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히딩크감독이 태어난 나라(네델란 도)의 아름다운축구에 관한 얘기네요.
수년전 어느외신기자의 글이므로 히딩크가 우리나라감독으로 부임하기 전의 글이구요. 우리랑 붙을 독일의 골키퍼 칸의 얘기도 나오는 군요.
요즘 히딩크를 여러가지면으로 매스컴에서 보여주긴하지만
사실 결과에 따른 해석이 농후할거 같아 객관적인 면에서 떨어진거 같구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역시 축구를 볼줄 알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구요.
그중에서도 히딩크가 태어나고 자란 네델란드에서의 축구는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도 좋을거라 생각되네여.
지나고 보니까 하는 얘기지만
참 엄청난 일들을 저지르도록 만들었네요.
애들에게 악마가 되라고 옷을 사입혀주는 나라...
악마들이 휴지줍기, 질서지키기하는 나라...
이런 악마들 첨본다 하면서 "대~한민국", "오 필승코리아"외치며 "아리랑"가르쳐 달라는 외국인들.
파리악마, 워싱턴악마, 토론토악마, 도쿄악마등 전세계의 악마들의 활약에 바싹긴장하고 있는 수많은 평양악마들.
암튼... 축구는 축구일뿐이라고 말하기에는 황당무계한... 그러면서도
파지티브 포인트(Positive point)가 극에 달하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 연출이 각본과 시나리오가 없이 완벽하게 전개될 수 있음에 세익스피어의 비극에 일격을 가하는 순간인것 만은 확실한것 같습니다.
어쩌면 로마가 태어나서 사라지는 일보다 확률적으로 따져보면 더 힘든일이 벌어지고 있는것은 아닌지... ^^
서두가 길었습네다.
그럼 아름다운 축구- 네델란드로 가보시지요.
(번역된 글)
It's the taking part that counts
내가 네덜란드로 이사한 1976년 10월 나는 7살이었고 이 나라에 대해서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나중에 깨달아 안 사실이지만 그 때는 유명한 Golden Age (네덜란드 축구가 세계에 그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하던 1974~1978 사이. 그때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를 중심으로한 토탈풋볼의 신화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었죠-역자 주)의 한 복판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Leiden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일하게 되면서 저희 가족은 작은 테라스와 커다란 창문을 가진 전형적인 네덜란드식 거리의 한 작은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이 큰 창문으로 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은 집안에서 일어나는 어떤일도 쉽게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이 영국인 기자는 네덜란드사람들의 개방적이고 리버럴한 전통을 영국인의 패쇄적이고 보수적인 태도와의 대비점을 가옥에 대한 소개를 통해서 암시라려는 것 같습니다 역자 주). 네덜란드에서의 첫날 저녁, 저는 저의 동생과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곳의 어린이들과 만나려고 하였습니다. 그 어린이들은 우리를 놀림조의 노래로 환영하였습니다.'Crazy boys, crazy boys!' 이 말은 아마도 그들이 알고 있던 유일한 영어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곧 우리는 레귤러 멤버로 받아들여저서 거의 매일 벌어지는 길거리축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전에는 거의 축구를 해보지 않았고 제가 기억하는 거의 모든 런던의 친구들 누구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Leiden에서는 누구나 축구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세계최고의 축구강국이었습니다.1974년 네덜란드는 지금도 세계가 기억하는 토탈풋볼로 결승에 진출하였습니다. 라틴계 사람들은 이 새로운 축구를 'la naranja mec?ica' 라고 불렀으며 이는 시계추처럼 돌아가는 오렌지팀이라는 뜻이 됩니다.세계는 그을의 등장을 경외의 눈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다음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도 네덜란드는 다시 결승에 진출하여 홈 팀(그나라를 통치하던 무장군인과 장군들로 꽉 들어찬 경기장에서)을 맞이합니다.
1-0으로 뒤지고 있을때 화회상인들이 주름잡는 북부 네덜란드출신 Dick Nanninga 라는 선수가 자신감에 넘쳐있던 아르헨티나의 골네트를 헤딩슛으로 가릅니다. 저는 아직도 그 이웃집들에서 터져나오던 환호성을 들을 수 있을것만 같습니다.경기는 3-1 아르헨티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만 ...
