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군 전원전멸. 나이프와 삼지창이 오가는 치열하고 격렬한 전장위엔 그 흔적만이 조금 남아있어 방금 식사했던 곳이란 걸 짐작하게 해줄 뿐이다.
“후-”
“잘먹었어, 여보.”
“..........”
포만감에찬 얼굴로 깊이 숨을 내쉬는 후작과 고마운 마음을 담은 표정으로 말하는 소령 그리고 미소로 화답하는 그의 부인을 보며 리노는 아연했다. 방금전에 죽이네살리네 싸울때는 언제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다니.
“리노야, 아직 많이 남았으니 더 먹으렴.”
“아니에요, 잘먹었습니다. 어머니.”
“더 먹지 그러니........”
“정말 많이 먹었어요. 그리고 오늘 저녁 정말 잘먹었습니다.”
“호홋,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며 웃는 어머니를 보며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벌써 17살이지만 어른들이 싸우는 광경을 보는건 여전히 자신을 두렵게 했다. 심장 울리던 소리가 멎고 음식물들이 장에서 기분좋게 순환하고 있었다. 이젠 안정된 모양이다.
“리노야-, 아버진 외할아버지와 의논할것이 있으니 그만 방으로 올라가 보거라.”
“그래, 우리 싸우는거 절대 아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가봐라.”
절대 싸울 것처럼 보입니다만............
“네에-”
리노는 건성으로 길게 대답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련하시겠습니까?
“삐그덕-”
계단을 밟을 때마다 귀를 찌르는 소리가 울려온다. 리노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다 다시 식탁쪽을 바라봤다. 후작과 소령 모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다. 리노의 어머니 미리온은 관심없다는듯 설거지를 하고 있었지만 손 끝에 미세한 진동이 눈에 잡힐듯 말듯 눈가에 아른거린다. 계단을 지나 2층 복도가 펼쳐지고 눈앞에 방문이 철탑을 지키는 병사처럼 버티고 있다.
“철컥-”
리노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금속성 그 특유의 둔중한 소리가 귓가를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하아.........”
리노는 한숨이 터져 나오는걸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냉정하고 이성적인척 해보려 해도 역시 애취급이다. 아니, 놀란 가슴은 진정시키지 못하는 자신은 여전히 어린아이다. 그래도 애취급 따위..........이젠 정말 질색이란 말이다.
방안은 온통 시커먼 어둠 속에 잠겨있다. 검은 검은 검은 검은 방. 검은 검은 검은 옷. 검은 검은 눈동자 검은 나의 마음. 어두운건 싫어 하지만 벗어나고 싶진 않아. 모순된 나의 마음...........
폭풍 속에서 갈라져 나온 나의 마음 한 조각
격정과 공포 속에 휩싸인 꽃잎 위에 띄워 보내네
아-아 언제쯤 닿을 수 있을까요?
나의 진실된 이 마음
아-아 언제쯤 알 수 있을까요?
나의 모순된 이 마음
검은 마음도 하얀 마음도
한없이 추악하고 더러운
한없이 순수하고 맑은
나의 두 마음 모두 깊이 사랑해주세요.
리노는 언젠가 <창세기 전집> (創世記 全集)에서 읽었던 노래 한 소절을 불러봤다. 지금 자신의 심정을 노래 하는것 같지 않은가? 귀족들을 증오하는 주제에, 후작을 미워하면서도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어서 더 이상 멸시 받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기뻐서 미치려 하잖아.
“더러워, 나는........”
리노는 쓸쓸한 어조로 아무도 듣지 못하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집안에는 온통 고요한 침묵속에 잠겨 있었다. 간간히 들려오던 소령과 후작간에 말다툼 소리도 이제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마치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듯한 평온함 너무 평온해서 돌이라도 던지고 싶어진다.
“..........하아.”
가벼운 탄식이 흘러나온다. 너무 일찍 잠들어 버려서 깨버린 것이다. 리노는 바이투스 산맥에만 서식한다는 식인 토끼의 털코트를 집어들고 잠시 망설이다 잠옷채로 걸쳐입었다. 작년 동계군사 훈련때 식인 토끼가 산에서 내려와 인근 주민들과 여행자들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해 힐라인 소령이 군대를 이끌고 소탕했어을때 랴오스둠 영주님이신 체네로 자작님이 선물로 공을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포상금과 함께 나눠주었던 거다.
“철컥-”
또다시 예의 그 금속성의 소리가 들려왔다. 리노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집문에 서자 세찬 바이투스 산맥의 냉풍이 스며나오는게 피부로 느껴졌다. 아무래도 좋다, 이런 기분으론 도저히 잠들지 못할것 같으니까.
