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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시 춘궁동 고골일대에는 백제관련 유물이 하나도 없다?
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몽촌토성이 발굴되었다.
그 후 우리나라 역사학계나 고고학계 뿐 만 아니라 온 나라가 한성백제 500년의 도읍지에 대한 논쟁으로 불끈 달아올랐다. 당연히 몽촌토성이라는 것이었다.
풍납토성 발굴이 올해로 10년이 넘었다. 이제는 풍납토성이 한성백제 500년 도읍지라는데 이견을 다는 바보는 없다. 그러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발굴되기 이전까지 우리나라 학자들에 의해 단 한 번도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이 한성백제 500년 도읍지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몽촌토성 발굴이후 몽촌토성 발굴자들은 몽촌토성을, 풍납토성 발굴자들은 풍납토성을 한성백제 500년 도읍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니 온 나라 국민들도 이제는 당연히 풍납토성이 한성백제 500년 도읍지라고 믿고 있다. 한성백제 500년 도읍지가 유령같이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고 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선사와 아방강역고를 쓴 다산 정약용부터 이병도에 이르기 까지 한성백제 500년 도읍지가 하남시 춘궁동 고골일대라고 주장해 왔던 선학들의 그동안의 주장이 하루아침에 보기 좋게 묵사발 난 것이다. 풍납토성은 우리나라 발굴사에 획기적인 사건임이 틀림없다. 역사이래로 고고학적인 발굴이 이토록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발굴자를 포함해서 풍납토성과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많은 수혜를 입고 일약 스타덤에 올라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풍납토성이 한성백제 500년 도읍지가 되는 바람에 현지 주민들의 사유재산권 침해로 인한 피해 또한 적지 않다. 풍납토성이 백제 500년 도읍지가 아니라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지도 않았을 터이고, 그렇게 되면 지금과 같은 갈등도 없었을 터인데.....당시 풍납토성 경당지구가 포크레인에 의해 발굴현장이 훼손되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면 보존하라 라고 지시했고, 급기야 국가사적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역사 이래 국가사적이 이렇게 지정된 예도 없을 것이다. 어쨋거나 풍납토성은 축복받은 유적임이 틀림없다. 현재 풍납토성 내 영어마을에 한성백제연구소가 만들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한성백제 박물관을 인근에 짓겠다고 기자회견 까지 했으니, 이보다 더 축복받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풍납토성이 과연 한성백제 500년의 도읍지인가? 한마디로 ‘아니다’이다. 최소한 건축학자인 필자의 시각으로 볼 때 풍납토성이 한성백제 500년 도읍지도 아닐 뿐만 아니라 백제의 왕성은 더욱 아니다. 지금까지의 발굴 결과를 놓고 볼 때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라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도리어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 아니라는 증거만 더욱 더 나올 뿐이다. 풍납토성을 발굴하고 있는 발굴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같이 해온 말이 있다. ‘아직 발굴이 진행되고 있어서 좀 더 발굴하다 보면 왕궁지가 나올 것이다.’이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풍납토성 발굴현장에서 나온 유구 중 그 당시 백제의 왕궁으로 추정되는 건물지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시인 하는 것이 된다. 사실 지금까지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유구 중 건축학적으로 그 당시 왕궁지로 추정되는 건물지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추후 발굴에서도 백제의 왕궁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발견될 확률은 희박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풍납토성의 거의 전 지역에 걸쳐 시 발굴조사를 한 결과 아직까지 백제왕궁에 사용 되었을 법한 그 흔한 초석 하나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는 건물지는 거의 대부분 불에 탄 움집 형태의 우진육각형 민가이다. 혹자는 장수왕의 공격으로 모두 불탔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필자에게는 그건 건축을 잘 몰라서 하는 무지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풍납토성에서 많이 발견되는 우진육각형 형태의 움집은 475년 장수왕의 공격으로 불탄 개로왕의 왕궁이 아닐 뿐만 아니라 475년 당시의 건물지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건축적으로 볼 때 그 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는 어느 시대의 민초들의 집 자리가 분명하다. 풍납토성을 개로왕의 왕도 한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개로왕의 아들 문주가 천도한 공주 공산성에서 발견되는 가구식 구조로 이루어진 진보된 형태의 건물지와 비교해 건축 구조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 조잡한 형태의 건물지가 풍납토성 건물지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지부터 설명을 해야 한다.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척살된후 25후 동성왕대에 지어진
공주 공산성에 지어진 임류각지의 초석
임류각지의 초석
임류각에 대한 설명, 개로왕이 AD 475년에 죽었으니 정확하게
개로왕 사후 25년후에 웅진에 지어진 건물이다.
공산성내에 임류각지 초석을 토대로 임류각을 재현 복원한 건물
개로왕과 자웅을 겨루었던 장수왕대의 왕궁인 안악궁을 살펴보자. 김일성대학에서 발굴한 안악궁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안악궁은 궁성면적이 11700평, 건축면적 9516평, 52개동에 달하는 건물동수, 2590개에 달하는 거대한 기둥으로 구성된 어마어마한 건물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의 건물이 회랑으로 연결되어 비가와도 왕이 비를 맞지 않고 전체 왕궁을 돌아다닐 수 있게 설계된 조선시대 왕궁과 비교해도 건축적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아니 규모로만 볼 때는 조선시대 왕궁이상으로 큰 규모로 구성되어 있다.
대성산성의 남쪽에 위치한 고구려 장수왕의 안악궁지,
(김일성대학의 발굴보고서 참조) 2590개의 거대한 기둥으로
이루어진 왕궁이다.
우리가 풍납토성을 개로왕의 왕도 한성이라고 주장하기 전에 이러한 건축적인 모순을 우선 설명해야 한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지금 현재 백제 500년 도읍지의 후보로 지목되고 있는 곳은 두 곳으로 압축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동안 몽촌토성을 지목해 왔던 학자들은 몽촌토성이 왕도 한성이라는 주장을 거의 철회한 상태라, 현재로서는 풍납토성과 하남시 춘궁동 고골일대 두 곳으로 압축된 상황이다. 하남시 춘궁동 고골일대에 반기를 드는 학자들의 가장 큰 논지는 하남시 춘궁동 고골일대에서는 백제 관련 유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하남시 춘궁동 고골을 중심으로 그 인근 지역에서 발굴된 한성백제 관련유물의 출토사례를 살펴보고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짚어봄으로서 백제 500년 도읍지인 왕도 한성의 위치를 추적해 보기로 하자. 그리고 더 나아가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조에 나오는 장수왕이 공격한 남북 두 개의 성의 비밀도 함께 풀어 보기로 하자.
