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령산
타워전망대
강 문 석
부산 한복판에 위치한 황령산은 조망이 빼어나기로 소문났다. 산을 올라 정상에 서면 동서남북 사방으로 펼쳐지는 시가지의 마천루는 물론 해운대를 비롯한 부산항 등 해안선도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서울에 남산이 있다면 부산엔 황령산이 있다. 하지만 도시가 비대해지면서 어느 때부터 황령산은 부산의 동서간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느껴진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시원스런 조망에도 황령산은 관광객을 제대로 유치하지 못하자 그 해결책을 놓고 그동안 논란이 분분했다. 급기야 부산시에서도 서울 남산처럼 전망타워를 세우면서 산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도 설치하려고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환경단체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곤 했었다.
금년 초 지역신문 B일보에《황령산 타워전망대》기사가 큼지막하게 나왔다. ‘아! 탈도 많고 말도 많았던 황령산 타워전망대가 드디어 들어서는구나…. 그래, 나 같은 늙은이도 타워에 올라 부산의 변화된 풍광을 볼 수 있겠구나!’ 했었다. 그런데 신문기사에는 부산시 관계자의 언급은 없고 사업을 시공하겠다는 건설사의 복안만 들어있었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만 마신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바로 "B일보의《황령산 타워전망대》는 부산시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된 바 없다"는 전날 기사 반박문이 실렸다. 설계상 타워전망대 건물 높이는 하부시설을 더해 105m로 황령산 해발고도까지 합하면 타워정상 해발고도는 493.6m에 달했다. 서울 남산타워 479.7m보다 더 높았다.
살아오면서 사진에 몰입하다보니 조망이 탁 트인 곳을 즐겨 찾는 편이다. 하지만 쓸쓸한 인생황혼에 황령산 찬가를 부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산에 얽힌 미련으로 황령산을 찬미해 봤자 더 궁상맞을 것만 같다. 그 대신 산자락을 돌면서 생활한 추억의 편린들을 떠올려 보고 싶다. 반세기 전 결혼 초엔 산의 서쪽 자락 전포동에 살았다. 직장에서 거리가 가까워 걸어서도 오갈 수 있어서였다. 전셋집은 바로 산 밑이었는데도 과중한 업무 때문이었는지 한 번도 황령산을 오른 기억은 없다. 그땐 직장의 인력도 적었고 동호인 서클 같은 것도 생기기 전이었다. 전세든 집 2층은 별도의 출입구로 통했다.
당시만 해도 밤손님이 극성을 부리던 때라 결혼하면서 새로 구입한 카메라장비와 옷들까지 몽땅 잃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대구에 사는 친척 어른들에게 인사차 다녀오느라 집을 비운 밤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웃사람들 중엔 당시 야밤에 동네 골목을 지키는 방범대원들이 초저녁부터 불이 꺼진 집을 골라 그런 짓을 한다면서 자기도 도둑맞은 옷을 방범대원이 입고 돈을 징수하러 왔더라는 말을 들려주었다. 도난신고를 받은 파출소장은 주인집을 통하지 않는 단독 출입구도 밤손님에게 취약하다는 것을 일러주었다.
88서울올림픽이 열리던 무렵엔 부산진구청 민방위교장이 전포동 황령산 밑자락에 들어섰다. 8백여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훈련장 건물은 황령산 속을 절반이나 파고들어가 여름엔 시원했고 실내구조도 체육관처럼 천장이 높았다. 당시 민주화를 잘못 이해한 민방위대원들 중엔 대낮 교육시간에도 술에 취해 복도를 휘젓고 다니며 비틀거렸다. 성격이 까다로운 나는 그런 대원들을 너그럽게 봐 넘기질 못해 강단에 설 때마다 스트레스를 다스리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산의 남쪽 광안동엔 부산시지방공무원연수원이 있었다. 매월 가가호호를 돌면서 전기사용량을 체크하던 전력회사 검침원들이 정부시책에 따라 수도와 도시가스까지 통합하면서 공무원 신분이 되었다. 공기업에 몸 담은 사람이 통합공과금 검침원들을 교육하느라 공무원연수원을 드나들었다.
직장 은퇴한 다음해 봄 신학기엔 황령산 북쪽 중턱 D전문대에서 출강요청이 있어 10년 넘게 인연을 맺었다. 강의가 오후까지 이어지는 날은 일찍 점심을 챙겨 먹고 산을 올랐다. 학교가 높은 곳에 자리잡아 약간만 오르면 시가지 절반이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았고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까지 들었다. 황령산 자락은 한창 젊은 청춘에 인연을 맺어 반백년 세월이 꿈같이 흘렀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들어 당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고난도 젊음은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게 힘을 주었다. 부산엔 금정산을 비롯하여 다른 명산들도 많은데 왜 유독 황령산 밑으로만 맴돌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믿지 않는 산신령이라도 있어서 사람을 끌어들였던 것일까.
작년 초가을 해운대에서 차를 몰고 귀가하다가 남천동에서 예정에 없던 황령산을 올랐다. 모처럼 황사가 걷힌 파란 하늘이 나그네를 산으로 유혹한 때문이었다. 이태 전 직장 은퇴자모임 산우들과도 종주했던 코스라 등산로는 낯설지 않았고 오르지 않았던 동안 주차장 공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조망이 좋아서인지 평일 한낮인데도 정상 부근엔 젊은이들이 여럿 보였다. 밤에 황령산을 한 번도 오르지 못한 나로선 홍보용 안내판에 붙은 사진으로 이곳 야경을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던 정상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동안에도 세우지도 않은 황령산타워가 서울 남산타워와 교차되면서 눈앞에 어른거렸다.
서울 남산을 비교적 자주 오른 것도 조망 때문이었지 싶다. 서울역에서 열차시간에 여유가 생기면 오르던 남산을 동서울버스터미널에서도 찾아갔다. 서울에 처음 발 디뎌 독립문 인근 인왕산 자락 판자촌에 살면서 바라보던 남산이어서 더욱 애착이 갔고 당시 다녔던 학교도 남산 밑이었다. 장충단공원과 붙은 D대학도 남산 밑이었고 학교에서 여행작가과정 수업을 듣느라 한 학기를 보내면서 남산을 올랐다. 파워 블로거나 여행작가를 대상으로 펼치는 팸투어에 초대받으면 짬을 내어 새벽에도 남산을 올랐다. 중국 발 황사가 심해진 이후론 자제하는 편이지만 나에게 남산은 잊히지 않는 산으로 남아있다.
황령산 타워전망대는 미래의 먹거리를 창출한다는 측면에서도 부산에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머지 않은 날에 지혜를 모아 환경파괴 우려를 잠재우고 타워전망대가 들어선다면 관광도시로서 부산의 위상도 크게 달라질 터이다. 혹자는 세계적인 야경명소로 통하는 홍콩 빅토리아파크에 못지 않은 글로벌 관광명소가 될 것이란 기대도 숨기지 않는다. 그동안 부산에 건설했던 산업도로나 도시고속도로, 동서고가로, 가덕대교, 수정-백양산터널처럼 민자사업으로 추진한다면 예산확보의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부산의 중심 서면 쪽에서 케이블카로 오를 수 있다면 황령산 정상 타워전망대는 분명히 대박을 터뜨릴 것이란 기대를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