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철 타고 인 서울을 했어요. 성동 오거리 대영학원도 없어져 버렸고, 상권이 왕십리역에서 성동 구청 쪽으로 번성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한층 높아진 원색 가을 하늘이 수채화 같아서 한 컷 찍었고, 진국 설렁탕이 당겨 한 그릇 때렸습니다. 주인이 또 바뀌었는지 친절한척합니다. 벤티를 불렀는데 요금이 1.7배(21.000)가 나왔어요. 무려 15.000원을 눈퉁이 맞고 동묘 프리마켓에 내렸어요. 와우, 나의 나와바리 반갑다 동묘야! 그새 주차장 자리에 새로 상가가 생겼고 제법 쓸만한 점포가 나의 소비를 부추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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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부터 동묘에 가게 자리를 물색하고 있었어요. CU 나 작은 점포 하나 얻어서 전당포를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30분 동안 아크 테릭스 블랙 반바지-조던 화이트 반바지-샤넬 볼 캡 화이트를 득템하고 서둘러 블루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기사가 전화를 걸어온 것이 시간 좀 걸릴 모양입니다. 염병, 추가 콜비 3.000원을 받아 처먹고 늦게 오는 택시를 어찌할까요? 죽여 살려! 카카오가 나쁜 놈이지 기사가 뭔 죄가 있다고. 개인택시 배급이 희망고문이라는 기사 말이 사실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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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한 살 아래(62세)로 시에서 운영하는 법인 택시에 5.000만원 보증금 내면, 다 빼고 400 이상 번다고 하네요. 설마, 말하는 본새가 허풍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뭐야... 지입 택시도 하고 전당포도 하면 이러다 버킷리스트(버스 운전)는 언제 하지요? 구리만 그런 줄 알았는데 요새는 서울도 도심 한가운데 떴다방 농산물/수산물이 대세에요. 비싸진 않지만 싼 것도 아닌데 왜 사람들이 몰릴까요? 비카 번쩍한 칼치 한 마리 살까 하다가 비린내 때문에 멈췄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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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뜯고 있는 아빠 사자에게 새끼 사자가 엉금엉금 밥그릇을 넘보자 아비가 으릉렁거리며 새끼를 몰아붙이는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수사자가 발정기에 새끼 사자를 물어 죽이는 것은 봤어도, 먹방 할 때 성질내는 건 처음 보거든요. 열 살 무렵 아버지 식단에 놓여있는 구운 갈치 한 점 먹다 선친에게 회초리를 맞았고, 발광하다가 입술에 흉터가 생긴 일이 떠올랐습니다. 50년도 넘게 어쩌면 부모가 그럴 수 있냐며 미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 빵 터져버렸습니다. 선친도 수사자였을까요?
2.
아버지의 갈치 한 점은 왜 50년 뒤 사자의 으르렁거림 앞에서 웃음이 되었는가? 전철을 타고 서울로 들어간다는 것은 공간의 이동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성동오거리에서 사라진 대영학원, 왕십리역 쪽으로 옮겨간 상권, 동묘 주차장 자리에 들어선 새 상가를 바라보는 순간, 서울은 그대로인데 내가 기억하는 서울은 자꾸 사라집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사라짐 때문에 기억은 더 선명해집니다. 도시는 건물을 철거하지만 인간은 철거된 자리에 기억을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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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의 동선은 흥미롭습니다. 설렁탕 한 그릇 먹고, 비싼 택시비에 투덜거리고, 동묘에서 아크테릭스 반바지와 조던 반바지, 샤넬 볼캡을 건지고, 전당포와 개인택시와 버스 운전까지 머릿속에서 창업하는 동안 나는 계속 현재를 걷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과거와 미래 사이를 정신없이 왕복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현재에만 사는 동물이 아니라 기억하는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삶을 미리 살아보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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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묘에서 점포를 보자 전당포가 떠오르고, 택시기사 이야기를 듣자 지입택시가 떠오르고, 거기서 또 버스 운전이라는 버킷리스트가 튀어나옵니다. 이것을 단순한 변덕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베르그손의 표현을 빌리자면 삶은 이미 정해진 가능성을 하나씩 실현하는 과정이라기보다 살아가면서 가능성 자체를 새로 만들어내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전당포도 하고 택시도 하고 싶은데 버스 운전은 언제 하지?”라는 푸념 속에는 제법 중요한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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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나는 반대로 가능성이 너무 많아서 고민합니다. 이것은 꽤 괜찮은 역설입니다. 늙는다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시간과 하고 싶은 것 사이의 간격을 더욱 정확하게 깨닫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청춘은 시간이 무한하다고 착각하고, 노년은 시간이 유한하기 때문에 선택을 진지하게 합니다. 버킷리스트가 절실해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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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한가운데 떳다방 농수산물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도 비슷하게 볼 수 있습니다. 