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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사미타(至死靡他)
죽을 때까지 다른 마음을 갖지 않는다는 뜻으로, 다른 마음 품지 않고 절개 지킨다는 말이다.
至 : 이를 지(至/0)
死 : 죽을 사(歹/2)
靡 : 쓰러질 미(非/11)
他 : 다를 타(亻/3)
결혼한 남녀가 성격이 맞지 않아 헤어지는 이혼(離婚)을 장려하지는 않더라도 요즘은 흔히 볼 수 있다. 예전에는 헤어진 후 다른 상대와 재혼(再婚)하는 것이 자유스러웠다가 주자학(朱子學)이 일반화되면서 여자에게는 금지되었다고 한다.
출가한 여성이 남편과 이별하거나 사별하더라도 다시 결혼하는 개가(改嫁)는 특히 사대부 집안에서 금기였다가 조선 말 갑오개혁(甲午改革)때 막을 내렸다고 한다.
죽은 남편을 그리며 정절(貞節)을 지키는 여인을 높이 평가하던 풍습은 중국에서 약 3000년 전부터 전해지는 시를 모았다는 ‘시경(詩經)’에도 등장하니 역사가 오래다.
죽을 때까지(至死)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다(靡他)는 이 성어는 당시 15개국의 노래를 수집한 국풍(國風)편의 용풍(鄘風)에서 유래했다.
어떤 현상이 널리 퍼진다는 풍미(風靡)에서 볼 수 있는 쓰러질 미(靡)는 없어지다, 멸하다란 뜻도 있고, 鄘은 나라이름 용이다. 용풍에서 첫머리에 나오는 ‘백주(柏舟)’는 잣나무로 만든 배를 말하는데 그 배를 젓는 젊은이를 사모하는 처녀의 노래다.
해설한 모시(毛詩)에 노래에 관해 따르는 이야기가 있다. 위(衛)나라 세자 공백(共伯)과 결혼한 공강(共姜)이란 여인이 남편의 요절 이후 청상(靑孀)을 걱정하는 친정어머니에게 개가하지 않겠다는 것을 맹세하는 내용이라 한다.
어려운 글자가 나오지만 전반부를 보자.
汎彼柏舟 在彼中河
(범피백주 재피중하),
두둥실 저 잣나무 배 황하 한 가운데 떠 있네
髧彼兩髦 實維我儀
(담피량모 실유아의),
배위의 더벅머리 총각 진실로 내 짝이라네
之死矢靡他(지사시미타)
죽을지언정 다른 마음을 갖지 않고 따르리
母也天只 不諒人只
(모야천지 불량인지)
어머님은 곧 하늘이지만 어찌 내 마음을 몰라주실까
모야천지(母也天只)는 나를 기르신 어머니가 하늘과 같다는 말이다. 원시에 나오는 대로 지사미타(之死靡他)로도 쓰고 백주지조(栢舟之操)라 해도 뜻이 같다.
글자도 어렵고 뜻도 케케묵은 이 말은 그러나 정절만 찬양한 것이 아니라 죽어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 지사의 절개도 포함한다.
한 임금에 대한 충성이 변치 않아 죽음이 닥치더라도 두 마음을 가지지 않는 굳건한 의지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신을 영원히 기리는 데서 나타난다.
백년해로(百年偕老)를 약속하고도 헤어지는 부부를 흔히 볼 수 있듯이 한 지도자만 따르는 정치인은 드물고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철새만 자주 눈에 띈다. 굳건한 지조는 예나 지금이나 높이 우러르는데도 그렇다.
▣ 사인 안윤과 절개를 지킨 여종(志操)
부마(附馬)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鄭顯祖; 세조의 사위)에게 양주(楊州)에서 부유하게 사는 종이 있는데, 딸을 낳아 잘 키웠습니다. 뛰어나게 아름다워 사인(士人; 벼슬 없는 선비) 안윤(安棆)이 보고 반하여 데려다 첩으로 삼으려 하니, 정현조가 듣고 노하여 말하였습니다. "어찌 종년을 마음대로 사인에게 시집을 보낼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본집에 잡아와서 어린 종에게 주어 처로 삼게 하려 했는데, 여종이 몰래 알고 분하여 어떻게 할 바를 몰라 담을 넘어 안윤에게 가서 죽음으로써 사랑을 맹세하니, 안윤은 더 없이 기뻤지만 역시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수일 만에 정현조가 사람을 시켜 다시 잡아간 후로 그림자도 보지 못했는데, 어느 날 여종이 방안에 몰래 들어와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후에 안윤이 어둠을 타서 성균관으로부터 홀로 광효전(廣孝殿) 뒤 재를 넘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때마침 초가을이라 산 위로 달이 반쯤 나오고 주위는 고요하며 행인도 끊어졌었습니다. 안윤이 죽은 여종이 그리워져서 애달프게 읊조리는데, 조그마한 발자국 소리가 소나무 사이에서 나오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죽은 여종이었습니다.
