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세는 없다? 깔끔하게 백기 들어야
몇일전 진 영 보건복지부 장관의 사퇴 해프닝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기초연금 공약에 문제가 생겼음이 확인됐다. 정부는 65세 이상 인구 모두에게 월 20만원을 지급하겠다던 기초연금제 공약을 대폭 수정해 소득 하위 70%에게 차등지급 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내년도 예산안이 처리되는 26일 국무회의에서 기초연금을 비롯한 복지정책 전반에 대한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대선이 끝난 지 불과 10달이 되지 않았다. 와전이다 오해다 같은 말로 넘어가기엔 '무조건 20만원'을 외치던 대통령의 모습이 너무 생생하다. 너무 뻔한 거짓말에 당황스럽지만, 지난 일의 말바꾸기를 비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앞으로의 문제다. 이제 모두가 알고 있는 대안에 관해 이야기할 때다.
이번 기초연금 논란은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시절 공언했던 복지공약 전반에 대한 의구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복지재원 마련의 실패는 기초연금 뿐 아니라 4대 중증질환 진료비 보장, 무상보육 등 박근혜 대통령이 약속했던 모든 복지공약들을 위협하고 있다. 이제 정부의 선택지는 두 가지다. 공약의 실패를 깨끗이 시인-사과하고 복지정책을 전면 수정할 것인가, 아니면 과감한 증세로 공약을 실행할 것인가. 앞에 것은 새누리당의 철학에 부합하는 것이며, 뒤에 것은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기본적으로 작은 정부-감세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 보수정당이다. 그런데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복지국가의 혜택을 약속하면서도 증세는 않겠다며 마법 같은 '제3의 길'을 표방했다. 이 실험은 위험해 보였다. 증세의 불가피성을 읍소했던 문재인 후보와는 달리 박근혜 후보는 증세없이도 가능하다고 공언했다. 급조된 복지공약의 조악함은 차치하더라도, 지하경제 양성화와 탈세방지 같은 모호한 방안들로 막대한 복지재원을 마련하겠다는 박 후보의 계획은 공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많은 경제학자들과 각 후보진영이 재원마련대책을 집요하게 추궁하자 박근혜 후보는 “해보고 안되면 그때가서 증세하면 된다”는 상식이하의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이 전략은 비겁했지만 효과적이었다. 대중은 문재인-이정희 후보의 피곤한 증세 계획보다 깔끔하게 "증세는 없다"고 말하던 박근혜 후보의 한마디에 더 솔깃했다. 결국 박근혜 후보는 선거에서 승리했고 동기와 과정이 어찌됐든 약속했던 공약을 지켜야 하는 처지다.
<기초연금제 논란의 원인은 실패한 세법개정안에 있다>
지난 16일 3자회담 자리에서 민주당 김한길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부자감세 철회에 대해 물었다. 대통령은 "법인세를 높이면 세계적 경쟁력을 저하시킬 수 있기 때문에 법인세를 높이는 것은 안 된다"며 법인세 인상에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전임자와 전혀 다르지 않은 비지니스 프렌들리다. 여기에는 법인세율을 낮추면 기업투자가 활성화되어 세수가 증가할 것이라는 주장이 깔려 있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2008년과 2010년 이명박 정부가 법인세를 낮췄을 때도 그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 효과는 어땠을까?
이명박 정부 기간 동안 과표 2억원 이하 기업의 법인세율은 13%에서 10%로, 과표 2억원 초과 기업의 세율은 25%에서 20%로 내려갔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법인세율을 이렇게 낮출 경우 국내투자는 10조원,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6조원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2003~2008년 평균 0.90이었던 10대 그룹의 투자성향지수는 2009~2012년 0.86으로 떨어졌고, 10대 그룹 고용유발계수는 2007년 1.17에서 지난해 0.78로 줄어들었다. 투자와 고용 모두 법인세 인하 이전보다 상황이 악화된 것이다. 전임 정부의 법인세 인하로 인한 부담은 고스란히 박근혜정부로 넘어왔다.
결국 법인세 인하로 나타난 결과는 기대했던 투자증가-고용증대가 아닌, 소득재분배 악화에 따른 양극화 심화였다. 문제는 박근혜 정부가 이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6일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는 "세수 부족분은 경제 활성화를 통해 메울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적인 전망을 전했다. 2008년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도 “법인세 인하로 6개월에서 1년 사이에는 기업 투자가 늘어날 것”이라고 장담했다. 당시 호언장담의 결과가 지금 박근혜 정부가 겪고 있는 세수부족이다.
