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김인선
세계의 해전(Naval Battle of World)
김인선(우리문화연구)
1. B.C. 480년 그리스의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제독의 살라미스(Salamis)해전
제3차 페르시아 전쟁중인 BC 480년 9월 23일, 아테네 함대를 주력으로 한 그리스 연합해군이 살라미스 해협에서 우세한 페르시아 해군을 괴멸시킨 해전을 말한다. 테르모필레·아르테미시온의 방위선을 돌파한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재위 BC 485∼BC 465) 대군은 파죽지세로 아티카를 점령하였으나 살라미스의 그리스군 공격이 여의치 않아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때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노약자와 부녀자를 피난시키고 거짓 정보를 보내어 페르시아군을 폭이 좁은 살라미스만(灣)으로 유인하여 11시간 계속된 해전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였다. 이때 아테네의 전사자는 200명, 페르시아는 6,000명 수준이라고 합니다.
2. 1588년 영국 하워드(Howard) 제독의 칼레(Calais) 해전
tm페인해군 즉 아르마다는 당시 최강최대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해군이예요. 겨우 드레이크를 앞세운 영국의 빈약한-영국은 당시 상선부터 시작해서 모든 선박의 총동원령을 내린상태-해군을 우습게 봤죠. 그리구 칼레는 2차세계대전당시 연합군의 상륙작전예상지역중의 하나로서 도버해협에서 가장 영국과 가까운 항구죠.
게다가 당시 최강의 육군을 가진 스페인은 상륙해서 영국의 변변찮은 육군을 확 쓸어버리고 건방진 엘리자베스여왕이하 반스페인 귀족을 처리할려구 했습니다.
스페인해군이 영국-네덜란드연합해군에 패한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보통 크게 2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 전통적인 해전은 함포사격에 이은 선상육박전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화포기술의 발전은 사거리뿐만아니라 크기도 많이 작아져서 선박에 충분한량의 화포가 거치되고 그 실용성을 일찍 파악한 영국해군은 근접전이 아닌 화포전으로 끝장내버리죠. 배끼리 부딫힌후 선상육박전을 벌릴려구 다가오는 스페인해군을 뒤로 벌어지면서 화포로 끝장낸 영국해군, 누가 이길까요^^*
둘째, 해적출신인 드레이크제독의 용병술. 그는 정면승부에서의 승리가 힘든걸은 알고 영국상륙부대를 실을려구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스페인함대를 기습공격하죠. 항구내에 있는 해군은 진주만전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항구에 있는 함대는 무력하게 깨집니다. 그래도 수많은 전함을 가지고 있던 스페인무적함대는 항구에서 출항하여 영국해군과 접전을 벌립니다. 넓은 바다에서 해적의 기술인 치고빠지기가 성공하여 스페인해군은 해전에 패배하여 스페인으로 귀한하나 기습당한후 항구에서 급하게 출격하느라 식량등 보급물자를 싣지 못해 배고픔과 질병으로 막상 스페인으로 귀한했을때는 소수만이 남았죠. 그 타격으로 스페인은 다시는 바다에서의 주도권을 쥐지못합니다.
뱃사람은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으니깐요.
3. 1592년 거북선을 앞세워 승리를 거둔 이순신(李舜臣) 제독의 한산도대첩
4. 1805년 영국 넬슨(Nelson) 제독의 트라팔가(Trapalgar) 해전
트라팔가 해전(Battle of Trafalgar)은 1805년 10월 21일 이베리아반도 남서부 트라팔가곶의 난바다에서 H. 넬슨의 영국함대가 P. 빌뇌브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를 격파한 해전. 에스파냐의 항구 카디스에 정박중인 빌뇌브의 함대가 나폴리로 출격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넬슨은 카디스 근처의 트라팔가곶 난바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전함 33척으로 편성된 빌뇌브의 함대는 영국함대를 확인하자 북쪽으로 침로를 바꾸었다. 이에 대하여 넬슨은 27척의 영국함대를 자신이 직접 인솔하는 15척과 부사령관 C. 콜링우드가 지휘하는 12척의 2대로 나누고, 기함 빅토리호에 <영국은 각자가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라는 신호기를 내걸고 서쪽에서 접근하여 적함대를 공격하였다. 그 결과 영국함대는 침몰함 0척, 전사자 약 1600명인 데 비하여 적함 격침 5척, 포획 17척, 전사자 약 8000명이라는 대승리를 거두었으나, 넬슨은 전사하였다. 이 해전으로 B. 나폴레옹은 영국 상륙을 단념하였다.
트라팔가르 해전을 승리함으로써 영국은 서인도 제도 등의 식민지를 잃지 않고 지켜냈고, 그 당시 영국의 경제 구조를 보면 상당한 비중이 식민지 착취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특히 서인도 제도를 지켜냈다는 것은 영국의 숨통을 틔였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을 기점으로 영국은 아메리카에서의 주도권 싸움에서까지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래서 영국 주도하에 의한 미국이 탄생하게 된다. 이게 트라팔가 해전이 세계사에 미쳤던 가장 큰 영향이다.