현대 소비는 반드시 최저가격을 찾아 움직이지 않습니다. 반짝이는 갈치가 좌판에 놓여 있고, 상인이 소리치고, 사람들이 몰려들고, 오늘 아니면 사라질 것 같은 분위기가 생기면 물건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 됩니다. 대형마트가 효율을 판다면 시장은 우연성을 팝니다. 동묘가 재미있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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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살지 정하고 가는 곳이 아니라 무엇을 만나게 될지 몰라서 가는 곳입니다. 소비가 계획이 아니라 발견이 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아크테릭스와 조던과 샤넬을 30분 만에 건진 일을 단순히 소비욕이라고만 비판하기도 어렵습니다. 동묘의 매력은 새것을 소유하는 데 있다기보다 버려지고 흩어진 사물 가운데서 ‘내 것’을 발견하는 데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쓸모를 다한 물건이 나를 만나 다시 가치를 얻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묘는 거대한 중고시장이면서 동시에 사물의 부활절 같은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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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이야기의 진짜 사건은 마지막에 벌어집니다. 고기를 먹던 아빠 사자가 밥그릇을 넘보는 새끼에게 으르렁거립니다. 그 순간 50년도 넘은 갈치 한 점이 돌아옵니다. 어린 나는 아버지 밥상에 놓인 구운 갈치 한 점을 먹었고, 아버지는 회초리를 들었고, 나는 발광하다 입술에 흉터까지 남겼습니다. 아이에게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폭력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자식에게 갈치 한 점 가지고 그럴 수 있는가.” 사건은 끝났지만 질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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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미움은 반세기 동안 살아남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늘 사자의 행동이 아버지의 폭력을 정당화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자도 그러니까 아버지도 그럴 수 있었다”라고 결론 내린다면 너무 싱거운 자연주의가 됩니다. 동물의 행동은 인간의 윤리적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재미있는 것은 기억의 의미가 변했다는 사실입니다. 프루스트에게 기억은 과거의 정확한 복사가 아닙니다. 현재의 어떤 우연한 감각이 과거를 갑자기 불러내면서 과거 전체의 의미를 바꾸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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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에게 마들렌이 있었다면 오늘 당신에게는 ‘으르렁거리는 아빠 사자’가 있었던 셈입니다. 사자를 보는 순간 갈치 한 점, 아버지, 회초리, 어린 나, 입술의 흉터가 한꺼번에 현재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린아이의 눈으로만 사건을 보지 않았습니다. 세월을 살아낸 아버지의 눈도 조금 섞였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먹을 것이 귀했던 시대의 밥상은 지금의 밥상과 같은 의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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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의 몫, 음식의 배분, 가난, 권위, 피로, 당시의 거친 양육문화가 뒤엉켜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회초리가 옳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해할 수 없었던 사건에 다른 각도가 하나 생깁니다. 니체가 말하는 망각도 여기서 생각해볼 만합니다. 니체에게 건강한 망각은 기억을 삭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 전체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힘입니다. 상처가 있었다는 사실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입술의 흉터도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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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사건을 해석하는 권한까지 과거의 아버지에게 계속 맡길 필요는 없습니다. 어쩌면 오늘 빵 터져버린 웃음은 용서보다 조금 앞선 곳에서 발생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도 숫사자였구먼.” 그 한마디의 우스운 깨달음 속에서 반세기 동안 거대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한 인간으로 작아집니다. 완벽해야 했던 아버지도 아니고, 평생 미워해야 할 폭군도 아니라, 자기 밥그릇 앞에서 성질 한번 지독하게 부렸던 결함 많은 한 인간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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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이해한다는 것은 부모의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모 역시 자기 시대와 욕망과 결핍을 등에 업고 살았던 유한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서울 나들이에서 가장 비싼 것은 2만1천 원짜리 택시도 아니었고, 가장 값진 득템은 샤넬 볼캡도 아니었습니다. 50년 묵은 갈치 한 점의 기억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 진짜 득템이었습니다.
2026.9.6.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