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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람과의 전쟁
삼하 10:15-19
15 아람 사람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다 모이매
16 하닷에셀이 사람을 보내 강 건너쪽에 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 내매 그들이 헬람에 이르니 하닷에셀의 군사령관 소박이 그들을 거느린지라
17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매 그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
18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또 그 군사령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19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그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
삼하 10:15-19 / [아람 족속들의 패망] 아람 족속은 자기들이 이스라엘에 하잘것 없이 패한 것을 분하게 여기고 모든 군대를 다시 집결시켰다. 16) 그 당시 아람 족속의 왕들 중에서 가장 강한 자는 하닷에셀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가 나서서 유브라데강 건너편에 사는 아람 족속의 군인들까지 동원시켰다. 이렇게 아람 족속의 대군이 집결되자, 하닷에셀은 자기의 군대 총사령관 소박에게 지휘권을 주어 갈릴리 호수의 동편 헬람으로 진격시켰다. 17) 다윗은 이런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의 모든 장정들을 모아 가지고 요단강을 건너서 헬람으로 아람 족속들의 연합군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마침내 헬람에서 두 진영이 맞붙어 결전을 벌였는데 18) 이번에도 아람 족속들이 이스라엘에 패하여 도주하게 되었다. 다윗은 자기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아람 족속의 전차 700대를 부수고 보병도 4만 명이나 죽였다. 아람 군대의 총사령관 소박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19) 이렇게 이제까지 하닷에셀의 통솔을 받으며 이스라엘과 대결하던 아람 족속의 왕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과 싸워서 이길 승부를 잡지 못하자 이스라엘에 예속되는 조건으로 화친을 청하였다. 그 뒤로 아람 족속은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감히 암몬 족속을 돕지 못하였다.
본문은 다윗의 지혜로운 지도력이 빛을 발하는 내용입니다.
패하였음을 보고 다 모이매(15-16) 연합군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아람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스라엘에 패한 것을 분하게 여기고 모든 군대를 다시 집결시켰습니다. 그 당시 아람 족속의 왕들 중에서 가장 강한 자는 하닷에셀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가 나서서 자기의 통치권 아래에 있는 유브라데 강 건너편에 사는 다른 아람 족속의 사람들까지 소집시켰습니다. 이렇게 아람 족속의 대군이 집결되자, 하닷에셀은 자기의 군대 총사령관 소박에게 지휘권을 주어 갈릴리 호수의 동편 헬람으로 진격시켰습니다. 여기 등장한 하닷에셀은 요단 동편과 유브라데 강 유역 등 수리아 등 넓은 지역를 장악했던 소바 아람국의 왕입니다. 그러니 아람 동맹군의 패배를 더욱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규모로 군사들을 소집하였던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17) 다윗은 적군이 헬람에 진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온 이스라엘 용사들을 모아 요단 강을 건너서 헬람으로 진군하였습니다. 지난번 전쟁에서 다윗 왕이 요압의 정예 부대만을 보낸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이스라엘 온 지파에서 병사들을 소집하여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하며 나아갔습니다. 다윗이 총력전으로 나선 것은 재차 이스라엘에 도전해 온 아람군이 지난번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적의 동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하는 다윗 왕의 지도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18-19) 그 곳에서 아람의 군인들은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가 이스라엘 군대를 맞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아람 거대연합군은 힘없이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고 맙니다. 이 때 다윗은 병거 모는 군인 칠백 명과 기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소박 사령관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특히 아람군 총사령관 소바의 전사는 곧 거대 아람 연합군의 완전한 패배를 의미합니다. 이제 하닷에셀을 섬기며 지원하고 다윗을 대적했던 아람 소국의 왕들이 그 전쟁의 승패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고대국가 간에는 패한 나라는 승리한 나라에 예속되어 조공을 바치며 섬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암몬군과 아람군에게 연전연승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삼하 7:11)의 성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적 용 : 이 전쟁에 임하는 지도자 다윗이 보여 주는 통찰성, 신중성, 지혜로움이 어떻게 나타나났는지 말해보십시오. 다윗을 연전연승케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에서 지금 당신의 삶에 어떤 것들에 승리를 보장하는지 서로 나누어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어찌 되든지 자신과 상관없다고 여기며, 지금 섬기는 교회만 생각하고 거기에만 집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 뜻을 따라 교회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십자가의 복음을 온전히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하시기 바랍니다.
호크마 주석
성 경: [삼하10:16]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아람군의 재패퇴]
하닷에셀이...아람 사람을 불러내매 - 하닷에셀(Hadadezer)은 그 당시 요단 동편과 유브라데 강 유역 등 수리아 지역에서 주도권을 장악했던 소바 아람국의 왕이다. 8:3 주석 참조. 따라서 그는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아람 동맹군의 패배(13, 14절)를 다른 어떠한 아람 왕들보다 더 수치스럽게 여기고선 그의 지배하에 있는 아람국의 군사들을 대규모로 소집하였을 것이다.