안윤이 그가 죽었음을 오래 전에 알았으므로, 분명 귀신이려니 하였지만 너무도 생각했던 탓으로 더 의심도 않고, 그의 손을 잡으면서 말하였습니다. "어찌 여기까지 왔소." 그러자 갑자기 보이지 않으니 안윤이 목 놓아 통곡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안윤은 마음의 병으로 여러 해 동안 먹지 못하다가 죽었습니다.
참판 김세자(金細子)는 이욱과 동갑 친구이고 안윤과는 사촌이라서 항상 이 일을 이욱에게 얘기 해 주었고, 사문(斯文) 유효장(柳孝章)도 안윤과 동서(姨婿)라 역시 이 일을 얘기하면서 무척 한탄하였습니다. 그들은 여종을 들어 "비록 사족(士族; 문벌이 높은 집안)의 부녀로 예법을 지키는 가문에서 생장하였더라도 능히 행하기 어려운 것을 천한 여종으로 애당초 예의(禮義)와 정신(貞信)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한 남편만 좇고 다른 데는 가지 않기로 하여 죽어가면서까지 욕됨이 없었으니, 옛 열녀인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하며 모두 안타까워했습니다.
지조(志操)는 꿋꿋한 뜻과 바른 조행(操行)을 말하며 정조(貞操)는 여자의 깨끗한 절개를 뜻하는 말로 이들은 이성관계에서 순결을 지키는 것을 두고 한 말들입니다. 시인 조지훈(趙芝熏)은 그의 '지조론(志操論)'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조와 정조는 다같이 절개에 속한다.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조는 육체적인 것이라고들 하지만 알고 보면 지조의 변절도 육체 생활의 이욕(利慾)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도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모든 지조와 정조는 밝은 지혜를 바탕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 지조(志操)를 지킨 위인 삼학사
우리 역사를 볼 때 국내적으로 정권과 관련해서 지조(志操)를 지킨 분들은 사육신(死六臣)이고, 외국의 침략에 맞서 항복하기를 끝까지 거부하고, 절개를 지키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분들은 삼학사(三學士), 홍익한 · 윤집 · 오달제이다.
1636년(인조 14년) 12월 청나라 태종(皇太極/황태극)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에 침입해온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인조임금은 강화도로 피란하려다가 적군이 앞길을 막아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다. 여기서 45일 동안 항전했는데 신하들은 항복을 하자는 주화파(主和派)와 끝까지 결사항전해야 한다는 척화파(斥和派)로 나뉘었다.
이후 삼전도(三田渡; 현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서 인조임금이 수항단(受降壇) 상에 앉은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 번 크게 엎드려 절하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아홉 번 이마를 땅에 부딪침)의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했다. 우리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일이다.
청태종은 소현세자, 봉림대군 두 왕자와 그 가족 그리고 척화파인 홍익한 · 윤집 · 오달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인질 또는 포로로 청나라 수도인 심양(瀋陽; 봉천)으로 잡아 갔다. 청태종은 이들 삼학사의 항복을 받고자 회유를 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러자 청태종은 판자에 긴 못을 쭈-욱 박은 여러 개의 판자를 자기 앞에다 엎어 놓아 못으로 된 가시밭길을 수 m나 만들어 놓고 이 세 사람이 맨발로 걸어서 자기 앞으로 오도록 하는 고문을 했다. 홍익한이 앞에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두 명 중 한명이 상을 찡그리자 홍익한이 왜 상을 찡그리느냐고 고함을 치자 씩씩하게 걸어서 청대종 앞으로 갔다.
청태종이 이제 항복하라고 하자 못한다고 하자 청태종은 자기 무릎을 탁 치면서 “조선의 왕은 이렇게 지조가 있는 훌륭한 신하를 두었으니 참으로 부럽도다!”라고 하면서 탄복,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3명을 비록 처형했으나 그 기개와 충절을 기려 청태종은 심양성 서문 밖에 사당과 추모비를 세워 추모하도록 하였으며, 추모비에는 “삼한산두(三韓山斗; 태산같이 높고 북두칠성같이 빛나는 삼인)”라는 비문을 내렸다. 이 비는 현재 중국 요녕성 심양시 발해대학(渤海大學) 교정 내에 두 동강 난 채 보관되어 있는데 높이 2m 폭 80㎝다.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 내에 있는 현절사(顯節祠)는 이 삼학사의 우국충절(憂國忠節)을 기리는 사당(祠堂)이다.