트라팔가르 해전을 세계4대 해전으로 꼽는 가장 큰 이유는 해전 당시 넬슨제독이 구사했던 전술에 있다. 당시로서는 이전의 해전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서양권에서의) 신개념의 전술은 빅토리아호의 중앙돌파로 적함대를 둘로 갈라놓은 후 이어지는 함대를 평행상태에서 발포하고 90도 선회하여 적의 선열을 끊는 것이었고 마지막으로 혼란해진 적의 함대를 몰아붙여서 승리를 한 것이었다. 이러한 전술은 기존의 전술인 직선적인 공격과 평행적인 함대배치를 뛰어넘는 3차원적인 전술 이였기에 트라팔가르 해전 이후 서양 해군 전술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서양권에서는 해군전술의 획기적 변화의 시발점이 됐다.
1.
2. 스
3. 1592년(선조 25) 7월 7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1592년(선조 25)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이순신의 수군은 6월 10일까지 사천 선창(泗川船艙)·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해전(栗浦海戰)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계속 패전의 소식만이 들려왔다. 그렇게 되자 적은 해상에서도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여 가덕도(加德島)와 거제도(巨濟島) 부근에서 적선이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하면서 육군과 호응하고 있었다.
이런 보고를 접한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은 우수사(右水使) 이억기(李億祺)와 연락하여 재차 출동을 결정하였다. 이때 일본은 해상에서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제1진은 70여 척을 거느리고 웅천(熊川) 방면에서 출동하였고,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도 많은 병선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7월 6일 이억기와 더불어 90척을 거느리고 좌수영을 출발, 노량(露梁)에 이르러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의 함선 7척과 합세하였다. 7일 저녁 조선 함대가 고성(固城) 땅 당포에 이르렀을 때 적함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하고 이튿날 전략상 유리한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한산도는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적이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板屋船)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서 급습, 이에 적선이 일시에 쫓아나오자 아군 함선은 거짓 후퇴를 하며 적을 유인하였다.
아군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일시에 북을 울리며 뱃길을 돌리고, 호각을 불면서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일제히 왜군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모든 지자총통(地字銃筒)·현자총통(玄字銃筒)·승자총통(勝字銃筒)을 한꺼번에 쏘아 적선을 격파하고 불사른 것만도 66척이나 되었다.
적의 목을 잘라 온 것이 86급(級), 기타 물에 빠지거나 찔려죽은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400여 명은 군량이 없이 13일간을 굶주리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때의 3대첩(大捷)의 하나로, 그 결과 일본 수군은 전멸하였고,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
4. 10월 21일, 스페인 남단의 트라팔카에서 교전, 수시간의 격전 끝에 영국함대는 프랑스 함선 23척을 격침, 또는 포획하고 대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측의 전사자는 8천이었는데 비해 영국측 전사는 1천 6백에 불과했다.
세계 5대 해전
1. 악티움 해전
2. 한산도 해전
3. 트라팔카 해전
4. 대마해협 해전
5. 미드웨이 해전
악티움해전 [ Battle of Actium ] 글자크기보통 크기로 보기
크게 보기
가장 크게 보기
기원전 31년 그리스 악티움에서 일어난 해전으로,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연합군을 물리친 전쟁공화정이었던 로마는 삼두정치를 시작으로 제국으로서의 체제를 정비해 나간다. 제1차 삼두정치는 기원전 91년의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의 정치적 밀약으로 시작된다. 이 때 크라수스가 사망하자 폼페이우스가 원로원과 결탁하여 카이사르를 적으로 선언하는데, 이에 카이사르가 로마 점령에 나서게 된다. 카이사르는 1인 독재 체제를 유지하지만 공화파의 반발에 부딪히고 곧이어 브루투스를 위시한 몇 명의 모의에 의해 암살당한다. 이후에 등장한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와 레피투스, 안토니우스의 제2차 삼두정치가 시작된다.
그런데 이 와중에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결탁해 연합군을 이끌고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하는데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서방 속주국을 결집하여 연합군을 격파하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이후 로마로 돌아가 내란을 종결하고 정식으로 로마제국을 세운다.
안토니우스는 원래 강력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해군의 군사력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의 주장으로 옥타비아누스와 해전을 감행하게 된다. 악티움에서 마주치게 된 두 세력은 각기 500여 척의 함대로 치열하게 전투하였으나 전략적 결함과 클레오파트라의 갑작스러운 후퇴로 연합군은 사기를 잃었고 옥타비아누스가 대승하게 된다. 며칠 뒤의 육상 전투에서도 연합군은 패배하게 되며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임진왜란 중 충무공 이순신 제독께서 완승을 거두신 한산대첩을 비롯해서 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해전을 엄선하여 세계 4대 해전으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시간 순서 순서에 의해 먼저 살라미스 해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운명을 바꿔 놓은 살라미스 해전은,
영화 ‘300’ 으로도 유명한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와 이어진 해전입니다.
BC 530년 페르시아 제국은 통일을 계기로 그리스 정복을 결심합니다.
총 3차에 걸친 원정 전쟁이 시작 되었는데..
BC 492년, 1차 원정은 페르시아 함대가 폭풍을 만나 좌절되었고
2년 후, 2차 원정은 마라톤 전투(마라톤이 생겨나게 된 유명한 전쟁이죠^^)에서 패했으며...
BC 481년에는 페르시아의 왕이 직접 30만의 대군으로 3차 침공에 나섭니다.
살라미스 해전당시 페르시아 대군을 이끈 왕은 바로 크세르크스!!!!
