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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란 중생에게 혜명을 밝혀주는 것이다 | ||||||||||||||||||||||||
흠모 / 동산 스님의 제자 대성 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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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귀영화는 뜬구름이요, 벼슬도 재물도 풀잎 위의 이슬이라.
범어사 주지 소임을 놓고 나니 새삼 ‘공부 못한 죄가 사무쳐’ 뒤늦게 은사 곁으로 다가간 것이라 했다. 은사와 함께 살았던 세월은 4년 남짓. 그리고 스승을 떠나보내고 44년.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기억할 수 없는 것이 더 많고, 보았던 것보다 보지 못했던 것이 너무 많은 제자. 그래서 대성 스님은 새삼 스승을 기록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스님을 모시며 살았던 기억들을 한 톨이라도 놓칠까 기록해놓은 수첩이다. 대성 스님의 손이 멈춘 곳은 1964년 1월 무렵. 대성 스님은 동산 스님의 당시 행적을 줄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동산 스님의 스케줄은 어느 한 달도 빠짐없이 빼곡하게 이어져 있었다. 시골 작은 사찰의 보살계부터 방생법회까지 동산 스님은 쉬지 않고 법문을 다녔다. 세수 76세로 열반에 들던 1965년 3월까지 동산 스님은 기꺼이 길을 나섰다. 세 차례나 종정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선지식이었으나 대중에겐 더없이 가까운 어른이었던 것이다. 요즘의 풍토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선사의 남다른 행보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대강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방에서 그 소리를 들은 동산 스님이 한걸음에 달려나오셔서는 노보살님에게 자상하게 길을 안내해주시는 겁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불교란 중생에게 혜명을 밝혀주는 것이다. 하물며 가까운 길도 가르쳐주지 못한다면 어찌 수행자라 하겠느냐?” 대성 스님은 바로 그 모습에서 불교정화운동의 참정신을 보았노라고 했다. 대중에게 길이 되는 수행자, 어둠을 밝히는 수행자였던 은사를 지금 대성 스님은 다시 만나고 있는 것이다.
대성 스님은 잠시 망설이다가 한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전지 사이즈로 크게 인화된 흑백 사진 속에 동산 스님이 있었다. 서울 종로쯤으로 짐작되는 거리에서 스님들이 가두행진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놀랍게도 동산 스님이 주장자를 들고 지프차 지붕 위에 올라 앉아있고, 그 뒤로 수많은 비구승들이 ‘불법에 대처승 없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뒤따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스님의 안전이 염려되는 아찔한 상황이었으나 흑백사진 너머로 전해지는 동산 스님의 표정은 결연했다.
정화운동의 명분에 대한 이의는 없으나,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지 못했다는 회한만은 비껴갈 수 없는 까닭이다. 하지만 아픔도 컸고 출혈도 컸던 만큼 정화운동의 정신만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승가는 여전히 화합하지 못하고 있고, 출가정신 또한 희미해지면서 군림하는 승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선배스님들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후학들인 우리 자신이 역사를 실패로 만들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드는 거죠.”
특히 모자를 쓰고 법당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호통을 쳤던 일화는 동산 스님이 수행자로서 얼마나 깨끗했으며 권력 앞에 당당했는지를 말해준다. 그만큼 당신의 삶은 더 철저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스님은 평생 대중과 하나 된 삶을 살았는데, 당시 대중들은 스님을 일러 ‘사람이 아니라 기계 같다’, ‘사람이 어찌 저럴 수 있겠느냐’며 가슴을 졸일 정도로 계율과 시간에 있어 한 치의 틈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종정이 된 후에도, 나이가 들어서도 동산 스님은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나 각단 예불을 올렸고, 공양과 운력도 함께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대중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 ‘어서 먹어라, 맛있게 먹어라’ 하면서 당신 입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기뻐하셨습니다. 점심 공양으로 국수가 나오면 ‘ 어서어서 종 쳐라, 빨리 먹자’ 하시면서 대중을 편안하게 해주셨고, 그런 특식이 나오는 날이면 ‘원주 왔노? 총무는? 도감은?’ 하면서 일일이 대중을 챙기셨습니다. 얼마나 자비롭고 따뜻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동산 스님 회상에 있으면 배도 부르고 마음도 편하고 공부도 잘된다고들 했지요.”
