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윗의 외교
삼하 10:1-5
1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2 다윗이 이르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 하고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보내 그의 아버지를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하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
3 암몬 자손의 관리들이 그들의 주 하눈에게 말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당신에게 보낸 것이 왕의 아버지를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당신에게 보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하니
4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그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그들의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5 사람들이 이 일을 다윗에게 알리니라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왕이 그들을 맞으러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
삼하 10:1-5 / [암몬 족속과의 전쟁] 그 뒤 얼마 지나서 암몬 족속의 왕 나하스가 죽자, 그의 아들 하눈이 아버지의 왕위를 이어받아 새 왕이 되었다. 2) 나하스는 사울의 적이었기 때문에, 사울에게서 피신해 다니던 다윗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기회에 나하스의 호의에 보답할 생각을 하였다. `하눈의 아버지 나하스가 곤경에 빠진 나를 도와주며 나와 좋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나도 그의 아들 하눈에게 호의를 베풀며 좋은 관계를 계속해 나가고 싶다' 그래서 다윗은 나하스의 장례식에 사절단을 보내 조의를 표하게 하였다. 그러나 다윗의 조문 사절단이 암몬 족속의 땅에 다다르자 3) 암몬 족속의 대신들이 나이 어린 왕에게 아주 그릇된 조언을 하였다. `임금님,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이렇게 사절단을 보낸 것이 단순히 선왕의 영예를 기리고 조문을 전달하려는 것으로 여기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우리 도성의 정보를 얻어 내어 이 나라를 정복하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4) 그러자 철없고 나이 어린 왕 하눈이 다윗의 사절단을 체포하여 그들의 수염을 반쪽씩 밀어 버리고, 그들의 의복도 허리 밑동을 모조리 잘라내어 양쪽 엉덩이와 부끄러운 곳이 드러나도록 하였다. 하눈은 그들을 이렇게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만들어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냈다. 5) 그러나 모욕을 당한 다윗의 사절단은 자신들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워 감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왕에게 이러한 사실을 살며시 알렸다. 그러자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위로하고, 수모와 모욕을 온 백성에게 공개하지 않으려고 이렇게 지시하였다. `여러분은 수염이 다 자랄 때까지 여리고에 머물러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오.'
본장은 삼하 8장 12에 간략히 언급된 암몬과의 전쟁에 대해 보다 상세한 부연 설명으로 이해됩니다.
그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1-2) 암몬 족속의 왕 나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새 왕이 되다는 소식이 다윗에게 들립니다. 다윗은 죽은 나하스가 사울에게서 피신해 다니던 때에 베푼 어떤 호의를 기억하고 장례식의 사절단을 보내 조의를 표하려 했습니다. 이를 통해 하눈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역시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 둘 것은 비록 적이라 할지라도 한 때 자기에게 베풀었던 작은 호의라도 잊지 않고 대를 이어서 후손에게라도 갚고자 한 다윗의 의리 있는 인격과 그의 행동에 보다 더 주목하여야 할 것입니다.
왕의 아버지를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3) 그러나 다윗의 조문 사절단이 암몬 족속의 땅에 다다르자, 암몬 사람의 고관들이 이 도성을 두루 살피고 정탐하여 함락시키려고, 정탐꾼을 보낸 것이라고 의심을 불어 넣었습니다. 이런 암몬 고관들의 오해는 그들 스스로가 다윗 왕의 고매한 품성을 헤아리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 것이며, 승승장구하는 다윗 왕의 통치세력 확장에 대한 저들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저들은 가나안 지역의 최강자 블레셋과 이웃 나라인 모압이 이미 다윗의 군대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사실과 끔찍한 형벌(삼하 8:1-2)을 알고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암몬의 수도인 랍바 성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의해서는 좀처럼 함락되지 않는 견고한 요새였습니다(11:1). 그러므로 암몬 사람들은 타국의 사절들에게 이 성의 내부를 보여 주는 것을 가장 꺼려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의복을 자르고(4-5) 어리석은 하눈은 다윗의 조문사절단을 잡아 수염을 절반씩 깎아 버리고 옷은 부끄러운 곳인 엉덩이가 드러나도록 절반씩 잘라 욕되게 한 후 그대로 돌려보냅니다. 당시 남자의 수염은 명예와 권위를 상징하였고 수염을 기르는 것은 자유인의 권리를 상징한 것이었습니다. 하눈의 이런 행위는 그들을 노예보다 못하게 한 수치 중의 수치였습니다(사 7:20; 50:6). 여기서 ‘수염의 절반을 깎았다’는 말이 수염 전체를 잡아 절반을 싹둑 잘랐다는 말인지, 얼굴의 한쪽 면만 수염을 밀어 깎고 다른 한쪽 면은 그대로 두었다는 말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또한 그 당시는 겉옷 속에 딱 붙는 속옷을 입지 않았을 것이니 옷을 자른 것도 지독한 모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하여 다윗 왕을 상징하는 조문사절단에게 가해한 것은 곧 다윗 왕에게 한 것입니다. 다윗 왕은 조용히 침묵으로 그들을 맞이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목 성읍인 여리고에 머물다가 수염이 어느 정도 자라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고 명합니다. 이런 조치는 저들의 수치를 백성들과 가족들에게 감추어 주기 위한 배려요 그들이 당한 수치를 반드시 갚아 줄 것이라는 의미를 담은 지시입니다.
적 용 : 통찰에 어둡고 아첨하는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며 상대의 진심어린 호의조차 통찰하지 못하는 하눈에게서 어떤 교훈을 받습니까?
현재 교회가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것은 진리 위에 제대로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가 세상을 향해 사랑과 은총을 베풀고 오직 진리 위에 바로 서 있어야 합니다. 다시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호크마 주석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수치당한 다윗의 조문 사절(弔問使節)]
그 후에 - 여기서 '그 후에' 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와예히 아하레이 켄'(*)은 8:1의 용례와 같이 시간적인 전후 관계를 연결하는 말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내용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단순 접속어이다. 8:1 주석 참조. 따라서 우리는 이 말에 근거하여 본장의 사건이 앞장의 사건 뒤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본장 1-14절의 사건은 8:3-8에 나타난 사건보다 앞서는 것이다(L-eon Wood). 왜냐하면 소바왕 하닷에셀의 다윗에 대한 도전(15-19절 ; 8:3-8)은 본장에 언급된 암몬과의 전투(1-14절)에 뒤이어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장1-14절은 8:12에 간략히 언급된 암몬과의 전쟁에 대한 보다 상세한 부연 설명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암몬 자손의 왕 - 삼상 11장에 언급된 나하스(Nahash)를 가리킨다. 그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치려다가 오히려 사울 왕에게 패배한 적이 있다(삼상 11:1-12).
성 경: [삼하10:2]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수치당한 다윗의 조문 사절(弔問使節)]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같이 - 나하스가 다윗에게 언제 어떠한 은총을 베풀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음과 같이 각기 다르게 추측하고 있다. (1)아마도 나하스가 다윗의 즉위식(卽位式, 2:4;5:1-3)에 특사를 보내어 축하해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Lange). (2)또한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다닐 때 나하스가 그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Keil,Matthew Henry). 즉 사울에게 패배한 나하스(삼상 11장)가 같은 사울에게 쫓기고 있는 다윗을 동정하여 그를 도와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3)나하스가 다윗에게 베풀어 주었다고 하는 '은총'이란 히브리어로 '헤세드'(*)인데, 이는 '언약적인 호의'를 의미한다(9:1 주석 참조). 그러므로 본절은 쌍방간에 불가침 조약과 같은 모종의 계약을 체결한 것을 가리킬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Rust, Interpreter's Bible). 그러나 우리는 이상의 세 견해 중 어느 것이 보다 사실에 가까운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성경의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절에서 이러한 사실 여부보다도 남에게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갚고자 한 다윗의 의리있는 인격에 보다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성 경: [삼하10:3]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수치당한 다윗의 조문 사절]
다윗이...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 이는 다윗의 호의에 대한 암몬 방백들의 오해이다. 이와 같은 저들의 오해는 분명 다윗의 세력 확장에 대한 저들의 염려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다(Lange, 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Rust). 즉 저들은 가나안 지역의 최강자 블레셋과 이웃 나라인 모압이 다윗의 군대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사실(8:1, 2)을 알고 저들의 미래를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웃 나라인 모압이 다윗에게 패배한 이후에 끔찍한 형벌을 받은 사실(8:2)은 그들에게 더욱 큰 경계가 되었을 것이다(Keil). 따라서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이 다윗의 호의를 그들을 정복하려는 저의(底意)로 오해하게 된 것도 무리(無理)는 아니다.
이 성 - 이는 암몬(Ammon)의 수도인 랍바(Rabbah) 성을 의미한다. 이 랍바 성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의해서는 좀처럼 함락되지 않는 견고한 요새였다(11:1;12:26;신3:11). 따라서 암몬 사람들은 외국 사절들에게 이 성의 내부를 보여 주는 것을 꺼려했을 것이 틀림없다(11:1 주석 참조).
성 경: [삼하10:4]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수치당한 다윗의 조문 사절(弔問使節)]
그 수염 절반을 깎고 - 고대 근동지방에서 남자의 수염은 명예와 권위를 상징하였다. 또한 수염을 기르는 것은 자유인의 권리를 상징한 것이었다(Lange, PulpitCommentary). 따라서 다윗의 특사들이 수염을 깎이운 것은 노예처럼 취급된 최고의 수치였다(사 7:20;50:6;15:2;렘 41:5). 그런데 오늘날에도 이러한 관습은 아랍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바 그들은 수염을 깎이우는 것을 죽음보다 더한 수치로 여기고들 있다(Keil & Delitzsch, Wycliffe). 한편 여기서 '수염의 절반을 깎았다'는 말은 수염의 밑부분을 잘랐다는 말이 아니라 얼굴의 한쪽면에 있는 수염을 깎고 다른 한쪽면은 그대로 두었다는 말이라는 주장도 있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 p. 375). 그러나 확실치는 않다.
의복의 중동 볼기까지 자르고 - 여기서 '의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두'(*)는 '펼치다', '확장시키다'는 뜻의 동사 '마다드'(*)에서 파생된 말이다. 즉 이는 발목까지 길게 내리운 옷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람인들은 다윗 신하들의 긴 옷을 엉덩이 윗부분까지 잘랐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겉옷 속에 내의를 입지 않았으니(Keil, Pulpit Commentary) 그들의 이러한 행위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선 지독한 모욕(侮辱)이 아닐 수 없다(6:20).
성 경: [삼하10:5]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수치당한 다윗의 조문 사절(弔問使節)]
너희는...머물다가 돌아오라 - 다윗이 이처럼 신복들에게 여리고에 머물다가 수염이 어느 정도 자라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고 한 것은 저들의 수치를 감추어 주기 위한 배려임에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랍바 성에서 가장 가까운 여리고는 비교적 이스라엘의 변방(邊方)으로서 많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삼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의 이같은 말에는 보다 암시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즉 '머물다가 돌아오라'는 말 다음에는 아무 말이 없긴 하지만 이는 분명 '머물다가 돌아오라 그 동안에 너희가 당한 수치는 내가 반드시 갚아 주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 491).
여리고 - 여리고(Jericho)의 뜻은 '향기로운 성읍' 또는 '달의 도시'이다. 그런데 이곳은 종려나무 산지로 유명하였으므로 일명 '종려나무 성읍'(the city of palms)으로도 불리웠다(삿 1:16). 한편 이곳은 랍바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위치하였는바 곧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약 28km 지점이다.