영화 ‘300’에서 가장 관대한(?^^;) 왕으로 나오죠~~
사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스 왕은 그 시대의 ‘엄친아’ 였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다소 미개 부족의 족장처럼 묘사되는 감이 없지않아 있지만...^^;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면...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침공을 위해 1,000여 척이 넘는 해군과 육군을 이끌고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는 400여 척이 안되는 규모의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단순 척수만 비교해 보면 페르시아 해군이 2~3배 가량 많은 군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규모의 해군이 이동하다 보니 당연히 항구 안에 정박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 했습니다.
그리하여 바다에 그냥 떠 있다가 그리스와 맞붙기도 전에 200여척의 군함이 풍랑에 휩쓸려 버리는 손실을 입게 되지만 800여척의 군함들이 건재했기 때문에 전쟁을 치르기엔 충분한 병력이었습니다.
영화 ‘300’에서도 페르시아 해군이 폭풍에 침몰되는 장면에서 스파르타 군인들이 환호성치며 좋아하는 장면이 나오죠...
참고로 그렇게 침몰이 많이 되어도 그 다음날 어마어마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페르시아 군에 놀라는 장면도 있었답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의 육군이 궤멸되었기 때문에 아르테미시온에서 벌어진 해전에서도 그 여파로 해군들이 패배를 하고 살라미스 섬 근처로 물러나게 됩니다.
그 당시 그리스 연합군의 사기는 거의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내부의 여론도 분분하여 도저히 전쟁을 할 수 없을 정도였죠.
이 때, 그리스 연합군 중 테미스토클레스라는 걸출한 장군이 있었는데 기막힌 재치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수 있게 하였습니다.
테미스토클래스는 몰래 페르시아 왕에게 첩자를 보내 지금 그리스 연합군이 분열 조짐이 있고 일부는 대열에서 이탈하여 철수하려고 하니 포위를 해서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을것이라 전합니다.
이에 페르시아 왕은 곧 살라미스 섬 부근으로 병력을 옮겨 그리스 연합 해군을 포위하게 되었고, 테미스토 클래스는 이를 이용하게 됩니다.
‘이왕 이렇게 포위된거 죽기살기로 싸워 보자’며 그리스 연합군을 독려하였고 이에 그리스 엽합 해군은 결국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좁은 살라미스 해협은 페르시아 해군이 병력의 양적 우세를 장점으로 활용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연합 해군은 질적인 측면에서 페르시아 해군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위 사진은 그리스 연합 해군의 삼단 노선인데, 뱃머리 부분에 충각이 부착돼 있고 여기에 청동을 입혀 페르시아 배를 들이받는 전술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는 BC 8세기경부터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페니키아인들로부터 조선술과 항해술을 익혀 해양활동에 능숙했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해군의 군함보다 규모가 작고 더 신속하게 기동할 수 있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라는 걸출한 지휘관과 그리스 연안의 홈그라운드(?) 장점을 살려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의 2차 침공 실패 후 반드시 페르시아가 다시 침공해 올것이라 예상하고 해군력을 신장시키기 위해 군함을 건조하고 미래의 전쟁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같이 선견지명이 뛰어나신 것 같습니다.^^
결국 그리스는 적은규모의 함정으로 무려 3배에 가까운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하였고 그리스 함대의 주력이었던 아테네는 문명의 황금기가 도래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편에선 스페인 무적함대와 영국의 해전인 칼레 해전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세계 4대 해전 중 이번에 소개해드릴 칼레해전이 아마 가장 생소한 해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3대 해전과는 달리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진 계기(?)가 없었다고 할 수 있으니...
(살라미스 해전은 영화 ‘300’으로 간접적이나마 알 수 있고, 트라팔가 해전은 넬슨 제독이라는 걸출한 제독을 배출하였으며, 한산대첩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모두들 잘 알고 계시겠죠?^^)
하지만 이 칼레 해전을 다룬 영화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영화 ‘골든 에이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스트리아 영화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역을 맡아 열연한 영화입니다.(사실 평점은 별로지만 해전을 이해하는 역사적 배경 이해에는 도움이 되실겁니다.^^)
먼저 칼레해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시대상황 인식이 필요합니다.
요즘과 같이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도 종교분쟁이 지구 곳곳에 벌어지는 것을 생각한다면 과거 신앙이 절대시 되던 중세 유럽에서는 종교 갈등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 하시겠죠?
당시 유럽은 각 국가들간 혼인으로 인한 동맹을 비롯하여 혈연, 지연, 종교 등 모든 나라들이 서로 얽혀 있는 복잡한 정세였습니다. 거기다 1517년 독일의 성직자였던 마틴 루터가 95개의 반박문을 내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초석이 되었으며, 그 후로도 구교와 신교도간의 종교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와중에 영국 해적은 스페인의 상선을 계속 공격하여 상당한 부를 취하였고,
이에 스페인이 영국에 해적을 소탕하라고 압력을 가하지만 영국은 오히려 해적에게 작위를 내리죠^^;
결국 스페인은 영국 침공을 결정하게 되고 칼레해전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간략한 감이 없진 않지만 그 당시 복잡한 국제관계 및 종교 갈등이 있었습니다.^^
본론에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더 칼레해전 발발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6세기에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힘이 강한 나라였으며, 신대륙인 아메리카 대륙에도 많은 식민지를 두고 있었습니다. 식민지를 통해 축적된 부를 통해 더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힘을 키우려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국왕인 필립 2세는 신실한 구교신자였으며 영국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이 터키와 신교와의 전쟁에 전력을 다하고 있을 때 영국의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드레이크를 보내서 스페인의 배들을 노략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드레이크와 당시의 해적선입니다. 당시 영국에선 해적을 장려하여 국가 이익을 올리고 있었기에 해적이지만 요즘으로 말하면 ‘공기업 직원’이라 할 수 있었죠^^ 요즘 소말리아 해적들이 상당한 부를 올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이해가 잘 가실 겁니다.)