하남시 광암동의 백제 횡혈식 석실분
서울 둔촌동에서 하남시 춘궁동 고골로 넘어가는 중간에 남한산성의 줄기인 금암산이 있고 금암산에서 한강 쪽으로 더 내려 가면 이성산성이 있는 이성산이 있다. 금암산과 이성산 사이에 하남시 춘궁동 고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향교고개(일명 사리고개)가 사리고개다. 86년 필자는 백제왕도 한성의 비밀을 가슴에 안고 비오는 여름 혼자 차를 몰고 이 고개를 넘어 갔던 기억이 어제 같이 생생하다. 좁디좁은 비포장 흙 고개 길을 힘겹게 넘어간 이유는 지금이나 그때나 백제왕도 한성의 비밀을 풀기위한 일념에서 였다. 지금 생각하면 역사학자도 고고학자도 아닌 필자가 백제왕도 한성의 유혹에 빠져 20여년 전에 향교고개를 넘어감으로서 인생이 이렇게 바뀔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데 근년 이 향교고개는 그동안 아스팔트 포장도 되고, 2차선이었던 도로도 4차선으로 확장되면서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결과 향교고개의 광암동쪽 산비탈에서 몇 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는데 그중 2기가 백제 한성기 횡혈식 석실분임이 밝혀졌다. 발굴을 지휘한 최정필 교수는 이미 도굴당한 묘광내에서 백제 한성기 토기가 분명한 단경호가 나왔다고 필자에게 일러 주었다.다행히 도로확장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 졌으니 다행이지. 이러한 고분이 하남시 춘궁동을 중심으로 금암산 능선과 건너편 객산 능선에서 필자가 발견한 고분만 100여기에 달하고 있으니 필자가 모르는 고분까지 포함하면 수백 기에 이를 수도 있겠다고 짐작해 본다. 이로서 하남시 쪽에서는 백제관련 유물이 하나도 없다던 일부 학자의 주장이 허구임이 밝혀진 셈이다. 이곳은 하남시 춘궁동 고골지역의 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하남시 이성산성 인근 광암동 수원지 앞 야산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횡혈식 석실분
광암동 수원지 앞 야산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횡혈식 석실분에서
발견된 백제 단경호 두점 이미 도굴된 상태였지만 다행이도 토기
두점은 도굴꾼의 눈을 피해 살아남았다.
이성산성 남문지 인근에서 발굴된 삼국시대 초기 토기?
이성산성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들에게는 유명한 산성일 뿐만 아니라 산성의 초 축 년대가 백제냐, 신라냐, 고구려냐를 놓고 학자들 간에 첨예한 논쟁을 벌이는 산성으로 더 유명하다. 87년 발굴을 시작한 이래로 아직도 발굴이 끝난 상태가 아닌 발굴이 진행 중인 산성이다. 이성산성 8차 발굴보고서에 ‘삼국시대 초기 토기’라는 글과 함께 토기편 사진이 몇 장 실려 있다. 삼국시대 초기 토기라면 분명히 백제 한성기 이외에는 이곳을 점령한 나라가 없어 백제토기라고 해야 옳지만, 왜 발굴보고서에 백제토기라고 하지 않고 삼국시대 초기 토기라고 적어 놓았을까? 여기에는 그만한 사연이 숨어있다. 당시 발굴자가 잘 몰라서 그렇게 적어놓은 것이 아니다. 발굴자는 엄청난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그나마 용기를 내어 삼국시대 초기 토기라고 적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성산성에서 백제 토기가 발굴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필자는 이성산성 발굴현장으로 달렸고 현장발굴자로부터 백제 토기임을 확인 하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돌아왔다. 이성산성에서는 그동안 백제 토기뿐만 아니라 청동기시대부터 통일신라까지 다양한 시대의 토기가 발굴되었지만 유독 백제 토기만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필자는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성산성은 예로부터 선학들에 의해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수없이 해자되어 왔고, 백제시대에 나라의 중심에 있었던 것도 역사적인 사실인데 어떻게 백제시대유물만 빼고 다른 시대의 유물만이 나온다고 하는지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8차 발굴조사가 시행되었으며, 드디어 백제시대 토기가 나왔다니 흥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백제시대 토기는 졸지에 삼국시대 전기 토기로 변절되어 보고서에 실리게 된 것이다. 그 당시 필자도 8차 발굴조사 지도위원회 현장에 있었지만 그날 한국 발굴사에 기록될 역사적 헤프닝이 벌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러나 그날 사건을 아무도 입 밖에 내려하지 않는다. 사건의 발단은 사실 그 훨씬 이전부터 복잡하게 진행되어 왔다. 다만 사건이 지도위원회 현장에서 터졌을 뿐이다. 현장에는 몇 몇 언론사 기자도 있었지만 아무도 그날의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다. 발굴조사 지도위원인 우리나라 원로 고고학자가 발굴보고서를 발굴현장에 집어 던져버린 것이다. 그 원로 고고학자는 이성산성 발굴이 속임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백제시대 유물이 분명히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감추고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겉으로 보기에는 한 원로 고고학자가 후배들을 단순히 질책하면서 화가 나서 보고서를 집어던진 사건으로 볼 수도 있으나 사실은 그 오래전부터 쌓여온 갈등의 정점에서 터진 한국 고고학계의 갈등의 단면을 보여주는 극적인 사건이라고 필자는 진단하고 있다. 이 사건이 터진 후에 작성된 이성산성 8차 발굴보고서의 삼국시대 전기 토기 이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발굴보고서란 발굴자가 발굴을 완료한 후 발굴과정이나 성과를 보고서라는 형식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발굴자의 개인의 편견이 반영되어서도 안 되지만, 발굴자가 발굴유물에 대해 소신 있게 주장할 수 없는 현실이 극적으로 벌어진 사건이 이성산성 발굴보고서 투척사건인 것이다. 이 사건을 보면서 필자는 이 사건 이외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이와 유사한 일들 얼마나 많이 벌어질까, 생각하면 아찔하고 한편으로는 무서운 느낌까지 든다. 이곳도 하남시 춘궁동의 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성산성 남문지 인근의 초축성벽, 세차례에 걸쳐 수축성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성산성 남문지 인근 초축성벽에서 발견된 백제토기들, 8차발굴보고서에는 삼국시대 전기토기라고 분류되어 있지만 발굴책임자인 유태용박사는 필자에게 분명히 백제토기라고 했다.
월간중앙 이항복기자가 이성산성 백제토기와 관련해서 쓴 기사를 참고로 다시 올립니다.
