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꺼내보는 명품시조 19, 기러기
석야 신웅순
기러기 우난 밤에 내 홀노 잠이 업셔
잔등 도도혀고 전전불매 하난 차에
창 밧긔 굴근 비 소리예 더옥 망연하여라
맹산 기녀 강강월의 시조이다.
기러기 우는 밤에 내 홀로 잠이 없어 희미해져가는 등불을 돋우어 켠다.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창 밖의 굵은 빗소리에 정신은 더욱 멀고 아득하고나.
님과 헤어진 후의 망연한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처량한 기러기 울음소리와 창밖의 굵은 빗소리가 외로움만 더해갈 뿐이다. 화자는 망연자실, 전전반측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님과의 애별은 이렇게도 아프고도 창망하다.
춘향전의 이별요에 “새벽서리 찬바람에 울고가는 저 기러기 한양성내 가거들랑 도령님께 이내 소식 전해주오.”라는 구절이 있다. V자 편대를 이루며 날아가는 기러기에게 내 마음을 전해달라는 것이다. 무정하고 비정한 것이 사랑이다.
발에 감긴 밤하늘이 시려서 우는 기러기
30원이 없었던가
막차 놓친 외기러기
못 가눠
뽑은 외마디
둘 데 찾는 이 기러기
- 서벌의「서울․3」전문
자신을 막차를 놓친 외기러기라고 했다. 발에 감긴 밤하늘이 시려서 울고 있고 30원이 없어서 막차를 놓쳤다. 가누지 못해 외마디를 뽑으며 자신의 몸 둘 곳을 찾고 있다. 그래서 ‘꺼억꺼억컥’ 기러기 외마디 소리를 뽑아내는 것인가. 얼마나 절절했으면 시린 밤하늘을 혼자서 뽑아내는 것인가. 자신이 처한 환경과 간난의 신세를 기러기를 통해서라도 독백해야하는 마음이 참으로 시리고도 가슴이 아프다.
기러기는 애별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간난의 상징으로도 나타나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기러기는 우리들의 아픈 삶을 달래주고 위로해주는 친근한 벗이 되었다.
섣달 그믐 객지의 여관에 든 나그네에게는 방 안의 등불은 더욱 차갑고도 쓸쓸하다. 객심에 기러기 울음은 나그네에게 더욱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있다.
달 밝고 서리친 밤 울고 가는 저 기러기야
소상동정 어데 두고 여관한등 잠든 나를 깨우느니
밤중만 네 우름 한소리에 잠 못 이뤄 하노라
달 밝고 서리친 밤, 울고 가는 저 기러기야. 소상동정 어디 두고 여관한등에 잠든 나를 깨우느냐. 한밤중 네 울음소리에 잠 못 이뤄 하노라. 석암제 시조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여창 지름 시조이다.
애별, 간난 말고도 객심에도 기러기 울음이 등장하고 있으니 기러기는 이미 우리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아프고, 고달프고, 외로운 심정을 대변해주는 친구가 되었다.
평사낙안(平沙落雁), 원포귀범(遠浦歸帆), 산시청람(山市晴嵐), 강천모설(江天暮雪), 동정추월(洞庭秋月), 소상야우(瀟湘夜雨), 연사만종(煙寺晩鐘), 어촌석조(漁村夕照).
소상팔경이다.
기러기, 배, 산, 눈, 달, 밤비, 종소리, 석양 이런 것이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까.
겨울 철새인 기러기가 한 편의 명시가 아니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출처: 신웅순,‘다시 꺼내보는명품시조 19,기러기,주간한국문학신문,2011.1.5.(수)
첫댓글 기러기가 이별을 상징하는 줄 몰랐습니다.
(일자무식~~^^)
그러고 보니 위의 시들 중에 기러기가 나오는 부분들은 이미 어디선가 듣고 가슴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구절들이었네요.
음~~~!
안견의 평사낙안.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 그림 잘 감상하였습니다 ~~
감사합니다.
정가를 하셨으면 조금은 익숙한 시조가 있을 겁니다.
지금 현대시조에도 기러기가 더러 등장하고 있습니다.
문인화에도 등장하고 있어 서예가들에게 운치를 더해주고 있으니 보기가 좋습니다.
기러기 울음이 있어 겨울 하늘이 더 차고 높은가 봅니다.
읽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