엘리자베스여왕은 자신의 아버지인 헨리 8세의 종교를 계승하였고, 유럽 대륙에 있는 신교 국가들, 즉 네덜란드와 같은 곳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사실 헨리 8세도 처음에는 구교도였으나 로마 카톨릭에서 자신의 이혼을 허가해 주지 않자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었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특히 네덜란드의 신교도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거리가 멀지않았기 때문에, 네덜란드에 있던 스페인 세력이 영국의 큰 위협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그 당시 스페인은 네덜란드와 주변의 플랑드르 지역에 강력한 군대를 주둔해 놓은 상태였죠.
앞에서 언급했듯이 영국은 해적을 통한 사략선 사업으로 해적 행위를 장려하고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막대한 부를 모았습니다. 이 때문에 필립2세는 1580년 7월부터 영국선박을 감시하고 서인도제도와 대서양에서 계속해서 노략질을 한 드레이크를 벌하라고 영국에 압력을 넣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오히려 드레이크에게 작위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영국군을 네덜란드로 파견해서 스페인에 대항해 네덜란드의 독립운동을 도왔습니다.
스페인의 왕인 필립 2세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가 죽고 나자 영국 침략 계획을 세웠습니다. 독실한 카톨릭 교도였던 메리는 스페인을 등에 업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정권을 전복시키려다 오히려 처형됩니다. 필립 2세는 로마의 도움을 얻고자 영국 침략 계획을 종교전쟁으로 과장하여 명분과 지지를 얻게 되어 침략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1587년에 드레이크경이 카디즈항으로 들어와서 필립 2세가 침략을 위해서 마련해 놓은 스페인 전선들을 대부분 침몰시켰는데 이 전선들에는 이미 많은 보급품들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은 이런 물품들도 다시 준비하기위해 시간을 더 늦추게 됩니다.
(영화 ‘골든 에이지’에서 메리의 참수 장면입니다~)
스페인의 영국 침략 계획은 애초에 전설적인 제독이었던 산타 쿠르즈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그는 아일랜드를 먼저 점령하고 그 후에 영국으로 전진하자고 제안하였으나, 그가 죽고 난 후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고 후에 메디나 공이 다시 계획을 세웠습니다. 메디나 공은 뛰어난 군인이었지만, 해전 경험은 다소 부족하다는 약점이 있었고 이는 칼레해전에서의 패인 중 하나가 됩니다. 필립2세의 계획은 그의 함대를 네덜란드에 있던 지상군인 파르마 공의 군대와 합해서 공격하는 것이었는데 필립 2세와 측근들은 강력한 스페인 지상군이 영국에 내리자마자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죠.
한편, 영국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스페인 내부에서 정보를 모으는데 주력했습니다. 영국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하였는데 특히, 당시 영국의 수상이었던 월싱험은 그의 사람을 스페인 왕궁에 심어놓고 첩보활동을 벌이도록 하였습니다. 영국 고문서들을 보면 그가 스페인이 침략하기 1년 전부터 이미 침략 계획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영국은 침략 계획을 알게 된 직후 방어 전략을 세웠고 네덜란드의 신교도들과도 협력관계를 돈독히 하였습니다. 동시에, 영국은 전선들의 구조를 변경하고 많은 배를 건조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한 스파이가 영국 정부로 보낸 편지내용에는 ‘130척의 배가 영국 침략을 위해서 준비되었으며 돈 알론소디 리바가 스페인 지상군 총 사령관이 되었다고 정확히 적고 있으며, 네덜란드의 파르마 공에게 함대가 언제 도착할 것인지 알리기 위해서 한 스페인 배가 스페인 함대가 출발하기 전에 네덜란드로 떠났다‘ 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사실 스페인 함대를 위해서 출병에 참여한 이탈리아 선장의 편지를 토대로 쓰여진 것이었습니다.
스페인 함대는 리스본항을 출항하여 오늘날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의 영토인 플랜더스 지방으로 향하였습니다. 이곳에서 파르마 공의 지상군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출항한 후 심한 폭풍 때문에 스페인 함대는 예정된 시각보다 더디게 영국쪽으로 북상 하였습니다.
7월 중순에 스페인 함대는 영국해협의 서쪽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7월 30일경에 스페인 함대는 영국 영토인 콘월지역에서 목격되었고 이때 영국 함대는 플리머스 항에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함대와 스페인 함대가 처음으로 교전을 치른 후에 하워드 제독은 영국 함대를 네 개의 분대로 나누고 한 분대는 자신이 한 분대는 드레이크 제독이, 한 분대는 호킨스 제독이, 그리고 나머지 한 분대는 마틴경이 이끌도록 하였습니다. 영국 함대는 스페인 함대와 몇 차례 교전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영국함대가 스페인 함대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스페인 함대의 함포를 소모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습니다. 메디나 공이 파르마 공에게 서한을 보내어서 함포와 탄약을 준비해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함대와 반대로 영국 함대는 탄약 및 마실 물, 음식 등을 근처 항에서 계속 조달할 수 있었고, 이러한 안정적인 군수 보급은 승리요인의 하나로 작용하였습니다.