병자호란 3년 후인 인조 17년(1639) 12월에는 청태종의 조선 정복을 기념하도록 대청황제공덕비 (大淸皇帝功德碑)를 항복 장소인 삼전도에 세웠다. 현재는 원래 위치보다 조금 동남쪽인 서울 송파구 석촌동 289-3 역사공원에 사적 제101호 삼전도비(三田渡碑)라는 안내문과 함께 서 있다.
이러한 역사유물을 치욕스럽다고 방치 할 것인가? 아니면 더욱 잊지 않도록 선명하게 보존해 후세들에게 산 교육장으로 활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가치관의 문제겠지만 통한의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고, 부국강병을 하지 않으면 또다시 ‘삼전도의 굴욕’은 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후세들에게 일깨워야 한다. 치욕의 역사를 숨긴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주었던 청나라는 3백년 만에 완전히 사라졌고,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이제 명맥을 찾기 어렵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현재 삼전도비 옆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이 어떤 곳인지 무관심하다면 서글픈 일이다.
삼학사의 꿋꿋한 절개는 우리민족의 기개(氣槪)요, 후세들에게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귀감이므로 학생들에게 현절사와 삼전도비를 산 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 지조론(志操論)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强度)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名利)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에 지조 없는 지도자, 배신하는 변절자들을 개탄(慨歎)하고 연민(憐憫)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의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驚醒)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지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識見)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지사와 정치가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독립 운동을 할 때의 혁명가와 정치인은 모두 다 지사였고 또 지사라야 했지만, 정당 운동의 단계에 들어간 오늘의 정치가들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 정당 운동을 통한 정치도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정책을 통해서의 정상(政商)인 이상 백성을 버리고 백성이 지지하는 공동 전선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구복(口腹)과 명리(名利)를 위한 부동(浮動)은 무지조(無志操)로 규탄되어 마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이 난국을 수습할 지도자의 자격으로 대망하는 정치가는 권모술수(權謀術數)에 능한 직업 정치인(職業政治人)보다 지사적(志士的) 품격(品格)의 정치 지도자를 더 대망하는 것이 국민 전체의 충정(衷情)인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염결공정(廉潔公正)청백강의(淸白剛毅)한 지사 정치(志士政治)만이 이 국운을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 모든 정치 지도자에 대하여 지조의 깊이를 요청하고 변절의 악풍을 타매(唾罵)하는 것은 백성의 눈물겨운 호소이기도 하다. 지조와 정조는 다 같이 절개에 속한다.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조는 육체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알고 보면 지조의 변절도 육체 생활의 이욕(利慾)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도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정치인의 무절제와 장사꾼적인 이욕의 계교와 음부적(淫婦的) 환락의 탐혹(耽惑)빠쳐서 놀아난 것이라면 과연 극언이 될 것인가.
하기는 지조와 정조를 논한다는 것부터가 오늘에 와선 이미 시대착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하긴 그렇다. 왜 그러냐 하면, 지조와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요, 시세를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부나 홀아비가 개가하고 재취하는 것은 생리적으로나 가정생활로나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고, 또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개가와 재취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면서도 어떤 과부나 환부(鰥夫)가 사랑하는 옛 짝을 위하여 개가나 속현(續絃)의 길을 버리고 일생을 마치는 그 절제에 대하여 찬탄하는 것을 또한 잊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 능히 하기 어려운 일을 했대서만이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본능고(本能苦)를 이성과 의지로써 초극(超克)한 그 정신의 높이를 보기 때문이다. 정조의 고귀성이 여기에 있다.
지조도 마찬가지다. 자기의 사상과 신념과 양심과 주제는 일찌감치 집어 던지고 시세(時勢)에 따라 아무 권력에나 바꾸어 붙어서 구복(口腹)의 걱정이나 덜고 명리(名利)의 세도에 참여하여 꺼덕대는 것이 자연한 일이지 못나게 쪼를 부린다고 굶주리고 얻어 맞고 짓밟히는 것처럼 부자연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 얼핏 들어 우선 말은 되는 것 같다.
여름에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다가 가을바람만 불면 단팥죽 장사로 간판을 남 먼저 바꾸는 것을 누가 욕하겠는가. 장사꾼, 기술자, 사무원의 생활 태도는 이 길이 오히려 정도(正道)이기도 하다. 오늘의 변절자도 자기를 이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자처한다면 별 문제다.
그러나 더러운 변절의 정당화를 위한 엄청난 공언을 늘어놓는 것은 분반(噴飯)할 일이다. 백성들이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먼 줄 알아서는 안 된다. 백주대로에 돌아앉아 볼기짝을 까고 대변을 보는 것이라면 점잖지 못한 표현이라 할 것인가.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困辱)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정신의 자존(自尊) 자시(自恃)를 위해서는 자학(自虐)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분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奇癖)까지도 지녔던 것이다.
신단재(申丹齋) 선생은 망명 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들어 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무서운 지조를 지킨 분의 한 분인 한용운(韓龍雲) 선생의 지조 때문에 낳은 많은 기벽의 일화도 마찬가지다.