저는 네덜란드를 1986년에 떠났습니다. 저는 지금 네덜란드를 오직 하나의 관심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유로 2000 에서 저는 네덜란드를 응원할 것입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수 천만의 사람들이 자카르나에서 Timbuktoo(어느 나라의 도시인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역자)에서 이 작은 나라 네덜란드를 응원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나라에 대해서 축구팀외에는 거의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 모든 응원의 이유는 단지 네덜란드가 경이로운 축구팀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네덜란드의 우승은 우리 축구관련 출판업자들의 첫번째 선택이기도 합니다(이 기자의 직업의식이 여기서... 역자). 중요한 것은 네덜란드는 아름다운 경기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올 2월 네덜란드와의 친선경기에서 망신을 당한 독일 골키퍼 Oliver Khan은 말하기를 "오늘 우리는 유럽의 최강팀과 경기를 가졌다.네덜란드의 완벽한 축구선수들을 볼 때마다 그들과 경기를 하는 것은 완전히 미친짓처럼 느껴진다"
17세기에 네덜란드는 수많은 천재화가들을 길러냈습니다. 이제 높은 인구밀도에도 불고하고 고작 1600만인 나라는 세계적인 축구선수들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의 성공비결을 말해 볼까 합니다.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아 저는 거의 모든 소년들이 축구클럽에 가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구가 겨우 십만을 넘는 Leiden의 십여개 클럽 중 하나는 21개의 성인 팀과 11개의 8세미만 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축구를 하지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제 동생과 저는 Ajax Sportman Combinatie라는 1892년에 설립된 클럽에 가입했습니다 이 클럽은 한때 네덜란드 최고클럽 중의 하나였고 아직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더이상 훌륭함들 내세울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저를 실망시키는 요인은 아니었습니다.매주 토요일 저는 아침 7시에 일어나 클럽 축구장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출입문은 잠겨있었지만 저와 저의 팀 소년들은 그것을 흔들며 마침내 누군가 도착하여 문을 열어줄 8 시까지 기다리곤 했습니다. 그다움에 우리는 클럽의 보조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며 우리의 경기시간까지 기다렸습니다. 경기후 우리는 클럽주위를 떠나지 않고 우리와 경기할 다른 팀을 찾곤 했고 모든 경기를 끝낸 후엔 팀원 중 하나의 집으로 가서 뒷마당 경기를 했습니다. 비 때문에 경기를 할 수 없을 때도 우리는 클럽경기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실내 축구장에서 우리는 많은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비오는 날 쿨럽은 우리에게 1974,1978 월드컵 경기를 녹화해 보여주곤 했습니다.거의 모든 네덜란드 소년들은 저처럼 축구와 함께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천사백만을 조금넘는 당시 인구에 네덜란드는 백만명의 등록된 선수들이 클럽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어떤 나라도 이 비율에 근접하지 못했습니다.Franz Beckenbauer는 헬리콥터로 네덜란드를 날아보고 나서 이 작은 나라의 국토가 거의 축구장으로 뒤덥혀 있다는 사릴을 깨다고 비로소 네덜란드 선수들의 우수성의 근원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어린이들 모두가 축구를 한다는 것이 놀랄 일도 아닌 것이엇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ASC 클럽에 매년 약 400 파운드를 지불했고 그 댓가로 저와 저의 동생은 거의 클럽에서 살다시피 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일주일에 두번 씩 우리는 길고 엄격하기로 소문난 코칭스쿨을 마친 코치들로부터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 중 한명은 프로선수출신이었습니다.우리는 완벽하게 관리된 구장에서 축구를 했습니다 물주고 잔디깍는 정성은 한마디로 광적이라고 할만 했습니다.사실 축구는 네덜란드에서 사회적 민주주의의 시금석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영국축구팬은 서로만나 "어느클럽을 응원하십니까?" 라고 묻지만 네덜란드 팬들은 "어느 클럽에서 축구하십니까?" 하고 묻는다. 네덜란드에서는 선수가 최우선이며 팬은 나중이다. 저는 한 때 Boudewijn Zenden 에게 물었습니다"어릴 적에 어떤 클럽을 응원하셨습니까?" 그의 대답은 "아무클럽도 응원하지 않았습니다"였습니다.그는 Barcelona 클럽팀과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에서 뛰고있습니다.(네덜란드의 왼쪽 미드필더 기억하시지요? 역자}.그는 어린시절 이미 누구의 포스터를 자기 방 벽에 붙이지 않고 직접 축구를 하는 선수였던 것입니다.