< 설 교 >
선을 악으로 갚은 하눈
삼하 10:1-5
본 장에서는 선을 악으로 갚은 암몬의 왕인 하눈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암몬 자손의 왕인 나하스가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 하눈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다윗이 나하스에게 도움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2절에 보면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나하스라는 이름은 뱀을 의미하며 몇몇 암몬 족의 왕들에 의하여 취해진 이름이던 것 같습니다. 나하스는 사울의 원수일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보이는데 사울의 세력으로 인하여 당했던 패배의 상처가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다윗에게 은총을 베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가 받은 은총을 생각하여 조문객을 암몬 땅에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사는 방백들은 하눈을 충돌질 하였습니다. 3절에 보면 “왕은 다윗이 조객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 신복을 보내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까”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 방백들이 이렇게 말함은 전쟁에서 다윗이 승리하자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나라를 불신하는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암몬의 새 왕인 하눈은 귀가 옅은 사람인 듯 합니다. 생각도 해 보지도 않고 그냥 다윗의 신복을 잡아서 수염을 절반을 깎아버렸습니다. 동양인에게 수염은 자신이 자유인이라는 표시이며, 이렇게 함은 단순한 모욕이 아니라 노예로 취급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염만 깎은 것이 아니라 그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잘랐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만이 속옷을 입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평상복은 윗옷과 그 위에 헐렁하게 걸치는 겉옷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동불기까지 잘랐다는 것은 엉덩이 바로 위까지 자른 것으로 하반신을 다 드러내기 때문에 이것은 대단히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 수치스럽고도 지독스러운 모욕이었던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볼 수 있지만 노아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은 채로 있었는데 노아의 아들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자 두 형제는 옷을 취하여 뒷걸음질쳐서 아비의 하체를 덮었다고 하였습니다(창 9:20-23). 그 결과 아비의 하체를 본 가나안의 아비 함은 자기 형제들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만큼 하체를 드러내는 것은 커다란 수치였던 것입니다. 하눈이 이렇게 행한 것은 다윗에게 전쟁의 선전포고를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의 신복들이 그런 모욕을 당하고 돌아온 것은 다윗 자신을 모욕한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 신복들이 그런 일을 당하고 부끄러워하자 다윗은 그들을 여리고로 가서 수염이 자라기까지 머물러 있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5절). 여기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몇 가지 사실들이 있습니다.
1. 선을 선으로 갚은 것입니다
성경에는 전에 다윗이 나하스에게 도움 받은 사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다윗은 그 사실을 깊이 간직 하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기에 나하스가 죽자 자신이 받은 친절을 생각하여 조문객을 보내었던 것입니다. 요즈음의 시대에서는 우리에게 주어졌던 많은 친절들이 복잡한 사회 속에서, 또 삶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받은 친절에 대하여 거의 잊어버리거나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윗은 암몬 왕의 호의에 대해서만 은혜를 갚은 것이 아니라 삼하 9장에도 기록되었지만, 자신이 요나단의 도움을 받은 것을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사울과 그 온 집의 재산을 다 돌려주고 그가 두 발이 다 절뚝발이라고 하였는데도 자기 상에서 같이 먹으라고 하였으며 왕자 중의 하나처럼 대하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인정이 있는 행위입니까? 우리가 선을 베푼 것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고 그냥 묻혀버린다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선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받은 선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갚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다.
다윗의 호의는 진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호의를 받는 편에서는 교활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 호의가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호의는 오히려 악으로 가득찬 앙갚음을 받게 되었고 멸시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로부터 계속해서 오해를 받았고 백성들이 다윗을 따르는 것을 시기하여 죽이고자까지 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도 많은 사랑으로 우리 인간들을 대하셨지만 오히려 그 사랑하신 사람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게 되셨던 것을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선한 사람들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탄의 세력이 더 강하기 때문에 어두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선이라는 것을 알려고 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위에서 다윗을 모함한다고 하여 거기 솔깃하여 다윗의 신복들에게 모욕을 준 하눈은 진실 된 것을 보지 못하는 무지한 자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가슴에는 상대편 사람들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온전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을 때 상상은 어떤 가능한 동기들을 바라보게 되고 그것은 좋은 쪽보다는 나쁜 면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하눈과 암몬 사람들의 거짓되고 악한 의도는 다윗의 행동을 잘못 판단하여서 우호적인 행위를 그들 자신을 스스로 파멸의 자리에 몰아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각 개인들에게 가장 비참한 저주의 상황으로 나타날 것이기도 합니다. 또 그리스도의 호의에 대한 방자한 배척이기도 합니다. 선을 악으로 갚음은 최고의 손실을 수반하는 법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호의에 대한 배척은 그의 위대성과 영광에 비례하는 손실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3.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편의 사람이 남에게 억울하게 멸시를 당하였거나 모욕을 받으면 기분이 상하게 됩니다. 기분만 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원한을 품게 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심리인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신복들을 좋은 뜻을 가지고 암몬 땅에 들어가게 하였던 것인데, 그 좋은 뜻은 이루지도 못하고 신복들이 온갖 수치를 다 당하고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보게 됩니다. 다윗은 자기의 신복들이 하눈에게 많은 수치를 당했지만 결코 하눈을 나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도 않고 자기의 신복들을 여리고로 보내어 수염이 자랄 때까지 그 곳에 머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하게 처리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다윗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오히려 덮어 주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호의가 그렇게 무참히 거부당하였다는 것은 다윗에게 있어서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기에 오히려 다윗에게는 더 많은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고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선한 일들이 남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고 오히려 분쟁의 원인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건져내시며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강한 적들로부터의 승리
삼하 10장 1~19절 /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9.11 테러 공격이 발생한지 20년이 넘었고 다음 달이면 21년이 됩니다. 테러 공격 발생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 미국 의회는 대통령이나 관련 부서 공무원들이 자신의 책임을 다했는지 철저하게 조사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한국과 미국의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포함해서 한국 사람들은 아무래도 많이 감정적입니다. 감정적인 면이 많이 앞서서, 어떤 사건이 터지면 여론이 들끓습니다. 특히 요즘은 인터넷이나 SNS가 있어서 각 개인이 다 자기 소리를 쏟아내니까 엄청난 비판과 비난의 소리가 넘쳐납니다. 그러나 조금만 지나면 그때뿐입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주로 가장 최하급 관계자 한두 명이 구속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건이 터지면 그 전에 들끓었던 것은 다 잊어버리고, 또 다른 사건이 나오면 바로 이전 것이 잊힙니다. 그래서 사실은 정권에 따라 새로운 사건을 일부러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정치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스포츠계나 연예계 사건들을 터뜨려서 그 전 것을 잊어버리도록 했고, 거기에 국민들이 넘어간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지난주에도 수도권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것을 뉴스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피해가 발생하면 일단 마음을 모아서 해결부터 해야 하는데, 누구 탓이냐를 따집니다. ‘시장 탓이다.’ ‘아니다, 이전 시장 탓이다.’ ‘시의회 탓이다.’라고 하며 서로 싸우기만 하는 것을 보고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일단은 문제를 해결해놓고, 그다음에 정확히 이게 누구 책임인지도 물으며, 더 중요한 것은 다음에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같은 문제가 일어나는 겁니다.
미국도 비슷한 점이 있지만, 그래도 어떤 일이 터지면 그 즉히 성급하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신 오랫동안 끈질기게 조사를 벌입니다. 유럽도 그런데, 지금도 나치 전범이 잡혔다고 하는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잡힌 사람을 보면 90대이거나 젊어도 80대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추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는 하지만, 21세기 들어 경험하는 전쟁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일단 전쟁터가 있었고 상대할 적군들을 직접 대면하여 싸웠는데, 이제 테러와의 전쟁은 전쟁터가 없습니다. 세계 어디나 전쟁터가 됩니다. 또 적군도 보이지 않습니다. 요즘은 드론을 띄워서 공격하는 일도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뭐가 터질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조심하면서 미리 테러를 예방하는 쪽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적군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오랫동안 싸워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영적 전쟁은 적군이 안 보이는 전쟁이고 전쟁터가 따로 없는 전쟁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만 존재한다면 좀 간단하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영의 세계로 하나님 나라도 있고 사탄의 세력도 있음을 성경이 분명히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래서 ‘마귀를 대적하여 싸우라.’ 하지 않습니까? 마귀가 없다면 왜 싸우라고 하겠습니까? 있으니까 싸우라고 합니다. 또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경우에 귀신들을 쫓아내셨는지 모릅니다. 말씀을 가르치시고 기적도 베푸셨지만, 귀신을 쫓아내신 적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의 세력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은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을 충동질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면서 보면, 직장이나 사업체에서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돌변해서 나를 공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그렇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렇고,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부부끼리 너무 대화가 잘되고 기분이 좋고 참 행복하게 있는데, 갑자기 한순간 감정이 확 상하고 부부싸움을 하게 되어 천국이 갑자기 지옥이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마귀가 사람들 사이를 벌려놓으려고 사용하는 전략 중 하나가 바로 의심을 품게 하는 겁니다. 사람에게는 원래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경향이 조금씩은 다 있는데, 그런 의심을 더 자극해서 자기방어를 넘어 상대방을 향해 공격적으로 되도록 부추기는 겁니다. 우리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되는데 자기도 모르게 더 나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주의하며 깨어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성경에서 명령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그래야 생각하지도 못한 공격이 들어와도 당황하지 않고 지혜롭게, 담대하게 또 능력 있게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암몬의 새로운 왕 하눈이 다윗을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돌이킬 수 없는 전쟁으로 나아가게 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탄의 부추김에 넘어간 것인데, 그러한 하눈이 어리석은 결정으로 전쟁이 일어나도록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1. 모욕당한 다윗의 신하들 (1~5절)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다윗이 이르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 하고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보내 그의 아버지를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하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 (1-2절)
암몬은 요단 강 동쪽에 있는 세 나라 중 하나인데, 가장 남쪽이 에돔(지금의 요르단쪽)이고, 그 위가 모압이며, 모압 바로 위가 암몬입니다. 이전에 암몬 사람들이 와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공격했다가 사울 왕에게 패배한 적이 있습니다(삼상 11장). 그러나 이후에 암몬 왕 나하스는 다윗과 동맹을 맺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암몬 왕 나하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조문하기 위해 신하들을 사신으로 보냅니다. 이것은 다윗이 나하스에게 은혜를 입은 것에 대해 보답하기 위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언제 암몬 왕 나하스의 도움을 받았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은데, 아마도 다윗이 피난 시절에 나하스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다윗과 나하스가 친족으로 얽혀 있는 관계일 수 있다고 하는데, 다윗 어머니 쪽으로 그렇게 된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어떤 은총을 받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호의를 베풀었던 것은 사실인데 무엇이었는지는 모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든 간에, 중요한 것은 다윗이 자기가 받은 은총을 기억하고 그것을 갚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받은 은총을 반드시 갚기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본문인 9장에 이어서 ‘은총’이라는 단어가 여기 또 나옵니다. 지난주 사무엘하 9장 1절을 보면 다윗이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은총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은총’이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인애, 자비, 능력, 사랑’ 등으로 번역됩니다. 다윗은 이러한 헤세드를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에게 베풀었습니다. 이 은총을 입은 므비보셋은 사울의 모든 유업을 이어받게 되고, 심지어 다윗 왕의 식탁에서 함께 먹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장애를 가진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던 다윗은, 이제 암몬의 새로운 왕이 된 하눈에게도 같은 은총을 베풀겠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은총을 베풀었던 나하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그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선한 마음에 대한 반응이 므비보셋 때와는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암몬 자손의 관리들이 그들의 주 하눈에게 말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당신에게 보낸 것이 왕의 아버지를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당신에게 보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하니,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그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그들의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3-4절)
다윗의 신하들로 구성된 조문객을 맞이한 암몬 왕 하눈은, 그것이 다윗이 암몬을 엿보고 공격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라는 자기 신하들의 말에 넘어갑니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수염을 깎고 옷의 절반을 잘라 돌려보냄으로 다윗을 모욕합니다.
