(365-214층탑석) 왕의 도시 공주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여러분 많이 더우시지요 ㅎㅎ
아래 연꽃 봉오리 하나 맺힌 것 보고
아하 저 아이도 이 여름 더위를 이겨내며
처염상정의 붉은 연꽃을 피워 내느라
우리만큼 애를 쓰고 있구나 하시며
상대의 처지를 긍휼히 여기시면
더위가 저만치 물러갈 것입니다.
오늘은 아침나절 두명의 스님이 오셔서
더위 이기기 방편으로 맛있는 냉면 드시고
부산에서 오신 전의이씨 종규 거사님 가족들과
차담을 나누며 오랜 인연에 감사하였습니다.
오후에는 세종시 전의면에 있는
전의 이씨 종중의 제4회 충효교실에 가서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웅진공주가를 중심으로
한시간 말씀 드리고 돌아 오니 하루 무더위가
땀과 같이 스러지는 저녁이 됩니다.
어르신들도 계시지만 젊은 세대들이
어린 초등학교 자녀들을 데리고 참석한 모습이
참으로 보기가 좋았습니다.
오늘이 입추라 하는군요.
한낮의 무더위는 감당하기 어려워도
아침 저녁으로는 이제 선선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고 창문을 닫게 하는 때가 온것입니다.
이 더위 있어야 작물들 자라고 과실들 맛이 드니
우리는 그저 달고 맛있는 과일 먹을 생각으로
하루 하루를 잘 지내가면 될것입니다.
연꽃대가 여러개 올라와도 보기 좋지만
딱 한개만 올라 와도 이렇게 반가우니
저 아이 단심의 이파리를 열고 하늘을 품는 날
다시 사진 한장 보내겠습니다.
다시 한번 후손들을 위하여 무더위에
충효교실을 열어 아름다운 모습 보이시는
전의이씨 종중 회원들께 감사드립니다.
전의이씨 가문과는
오래전에 쓴 아래 글이 인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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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문한 탓이겠지만
절에 제사를 모시러 온 전의 이씨
성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공주와 고려 태조 왕건의 이야기를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웅진동 한옥마을에
고려때 현종 임금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가다가 공주에 머물렀던 것과
조선의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기록을 담은
비석이 있는 것은 대부분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왕건에 대한 이야기는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검색을 통해
그 내용을 소개해 보려 합니다.
백제시대는 웅진 혹은 웅천주라 불리던
지금 현재의 공주라는 지명은
고려를 개국한 왕건에 의해
이름지어졌다고 알고 있는데
왕건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견훤왕을 항복받으려 군사를 이끌고
공주를 지나 남쪽으로 내려 가게 됩니다.
그런데 마침 비가 많이 온 탓인지
물이 불어 강을 건너기가 어려운 그 때에
공주에 나룻배를 여러척 운영하던
이치齒라는 분이 어려움을 부릅쓰고
군사의 도강을 돕습니다.
왕건은 삼한을 통일한 후에
전쟁에 큰 공을 세운
공주 사람 이치라는 이에게
이도 李棹 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훗날 삼한공신으로 삼습니다.
그렇게 공주에는 왕건의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려조의 현종과
조선조의 인조를 말할 때
고려 태조 왕건을 먼저 이르는 것도
백제 이후의 공주와 관련지어
여러명의 왕과 관련한
중요한 내용이 될 수도 있을것입니다.
이렇게 이도라는 이는 지금
전의 이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고
그분의 묘소가 공주시 신관동
시목동이라는 곳에 자리하고 있으니
아마도 고마나루에서 도강을 하기보다
시목동과 장깃대 나루를 이용하여
군사가 움직였을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본관을
전의 이씨로 하는 성씨가 생기기 이전에
이도의 조상 가운데에는 100여년을 거슬러
이방이 라는 분이 나루에서 배를 움직여
사람들을 건네주는 일을 하였나 봅니다.
뱃사공 이방이는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뱃삯을 받지 않고
또 걸인들을 보살피고 적선을 하는 등
자신은 비록 어렵고 가난하여도
사람들을 위해 나눌줄 아는 분이었다 합니다.
어느 때 스님 한분이 배를 타고는
건너가자 돌아가자 오르자 내리자 를
반복하기를 여덟번을 하는데
이씨 사공은 아무런 말 없이
스님이 하자는대로 노를 젓습니다.
그런 후에 스님은 내가 이러저러 하자 해도
아무 말 없이 노를 젓는 사공의 성정이 고마운데
사정이 있어서 그리한 것이니 이해하시라 하고는
혹시 집안에 상을 당하지 않았는가 묻습니다.
예 저희 어르신(이석재)의 상중임에도 어려워서
묘를 잡지 못하고 가매장 한 상태입니다 대답하니
스님은 내가 사공의 마음이 착한 것을 생각해
묘자리를 하나 잡아 줄테니 그곳에 묘를 쓰십시요
하고는 현재의 시목동 정수장 뒷산에 자리를 잡아주는데
후에 후손들이 번성하고 벼슬하는 명당이 됩니다.
그 스님은 당나라에서 온 주호스님이라는 분으로
아마도 조선을 다니면서 인연있는 착한 사람들에게
공덕을 심어 주느라 그리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그 사공 이방이의 후손이 이치라는 사람이었고
그 이치가 100여년 후에 왕건과 군대의 도강을 도운 공이 있어서
배를 젓는 노 라는 의미의 도棹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후에 삼한개국공신으로 등재가 되었으니
이는 공주의 역사 속에서 기억되어야 할 내용인듯 싶습니다.