헬람 - 아람 동맹군의 재집결지인 헬람(Helam)은 지난번 그들이 요압군에게 패주했던 메드바(Medeba) 들(8절 주석 참조)에서 북쪽으로 약 80km 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이곳은 갈릴리 바다로부터 동쪽으로 약 48km 지점인 오늘날의 알마(Alma)로 알려지고 있다(Ewald, Lange, Thenius).
성 경: [삼하10:17]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아람군의 재패퇴]
저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 이는 지난번 전쟁에서 다윗 왕이 요압의 정예 부대만을 보낸 것과는 달리(7절) 이번에는 이스라엘 온 지파에서 병사들을 소집한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다윗 왕이 이번에는 총력전으로 나선 것은 재차 이스라엘에 도전해 온 아람군이 지난번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새로이 정신적, 군사적인 무장(武裝)을 강화하였을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적의 동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하는 다윗 왕의 신중성과 지혜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곧 전쟁의 승패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물론(12절), 인간으로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진정한 신앙 자세가 아닐 수 없다(마 10:16).
성 경: [삼하10:18]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아람군의 재패퇴]
사만을 죽이고 - 아람 동맹군의 전사자(戰死者) 수를 보여 주는 이 통계는 제 일차로 아람 동맹군의 사망 숫자 이만(8:4;대상 18:4)과 후에 하닷에셀을 도우러 온 다메섹 아람의 지원군 이만 이천을 합산한 수이다(8:5;대상 18:5). 그런데 여기서 이천 명의 오차가 생기는 것은 아마도 계수(計數)의 착오이거나 붙잡힌 아람 군사 얼마가 도주하므로 생긴 오차일 것이다(Lange).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 고대 전쟁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총사령관(16절)의 전사는 곧 그 전쟁의 패배를 의미한다(삼상 17:51-53). 따라서 본절은 아람군 전사자의 통계와 더불어 아람 동맹군의 완전한 참패(慘敗)를 보여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삼하10:19]
주제1: [다윗의 2차 정복 전쟁]
주제2: [아람군의 재패퇴]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 - 이들은 하닷에셀을 지원하여 다윗을 대적했던 아람 소국의 왕들을 의미한다(16절).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 이는 고대 근동 지방에서 전쟁을 치르고 난 후 승자와 패자 간에 맺는 종주권 계약(宗主權契約)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때에 패자는 승자에게 조공을 바쳐야만 했다. 8:6 주석 참조. 아무튼 이처럼 이스라엘이 암몬군과 아람군에게 연전 연승(連戰連勝)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7:11)의 성취라는 의의를 지닌다.
< 설 교 >
분수를 모르고 덤비는 아람왕 하닷에셀
새벽기도 말씀묵상 / 삼하 10:15~19 (우리평화교회 이약로목사)
◈ 성구 : (삼하 10:18)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또 그 군사령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암몬에게 고용되어 다윗과 싸운 소바 아람왕 하닷에셀은 다시 전쟁을 준비한다. 이스라엘에게 패했다는 불명예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8장 3절에 보면 자기의 권세를 회복하려 했다고 말한다. 그와 손을 잡았던 왕들도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다윗을 섬기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닷에셀은 계속해서 다윗에게 대항한 어리석은 사람이다. 자신의 능력을 모르고 끝까지 싸워보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이 많다. 분수를 알아야 한다. 그 결과 아람 군대는 엄청난 피해를 당한다. 그런데 8장 3~5절에는 마병 천칠백 명과 보병 이만 명을 사로잡았고 다메섹 아람 사람 이만 이천 명을 죽였다고 적혀있다. 오늘 본문에는 병거 칠백대와 마병 사만 명이 죽었다고 말한다. 역대상 19장 18절에는 아람 병거 칠천 대의 군사와 보병 사만 명이 죽었다고 적혀 있는데 이것이 가장 올바른 기록으로 여겨진다.
◈하닷에셀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엄청난 양의 놋을 탈취한다. 훗날 솔로몬이 성전을 세울 때 놋바다와 기둥과 놋그릇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대상 18:8). 하닷에셀과 전쟁 중이던 하맛왕 도이가 금그릇, 은그릇, 놋그릇을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다윗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재물을 허락하셨다. 믿음으로 견고히 서면 물질의 복을 얻는다. 돈을 따라가지 말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게 축복의 길이다. (신 8: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다윗의 승리
삼하 10:15-19 / by skd1
🏆 승리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
사무엘하 10장 후반부에는 다윗이 시리아 연합군을 상대로 얻은 놀라운 승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암몬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시작되었던 전쟁이 이제는 강대국 시리아와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 승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신앙의 중요한 교훈을 남겨줍니다.
