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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그랬다. 돈 갚겠다는 날부터 전화를 안 받으면 약속 못 지키는 것으로 알아야 했다. 온다는 날 못 왔을 때도 잔소리 듣기 싫어서 전화기 전원을 꺼놓는다. 제가 필요할 때만 전화질을 하고 다른 전화는 받지 않는다. 김가영의 외삼촌 정재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무책임, 불성실, 무능력의 표본 같은 인물이다. 굳이 장점을 말하라면 착하다는 것, 끝없이 속고, 속고, 속으면서도 악질이 되지 않는다는 것. 김가영의 관점에서 보면 그건 팔푼이, 낙오자의 전형이다. 그 정재호가 다시 어제 오후부터 전화기 전원을 꺼놓고 잠적한 바람에 김가영이 이번에는 직접 찾아 나섰다. 융통성도 없어서 갈 곳은 뻔하다. 월세집이건 합숙소건 숙소에 웅크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고시원이다. 관악구 남현동의 고시원으로 들어선 김가영이 심호흡부터 했다. 오전 9시10분, 일용직 독신자 숙소가 되어버린 고시원 안은 한적하다. 다 부지런해서 일을 나갔거나 야근을 뛴 사람들은 잠이 들었을 것이다. 비실거리는 놈은 일 없는 실업자, 무능력자다. 곧 정재호 같은 위인이다. 외삼촌이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미워지는 정재호다. 윤영이가 언젠가 계산을 하더니 외삼촌한테 퍼준 돈이 1억이 넘는다고 했다. 윤영이 중학교 때부터였으니 10년도 안되는 기간에 빠져나간 돈이 그렇다. 정민옥은 가만있었지만 김가영 생각에는 그보다 더 되었다고 믿어졌다. 정민옥이 두 딸 모르게 빼준 돈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돈까지 합하면 그 배쯤 된다. 그러니 결혼 3년 만에 와이프한테 이혼을 당하더니 지금까지 혼자 산다. 직장은 대학 졸업하고 제약회사에 3년 다니다가 잘린 후에 아마 10번은 더 직장을 옮겼을성싶다. 1년도 안 되어서 잘리고는 10년쯤 전부터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번까지 포함해서 망해먹은 사업체가 일고여덟 개는 될 것이다. 정재호의 방은 616호실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김가영이 텅 빈 복도를 걸어 616호실 앞에 섰다. 건물은 조용했지만 어디선가 TV 소음이 희미하게 울렸다. 퀴퀴한 냄새는 남자들의 체취다. 벨도 없었기 때문에 김가영은 노크를 했다.
“삼촌, 저요. 가영이.”
정재호는 느긋하게 잠을 잘 위인도 아니다. 누웠기는 했겠지만 눈을 뜨고 있을 것이다. 담배는 피우지만 술도 마시지 못해서 어머니 표현대로라면 ‘술로 풀지도 못하는 위인’이다.
“삼촌, 저요.”
다시 노크를 한 김가영의 화가 무럭 솟았다. 또 도망가면 장땡이냐? 장기라도 팔아서 변상을 해줘야할 것 아냐! 다시 노크를 했던 김가영이 문의 손잡이를 쥐고 와락 돌렸더니 덜컹 열렸다. 문이 잠겨져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맛살부터 찌푸린 김가영이 안을 보았다. 과연 정재호는 누워 있었다. 이불도 덮지 않고 옷을 입은 채로 누웠다.
“삼촌!”
조금 목소리를 높여 불렀던 김가영이 숨을 들이켰다. 정재호의 입가에서 흰 거품이 맺혀져있는 것이다. 그리고 머리맡에 접혀진 백지가 보였다. 다음 순간 김가영의 입에서 외침이 터졌다.
“삼촌!”
병원으로 실려간 정재호는 응급조치를 받았지만 깨어나지 못했다. 정재호의 사인(死因)은 수면제의 과량 복용이었던 것이다.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정민옥은 몸만 떨뿐 눈물을 쏟지도, 통곡하지도 않았다. 말귀도 다 알아듣고 머리를 끄덕이거나 간단한 대답도 했지만 말을 내놓지는 않았다. 눈동자의 초점도 잡혀져 있어서 김가영은 조금 마음은 놓았어도 주의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정재호의 머리맡에 두었던 접힌 쪽지는 유서였는데 그것도 어머니한테 아직 보여주지 않았다. 김가영과 경찰만 읽은 상태다. 오후 2시 반, 근처의 병원으로 실려 간 정재호의 시신은 다행히 병원의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 본래 사흘장이었으나 김가영은 바로 내일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다. 친척 몇 명한테만 연락하고 지인들에게는 비밀로 한 것이다. 김윤영한테도 오후 3시경에야 연락했기 때문에 오후 4시경에야 장례식장에서 처음 울음이 터졌다. 김윤영의 울음이다. 그때 김윤영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보던 정민옥이 머리를 돌려 김가영에게 말했다.