이도의 조상인 뱃사공은
스님이 알려준 대로 묘를 쓰는데
혹시 앞으로 이 묘가 좋지 않다며
이장을 해야 한다고 파보자 하는 사람이 나올것인데
절대로 응하지 말라 하시고는 회를 두텁게 쳐서
묘가 훼손이 되는 것을 경계하셨다 합니다.
그리고는 판석에다 몇자 글을 써서
봉분의 겉부분에 묻게 하였는데
조선조 광해군 때에 풍수사로 유명한
박상희라는 이가 와서 이 묘는 잠시 발복하였으나
맥이 상하여 밀어주는 뒷심이 부족한 고로
더 훌륭한 자리에 이장하자 권하는 바람에
봉분을 조금 파 들어 가다 보니
석판이 나오는데 주호스님이 적은 글입니다.
"남래요사 박상희 단지일절지사 미만대영화지지
(南來妖師 朴相熙 單知一節之死 未萬代榮華之地)"
즉 남쪽에서 요상한 지관 박상희가 와서
단지 용맥 일절이 죽은 것만 알고
만대영화지지라는 것을 모른다는 내용이었더랍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더 이상 묘를 건드리지 않았고
그 뒤로 후손들 가운데는 뛰어 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합니다.
전의 이씨들은 주호스님의 도움을 감사히 생각하고
묘소 부근에 진양각이라는 작은 사당을 지어
스님의 상을 모시고 제향을 지낸다고 하니
천여년전의 인연이 오늘에도 이어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방이라고 하는 이도의 조상이
주호스님의 권유에 따라 묘를 쓰고 나서
108년이 지난 후인 918년에 고려가 건국을 하게 될때
이방이의 후손인 이도라는 이는
위와같은 사연으로 고려조의 개국공신이 되는
기연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명당이 있는 것이라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리를 간다는 말처럼
조상이 선행 적덕을 많이 해서 음덕을 쌓으면
후손이 그에 의지하여 잘 살아가게 되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스스로 돌아보아
이만하면 잘 살고 있다 싶으면
조상님들의 공덕에 감사드리고
아직 멀었다 싶으면 자기 스스로 공덕을 지어
후손들에게 강동 팔십리 그늘이 되어주면
이 또한 좋은 일이 될것입니다.
웅진공주가에 고려태조 왕건 이름을 추가합니다.
2.
상왕산록 우전차를
큰샘물로 우려내어
로 시작하는 웅진공주가 입니다.
지난해 만들었던 공주가에서
몇구절 빼는 대신 차를 내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내용은 좋을지 몰라도
글자가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어서
현대인들의 급한 심성에 덜 맞다
하는 조언이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추가한 것이 있습니다.
공주에는 오년여 전 웅진동 한옥마을에
뜻있는 인사들이 마음을 모아서
공주를 다녀간 고려와 조선의 왕을
기리는 석비를 세운 것이 있습니다.
고려때는 현종임금이 거란의 침략을 피해
나주로 가는 길에 공주에서 며칠 머물렀고
조선 때는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까지 도망쳐 와서 공산성의 쌍수 나무 아래
고단한 몸을 쉬다가 난이 진압되었다
는 소리를 들었다 합니다.
두 왕이 모두 난리를 피해
어가를 움직인 것에 반해
공주에 왕이 행차를 하면서
군대를 이끌고 상대를 정벌하기 위하여
지나간 분이 바로 고려 태조 왕건입니다.
태조 왕건이 군대를 이끌고
견훤을 물리치러 남하하던 중
공주에 도착하였을 때는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어 나 도강을 하기가 어려웠나 봅니다.
그 때 공주에 배를 가지고 있던
이치라는 이가 위험을 무릅쓰고
왕건의 부대가 안전하게 도강을 하도록 도왔고
왕건은 그 공을 높이 사서
이치의 이름을 이도李棹로 고치게 하고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삼았다 합니다.
현종이나 인조 보다는 왕건의 공주 행차가
더 의미있는 일이 될 수 도 있겠다 싶어
웅진백제 오대왕 뒤에 고려왕건과
공신.이도 를 추가하기로 한 것입니다.
훗날 고려 왕조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일부 왕씨들이 공주의 상왕동으로 숨어 들어와
몸을 숨기고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어찌 되었든 공주는 고려 왕건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입니다.
물론 개성이나 평양 한양등 무수한 왕들이
살았던 수도에서는 굳이 몇명의 왕 이름을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겠지만
웅진 백제 오대왕 이후로 왕건과 현종 인조가
공주를 다녀 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현종 인조를 이야기할 때 왕건도 같이
말해 져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추가한 것입니다.
아무리 허름한 집도 임금이 하루 머물다 가면
귀한 집이 되는 것이란 이야기를
숙종과 갈처사 이야기에서도 살펴 보듯이
백제 오대왕은 물론 고려 조선의 왕들이 다녀간 공주는
가히 '왕의 도시'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임금이 어가를 옮기면
파천 또는 몽진이라 하고
머물고 떠난 곳을 주필지라 유식하게 말하는데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현종과 인조는 엄밀히 말하면
왕성을 버리고 도망친 모양새이고
왕건은 삼한일통을 위한 공주의 통과이므로
기왕지사 세워놓은 현종 인조 기념비 옆에
왕건의 비도 추가하자 하는 의견도 내봅니다.
-공주 상왕산 원효사 심우실에서-
(글:해월스님 사진:李海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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