8월 6~7일경에 스페인 함대는 파르마군과 만나기로 한 칼레앞바다에 정박하였는데, 스페인 함대는 이곳 바다의 수위가 낮고 배의 크기 때문에 포구에 정박하는 것이 어려워 앞바다에서 정박한 후 파르마군을 작은 배로 실어 나르기로 결정했습니다. 영국 함대 또한 스페인 함대 근처에 정박하였습니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은 칼레에 도착하기 전에 자신의 사람을 파르마 공에게 보내었으나 파르마 공의 군대는 몇 일이 지나도 오지 않았습니다. 최근 밝혀진 스페인 역사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그 당시 파르마 공은 이미 이 침략 계획이 실패한 것이라 여겨서 그의 군대를 내륙으로 이동시켰다고 하네요.(현명한 판단인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결전의 날인 8월 6일이 되자 남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왔으며 이는 영국 함대에 큰 이점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스페인 함대가 영국 함대쪽으로 이 바람 때문에 나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죠. 자정 즈음에 영국함대가 스페인 함대의 전선 사이로 불을 붙인 작은 배들을 보내자 스페인 선원들은 곧 자신들의 배가 폭발할 것이라고 여겨서 배들을 잇고 있던 줄을 잘라버리고 출항하였습니다. 이에 함대의 전형은 흐트러지고 혼란스러워져 스페인 함대를 무찌를 기회가 영국 함대에 찾아왔고, 메디나 시도니아 공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을 동안 영국 함대는 칼레항 근처에 있는 그라블린 항에서 많은 스페인 전선들을 침몰시켰습니다. 스페인 전선들은 영국 배들에 근접하여 올라탄 후 전투를 벌이려고 했으나, 익히 이 전술을 알고 있었던 영국 함대는 먼 거리에서 함포사격을 하고 스페인배의 접근을 피했습니다. 영국 전선들은 집중적으로 함포사격을 하였고 스페인 전선들은 영국 함대와 플랜더스 지방 사이에 끼인 상태가 되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풍향이 바뀌어서 스페인 함대는 이곳을 떠나 북쪽으로 북상할 수 있게 되어서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무적함대라는 스페인 함대는 칼레해전 전에 이미 영국 해군에 따라 잡혔다고 보는 시각도 많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지난 레판토 해전의 승리에 대한 명성으로 왕좌의 자리에 있었지만 큰 덩치와 느린 선회 속도로 이미 그들의 함선은 옛 영광에서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반면 헨리 8세 이후 쇠락하던 영국 해군을 해군성의 존 호킨스가 다시 살렸는데 최신예 전선인 갈레온선들로 4년 동안 11척을 추가로 건조하였습니다.
아래 보시는 갈레온선들은 폭이 좁은 대신 길이를 더 늘려 더 많은 포를 탑재하였고 기동성 측면에서도 스페인의 갤리선보다 뛰어났습니다.
스페인 해군은 레판토 해전에서 거둔 승리의 여운과 기존 갤리선들을 모두 교체하는데 드는 천문학적인 비용으로 갤리선으로의 교체를 못하고 전쟁에 임하게 되었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스페인 함대는 영국 해협으로 다시 남하하여 오려고 했으나 폭풍으로 인해 계속 북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메디나 시도니아 공은 침략 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미 무기와 음식도 바닥이 난 상태였습니다. 시도니아 공은 결국 퇴각하여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거쳐 다시 모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당시 스코틀랜드 왕이었던 제임스는 스페인 군이 스코틀랜드 항구에 입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제임스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잇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터였기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신임을 어기는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으로 향하는 길에 스페인 군인들은 심각한 음식 및 물 부족에 시달렸으며 태풍 또한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굶주린 스페인 선원들은 메디나 시도니아 공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에 정박하여서 먹을 것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이를 미리 예상한 엘리자베스의 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도륙되었고 메디나 시도니아 공은 9월 13일이 되어서야 반절 남은 함대를 이끌고 산탄더항에 도착하게 됩니다.
칼레 해전이 끝난 후 영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은 1604년에 런던 조약이 조인될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영국은 계속해서 네덜란드의 신교 세력을 지원하였고 스페인 선박들을 갈취하여서 부를 쌓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스페인 무적함대의 명성 또한 시들어 갔고 스페인 무적함대의 몰락은 스페인의 해양력에도 큰 영향을 주어 점차 힘을 잃어갔다. 스페인이 힘을 잃어갈수록 영국은 힘을 얻었습니다. 영국은 1600년에 동인도회사를 차렸는데 이는 영국제국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영국은 1604년에 스페인 외 유럽 대륙에서는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버지니아라는 식민지를 세우게 되었는데 버지니아라는 이름은 처녀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를 기념하고자 지어졌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 대마도에서 부산에 상륙하기 위한 20만의 왜군이 출항을 하게 됩니다. 오후 5시경 부산 앞 바다를 뒤덮으며 모습을 드러낸 왜군은 한 달도 채 되기전에 함경도까지 진격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료가 나타난 이후, 200여년간 평화가 지속된 시절이 없었기에 몇몇 선구자들을 제외하고는 전쟁준비를 하지 않았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율곡 이이와 같은 인물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며 전쟁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관철되었죠...ㅡ.ㅡ;
한편, 왜군은 수륙 양진으로 한반도를 넘어 대륙으로의 침략까지 계획했으나 해전에서 번번이 패하게 되어 결국 우리나라는 물론 ‘명’까지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명나라 또한 국내ㆍ외 적으로 혼란스런 시기였으므로 많은 학자들이 왜군이 상륙했다면 ‘명’ 또한 고전을 면치 못했을꺼라 추정을 한답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살펴 보겠습니다.^^
육전에서 계속 밀리기만 하던 조선에 실낱같은 희망을 안겨준 것이 조선 수군이었습니다.