영국에 돌아왔을 때 저는 많은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웅원하는 팀의 경기를 매주말 빠뜨리지 않고 보지만 직접 플레이하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영국에서 축구할 기회를 잡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결했습니다.Margaret Thatcher 수상(유명한 우파 보수당 출신 여성 수상으로 2차 대전 이후로 영국사회의 자랑이던 사회보장제도를 공격하고 노동자및 저소득자들의 생활보호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2회연속 집권에 성공함. 영국병치유를 위한 의사를 자임하며 자신의 대기업편향 정책을 정당화하였고 10여년 후 김영삼의 한국병 치유론의 오리지날 버전으로 평가됨. 로날드 레이건과 함께 현재 전세계를 계층대결의 각축장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짐.역자주)시 학교 축구장이 많이 상업용 부지로 팔려 나간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1981년 부터 1997년 사이에 약 5000개 학교 축구장이 팔렸으며 이는 주택단지와 상가등으로 재개발되었습니다.
이 이외에도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Liverpool 과 District Sunday League는 축구경기장 관리위원회가 경기장 임대료를 올림에 따라 약 절반의 축구팀들을 잃었으며, 축구선수들은 먼 곳에 있는 축구장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갈아타는 일과 진흙탕에서 뛰는 것에 질력이 났습니다.
저는 지금 런던 중부에 살고 있습니다. 몇 마일 안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살고있습니다만 그들이 즐길수 있는 축구장은 인구 십만의 시골도시Leiden 보다도 적습니다.영국이 축구에 더이상 강국이 아닌 것이 놀랄일이 아닌 것입니다.
은퇴한 골키퍼이자 소설가인 Albert Camus는 말했습니다. "내가 가장 확신하는 도덕의 덕목과 남자로서의 의무는 축구를 통해서 배웠다"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내가 아는 가장 확실한 네덜란드는 축구를 통해서 배웠다.축구경기에 참여하는 것은 교육이었다" 우리는 해안지역출신 팀들과 경기를 하곤 했습니다 이 지역들은 독실한 기독교전통이 강한곳으로 호밀빵과 생선 그리고 낙농제품만으로 이루어진 식생활로해서 막 11살짜리 소년들임에도 180cm를 넘는 선수들이 많았습니다.Edwin van der Sar, 현 네덜란드 대표팀의 장신 골키퍼도 이런 클럽 출신입니다.
좀 더 내륙지역은 화회재배 및 수출로 백만장자가 된 지역 농부들이 많은 곳으로 지역 팀들은 매 경기 수천명의 관중을 끌어들입니다. 일급선수들은 엄청난 연봉을 클럽으로부터 받으며 그래서 그들은 프로로 전향하는 것을 거부할 정도입니다.그들은 프로가 되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손실로 여깁니다.
각 클럽은 항상 구별되는 문화를 가지고 있고 축구경기는 이런 문화집단들의 경쟁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화회재배지역,청교도 지역,네덜란드 서인도인 지역 등등.
네덜란드는 클럽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클럽활동을 위한 충분한 여가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1970년대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상당 수는 의사에게 가서 스트레스 혹은 피곤함을 호소하거나 등에 가벼운 통증을 상담하고나서 조기퇴직을 권고받은 사람들로서 마지막월급의 70%를 종신토록 지급받도록 조치되었습니다.그 당시 아직 일을 하던 사람들도 일의 강도는 극히 미미하였습니다. 심지어 요즘도 네덜란드의 모든 사무실은 오후 5시면 어김없이 텅 비어버립니다.저의 아버지는 보통 점심식사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오후시간을 집에 머무르면서 혹시 동료들이 볼까하여 눈치를 살피곤 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밖으로 나갈 때는 cricket경기를 하셨습니다.
모든사람들은 이런 시간을 축구를 위해서 썼습니다. 직접 축구경기에 참여하는 것은 클럽에서 시간을 보내는 한 가지 방법일뿐입니다 많은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들의 가장 중요한 직업이 클럽의 회장이 되거나 기구 및 구장 관리위원회에 참여하는 의원이 되거나 열네번째 팀을 코치로서 지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럽문화는 네덜란드에서는 어디에나 있습니다.제가 속해 있던 Ajax Sportman Combinatie(ASC)클럽은 네덜란드에서 최악의 클럽 중의 하나였으나 그 명칭으로 해서 최상의 팀인 Ajax와 연계되었습니다.
Ajax of amsterdam이 설립되던 1900년 이 클럽의 대표들은 우리클럽에게Ajax라는 명칭의 사용을 허락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우리클럽은 100년후에 결정을 재검토할 것이라는 조건하에 그 명칭의 사용을 허락했습니다. 슬프게도 100년 후가 되는 올해 밝혀졌지만 ASC는 답장편지를 잘못된 주소로 보냈으며 결국 Amsterdam의 Ajax는 그 이름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Ajax of Amsterdam는 70년대까지는 ASC와 같이 평범한 이웃동네 클럽에 불과했습니다. 그냥 세계최고의 이웃동네 클럽이었죠 .