“한성백제는 온조가 나라를 세운 BC 18년부터 고구려의 침입으로 개로왕이 죽고 문주왕이 공주로 천도한 475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 시기 한성백제의 수도는 서울 송파, 강동구와 여기에 접한 경기도 하남시 일원이다. 이곳에서 ‘삼국시대 초기 토기’가 발굴됐다. 삼국시대 초기는 대략 4세기 이전을 말한다.” 이 같은 예문을 주고, 과연 이곳에서 발굴된 ‘삼국시대 초기 토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중 어느 나라 토기인가 하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앞에 제시한 예문만 자세히 읽어보면 답은 뻔하다. 내친 김에 결정적 힌트를 준다. 이 시기 이 지역은 백제의 왕도 혹은 왕도의 변두리 지역이었다. 475년 이후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다 558년 무렵 신라의 진흥왕이 이 지역을 점령하고 신주를 설치하면서 비로소 신라 땅이 됐다.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진 것도 이 때다. 이제 문제를 다시 정리해 보자. 고구려는 475년, 신라는 558년 이전에는 발을 디딘 적이 없는 경기도 하남 지역에서 4세기 이전에 만든 토기가 발견됐다면 이 토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중 어느 나라 토기냐는 것이다. 물론 당시 한반도에는 이들 네 나라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쉬운 문제를 소위 전문가들, 우리 역사학계를 주름잡는 고수들조차 풀지 못했다. 문제가 나온 지 벌써 10년이 가까운데도 손으로 꼽을 정도의 몇몇 학자를 제외하면 모두 틀린 답을 정답인 양 주장하고 있다. 2000년 5월22일부터 7월31일까지 83일 동안 실시된 한양대박물관의 이성산성 8차 발굴조사에서는 대량의 신라 토기와 함께 유의미한 정도의 백제 토기도 발굴됐다. 발굴에 참가했던 한 인사의 말에 따르면 발굴된 백제 토기 파편은 한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의 양동이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 형태도 삼족토기를 비롯한 백제 토기임이 확실한 것들이었다. ‘욕살’이라는 고구려 관직 이름이 적힌 목간도 이때 함께 발굴됐다. 그러나 나중에 나온 8차 발굴의 공식 발굴조사보고서에 백제 토기는 없었다. 보고서의 토기 분류에는 청동기시대 토기, ‘삼국시대 초기’ 토기, 고구려 토기, 신라 토기는 별도 항목으로 구분해 놓았지만 백제 토기는 없었다. 어찌 된 일일까? 발굴 기간 현장에서 열린 발굴지도위원회 회의장. 발굴 책임자인 한양대 배기동(한양대박물관장 박물관협의회장) 교수가 지도위원들에게 미리 배포한 중간 보고서를 읽는 순간 지도위원 가운데 한 명이 벌떡 일어서더니 보고서를 집어던지며 소리질렀다. “무슨 이런 엉터리 같은 일이 있어!” 최몽룡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교수였다. 당시 이 사건은 몇몇 신문에 짤막하게 보도됐다. 그러나 더 이상의 파문은 일지 않았다. 몇 달 후 8차 발굴보고서가 나왔다. 그 보고서에는 앞에서 말한 대로 ‘백제 토기’는 ‘삼국시대 토기’로 변장하고 행간에 숨어 있었다. 한양대박물관은 1986년부터 2005년까지 11차에 걸쳐 이성산성을 발굴했다. 그런데 이전 7차 발굴까지는 아예 토기를 형태별로 분류하지 않아 심지어 청동기시대 토기마저 신라 토기로 읽힐 정도라는 것이 일부 학자들의 우려다. 그렇다면 혹시 발굴된 양이 적어 다른 토기를 백제 토기로 오인한 것은 아닐까?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서로 인접해 있던 만큼 양식이 혼재돼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이다. 흔히 토기는 색깔 모양 경도 등으로 구분한다. ‘회갈색 연질토기 단경호’ 혹은 ‘회청색 경질토기 합’과 같이 분류한다. 그런데 3국의 토기는 그 양식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어 약간의 지식만 갖춰도 쉽게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 관련 학자들의 말이다. 하물며 수십 년 동안 이들 유물만 연구해온 전문가들이라면 한눈에 어느 나라 토기인지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성산성 발굴 과정에서 토기 못지않은 중요한 발굴 성과가 같은 이유에서 가려져 있다. 이 역시 단서는 8차 발굴보고서에 나타나 있다. 백제 토기와 같이 이성산성이 백제성임을 간접적으로 방증하는 유물이 아니라, 이성산성이 바로 백제성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유구의 발굴이었다. 이른바 초축성벽(初築城壁)이다. 현재의 성곽 아래서 초축한 것으로 보이는 성곽 유구가 나타났는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백제성이 분명하다는 것이 발굴 현장에 있었던 한 젊은 학자의 증언이었다. 이에 대해 한양대박물관 측의 8차 발굴조사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초축성벽은 6차 발굴조사에서 추정 남문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외벽 안쪽에 또 다른 성벽이 확인되면서 그 존재가 처음 드러나기 시작했다. 절개된 부분을 중심으로 그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성벽의 외벽은 기단석 없이 장방형의 면석을 90도 각도의 겉쌓기를 하였다.... 기단석 없이 암반 위에 곧바로 쌓았기 때문에 기저부를 보강하기 위해 성벽의 기저부 앞에 판석을 정확하게 짜 맞추어 석비레층을 조성했다....” 그러나 6차와 8차 발굴에서 드러난 초축성벽은 10차 발굴보고서에서 정면으로 부정된다. “8차 발굴조사에서 3차 성벽으로 명명했던 것 중 2차 성벽은 축성시기가 다른 별개의 성벽이 아니라 체성을 보강하기 위한 개보축 구조물이며, 이러한 점은 이성산성에서 처음 확인된 대규모 치성 구조로 확인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로 다음과 같이 밝혔다. “9, 10차 발굴에서 백제 초축국설, 고구려 축성설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전혀 발굴되지 않았다. 이성산성과 같은 대규모 석성을 백제나 고구려가 쌓았다면 이에 걸맞은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어야 마땅하나 이 같은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초축벽과 관련해 백제계 유물은 전혀 없었으며, 2차 성벽의 경우 고구려 축성 양식을 받아들였음을 부정하기 어려우나 고구려와 관련된 유물은 전혀 없다. 또한 기존 백제계 혹은 고구려계 토기로 분류됐던 유물은 통일신라 말~고려 초기의 유물을 잘못 분류한 것이다. 따라서 기존에 본 조사발굴단이 견지해 왔던 바와 같이 이성산성이 신라에 의해 축성되고 사용된 것이라는 공식적인 견해에는 변함이 없으며 여전히 유효하다.” 어떻게 같은 유물을 두고 이렇게 정반대의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8차 발굴 당시 초기 발굴단장을 맡았던 심광주 한국토지박물관장은 2006년 한양대박물관이 ‘이성산성 발굴 20주년 기념 특별전’과 함께서 발행한 <이성산성>이라는 책자에 실은 ‘삼국시대의 성곽과 이성산성’이라는 논문에서 “성곽의 축성 방법은 시대와 축성 주체에 따라 형태적, 기술적 차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기술적 요소들은 축성시기와 축성 주체를 가려내는 중요한 변별 요소가 되기도 한다”고 전제하고 “9차에 걸친 고고학적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결론은 이성산성은 신라에 의해 초축된 산성”이라고 단언했다. 심 관장은 그 근거로 “이곳에 백제의 유적이 있었거나 더구나 백제의 왕도가 있었다고 한다면 어떠한 형태로든 증거가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산성에서 발굴된 수많은 유물 중에는 백제의 특징적 유물은 단 한 점도 발굴되지 않았다. 시대를 판별할 수 있는 가장 표식적인 유물은 토기류이며,,,”라고 말했다. 또 “이성산성이 백제에 의해 초축됐다면 이성산성을 공략한 고구려에 의해 약 80여 년 동안 장악되었을 것이지만 이성산성에서는 고구려의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고 말했고 “이러한 정황증거로 볼 때 이성삼성은 진흥왕 14년을 전후한 시점에 축조되기 시작했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여기서 다시 8차 발굴보고서를 살펴보자. 8차 발굴보고서에는 일반의 관심을 끄는 수많은 발굴 유물을 언급했다. 우선 발굴 당시부터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유물로 저수지 조사에서 나온 신묘(辛卯)년 명 목간이다. 이 목간에는 특히 욕살(褥薩)이라는 고구려 지방 관직명이 등장한다. 이 목간과 함께 고구려척과 중국 집안의 고구려 오회분 벽화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형태의 요고 등 다양한 목제유물, 그리고 고구려 토기가 발견됐다. 