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동산을 기억하며
청라언덕에서 내려 와서 오랫동안 머리에 남아있던 것은
청라언덕 챔니스 주택 아랫쪽에 있는
은혜의정원(Garden of Mercy)이라는 선교사 묘소였다.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이 대구와 경북 지방에 기독교를 전파하러 파송되어
오지의 땅 한반도의 당시 일제 치하에서 어둡고 가난하게 살던 우리에게
선교와 교육,의료의 혜택을 주기위해 봉사와 희생을 하였던
선교사들과 가족들이 자기가 살던 주택 앞에 잠들어 있다.
그들은 물설고 땅설은 이곳으로 태평양을 건너와 이국에서 온갖 배척과 박해를 무릅쓰고
미신과 문맹을 깨우치고 병을 치료해 주며 이 나라 사람들을 위해 일하였다
혼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고 인술을 베풀다가
당시 만연하던 이질과 장티푸스라는 풍토병에 쓰러져 삶을 마감한
선교사들의 숭고한 삶을 돌아 본다.
챔니스 선교사가 거처하며 인술과 의술을 베풀었던 주택을
의료박물관으로 만들었고,
블레어 선교사의 집은 2001년 교육역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자신들이 살던 곳에 묻히고 싶어하여 주택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에 묘비가 있다.
박물관 입구에는 대구시 보호수 1호인 사과나무가 서있다
사과나무는 1900년 동산의료원 개원 당시
초대 병원장 존슨(Woodbridge O. Johnson) 한국명( 張仁車) 선교사가
미국 미조리주에 있는 사과나무를 주문하여 동산병원과 사택 주변에 심었고
사과나무를 제공하여 주민들이 재배하여 생활에 도움이 되게 하면서
한때 대구가 사과의 명산지가 되기도 하였다.
사과나무를 들여와 여러곳에 심었던 나무 중에서
그 자손목인 사과나무를 옮겨와서 다시 심어 놓았다.
선교사들은 대구지역에 많은 공로를 남기고 갔다
청라언덕에서 그분들이 베풀고 간
숭고한 삶에 대해 들으며 모두들 숙연해졌다.
동산병원 의료선교박물관 앞에 대구 경북 지방에 기독교를 전하러 왔다가
순교한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가 묻혀 있는 12개의 묘석이 있다.
선교사와 가족들의 묘석이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데
20대 젊은 나이에 순교한 선교사와
태어 난지 10일 만에 죽은 선교사의 갓난아기 묘소도 있다
이땅의 사람들을 위해 낯선 땅에 뼈를 묻은 선교사들과
그들의 선교 활동을 비문과 참고 글에서 찾아 소개해 본다.
도슨(Dawson) 선교사는 6.25 전쟁 때 해군으로 참전하였다가
한국인의 어려운 실상을 보며 의료봉사를 하기로 결심하고
동산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며 선교의 사명을 다했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6명의 자녀들에게 "한국인을 사랑했다”라고 말하며
한국 대구 동산병원 은혜정원에 묻히기를 희망하여
자손들이 병원을 방문 묘비를 세웠다.
존 로손 시블리(JOHN RAWSON SIBL
미국에서 의과대학에 재학 중 2차대전에 군 복무를 하고 난 후
의과대학을 마치고 선교사가 되었으며 기독학생 모임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을 하여
부부가 함께 선교사업을 하는데 뜻을 같이 하였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중국에서 선교사로 봉사를 하였던 선교사 집안으로
연세대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1960년대 후반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서민계층을 위해
거제도에서 지역 사회개발 보건 사업을 시행하였다.
86세까지 구호활동과 선교 의료봉사로이어지는 삶을 살다가 은혜의 정원으로 돌아갔다.
닥터 시블리 (Dr.Sibley )선교사
동산병원 외과의사로 재직하며 선진 외과지식을 보급하였고.당시 우리나라에서 구하기 어려웠던
많은 의학과 외과 관련 도서들을 의료계에 보급하고 의료 발전에 공헌하였으며
마펫 선교사 또한 동산병원을 지역의 대표적인 종합병원을 만드는데 평생을 바쳤다.