오늘 우리가 지도자와 정치인들에게 바라는 지조는 이토록 삼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 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다. 한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에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菜根談)의 한 구절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딜힘도 없으면서 뜻있는 백성을 속여 야당(野黨)의 투사를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미끼를 기다리다가 후딱 넘어가는 교지(狡智)를 버리라는 말이다. 욕인(辱人)으로 출세의 바탕을 삼고 항거로써 최대의 아첨을 일삼는 본색을 탄로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언의 근원을 캐면 그 박에는 변절하지 말라, 지조의 힘을 기르란 뜻이 깃들어 있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 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일제 때의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 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고 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독립 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권력에 붙어 벼슬하다가 야당이 된 이도 있다. 지조에 있어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들에게도 변절자의 비난은 돌아가지 않는다.
나머지 하나 협의 (狹義)의 변절자, 비난 불신의 대상이 되는 변절자는 야당 전선(野黨戰線)에서 이탈하여 권력에 몸을 파는 변절자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이름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다.
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의 치욕에 김상헌(金尙憲)이 찢은 항서(降書)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主和派) 최명길(崔鳴吉)은 다시 민족정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심양(瀋陽)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다.
최명길은 변절의 사 (士)가 아니요 남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朴重陽), 문명기(文明琦)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하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唾棄) 되기는 하였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민족 전체의 일을 위하여 몸소 치욕을 무릅쓴 업적이 있을 때는 변절자로 욕하지 않는다. 앞에 든 최명길도 그런 범주에 들거니와, 일제(日帝) 말기 말살되는 국어(國語)의 명맥(命脈)을 붙들고 살렸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민족 해방의 날을 위한 유일의 준비가 되었던 맞춤법 통일안, 표준말 모음, 큰사전을 편찬한 '조선어학회'가 국민총력연맹 조선어학회지부(國民總力聯盟 朝鮮語學會支部)의 간판을 붙인 것을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하는 일도 없었다면 그 간판은 족히 변절의 비난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좌옹(佐翁), 고우(古愚), 육당(六堂), 춘원(春園) 등 잊을 수 없는 업적을 지닌 이들의 일제 말의 대일 협력(對日協力)의 이름은 그 변신(變身)을 통한 아무런 성과도 없었기 때문에 애석하나마 변절의 누명을 씻을 수 없었다.
그분들의 이름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실망이 컸던 것은 우리의 기억이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이분들은 반민 특위(反民特委)에 불리었고, 거기서 그들의 허물을 벗겨 주지 않았던가. 아무 것도 못하고 누명만 쓸 바에야 무위(無爲)한 채로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사표가 됨만 같지 못한 것이다.
변절자에게는 저마다 그럴듯한 구실이 있다. 첫째, 좀 크다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백이(伯夷)나 숙제(叔齊)는 나도 될 수 있다. 나만 깨끗이 굶어 죽으면 민족은 어쩌느냐가 그것이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는 투의 이론이요, 그 다음에 바깥에선 아무 일도 안 되니 들어가 싸운다는 것이요, 가장 하치가, 에라 권력에 붙어 이권이나 얻고 가족이나 고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굶어 죽기가 쉽다거나 들어가 싸운다거나 바람이 났거나 간에 그 구실을 뒷받침할 만한 일을 획책도 한 번 못해 봤다면 그건 변절의 낙인밖에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어떤 선비도 변절하여 권력에 영합해서 들어갔다가 더러운 물을 뒤집어쓰지 않고 깨끗이 물러나온 예를 역사상에서 보지 못했다. 연산주(燕山主)의 황음에 어떤 고관의 부인이 궁중에 불려갈 때 온몸을 명주로 동여매고 들어가면서, 만일 욕을 보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 놓고 밀실에 들어가서는 그 황홀한 장치와 향기에 취하여 제 손으로 명주를 풀고 눕더라는 야담이 있다. 어떤 강간도 나중에는 화간이 된다는 이치와 같지 않은가.
만근 (輓近) 30년에 우리나라는 변절자가 많은 나라였다. 일제말의 친일 전향, 해방 후의 남로당 탈당, 또 친구의 민주당의 탈당, 이것은 20이 넘은, 사상적으로 철이 난 사람들의 주책없는 변절임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궤(同軌)다. 감당도 못할 일을, 제 자신도 율(律)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민족이니 사회니 하고 났더라는 말인가. 지성인의 변절은 그것이 개과천선(改過遷善)이든 무엇이든 인간적으로는 일단 모욕을 자취(自取)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우리가 지조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말은 다음의 한 구절이다. "기녀(妓女)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쫓으면 한평생 분 냄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부(貞婦)라도 머리털 센 다음에 정조(貞操)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절(苦節)이 아랑곳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을 보라" 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차돌에 바람이 들면 백 리를 날아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거니와, 늦바람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아직 지조를 깨뜨린 적이 없는 이는 만년(晩年)을 더욱 힘 쓸 것이니 사람이란 늙으면 더러워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직 철이 안든 탓으로 바람이 났던 이들은 스스로의 후반을 위하여 번연(飜然)히 깨우치라.