문제는 이처럼 일반의 상식으로 생각할 때 고구려 유물이 확실해 보이는 유물들을 특별한 이유 없이 모두 신라의 유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앞에서 초축성벽 속에서 발굴됐다는 다량의 백제식 토기도 신라 토기로 간주했음은 물론이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이 어처구니없는 일의 발단은 모두 이성산성의 위치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이성산성은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경기도 하남시의 춘궁동 덕풍동 초이동 광암동 등에 둘러싸여 있다. 지도상으로는 하남시의 한가운데다. 하남시 춘궁동은 예부터 한성백제의 왕도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던 곳 중 한 곳이다. 최근 들어 몽촌토성에 이어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도라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졌지만 사실 김정호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많은 학자들은 하남시 춘궁동을 한성백제의 왕조로 여겼다. 558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세운 신주의 치소도 이곳으로 추정되며, 이후 고려와 조선 왕조 시기에도 이곳 춘궁동은 광주의 고읍이었다. 때문에 춘궁동와 인접한 이성산성은 당연히 백제의 왕성 혹은 왕성을 호위하는 산성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동안 철썩 같이 백제의 성으로 여겨지던 이성산성은 1986년 한양대박물관이 발굴을 시작하면서 뒤집히기 시작했다. 신라 토기는 대량 발굴된 반면 백제 토기는 한 점도 발굴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아가 축성 양식도 신라 토성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성산성과 춘궁리의 한성백제 왕성론은 힘을 잃어 갔고, 이 시기 발굴을 시작한 몽촌토성에서는 백제 유물이 대량 발굴되면서 한성백제의 왕성으로 떠올랐다. 1990년대 들어서는 몽촌토성과 이웃해 있는 풍납토성이 발굴되면서 현재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북성과 남성을 이루면서 백제 왕도를 구성했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져가는 모양새다. 따라서 이성산성이 백제성이냐 여부는 한성백제의 왕도의 위치를 점칠 수 있는 중요한 판단의 근거이며, 이성산성에서 백제 토기의 발굴 여부는 또 이성산성이 백제성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근거인 것이다. 결국 이성산성에서 백제 토기가 발굴됐느냐 아니냐에 따라 우리 고대사의 커다란 줄기가 좌우되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이성산성에서 백제 토기 발굴을 인정하는 순간 몇 몇 학자들의 학문적 공적은 사상누각처럼 허물어지게 된다. 결국 몇몇 학자들의 학문적 공적을 유지하기 위해 백제토기 발굴 사실이 10년이 가까워지도록 묻혀 있다는 것이 학계 일부의 주장이다. 한양대박물관은 2005년 11차 발굴을 끝내고 2006년 5월 ‘이성산성 발굴 20주년 기념 특별전’을 열면서 함께 발행한 <이성산성>이라는 책자에서 그동안의 발굴 결과를 정리했다. 그리고 3년, 그동안 입장이 바뀐 것은 없을까? 8월 초 배기동 한양대박물관장을 만났다. 배 관장은 한마디로 “개연성은 부정 못하지만, 백제성의 가능성을 밝혀주는 증거가 굉장히 미약해 백제를 말하기 어렵다”며 “현재 남아있는 구조물의 주인은 통일신라시대이며 발굴 성과를 본다면 성곽의 축성 연대는 진흥왕 때 한산주 설치 시기(558년)와 통일 이후(7세기 중반)”라고 말했다. “백제 유물이 나온다 하더라도 500년 동안 백제 땅으로 지속됐던 지역인 만큼 문화적 복합관계를 따져봐야 한다. 왕국의 수도가 반경 10km 이내인 풍납 몽촌에 있는데 백제 유물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백제 유물이 나타나지 않는다. 왜 없는가? 이것이 더 숙제다. 욕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목간이나 요고 등도 해당 지역이 대치 지역인 만큼 고구려 목간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몽촌에서도 고구려 유적이 나왔다. 전체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 특히 한강 유역에는 백제 석성이 별로 없다. 공주 부여 쪽에도 성이 부실하다. 부소산성도 신라가 개축한 것이다. 무리하게 비과학적 판단을 하면 혼란만 있다.” 그러면서 배 관장은 8차 발굴보고서에서 나타난 ‘삼국시대 초기 토기’에 대해서는 “가치 부여 없이 명확하게 하려는 노력에서 발생한 발굴자의 미숙한 용어 선택”이라고 치부했다. 이에 대해 8차 발굴 때 지도위원으로서 격하게 문제를 제기했던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최몽룡 교수는 “이성산성은 근초고왕 때 고구려 산성을 모방해 처음 쌓은 백제의 석성”이라고 단언했다. “이성산성의 초축토성은 백제성이다. 한쪽에서는 백제에는 심지어 석성이 없다고까지 말하는데, 백제성으로 같은 시기에 축조된 이천의 설봉산성과 설송산성 등에서 이성산성과 똑같은 양식이 나타난다. 평양까지 진격했던 근초고왕 때 고구려 석성 축성 방법을 배워 쌓은 성이다. 청동기부터 조선까지 지리적 요충 백제가 놓칠 리 없다. 하남시 광암동 이성산성 아래 산록에서 발굴된 백제시대의 4세기대 횡혈식 석실고분은 이성산성이 백제시대 371년 경 축조했을 것으로 추정 축조됐음을 증명한다.” 발굴 당시 현장을 둘러본 강찬석(건축가) 전 문화재청 전문위원은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억한다. “성벽을 절개했을 때 마침 현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초축성벽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현장을 살피는데 이미 발견된 두 개의 성벽과는 형식이 완전히 다른 체성이 보였다. 백제성의 특징으로 알려진 기단부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한 발굴단원이 그 성벽 속에서 발굴한 것이라며 백제토기 파편 여러 양동이를 보여줬다.” 이 논란의 한가운데는 또 한 사람의 중요한 인물이 숨어 있다. 8차 발굴 당시 현장책임자였던 유태용 당시 한양대 강사. 현재 재단법인 서해문화재연구원 대표로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 수 차례 전화를 했으나 그는 의도적으로 만남을 회피하는 듯했다. 마침내 오산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불시에 방문했으나 유 대표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지난 7월 말 최몽룡 교수를 찾았을 때 최 교수는 이성산성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의미심장한 말을 한마디 했다. “막스 베버는 인문학의 연구 성과는 10년을 채 넘기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부 고고학자들의 욕심이 너무 지나쳤습니다.” |
하남시 고골지역 하사창동에 그동안 이름도 몰랐던 대형 사찰지가 있다. 2001년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 의해 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필자를 비롯한 세종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 때 이미 ‘천왕’ ‘천왕사’명 기와의 수습으로 이곳이 천왕사라는 것이 알려졌지만, 처음에는 대왕사 인줄 알았던 것이 사실이다. ‘天王’의 ‘天’자가 天인지 大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대자 위에 획이 점으로 찍혀 있어 자칫하면 大자로 해독하기 쉽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여주 고달사지의 원종국사혜진탑비에 고려태조가 원종국사를 광주 천왕사에 주지로 보냈다는 비문의 기록으로 이곳이 고려 초 광주 천왕사임 밝혀진 것이다. 그러니까 고려 초에는 이미 천왕사라는 사찰이 이곳에 있었으며 세종대학교의 지표조사 때 사찰의 규모가 1만평이 넘는 대규모 사찰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의 시굴조사로 대형 목탑지를 비롯하여 20여개의 건물지의 유구가 확인되어 통일신라 때 조영된 사찰로 보고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광주철불 혹은 춘궁리 철불로 알려진 보물 332호 철불이 이곳 천왕사에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로 천왕사지 인근 주택가에 춘궁리 철불의 대좌로 보이는 연화문 8각 대좌의 일부분이 그 집의 장독대로 사용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천왕사의 중심건물인 목탑지가 시굴조사보고서에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고되었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목탑보다 석탑이나 전탑이 유행하던 시대라 신빙성이 없고, 오히려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후 조영된 단 탑 형식의 목탑이 아닌가 생각한다. 