“너 삼촌 유서 갖고 있다면서? 보자.”
정재호가 죽은 후에 처음으로 길게 내놓은 말이었으므로 김가영이 몸을 굳혔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허리에 꽂아 놓았던 유서를 꺼내 주었더니 쪼그리고 앉은 정민옥이 김윤영의 울음을 배경 소리로 삼는 것처럼 읽는다. 김가영이 우두커니 정민옥의 옆모습을 보았는데 유서는 외우고 있다.
“누님, 그리고 가영아, 윤영아. 내 장기라도 팔아보려고 터미널 화장실에 갔더니 스티커가 다 떼어졌어. 화장실에 앉아서 생각을 했더니 누가 옆에서 챙겨주지 않으면 장기 판돈도 사기 당할 것 같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했지만 안 되겠어. 누님이 옆에 있는 한 의지하려고 들어서 거머리같이 피만 빨아먹고 지낼 거야. 누님, 가영아, 윤영아. 나 갈게.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혼이 되어서 누님 세 식구한테 신세진 것 갚을게. 이만 안녕.”
이윽고 유서에서 시선을 뗀 정민옥이 우두커니 정재호의 사진을 보았다. 집에 있던 사진을 확대한 것이어서 30대쯤의 낯선 사내가 웃고 있다. 김윤영의 울음도 그친 영안실 안은 조용하다. 영안실에는 세 식구뿐이기 때문이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때 정민옥이 말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김가영의 시선을 받은 정민옥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나한테 말하려고 온 날 밤에 알았어.”
“....”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고맙다고 하잖니? 말이 돼?”
“엄마.”
김가영이 정민옥의 손을 잡았다. 손이 뜨겁다.
“엄마, 내가...”
“난 니 외삼촌이 이렇게 길게 글 쓴것 처음봤다.”
“엄마.”
마침내 김가영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정민옥의 나중 말을 들은 김윤영도 다시 울었으므로 좁은 영안식장은 울음소리로 뒤덮였다. 그러나 정민옥은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오후 9시 반, 윤성일이 다시 핸드폰의 음성녹음 버튼을 누르고는 귀에 붙였다. 그러자 김가영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나 전원 꺼놓고 있을게. 전화 주고받고 할 형편이 아니어서 그래. 그러니까 이해해줘, 형.”
그러더니 잠깐 뜸을 들이고 나서 말을 잇는다.
“내가 며칠 후에 연락할게. 걱정말고 기다려줘, 응?”
그것이 끝이다. 오늘 오전에 전화를 했더니 이렇게 메시지가 녹음되어 있는 것을 저장 해놓은 것이다. 병실 안은 조용하다. 오늘이 14일째, 윤은지는 아직 병원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안성댁은 성북동 저택에 다녀오겠다면서 나갔다. 병실에는 간병인과 둘 뿐이다. 아버지가 다녀간 날 밤에 윤은지한테 이야기 했더니 곧 두형한테 연락을 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형과 형수들의 방문이 조금 많아진 것이다. 그러나 윤성일은 윤은지에게도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오직 분란을 일으키기 싫었기 때문이다. 두 형이 그 말을 전해 듣는다면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형수들도 마찬가지다. 형들은 벌써 저희들끼리 부동산 분배를 끝낸 눈치였다.
“그나저나.”
심호흡을 한 윤성일이 제법 큰소리로 혼잣소리를 했다.
“이자식이 내가 며칠 연락 안했다고 너도 한번 당해보라고 하는 건가?”
그러나 신빙성이 없는 일이고 보아도 믿지 않는 터라 목소리가 약하다.
“도대체 무슨 일야?”
투덜거린 윤성일이 눈을 감았다. 병원의 일상은 단조롭다. 그래서 리듬을 타지 않으면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윤성일은 답답할 때 눈을 감고 지난 일을 떠올리는 버릇이 들었다. 베트남에서의 나흘이다. 눈을 감고 있던 윤성일이 왼손을 폈다가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손가락에 낀 은반지의 감촉이 전해져왔다. 커플링이다.
“잠깐 드릴 말씀이...”
사내가 정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검정색 양복에 검정 넥타이, 유족 같다. 실제로 화장장의 직원이 사내한테 유족 대표인줄 알고 말을 걸었기도 했다. 김가영의 시선을 받은 사내가 눈으로 옆쪽을 가리켰다. 이곳은 성남 화장장에서 멀지 않은 한강 지류의 강변, 방금 정민옥이 정재호의 유골을 강가에 뿌린 후다. 오후 5시 반, 이제 다 끝났다. 강변에 모여선 유족은 여덟 명, 정민옥의 가족 셋과 먼 친척 셋, 그리고 김가영의 친구 서보경과 사내까지다. 강가의 바위 밑으로 다가간 둘은 마주보고 섰다. 사내의 이름은 조기선, 사채업자 사무실 직원이다. 40대 중반, 명함에는 ‘일신상사’ 조기선 부장이라고 찍혀져 있었는데 인상도 좋고 성실했다. 어제 저녁부터 장례식장에서 밤샘을 했고 장례식 절차에 훤해서 화장예약에서부터 비용 처리 문제를 거의 도맡아 도와주었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모레 아파트가 경매처분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김가영은 숨을 죽였고 사내가 길게 숨을 뱉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럼 곧 집을 비워주셔야 될 겁니다. 요즘은 바로 행정집행이 되기 때문에....”