💪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한 승리
"아람 사람들이 다윗 앞에서 도망하는 것을 보고 저희도 그대로 도망하여 성으로 들어간지라... 아람 사람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다 모여 왔더니" (삼하 10:15-16)
처음 암몬과의 전투에서 아람(시리아) 용병들은 패배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더 큰 군대를 모아 다시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닷에셀 왕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에서까지 군대를 모아 전력을 보강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시리아 연합군은 이스라엘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그들은 수적 우위와 전차, 기마병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싸움에 나갔습니다.
"그들이 다윗에게 전하매 그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마주하여 진을 치고 그와 싸우더니" (삼하 10:17)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주저함 없이 적진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는 단순히 방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요단강을 건너 시리아 군대와 맞서 싸웠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 하나님을 신뢰함에 승리
"아람 사람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하매 다윗이 아람 병거의 말 탄 자 칠백 명과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또 그 군대 장관 소박을 치매 그가 거기서 죽으니라" (삼하 10:18)
다윗이 거둔 승리는 실로 압도적이었습니다. 시리아의 막강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들의 병거 칠백 대와 기마병 사만 명을 물리치는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특히 시리아 군대의 장관 소박까지 전사함으로써 시리아 군대는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승리는 결코 인간의 힘으로만 이룰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떤 이는 병거, 어떤 이는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시 20:7)
다윗은 적의 강력한 무기와 수적 우세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심을 알았고, 그 하나님이 모든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신뢰가 다윗의 승리의 핵심이었습니다.
️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것에 의한 승리
"하닷에셀에게 속한 모든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이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 (삼하 10:19)
다윗의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도덕적, 영적 승리이기도 했습니다. 이 전쟁은 애초에 다윗이 암몬의 왕 하눈에게 베푼 선의가 오해받고 모욕당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은 불의에 대해 타협하지 않고 단호하게 대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다윗의 정의로운 태도를 보시고 그에게 승리를 허락하셨습니다. 다윗은 개인적인 복수나 영토 확장의 욕심으로 싸운 것이 아니라, 부당한 모욕과 공격에 맞서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싸웠습니다.
결국 시리아의 모든 왕들은 이스라엘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게 되었으며, 더 이상 암몬을 돕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 우리 삶에 적용하기: 승리의 원리
다윗의 승리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원리들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삶에서 직면하는 도전과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 배워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라
다윗은 자신의 군사력이나 전략만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전쟁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우리도 삶의 모든 도전 앞에서 먼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시 3:1-8)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얼마나 크고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다윗처럼 우리도 먼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예상치 못한 승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2. 두려움 대신 신뢰를 선택하라
시리아의 강력한 무력 앞에서도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담대하게 전쟁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올 때,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 상황에 압도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신뢰할 것인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사 41:10)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모든 상황이 즉시 좋아질 것이라는 보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우리를 도우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신뢰할 때 두려움을 이기고 승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불의와 타협하지 말라
다윗은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불의한 상황에서 쉽게 타협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시며, 옳은 것을 위해 싸우는 이들과 함께하십니다.
"공의를 행하며 정의를 구하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받으시느니라" (잠 21:3)
때로는 옳은 일을 위해 서는 것이 어렵고 희생이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선택을 존중하시며, 결국에는 정의가 승리하도록 도우십니다.
🙏 승리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다윗의 승리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모든 승리의 진정한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배웁니다. 다윗은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지 않고,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는 많은 시편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힘이요 방패시며, 모든 승리의 근원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27:1)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도전은 다윗의 시대와 다를 수 있지만, 승리의 원리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을 때, 우리도 다윗처럼 삶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이 무엇이든 - 건강의 문제, 관계의 어려움, 직장에서의 도전, 또는 내적인 영적 싸움이든 -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하셨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승리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갑시다.
주께서 선히 여기시는 일
삼하 10:9-19 / 김양재목사
날마다 살아나는 큐티 김양재 목사입니다. 오늘 큐티인 말씀은 사무엘하 10장 9절부터 19절까지예요. 하나님 아버지 담대히 영적 전쟁에 임하여 주께서 선히 여기시는 일을 위해 끝까지 싸워 나가길 원합니다. 말씀해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주께서 선히 여기시는 일을 하려면
1. 공동체와 함께 담대히 싸워야 합니다.
9절에 요압이 자기와 맞서 앞뒤에 친 적진을 보고...
라고 해요. 암몬과 아랍 연합군이 앞뒤로 진을 치고 이스라엘을 협공하는 상황입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지요. 그런데 요압은 당황하지 않습니다. 상황을 정확히 보고 군대를 나눕니다.