한일합방(韓日合邦) 때 자결(自決)한 지사 시인(志士詩人) 황매천(黃梅泉)은 정탈(定奪)이 매운 분으로 '매천필하 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이란 평을 듣거니와 그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보면, 민충정공(閔忠正公)과 이용익(李容翊) 두 분의 초년 행적(初年行蹟)을 헐뜯는 곳이 있다. 우늘에 누가 민충정공과 이용익 선생을 욕하는 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분들의 초년을 모른다. 역사에 남은 것은 그분의 후반이요, 따라서 그분들의 생명은 마지막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도도히 밀려오는 망국(亡國)의 탁류(濁流) ― 이 금력과 권력, 사악 앞에 목숨으로써 방파제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지조의 함성을 높이 외치라. 그 지성 앞에는 사나운 물결도 물러서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천하의 대세가 바른 것을 향하여 다가오는 때에 변절이란 무슨 어처구니없는 말인가.
이완용(李完用)은 나라를 팔아 먹어도 자기를 위한 36년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가졌었다. 무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권력에 뒤늦게 팔리는 행색은 딱하기 짝없다. 배고프고 욕된 것을 조금 더 참으라, 그보다 더한 욕이 변절 뒤에 기다리고 있다.
소인기(少忍飢), 이 말에는 뼈아픈 고사(故事)가 있다. 광해군의 난정(亂政) 때 깨끗한 선비들은 나가서 벼슬하지 않았다.
어떤 선비들이 모여 바둑과 청담(淸談)으로 소일하는데, 그 집 주인은 적빈(赤貧)이 여세(如洗)라, 그 부인이 남편의 친구를 위하여 점심에는 수제비국이라도 끓여 드리려 하니 땔나무가 없었다. 궤짝을 뜯어 도마 위에 놓고 식칼로 쪼개다가 잘못되어 젖을 찢고 말았다.
바둑 두던 선비들은 갑자기 안에서 나는 비명을 들었다. 주인이 들어갔다가 나와서 사실 얘기를 하고 초연이 하는 말이 가난이 죄라고 탄식하였다. 그 탄식을 듣고 선비 하나가 일어서며, 가난이 원순 줄 이제 처음 알았느냐고 야유하고 간 뒤로 그 선비는 다시 그 집에 오지 않았다.
몇 해 뒤 그 주인은 첫 뜻을 바꾸어 나아가 벼슬하다가 반정(反正) 때 몰리어 죽게 되었다. 수레에 실려서 형장 (刑場)으로 가는데, 길가 숲에서 어떤 사람이 나와 수레를 잠시 멈추게 한 다음 가지고 온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내놓고 같이 나누며 영결(永訣)하였다.
그때 그 친구의 말이, 자네가 새삼스레 가난을 탄식할 때 나는 자네가 마음이 변한 줄 이미 알고 방문을 끊었다고 했다. 고기 밥맛에 끌리어 절개를 팔고 이 꼴이 되었으니 죽으면 고기 맛을 못 잊어서 어쩌겠느냐는 야유가 숨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찾는 것은 우정이었다. 죄인은 수레에 다시 타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탄식하였다 . "소인기 소인기 소인기(少忍飢少忍飢少忍飢)하라"고.
변절자에게도 양심은 있다. 야당에서 권력에로 팔린 뒤 거드럭거리다 이내 실세(失勢)한 사람도 있고, 갓 들어가서 애교를 떠는 축도 있다. 그들은 대개 성명서를 낸 바 있다. 표면으로 성명은 버젓하나 뜻 있는 사람을 대하는 그 얼굴에는 수치의 감정이 역연하다. 그것이 바로 양심이란 것이다.
구복(口腹)과 명리를 위한 변절은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 자기 변병은 도리어 자기를 깎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핑계는 있다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왜 아기를 배게 됐느냐 하는 그 이야기 자체가 창피하지 않은가.
양가(良家)의 부녀가 놀아나고, 학자 문인까지 지조를 헌신짝같이 아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으니 변절하는 정치가들도 우리쯤이야 괜찮다고 자위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조를 잃고 변절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자임(自任)하는 바를 포기하는 것이다.