1592년 5월 4일 이순신 제독이 처음 출전하여 옥포해전에서 승리한 이 후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것이 그해 7월 8일의 한산대첩 입니다.
한산섬 앞바다에서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및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거느린 조선수군이 왜수군의 주력대를 무찌른 우리나라 해군 역사상 최대의 해전.
그럼 한산도대첩은 어떻게 해서 벌어지게 되었을까요??
최초 왜군은 수륙병진계획으로 조선을 침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수군이 남해·서해로 침범하던 중 옥포(玉浦)·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지에서 연전연패하자 수군의 유능한 장수였던 와키사카(脇坂安治)는 정예병력을 늘려 73척을 이끌고 거제도 등지를 침범하게 되었습니다. 수군 장수였던 구키(九鬼嘉隆)도 42척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습니다. 왜 수군들의 동향을 탐지한 이순신은 7월 5일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고, 다음 날인 7월 6일 본영을 출발해 노량(露梁 :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이르러 원균이 이끌고 온 7척과 합세하니 3도의 전선은 모두 55척이 되었습니다. 7일 저녁 당포 앞바다에 이르러 목동 김천손(金千孫)에게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 :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들은 후 8일 한산섬 앞바다에 이르러 이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때 왜수군의 세력은 수군장수 와키사카가 이끄는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이었습니다.
왜군과의 일전을 예견한 충무공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板屋戰船)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한산섬 앞바다로 유인해 격멸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먼저 소수의 판옥전선을 이용하여 허술한 일자(一자)진을 형성한 후 적으로 하여금 방심하여 공격을 유도하였습니다.
이에 왜수군이 공격하여 오면 한산섬으로 물러나면서 유인하였고, 왜 수군들은 그때까지 패전한 것에 대해 보복하려는 듯 의기양양하게 압도적인 물량공세를 펴며 판옥선을 추격했습니다.
거짓 후퇴를 거듭하며 싸울 기회를 포착한 이순신은 공격하기에 유리한 해역에 다다르자 모든 전선이 학익진(鶴翼陣, 학이 날개를 편 듯이 치는 진. 적을 둘러싸기에 편리한 진형)을 짜서 공격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현자총통(地玄字銃筒)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습니다. 조선 수군의 최대 약점이었던 포의 재장전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점은 충무공의 평소 실전과 같은 훈련과 반복 연습으로 신속하게 배의 방향을 180° 바꿔 반대편 포를 사격함으로써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 시키고 연속적인 공격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거기다가 우리 해군의 자랑인 거북선까지 등장하여 적의 사기를 완전히 꺾을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 사료에 의해 실제 모습으로 복원 된 거북선입니다. 해군 사관학교에서 구경하실 수 있답니다.^^)
싸움의 결과 중위장 권준(權俊)이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나포하는 것을 비롯해 47척을 분파(焚破)하고 12척을 나포하는 등의 성과를 올렸습니다. 왜 수군장 와키사카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해 이 해전은 조선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격전 중 조선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는 완벽에 가까운 승리였습니다. 왜병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습니다.
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 중 진주성대첩(晉州城大捷, 1592.10.5.∼10.)·행주대첩(幸州大捷, 1593.2.12.)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불린답니다. 한산도대첩으로 왜수군의 주력을 거의 격파해 그들의 수륙병진(水陸竝進 :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공격하여 나아가는 일.) 계획을 완전히 좌절시켰으며 일본의 북진을 저지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육지에서 잇단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수군이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이미 상륙한 적군에게도 위협을 주어, 그 때까지 매우 불리했던 임진왜란의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의 역사가 헐버트(Hulbert,H.G.)도 “이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Salamis)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감탄하였 습니다. 이 해전과 하루 뒤에 벌어진 안골포(安骨浦 : 진해시 안골동)해전을 승리로 이끈 전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이억기·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의 관계를 받았습니다.
23전 23승, 전 세계 역사상 이같은 전적은 없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오직 조국의 안위를 위하여 헌신 하신 충무공의 삶!!
충무공의 후예답게 우리의 바다를 잘 지키겠습니다.