9절과 10절을 보니 요압은 이스라엘에 선발한 자 중에서 또 엄선하여 자신은 아람 사람과 싸우려고 진을 치고 남은 백성은 아우 아비새에게 맡겨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합니다. 무작정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주도 면밀하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11절에 요압이 아비새에게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고 해요. 이것이 공동체의 전쟁이에요.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쪽이 돕고 내가 힘들 때 형제가 와서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혼자 잘 싸우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함께 버티고 함께 돕는 것이 믿음입니다.
12절에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요압은 싸움의 명분을 분명히 압니다. 돈 때문에 싸우는 아람 용병들과 달리 이스라엘은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해 싸웁니다. 명분이 있는 싸움과 돈에 팔린 싸움은 이미 승패가 갈린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지금 싸우는 싸움이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인지 하나님 나라와 공동체를 위한 싸움인지 보아야 합니다. 내 기분과 인정 욕구를 위한 싸움이라면 오래 못 갑니다. 그러나 가정의 구원, 공동체 회복, 하나님의 성읍을 위한 싸움이라면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요압은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고 합니다. 최선을 다해 작전을 세우고 서로 돕고 담대히 나아가지만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3절에 요압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아람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려고 나아가니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고
싸워보기도 전에 도망한 그들입니다. 왜죠? 그들은 돈 받고 온 용병이기 때문이에요. 생명을 걸고 싸우는 사람과 돈만 받고 싸우는 사람은 다릅니다. 14절에 보니 암몬 자손도 아람 사람이 도망가는 것을 보고 성읍으로 도망합니다. 용병이 도망하니 전의를 상실한 것이지요. 이렇듯 하나님 없는 연합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적용 질문 드릴게요.
- 지금 어떤 영적 전쟁 앞에 서 있습니까?
- 내 싸움의 명분은 하나님 나라입니까? 아니면 내 자존심입니까?
- 힘든 지체를 돕고 나도 공동체의 도움을 받으며 함께 싸우고 있습니까?
주께서 선히 여기시는 일을 하려면
2. 끝까지 싸우시는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15절에 아람 사람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다 모이매
번 졌다고 끝난 것이 아니에요. 아람 사람이 다시 모입니다. 사탄의 공격도 그래요. 한 번 시험에 이기고 한 번 은혜 받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넘어뜨리지 못하면 다시 모이고 또 다른 방법으로 공격해 옵니다. 그래서 영적 전쟁은 늘 반복됩니다.
16절에 보니 하닷에셀이 강 건너편 아람 사람들까지 다 불러 모아 헬람에 이르고 군사령관 소박으로 하여금 그들을 거느리게 합니다. 자기 권세를 회복하려고 더 큰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지요. 우리 안의 죄성도 그래요. 한 번 꺾인 것 같아도 자존심과 혈기와 음란과 열등감 다시 모여서 공격합니다. 그래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18절에 보면 다윗이 아람 병거 700대와 마병 4만 명을 죽이고 군사령관 소박까지 죽입니다. 세상은 숫자와 힘과 돈을 의지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언약과 말씀으로 싸웁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 선 싸움은 결국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19절에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패배한 아랍연합군들은 결국 다윗과 화친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암몬을 돕지 않아요. 이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나라가 견고해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선히 여기시는 길로 행할 때 원수의 연합도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도 도와야 할 나라가 있고 끊어야 할 나라가 있어요. 내 안의 암몬과 화친하면 안 됩니다. 죄와 타협하지 말아야 하고 사탄과 협상하지 말아야 합니다.
끊어야 할 것은 끊고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승리는 다윗 혼자만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 뒤에 공동체가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혼자 싸우는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만 하나님 나라 공동체 안에서 함께 싸우는 사람은 끝까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 내 안에서 계속 재집결하며 공격하는 죄와 유혹은 무엇인가요?
- 반복되는 영적 전쟁으로 지쳐 있나요? 그래서 내가 끊어야 할 암몬과 화친하려 하지는 않나요?