▶️ 至(이를 지, 덜렁대는 모양 질)는 ❶지사문자로 새가 땅(一)을 향하여 내려앉는 모양이라 하여 이르다를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至자는 '이르다'나 '도달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至자는 화살을 그린 矢(화살 시)자가 땅에 꽂힌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至자를 보면 땅에 꽂혀있는 화살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목표에 도달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至자는 대상이 어떠한 목표지점에 도달했다는 의미에서 '이르다'나 '도달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至(지, 질)는 ~까지의 뜻을 나타내는 한자어(공간이나 시간에 관한 낱말 앞에 쓰임)의 뜻으로 ①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②영향을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③과분하다, 정도(程度)를 넘다 ④지극(至極)하다 ⑤힘쓰다, 다하다 ⑥이루다 ⑦지향(志向)하다 ⑧주다, 내려 주다 ⑨친근(親近)하다 ⑩표(表)하다 ⑪진실(眞實), 지극(至極)한 도(道) ⑫실체(實體), 본체(本體) ⑬동지(冬至), 절기(節氣)의 이름 ⑭지극히, 성대(盛大)하게 ⑮크게 ⑯최고(最高)로, 가장 ⑰반드시 ⑱마침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이를 도(到)이다. 용례로는 더할 수 없이 급함을 지급(至急), 더할 나위 없이 독함을 지독(至毒), 더할 수 없이 가장 높은 위를 지상(至上), 더할 나위 없이 천함이나 너무 흔해서 귀한 것이 없음을 지천(至賤), 더할 수 없이 어려움이나 아주 어려움을 지난(至難), 지극한 정성을 지성(至誠), 더할 수 없이나 지극히 착함을 지선(至善), 더할 수 없이 크다 아주 큼을 지대(至大), 더없이 높음이나 뛰어남 또는 더없이 훌륭함을 지고(至高), 지금까지를 지금(至今), 몹시 가까움이나 더 없이 가까운 자리를 지근(至近), 지극한 즐거움이나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을 지락(至樂), 더할 나위 없는 재능을 지재(至才), 더할 나위 없이 곤궁함을 지궁(至窮), 더 할 수 없이 존귀함을 지존(至尊), 어떠한 정도나 상태 따위가 극도에 이르러 더할 나위 없음을 지극(至極), 한군데로 몰려듦을 답지(遝至), 수량을 나타내는 말들 사이에 쓰이어 얼마에서 얼마까지의 뜻을 나타냄을 내지(乃至), 장차 반드시 이름이나 필연적으로 그렇게 됨을 필지(必至), 지극한 정성에는 하늘도 감동한다라는 뜻으로 무엇이든 정성껏 하면 하늘이 움직여 좋은 결과를 맺는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지성감천(至誠感天), 지극히 공평하여 조금도 사사로움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지공무사(至公無私), 지극히 공정하고 평등함을 일컫는 말을 지공지평(至公至平), 매우 가까운 곳을 이르는 말을 지근지처(至近之處), 진정한 명예는 세상에서 말하는 영예와는 다르다는 말을 지예무예(至譽無譽), 지극한 정성이 있는 사람은 그 힘이 신과 같음을 일컫는 말을 지성여신(至誠如神), 지극히 도리에 맞는 말을 말없는 가운데 있음을 이르는 말을 지언거언(至言去言), 매우 인자함을 일컫는 말을 지인지자(至仁至慈), 지극히 가깝고도 정분 있는 사이를 일컫는 말을 지정지간(至情之間), 더할 수 없이 높고 순수함을 일컫는 말을 지고지순(至高至純), 죽음을 당하는 처지에 이르러도 끝까지 굽히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지사불굴(至死不屈), 거의 죽다시피 되는 어려운 경우를 일컫는 말을 지어사경(至於死境), 매우 어리석은 듯 하나 그 생각은 신령스럽다는 뜻에서 백성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듯하지만 그들이 지닌 생각은 신령스럽다는 뜻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지우이신(至愚而神), 몹시 천한 물건을 일컫는 말을 지천지물(至賤之物), 절대로 복종해야 할 명령을 일컫는 말을 지상명령(至上命令), 지극한 정성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겠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지성진력(至誠盡力),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일컫는 말을 지우금일(至于今日), 지극히 원통함을 일컫는 말을 지원극통(至冤極痛), 그 이상 더할 수 없이 매우 곤궁함을 일컫는 말을 지궁차궁(至窮且窮), 더할 나위 없이 정밀하고 미세함을 일컫는 말을 지정지미(至精至微), 매우 가난하여 의지할 곳조차 없음을 일컫는 말을 지빈무의(至貧無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도 남을 나무라는 데는 총명하다는 뜻으로 자신의 허물은 덮어두고 남의 탓만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을 지우책인명(至愚責人明), 끊임없는 지극한 정성이란 뜻으로 쉼 없이 정성을 다하자는 의미로 지극한 정성은 단절될 수 없다는 뜻을 나타냄을 일컫는 말을 지성무식(至誠無息), 초나라로 간다면서 북쪽으로 간다는 뜻으로 목적과 행동이 서로 배치됨을 이르는 말을 지초북행(至楚北行) 등에 쓰인다.
