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 정도전 선생의 유배지 소재동에서
오랜만이다. 너무 오랜만이다. 그때나 변함이 별로 없이 작막강산인 곳, 삼봉 정도전 선생의 유배지다.
나주 곰탕이나 영산포 홍어를 먹기 위해
나주를 찾는 사람
어느 누가 여기를 찾아올까?
문을 열고 들어가며 ’선생님‘ 하고 불러도 대답이 없다. 먼지 부연하게 앉은 마루에 서서 정도전 선생의 지난날을 반추한다.
정도전이 유배생활을 보낸 회진의 소재동은 소재사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정도전은〈삼봉집〉에서 회진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회진은 큰 산과 우거진 숲이 많고 바다에 가까우며 사람이 사는 동네는 거의 없다” 정도전은 유배생할 초기에 황연이라는 사람의 집에 세를 들어 살았는데 “집이 낮고 기울고 좁고 더러워서 마음이 답답하다”라는 말이나 “빌린 집이 너무도 작고 낮아서 아침저녁 밥 짓는 연기로 덥다”며 한 심사를 토로했던 것으로 보아 생활하기가 불편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하지만 “황연의 집에서는 술을 잘 빚고 또 황연이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술이 익으면 반드시 나를 먼저 청하여 함께 마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술을 좋아했던 정도전에겐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산의 아지랑이와 바다의 장기가 사람의 살에 침입하면 병이 때 없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해가 뜨고 질 때 기상이 천만 가지로 변화하니 구경할 만하다”고 주변 풍경을 기록했던 정도전은 어느 날 산에 올라가 경치가 빼어난 곳을 발견한 뒤 두 칸 짜리 띠집을 지은 뒤 초사라 명명하면서 글 한편을 지었다.
“내가 이 초사에서 얼마나 살 것인지. 내가 이곳을 떠나간 뒤에 이 초사가 비바람을 맞아 무너지고 말 것인지, 들불에 타거나 썩어 흙덩이가 되고 말 것인지, 아니면 후세에 알려질지, 알려지지 않을지, 모두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내가 미치광이 같고 엉성하고 어리석고 고지식하므로, 시대에 버림을 받아 먼 지방으로 귀양 왔는데, 동리 사람들이 나를 이와 같이 후대해 주니, 어찌 그들의 궁한 것을 애처로이 여겨 거두어 주는 것인지, 또는 그들은 먼 지방에서 생장하여 시대의 여론을 들지 못하여 나의 죄를 알지 못함인가. 요컨대 모두 후대함이 지극하니 나는 부끄럽고 감격해서, 시말을 적어 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하였다.
그러나 그가 지은 초사는 흔적도 없고 그 터마저 찾을 수 없다.
유배생활 이년 째가 되던 1376년 1월에 정도전은 그의 고독하고 외로운 심사를 ‘동정에게 올리다’라는 시에 담아냈다.
하늘에 네 철을 나눠 놓으니
추위와 더위가 다 때가 있다네
정월이라 설도 이미 지나가고
입춘도 다가오건만
추위는 아직도 위세를 부려
으스스 살갗에 스며드누나
이역에 묶여 있는 오랜 나그네
떨어진 옷에 헌 솜이 뭉쳤네
새벽 닭이 좀처럼 울지 않으니
밤새도록 부질없이 슬퍼만 하네
……
슬프다 나의 도는 왜이리 적막한고
하지만 정도전을 슬프게 했던 것이 고독이나 외로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가 인편에 편지를 보냈다.
“당신은 평일에 글을 부지런히 읽으시느라 아침에 밥이 끓든 저녁에 죽이 끓든 간섭치 않아 집안 형편은 경쇠를 걸어놓은 것처럼 한 섬의 곡식도 없는데, 아이들은 방에 가득해서 춥고 배고프다고 울었습니다. 제가 끼니를 맡아 그때그때 어떻게 꾸려나가면서도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시니 뒷날에 입신양명하여 처자들이 우러러 의지하고 가문에 광영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는데, 끝내는 국법에 저촉되어서 이름이 욕되고 행적이 깎이며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서 독한 장기나 마시고, 형제들은 나가 쓰러져서 가문이 여지없이 망하여, 세상 사람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현인군자라는 것이 진실로 이러한 것입니까”
아내의 편지를 받은 정도전은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그대의 말은 참으로 온당하오. 나에게 친구가 있어 정이 형제보다 나았는데 내가 패한 것을 보더니 뜬구름같이 흩어지니, 그들이 나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본래 세력으로 맺어지고 은혜로써 맺어지지 않은 까닭이오. 부부의 관계는 한 번 결혼을 하면 종신토록 고치지 않는 것이니 그대가 나를 책망하는 것은 사랑해서이지 미워서가 아닐 것이오.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이 이치는 허망하지 않으며 다 같이 하늘에서 얻은 것이오. 그대는 집을 근심하고 나는 나라를 근심하는 것 외에 어찌 다름이 있겠소. 각각 그 직분만 다할 뿐이며 그 성패와 이둔利鈍과 영욕과 득실에 있어서는 하늘이 정한 것이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닌데 무엇을 근심하겠소”
유배생활 중 유일한 낙은 오로지 술이었다. 그의 시 ‘가을 장마’에서 “슬프다 나의 도는 왜 이리 적막한고 / 술에 아니 빠지고 무엇하리오”하고 노래했고 ‘마을 장마’에서는 “글 보다가 흩어진 책 그대로 두고 / 술 있으니 스스로 잔 기울이네 / 세상 일 잊자는 것 뿐만 아니라 / 깊이 품은 생각 재가 된 지 이미 오랠세”라고 세상을 자조하기도 했다.