아버지께서 소천하신 뒤 예수님을 만나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날마다 자기 안에 대적과 전쟁 중이라는 한 성도님의 큐티인 묵상 간증이에요. 저를 때리는 오빠와 그 폭력을 방치하시는 부모님은 제게 버리고 싶은 존재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폐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어요. 이후 아버지는 지인과 의료진 환우들에게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하며 전도하셨지요. 그러나 저는 병 낫는 일 외에는 아무 데도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받은 책 <날마다 큐티하는 여자>를 통해 가족이 저의 구원을 위해 수고했음을 깨닫고 제 맘대로 죄 지으며 산 것을 회개하며 예수님을 만났어요. 또한 사명대로 살다 가신 아버지의 삶이 해석되어 기뻤고 남은 가족이 구원받도록 기도해야 함도 알게 되었지요. 이후 하나님은 이기적인 저를 큐티하는 공동체로 인도하셨어요. 매주 교회 소그룹 모임에서 "효자 남편과 시부모님이 미워서 시부모님께 아이들을 보여주지 않는 복수를 했어요." 라고 내 안의 대적을 고발하며 나눴지요. 그러자 어느새 남편과 시부모님과의 관계가 모두 회복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어요. 요즘 저는 세 자녀를 세상에 엄선된 용병으로 키우고 싶은 야망과 전쟁하고 있어요. 주일 아침마다 상전 노릇을 하는 아이들에게 혈기 부리고 싶을 때면 남편이 "애들도 예배 데려가야지" 라며 마음을 고쳐먹게 도와줍니다. 제 안에 끊임없이 진치는 아람과 암몬을 물리쳐 주시길 주께 기도해요. 믿음의 공동체와 화친하는 자녀로 키우고자 날마다 성령의 전신 갑주를 입고 영적 전쟁에 임할게요. 저의 적용은 교회를 떠난 언니에게 전화해서 안부를 물으며 예배에 초청할 타이밍을 찾겠습니다. 주일 아침에는 자녀들이 좋아하는 모닝버거를 준비하겠습니다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압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라고 외쳤어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싸움에는 반드시 명분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끊임없이 미움과 열등감, 혈기와 욕심이 계속 재집결하며 공격해옵니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죄를 고백하고 함께 싸울 때 하나님이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내 안의 대적을 물리쳐주십니다. 사탄은 반복해서 공격하지만 우리의 왕 되신 예수님이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니 혼자 싸우지 말고 공동체와 함께 담대히 싸우시길 바래요.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믿으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주님! 오늘 암몬과 아람처럼 우리 안에 끊임없이 재집결하는 죄성을 깨닫습니다. 자존심과 혈기 욕심과 열등감이 계속 우리를 공격하지만 혼자 싸우게 두지 않으시고 공동체를 붙여주셔서 함께 버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반복되는 영적 전쟁 앞에서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사탄의 공격이 계속될지라도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끝까지 말씀과 공동체 안에 머물길 원합니다. 내 기분과 자존심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우리 백성과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한 싸움을 하게 도와주시옵소서. 가정의 구원과 공동체 회복을 위해 담대히 싸우고 결과는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맡길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
다윗의 선한 의도를 곡해한 암몬 사람들
성령으로 새롭게 / 사무엘하 10:1-19
선의를 악의로 바꾸는 '잘못된 생각'의 위험성과 영적 분별력
[서론] 모든 전쟁은 '생각'에서 시작된다
다윗은 암몬 왕 나하스가 죽자, 과거에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 조문 사절단을 보냅니다. 다윗의 마음은 순수했고 '선의'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이 친선 방문은 이스라엘과 암몬, 그리고 아람 연합군까지 휘말리는 거대한 전쟁의 불씨가 됩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군사력이 아니라 **'생각'**이 문제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마음의 생각의 중요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론 1] 왜곡된 생각이 불행을 부릅니다 (1-5절)
다윗은 위로하기 위해 신하들을 보냈지만, 암몬의 관리들은 이를 '염탐'하러 온 것으로 단정 짓습니다.
의심의 안경: 암몬의 신하들은 다윗의 선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정말 조문하러 왔겠느냐, 이 성을 엿보고 함락시키려 함이 아니냐"며 왕의 귀에 의심을 집어넣습니다.
수치와 모욕: 하눈 왕은 이 왜곡된 생각에 빠져 다윗의 신하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의복의 중동볼기(엉덩이)까지 잘라 돌려보내는 치욕을 안깁니다.
영적 교훈: 사단은 언제나 하나님의 선의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하나님이 정말 너희더러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물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했던 것과 같습니다. 잘못된 생각의 안경을 쓰면 상대의 진심이 독화살로 보입니다.
[본론 2] 잘못된 판단은 감당할 수 없는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6-14절)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은 암몬은 회개하는 대신, 엄청난 돈을 들여 아람 용병들을 고용하여 전쟁을 준비합니다.
확전되는 비극: 한 번 뒤틀린 생각은 계속해서 잘못된 선택을 낳습니다. 암몬은 다윗에게 사과하면 끝날 일을, 아람 사람 3만 3천 명을 고용하며 대규모 전쟁으로 키웁니다.
요압과 아비새의 협력: 이 전쟁에서 요압과 아비새 형제는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며 믿음으로 맞섭니다. 결국 수많은 아람 군대가 죽고 암몬은 패퇴합니다.