벌써 세계 4대해전 마지막 이야기를 쓸 차례가 왔네요^^
이번에 소개해 드릴 해전은 20세기 이전까지 영국의 해양 패권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트라팔가 해전입니다.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해군 제독인 넬슨 제독의 승리로 더욱 유명한 해전이죠^^
그럼 트라팔가 해전 당시의 역사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8세기 말 프랑스의 바스티유 감옥이 폭도들에 의해 불타고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그 왕비인 마리 앙뜨와네뜨... 그 당시 배고픈 군중들이 ‘빵을 달라’라고 외쳤을 때,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는 말로 곤욕을 치뤘죠. 요즘같이 어록이 이슈가 되는 사회였다면 각종 챠트 1위에 올랐을 것이라는...^^;)
그리하여 프랑스 절대 왕정은 무너지게 되고 공화국이 되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왕정을 실시하고 있었기에 프랑스의 혁명은 너무나 위험한 것이었죠. 자신들의 백성들도 들고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곧 그들은 연합하여서 프랑스에서 다시 절대 왕정 정부를 세우고자 하였고, 1792년부터 젊은 프랑스 공화당원과 왕정국가들의 군대간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 과정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당시 유럽에서 해군 장교는 특히나 존경을 받았습니다.(왕족과 귀족들의 자제만이 해군장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죠.) 나폴레옹도 원래는 원래 해군장교가 되고자 했으나, 신분상의 제약으로 포병장교가 되어야 했습니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20살에 불과했으나 1793년의 영국과의 전투, 1795년의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서의 혁혁한 공으로 순식간에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할양하게 되었고 그 후 영국 제패라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1797년에 프랑스인들을 설득하여 영국왕정이 반드시 자신들에 의하여 무너져야 전 유럽이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습니다. 이렇게 전쟁명분을 만들어가며, 그는 영국 침략을 위한 해군을 세우는데 공을 들입니다. 그 당시 영국 해군은 넬슨 제독과 함께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아미앵조약(Treaty of Amiens : 영국과 프랑스간의 화평을 목적으로 맺은 조약)이 1802년에 조인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약 14개월 동안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나폴레옹은 강력한 권력을 쌓아가고 있었으며 마침내 1804년 12월 2일에 스스로 나폴레옹 1세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죠. 황제가 된 후, 나폴레옹은 제국을 더 넓히고픈 야망에 영국을 점령하고자 다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영국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기에 영국은 프랑스의 침략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영국의 항구에 도착하는 순간 영국의 운명은 겪어보지 않아도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이 섬나라였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바다를 지배하는 중요성을 어떤 나라보다 잘 알고 있었고, 영국 해군은 프랑스 함대의 모든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지상군에서는 프랑스의 군이 훨씬 우세하였으나 해군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1804년 말 스페인과 연합하여 영국을 침략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스페인의 함대가 나폴레옹의 손안에 쥐어지게 된 것이죠. 나폴레옹은 영국 침략을 위해 2000여 척의 배와 90,000명의 군대를 준비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들은 프랑스의 해안으로 집결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주 목적은 해전에서의 승리보다는 나폴레옹의 지상군이 바다를 건너 영국에 도착할 동안 영국함대를 막는 것이었습니다.
1805년 초, 프랑스 함대는 영국의 서인도 제도의 식민지를 약탈하고, 무역을 방해하여 일단의 혼돈을 가져다주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같은해 8월, 나폴레옹은 해군의 각 제독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들의 마음을 다졌습니다. 내용인즉, ‘프-스 연합함대가 힘을 합친다면 영국을 충분히 물리치고 그간의 치욕을 갚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명령이자 독려의 메시지였지만 대부분의 제독들은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짐작했습니다. 프랑스 항구에 정박중인 나폴레옹의 함대는 모두 2,000여척, 그리고 90,000여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막강한 영국의 해군력에 의해 거의 모든 항구가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메시지는 전함대를 카디즈(Cadiz) 80km 동쪽 지점에 위치한 트라팔가 곶(Cape Trafalgar)으로 집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요구에 응하기 위해 프랑스의 빌레누브(Pierre de Villeneuve, 1763-1806)제독은 20척의 함대를 거느린 스페인의 그라비나(Don Frederico Gravina)제독과 합류하기 위해 영국 해군제독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의 봉쇄를 뚫고 마르티니크 섬(Martinique I.)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스페인(Franco-Spanish)함대는 피니스테레 곶(Cape Finisterre)에서 18척의 영국함대와 교전으로 2척의 전함을 잃고 카디즈(Cadiz)로 퇴각했습니다.
그 당시 나폴레옹의 함대는 프랑스의 브레스트, 로쉐포트, 툴롱항과 스페인의 카디즈, 페롤에 흩어져 있었고, 영국 함대는 이들 항구 길목에서 프랑스 함대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는 캐러비안 해에서 연합하기로 했는데, 이는 영국해협을 건너는 동안 영국 함대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함이었죠.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의 총 지휘관이었던 빌레뉴브의 제독의 함대는 툴롱항에 있었으며, 이를 넬슨 제독이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빌레뉴브 함대는 1805년 3월 30일에 마침내 툴롱에서 넬슨을 따돌리고 출항하여 대서양으로 향하였고, 넬슨제독이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빌레뉴브 함대가 지중해로 갔다고 여겨 이집트 근처로 함대를 움직입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빌레뉴브 함대를 뒤쫓기 시작하고, 카디즈항에 있던 스페인 함대는 항을 빠져나와 빌레뉴브 함대와 연합하게 됩니다.
빌레뉴브함대가 캐러비안해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마르티니에 도착했을 때, 빌레뉴브 제독은 페롤항에 있던 함대가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빌레뉴브 제독은 나폴레옹 황제가 그가 영국해협으로 와서 영국함대로부터 막아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므로 페롤항으로 가서 남아있는 프랑스함대를 이끌고 북진하기로 결정 했습니다. 페롤항으로 가는 길에 빌레뉴브 제독의 함대는 로버트 캘더 제독의 함대와 부딪히게 되었으나 캘더 제독을 따돌리고 페롤 바로 밑에 있는 항구인 비고항에 도착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5개월 동안 영국 침략에 전력을 쏟으며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연합하여서 프랑스를 침략하려고 하였습니다. 어쩔수 없이 나폴레옹은 영국침략을 포기하고 군대를 움직여서 독일로 향하게 되고 빌레뉴브함대에게 지중해로 들어와서 프랑스 지상군을 도우라고 명하였습니다.