삼국시대에 조영된 가람은 대부분 1금당 1탑 배치를 띠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쌍 탑 배치가 등장하는 가람이 신라 선덕여왕 때 조영된 경주의 사천왕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주의 사천왕사는 목탑형식에서 석탑형식으로 바뀌기 전 마지막목탑이다. 경주의 사천왕사는 광주 천왕사와 사찰명도 비슷할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는 四天王寺가 아닌 天王寺로 기록되어 있음.) 목탑의 심초석도 크기만 다를 뿐, 사리공의 형태나 심초석의 형태도 쌍둥이 같이 닮아있다. 그래서 필자는 광주 천왕사의 조영시기를 선덕여왕 이전시기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의 시굴조사에서 기존의 목탑지 바로 옆 하부 땅속에서 목탑지의 심초석보다 더 큰 거대한 초석이 하나 발견되었다. 시굴조사 보고서에는 그냥 대형초석이라고만 기록하고 말았고, 그 대형초석의 정체에 대해서는 일절 아무런 언급이 없다. 필자가 보기에는 매우 중요한 초석으로 보이는데 그 거대한 초석에 대해서 ‘알 수 없다’로 일관하고 있어 그 이유가 궁금했다. 필자가 현장을 방문했을 때 발굴자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초석이니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고, 또 다른 목탑의 심초석일 가능성에 대해 의견을 피력한바 있다. 그런데 그 후 발굴은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고, 현장은 복토되고 발굴은 중단되고 말았다. 왜일까? 필자는 하부의 그 거대한 초석을 또 다른 목탑의 심초석으로 보았고 상부목탑의 하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상부목탑이 조성되기 이전 어느 시대에 조성된 목탑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부목탑이 조성된 시기는 언제일까? 혹시 백제? 백제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때는 침류왕 원년이다. 삼국사기 침류왕 조에 <9월에 호승 마라난타가 진에서 오니, 왕이 궁내로 맞이하여 예와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불법이 이로서 비롯되었다. 2년 봄 2월에 한산에 불사를 창건하고 승려 10명을 두었다.>라고 하여 백제는 385년 한산에 백제 최초의 사찰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상부목탑이 신라시대에 지어졌고, 하부의 목탑이 신라 이전시대에 지어진 것이라면 백제목탑일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고, 그곳을 백제 때 한산지역이라고 했다면 침류왕 2년에 지어진 백제 최초의 사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백제 때 조성된 목탑이라는 가능성을 제기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상부목탑의 초석은 심초석을 비롯하여 모두 사각 형태를 띠는 반면, 하부목탑은 심초석을 비롯하여 모두 특별한 형태가 없는 덤벙돌 형태를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탑이 배치된 방향도 다르고, 특히 심초석의 형태와 크기도 전혀 다르다. 그러니까 상부목탑과 하부목탑은 전혀 다른 개념의 목탑으로 조성된 시대가 다른 두 개의 탑이라는 것이다. 특히 하부목탑의 심초석은 지름이 205cm(상부목탑의 심초석은 가로 148cm, 세로 138c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일 뿐만 아니라 심초석 상부를 장식하고 있는 지름 91cm나 되는 볼록렌즈 형태의 柱座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견된 형식의 심초석으로서 건축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하부목탑의 규모도 필자의 복원도에 의하면 높이가 80여m 에 달하는 경주 황룡사 목탑에 필적하는 규모의 목탑으로 밝혀졌다. 혹자는 목탑의 심초석이라면 상부목탑과 같이 사리공이 있어야 하는데 사리공이 없는 것으로 보아 목탑의 심초석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하부목탑이 한국 최초의 목탑이라면 목탑의 형식을 따진다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고, 발굴을 중간에 중단하였기 때문에 심초석의 하부나 별도의 사리장치를 하였는지의 여부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왈가왈부 한다는 것 또한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당시 발굴단장을 사석에서 우연히 만나 ‘시굴조사보고서에 왜 하부목탑지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하는 대답이 ‘자기는 지금 은퇴해서 천왕사지 시굴조사보고서의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하였다. 필자가 당시 발굴단장에게 천왕사지 하부 목탑지에 대해 물어본 이유는 당시 발굴 단장이던 그는 시굴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그 거대한 초석이 또 다른 목탑의 심초석이라고 필자와 의견을 같이 했기 때문이고, 그는 ‘확실한 것은 본 발굴을 하여 확인해 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천왕사지의 하부 목탑지는 다시 본 발굴을 재개하여 이러한 의문을 하루속히 풀어야 한다. 그래서 필자를 비롯하여 뜻있는 분들이 모여 지금 본 발굴을 추진하고 있음을 여기에서 밝혀둔다. 이곳은 하남시 춘궁동의 동쪽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하남시 하사창동의 천왕사지에서 발견된 2기의 목탑중 상부목탑의 心礎石
천왕사지 2기의 목탑중 하부목탑의 심초석으로
추정되는 폭이 2m가 넘는 거대한 초석,시굴시
발견되었으나 본발굴을 시행하지도 않고 복토해 버렸다.
하남시 하사창동에서 발견된 천왕사지의 시굴실측도에 나타난 2기의 목탑지의 심초석, 하부목탑지의 심초석이 상부목탑의 심초석보다 1.5m정도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하남시 미시리에서 발견된 백제시대의 밭과 우진 육각형 집자리
하남시 한강변에 미사리섬이 있다. 이 섬은 지금은 도로로 연결되어 섬처럼 보이지 않지만 88서울올림픽 전 까지만 해도 한강의 물길이 섬의 양쪽으로 갈라져 흘러 완전한 섬이었다. 88서울올림픽 전에 섬의 북단 한강변 구릉에 대대적인 발굴이 이루어 졌다. 유적지가 너무 넓어 단독발굴의 형식이 아니라 여러 발굴단이 참여하는 합동발굴형식으로 발굴되었다. 그런데 이곳은 신석기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유적이 땅속으로부터 층위를 이루면서 겹겹이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우리가 필자도 발굴기간 중 여러 차례 방문하여 관심을 보인 발굴현장이었다. 그런데 백제시대 층위에서 백제시대 사람들이 경작하던 밭이랑과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형식의 우진 육각형 형태의 주거지가 다량 발견된 것이다. 그러니까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우진 육각형 형태의 주거지가 미사리에서 먼저 발견된 것이다.필자의 기억으로는 그 당시 언론에서 우진 육각형주거지 보다 백제시대 밭의 발견에 더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곳은 하남시 춘궁동의 북쪽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남한산성 행궁지에서 발견된 백제시대의 토기 편들
남한산성 행궁지 발굴도중 행궁지 뒤 구릉지에서 백제시대 토기 편들이 다량 발굴되었다고 해서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에는 과연 그동안 발굴된 토기의 형식과는 전혀 다른 형식의 토기들이 널려 있었다. 발굴자의 전언에 의하면 백제 토기라는 것이다. 필자가 볼 때에도 그동안 이곳에서 발견된 토기와는 전혀 다른 토기였다. 필자가 고고학자가 아닌 이유로 발굴자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한산성이고, 신라의 주장성이다. 이곳은 하남시 춘궁동의 남쪽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로서 하남시 춘궁동의 동서남북 사방에서 백제유적이 발견된 것을 확인하였다. 하남시 춘궁동 고골 지역이 백제왕도 한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가장 큰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 하남시 쪽에서는 백제관련 유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는데, 이로서 그런 주장이 허구임이 밝혀짐으로서 하남시 춘궁동 고골일대가 백제왕도 한성임을 설파한 선학들의 주장이 다시 힘을 받게 된 것이다.
