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장원님이 올리신 사진을 보니,
아련한 기억속에 담겨있는 어릴때의 정서 그대로 입니다.딱 그때 그랬습니다.
제가 어린이 시절이었던 60년대의 우리 삶, 아니 바로 나의 삶과 어찌 그리 똑 같은지요.
명절이라서인지 사진만 보아도 그 시절로 돌아가 딱 그자리에 서 있는 듯 합니다.
파노라마 처럼 스쳐 지나가는,, 가슴 설레 듯 그리운 내 어릴때의 자화상을 보는 듯합니다.눈 밑이 촉촉해 집니다.
농촌에서 자라 그때 그 보리고개를 넘어간 사람들은 아마 하나같은 기분일 것입니다.
내 기억에 너무나 생생한 사진과 그때 저희 아버님이 맨날 들으셨던, 지금도 대를 이어 기억하는 그 노래를 잠시 훔쳐 와서 오늘 나의 즐거움으로 삼으려 합니다. 생활은 지금이 편리하나, 마음은 그때가 제일이었습니다. 촌놈 출신 스프링이 기억하는 그때 그 시절은 이랬습니다.
늦은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신작로가 저러했습니다.
늦가을의 때양볕이 식어가는 딱 그 시간 일 겁니다.넘어가는 햇살에 그림자를 벗삼아 느릿느릿 집으로 돌아갑니다. 저 포플라 나무와 자전거를 끄는 아제의 옆 언덕에 늘어져 있는 호박줄기는 바로 우리집으로 돌아오는 그 길과 어찌 저리 닮았을까? 저 길 끝 자락에서 개울을 한번 건너야 합니다. 마른 콩 가지를 잔득 이고 걸어가는 저 누나는 땀에 미끄러 자꾸 벗겨지는 흰 고무신을 줏으러 몇 번이나 지나 온 길을 뒤 돌아서야 했습니다. 5촌 당숙이신 아제는 발동기 엔진을 수리해서는 짐 자전거에 싣고 내일 타작을 준비했습니다. 왕눈깔 사탕을 한 손에 들고 폴짝 폴짝 뒤 따라가는 저 소녀는 바로 제 셋째 여동생 일겁니다.(저희집은 8남매라 사실 몇 째 동생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당시 타작한 벼는 저렇게 마당이나 논 옆의 큰 길가에서 돗자리를 깔고 말렸습니다.
자주 소쿠리로 퍼서 바람에 쭉정이를 날려 보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저희 할머니와 어머니가 담당이었지요. 콩줄기는 저렇게 도리깨질을 해서 콩알을 솎아 냅니다. 논두렁콩은 메주 콩과는 달리 콩 자반을 만들거나 흰 쌀밥에 섞으면 파르스럼 한 것이 최고의 잇밥이 됩니다. 보리밥에 섞으면 별 감흥이 안 납니다.표시도 없어요.
당시 탈곡기는 발로 밟아 바늘이 듬성듬성한 몸체를 돌리면서,
손으로는 볏단을 몸체에 대고 훑어내는 수동식이였습니다. 그것도 없는 집에서는 바닥에 몸체를 고정하고 볏단을 훑으면 되었습니다. 그 훑어 낸 낱알을 저렇게 길바닥에 말립니다. 아버지는 원래 기계를 만지셨던 분이라, 우리 군에서는 최초로 자동탈곡기란 것을 구입하셨습니다. 처음엔 외부에 발동기를 준비해서 밸트로 연결해서 축을 돌렸으나, 나중엔 경운기를 사용하여 동력을 받았습니다.발로 밟아 축을 돌리는 수고만 없다 뿐이지 손으로 볏단을 몸체에 대는것은 똑 같았습니다.그래도 작업효율이 열 배나 높았습니다. 당시 나락 한 가마 탈곡해 주면 품 삯이 나락으로 닷 되를 받았습니다. 온 동네가 줄을 섰습니다. 아버지의 수첩엔 일정이 빽빽 했습니다. 하양,금호를 거쳐 영천까지 출장 탈곡을 다닐 정도였습니다. 저도 많이 따라 다녔지요. 삼시세끼 잔치상 처럼 푸짐한 밥상을 받을 수 있었던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저희 아버님을 회상하자면,
그 척박한 농촌 생활에서도 참 낭만적인 분이셨습니다.덕분에 우리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농번기가 끝나면 여지없이 객지로 출장을 가서 몇 달간 돌아 오시지 않으셨는데, 보통 남의 과수원이나 소규모 공장의 발동기를 담당하셨습니다. 기술이 있으시니 오라는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바퀴 하나가 어른 키보다 큰 10마력 발동기를 만질 수 있었던 분은 주위 전체를 통 털어 저희 아버님 밖에 안 계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댓가로 새끼 손가락 하나를 바치셨지만...