▶️ 死(죽을 사)는 ❶회의문자로 죽을사변(歹=歺; 뼈, 죽음)部는 뼈가 산산이 흩어지는 일을 나타낸다. 즉 사람이 죽어 영혼과 육체의 생명력이 흩어져 목숨이 다하여 앙상한 뼈만 남은 상태로 변하니(匕) 죽음을 뜻한다. 死(사)의 오른쪽을 본디는 人(인)이라 썼는데 나중에 匕(비)라 쓴 것은 化(화)는 변하다로 뼈로 변화하다란 기분을 나타내기 위하여서다. ❷회의문자로 死자는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死자는 歹(뼈 알)자와 匕(비수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匕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死자를 보면 人(사람 인)자와 歹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해서에서부터 人자가 匕자로 바뀌기는 했지만 死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죽음'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死(사)는 죽는 일 또는 죽음의 뜻으로 ①죽다 ②생기(生氣)가 없다 ③활동력(活動力)이 없다 ④죽이다 ⑤다하다 ⑥목숨을 걸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망할 망(亡)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살 활(活), 있을 유(有), 날 생(生)이다. 용례로는 죽음을 사망(死亡), 활용하지 않고 쓸모없이 넣어 둠 또는 묵혀 둠을 사장(死藏), 죽음의 원인을 사인(死因), 죽는 것과 사는 것을 사활(死活), 사람이나 그밖의 동물의 죽은 몸뚱이를 사체(死體), 죽음을 무릅쓰고 지킴을 사수(死守), 죽어 멸망함이나 없어짐을 사멸(死滅), 죽어서 이별함을 사별(死別), 죽기를 무릅쓰고 쓰는 힘을 사력(死力),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서로 저버리지 않을 만큼 절친한 벗을 사우(死友),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거나 목숨을 내어 걸고 싸움 또는 그 싸움을 사투(死鬪), 죽음과 부상을 사상(死傷), 수형자의 생명을 끊는 형벌을 사형(死刑), 태어남과 죽음이나 삶과 죽음을 생사(生死), 뜻밖의 재앙에 걸리어 죽음을 횡사(橫死), 참혹하게 죽음을 참사(慘事), 쓰러져 죽음을 폐사(斃死), 굶어 죽음을 아사(餓死), 물에 빠져 죽음을 익사(溺死), 나무나 풀이 시들어 죽음을 고사(枯死), 죽지 아니함을 불사(不死), 병으로 인한 죽음 병사(病死),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말을 사무여한(死無餘恨), 죽을 때에도 눈을 감지 못한다는 말을 사부전목(死不顚目), 죽을 고비에서 살길을 찾는다는 말을 사중구활(死中求活), 죽는 한이 있어도 피할 수가 없다는 말을 사차불피(死且不避), 죽더라도 썩지 않는다는 뜻으로 몸은 죽어 썩어 없어져도 그 명성은 길이 후세에까지 남음을 이르는 말을 사차불후(死且不朽),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라는 말을 사생지지(死生之地), 다 탄 재가 다시 불이 붙었다는 뜻으로 세력을 잃었던 사람이 다시 세력을 잡음 혹은 곤경에 처해 있던 사람이 훌륭하게 됨을 비유하는 말을 사회부연(死灰復燃), 죽은 뒤에 약방문을 쓴다는 뜻으로 이미 때가 지난 후에 대책을 세우거나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말을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끝장을 내려고 덤벼든다는 말을 사생결단(死生決斷), 죽어서나 살아서나 늘 함께 있다는 말을 사생동거(死生同居), 죽어야 그친다로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말을 사이후이(死而後已) 등에 쓰인다.