한산아래 세운 하남위례성-그렇다면 한산은 어디인가?
우리가 백제의 왕도 하남위례성을 거론할 때 마다 항상 따라다니는 낱말이 한산이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 온조가 세운 하남위례성의 위치가 한산아래라고 하여 하남위례성과 한산은 불과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세트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산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만 있다면 하남위례성이 어디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데 한산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고고학적인 단서가 남한산성의 서문쪽에서 한강으로 뻗어 내려가는 산줄기에 위치한 금암산자락의 한 폐사지에서 발견된 <약정사> 명문기와로 현재의 남한산성이 위치한 청량산, 금암산 일대가 한산임이 밝혀진 것이다. 왜냐하면 산증동국여지승람 광주 불우조에 <약정사 재한산>이라고 하여 광주(당시 광주의 치소는 지금의 하남시 고골에 있었음.)의 약정사가 한산에 있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어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쓰여 질 당시 까지만 해도 남한산성이 위치한 청량산, 금암산 일대를 한산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약정사는 지금 하남시 항동 금암산 중턱에 위치한 폐 사찰로 출토되는 기와로 볼 때 고려시대에는 존재했던 사찰로 보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해온 사찰로 추정된다.
온조가 열명의 신하와 오른 한산의 부아악은 어디인가?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작도하기 전에 열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작도할 곳을 살피는데 그때 온조가 오른 부아악은 과연 어디인가? 온조가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랐다고 했으니, 부아악은 당연히 한산에서 찾아야하고, 한산이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 금암산 일대이니 부아악도 당연히 청량산, 금암산 일대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일부학자들은 부아악을 삼각산 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필자가 삼각산에 올라 강남지역을 아무리 봐도 삼국사기 기록에 나오는 그런 경관은 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남산에 가려 한강조차도 보이질 않았다. 지금 현재 청량산, 금암산 일대에는 부아악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나 바위봉은 없지만 부아악이 고유명사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아이를 등에 업고 있는 형상을 한 바위봉을 의미하는 형용사인 알 수는 없지만, 필자가 청량산, 금암산 일대를 조사한 결과 온조가 바라본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남한산성 서문 밖 연주봉이다. 연주봉을 하남시 고골 쪽에서 보면 남한산성 서문 쪽 정상 근처에 정말로 아이가 엄마 등에 업혀 있는 형상을 한 바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날씨 맑은 날 연주봉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면 온조가 보았던 그 경관이 한 눈에 펼쳐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수왕이 공격한 백제의 남북 두 개의 성은 어디인가?
475년 장수왕이 공격한 백제의 남북 두 개의 성은 과연 어디인가?
삼국사기는 장수왕이 마지막으로 공격한 한성백제의 남북 두 개의 성에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성을 공격해와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성으로 옮겨 공격하므로 성안이 위태하여 두려워하였다.>라고 하여 장수왕이 먼저 공격한 성이 북성이고, 북성을 함락한 장수왕은 그 여세를 몰아 남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사로잡아 아차성으로 끌고 가서 죽인다.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공격한 남성이 백제왕도 한성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북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여러 가지 이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의견이 이도학의 몽촌토성 남성설이다. 이도학은 풍납토성을 북성으로 몽촌토성을 남성으로 보는 대표적인 학자다. 몽촌토성이 남성이라면 몽촌토성이 고구려 장수왕의 최후공격을 받은 백제왕도 한성이라는 말인데, 이는 이미 우리나라 주류 사학자들의 주장과 맞지 않으므로 이 시점에서 이도학의 주장은 이미 효용가치를 상실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주장은 풍납토성 왕도 한성설을 주장하는 풍납토성 발굴자들이다. 풍납토성이 왕도 한성이라면 풍납토성이 남성이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북성은 어디라는 말인가. 이에 대해 풍납토성 왕도 한성설을 주장하는 어느 학자도 속 시원한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풍납토성이 남성이라면 풍납토성의 북쪽은 한강이 있기 때문에 북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 두 주장은 둘 다 논리적으로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북성과 관련된 고고학적인 증거가 아차산성에서 발견되어 남성, 북성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논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서울대학박물관이 실시한 아차산성 시굴조사에서 <北漢O>, <漢山O> 명 기와가 다량 출토됨으로서 아차산 일대가 북한성 또는 북한산성일 가능성이 짙어졌으며, 삼국사기 개로왕조에 나오는 북성이 강남이 아닌 강북의 아차산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도학은 그의 저서<한국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에서 “아차산성에서 출토된 그 많은 기와편 가운데 ‘城’자 명문이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北漢山O’의 ’北漢山‘도 어디까지나 추독(推讀)에 불가하므로 북한산성인지 알려주는 기와는 전무하겠다고 하겠다. 이곳에서 출토된 ’北漢‘ ’漢山O‘ ’受‘ ’蟹‘ 등의 명문은 1925년 한강 남안(南岸)의 선동에서 출토된 기와와 마찬가지로 ’北漢受國蟹口船‘을 구성하는 글자일 뿐, 성 이름과는 직접 관련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명문을 토대로 북한산성으로 비정하기에는 설득력이 약하다.”라고 하면서 단지 ‘城’자 명문이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아 아차산성을 북한산성이나 북한성 지역으로 비정하는데 거부감을 표명했다. 그렇다면 이도학이 왕도 한성으로 비정하는 몽촌토성이나 또 다른 학자들이 왕도 한성이라고 주장하는 풍납토성에서는 한성을 의미하는 ‘漢’자 하나라도 나왔는지 반문하고 싶다. 그리고 ’北漢受國蟹口船‘을 ’북한에서 나라로 들어가는 게O 입구 배‘라고 해석할 때 남한산성 쪽에서 선동 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개천의 이름이 ’게내‘(蟹川)인 것으로 보아 북한지역인 아차산성지역과 나라로 들어가는 ’게내‘(蟹川)’입구의 선동을 오가는 배와 관련된 명문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되어, 아차산성에서 발굴된 기와는 한강남쪽 선동 인근 어디에서 구워 선동의 게내(蟹川) 입구를 출발하여 북한지역인 아차산성으로 운송하지 않았나 추정된다. 그래서 아차산성에서 발굴된 <북한>과 관련된 명문기와가 하남시 선동에서 발견된 명문기와 ’北漢受國蟹口船‘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아차산성을 북한산성으로 비정하기에 설득력이 약한게 아니라, 설득력이 더 강하다고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학계는 ’北漢受國蟹口船‘ 명문중 蟹口船의 의미를 몰라 명문의 정확한 의미를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남시 선동쪽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개천의 이름이 ’게내‘(蟹川)’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北漢受國蟹口船‘의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아차산성이 북한산성일 가능성이 더욱 강해졌으며, 아차산성 일대가 삼국사기에 나오는 북한성, 즉 장수왕이 7일동안 공격하여 함락한 북성일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아차산성에서 발굴된 '북한'명 기와
500년 도읍지 백제왕도 한성(남성)은 어디인가?