영적 교훈: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끝까지 고집하면, 본래 겪지 않아도 될 고통과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내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며, 그것이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본론 3] 다시는 돕지 않으리라: 악의 연결고리를 끊으라 (15-19절)
패배한 아람 왕 하닷에셀은 다시 군대를 모아 다윗에게 도전하지만, 병거 700대와 기병 4만 명을 잃는 대패를 당합니다.
끊어진 악의 연합: 19절은 중요한 결론을 내립니다. "아람 사람들이 다시는 암몬 자손 돕기를 두려워하니라." 헛된 생각으로 맺어진 악한 동맹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 철저히 깨어집니다.
생각의 정복: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해 오히려 영토를 넓히고 주변 나라들을 복속시킵니다. 악한 의도로 시작된 전쟁이었지만, 하나님은 결국 다윗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영적 교훈: 우리는 누군가의 선의를 곡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무슨 꿍꿍이가 있겠지"라며 의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잘못된 생각의 뿌리를 뽑지 않으면 평생 전쟁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결론] 성령의 생각으로 마음을 지키십시오
암몬 왕 하눈은 다윗의 친절을 '침략의 기회'로 오해하여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생각이 곧 인생입니다. 선한 의도를 선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의 여유가 복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겠지"라는 율법적 생각에 갇혀 있습니까? 아니면 "조건 없이 나를 위해 죽으신 그분의 선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부디 암몬 왕처럼 의심의 안경을 쓰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상황을 **'은혜의 기회'**로 해석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함께 하면 좋은 질문]
최근에 다른 사람의 진심을 오해하여 관계가 틀어진 적은 없나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의 고정관념이 그 말씀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나요?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다 모이매
삼하 10:15~16 / 헵시바
4. 아람과 다윗의 군대가 전쟁의 재 대결(삼하10:15~19).
15절. 아람 사람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다 모이매
“시리아 사람”은 히브리어로“높혀지다”란 뜻으로“아르몬”에서 유래하였다. 메소포타이미아와 시리아를 주요 도시였던 곳이며. 아람족(시리아인)이 살던 곳이다. 이스라엘은 다메섹을 중심으로 한 이들 왕국과 많은 접촉을 가졌으며 전쟁도 자주 치루었다. 시리아와 거의 동의어로 이것은 팔레스타인 북동부 티그리스강 북쪽으로 다소 서쪽으로 지중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아람은 메소포타미아 즉 히브리 사람들이 아람, 나아림이라 부른 지역과 두 강의 아람이라 부른 지역을 포함한다(창25:20, 48:7), 그러므로“시리아”라고도 부른다.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패하였음”는 히브리어로“나가프”인데“여호와께서 어떤 온역으로 사람을 치심을 뜻하기도 하며, 찌르다, 부딪치다, 때리다, 강타하다, 패배하다, 맞다, 도망치다”을 뜻한다.“보고”은 히브리어로“라아”인데“보다”을 뜻한다, 즉 눈의 활동으로“나타나다, 조사하다, 경험하다, 바라보다, 주의깊게 보다, 조심스럽게 관찰하다”란 의미이다. 이들은 암몬 나아스의 아들 하눈에게 돈을 받고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다윗의 군대(요압과 그 아우 아비새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에 패배한 자들이다.
16절. 하닷에셀이 사람을 보내 강 건너쪽에 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 내매 그들이 헬람에 이르니 하닷에셀의 군사령관 소박이 그들을 거느린지라
“하닷에셀”은 히브리어로“하다르에제르”인데“에돔사람 하달”을 뜻하는“하다르”와,“원조, 도움”을 뜻하는“에제르”에서 유래한 것으로“도움”을 뜻하며 다윗 왕 시대에 아람(시리아)의 왕을 뜻한다. 즉 하닷에셀은 그 당시 요단 동쪽과 유브라데스 강 유역 등 시리아 지역에서 주도권을 장악했던“소바 아람국”의 왕이다.
“사람을 보내 강 건너쪽에 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 내매”
“하닷에셀”은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아람 동맹군의 패배하는 것을(13, 14절) 다른 어떠한 아람(시리아) 왕들보다 더 수치스럽게 여기고 그가 지배하고 있는 강 건너(유프라 데스강)에 있는 아람(시리아)국의 군사들을 대규모로 소집하였다.
“그들이 헬람에 이르니”
여기서“그들”은“강 건너(유프라 데스강)에 있는 아람(시리아)의 소국으로 하닷에셀에게 소집된 군사들을 뜻한다.“헬람에 이르니”에서“헬람”은 히브리어로“힘, 권능, 용기”을 뜻하는“하일”에서 유래한 것으로“유브라데스 강 근처에 있는 요새의 마을”로“메드바들”에서 북쪽으로 약 80km 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이곳은 갈릴리 바다로부터 동쪽으로 약 48km 지점인 오늘날의 알마(Alma)로 알려지고 있다.