▶️ 靡(쓰러질 미, 갈 마)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아닐 비(非; 어긋나다, 아니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麻(마)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靡(미, 마)는 ①쓰러지다 ②쓰러뜨리다 ③멸(滅)하다 ④말다, 금지(禁止)하다 ⑤호사하다 ⑥다하다 ⑦물가(물이 있는 곳의 가장자리) 그리고 ⓐ갈다(단단한 물건에 대고 문지르거나 단단한 물건 사이에 넣어 으깨다)(마) ⓑ흩다, 흩어지다(마)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어른이 병으로 편하지 못함을 미령(靡寧), 치레하여 아름답게 꾸밈을 미문(靡文), 변함없이 늘 한결같지 않음을 미상(靡常), 의지할 곳이 없음을 미의(靡依), 물품이나 돈 따위를 모두 써 버리거나 허비함을 미비(靡費), 초목이 바람에 쓸리듯 어떤 위세가 널리 사회를 휩쓸거나 또는 휩쓸게 함을 풍미(風靡), 음탕하고 사치함을 음미(淫靡), 풀이 바람에 나부껴 한쪽으로 쏠리듯이 순종함을 초미(草靡), 경박하고 소신이 없음을 투미(偸靡), 쇠퇴하여 쓰러짐을 퇴미(頹靡), 가볍고 화려한 것을 부미(浮靡), 곱고 화려함을 여미(麗靡), 시들고 느른해짐 또는 쇠하여 피로해짐을 위미(萎靡), 나무나 풀이 바람에 불려 쓰러지거나 쓸린다는 뜻으로 남의 권세나 위력에 눌려 여러 사람이 굴복함을 피미(披靡), 자신의 특기를 믿고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미시기장(靡恃己長), 마음과 힘을 다하여야 한다는 말을 미불용극(靡不用極), 무엇이든지 못할 일이 없다는 말을 미소불위(靡所不爲), 대세에 휩쓸리어 좇는다는 말을 종풍이미(從風而靡), 그 시대의 사람들을 그 일에 쏠리게 한다는 뜻으로 풀이 바람에 몰려 한쪽으로 쓰러지듯이 위세에 딸려서 저절로 복종한다는 말을 일세풍미(一世風靡), 물결이 끝없이 흘러가고 차차로 변천한다는 뜻으로 세상의 추세를 비유해 이르는 말을 파류제미(波流弟靡) 등에 쓰인다.
▶️ 他(다를 타)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 사람)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뜻을 나타내는 也(야, 타)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它(타)의 옛날 자형(字形)은 사람의 발과 뱀으로 이루어졌다. 뱀이 무서운 짐승이므로 사고(事故), 별다른 일, 다른 것의 뜻으로 되었다. 他(타)는 후일 다시 사람인변(亻=人; 사람)部를 붙여 뱀과 구분되는 다른 사람, 다른 일의 뜻으로 쓰인다. ❷형성문자로 他자는 ‘다르다’나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他자는 人(사람 인)자와 也(어조사 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다르다’라는 뜻은 본래 佗(다를 타)자가 먼저 쓰였었다. 佗자에 쓰인 它(다를 타)자는 뱀의 형상을 본뜬 것으로 ‘다르다’나 ‘뱀’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佗자는 이렇게 ‘다르다’라는 뜻을 가진 它자에 人자를 더한 것으로 ‘다른(它) 사람(人)’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었다. 그러나 소전에서의 它자와 也자가 혼동되었었는지 지금은 也자가 들어간 他자가 ‘다르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他(타)는 (1)타인(他人)의 뜻을 나타냄 (2)어떤 명사(名詞) 앞에 쓰이어, 다른의 뜻을 나타냄 등의 뜻으로 ①다르다 ②간사하다(마음이 바르지 않다) ③겹치다 ④짐을 싣다 ⑤남, 다른 사람 ⑥다른 곳, 다른 데, 다른 방면(方面) ⑦딴 일 ⑧두 마음, 부정(不正) ⑨겹쳐 쌓이는 모양 ⑩그, 그 사람, 그이 ⑪누구 ⑫다른, 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를 별(別), 다를 차(差), 다를 수(殊), 다를 리(異),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스스로 자(自)이다. 용례로는 다른 나라를 타국(他國), 제 고장이 아닌 다른 고장을 타향(他鄕), 다른 사람 또는 자기 이외의 사람을 타인(他人), 타향의 달리 일컫는 말을 타관(他關), 남이 죽임 또는 남에게 당한 죽음을 타살(他殺), 동작이 다른 데에 미침을 타동(他動), 자기 외의 다른 사람을 타자(他者), 다른 생각이나 다른 사람의 뜻을 타의(他意), 자기의 의사에 의하지 않고 남의 명령이나 속박에 따라 움직임을 타율(他律), 미래의 세계를 타세(他世), 남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타견(他見), 다른 까닭이나 사고를 타고(他故), 남의 영토 또는 영역을 타령(他領), 어떤 물건이나 장소 등의 다른 쪽을 타면(他面), 그것 외에 또 다른 것을 기타(其他), 남을 반대하여 내침을 배타(排他), 자기와 남을 자타(自他), 나머지 다른 것을 여타(餘他), 남에게 의지함을 의타(依他), 다른 이에게 이익을 주는 일을 이타(利他), 집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나감을 출타(出他), 다른 까닭이 아니거나 없음을 무타(無他), 남의 활을 당겨 쏘지 말라는 뜻으로 무익한 일은 하지 말라는 말을 타궁막만(他弓莫輓), 다른 것은 말해 무엇 하랴는 뜻으로 한 가지 하는 일을 보면 다른 일은 보지도 않아도 미루어 헤아릴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타상하설(他尙何說), 바빠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음을 염불급타(念不及他),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이 아주 확실함을 보무타려(保無他慮), 남에게 더 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자기 것으로 넉넉함을 이르는 말을 불필타구(不必他求)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