지금까지 우리 학계는 장수왕이 공격한 남북 두 개의 성을 한강 이남에서 찾으려고 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모순에 빠졌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아차산성에서 <북한>관련 명문기와가 출토됨으로서 북성, 북한성, 북한산성의 위치가 밝혀졌다고 본다. 그렇다며 남성인 백제왕도 한성은 과연 어디 인가? 몽촌토성도 풍납토성도 남성인 왕도 한성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밝힌 바이다. 이제 남은 곳은 그동안 김정호나 이병도를 비롯하여 많은 선학들이 초지일관 줄기차게 주장해온 하남시 춘궁동 일대이다. 역사 이래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이 백제 왕도한성이라고 주장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몽촌토성이 발굴되고, 또 풍납토성이 발굴되면서 이제는 풍납토성이 남성인 백제왕도 한성으로 굳어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풍납토성 발굴결과 풍납토성은 왕도한성 아님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짐에 따라 이제는 다시 하남시로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필자는 이미 10여년 전 어느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에 백제왕도 한성은 몽촌토성도 풍납토성도 아닌 하남시 춘궁동 일대라고 주장한바 있다. 물론 필자의 주장이 처음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상 몽촌토성도 풍납토성도 아닌 하남시 춘궁동 일대라고 주장하기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시기라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간의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를 놓고 볼 때 이제는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인줄 모른다. 藥井寺 명문기와가 금암산 중턱에서 발견되어 한산의 위치가 밝혀졌으며, 하남시 이성산성 옆 광암동 산기슭에서 백제 횡혈식 석실분이 발견되어 하남시 춘궁동일대 야산에 수없이 많이 흩어져 있는 고분중 상당수가 백제 고분 일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으며, 하남시 이성산성 8차 발굴로 드러난 초축성벽과 그때 발굴된 백제토기로 이성산성이 백제성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특히 8차 발굴 때 발굴된 무진명 목간에 적힌 ‘......南漢城......’명문의 발견으로 이성산성과 춘궁리 일대가 남한성, 즉 개로왕의 남성인 왕도 한성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하남시 천왕사지 시구로 드러난 하부목탑과 백제관련 기와의 출토, 그 외에도 하남시 미사리에서 발견된 백제경작지와 우진6각형 백제주거지, 남한산성 행궁지에서 발굴된 백제토기, 등 그간 고고학적인 성과를 볼 때 그 중심에 있는 하남시 춘궁동일대를 백제의 남성인 왕도한성이라고 이제는 확신한다. 하남시 춘궁동일대는 조선시대 정약용을 비롯하여 이병도 까지 많은 선학들에 의해 백제왕도 한성으로 비정되어온 곳으로, 지금도 인근야산과 논두렁에는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산포하고 있음이 세종대박물관의 조사로 밝혀졌으며, 백제유물 뿐만 아니라 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유물까지 혼재되어 정밀한 발굴이 동반되지 않고는 시대적 구분이 쉽지 않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986년 필자가 처음 이성산을 넘어 처음 하남시 춘궁동일대를 처음 조사할 때와는 주위환경도 판이하게 많이 달라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간의 개발행위로 수많은 유물과 유구가 파괴되고, 사라지고 있는 게 안타깝기만 하다. 문화유산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보전하여 후손에게 물려줘야할 자산이다. 특히 그것이 뒤틀린 우리의 역사를 밝혀줄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면 더욱 신중하고 소중하게 다뤄야 할 것이다. 학자란 모름지기 자기가 주장했던 학설이 다른 사람에 의해 깨져 나갈 때가 가장 고통스럽겠지만, 그것을 수용할 줄 아는 너른 아량을 가진 학자가 진정한 학자다.
이성산성에서 발견된 무진년목간과 그에 새겨진 명문
南漢城이 보인다.
첫댓글 1. 일연의 삼국유사에 한성백제의 도읍지가 "춘궁동 고골일대"라고 명시한 부분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까지 똥깡님이 쓴 글을 다 읽어 보았지만, 삼국유사를 근거로 그렇게 특정할 수 있다는 논증을 본 적이 없습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그런 구절은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근거없이 사서의 내용을 확대 해석한 것으로 보이는데, 구체적인 근거와 논증을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2. 공주에서 발견되었다는 어떤 건물터를 臨流閣址라고 단정한 근거를 알고 싶습니다. 데이팅을 통해 그 유적이 생성된 연대를 확정한 것인지, 아니면 臨流閣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와당이라도 발굴된 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3. 일전에 똥깡님의 주장을 검토하고 반론을 써 보겠다고 했는데, 하루 정도 똥깡님의 글을 분석하다가 반론을 포기했습니다.
똥깡님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타당해서가 아닙니다. 논리 전개가 엉터리고 비약이 너무 심해서 똥강님이 무슨 주장을 하는지 모든 문장을 하나 하나 분해새서 따져 보기 전에는 반론을 쓰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을 공부하는 아마추어의 입장에서 볼 때,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이었는지 아닌지에 관련해서 구태여 논리도 없는 글을 분해하면서 토론을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어 포기를 하고, 단순한 몇 가지의 팩트(삼국유사의 기록, 명문 기와의 출토)만 수용을 하였습니다.
다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에 관련해서는 명확히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고 생각되어, 똥깡님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4. 앞서 문화재연구소와 관련이 있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역사학/고고학 분야의 기관 또는 교수들과 개인적인 친분 관계라고 할 것은 없는 순수한 아마추어임을 밝혀드립니다.
근거 요구가 다소 강하게 보일 수도 있을텐데,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가라면 그런 근거 요구에 대해 자신의 부족한 논리를 채울 수 있는 기회로 보아 고맙게 생각을 하고, 자신만의 관점에서 명확하게 자신의 논지를 전개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제 입장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근거 요구를 하였습니다.
자신이 순수한 아마추어라고 해놓고 논리전개가 엉터리라니요? 무엇이 엉터리라는 말입니까?
일단, 지금 궁금해 하고 있는 두 가지의 주장만을 가지고 토론을 해 보지요. 그마나 토론이 가능할 정도로 똥깡님의 주장이 명확하게 들어난 것만을 골랐으니까요.
1, 일연은 삼국유사에 백제의 하남위례성을 今廣州(지금의 광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일연이 살았던 당시의 廣州의 치소는 지금의 하남시 춘궁동 일원입니다.
2삼국사기 기록에 동성왕이 임류각지에서 연회를 했다는 기록과 그 위치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당시 발굴자들이 임류각지라고 확신했던것으로 알고 있고, 현장의 안내문에도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저의 견해가 아닙니다.