암몬 관리들이 속지 말라고 하면서, ‘지금 이 사람들은 친선 조문 사절단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염탐하려는 스파이를 보낸 것입니다.’ 하고 엉뚱하게 조언합니다. 그러자 하눈은 사절단의 수염을 깎고 의복을 자르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니까 하눈은 굉장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왕이지만 왕으로서 판단력이 없습니다. 주변 신하들의 말에 그냥 넘어갑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 수염은 남자들에게 권위의 상징이며 남자의 명예를 상징했습니다. 지금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지금은 수염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지만, 옛날에는 다 수염을 길러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남자들은 당시 관습뿐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도 수염을 기르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레 19:27). 그런 상황에서 수염이 잘렸다는 것은 노예처럼 취급당한 것을 말합니다. 한국의 이발소에서 면도해주는 서비스를 받은 게 아니라 완전히 모욕을 당한 겁니다. 노예 같은 취급을 받은 겁니다.
또한 의복의 중동 볼기까지 잘렸습니다. 당시는 속옷을 입지 않았는데 옷을 엉덩이까지 죽 자르면 걸을 때마다 다 속이 보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수치를 주고 모욕하는 일이었으며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암몬 사람들의 이러한 행동은 다윗의 호의를 악으로 갚고 전쟁을 선포한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이 일을 다윗에게 알리니라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왕이 그들을 맞으러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 (5절)
다윗은 먼저 신하들에게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가서 머물다 오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은 ‘니들은 창피하니까 거기 좀 있다가 와.’라고 하는 게 아니라, 수치를 당한 그들에게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리고로 가 있으라고 하는데, 여리고는 다윗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18마일 정도 떨어진 성입니다. 여호수아 정복 전쟁 때도 가장 먼저 공격했던 성이 아닙니까?
아주 멀지도 않고 아주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 있는 그곳에 가 있으라는 겁니다. 암몬에서 돌아올 때 거치는 성이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합니다. 빙 돌아서 다른 데로 가지 말고 오는 길에 있는 그 성에서 머물러 수염이 자랄 때까지 있다 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사신들이 가족들이나 아는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수염이 다 자라기까지 그곳에서 머물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그들의 입장을 헤아려주면서 배려해준 것입니다.
9장에서 므비보셋은 다윗의 은총을 받아들여 재산이 회복되고 왕의 상에서 같이 먹는 그 풍성함을 함께 누리는 가족과 같은 위치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10장에서 암몬의 하눈은 그 은총을 거절함으로써 전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도 이겼으면 다행인데 패배의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참 어리석습니다. 므비보셋은 은총을 받아서 축복을 누렸고, 하눈은 잘난 체하고 까불다가 큰코를 다치고 굴욕을 당하게 된 겁니다.
이런 암몬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의심하면서 자꾸 은혜를 악으로 갚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마음속에 뭔가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열등감의 상처가 있습니다. 의심이 많고 늘 경계하며 자기방어적입니다. 친절하게 대해주면 무슨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하며 틀어서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갑니다. 스스로의 어리석은 결정 때문에 손해를 보게 되는 겁니다.
이때 다윗은 신하들을 배려해주었는데,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려준 겁니다. ‘내가 보기에 너희는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무엇이 필요할까를 생각하며 거기에 머물도록 해준 배려입니다.
이것이 우리 식으로 하면 ‘사랑의 언어’입니다. 상대방의 사랑의 언어로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나의 사랑의 언어로 사랑해주면, 상대방에게 분명히 사랑을 베풀어주었는데도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부끼리도 그렇고, 부모와 자녀 간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의 삶> 공부를 할 때 자기의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를 점검하고 자녀의 것을 점검하고 배우자의 것을 점검합니다.
상대방의 사랑의 언어로 사랑해주자는 것인데, 바로 그것을 실천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랑의 언어’로 한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의 상황에 맞추어서 맞는 방향으로 나아가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눈은 자기 안의 열등감 등의 상처 때문에 다윗이 베풀어주는 호의를 엉뚱하게 해석하고 오히려 전쟁으로 나아가다가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다윗은 암몬 왕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가 도리어 모욕을 당하는데, 이것은 몇 가지 교훈을 줍니다.
첫째로, 우리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는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주인과 우리의 주인이 다릅니다. 그리고 삶의 전 영역에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선한 의도로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고 할 때 오해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특히 교회와 기독교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신자들의 선한 의도까지도 왜곡하고 잘못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셋째로, 세상 사람들은 때때로 선을 악으로 바꾸어 갚기도 한다는 겁니다. 이것도 우리가 놀랄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 됩니다. 선한 의도로 어떤 일을 행하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나올 수 있는데, 그래서 사도 바울도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갈 6:9).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날 때 어떻게 반응해야겠습니까?
첫째로는, 낙심하지 말고 담대해야 합니다(요 16:33). 만약 내가 잘해주었는데도 저쪽에서 이상하게 나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도 세상에서 모욕과 고난을 당하시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세상에 나를 미워했으니까 나를 따르는 너희도 미워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8-19). 그래서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세상에서 모욕을 당하고 오해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아무런 잘못 없이 고난과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인내하면 아름다운 결과가 반드시 나타날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벧전 2:19). 사람들은 몰라줘도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아무 잘못 없이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까지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고 사도 베드로가 권면하면서 결국 아름다운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셋째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야겠습니다(마 5:44).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물론 안 믿는 사람,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도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선택적 사랑’입니다. 내가 좋은 사람은 사랑하고 내가 싫은 사람은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미워하고, 아니면 슬그머니 관계를 끊습니다. 그것이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인데, 요즘은 믿는 사람도 안 믿는 사람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원래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죽임을 당해도 나를 죽이는 사람조차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방식이고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우리가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힘이 있다고 저쪽에서 이상하게 나오면 나도 힘으로 누르고 반격하는 게 아니라, 희생하고 견뎌주고 오히려 사랑으로 대해줄 때 그것이 나를 변화시키고 또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2. 암몬과의 전쟁과 승리 (6~14절)
“암몬 자손들이 자기들이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암몬 자손들이 사람을 보내 벧르홉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 명과 마아가 왕과 그의 사람 천 명과 돕 사람 만 이천 명을 고용한지라” (6절)
여기서 ‘고용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암몬 자손들은 다윗이 자신들의 행위로 인해 분노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군대뿐 아니라 용병을 고용해서 다윗을 대적합니다. 여기 여러 지명들이 나옵니다. 벧르홉, 소바, 마아가, 돕 중에서 작은 도시 국가인 돕을 제외하고는 모두 암몬 북쪽에 위치한 아람(시리아)의 국가들입니다.
암몬 왕 하눈은 다윗과 적대 관계에 있던 아람 군대들을 동원해서 연합군을 이루어 다윗의 이스라엘 군대와 싸우려고 한 것입니다. 역대상에서는 하눈이 은 천 달란트를 주고 이 군대들을 사왔다고 기록합니다(대상 19:6).
“다윗이 듣고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내매, 암몬 자손은 나와서 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소바와 르홉 아람 사람과 돕과 마아가 사람들은 따로 들에 있더라” (7-8절)
암몬 사람들은 자기의 지혜대로 한 떼는 성문 어귀에, 다른 나라에서 데리고 온 군사들은 들판에 배치를 해서 이스라엘 군을 협공하는 전략으로 나옵니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이스라엘의 군대장관 요압은 이스라엘 군 역시 두 떼로 나눕니다. 그래서 한 떼는 자기가 맡고 다른 한 떼는 자기 아우 아비새에게 맡기어 서로 협력하면서 싸우도록 전략을 짭니다.
“요압이 자기와 맞서 앞뒤에 친 적진을 보고 이스라엘의 선발한 자 중에서 또 엄선하여 아람 사람과 싸우려고 진 치고, 그 백성의 남은 자를 그 아우 아비새의 수하에 맡겨 암몬 자손과 싸우려고 진 치게 하고” (9-10절)
요압은 적들이 앞뒤에서 동시에 공격할 태세를 취하니까 자기도 군대를 둘로 나누는데, 선발한 군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용사들을 다시 엄선하여 3만 3천 명이나 되는 아람 연합군과 싸우게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군대는 동생 아비새에게 맡겨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두 개의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암몬과도 싸워야 하고 암몬이 용병으로 고용한 아람과도 싸워야 합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르되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 (11절)
군대를 둘로 나누어서 싸우지만, 한쪽이 전투에서 밀리면 다른 한쪽이 와서 도와주기로 동생과 약속합니다. 이것이 사실은 아주 위험한 작전입니다. 왜냐하면 둘 다 밀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요압은 이것 외에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합리적입니다. 한쪽이 밀리면 다른 쪽이 와서 도와주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쪽이 비게 되지만 모험을 걸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순간 요압은 정말 요압답지 않은 놀라운 믿음의 선언을 합니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12절)
요압이 어떻게 보면 유일하게 믿음의 고백을 한 곳이 바로 여깁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믿음의 고백과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요압은 여기서 세 가지로 자신의 군대를 격려합니다.
첫째, 담대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많은 수의 적들을 상대해야 하는 군인들에게 힘을 북돋워 주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 “우리 백성과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해 담대히 하자”라고 격려합니다. 그들이 이 전투에서 질 경우,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에 큰 피해가 올 것을 기억하도록 한 것입니다.
셋째, 요압은 하나님이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실 것이라고 선포함으로써 군사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도록 격려합니다. 이 싸움에서 담대할 것과 또 이 싸움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이름을 위한 것임을 언급하면서, 모든 결과를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맡긴다고 놀라운 믿음의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요압은 원래 피의 사람이고 잔인한 사람입니다. 아브넬을 슬쩍 불러 죽였고, 나중에도 똑같은 일을 또 합니다. 아주 잔인한 사람이고,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것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물론 이것을 진정한 믿음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위기 상황에 닥쳤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은 웬만하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요압이 여기서 보여주는 모습을 통해, 아무리 잔인하고 악한 요압이지만 그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자기의 최선을 다한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바로 그런 것이 믿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조건 기도만 하는 것이나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을 하는 게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자기 힘으로만 열심히 하는 것도 당연히 믿음이 아닙니다. 둘 다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동시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요압이 이 순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딱 이때만 그러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압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아람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려고 나아가니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고, 암몬 자손은 아람 사람이 도망함을 보고 그들도 아비새 앞에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간지라 요압이 암몬 자손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13-14절)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아간 요압과 이스라엘 군대에게 하나님은 암몬과 아람 군대로부터 승리를 거두게 해주십니다. 요압이 비록 이때만 믿음으로 나아가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참 자비롭고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형편없는 요압인데도 불구하고, 믿음의 모습도 딱 이때 한순간만 보인 요압인데도 불구하고 승리를 주십니다. 이스라엘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람 군대는 별 목적이 없이 그냥 돈 주니까 나온 겁니다. 돈을 받고 용병으로 싸우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의 군사 중에도 뽑힌 용사들이 나온 것이니 얼마나 잘 싸우고 얼마나 용맹하겠습니까? 그 장수들이 결연한 의지로 공격하는 그 앞에서 싸울 의지를 상실하고 도망간 겁니다. 사실 별 목적 없이 돈 버니까 나와서 싸우는데, 저쪽에서는 죽기 살기로 나오니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러니 도망가는 겁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굉장히 비슷합니다. 러시아에서 용병을 고용해서 우크라이나로 보낸다고 그런 뉴스도 보았는데, 우크라이나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합니다. 자기 나라가 넘어가게 생겼으니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애국심을 갖게 되는 것을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여기 치고 저기 치면 함락되고 가볍게 이 땅을 먹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벌써 6개월입니다. 그러니까 정신력과 애국심을 간과한 것입니다.