그 무렵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심취했던 정도전은 ‘독동정도시후서’라는 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섰다. “도연명이 넉넉한 봉록을 의롭지 못하다 하고 전원의 생활을 달갑게 여긴 것은 추위와 배고픔을 즐거움으로 삼았기 때문이며, 술에 의탁해서 그 지조를 지켰으나 취한 것이 곧 절개가 되었다.
1392년 유월 유배지에서 돌아온 정도전은 공양왕이 폐위된 뒤 곧바로 8월 조준등과 함께
이성계를왕으로 추대했고 6년여에 걸쳐 조선 건국의 초석을 다지다가 1398년 8월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영광의 시절은 짧았고 그리고 그는 악역을 짊어진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조선 개국을 끝까지 반대했던 목은 이색은 정도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벼슬에 나가면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고, 어떤 일을 당해서도 회피할 줄 몰랐으니 옛날의 군자도 우리 정도전과 같은 사람은 많지 않다. 하물며 지금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그를 존경하고 존경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뒤 술이 취할 때마다 “삼봉이 아니었으면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하며 정도전의 공을 치하했다.
조선 초기의 학자였던 권근은『삼봉선생진영찬三峯先生眞贊』에서 그 용모를 두고 “온후한 그 빛과 엄중한 그 용모는 쳐다보면 고산高山을 우러러보는 듯, 다가서 보면 봄바람 속에 앉은 듯하도다. 그 얼굴이 윤택하고 등이 펴진 것을 보니 화순和順이 속에 쌓여 있음을 알겠다.” 하였으며, 정도전의 기상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빛은 만 길이나 솟아오르고 기氣는 긴 무지개 뱉어 놓은 듯, 바야흐로 곤궁 할 때에도 그 뜻이 꺾이지 않고, 귀하게 되어서도 그 덕 더욱 높기만 하도다. 이것은 그 마음이 넓고 스스로 만족한 때문이니, 반드시 정의를 집결하여 속을 채운 데서 오는 것이리라.”
또한 정도전의 재기材器를 두고서는 “선善을 좋아함이 득실하고 일을 처리함이 통명하며, 관대하기가 하해河海의 넒음 같고, 믿음성. 결단성은 시구蓍龜의 공정함 같다. 그 국량局量과 규모는 커서, 또 오활하고 괴벽한 자가 얻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 하였다. 권근은 정도전의 학문과 사업 그리고 문장을 두고서 “그 성리性理의 학문, 정치의 공부는 이단異端을 배척해서 우리 도의 정대함을 밝히고, 정의에 입각해서 일어나는 우리의 개국을 도왔다. 그의 문장은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이며, 그 감화는 세상 끝까지 흡족하였으니, 참으로 국가의 중신이며, 후학의 스승이로다.”하였다.
또한 신숙주도 “개국 초기에 실시 된 큰 정책은 다 선생이 구상한 것으로
당시 영웅호걸이 일시에 일어나 구름이 용을 따르듯 하였으나 선생과 더불어 견줄 자가 없었다”고 정도전을 평하였다.
하지만 그의 업적이 다른 사람의 공으로 둔갑한 경우도 있는데, 신채호가 지은 <사론>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고려사>는 정도전이 저술하다가 역모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김종서가 이어서 완성하였으나, 그도 또한 정변政變에 죽었기 때문에 세조가 드디어 정인지의 지음이라 이름하여 행세하게 된 것이다.“
모내기가 한창인 나주의 소재동을 떠나올 때 문득 삼봉선생의 글 한 편이 떠올랐다.
“첫눈이 내리는 겨울날 가죽옷에 준마를 타고 누런 개와 푸른 매를 데리고 평원에서 사냥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다.”
이렇게 말했다는 호방하게 정도전의 이상은 지금 이 시대에 어떤 의미로 우리들에게 다가오는가?
2022년 5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