Ajax는 주전의 대부분이 지역출신들로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European Cups을 3회 연속 우승하게되었습니다(1971~73).
투철한 사회주의자이며 당시Ajax centre-back이었던 Barry Hulshoff는 많은 해가 지난 후에 그리스의 시골 산골마을에서 한 노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Hulshoff는 회고하며
"그는 나의 손을 잡고 울었습니다. 그는 약 5분 정도 울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챙피했고 무엇때문에 그 노인이 우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나의 통역관이 설명하기를 그 노인은 아약스의 팬이었지만 시골 마을에 TV가 없어서 산길을 2 시간이나 걸어 가장 가까운 곳의 TV있는 곳으로 가야했다는 군요. 그런데 그때 아약스 선수중의 한명이 자기 앞에 서 있어서 그것이 감격스러워 울었다더군요"
그 그리스 노인이 본 선수는 암스테르담 동부출신이다.아약스 아웃사이드 래프트 풀백 jaak Swart과 아웃사이드 라이트 백 Piet Keizer 는 아약스의 구 구장에서 얼마 멀지 않은 거리에서 함께 자랐다.센터 포워드 Johan Cruyff는 아약스 첫번째 팀의 연습을 지켜보기위해 구장을 매일 찾던 어린 소년이었다.
지난 12월 나는 구 야약스 스타이움 뒤 아이스링크 이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Swart를 만났다."몇일 전 나는 구 아약스 홈구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는데
Johan 과Pietje 가 앉아 있었지요. 나는 "위대한 공격라인이 여기에 있었군"하고 소리쳤어요" 그들 모두는 커피를 나누었다.
네덜란드 선수들은 클럽문화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어서 스타플레이어들은 은퇴하자마자 하위 클럽팀에서 새로운 아마추어생활을 시작하곤 한다.
Swart는 아약스에서 은퇴한 이후 거의 20년 동안 아마추어 축구를 하고 있다.
70년대 후반 아약스의 스타플레이어Wim Meutstege는 나중에 ASC에 가입하였으며, 또 다른 아약스 출신으로 현 네덜란드 국가대표 감독인Frank Rijkaard는 그의 고향 클럽인Abcoude 에서 아마추어로 뛰고 있다.아직 37살인Rijkaard는 "우리 팀은 훌륭합니다, 모두 친구들이죠. 한시간 반동안 축구하고 뛰고 뒤쫏고 하아보면 땀을 흘리게 되고... 정말 환상적이죠. 뭔가 한 뿌듯함이 느껴지고 클럽매점에 가서 맥주 한 잔을 하며 경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가끔씩 좋은 상대팀을 만나 경기를 하지요 농담도 곁들여 가면서. 저는 이 이상 바라는 거 없어요"
이번 겨울 저는 Rijkaard의 동료였던Ruud Gullit가 암스테르담 클럽팀인AFC의 5번째 팀에서 경기하는 것을 봤습니다.상대팀은 OSDO라고 불리는 삼십대 클럽팀이었고 관중은 20명 남짓 이었습니다.
하프타임때 Gullit의 팀은 5-0으로 지고 있었지만 마지막에 5-3으로 경기를 마쳤습니다.그렇지만 그는 행복해 보였습니다. 한 두번 그는 득점기회를 갖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볼을 완전히 놓치곤 했습니다. 경기후 그는 모두와 악수를 나누고 흑인 여성 주심에게 축하의 말을 건냈습니다. 그가 경기장을 나서면서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는 혼잣말로 "후반전은 우리팀이 더 잘했어"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거의 모두가 축구를 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는 네덜란드의 성공을 설명할순 없다고 생각합니다.70년대까지 네덜란드 축구는 중급수준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끔 룩셈부르크에게 지기도 했고 그들의 주된 라이벌은 벨기에였습니다.그들의 성공에는 Johan Cruyff의 역할이 컸습니다.그러나 이 사실을 이해하는데 저는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야했습니다. 1976년 10월, 제가 처음 이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Cruyff는 무대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Barcelona에서 뛰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뛰지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는 78년 은퇴했습니다.