별 목적도 없이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와서 싸우는 사람과, ‘죽더라도 우리나라를 지켜야 한다.’라는 마음으로 싸우는 쪽 중에 어디가 더 용맹하겠습니까? 그러니 갈수록 상황이 바뀌는 겁니다. 물론 아직도 어렵지만, 우크라이나가 아주 잘 싸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옛날에는 더합니다. 돈 받고 와서 대충 싸우려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에게 상대가 안 됩니다.
비록 요압은 악한 사람이고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여기서만큼은 아름다운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맞이하는 어려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도 이렇게 지혜를 잘 사용해서 위기 상황에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뢰하며 담대하게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질 때 그것이 믿음이고, 그때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아람과의 전쟁과 승리 (15~19절)
“아람 사람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다 모이매, 하닷에셀이 사람을 보내 강 건너쪽에 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 내매 그들이 헬람에 이르니 하닷에셀의 군사령관 소박이 그들을 거느린지라” (15-16절)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과 암몬의 전쟁으로 나오지만, 사실은 이스라엘이 아람을 정복하는 사건입니다. 완전히 아람을 누르고 다윗이 고대 근동의 패권을 차지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를 여기서 보여줍니다. 그래서 비록 암몬과의 싸움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아람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아람의 하닷에셀 왕은 암몬을 돕다가 자신들이 다윗에게 패한 것을 보니까 모든 아람의 도시 군주들을 불러 모아서 더 크게 이스라엘을 공격해 옵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매 그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또 그 군사령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17-18절)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이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나아갑니다. 전쟁에 참여하여 아람을 치고, 하닷에셀과 아람 군대의 싸움에서도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둡니다. 요압의 군대가 암몬과의 싸움 그리고 아람 용병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오니까, 아람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고, 이때 왕인 다윗이 직접 나가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아람의 군사령관인 소박의 죽음에 대해서 굳이 안 써도 되는데 왜 썼느냐 하면, 그들이 완전히 패배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군사령관이 죽었으니 그들은 완전히 궤멸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하닷에셀과 연합한 아람 왕들은 다윗에게 조공을 드리고 화친하게 되고, 두 번 다시 암몬을 돕지 않게 됩니다.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그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 (19절)
암몬 왕 하눈은 아무리 봐도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실 그는 다윗에게 대항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반역한 겁니다. 은총을 베풀겠다고 할 때 받아들이면 되는 것을, 신하들의 말에 넘어가서 괜히 싸우다가 졌습니다.
용병을 고용했다는 것은 자기가 직접 싸우는 것보다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인 것을 보여줍니다. 역대기에 의하면 은 천 달란트를 사용했는데, 그래도 졌습니다. 그 정도를 썼으면 이겼어야 했는데도 졌습니다. 돈만 크게 낭비하고 패배한 겁니다. 차라리 다윗이 은총을 베풀겠다고 했을 때 감사함으로 받고 조공을 바쳤다면, 일천 달란트 들어간 것보다 훨씬 적게 들어갔을 겁니다. 그러나 엄청난 돈을 쓰고도 졌습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온 나라가 비탄에 빠지고 고통을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왕입니까?
지금도 자기가 가진 것이나 돈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돈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 잘 잡아야 하는데, 그것을 놓치고 자기 힘으로 해보려다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스라엘의 영향력이 확고하게 미치게 된 계기가 된 겁니다. 이스라엘의 영토가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를 것이라고 하나님이 약속해주셨는데, 그것을 이룬 사람이 바로 다윗이 된 겁니다(창 15:18; 신 11:24).
우리가 오늘 기억할 것은, 영적 전쟁은 항상 있다는 겁니다. 의외일 때, 생각하지 못할 때 올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휴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전쟁을 싸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늘 본문에서 배웁니다.
첫째,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어떤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때 그게 항상 사탄의 공격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시련을 주시는 것도 있고, 또 우리의 욕심 때문에 일어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하는 시험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사탄은 두려움과 속임수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두렵게 하고, 자꾸 속입니다. 과장하게 해서 두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요압의 군대는 소수였지만 많은 수의 아람 군대 앞에서 담대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둘째로 배우는 것은, 다른 형제자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압과 아비새는 각기 다른 적들과 싸웠지만, 이들은 자기가 약해지면 분명 상대방이 자기를 도울 것을 신뢰하면서 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이겼습니다.
우리도 영적 공격을 받을 때, 또는 어떤 어려움을 겪을 때, 그냥 가만히 있거나 쉬쉬하는 것이 성도의 일이 아니라 다른 성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겁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남을 돕겠습니까? 기도로 돕는 겁니다. 그래서 중보기도실 사역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기도 카드를 많이 써서 내시기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면 좋은데 뭘 숨길 게 있다고 자꾸 쉬쉬하며 숨깁니까? 곪아서 터집니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같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교회로 묶어 주셨습니다. 함께 이기는 겁니다. 혼자 이기는 게 아닙니다.
셋째, 말로 승리를 선포하면서 서로 격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압이 말로 선포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특히 영적 전쟁 때, 믿음의 싸움 때 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정적인 말이나 실패와 낙담의 말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주변 사람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의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린 자녀를 두신 분들은, 위선이 아닐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녀들 앞에서 말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속에 있는 생각이 말로 나올 때 그게 다릅니다. 말에는 파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말은 하나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입니다. 정말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있는데, 보니까 직장이나 사업이나 세상에서 잘 안 풀린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열심히 해봤자 소용없네.’라고 합니다. 이게 아주 하나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입니다.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또 ‘기도해봤자 소용없네. 기도해봤는데 별 볼 일 없네.’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얼마나 기도했습니까? 생명 걸고 기도한 것도 아닌데 기도해봤자 소용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특히 조심해야 할 게 이겁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해준 게 뭐 있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어, 그래? 내가 뭔가 보여줄게.’라고 하시며 솜씨를 보이시는데, 그러면 큰일 납니다.
우리는 오히려 어려울수록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감사의 언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잘될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망 언어가 아니라 생명 언어를 써야 합니다. 그중 하나가 감사 언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에서도 감사의 제목을 나누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큰 힘을 얻습니다.
우리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문제가 닥쳐오든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은총을 거절한 암몬
삼하 10:1~8/ 김양재 목사
날마다 살아나는 큐티 김양재 목사입니다. 오늘 큐티인 말씀은 사무엘하 10장 1절부터 8절까지예요. 하나님 아버지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사람의 호의를 왜곡하지 않는 겸손한 마음을 갖길 원합니다. 말씀해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은총을 거절하지 않으려면
1. 받은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1절에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고 해요. 암몬은 롯의 후손으로 이스라엘과 오랫동안 대적 관계에 있던 민족입니다. 특별히 하눈의 아버지 나하스는 사울 시대에 길르앗 야베스를 공격하며 이스라엘을 괴롭힌 사람이에요. 그러니 다윗이 굳이 관계 맺을 이유가 없는 집안입니다.
그런데 2절에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 고 해요.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도망다니던 비참한 시절에 나하스가 자신에게 베푼 호의를 기억하고 있었어요. 왕이 된 지금도 그 은혜를 잊지 않았지요. 우리는 조금만 형편이 좋아져도 과거의 은혜를 금방 잊곤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이 되고 나라가 안정된 후에도 자기를 도와준 사람을 기억합니다. 여기서도 다윗이 먼저 그를 찾아갑니다. 하눈이 도움을 요청한 게 아닙니다. 다윗이 먼저 조문 사절단을 보냅니다. 그런데 은혜를 베푸는 일은 늘 오해받을 위험이 있어요. 그럼에도 은혜 받은 사람은 받은 은혜를 흘려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의 행동은 단순히 인간적인 의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흘려보내는 언약의 삶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 과거에 받은 은혜를 잊고 살지는 않습니까?
- 어려운 가운데 있던 나를 도와준 사람을 기억합니까?
-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먼저 찾아가 은혜를 베픕니까?
은총을 거절하지 않으려면
2. 열등감으로 호의를 왜곡하지 않아야 합니다.
3절에서 암몬 자손의 관리들이 하눈에게 말합니다. 아니 다윗이 조객을 보낸 것이 정말 왕의 아버지를 공경해서겠습니까? 성을 엿보고 탐지에서 함락시키려는 것 아니겠어요? 라고 하는 거예요. 하눈은 하나님을 모르게 다윗의 마음도 분별하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은 늘 자기 방식대로 생각하지요. 자기 계산대로 살기에 남의 호의도 계산하고 자기가 의심하며 살기에 남의 선의도 의심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은총을 은총으로 바지 못하고 정탐으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4절에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그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그들의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라고 해요. 당시 수염은 남자의 명예와 권위, 자유인의 상징이었어요. 그러니 수염을 깎인 것은 죽음보다 더한 수치였습니다. 다윗의 좋은 뜻이 가장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왜곡되고 조롱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선한 뜻을 악하게 해석하도록 유도하여 은총을 모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의 뿌리는 열등감이에요.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호의를 호의로 받을 수 있지만 열등감과 두려움에 붙잡힌 사람은 상대의 선의도 공격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거절하고 오히려 전쟁을 불러옵니다. 그런데 5절에 보니 다윗은 이 일을 듣고도 곧장 보복하지 않아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 머물다가 돌아오라며 수치당한 신하들을 먼저 배려합니다. 그들의 부끄러움과 상한 마음을 깊이 해봅니다. 그런데 여리고는 암몬과 가까운 지역이기도 하기에 다윗이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겠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6절에 암몬 자손들이 자기들이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라고 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사과하고 오해를 풀어야지요. 그런데 하눈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용병을 고용하여 전쟁을 일으킵니다. 북방아람의 여러 왕국에서 보병 3만 3천 명을 돈으로 사들인 것입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니 문제가 더 커집니다. 우리도 그렇지요. 미안합니다. 한마디면 끝날 일을 자존심 때문에 크게 키울 때가 많아요. 회개하지 않으면 변명하게 되고 변명하다 보면 방어하게 되고 방어하다 보면 결국 전쟁이 됩니다. 7절에 보니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서 요압과 용사들을 보냅니다. 전쟁은 명분이 중요합니다. 다윗은 먼저 은총을 베풀었고 암몬은 그 은총을 모독했습니다. 그러니 이 전쟁은 다윗의 욕심이 아니라 공의를 세우는 싸움이 됩니다.
8절에 보니 암문 자손은 성문 어귀에 진을 치고 고용된 용병들은 따로 들에 있었다고 해요. 돈 받고 싸우는 사람과 생명 걸고 싸우는 사람은 다릅니다. 암몬은 돈으로 사람을 모았지만 언약 공동체는 생명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군대와 하나님 백성의 차이입니다.
적용 질문 드립니다.
- 다른 사람의 호의를 내 상처와 열등감 때문에 의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할 일을 자존심 때문에 더욱 크게 키우고 있지는 않나요?