애락보건병원이라는 나병환자들을 치료하는 병원을 설립하여 치료릏 하면서
어려운 환자들에게는 무료진료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미국에서 모은 기부금으로 간호전문학교(현 계명대 간호대학)와 근대병원 설립에 기여하며.
1950년대와 60년대 한국인 의사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 선진 의학을 받아들이게 했다
동산의료원을 현재의 계명대학교 의료원으로 성장시켰다.
넬리 딕 아담스 (Nellie Dick Adams)
넬리 딕 아담스 (Nellie Dick Adams)
넬리 딕 아담스는 대구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인 아담스 (안의와)의 아내이며
1897년에 3개월 된 아들 에드워드(안두화)를 안고 태평양을 건너왔다.
남문안예배당(제일교회)의 유년주일학교를 만들었고 신명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며
남편을 도와 교육과 선교에 힘을 썼다.
대구 지역에 발걸음을 디딘 첫번째 여자 선교사였는데
날마다 대구지역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양한 선교활동을 하는 열성을 보였다.
1909년 넷째 아이의 유산 후유증으로 43세의 나이로 숨져
대구 은혜정원에 묻힌 최초의 외국인이 되었다.
넬리 딕의 쌍둥이 자매 진(Jean)도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서 그곳에서 순교하였고
후에 장남 에드워드(안두화 )는 "계명기독대학을 설립하였다.
넬리 딕 선교사의 묘에는
She is not dead but sleepeth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을 뿐이다)
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죽은 것이 아니고 아직도 이 땅과 이 땅에 있는 한국인들을 위해
자신의 영혼은 살아서 기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체이스 크로포드 사우텔(Chase Crawford Sawtell)
1907년 신혼의 부부 선교사로 내한하여 대구 선교지부에 배치받았다.
당시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던 지역인 안동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고.
안동 선교지부 개설을 자원하여 갔다가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1909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하였다
그의 묘비에는 나는 그들을 사랑하겠노라 (I am going to love them ) 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죽어서도 이 땅의 백성들을 사랑하고 있을 사우텔 목사의 사랑을 전해준다.
마르타는 (브루언, 傅海利) 목사의 아내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출생의 마르타 스콧 브루언 선교사는
원래 생활여건이 열악한 조선을 향한 선교의 마음이 없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 브루언과 함께 할 수 있고 남편을 도와 자신이 힘이 될 수 있다면
태평양을 건너 가기로 결심을 했다.
1902년 남문안예배당(제일교회)구내 초가집에서 신명여자소학교를 열었고
1907년에는 동산 위에 있던 부인용 사랑채에 신명학교를 설립하였다.
대구 여성교육의 선구자가 되어 사역을하다가 1930년 ,55세를 일기로 소천 하였다.
마르타 스콧 브루언 선교사의 쌍둥이 두딸이 엄마의 묘비 옆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으로
2007년 신명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면서 유품을 가지고 와서
두 딸들도 은혜 정원에 함께 나란히 묻혔다.
묘비제막은 가족들과 신명학교 관계자들이 세웠다.
..
은혜의정원에는 대구지역과 조선을 위한 선교의 삶을 살다가 묻히신 분들 외에도
선교사 자녀들의 작은 묘비들을 볼 수 있다.
그당시 우리나라는 모든 환경이 너무나 열악했기에
선교사의 자녀들이 태어나서 채 얼마되지 않아 생명을 잃기도 했다.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안락한 삶을 접어두고
먼 이국 땅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가운데 사랑했던 자녀를 희생해가면서 까지
맡은 사명을 감당했던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동안 선교사들의 투철한 사명에 대해 무감각하게 잊혀지고 있었다.
은혜의정원에서
" 어둡고 가난했던 그 시대 태평양 건너 머나먼 이국에와서
배척과 박해를 무릅쓰고 혼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고 인술을 베풀다"
팻말에 쓰여진 대로 그렇게 삶을 마감한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묘소를 바라보며
이 민족의 복음화와 번영을 위해 힘쓰다가 희생했던 분들을 기리며 숙연해진다.
첫댓글 오지와 척박한 이 나라를 위하여 이국 땅에서 온 선교사들의 무덤을 봅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한 그들의 삶을 돌아보며 오늘 이렇게 발전한 우리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