한번은 몇 달간 일해서 품삯으로 받은 돈으로 덜렁 천일전축을 하나 사는데 다 써 버렸습니다.
그 품삯을 손꼽아 하염없이 기다렸던 우리 어머니.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데요.. 꿈결에 도란도란 이야기가 들립니다. 오랜만에 아버님이 돌아오셨구나 하는 것을 직감으로 느낍니다. 늦은 밤에 아버님이 밥상을 받으셨나 봅니다. 아버지가 말 합니다." 일이(제 이름입니다.) 깨워서 밥 좀 먹으라 하제!!", 그러면 어머니는 한결같이 " 놔 두소 마. 곤히 자는데,,,". 자는 척 침을 꿀꺽 삼키기도 참 힘드는 일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쿵작쿵작 스테레오 음악소리가 들립니다.꿈인 줄 알았습니다.
돌아 누운 채로 실눈을 살며니 떠니,,코구멍만하고 호롱불 밖에 없던 어두침침한 방안이 여기저기 온통 번쩍번쩍 거립니다. 가슴이 두근두근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버님은 한푼이라도 생기면 LP 레코드판을 사 오십니다. 지금 듣고 있는 저 노래. 정말 신물나도록 들었습니다. 특히 첫 사랑 마도로스.마도로스 도돔바.잘 있거라 부산항아.백마강.무역선 오고가는...등등은 지금도 눈 감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부엌을 정지라 했습니다.
화장실은 정낭 혹은 뒷간이라 했구요.우리집 모양이 딱 저랬습니다. 정지간 위치도 그대로고..
어머니가 밭일을 나가시면, 우리들이 알아서 밥을 챙겨 먹어야 했습니다. 정지를 열고 들어가면 진흙으로 다져 만든 부뚜막 위에 두개의 가마솥이 있습니다. 솥 두껑을 열면 두껑 덮힌 밥 그릇 두세개가 항상 있는데, 보리고개 기간에는 그마저도 없습니다. 정지 천장에 커다란 소쿠리가 달려있는데, 우리말로 '아시게' 삶아 놓은 보리밥입니다. 그냥은 딱딱해서 못 먹습니다. 보리밥은 두 번 삶아야 보들보들 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부뚜막을 딛고 그 소쿠리에 담겨 진 보리밥을 한 그릇 퍼 냅니다. 그리곤 다시 삶습니다. 된장을 꺼내어 보리밥에 비벼 먹으면 식사 끝. 보리밥에 된장을 넣고 비빌 때 설렁설렁 비벼야지, 먹기 좋게 숱가락으로 빡빡 떡을 만들어 먹으면 엄마에게 혼 났습니다. 특히 운 좋은 날.몽고간장으로 비비면 천하제일 맛이었습니다.여기에다 미군부대에서 빼 온 버터를 조금만 섞으면,,,아흐~
아무리 힘든 보리고개에도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 밥 그릇 만큼은 보리밥 중간에 쌀밥 한 움쿰 들어가 있게 했습니다. 아버지가 입이 깔깔하시다고, 한 숱갈 뜨고 수저를 놓으시면 그렇게 기쁠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봄에 정지에 들어가기를 참 싫어 했습니다.
따뜻한 봄 볕에 놀다가 밥 먹으러 들어 간 정지는 으스스하고 썰렁해서 왠지 외롭고 서러운 기분이 들어 얼른 튀어 나와 버립니다. 먹을 것도 별로 없지만...최근 일부러 찾아가서 먹는 유명한 무슨 보리밥 비빔밥이나 수제비 뭐 그런거 아직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남들은 추억의 음식이라 하던데,.,,,
그 어려운 와중에 우리 8남매. 단 하나만 잃고 나머지는 다 살려 반듯하게 키워 주신 부모님이 눈물나게 고맙습니다.
그런 기억으로 굴러가는 인생인가 봅니다.
첫댓글 어머..백남숙 아녀요? 연분홍사랑, 꽃잎편지 제 18번인데....결국 깨알같은 글 다 읽게 만드는군요...
설은 역시 어릴때의 설이 최고이엇지요.좀 센티해 졌습니다.
저도 비슷합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네요.
잘 보고 잘 듣고 잘 담아 갑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이것은 저에게도 그대로 이랍니다. 경기도 여주에서 78년까지 살았지요...
사진을 보니 기억이 새롭네요 경제가 좋아지니 사람들이 인정이 없어지면서 너무이기적으로 변해요 물질이풍부하다고 꼭 잘사는것이 아닌것같아요
검정고무신을 신고 버스 꼬랑지의 뽀얀 먼지를 쫒아 가던 시절...이 생각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