친구에게 오해받아 억울했지만, 이제는 내 생각만 옳다. 여기지 않고 친구의 마음을 잘 살피겠다는 한 초등학생의 어린이 큐티인 묵상 간증이에요. 학교에서 함께 급식 당번을 하던 친구가 앞치마를 입지 않아서 챙겨주고 싶은 마음. 앞치마를 건네며 입으라고 했어요. 하지만 친구는 제 말을 지적으로 받아들였는지 표정과 말투가 차가워졌지요. 3절에서 다윗이 선한 마음으로 암몬 왕을 위로했지만, 오해받은 것처럼 저도 친절이 다르게 전해진 상황이었어요. 처음엔 억울했는데 서로 생각이 달라 오해할 수 있음을 깨닫고는 마음이 편해졌어요. 이제는 제 생각만 옳다 여기지 않고 친구의 마음을 잘 살필래요. 저의 적용은 억울한 마음이 들 때 친구의 입장으로 다시 생각해 볼게요 입니다.
다윗 왕의 마음을 오해한 하눈의 모습이 누나의 마음을 오해한 자기 모습 같아서 부끄러웠다는 일곱 살 어린이의 샛별 큐티인 묵상 간증이에요. 어느 날 제가 만화를 보고 있는데, 누나가 조용히 불렀어요. 평소에 장난을 잘 치는 누나라서 또 저를 놀리는 줄 알고 "왜 불러" 하고 소리를 질렀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누나는 제가 좋아하는 젤리를 몰래 주려고 조용히 부른 거였어요. 4절에서 다윗 왕의 좋은 마음을 나쁘게 오해한 하눈의 모습이 꼭 제 모습 같아 부끄러웠어요. 이제부터 부모님과 누나가 저를 부를 때 기분 좋은 목소리로 대답할래요. 저의 적용은 짜증부터 내지 않고 왜 불렀는지 차분히 물어볼게요 입니다.
간식을 조금만 준 엄마와 형이 미웠지만 자신을 위한 일이었음을 깨닫고 미워한 것을 회개한다는 다섯 살 어린이의 새싹큐티인 묵상 간증이에요. 저는 달콤한 간식을 좋아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엄마가 저에게 간식을 조금만 주세요. 형은 저와 간식을 나눠 먹지도 않고요. 그래서 저는 엄마와 형이 엄마는 간식을 많이 먹으면 치과에 가야 한다고 하셨지만, 저는 계속 속상하기만 했지요. 그러다 결국 치과에 가서 충치 치료를 받았어요. 그러고 나니 저를 생각해서 간식을 주지 않은 엄마와 형이 생각났어요. 4절의 하눈처럼 오해해서 제 마음대로 미워한 것을 회개해요. 저의 적용은 달콤한 간식은 일주일에 두 번만 먹고 양치를 잘 할게요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은 과거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하눈에게 먼저 은총을 베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눈은 그 호의를 의심하고 왜곡하며 결국 전쟁을 불러왔지요.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면 사랑도 공격으로 느껴지고 도움도 간섭처럼 보이게 됩니다. 내 안에 열등감과 상처가 사람의 선의를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하눈처럼 자존심 때문에 사과하지 못하면 결국 문제는 더 커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먼저 찾아가 사랑을 베풀고 오해보다 이해를 선택하며 자존심보다 회개를 선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주님 저희는 받은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사람의 호의마저 의심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다윗처럼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먼저 찾아가 사랑을 베풀기보다 하눈처럼 열등감과 두려움으로 선한 뜻까지 왜곡하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상처와 열등감 때문에 사람의 말과 행동을 악하게 해석하지 않게 하시고 은혜를 은혜로 받을 수 있는 건강한 마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변명하고 방어하며 자존심 때문에 미안합니다. 한마디를 하지 못해 문제를 키워온 것을 회개합니다. 이제는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며 오해보다 이해를 자존심보다 회개를 선택하는 저희가 되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거부당한 은총
사무엘하 10:1-5
<설교>
본문의 내용은 앞의 9장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9장에서 살펴본 내용은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푸는 다윗과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는 말로서 크게 감사하는 므비보셋의 반응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얘기가 등장합니다. 2절에 “다윗이 가로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 하고 그 신복들을 명하여 그 아비 죽은 것을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복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라고 말하는 내용을 보면 다윗이 요나단을 인하여 그 아들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푼 것처럼 역시 하눈의 아비 나하스로 인해 하눈에게 은총을 베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하스란 사람이 다윗에게 어떤 은총을 베풀었는지는 성경이 언급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다윗이 이방인으로부터 어떤 은총을 받아야 했다면 그것은 사울에게 쫓겨 다닐 시기가 가장 가능성이 큼으로 그때 도움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뿐입니다.
그런데 이 두 내용은 므비보셋이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는 반응을 보인데 반해 하눈은 다윗의 은총에 대해 의심하고 다윗의 신복들을 조롱한 것에서 서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다윗의 은총이 므비보셋에게는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여진 반면 하눈에게는 거부당한 것입니다.
다윗의 은총을 거부한 것은 죽은 나하스를 신하를 보내어 조상하는 다윗의 호의에 대한 의심 때문입니다. 3절의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그 주 하눈에게 고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 신복을 보내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다윗이 조객을 보낸 호의를 자기들의 성을 엿보고 탐지하기 위한 것으로 의심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눈은 다윗의 신복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의복의 중동볼기까기 자르고 돌려 보냄으로서 다윗의 은총에 대해 조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내용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므비보셋처럼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눈처럼 거부하고 오히려 은총을 모욕하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지 말고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자’라는 다짐 아닌 다짐으로 끝내 버릴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므비보셋처럼 감사와 기쁨의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쉽게 생각하고 넘어갈 것입니다. 즉 ‘나는 절대로 하눈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지 않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하긴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겠다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모두가 은총을 오매불망 원할 것인데 베풀어진 은총에 대해 감히 누가 거부한단 말입니까? 또 누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역시 하눈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본문이 바로 그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와 기쁨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어느 한순간의 감상적 생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순간의 감상적 생각으로 인해 스스로 속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말씀을 들을 때 ‘감사하다. 기쁘다’라는 생각과 느낌이 있다고 해서 ‘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라고 단정 짓는 것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느낌과 생각만으로는 신앙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신자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들 말씀으로 인해 감동을 받고, 예수님에 대해 생각을 하고, 은혜를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니며, 그것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산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고 느끼게 된 것에 내 마음과 삶이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에 개입되지 못하는 것은 그 생각과 느낌이 아무리 신앙적이라고 하더라도 죽은 것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생각과 느낌으로는 은총을 감사하고 기뻐하면서도 정작 삶에서는 은총을 거부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은 보지를 못하고 단지 생각이 있고 느낌이 있다는 것으로 자신을 정당화 한다면 결국 자기 문제를 보지 못하는 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사실은 은총을 거부하는 자로 사는데도 자신은 은총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 대해 본문이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은총을 거부하게 된 원인은 다윗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조문객을 보낸 다윗의 호의를 자기들의 성을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하는 계략으로 의심한 것입니다. 이들이 이러한 의심을 갖게 된 것은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다윗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으며, 다윗과 친한 관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조문객을 보낸 것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호의를 보인다면 그 의도를 의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다윗이 나하스의 죽음에 대해 조객을 보낸 것은 하눈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나하스가 다윗에게 베푼 은총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윗과 자기들과의 관계에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이 자신들에게 그러한 호의를 보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게 될 것이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객을 보낸 호의를 베푼 것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으로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푼 것은 그 아비 요나단을 인해서였습니다. 하눈에게 은총을 베푼 것도 하눈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그 아비 나하스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신 것은 우리와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계산하면서 은총을 평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지 않는데 하나님이 나를 은총으로 대할 리가 없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을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으로 여기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에 있지 않는데 그런 나에게 은총을 베푼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태복음 5:45절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는 분이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는 분입니다.
단적으로 우리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도 복은 내려집니다. 심지어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복은 내려집니다. 아마도 한국교회 분위기 상 이런 말은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십일조 등의 행위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탱을 하고 있고, 그런 관계를 내세우며 복은 자신의 몫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분통이 터질 말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중심사상이며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셔야 할 이유이며, 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복이 내려지는가?’라는 생각에 머물게 된다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로 인해서 베풀어지는 은총을 거부한 것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의심을 갖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무조건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무조건이라는 것이 생리에 맞지 않습니다. 항상 조건을 앞세우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랑을 한다면 사랑할 만한 조건이 있기 때문이고, 친절을 베푼다면 친절을 베풀만한 이유와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도 조건적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총도 받을 만한 사람이 받게 되는 것으로 복도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 주어져 있는 은총에 대해서도 조차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악인들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처럼 악하다는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남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자신을 속이려고 하고 거짓말을 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고,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 악의를 갖고 있을 때 그들이 나에게 선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믿지 않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호의도, 사랑도 조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도 조건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은총에 대해 의심하게 하고 거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께 은총을 베푸신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잘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입니다.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은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총 앞에서는 우리의 그 어떤 행위도 돌아볼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감사하고 기뻐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설명을 잘 들으셨습니까? 그리고 이 모든 말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다 된 것일까요? 앞서 말씀드리기를 신앙은 느낌과 생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시간의 말씀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여러분의 삶에 개입하여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느낌과 생각이 삶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 앞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가 무엇인가는 므비보셋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십니까?’ 이것이야 말로 은총에 대한 최고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과 느낌은 쉽게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반응이 드러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은 죽은 개 같은 자가 누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신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겠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겠습니까?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으로도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비교하고 무시하는 도구로 사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은총을 믿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은총을 말하면서도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무시하고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는다면 그것이 곧 은총을 거부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한가지는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부끄러움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가려주심으로써 은총에 거하게 하셨고, 이 은총을 아는 자로 산다면 누군가의 부끄러움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속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즉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가려주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눈은 다윗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눈은 다윗의 신복들을 모욕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 머물다가 돌아오라고 지시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배려는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웃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욕하지 않게 됩니다. 부끄러운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총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께 베풀어진 은총이 무엇이며 무엇을 근거로 하여 베풀어졌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으로 삶이 다스림 받는 자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이 은총을 받은 자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느낌과 생각이 있으니 신자로 살고 있다는 생각은 스스로의 느낌과 생각에 속는 것입니다. 은총을 거부하는지 아니면 진심으로 은총으로 사는지는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삶에서 여러분의 실체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한 이유
삼하 10:1-5 / 꿈쟁이
들어가는 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습니다. 이 말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요즘같이 한 두 명의 자녀를 키우는 시대에 사용되는 말이 아니라 옛날처럼 10명 이상 낳아서 기르던 시대에 사용해야 어울리는 말입니다.
그러나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열 명의 자녀가 있을 때 더 사랑스런 자녀가 있는 것도 사실 아닌가요? 아무래도 부모 앞에서 예쁜 짓 하면 더 사랑스럽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 중에서 유독 더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더 많이 사랑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그냥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 받을 짓을 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다윗이 하나님께 사랑 받은 이유에 대해서 같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몸말
다윗이 하나님께 사랑 받은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녀가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부모님의 뜻을 찾아 그대로 순종하면 부모님이 얼마나 그를 좋아할까요?
삼하6:3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다윗은 하나님에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궤를 수레를 통해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민4:15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다윗은 다윗의 임의대로 하나님의 궤를 옮기려고 했습니다. 결국 궤는 옮길 수도 없었고 애궂게 웃사만 죽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의 태도가 여기서 끝났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은혜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궤를 옮깁니다.