“찌이이잉-”
낡은 나무문 특유의 소리를 내며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세찬 바람에 옷자락이 정신없이 펄럭거리고 숨조차 쉬기 힘들다. 고생 끝에 다시 문을 닫고 한발 한발 문앞에 있는 큰 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저 큰 나무를 보자 후작과 소령이 인가와는 멀리 떨어진 이 집에 오기 힘들어서 만들어 놓은 불법 영구 이동 마법진의 복잡한 수식 따위가 나무 표면위에 새겨져 있고 듣기로는 어떤 아티펙트를 나무 밑에 묻었다고 소령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나무 부근으로 다가가자 동장군(冬將軍)이 휘두르는 무시무시한 칼바람도 조금씩 진정되었다. 아마도 나무 믿에 묻어 놓은 아티펙트의 영향일거라고 리노는 단정지어버렸다. 고개를 잠시 들어 보다 검은 인영이 나무에 기대어 있는걸 보고 잠시 흠칫 놀라다가 가족 외에 사람이 나무주변에 있을리 없다는걸 상기해내고 다시 천천히 걸어갔다. 그 사람은.........
“아버지.”
“안자고 이 추운데서 뭘 하는 거냐?”
“그럼 아버지야 말로 여기서 뭘 하십니까?”
소령은 자신의 상태를 생각해내고 피식 웃어버렸다.
“녀석, 버릇없게 굴긴.”
“아버지 없이 자란 탓이죠, 이해해주세요.”
“................”
냉기어린 목소리로 조소하는 아들을 보던 힐라인 소령은 화보다 측은함이 더 들고 안타까운 기분이 들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말씀도 안하시는 군요. 외할아버지가 절 빼앗아가는걸 두고 볼 참인가요?”
“두고 보지도, 막지도 않는다.”
“하아! 참 속편하시겠네요.”
“그래, 속편하다. 버릇없는 아들 이참에 줘버릴까 고민 중 이다.........”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는 힐라인 소령을 보며 리노는 몸이 떨렸다. 목울대가 울렁거리고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건 완전히 화풀이잖아. 나도 은근히 바라던 일인데 차라리 잘됐잖아. 군사지도 보면서 머리싸멜일도 없고 병법서, 검술교본, 정치, 외교와 관련되 어려운 책들 볼 필요 없잖아. 내가 그렇게 공부하고 싶던 역사나 문학책만 봐도 되잖아...........귀족이 되면 내가 하고 싶은 일 따위 자유롭게 할 수 있잖아.........그런데 왜? 눈물 줄줄 흘리는 3류 신파극이라도 기대한 건가?
“뭐라 말씀좀 해보세요. 저는..........”
“리노야.”
힐라인 소령은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힘들고 괴로울때 누군가를 찾아 의지하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다. 넌 이제 어른이 되어야해. 스스로 길을 찾아 나아가거라. 처음엔 낯설고 힘들것이다. 익숙한 것만 찾는 인간은 더 이상의 발전이 없단다. 용기를 내서 너의 희망을 찾아가거라.”
“전.......”
힐라인 소령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훗, 네가 정말 가고 싶지 않다면...........못난 애비와 계속 지내고 싶다면 언제든 찾아와 말하거라. 더 이상 못하겠다고 정말 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주마.”
“...............”
리노는 말없이 소령을 응시했다.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지만 짙은 어둠이 가려줬다. 리노는 다행스러움을 느꼈지만 한마디 말이라도 건냈다간 간신히 잡아두고 있는 눈물들이 터져나올것 같은 느낌 때문에 고개를 살짝 숙여 땅을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 오두막을 벗어난적이 별로 없다. 산맥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 가서 물건 따위를 주문한 일은 많다. 하지만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완전한 타인과 교류한 경험은 거의 없다. 한때 또래 애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려 했지만 자신을 반쯤은 질투하는 눈빛과 질투하는 눈빛으로 보는 아이들 때문에 포기해버렸다.
슈페리온이기에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차고 시리다. 평민은 평민대로 귀족은 귀족대로 리노를 경멸했다. 세상이 싫어서 오두막에서 나오지도 않고 지냈다. 리노에겐 몇안되는 가족과 랴오스둠 중앙 파견군 소속 병사들이 유일한 외부와의 대화창구다. 두렵기만 하다, 모든 것이.
“지금 대답하기 힘들다면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니 다음에 이야기 하자 꾸나. 밤바람도 차니 이만 들어가 볼까?”
“..............”
짐짓 쾌활한 어조로 말하는 소령 뒤로 리노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걸었다. 집안에 들어서자 나올때와 마찬가지로 온통 어둠이었다.
“잘자거라, 내일보자.”
“네......”
리노는 들릴락 말락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숙한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슈페리온인 나에게 잘대해줄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리노는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첫댓글 리노리노. 재미있어요~~^ ^
감사합니다^^ 이렇게 호평받아보는게 얼마만인지 정말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