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여마을 이야기
새해 첫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다. 내일이 소한인데 우리 지역 최저 기온은 연일 영상권이다. 아침이면 지기들에 보낸 시조는 옐리뇨를 글감으로 삼았다. “해수온 높아지는 옐리뇨 주기 들어 / 강수는 잦아지고 겨울이 따뜻해져 / 서민이 살아가기는 이전보다 나을까 // 날씨가 변수였나 작년은 과수 흉작 / 사과는 금사과요 감조차 귀해져서 / 노점상 과일 트럭도 빈 상자로 다닌다”
아침 식후는 집 근처 반송시장 동네 내과 의원을 찾아갔다. 한 달 한 차례 당뇨약을 처방받는다. 혈당 수치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데 의사가 나오라고 해 가긴 간다. 간호사가 측정한 식후 2시간 수치는 정상 범위 안에 있음에도 주치의 처방전 따라 약국에서 4주간 약을 타 나왔다. 반송시장 저잣거리로 나간 김에 꽃집을 지나다가 모레 가족 행사에 쓰일 꽃다발을 하나 봐 두었다.
약국과 꽃집 둘러 반나절 산책을 나섰다. 어제는 모처럼 산행다운 산행으로 정병산을 올랐더랬다. 창원중앙역 뒤 길상사에서 비탈을 올라 내정병봉을 먼저 정복하고 산등선을 따라 정병산에 닿아 촛대봉으로 하산했다. 독수리 바위에서는 고소 공포가 느껴져 우회 등산로로 둘러 가기도 했다. 자고 난 이튿날은 무릎과 종아리가 여전히 불편하게 느껴져 쉽게 회복되지는 않을 듯하다.
산책 코스는 어제 하산한 정병산 기슭으로 정했다. 원이대로 정류소에서 동정동으로 나가 자여로 가는 7번 마을버스로 갈아탔다. 자여는 동읍에서 자연마을로는 아주 커서 마을 하나가 초등학교의 한 학구를 이루고 있다. 예전에는 정병산 동북 사면의 배산임수형 전통 자연 부락인데, 근래 마을 앞 농지에 빌라촌과 높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젊은 층의 인구 유입이 발생한 곳이다.
도서관에서 조선 후기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의 간서치(看書痴)란 자호를 남긴 이서구가 쓴 ‘이목구심서’에 나온 국토 변방 자여역의 특이했던 망아지 이야기를 본 적 있다. 그 망아지는 꼴이나 콩은 먹지 않아 다른 오곡을 줘도 마찬가지였단다. 사육사가 시험 삼아 소주를 줘봤더니 마셨는데 안주로 여겼던지 황대구를 저며 주니 잘 받아먹어 하루 칠백 리 팔백 리도 거뜬히 걷더란다.
조선시대 역참제도에서 역은 공무를 수행하는 관원들의 숙소였으며 다음 역까지 타고 가는 말을 준비해 기르기도 했다. 당시 영남 해안 중심 도호부였던 창원에서는 신풍과 안민과 자여에 역이 설치된 기록은 문헌에서 접했고 풍문으로도 듣고 있다. 인근 고을 함안이나 창녕 밀양에도 역은 있었을 테고 동래로 가던 낙동강 강가 물금에는 황산역을 문헌이나 한시 작품에서 본 바 있다.
7번 마을버스를 타고 예전 말 이야기를 떠올려 본 사이 버스는 용잠삼거리에서 자여로 들어섰다. 빌라촌에서 내려 초등학교 근처 과수원으로 가는 농로를 겸한 정병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찾아 들었다. 산기슭에 창원을 본관으로 쓰는 성씨의 하나인 구씨 선산이 나왔다. 지금은 폐선이 된 덕산 부근에도 구씨 집안 넓은 산소를 봤는데 자여에는 강계부사를 역임했다는 이 무덤이었다.
지난가을에 감을 따고 봄 농사인 가지치기가 아직 시작되지 않은 단감과수원을 지나자 가랑잎이 덮인 오솔길이 나왔다. 아무도 다니질 않는 호젓한 나목의 숲길을 걸으니 여름날엔 산행객이 목을 축이고 갔을 샘터가 나왔다. 집에서 가져간 삶은 고구마를 꺼내 먹은 뒤 산허리로 난 길을 따라가니 체육 기구가 놓인 쉼터에는 한 노인이 몸을 단련하고 있어 나아갈 등산로를 안내받았다.
산책을 나설 때는 어제 정병산에서 촛대봉으로 내려선 용정사에서 봐 둔 등산로와 연결될 줄 알았는데 거기로는 가질 않았다. 과수원과 묵정밭을 지나니 역시 자여마을이었는데 행정구역으로는 용정1구 마을 회관이 나왔다. 마을이 커서 2구 3구로 나누어질 테고 내단계마을 회관도 보였지만 골목길을 사이에 둔 이웃이었다. 못다 걸은 용정사 가랑잎 길은 다음 어느 날 찾아갈 셈이다. 24.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