삼하6: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다윗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잘못을 계속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사랑은 받지 못할 겁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씀하시고 당신의 태도를 바꾸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윗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은 삼하7:2“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다윗의 이런 마음은 하나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나는 좋은 집에 사는데, 부모님은 허름한 집에 산다면 우리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나는 맛난 음식 먹는데 부모님은 거친 음식을 먹으면 우리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나는 유행하는 새로운 패션의 옷을 입는데 부모님은 헤진 옷을 입으면 우리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이런 마음을 부모님이 알면 그 자식이 사랑스럽지 않은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좋은 집을 지어드려야겠다. 그래서 그는 전쟁에서 얻은 은 그릇, 금 그릇, 놋 그릇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삼하8:10하 “요람이 은 그릇과 금 그릇과 놋 그릇을 가지고 온지라”
11절 “다윗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저가 정복한 모든 나라에서 얻은 은금”
12절 하 “드리니라”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말고 혀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자신의 사랑을 보여 드렸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지나친 욕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실 겁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는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요나단에게 입은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만 하면 자연히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에 왕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했고, 아버지의 손에서 다윗을 도와 죽음에서 그를 살려주는 은혜를 줍니다.
다윗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삼하9:1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그는 요나단에게 므비보셋이란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를 자신의 아들처럼 자신의 상에서 같이 먹는 은총을 허락합니다.
삼하9:7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다윗은 사람을 대할 때도 언제나 신의로 대했습니다. 므비보셋에게 행한 것을 보고 어찌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다윗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암몬이란 나라에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옛날에 자신을 도운 암몬의 왕 나하스의 조문을 위해 조문객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암몬의 새로운 왕 하눈은 다윗의 뜻을 잘못 받아들여 조문객을 욕보이는 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삼하10:4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복들을 잡아 그 수염 절반을 깍고 그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생각지 않은 일을 당한 다윗의 분노가 대단하였습니다. 8장과 9장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싸움을 잘하는지를 안다면 이 사건은 다윗으로 하여금 수치감을 느끼게 하는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차분하게 어떻게 대처합니까?
삼하10:5 “혹이 이 일을 다윗에게 고하니라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왕이 저의를 맞으러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
다윗은 지금 자신을 대신에 암몬으로 조문을 하러 갖다 오는 조문객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이 수치와 모욕을 당한 것을 지금 분해하며 그들에게 잠시 쉴 곳을 마련해 줍니다.
다윗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맺는말
마22: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22:37-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다윗이 하나님께 사랑받은 이유를 아시나요?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복은 마땅히 받을 만한 사람 다윗의 차지였습니다. 물론 당신도 그 복을 받을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다윗이 누렸던 복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
삼하 10:5 / 헵시바
2. 다윗의 신하들의 수염을 깎고 경멸고 돌려보냄(삼하10:3~5).
5절. 사람들이 이 일을 다윗에게 알리니라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왕이 그들을 맞으러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
“사람들이 이 일을 다윗에게 알리니라”
“이 일”은 아람 왕 하눈의 관리들이 다윗의 신하들을 경멸하기 위하여 긴 옷을 엉덩이 윗부분까지 잘라 버렸음을 뜻한다.“다윗에게 알리니라”는 히브리어로“나가드”인데 이 말은“앞에 두다, 보이다, 나타나다, 선언하다”을 의미한다. 즉 어떤 것을 잘 보이도록 빛 가운데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어떤 기밀을 누설하다, 죄악을 고발하다, 진술하다”등의 뜻에서 파생되었다.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그 사람들”은 다윗의 신하들을 뜻한다.“크게”는 히브리어로“메오드”인데“긁어모으다”을 뜻하는“우드”에서 유래한 것으로“강함, 힘, 풍부, 크다, 심하다, 열열하다, 대단히”을 뜻한다,“부끄러워 하므로”는 히브리어로“칼람”인데“상처를 입히다, 비난하다, 나무라다, 꾸짖다, 모욕을 주다, 헤치다, 부끄럽게 여기다”을 뜻한다.
“왕이 그들을 맞으러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여리고”는 히브리어로“예리호”인데“달, 월”을 뜻하는“야레아흐”에서 유래한 것으로“요단강과, 사해 근방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한 도시”를 말한다. 여리고는 요단 강 서쪽 약 8Km지점과 예루살렘 동북 약 29Km 지점에 위치한 큰 성읍으로, 요단 강을 건넌 이스라엘이 최초로 점령한 가나안의 성읍이다(수6:21). 오늘날 텔 에스 술탄(Tell es Sultan)이란 곳으로 밝혀졌다.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
“머물다가”는 히브리어로“야사브”인데“앉다, 자리잡다, 머물다, 거주하다, 살다”을 뜻한다.“돌아오라”는 히브리어로“슈브”인데“방향을 돌리다, 돌아서다, 회복하다, 새롭게하다”을 뜻한다. 이말의 본 뜻은“원래의 장소로 돌아가다, 원상태로 회복하다”이다.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신하들에게 여리고에 머물다가 수염이 자라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고 한 것은 저들의 수치를 감추어 주기 위한 배려임에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랍바 성에서 가장 가까운 여리고는 비교적 이스라엘의 변방(邊方)으로서 많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삼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의 이같은 말에는 보다 암시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즉 “머물다가 돌아오라”는 말 다음에는 아무 말이 없긴 하지만 이는 분명 “그 동안에 너희가 당한 수치는 내가 반드시 갚아 주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은총을 거절한 암몬
삼하 10:1~8 / 최대규 목사
자 오늘 우리 사무엘하 10장 말씀인데요. 오늘 말씀을 우리 다윗의 관점에서 하나 그리고 하눈의 관점에서 하나 이렇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다윗의 관점에서 이겁니다.
1. 호의가 전쟁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 호위가 뭐가 된다고요? 전쟁이 된다는 거예요. 다윗이 지금 큰 죄를 범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게 아니라 오히려 다윗이 호의를 베풀었는데 그것이 전쟁으로 돌아왔다는 겁니다. 참 다윗이 얼마나 마음이 참 답답했을까요? 자신이 원했던 계획했던 전쟁이 아닌데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전쟁인 거예요. 그 전쟁을 해야 되는 다윗의 입장이 얼마나 참 답답했을까? 그런데 이것이 크리스찬의 삶입니다. 크리스찬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전쟁을 치르는 존재들이에요.
우리의 싸움이 공중권세 잡은 자의 싸움이기 때문에 원하지 않지만 계획하지 않았지만 그 전쟁 속에 들어가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려고 할 때 굉장히 시비 거는 사람 기분 나쁘게 꼴 보기 싫어하는 세력들이 존재합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을 안 보고 살면 됩니까? 그럴 수가 없잖아요. 원치 않는 상황이지만 이것을 치러야 하는 전쟁이 우리가 해야 되는 전쟁이에요. 그런데 다윗의 이 전쟁이 참 다윗에게는 위기가 됐다고 그래요. 무슨 말이냐면 우리 사무엘하 9장까지 우리가 어떤 말씀 봤습니까?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던 이야기입니다.
자격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원수였던 사울의 손자였던 므비보셋에게 요나단과 했던 언약 때문에 같은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은총을 베풀었어요. 정말 은혜로운 그런 스토리였습니다. 그런데 11장에 보면 그랬던 다윗이 이 전장터에서 떠나 게으름을 부리다가 늦게 일어나서 옥상에 올라가서 누구를 염탐했죠? 밧세바라는 유부녀를 염탐했잖아요. 그리고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밧세바와 불륜을 행하고 그 잘못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그 밧세바의 남편이었던 우리아 충신 우리아를 파렴치한 방법으로 전장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정말 은총을 베풀었던 다윗이 11장에서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라는 다윗으로 보여지게 된다는 겁니다. 이 9장과 11장 사이에 오늘 암몬과의 전쟁 사무엘하 10장의 말씀이 나왔습니다. 이 원치 않았던 전쟁 치르고 싶지 않았던, 계획하지 않았던 이 전쟁이 다윗에게는 또 다른 위기가 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 크리스찬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매일 치르는 답답한 전쟁을 잘 통과하는 것이 영적인 저점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서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오늘 우리 투표했습니다. 투표하셨죠? 투표했어요. 이게 가치관의 전쟁입니다. 이 복음적 가치관과 세속적 가치관에 이 전쟁이 앞으로 되어질 거예요. 우리가 원치 않더라도 그 전쟁을 우리가 해야 하고 그 전쟁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싸움을 우리가 잘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거예요. 자 1절 2절 말씀을 우리가 자세하게 좀 살펴볼 텐데 1절 2절 말씀 읽어보겠습니다.
1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2 다윗이 이르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의 아버지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 하고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보내 그의 아버지를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하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
다윗의 신하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름에 다윗이 나하스라는 암몬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단을 친히 보냅니다. 성경에는 명확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아마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다닐 때에 사울의 대적이었던 암몬 왕으로부터 도움을 좀 받았던 것 같아요.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다윗이 은총을 베풀기 위해서 오라고 한 적도 없는데 이 조문단을 정성스럽게 꾸며서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요.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데는 굉장히 많습니다. 연락 안 하던 가족한테도 연락하고 밑에 집에 찾아가서 "죄송해요. 우리 애들 때문에 많이 힘드시죠?" 라고 하면서 과일도 주고 주보도 주고 왜 그렇게 합니까? 그 은혜를 베풀어 주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곡해하고 왜곡하고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3절 말씀입니다.
암몬 자손의 관리들이 그들의 주 하눈에게 말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당신에게 보낸 것이 왕의 아버지를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의 신하들을 당신에게 보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하니
자, 하눈의 신하들이 다윗의 조문단을 보고 자신들을 염탐하러 온 스파이라고 단정 지어 말합니다. 근거 없는 의심과 오해를 하는데 이걸 해명할 길이 없는 거예요. 이 크리천의 삶이 그겁니다. 다 일일이 해명할 수가 없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하눈은 어떻게 합니까?
4절 말씀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그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그들의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자, 중요한 단어가 있어요.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4절에 하눈이 이에 곧바로 어떻게 합니까? 그 신하들을 잡아서 수염의 반을 깎고 그 당시에는 이것이 굉장히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행동입니다. 옛날에 조선시대에 상투를 자르면 굉장히 치욕스러운 것처럼 그 당시에는 수염을 자르는 것이 치욕적인 치욕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방법이었어요. 그런 것뿐만 아니라 옷의 중동 볼기까지 자르고 엉덩이가 다 보일 정도로 그 옷을 자르고 하체를 다 드러내 보일 정도로 수치를 주고 돌려보냈다는 겁니다. 이렇게까지 사실 할 필요가 없잖아요. 오해했던 건 좋습니다. 의심했던 것도 좋아요. 그런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 참 지혜가 없어요.
