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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봄 향기와 함께
밖으로만 내달리고 싶은 이 계절의 안동답사 날이다.
건강상태가 좋지않아 근 6년동안 한번도 빠지지 않았던 내가
지난 진도 답사를 쉬었던 휑하니 허전했고 아쉬웠던 마음에
그야말로 손꼽아 기다려 왔던 마음을 그 뉘 알리요.ㅋ
이제는 뗄레야 뗄수없는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렇게 불어대던 심한 꽃셈 바람은 오늘은 눈치가 좀 있어얄 건데....ㅎㅎ
준비랄것도 없지만 전날 미리 구입해 놓은
두부 상자를 들고 집을 나서는 마음은 벌써 엔돌핀 상승 기류를 탄다.


그리 멀지않은 새벽길을 가르며 달려온 안동 입구의
들판의 조탑동 전탑이 눈에 들어 온다.

 
 
1층 기단이 벽돌이 아닌 돌로 만들어 진것이 내눈엔 좀 이상하게 보여진다.
질문을 했더니 그것이 특징이라고 답변을 하는 울 회장님 말씀.
또 알쏭 달쏭이다.
그라인께 특징은 특징인거 같은디 왜 글냐구요???

◈안동 조탑리 오층 전탑(보물 57호)
화강암과 벽돌을 혼용해서 만든 통일신라시대의 5층 전탑이다.
초층 옥개석(屋蓋石)부터는 벽돌로 쌓았으며 그 가운데 당초문(唐草文)을 새긴 것이 섞여 있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으로 짐작하게 한다.
옥개 받침은 초층부터 9단·8단·7단·6단·3단이며 옥개석에 기와를 입혔던 흔적은 없다.
탑신부(塔身部)의 2층과 4층 옥신석(屋身石) 남쪽 면에 형식적인 감실이 표현되어 있다.
옥신은 1층의 높이에 비해 2층 이상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2층부터의 체감률은 작아서 안정감이 있으나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탑의 상륜부(相輪部)는 훼손되어 모두 없어졌다.

김회장님 내외분의 정다운 모습 부럽습네다.
 

개인적으로 3번째 안동 답사이지만 공사때문에
출입을 통제해서 처음으로 건너볼수 있었던 월영교.
수면위에 그려진 아름다운 월영교의 모습이 넘 좋았습니다.
 




 




 



볼록 볼록 꽃망울이 아직은 하나도 터지지를 않았네요
남도에는 개나리, 벚꽃, 진달래가 지천으로 만개해
그야 말로 난리 벚꽃장인데...


다리를 건너면 내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육사 시비가 있고요.
자그마한 공원과 자연마을도 조성되어 있네요


 

이런 ~! 오늘 중점적으로 전탑을 보아야 한다고 강의 하셨는데
어째 꼭 한건씩은 공사를 해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게 하누나.
◈안동 법흥리칠층 전탑(국보 제16호)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탑을 말한다.
법흥동에 세워져 있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에 속해있던 탑으로 추정되나, 탑 주위로 민가와 철도가 들어서 있어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탑은 1단의 기단(基壇)위로 7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8부중상(八部衆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세워놓았고,
기단 남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여 1층 몸돌에 만들어진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향하도록 하였다.
진한 회색의 무늬없는 벽돌로 쌓아 올린 탑신은 1층 몸돌에 감실을 마련하였고,
지붕돌은 위아래 모두 계단모양의 층단을 이루는 일반적인 전탑양식과는 달리,
윗면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단의 윗면을 시멘트로 발라 놓아 아쉬움을 남기는 이 탑은 7층이나
되는 높은 층수에 높이 17m, 기단너비 7.75m의 거대한 탑임에도 매우 안정된 자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국내에 남아있는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에 속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또한 지붕에 기와를 얹었던 자취가 있는 것으로 보아
목탑을 모방하여 전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탑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다.
이 일대의 지명< 地名 >을 법흥리< 法興里 >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 統一新羅時代 >에 창건되었다는
법흥사< 法興寺 >에 세워진 전탑< 塼塔 >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16.4m 이다.
단층< 單層 >의 기단< 基壇 >은 팔부중상< 八部衆像 >과
사천왕상< 四天王像 >을 조각한 판석< 板石 >을 세워 만들고
탑신부< 塔身部 >는진회색의 무늬 없는 전< 塼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전의 크기는 길이가 약 28cm, 폭 14cm,두께가 6cm 이다.
각층 지붕 윗 면에는 기와를 이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목탑< 木塔 > 양식< 樣式 >의 수법< 手法 >을 모방< 模倣 >하여
전탑이 조성되었음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탑의 윗 부분에는 금동제< 金銅製 > 상륜부< 相輪部 >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없어졌다.