그 후 그는 돼지사육사업에서 모든 돈을 잃고 미국에서 다시 선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 대한 회고의 글을 그가 아약스로 돌아오던 81년 12월까지 쓰지 않았습니다. 거의 24년 동안의 줄담배와 발길질에 멍든 이 작은 체구의 사나이는 그후 3년동안 주말마다 경기장에서 저를 놀라움으로 떨게 했습니다.저는 1982년 12월 5일 Helmond Sport와의 경기에서 그가 보여준 페널티 킥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평범하게 차는 대신 그는 좌측전방 페널티 에리아로 달려들던 포워드Jesper 에게 패스하고 그로부터 리턴 패스를 받습니다.
상대 골키퍼는 물론 Olsen쪽으로 쏠려 있어서 그는 무방비의 골넷으로 슬쩍 볼을 밀어 넣었지요.Cruyff는 네덜란드 축구선수들을 규정하는 힘입니다. 그와 플레이를 한 경험이 있는 Gullit와 Rijkaard 를 비롯해서 유로2000 경기에 나올 국가대표팀 그리고 ASC에서 축구를 하던 우리 모두를 말입니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그러나 매우 중요한 변화에 대한 그의 영향은,적어도Leiden에서는, 바로 우리모두가 축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그가 바로 축구를 학구적 토론의 대상으로 만든 장본인입니다."축구는 머리로 하는 게임이다" 언젠가 그가 한 말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축구를 이런 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언젠가 저는 Gullit에게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그리고 영국을 축구에 관하여 비교해 보라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그는 말했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탈의실에서 모든 선수들이 자신 개개인이 가장 축구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이태리에서는 탈의실에서 선수개개인이 축구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도 메니저에게 감히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 영국선수들은 탈의실에서 그저 농담이나 할 뿐입니다" 저는 영국의 이사들과 아르헨티나의 장군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mafiosi들과 인터뷰를 해 왔습니다만 가장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네덜란드 축구선수들이었습니다.당신은 그을과 한시간 반 동안 이야기하며 당신이 생갹할 수 있는 모든 질문들을 물을 수 있고 마침내 당신의 녹음기를 껐을 때 그들은 보통 30분 이상 더 당신을 잡아 둘 것입니다. 제가 Sjaak Swart와 인터뷰 할때 그는 처음에는 시간이 없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겨우 제가 그의 말을 자르고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말했습니다 "여기 커피 한 잔 더 줘요 아가씨 "
나는 이번 유로 2000에서 네덜란드를 응원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가장 천부적으로 축복받은 팀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우승하지 못할 것을 예상한다.그것은 네덜란드인에게 승리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실을 10년 전 내가 나의 축구팀을 이끌고 네더란드 원정을 떠났을 때 깨달았다. 우리 팀은 원정 첫 경기를 8-0으로 이겼다.경기후 경기장 내 주점에서 상대팀 선수 한 명이 맥주 잔들 넘어로 나에게 말했다.
"물론 우리팀이 당신 팀 보다 더 낳은 축구를 했다" 그것은 자신의 팀이 더욱 잘 조직되었고, 열심히 생각하는 축구를 했으며, 전체적으로 더 아름다운 게임을 했던 반면 우리는 단지 더욱 힘이 쎄었다는 의미의 말이었다
그의 말은 넌센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반적인 네덜란드인의 축구에 대한 관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 낳은 축구" 가 승리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더 낳은 축구"는 패싱이며 생각하는 플레이이고 이는 Cruyff에 의해 발명된 발레같은 축구와 맞닿아 있다. Cruyff는 '실재로는' 네덜란드가 1974년 월드컵에서 우승했다고 말한바 있다 비록 결승에서 졌지만. 어떻게 ? 흠 Cruyff의 관점에 의하면 모두가 아름다운 네덜란드의 플레이를 기억하지 결승전의 스코어를 기억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라고 했다.(너무 멋있다....-집주인)그것이 스코어라는 조잡한 잣대보다 더욱 중요한 승리이라는 것이다. 98년 월드컵 아름다운 경기 끝에 준결승까지 올랐던 오렌지팀 코치Guus Hiddink은 나중에 일갈한다"당신은 우리의 스타일, 우리의 축구철학이 세계에 감명을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그것이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며 설혹 우리가 월드컵에서 우승했더라도 만약 그 스타일이 나빳다면 나는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승리만을 위해 모든것을 희생하는 플레이, 아마도 이탈리안스타일??역자 삽입) 짓을 할 수 없었다"
다른 어떤 나라의 국가대표감독도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Rijkaard 는 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싶다고 말했다.이번 여름 만약 오렌지 팀이 갈채와 찬사뿐 우승없이 끝나게 된다면 그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우승하던 그렇지 못하던 그는 올 가을 Abcoude 클럽 팀에서 다시 볼을 쫏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