좀 생각해보고 물어보고 고민해 보면 되는데 그냥 어떤 이유 때문인지 그냥 젊은 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 신하들 앞에서 이제 갓 왕이 됐으니까 뭔가 내가 왕권을 좀 보여줘야 되겠다라는 그런 마음 때문인지 그렇게 모욕과 수치를 주면서 돌려보냅니다. 그래서 여러분 어떤 말을 들었을 때에 이에 그냥 여러분 혈기대로 이에 그냥 생각한 대로 곧바로 행동하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목장에 물을 새가 없이 바쁜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든 목장에 물어볼 시간은 충분합니다. 아멘이시죠? 물어볼 시간은 충분해요. "아이 목장에 물어볼 큐티할 시간도 없이 너무 긴급한 일이었어요." 그런 일은 없어요. 아멘이시죠? 예. 참 오해를 한 것까지는 참 좋은데 그럼 또 사절단이 왔으니까 그냥 잘 달라고 달래서 얘기를 좀 잘 해가지고 그냥 보내도 됐을 것 같았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말 한마디를 잘 해가지고 돌려보내도 됐을 텐데 그래요. 그런데 우리가 참 말 한마디가 너무 중요한데 이 말 한마디를 지혜롭게 하지 못해서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거나 수치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누굴까? 내 주변엔 누굴까라고 생각하니까 저희 어머니시더라고요. 제가 가끔 저희 어머니한테 전화할 때가 있어요. "어머니 엄마 잘 지내죠? 별일 없죠?" 이렇게 물어보면 여러분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어. 별일 없어" 라고 하든가 별일 있으면 "그래 좀 그래" 이렇게 대답하면 되는데 저희 어머니 항상 "엄마 별일 없죠?"라고 물어보면 저희 어머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니는 내가 별일 있길 바라나?" 뭐가 꼬였어. 사람이 '내가 말을 잘못했나? 별일 없죠가 너무 부정적으로 들렸나?' 이런 생각도 하면서 왜 이렇게 사람이 꼬였을까? 이런 생각도 해보면서 "어? 어머니 그렇게 좀 얘기하지 마. 별일 없죠? 하면 별일 없으면 별일 없어. 이렇게 얘기하면 되지. 니는 별일 있길 바라나? 이게 참 너무 아닌 것 같아요." 요즘은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별일 없어.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아마 그렇게 습관처럼 누군가에게 민망하고 수치를 주는 말이 익숙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말 한마디로 참 너무 사람들을 힘들게 만드는데요. 그런 말을 들을 때 여러분 어떻습니까? 마음이 쉽지 않죠.
다윗의 반응이 뭔지 봅시다. 5절
사람들이 이 일을 다윗에게 알리니라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왕이 그들을 맞으러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
저는 5절에 사실 굉장히 은혜를 받았어요. 5절의 말씀에 지금 다윗의 이스라엘이 굉장히 신흥 강국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는 나라예요. 다윗이 큰 마음을 먹고 암몬이라는 나라에 사절단을 보냅니다. 아무나 안 보냈을 거예요. 굉장히 똑똑하거나 말을 지혜롭게 잘하거나 충분히 암몬의 왕에게 격식 있게 위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서 보냈을 겁니다. 충신을 보냈을 거예요. 사명감을 가지고 그들이 갔을 텐데 그곳에서 진짜 다윗이 아니면 하나님이 아니면 당하지도 않을 인생의 최대의 수치를 당하게 되는 일을 겪습니다.
정말 이게 자기가 진짜 조롱이 '하나님이 아니면 이런 조롱을 당할 수 없어'라고 할 만큼 당하고 돌아오게 돼요. 그때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을 맞으러 보내. 사실 다윗이 심정적으로는 다윗이 막 나가고 싶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러지 않고 다윗이 지금 예루살렘이 있고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못할 만큼 수치를 당했기 때문에 요단강을 바로 건너는 여리고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 다윗이 친히 나갈 수 없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다윗이 자신의 또 사랑하는 신하들을 보냈습니다. 또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다윗이 정말 잘 위로하는 신하를 보냈겠죠. 그래서 그들에게 다가가서 다윗이 그들을 너무 부끄러워하는 그들을 여리고에 머물면서 위로와 회복의 시간을 갖게 해줍니다.
어찌 보면 그들은 이 다윗의 명을 받고 정말 중대한 임무를 갖고 갔다 온 사람들이잖아요. 어떻게 보면 그 임무를 완수하지도 못하고 돌아온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그들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에 너무 은혜를 받았어요. 우리가 사실 이곳에 왔는데 오늘 저녁에 저뿐만 아니라 이곳에 온 성도님들이 우리가 3일 동안 정말 주의 말씀대로 옷을 찢으니라의 그 말씀대로 진짜 내 옷을 찢고 말씀대로 살고 사명 감당하고 임무 완수하고 왔어요? 그러지 않았을 것 같은 거야. 그런 마음으로 직장에도 가고 가족에게도 갔지만 환대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말씀을 들은 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 때문에 오히려 수치와 조롱을 당하고 하나님이 아니면 도저히 참지 않아도 될 일인데 하나님 때문에 겨우겨우 참고 이전에 나왔을 우리 성도님들을 다윗이 그들을 맞이한 것처럼 왕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그 성도님들을 맞이해 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저도 너무 은혜가 되더라고요.
제가 예전에 우리들교회 온 지 한 1~2년 됐을 때 제가 목자가 빨리 됐는데 제가 목장 가기 전에 최대한 부부싸움을 안 하려고 그래요. 왜냐하면, 부부싸움을 하면 우리 와이프가 가서 고발할까 봐. 그래서 어쨌든 이렇게 부부싸움을 안 하고 가려고 하는데 그날따라 저도 사단이 씌었는지 부부싸움을 막 했어. 목장 가기에 1시간 전에. 그런데 와이프가 집을 나가버렸네요. 아 그래가지고 제가 막 전화를 했어요. 왜? 부부목장에 갈 때는 또 같이 가야 되니까. 아무렇지 않게 가야 되니까. 그런데 전화를 안 받아요. 제가 목장에 안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목자니까. 그래서 어떤 집사님 댁에서 했는데 막 띵동 했는데 딱 왔어요. "왜 사모님은 안 오셨어요?" 제가 말하는 게 참 부끄럽더라고요. "싸워서 안 왔습니다. 오늘은 아마 싸워서 안 올 겁니다. 제 전화를 안 받아요."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우리 집사님들이 저를 박수 치며 좋아하는 거예요.
저는 사실 이게 목사의 체면이 있으니까 싸워서 못 왔다. 이게 너무 수치스러워. 그런데 집사람들이 막 좋아하면서 너무 잘 왔어요. 목사님. 목사님 목장에 오셔야죠. 이렇게 하면서. 그랬더니, 아내 집사님, 어떤 목원 집사님 우리 와이프한테 전화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했을 때는 안 받았는데 우리 여자 목원 집사님이 전화를 하니까 받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한 30분 뒤에 저희 아내가 또 왔어요. 오니까 우리 여자 집사님들이 와 잘 왔다면서 막 우리 와이프를 안아주고 너무 잘 왔다면서 원래 부부 목장 하기 전에는 꼭 싸워야 된다고 이런 얘기를 하면서 기억이 탁 나더라고요.
우리가 박수 받을 만큼 잘나서 성공해서 사명을 잘 감당했기 때문에 우리 주님이 맞이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너무 크게 부끄러워할 만큼 내가 과연 돌아가도 되나? 내가 과연 목장에 가도 되나? 내가 우리 목자님을 크게 실망시켰는데 내가 가도 되나? 내가 우리 목사님 참 그렇게 약속했는데 큰 실망을 하게 해드렸는데 내가 가도 되나? 내가 이 예배당에 와도 되나? 크게 부끄러워할 때 주님이 맞이해주러 오신다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이죠. 다윗이 선한 호의로 베푼 그 은혜가 불가피한 전쟁으로 결국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집안에서 자녀들이 치고받고 싸우는 것만으로도 낙담이 될 때가 많은데 백성들의 생사가 걸린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왕의 입장에서는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이 전쟁을 허락하신 것은 끊임없이 사람을 분별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시려는 거예요.
선한 우리의 호의와 선한 은헤 베품이 전쟁으로 오히려 공격으로 오히려 비난으로 돌아올 때는 영적 전쟁이 시작된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싸워서 이겨야 될 것은요. 상대방의 굴복이 아니라 내가 죄에 굴복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이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겼어요. 내일 본문에서 크게 이겼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 본문에선 다윗이 왕궁에서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늘어지게 잠을 자는 거예요. 이겼지만 본인의 죄에 결국 넘어지게 되었어요. 우리는 이겨도 자만하지 않고 져도 낙담하지 않는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 호위 가운데 전쟁을 보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제가 청년부를 섬기니까 청년 목장을 탐방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루는 어떤 여자 청년의 목장에 갔는데 목자가 있고 부목자가 있고 목원들이 있는데, 거기서 20대 초반의 어린 목원 자매였어요. 나눔을 하는데 이 자매가 이렇게 나눔을 하는 거예요. 자기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데 말씀이 잘 안 들리는데 우연히 담임 목사님이 나오신 영상에 OST 영상을 자기가 보게 됐는데 제목이 눈길을 확 끌어서 그걸 다 보게 됐다는 거예요. 그 영상의 제목이 뭐냐면 "싫은 사람 어떻게 해요?" 라는 거였어요. 자기가 너무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영상 제목에 확 꽂혔다는 거예요. 거기서 담임 목사님 말씀하시기를 야곱 얘기였는데 야곱이 미운 사람이 참 많은데 에서도 미워하고 라반도 미워하는데 그런데 정작 야곱의 원수는 에서도 아니고 재물을 빼앗는 라반도 아니고 하나님이 야곱 안에 죄성과 자아와 교만의 이 원수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그 얍복 강가에서 야곱과 하나님이 밤새 씨름을 하셨다라는 말씀이었어요.
그러면서 이기적인 세상에서 이기적인 내 죄성을 보라고 나와 똑같은 이기적인 사람을 붙여주셨다고. 그래서 그 사람이 최고의 기회라고 이 말씀을 봤는데 그 말씀이 이 친구에게 확 들린 거예요. 이 청년이 누구를 정말 그렇게 싫어했을까? 누굴 싫어하길래 그 제목에 꽂혔을까? 이 친구가 아빠가 룸싸롱 다니고 바람피고 엄마랑 싸우는 걸 어릴 때부터 보면서 아빠를 너무 싫어한 거예요. 남자도 못 믿겠고. 그런데 내가 아빠를 싫어하는데 아빠가 돌아왔음에도 계속 그 마음이 사라지지가 않는 거예요. 그런데 내 안에 아빠와 똑같은 아빠의 악함이 내 안에도 있구나. 내가 아빠랑 지금 막 씨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나랑 씨름하고 계시는구나 라고 깨달아진 거예요.
그것이 깨달아지고 난 뒤부터 아빠랑 점점 사이가 좋아졌다 이렇게 나눔을 하더라고요. 20대 초반에 젊은 청년이 나눔을 하니까 목자랑 부목자랑 저도 너무 이미 은혜를 받아가지고, "은혜 받았어. 대박이다." 이러면서 막 박수치고 좋아했어. 야 너 대단하다 이러면서 그러면서 "너는 꼭 믿음이 있는 형제를 여기서 꼭 만나." 제가 이런 얘기를 해줬어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뭐냐면 "목사님 저는 믿음이 있었어요. 옛날에도. 그런데 그때도 믿음이 있었는데, 저는 내 죄를 보고 나서는요. 자기 죄를 보는 남자를 만나고 싶어요." 이러더라고요. "믿음이 있는 남자가 아니라 자기 죄를 볼 수 있는 남자랑 연애할 거예요." 이렇게 얘기하니까 "와 그래. 아 완전." 할렐루야
적용 질문 드릴게요.
- 선의와 호의가 갈등과 싸움으로 돌아온 적이 있습니까?
- 상대방의 마음을 몰라주고 어리석게 행동한 적은 언제입니까?
- 모든 전쟁이 내 속의 원수와의 싸움임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 청년들은 자기 죄를 보는 사람과 교제하고 싶습니까? 한번 스스로 질문을 해보십시오. 첫 번째, 우리 다윗의 관점으로 한번 봤습니다. 두 번째는 다윗의 은총을 거절한 하눈의 입장에서 보겠습니다.