1-1.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던 당시의 廣州의 공간적 범위가 어떻게 되는지요?
1-2. 삼국유사 어느 기록에 그 당시 광주의 치소가 하남 위례성이 있던 위치라고 나오는지요?
1-3. 똥깡님이 주장하듯이 하남시 춘궁동 어디엔가 있는 광주의 치소에서 한성 백제기의 왕궁으로 볼 수 있는 유구가 발굴이 된 적이 있는지요?
2-2. 그 말은 소위 임류각지로 알려진 그 건물의 초석을 가지고 한성 백제 시대의 건축 기술을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이해해도 되는 것인지요? 그 초석이 한성 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건물의 초석이라는 것을 똥강님이 명확히 입증한 다면, 그 이후에 그 부분에 관련하여 똥깡님의 주장을 존중하겠습니다.
하남시 춘궁동은 신라시대 진흥왕의 신주, 한주임은 황보경박사의 학위논문에서 밝혀졌고, 고려시대 왕규의 근거지임도 밝혀졌고, 고려시대 광주의 치소임도 이미 밝혀진 사실입니다. 일연이 今廣州라고 한것은 광주의 치소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남시 춘궁동을 지목한 것이지요.
하남시 춘궁동 일원은 풍납토성과 같이 아직 광범위하게 발굴되지 않아 유구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신라신주,한주와 고려 광주, 조선의 광주(병자호란때 광주치소가 남한산성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조선시대 광주의 치소가 춘궁동 일대였슴)등과 겹쳐있어 더욱 유구찾기가 힘듭니다.
임류각지가 한성시대 건물지라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한성시대 마지막왕인 개로왕이 죽은 연도가 AD475년이고 동성왕이 임류각을 지은 연도가 AD500년이니(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조 참조하시길) 개로왕이 죽고 25년후 지어진 건물이니 백제 한성시대의 건물과 비교할 수 있는 건물이 아니겠는가라는 차원에서 제가 인용한 것입니다.
1. 학위 논문에서 어떤 주장을 했다는 것 하고, 그런 주장을 똥깡님이 어떤 근거를 채택하여 수용하는지 하고는 별도의 사건입니다. 똥깡님이 채택한 근거가 궁금합니다.
2. 그 박사 학위 논문에서 진흥왕의 신주와 한주라는 공간 영역이 하남시의 춘궁동 지역으로 한정된다고 주장했나요?
3. 고려 시대 광주의 치소가 이미 발견되었다고 했는데, 그곳이 어느 유적인지요? 그리고 그 유적이 똥깡님의 주장처럼 한성 백제의 왕궁 유적이라는 것이 밝혀 졌는지요?
똥강님의 주장만 포커싱해서 근거를 제시했으면 좋겠습니다. 춘궁동 발굴 이력은 똥감님 주장의 근거 제시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今廣州는 문헌 해석의 문제고, 고고학에 관련해서는 똥깡님의 주장대로 춘궁동 어디엔가에 있는 광주의 치소에서 한성 백제기의 왕궁으로 볼 수 있는 유구가 발견되었음을 근거를 들어 입증하면 되는 것입니다. 똥깡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일연이 말한 당시 광주의 치소는 어느 유적인지를 널리 알려진 유적 명칭을 들어 제시를 하고, 이어서 그 유적에서 한성 백제 왕궁으로 볼 수 있는 유물이나 유구가 발견되었는지만 제시하면 됩니다.
이성산성에서 발견된 백제토기를 근거로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이성산성은 춘궁동 바로 옆에 있는 산성입니다.
세종대 박물관의 학예실장인 황보경박사는 저와 같이 10여년을 하남시 춘궁동 일대를 조사한후 <하남시의 문화유적>이라는 조사보고서를 출간하였고, 그를 근거로 박사논문을 썼습니다. 저는 그것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고려시대 광주의 치소라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모단님은 백제왕도 한성이 어디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하남시 교산동에서 거대한 건물지가 발견되어 발굴한 결과 나말여초의 건물지임이 밝혀졌습니다.
저는 한성 백제의 왕성이 어디라고 주장하거나 풍납토성의 성격에 대해서 주장을 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똥깡님의 질문에 대해서 답변할 내용이 없습니다.
똥강님의 주장 중에서 그나마 명확히 들어나는 부분에 대해서 근거 제시를 드렸는데, 왜 이렇게 서로 간에 글이 길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삼국유사 부분은 역사 해석에 관련되는 문제인데,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今廣州"라고 한 다음 그곳이 현재의 "춘궁동 고골일대"라고 특정한 문장을 찾아서 제시해 주면 되는 간단한 문제입니다. 일연이 그런 주장을 했다면 삼국유사에 예컨데, "今廣州, 其治所漢城百濟王宮也"라는 글귀가 나올거 아닙니까? 그리고 그 당시 광주의 치소가
현재의 하남시 춘궁동 일대라는 것을 입증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문제인데... 왜 이렇게 글이 길어지지요? 제가 말씀을 잘못 드렸나요?
그리고, 그 당시 광주의 치소에 관련해서는 예컨데 "널리 알려진 교산동 건물터가 그 당시 광주의 치소다"라고 제시를 한 다음, 그곳에서 한성백제의 유물이나 유구가 발견되었음을 보이면 되는 간단한 문제입니다. 똥깡님이 주장하는 당시 광주의 치소가 널리 알려진 여러 유적들 중에 어느 유적을 말하는지 먼저 밝히면 되는 간단한 문제인데... 저는 똥강님이 어느 유적을 특정해서 말하는지 잘 모릅니다.
하남시춘궁동 일대가 고려시대 광주의 치소라는 것은 상식에 해당하는 문제인데 왜 제가 고고학적으로 증명을 해야 하죠?
1. 똥깡님은 일연이 한성백제 도읍지가 하남시 춘궁동 고골일대로 비정했다는 주장을 했는데, 반복적으로 그 문제를 추궁했음에도 지금까지 그런 주장에 대한 근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이해를 하고, 똥깡님의 주장을 기각하겠습니다.
2. 공주에 있다는 임유각지 관련해서, 그 초석이 백한성 백제 시대의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 주장도 기각하겠습니다.
종합 정리를 하자면, 똥깡님이 지금까지 올린 주장은 중구난방 논리부족이라서 무슨 근거로 주장을 하는지 종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중에서 조금은 명확하게 쓰여진 주장에 대해
무슨 근거를 가지고 그런 주장을 하는지 알아 보기 위해 논리적으로 접근을 해 보고자 하였는데, 똥깡님은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명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본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를 제시하는 방법론조차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전문가"는 단지 줏어들은 지식이 많은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전문가는 자신이 무슨 주장을 하는지 스스로 알고, 자신의 주장이 어떤 근거 위에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런 근거의 한계는 무엇이며, 특히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겉멋을 부리더라도 전문가라고
할 수 없고, 그런 사람은 전문가로 대접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 동안 똥강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모단님. 청사죽백, 여휘님 代打인가요?
삼국유사 기사내용 제시하지 못하다니요? 삼국유사에 일연이 한 이야기는 찾아 보십시요. 그리고 제가 쓴 책 부터 읽어보고 이야기 합시다. 임류각지가 한성시대의 건물지가 아니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모단님의 심보를 알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