“하닷에셀의 군사령관 소박이 그들을 거느린지라”
“군사령관”은 히브리어로“사르”인데“주권을 소유하다, 통치 하다”을 뜻하는“사라르”에서 유래한 것으로“지도자, 통치자, 특히 군대 대장, 사령관”을 뜻한다.“소박”은 히브리어로“쇼바크”인데“번성한 가지,넝쿨진가지”을 뜻하는“소베크”에서 유래한 것으로“하닷에셀의 군대 장관을 뜻한다. “그들”은 “강 건너(유프라 데스강)에 있는 시리아 국의 소집된 군사들”을 뜻한다. 즉 소박은 유프라데 강을 건너온 시리아 소국에서 온 군대의 군 사령관으로 그들을 거느렸다.
이방인과 이스라엘
사무엘하 10:6-19 / 은석교회
<본문>
암몬 자손이 자기가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벧르홉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과 마아가 왕과 그 사람 일천과 돕 사람 일만 이천을 고용한지라 다윗이 듣고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내매 암몬 자손은 나와서 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소바와 르홉 아람 사람과 돕과 마아가 사람들은 따로 들에 있더라 요압이 앞 뒤에 친 적진을 보고 이스라엘의 뺀 자 중에서 또 빼서 아람 사람을 대하여 진치고 그 남은 무리는 그 아우 아비새의 수하에 붙여 암몬 자손을 대하여 진치게 하고 가로되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요압과 그 종자가 아람 사람을 향하여 싸우려고 나아가니 저희가 그 앞에서 도망하고 암몬 자손은 아람 사람의 도망함을 보고 저희도 아비새 앞에서 도망하여 성으로 들어간지라 요압이 암몬 자손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라 아람 사람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다 모이매 하닷에셀이 사람을 보내어 강 건너편에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 내매 저희가 헬람에 이르니 하닷에셀의 군대 장관 소박이 저희를 거느린지라 혹이 다윗에게 고하매 저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승의 사람과 마병 사만을 죽이고 또 그 군대 장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이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사무엘하 10:6-19)
<설교>
다윗이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었으나 하눈은 다윗이 자신의 성을 탐지하여 함락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고 다윗의 신복들을 모욕하여 돌려보냅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전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 본문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6절을 보면 “암몬 자손이 자기가 다윗에게 미움이 된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벧르흡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과 마아가 왕과 그 사람 일천과 돕 사람 일만 이천을 고용한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눈이 다윗의 신복을 모욕하고 보낸 뒤에 다윗이 분노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기들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경우 그들이 할 일은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눈은 여러 곳에서 군사들을 고용하게 된 것입니다. 고용했다는 것을 보면 돈을 주고 군사를 사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방인의 방식입니다.
하눈은 다윗에게서 다만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많은 군사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많은 사람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 생각이며 이방인의 전형적인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것이 다윗의 많은 군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군사만 많이 모으면 다윗을 대적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니 사람만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 이방인들을 나무랄 입장이 되지를 못합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을 말씀드리고 우리는 그들처럼 살지 말자가 아니라 이미 그들, 즉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을 보자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지금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이방인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하나님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사람을 보며 살아온 존재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전도를 빙자하여 사람을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수가 교회의 크고 작음을 결정하게 되고, 교회의 크고 작음은 인간의 자존심과 연결되어 이기에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교회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생각이 아닙니까? 이것이 다윗의 대적하기 위해 돈을 주고 군사를 사 모으는 암몬이라는 이방인 방식인 것입니다.