2. 깨달았을 때 회피가 아닌 회개를 해야 됩니다.
사실 너무 뻔한 이야기지만 사실 너무 중요한 말씀이죠. 우리 사무엘하 10장을 우리가 보고 있는데요. 사무엘하 10장에서 하눈이 저지른 많은 잘못 중에 결정적인 딱 한 가지를 고르라고 한다면, 뭘까요? 다윗의 호의를 의심하거나 오해한 것 아니면 다윗의 신하들을 모욕하고 쫓은 것 그것뿐 그것이 아니라 자신이 뭔가 잘못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킬 기회를 버리고 오히려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교만이라는 겁니다.
우리 6절 말씀 한번 볼까요?
암몬 자손들이 자기들이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암몬 자손들이 사람을 보내 벧르홉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 명과 마아가 왕과 그의 사람 천 명과 돕 사람 만 이천 명을 고용한지라 아멘
자 암몬 자손들이 자기들이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그건 알았다. 그냥 단순히 알았다는 게 아니고 이거요. 원어로 보면요. 진짜 완전히 확실히 알았다는 거예요. 확실히. 다윗의 사절단을 모욕한 것이 엄청난 잘못이고 큰 위기를 불러올 거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너무 두려웠어요. 너무 괴로웠어요. 그런데 회개가 안 되는 겁니다.
암몬은 이것을 돈으로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돈을 쏟아부어서 3만 3천 명의 이방 용병을 사들입니다. 그다음에 아람 계열의 연합군들이에요. 그 돈이 자그마치 은 천달란트라고 역대상 19장 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제가 읽어드릴게요.
암몬 자손이 자기가 다윗에게 밉게 한 줄 안지라 하눈과 암몬 자손은 더불어 은 천달란트를 아람 나하라님과 아람 마아가와 소바에 보내 병거와 마병을 삯 내되
한 달란트가 6천 데나리온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일삭 하루에 품삯 6천 데나리온이라고 한다면, 어마어마한 돈이죠. 한 달란트가. 그런데 그것이 천 달란트라고 하니 3만 3천 명을 고용했을 때에 참 어마어마한 돈이죠. 그냥 노동자 하루 품삯, 군인의 하루 품삯도 그냥 한 데나리온이라고 가정을 그냥 했었다고 치면 6개월 치 연봉을 주고 월급을 주고 그들을 사 온 거예요.
회개가 가장 쉽고 가장 저렴한 방법인데 돈으로 해결하려니까 막대한 국가 재산이 들어가게 된 것이에요. 이렇게 우리가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가장 사실은 어리석은 일 중의 하나예요. 오해도 할 수 있고 실수도 할 수 있습니다. 죄도 지을 수 있어요. 그러나 진짜 은총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에 엎드려 회개하는 것이에요. 용서를 구하는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용기가 없다면 엎드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인 겁니다. 그런데 돈이 있으니 돈으로 해결하는 암몬은 하나님의 은총을 거절할 수밖에 없죠. 더불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 다윗을 대적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아람도 하나님의 은총에서 멀어지게 되었어요.
여러분 다윗에게 지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인데 이렇게 생각했겠죠. 다윗의 속국이 되느니 내가 차라리 죽겠다라는 자존심을 부렸을 겁니다. 이 다윗에게 미움이 되는 사건은 영적인 세계에 눈을 돌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건이 돼야 하는데 그냥 미워하는 다윗만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에요. 우리도 어떤 사건을 통해서 가족에게 미움을 받거나 직장 동료에게 미움을 받을 수 있죠.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다른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려고 하라고 하시는 것인데 그냥 그 미워하는 사람만 제거하려고 모든 것을 총동원합니다.
우리 안에는 암몬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총 이것을 말하지만 그것을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보다 내 성벽으로 나를 지키고 내가 할 수 있는 내 용병으로 나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말하기보다 내가 한 거예요. 라고 말하고 싶은 내 안에 의와 교만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안에 그런 암몬의 마음을 주님께 내어놓아야 돼요.
저희 부부 목장에 진짜 너무 똑똑하시고 생활도 너무 바르게 잘 하시고 존경할 만한 게 많은 그런 분이 계세요. 운전도 절대 과속을 안 하신대요. 60km면 딱 60km로 운전하시고 50km면 딱 50km로 운전하시고 이분이 아들과 청년인 아들과 소통을 하고 싶어서 늘 아들이 뭘 좋아할까 이렇게 생각을 한대요. 그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유명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려고 하는데 이 아들을 내가 뭔가 잘 얘기해 주려면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아들한테 얘기해 주기는 너무 쓸데없는 소리를 할 것 같아서 방통대에서 공부까지 하시는 분이에요. 사실 죄 보기가 너무 힘든 분이겠죠. 맞죠? 그래서 이분이 똑똑하셔 가지고 똑똑한 머리로 주식을 하시는데 진짜 하나님의 은총으로 1억을 사기당하셨어요. 그거를 아내가 용납해 줌으로 말미암아 대신에 부부목장에 오기로 약속을 하신 거예요. 1억으로 인해서 아내의 속국이 되어 목장에 지금 매주 끌려나오고 계십니다. 이게 정말 하나님의 은총인 거예요.
그게 아니면 부부 복장에 절대로 나오실 분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얼마나 좋으신 분인데 똑똑하시고 그분에겐 1억을 번 게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 오히려 1억을 날려버린 것이 하나님의 은총인 거죠. 만약 그분이 1억을 버셨다면 암몬처럼 목장 가자는 아내와 더불어 싸우자고 온갖 것을 다 동원하면서 사셨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우리도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다 나오잖아요. 우리도 1억을 벌었으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라고 나왔을까요? 우리도 어쨌든 빼앗기고 낮아지고 들춰지고 수치를 당하고 용병이 아닌 나도 쓸 곳이 없는 그런 처량한 신세가 되니 하나님의 은혜의 속국 안에 들어와 그렇게 우리가 가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비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전에 나왔는데요. 이전에 하나님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가 잘 했기 때문에 잘하기 때문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개의 기회를 얻고 또 우리 가운데 다윗의 신하들처럼 하나님 위로와 회복의 시간을 주시기 위해 이 자리에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적용 질문 드릴게요.
- 최근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거나 인간관계의 위기를 겪고 있는 일이 또 있으십니까?
- 그 위기 앞에서 세상적인 수단으로 회피하십니까? 아님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기회로 삼고 있으십니까?
- 하나님께 온전히 엎드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내가 의지하고 있는 세상에 용병과 견고한 성벽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정리합니다.
호의가 전쟁으로 이어져도 놀라지 마십시요. 진짜 이겨야 하는 전쟁은 내가 믿음으로 서는 것입니다. 내가 죄와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내 잘못을 깨닫고도 돈과 세상 수단이라는 용병을 사서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려다 파멸한 암몬의 길에서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다윗에게 베푸셨던 그 은총이 우리 가운데도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 찬양하면서 우리를 살피시는 주님께 영광 올려드리며 우리 기도하겠습니다.
은총에 대한 오해
삼하 10:1-5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오해가 생겼다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호의를 베푸는데 암몬 왕인 하눈은 마치 자신의 나라를 치기 위한 스파이를 파견하는 그런 적대적 행위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전쟁이 일어나서 17-18에 보면, 그 암몬이라는 나라가 대패를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매 그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또 그 군사령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과연 사람간의 사소한 오해가 이런 파탄을 야기할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보통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인간은 다른 인간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작용하게 됩니다. 이 언약 작용으로 인해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 사람 대 하나님의 관계로 확대가 됩니다.
예를 들면, ‘개’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그 개념에 맞는 개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냥 삽살개, 진돗개, 셰퍼드, 달마시아 같은 개들이 있을 뿐입니다. 이들을 한데 집결해서 말하기를 ‘개’라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있습니다.
철이, 영희, 순희, 동영이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모아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사람들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에 의하면 다윗이라고 하더라도 대단한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약을 내리시는 하나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담’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아담이 행하는 모든 것은 나머지 모든 인간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적도 없는 우리 모두는 선악과 따먹은 그 벌을 다같이 받게 됩니다. 이런 관계에 있는 아담은 ‘보편적 단독성’이라고 합니다. 단독성이란 ‘한 사람’을 뜻하고, ‘보편성’이란 그 뒤에 튀는 사람없는 숱한 일반 사람들이 붙여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뒤에 얼마나 많은 인류들이 태어났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묵묵히 아담만 상대하십니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하든지 간에 우리 조상되시는 아담이 저질러놓은 죄의 구조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죄의 구조 안에 갇힌 꼴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눈에 의하면 다윗은 그냥 보통 사람일 뿐입니다. 결코 다윗의 끝에 아담이 있고 그 아담의 끝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서 ‘아담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통한다’는 사실을 보통 인간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각자 자신들이 알아서 하나님과 통한다고 보는 겁니다. 이런 인식으로 인해 하눈은 다윗의 ‘보편적 단독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 말고 다른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비로소 아담이 갖고 있는 보편적 단독성이나 다윗이 갖고 있는 보편적 단독성의 참 내용이 그들 내부에서 펼쳐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서 다윗이 베풀어주는 것은 단순히 사적인 동정심이나 배려 차원이 아닙니다. 다윗이 베푸는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로서 베푸는 것이라고 효력이 있는 동시에 그 은혜를 거절하는 것은 단순히 다윗에게 징벌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식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복음을 믿는 자들의 복음 전달을 거부하는 것은 천국에 도저히 들어갈 수 있는 인물임을 확인하는 과정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눈이라는 작자와 지난 번에 나온 므비보셋의 존재를 비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 다 다윗이 어려워했을 때에 도움을 준 집안입니다.
므비보셋의 아버지 요나단으로부터 다윗은 혜택을 입었으며 하눈의 아버지 나하스에게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상 21:10에 보면,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다윗은 보답을 하기 위해 찾아갔지만 사람들은 다윗의 위상을 일반인들과 같은 것처럼 오해한 것입니다.
하지만 므비보셋은 다윗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였습니다. “나 같은 개 같은 인간을 돌아보시나이까?” 그런데 하눈은 결코 이런 고백을 해내지를 못합니다. 자존심 때문입니다. 자기 구조, 자기 세계를 따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행하는 의로운 행위를 의롭다고 인정해달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바로 므비보셋과 같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따로 고수하겠다는 비복음적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하눈의 이러한 은혜에 대한 배반은 출애굽기 1:8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조들이 받은 은혜를 후손들이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과의 대표자가 아님을 알지 못하고 선조들, 즉 보편적 단독적과 자신과의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사람들은 다윗이 하눈을 미워서 전쟁하는 줄 알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눈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하눈은 그 은혜를 짓밟고 모독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미워합니다. 하지만 실은 그런 미움을 드러내는 그 모든 행위도 실은 예수님이 주신 은혜의 힘으로 합니다. 이런 은혜를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므로 모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에 지옥에 간 그 어떤 인간도 주님을 미워하지 못하고 자신을 미워하게 됩니다. 주님에게 대드는 것이 아니라 후회합니다. 왜 그동안 받은 은혜에 대해서 예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자기 영광을 돌렸느냐 하는 식으로 후회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천국 뿐만 아니라 지옥에서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지옥에 속한 자들이 주장하는 협박이나 미움에 두려워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그들과 우리 사람에는 골짜기가 있어서 우리가 저리로 건너 갈 수 없고, 저들도 우리 있는 곳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천국은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같이 미천한 자들에게 대해 베푸시는 은혜를 우리가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