◈임청각
임청각은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지낸 바 있는 이명이 1515년(중종 10)에 건립한 주택이며,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의 집이기도 하다.
이 집은 영남산(映南山) 동쪽 기슭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한 명당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중앙선 철도부설 때 50여간의 행랑채와 부속채가 철거되어 현재의 규모로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길에서 보면 맞담 너머로 보이는 웅장한 모습의 행랑채가 이 집이 소위 말하는 99간집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 중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보물로 지정된 군자정은 임청각의 별당으로 조선 중기에 지은 ‘丁’자 평면의 누각형 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중심은 남향의 대청이고, 그 서쪽에 이어서 지은 T자형의 온돌방이 부설되어 있다.
내부는 4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둘레에는 툇마루를 돌려서 난간을 세웠으며,
출입은 두 군데에 마련해 놓은 돌층계를 이용하게 되었다.



보물 제182호 군자정

이게무슨 역할을 하는지 멋있게 보이려한 것인가?

 

◈안동 동부동오층전탑(보물 제 56호)
탑은 무늬없는 벽돌로 5층을 쌓았다.
몸돌에는 층마다 불상을 모시기 위한 방인 감실(龕室)을 설치했고
특히 2층 남쪽면에는 2구의 인왕상(仁王像)을 새겨두었다.
지붕돌은 벽돌을 사용한 것에서 오는 제약때문에 처마 너비가 일반 석탑에 비해 매우 짧다.
밑면의 받침수는 1층부터 차례로 10단·8단·6단·4단·3단으로 줄어들었고
처마끝에는 기와골을 받기 위해 총총한 나무를 얹고 4층까지 기와를 입혀 놓았다.
이러한 지붕모양은 탑신의 감실과 더불어 목탑양식의 흔적을 보여준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 남아 있다

 
어째 거의가 친구 사진으로 도배가 되었네.
여보게 친구~! 전속 사진사 팁을 톡톡히 주쇼!!!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 길목의 식당문에 붙여 놓은
노랫말이 구수하고 서민적인 감칠맛 나는
간고등어의 맛과 잘 맞아 떨어지는거 아닌가요? ㅎㅎ

 
더러 안동찜닭을 먹어 보았지만
푸짐하고 칼칼했던 안동찜닭 본고장의 맛은 역시 무엇이 달라도 달랐다.
모두들 포식도, 폭식도 했으리라
난 그래도 밥순이라 밥이 젤로 좋던디....ㅋ
입이 까탈스럽다고 하지만 내 입에 겉돌면 기분도 꿀꿀 하더만
지금에는 회원들의 입맛에 맞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짧은 입이 길어 진것은 아닐테고
아마도 수년간 다녔던 답사여행과 함께한 음식문화
체험이 한 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거나한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조리 과정을 스캔

안동의 마스코트 양반님 가로등 조형물이 완죤 귀염이^^

살다보면 닮는다고.... 참 많이 닮으셨습니다.
처음 뵙지만 반갑습니당. ^^





 

문득 그리움이 묻어나 그저 아스라이 아린 마음이 스멀스멀
금빛 모래 도화지에 한없이 그림을 그려본다.
봄날의 고향 노래를 마음으로 부르며
"엄마야~ !누나야 ~ !강변살자! " ~~~♬



이런 풍경이 난 넘 넘 좋아 쫗아!!!~~


봄이지만 가을같은 느낌의 나는 강변의 억새

민선아 ! 같이 가자~~~!!!

하얀 모래위를 맨발로 가면 파란 하늘보면 아련한 마음~~~
수많은 발자욱 따라 저 세상 끝까지~~~ㄹㄹ

 
살짝 불던 바람이 강바람과 짝꿍이 되었나?
머리카락하며 모자가
바람불어 좋은날 정도가 아닌
강풍에 혼줄이 나갈뻔 했다구여~~그치만
강바람을 이고지고 나룻배를 타는 체험 학습(?)
아~~! 정말 좋았습니다.
1~2분정도 탔나???
아~~! 엄청 아쉬웠습니다.



바위 곳곳에 이 무지랭이가 알수 없는 글이 새겨져 있네요.
보기가 썩....

달랑 두사람이 탄 그림이 아주 낭만과 여유가 있어 보여서리...
걍 혼자 타고 강 기슭을 지나고 싶었단 말입니다.


 
 
자판기 집이 멋을 부렸네요ㅎ




 
부용대에 올라서 한눈으로 바라본 하회 마을

이게 바로 진경 산수화 롤 모델

부용대에 올라서 한눈으로 바라 본 하회 마을

고대광실 사대부집 보다 납작한 서민의 초가집이 웬지
도란도란 토방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픈 삶의 정서가 묻어나는
현대인의 안식처로 딱 인데....


 
 




양진당을 가는 어느 골목에서는 사진 동호인들의
물동이를 인 할머니들의 모습을 담느라 열기가 대단했는데
다가 올수록 할머님의 피로에 지친 모습이 역력하게 보였다.
다섯번도 더 왔다 갔다 한다니...