박근혜정부가 '공약가계부'에서 2017년까지 주요 복지공약 실현을 위해 필요하다고 밝힌 예산은 총 79조 원이다. 정부는 이 예산을 직접적인 증세 없이 지하경제 양성화와 비과세 감면 조정, 세출 구조조정 같은 것들을 통해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 계획은 많은 이들이 예견했던 대로 난관에 부딛혔다. 기획재정부는 전년 대비 올 상반기의 세수 부족이 약 10조원에 이른 것으로 내다 보고 있다. 올 1~5월 까지의 세수는 82조 1262억원으로 전년 동기(91조 1345억원)보다 약 9조원이 적었다. 감소분의 절반가량인 4조 3000억여원은 법인세인하로 인해 줄어든 몫이다. 법인세를 2008년 경제위기 이전 수준(25%)으로 복구한다면 연간 약 10조원의 재원이 충당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의 기초연금 공약을 실현하는데 소모되는 비용이 연간 7조원 정도임을 감안할 때 이를 감당하고도 남는 액수다.
<출처:오마이뉴스>
정부의 세수 부족분을 가장 효과적으로 채울 수 있는 방안이 법인세인하와 각종 기업감면혜택의 축소·폐지다. 한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22%로 OECD평균 23.6%보다 조금 낮은 수준이다. 그러나 한국 기업의 법인세와 사회 비용을 합한 총 조세 비중은 29.8%로 OECD 회원국 평균(42.5%)에 비해 크게 낮다. (2011년 세계은행 자료) 투자세액공제 제도를 비롯한 각종 세제감면제도로 인해 명목세율보다 실효세율이 훨씬 낮은 까닭이다. 더욱이 전체 법인 가운데 매출액 상위 1%법인들이 전체 감면액수의 78.7%(2011년 기준)를 차치할 정도로 대기업에 집중적으로 혜택이 돌아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법인세를 낮추는 것이 추세"라는 대통령의 인식은 별세계 이야기처럼 들린다. 법인세 인상은 단지 세수확충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돈을 가장 많이 버는 대기업이 가장 많은 세제감면 혜택을 누리고 있는 현실은 조세정의에도 맞지 않는다. 대기업에 집중된 세액공제를 축소하고 법인세를 2008년 이전 수준(25%)으로 인상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경제의 대기업집중을 우려하는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세금, 어디서 걷어야 할까?
지난달 정부가 세법개정안을 발표하자 '중산층 세금폭탄론'이 퍼지면서 거대한 조세저항이 일어났다. 이 개정안에 국민들이 분노했던 이유는 재벌감세를 철회하지 않고 중산층에게 부담을 전가하겠다는 정부의 태도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번 기초연금 파동도 실패한 세법개정안의 결과다. 만약 세법개정안에 재벌감세 철회(법인세 인상) 안이 포함됐더라면 기초연금 공약 실현에 필요한 세수를 확보할 수 있었을 테고, 설사 재원이 부족하더라도 최소한 국민들을 설득할 명분은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은 정부가 이제와서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대통령은 스스로 궁지에 몰렸다.
대선기간 박근혜 대통령은 장미빛 공약만 제시했을 뿐 공약실현에 따르는 국민들의 부담은 은폐했다. 덕분에 복지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높아졌지만 늘어난 부담을 감당할 준비는 되어있지 않다. '증세없는 복지'라는 괴상한 구호가 만들어낸 촌극이다. 이제 선택해야 한다. 공약을 폐기할 것인지 부담을 늘릴 것인지.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혹독한 비난이 뒤따르겠지만, 이는 거짓 공약으로 표를 쉽게 얻으려 했던 혹세무민의 대가다.
조세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대통령의 철학이다. 선거기간 경제민주화 프레임 속에서 다소 급진적인 복지공약을 들고 나왔지만, 정치인 박근혜를 상징하는 경제정책은 여전히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은 바로 ‘세’우자)'다. 경제민주화의 대척점에 있는 줄·푸·세에서 맨 앞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감세다. 이번 법인세 인상 반대 발언은 대통령의 인식이 기존 줄푸세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대통령이 줄푸세를 고집하는 한 복지국가건설은 요원하다.
박근혜정부가 정말 경제민주화를 시대적 당위라 믿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길은 하나 뿐이다. 과감한 재벌감세 철회를 통해 복지재원을 마련하는 길이다. 재벌에게 벌을 내리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누려왔던 과도한 혜택을 그만 거두라는 뜻이다. 국내 매출 1위기업 삼성전자의 법인세 실효세율은 11.9%에 불과하지만 창고에 쌓아둔 사내유보금은 135조 이른다. 10대 기업의 유보금은 법인세를 대폭 낮추기 시작한 2008년 235조원에서 지난해 405조원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정부의 곳간은 비어가는데 재벌들은 돈잔치를 벌이고 있다. 가계소득은 늘지 않는데 대기업 소득만 증가하는 상황, 부족한 세수를 어디서 충당하는게 맞는 걸까? 패배가 분명하다면 백기를 빨리 드는 것이 좋다.
출처 : 정치블로그 ☞ <다람쥐주인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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