“한번은 범어사 선원에 노스님이 방부를 드렸는데, 그 어른이 술을 자시고 행동도 함부로 하고 해서 어수선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동산 스님이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질 거라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동산 스님께서는 그 어른께 타박은커녕 극진히 모시면서 돈까지 드리는 거예요. 의외였죠.
그때 저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어른은 젊어서 공부 열심히 하신 분이다. 잘 모셔라. 그러나 저 어른에게서 하나는 배우거라. 수행자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공부하는 수행자를 귀하게 여기며 언짢은 일을 반면교사로 삼게 했던 스승. 그리고 끝내 대중화합을 지켜내고자 애썼던 동산 스님. 불교정화운동 또한 그러한 스님의 염원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대성 스님은 강조했다. 그중 대성 스님은 어떤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감인대(堪忍待)’라는 말을 아십니까? 우리 스님이 늘 강조하셨던 말씀인데, 어떤 조건에서도 견디고 참고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성불의 그날까지 기다리며 정진하라는 가르침이셨겠지요. 제게 동산 스님은 그렇게 간절히 제자들을 품고 기다려주셨던 스승입니다. 지금은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습니다(웃음).”
“가는 길에 은하사도 잘 보시고, 신어산도 잘 보고 가십시오. 한국불교가 첫걸음을 내딛은 곳입니다.” 첫걸음. 대성 스님은 당신 수행의 첫걸음이었던 동산 스님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중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동산 스님 _ 1890년 충북 단양에서 출생하였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12년에 범어사로 출가하여 이듬해 용성 스님을 은사로, 성월 스님을 계사로 수계하였다. 범어사 조실, 해인사 조실,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였으며, 불교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불교정화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65년 3월, 세수 76세 법랍 53세로 입적했다. 대성 스님 _ 1961년 동산 스님을 은사로 범어사에서 출가했다. 범어사 주지를 맡아 ‘설선대법회’를 개최했으며, 대중과 함께하는 불교 문화포교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최근에는 은하사에 주석하며, 동산 스님과 불교정화운동사 재정립을 위해 김광식 박사와 함께 『동산대종사와 불교정화운동』, 『범어사와 불교정화운동』을 출간했다. 현재 동산 스님의 뜻을 선양하며 수행의 길을 걷고 있다. |
첫댓글 초임지에서 보결을 마다하고 다니시던 교감선생님의 말씀이 불현듯 생각납니다. "아이들이 수업을 받지 않고 있는데 교감이면 무슨 대단한 벼슬이라고 보결을 하지 않느냐? 당연히 아이들을 위해 해야한다고" 진정 중생을 위한 마음을 배웁니다. 바로 보현행원이라는 생각도요. 대중의 화합을 깨는 일, 계율을 지키지 않은 이에게는 용서치 않음에서 모든 것을 아우러는 것이 보현행원이지만 중생을 향한 큰 것을 바라보고 어긋나는 것은 용서치 않는 것도 보현행원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견디고 참고 기다리라.."감인대"...새겨듣습니다..감사합니다.._()_
선배스님들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후학들인 우리 자신이 역사를 실패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스님의 말씀이 귀에 박힙니다. 참으로 자비심 만큼이나 당당하신 동산큰스님의 면모.... 마하반야바라밀 _()()()_
항상 깨끗하고 당당하게, 자비롭고 착하게...명심하겠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동산큰스님의 행장에서 광덕큰스님의 모습을 또 그 모습에서...부불련 단골법사스님이셨던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마하반야바라밀......_()_
자등명, 법등명...더더욱 밝게 나부터 타 오르길............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