◆ 안동 하회마을
안동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제122호)은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며, 와가(瓦家:기와집) 초가(草家)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 된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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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豊山柳氏)는 본래 풍산 상리에 살았으므로 본향(本鄕)이 풍산(豊山)이지만,
제7세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공이 화산에 여러 번(가뭄, 홍수, 평상시) 올라가서 물의 흐름이나 산세며
기후조건 등을 몸소 관찰한 후에 이곳으로 터를 결정했다고 한다.
입향 후 풍산류씨들은 계속된 후손들의 중앙관계에의 진출로 점점 성장하였으며,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 귀촌(龜村) 류경심(柳景深),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 등의
조선중기에 배출한 명신들로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하회마을은 현재에도 주민이 살고 있는 자연마을이다.
한말까지 350여 호가 살았으나 현재는 150여 호가 살아가고 있다.
마을 내에는 총127가옥이 있으며 437개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27개 가옥 중 12개 가옥이 보물 및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

◈양진당(보물 제306호 )
우뚝 솟은 솟을 대문과 장엄한 분위기가 감도는 「양진당(養眞堂)」은 풍산 류(柳)씨의 대종가(大宗家)이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입암고택(立巖古宅)」현판은 겸암 류운룡(柳雲龍,
1539~1573)선생의 부친인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 1515~1573) 선생을 지칭한다.
당호인 「양진당(養眞堂)」은 겸암 선생의 6대 자손인 류영(柳泳, 1687~1761)공의 아호(雅號)에서 유래하였다.
입암(立巖) 류중영 선생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 부르며, 양진당(養眞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랑채는 고려건축양식이며 안채는 이조건축양식으로서 고려양식과 이조양식이 공존하는 고택이다.
풍산류씨의 하회마을 입향조(入鄕祖)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 공(公)이 13세기 입향 당시에
처음 자리잡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 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하여,
고려말 건축양식과 조선중기 건축양식이 섞여 있다.
하회마을에서는 드물게 정남향(正南向)의 집이며 99칸으로 전해오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
문간채와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고, 口자 형의 안채와 그 북쪽의 사랑채를 一자 형으로 배치하였으며,
오른편 북쪽에는 2개의 사당(祠堂)이 있는데,
정면의 큰 사당은 입암 류중영 선생의 불천위
(不遷位: 공신이나 대학자 등의 탁월한 자에게만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말하며,
불천위로 인정되면 4대조까지 올리는 제사의 관행을 깨고 후손 대대로 제사를 올린다.)
사당이며, 작은 사당은 겸암 류운룡 선생의 불천위 사당이다


 
참말로 일당을 받아야 쓰것는디 ..ㅋㅋ

충효당(忠孝堂) 보물 제414호의 전체 모습
충효당은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서애종택’이라고 부르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서애 생존시의 집은 아니다. 서애는 현재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집에서 소년기와 만년을 보냈다.
선생이 30여년 몸담은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낙향했을 당시의 집은 극히 단출했다고 한다.
선생은 64세 때인 1605년 9월에 하회마을이 수해를 당해 풍산읍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1607년 5월 6일 삼간초옥 농환재에서 타계했다.
지금의 충효당은 서애 사후에 지은 집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선생이 초가삼간에서 돌아가신 후,
선생의 문하생과 사림이 장손(長孫) 졸재(拙齋) 원지(元之)공을 도와서 지었고,
증손자 의하(宜河)공이 확장한 조선중엽의 전형적 사대부(士大夫) 집으로서,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52칸이 남아있다.
충효당 내에는 영모각이 별도로 건립되어 서애선생의 귀중한 저서와 유품 등이 전시되고 있으며,
바깥마당에 엘리자베스2세의 방문기념식수가 있다.




 

 

교육을 할때 영모각의 가죽 갑옷을 한번 보라고 했는데 보이지를 않는다.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적 건축물로서, 류성룡과 그의 셋째아들 류진을 배향한 서원이다.
병산서원의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고려말부터 사림들의 학문의 전당으로
1613년 서애 류성룡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존덕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했다.
1868년 대원군 서원 철폐령이 내려졌을 때 그 대상에서 제외된 전국 47개, 안동 2개소 중 한 곳이다.
3월과 9월 초정일(初亭日)에 향사하고 있다.

백일홍이 붉게피는 7월의 화려한 병산서원과는 다른 수수한 모습의 서원
회장님은 달 밝은 병산서원을 가 보고 싶다고 했는데
달 밝은 백사장에서의 병산서원을 보는 느낀은 어떤 것일까?....
 
 

지난번 만대루에 올라 해설사님의 해설을 듣는둥 마는둥
등짝을 대고 누웠다
스르르 잠에 취할뻔 했던 기억에 오늘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은 배가 된다.










어언 햇살의 몸이 기울어 산봉우리가 받쳐야 될 시간이 되어 가는 그 시각
마지막 병산서원 답사를 마치고는
정성껏 준비해온 오늘의 마지막 먹거리 삼종셋트
회무침과 손두부,포천 막걸리로 입은 미어지고 웃음 활짝
모두들 격의 없이 화기애애 즐거운 시간을 가졌고.
귀갓길의 약간의 여유시간에는 전에 없던 가벼운 노래가락, 차차차
오랜만에 정겨움이 묻어나는
뜻을 함께한 답사여행에다
살면서 제일 크다고 하는 먹는 즐거움을
함께 누릴수 요맛은 또 어디에 비길꼬???
◈은수와 민선이의 민속놀이 채험학습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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