빌레뉴브 제독의 함대는 10월 18일에 황제의 명을 따르기 위해 카디즈를 떠났습니다. 넬슨 제독은 카디즈에 9월 말에 도착하여서 프랑스 함대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휘하 장수들과 회의를 열었습니다. 넬슨 제독의 전투 전략은 프랑스 함대가 카디즈를 떠나기 전에 함대를 나누어서 일렬로 늘어서서 공격해 들어가는 것으로 결정되어 지고 있었습니다.
10월 21일에 넬슨의 영국함대는 스페인연안의 트라팔가곶에서 빌레뉴브 함대와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넬슨 제독은 자신의 함대를 웨더와 리 분대로 나누고 그는 웨더 분대를 이끌고 콜링우드 제독으로 하여금 리 분대를 이끌게 하였습니다.
넬슨 제독과 그의 기함인 빅토리아 함입니다^^
영국 함대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로 접근해 오자 빌레뉴브 제독은 카디즈항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명하였고, 이 때문에 그의 함대는 북에서 남으로 길게 늘어뜨린 전법 형태를 띄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이와 같은 전법 형태는 가장 일반적인 것이었는데, 전선의 양쪽 뱃전을 적으로 향하게 해야 함포 사격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넬슨제독의 계획에 따라 영국 함대는 서쪽으로부터 프랑스-스페인 함대의 중간 부분을 끊고 들어갔습니다. 넬슨제독은 풍향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 때문에 영국 함대는 빠른 속도로 전진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넬슨은 그 당시 바람 방향을 예측하여 미리 풍상(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위치하여 있었습니다. 넬슨 제독이 이끄는 웨더 분대는 빌레뉴브제독의 배인 부상테어 앞을 끊고 들어갔으며 콜링우드 분대는 더 남쪽을 끊고 들어갔습니다.
콜링우드 분대의 목표는 스페인 사령관의 배를 부수고 넬슨의 공격으로 흩어진 전선들을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넬슨의 분대 중 두 척은 본대가 방향을 바꾸어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공격을 시작하자, 빌레뉴브의 배보다 앞에서 전진하고 있던 배들을 공격했고, 콜링우드 분대는 뒤 쫓고 있던 스페인 함대의 분대와 맞서게 되었습니다.
교전이 무르익을 즘인 1시 경 넬슨제독이 저격수가 쏜 총에 맞았습니다. 넬슨의 웨더분대는 프랑스 함대의 중간부분에 있던 배들을 격침시켰고 일찍이 분대에서 떨어져 나가서 싸우고 있던 2척이 있던 곳으로 향하였습니다. 이들과 교전 중이던 프랑스 함대의 분대는 넬슨의 웨더 분대가 자신들에게 향해오자 퇴각하였고, 승리의 소식을 전해들은 넬슨제독은 희미한 목소리로 '나는 20살의 약속을 지켰다. 나는 나의 의무를 다했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라는 말을 마친후, 그의 기함 빅토리호에서 그의 선장인 토마스 하디가 지켜보는 가운데 4시 30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많은 해군을 잃었으며 21척의 전선은 영국함대에 포획되었 습니다. 사상자는 프랑스군 해군 2,218명이 사망, 1,155명이 부상을 당했고 스페인 해군은 1,025명 사망, 1,383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게다가 7천여명은 포로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반면 영국함대는 배를 한 척도 잃지 않았으며, 넬슨 제독을 비롯한 449명의 해군이 죽었고 1,246명이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14,000여명의 사상자를 낸 프랑스-스페인 함대는 모두 괴멸되었고, 해군제독 빌레누브는 영국해군에 의해 사로 잡혔고, 프랑스-스페인 함대 중 그라비나 제독이 이끈 스페인 함선 11척만이 카디즈로 회항했습니다. 빌레누브는 영국으로 끌려가 다음해 자살하게 됩니다.
트라팔가르 해전이 끝난 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압승을 거두고 오스트리아에게 프레스버그조약(Treat of Pressburg :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프랑스에 할양하는 조건으로 맺은 평화조약)에 사인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더 많은 땅을 프랑스에 할양해야 했고, 나폴레옹은 자신의 함대로는 강력한 영국 해군을 이길 수 없다고 여기고 그의 영국 침략 계획을 포기하게 됩니다. 대신 나폴레옹은 영국의 대유럽대륙 무역을 막아서 영국의 경제적 힘을 축소시키려는 방안으로 1806년 11월 21일에 그는 모든 유럽 국가들이 영국과 무역하는 것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선언하였 습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을 막아서 고립시키려고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정책은 그를 고립되게 만들었으며 그의 제국이 무너지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대륙봉쇄령은 그의 제국과 제국 내 유럽 국가들 간의 분쟁을 초래했고, 1810년에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의 무역을 다시 시작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러시아로 군대를 파견했는데, 대 러시아 군사적 전략이 실패하자 그의 권세는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영국인들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의 승리를 수백년동안 축하해 왔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석상중 하나는 이 해전을 승리를 이끌었던 넬슨의 석상으로 영국의 수도 런던에 있는 트라팔가르 광장에 있습니다.
트라팔가 광장의 모습
2005년에는 트라팔가르 해전의 200주년을 맞아서 영국 해군은 세계해군함대 전시, 루미나리에 축제 등과 같은 행사를 성대하게 열었고 우리 해군 순양훈련단대도 참가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