“....”
“제가 딱해서 이런 상황에서도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대비를 하고 계셔야할 것 같아서요.”
“....”
“제가 조금 늦춰보려고 했지만 한두 건도 아닌데다 담당 변호사가 처리하는 것이어서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
“다만 내일까지 원금만 마련해오시면 경매에서 제외되고 소유권을 찾게 되십니다. 각서, 계약서는 다 폐기되고 이자만 1년 안에 갚으시면 되는 거죠.”
사내가 열심히 말했으므로 김가영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마침내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내일까지 6천을 만들어요?”
배에 힘을 주었지만 김가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외면한 채 김가영이 말을 잇는다.
“그럴 수 있었다면 외삼촌이 저렇게 되었겠어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김윤영은 옷도 벗지 않고 쓰러져 잠이 들었다. 밤 9시 반, 친척들과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헤어진 것이다.
“엄마, 모레 아파트가 경매처분 된대.”
소파에서 마주보고 앉았을 때 김가영이 말하자 정민옥이 머리를 끄덕였다. 담담한 표정이다.
“으응, 내일 내가 월세방 알아보고 올게. 아마 변두리 쪽은 보증금 1천에 월 20만 원짜리 정도가 있을 거야.”
한 단어씩 힘들게 말한 정민옥의 시선이 힐끗 선반위의 유리병을 스치고 지나갔다. 반 홉 정도 크기의 약병인데 안에 정재호의 유골이 담겼다. 정민옥이 다 버리지 않고 가져온 것이다. 정민옥이 말을 이었다.
“이제 네 외삼촌이 가져간 만큼 우리 식구를 도와줄 거야, 가영아.”
“외삼촌이 불쌍해.”
김가영이 외면한 채 말했더니 정민옥은 가만있었다.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울렸다. TV도 켜지 않고 앉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이 어떤 집인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마련한 세 식구의 유일한 재산이다. 18평형 이 아파트에서 세 식구는 15년을 살았다. 아버지의 추억이 곳곳에 박혀있는 집인 것이다.
다음날 아침, 김가영이 가장 먼저 일어났다. 하지만 오전 8시 반이다. 어머니와 김윤영은 아직도 잔다. 둘의 자는 모습을 보고나서 주방으로 다가간 김가영의 가슴이 울컥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심호흡을 한 김가영이 눈물을 닦았을 때 집 전화벨이 울렸다. 벨소리가 컸으므로 김가영이 서둘러 전화기를 들었다. 둘의 잠이 깰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예, 저 조부장입니다.”
그러더니 사내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가영 씨 아니세요?”
“네, 전데요.”
“아침부터 실례인것 같습니다만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을것 같아서요.”
“....”
“제가 아파트 앞에 있습니다. 잠깐만 말씀이나 듣고 가시겠습니까? 10분이면 됩니다.”
“저기, 무슨 일이신데요?”
“예, 해결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 그럽니다. 하지만 싫으시면 그만이구요.”
“....”
“예, 변호사 앞에서 결정하셔도 됩니다.”
“저, 나갈게요.”
김가영이 얼굴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잠시 후에 둘은 아파트 옆 놀이터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조기선은 수염도 깍지 않은 꺼칠한 모습이다. 그러나 김가영은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은 강했다. 조기선이 한마디씩 또박또박 말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원하신다면 제 이야기를 녹음하셔도 됩니다.”
조기선이 김가영이 쥐고 있는 핸드폰을 눈으로 가리켰다. 심호흡을 한 조기선이 말을 잇는다.
“직업상 룸살롱 마담들하고 잘 압니다. 김가영 씨가 룸살롱에서 일하신다면 당장 6천쯤 선불금으로 지급될 수 있을 겁니다.”
조기선이 똑바로 김가영을 보았다.
“룸살롱에서 몸 파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계약서에 명기 할 수도 있습니다. 김가영 씨 같은 미모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돈 가치를 할 테니까요.”
조기선의 목소리는 자신에 찼고 표정은 열의를 띄우고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요
굿,,즐감,,,
^^
즐감요~
잘 읽고 갑니다^^
저런~~~~
감사
감사히 잘봤습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
늘 감사합니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건가?
잘읽었습니다
감사...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