총회가 열릴 때마다 끊이지 않는 것이 총회장 투표 부정입니다. 총회장에 당선되기 위해 자기 편 사람을 만들려고 돈을 얼마를 풀었다는 말이 항상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고 있는 이방인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정당한 것입니까? 은석교회는 사람을 모으기 위한 의도로 총동원 전도주일과 같은 행사를 하지 않으니 사람을 보지 않는 정당한 교회입니까? 만약 그렇게 본다면 눈이 어두워져 있는 소경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역시 정당한 사람들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도 사람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겉으로만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을 들어서 암몬과 암몬을 돕는 아람을 치고 이스라엘로 승리하게 하는 내용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분명 다윗의 은총을 거부한 암몬 자손이 잘못해서 일어난 전쟁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나는 정당하고 저들은 나쁘다는 구별만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구별이 ‘하나님은 내편이다’는 잘못된 생각을 이끌어 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왜 잘못되었는가는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들여보낸 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기 위해 애굽에 재앙을 내리십니다. 결국 마지막 장자 재앙에서 이스라엘이 생명을 얻고 애굽을 나오게 되지만 애굽은 악한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은 정당한 하나님의 백성들이어서 그들을 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시 애굽과 다를 바 없는 이방인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광야에서의 원망으로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애굽의 것을 사모함으로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을 후회하는 것이야 말로 이방인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이스라엘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결국 정당하고 의로운 자들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악한 자들이 들어간 것입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악해도 봐주는 방식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악함을 어린양의 희생으로 대속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다른 점은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가 모르는가?’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수없이 강조한 것 중 하나가 행위를 가지고 타인과 자신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나쁜 행동을 했을 때 그같은 행동을 하지 않은 자신은 아주 정당하게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것이 곧 행위를 가지고 구별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별을 하는 그 순간 나는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거부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눈이 다윗의 은총을 거부하듯 나 역시 예수님의 크신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정당한 자에게 무슨 은총이 필요하겠습니까? 나는 정당하니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은총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 주위에 있는 이방인은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말을 하면서 자신은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천국 갈 사람으로 여기는 정당성이야 말로 하나님의 원수가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될 분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예수 믿을 것을 권한다면 ‘나는 예수 믿고 있고 너는 안믿는다’는 구별의 자세를 버려야 한답니다. 그리고 ‘나 역시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심정에서 믿음을 권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결국 나 자신부터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고,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모든 것들이 믿음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제가 생각할 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떨 때입니까? 그런 행위가 있는 자신을 정당하게 여길 때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은총을 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교회에서 행하는 것들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하나님의 원수로 서게 하는 도구로 작용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점을 깊이 생각했으면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의미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타인에 비해 정당한 자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사 사람을 100명 살해한 살인자 앞에서도 우리는 정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도 죄의 본성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1장에 보면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왜 10장에 이어 11장에서 그러한 얘기가 등장할까요? 자세한 얘기는 다음 주일에 드리겠지만 중요한 것은 다윗 역시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신뢰했던 다윗이지만 그가 남의 아내를 범합니다. 결국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사람이 못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눈이 군사를 모았다는 말을 들은 다윗은 그들을 대적하기 위해 요압과 용사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아람과 암몬은 패하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분명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을 들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보지 않고 단지 사람만을 보면서 대적하는 이방인의 사고방식을 치기 위한 것이지 이스라엘이 정당해서 그들을 돕기 위해 승리하게 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든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피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그가 바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코 정당할 수 없는 자신을 보는 것, 그리고 나에게는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이 살길임을 아는 것, 이것이 최고의 신앙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신자가 되기 위해 정당하지 못함을 고백한다면 그것은 위장일 뿐입니다. 여전히 정당해지기를 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당한 신자로 여기심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의 여겨주심일 뿐입니다. 결국 정당한 신자로 여겨주시는 것조차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요압이 아우 아비새를 독려하는 말입니다. 요압의 이 말을 보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자신들은 지금 하나님을 위한 정당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자신들을 도우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압의 이러한 착각이 곧 우리들의 착각입니다. 우리는 교회 일은 곧 하나님을 위한 일이고, 하나님을 위한 일이니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는 공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식을 갖고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많은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당을 짓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분명 도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만이 아니고 뭐든 교회와 연관된 일은 하나님의 뜻을 동원합니다. 이것은 모두 엉터리일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했다가 일이 잘 안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봅니다’라고 변명을 합니다. 자기 편리한 대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이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 암몬 자손을 돕기 위해 나왔던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패하자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섬기며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기준에 의해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유리한 대로 자신에게 좋은 대로 변하고 행동하는 이방인 방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믿음 역시 그와 같지 않냐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을 기준으로 하여 변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갑니까? 믿음을 말하면서 항상 내 편한 대로 살고, 나에게 좋은 대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예수 예수’ 하다가도 나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예수님께로부터 등을 돌리는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당치 못한 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게 하시기 위해 이방인을 끌어 들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왜 이토록 우리의 정당치 못함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자신의 정당치 못함을 보는 자가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은혜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를 원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가 곧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뭔가 엉터리로 여겨지는 교회나 교인들을 보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우리 교회, 나는 정당하다는 생각을 가질 위험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가 하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정당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하는 것은 옳고 네가 하는 것은 틀렸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자가 무엇인가에 대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 때입니다.
이방인이든 신자는 세상에 대한 욕망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는 자신의 악함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방인은 언제나 자신의 정당성을 구축하기 위해, 즉 자기 의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라고 하면서도 신앙의 정당성을 갖기 위해 뭔가 하고자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원수된 이방인의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임을 아시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을 아시겠습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께 무척 중요한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제발 건성으로 흘려듣는 것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방인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시고 무엇이 이방인이며 무엇이 참된 이스라엘인가를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