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에서는 프로젝트가 크면 기획점검회의를 연다. 참가자들은 모두 약간씩 긴장한다.
누구도 프로그램의 성패를 자신할 수 없고, 실패한다면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순제작비 15억에 달하는 ‘3D입체복원 조선왕조의궤’ 회의 도중의 일이다.
작가가 정조가 수원으로 행차했던 과정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배경을 설명해나갔다.
“친모마저 당쟁에 휘말려 자식을 죽이자고 이야기하는...”
사도세자가 죽게 되는 부분에 대한 설명이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은 이유를 당쟁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늘 있어왔던 설명방식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역사책들도 당쟁이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요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어머니도 당쟁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명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자식의 목숨과 맞바꿀 당파적 이익이 과연 존재했을까? 작가에게 질문했다.
“잠깐! 그 친모는 자식을 죽이면 어떤 이익을 얻게 되죠?”
사도세자의 어머니는 선희궁 영빈 이씨, 영조에게 친자식 사도세자에게 대처분을 내리자고 말한 여인이다.
그녀는 노론, 소론 어느 편에 가담했었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역시 질문에도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
모두 약간씩 난감해 하고 회의는 진행이 되지 않았다.
‘이런 의견이 있을 수도 있으니 원문을 다시 확인해보세요’라고 말하면서 회의는 정리되고 말았다.
‘당쟁의 와중에 억울하게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 250년을 줄기차게 이어온 이 생각은 진정 올바른 것일까?
한양굿이나 경기도당굿에서는 지금도 사도세자를 별상이라며 모신다.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원혼이 신의 지위로까지 격상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사도세자는 살인자다. 학자 중에 사도세자의 살인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도세자의 살인에는 이상하리만치 너무 관대하다.
사도세자의 살인은 살펴볼수록 심각하며 그 살인방식은 매우 끔찍하다. 내관 김한채를 죽였다.
그리고는 그의 목을 잘라 들고 궁내를 돌아다녔다. 혜경궁 홍씨의 목격담이다.
“그 머리를 들고 드러오오셔 내인들에게 회시하오시니 내가 그때 사람의 머리 버힌 거슬 보아시니...” - 『한중록』-
일부의 주장처럼 노론 집안인 친정을 비호하려는 마음에 혜경궁 홍씨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러나 이 사건은 실록에서도 드러난다.
세자 본인의 입으로도 그 사건을 시인하고 내관 김한채를 위해 휼전을 내리도록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그 후에도 살인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친자식을 낳은 후궁도 죽였고 점치는 맹인도 죽였다. 그가 죽인 사람의 수는 오늘날 어지간한 연쇄살인범이 죽인 숫자보다 더 많다.
정조가 읽고는 타이틀을 ‘『천유록(闡幽錄)』’에서 ‘『대천록(待闡錄)』’으로 직접 고쳐준 책 속에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의 숫자가 들어있다.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거의 백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다.[世子戕殺中官內人奴屬將至百餘 而烙刑等慘]”
사도세자는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인 희대의 살인자였다.
이는 영조가 직접 말한 내용이며, 세자를 폐하며 발표한 폐세자반교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선의 왕자 중에도 살인에 관여하고도 왕이 된 왕자들이 없지는 않다. 이방원과 수양대군 등이다.
그러나 그 살인은 쿠데타나 권력 다툼의 와중에 일어났으며 그 경우에도 왕자가 직접 때려서 사람을 죽인 경우는 드물다.
연산군이 포악하다 하나 직접 손으로 사람을 죽인 경우는 없다. 때리다 말았고 결국 다른 사람이 죽였다.
세자가 무고한 사람을 100여 명이나 직접 살해한 경우는 동서양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나경언의 고변이 있던 그날 밤 영조는 뜰에 엎드린 세자에게 소리친다. 그 첫마디 역시 살인에 대한 것이었다.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지 않았느냐?[汝搏殺王孫之母]”
영조는 ‘박살’이라고 했다. 박살은 손으로 때려서 죽이는 것 아닌가. 세자가 제 자식을 낳은 후궁을 때려서 살해했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참혹한 행위가 극에 달했음에도 모두 쉬쉬했다. 병으로 한두 사람을 때려죽인 수준에서 벗어나 습관적 살인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한중록』에 의하면 어머니인 선희궁 영빈 이씨의 내인도 살해당했다.
어머니를 모시는 내인을 살해한 행위는 효를 강조하는 유교국가에서 용납될 수준이 아니건만 모두들 입을 다물었는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결국 일은 점점 심각해져 심지어 친여동생 화완옹주에게도 칼을 들이댔고 그 어머니조차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폐세자반교문에 나오는 선희궁 영빈 이씨의 증언이다.
“요사이 그곳에 갔다가 거의 죽을 뻔 했는데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頃日往彼闕幾乎被殺 僅以身免]”
이런데도 사도세자가 정상적으로 등극할 수 있었을까?
성리학이 통치이념인 조선에서 무고한 백성 100여 명을 직접 살해하고 친모의 내인을 죽인 자가 왕이 될 수는 없다.
맹자는 신하가 군주를 시해할 수 있는가를 묻는 제선왕(齊宣王)의 질문에, 인을 해치고 의를 해치는 자는 군주가 아니므로 군주를 시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즉 죽여도 좋다고 한 것이다. 사도세자는 왕이 되면 또 다른 불행을 불러올 것이 예고된 사람일 뿐이었다.
영조조차 이렇게 친제 묘지문에서 말한다.
“아 자고로 무도한 군주가 어찌 없다 하리오만 세자시절에 이런 자, 나 듣지 못했다.[噫 自古無道之君何限 而於世子時若此者 予所未聞]”
세자의 이런 패악은 일찍이 전라도에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던가?
전라도 용안(익산)현감이던 이정(李瀞)은 그 소문을 상소하면서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한다.
세자의 그 패악이 소문이 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백성들은 수군거리고 희생자는 늘어나기만 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장인인 홍봉한은 사건을 감추기에 급급했고, 대신들은 세자를 비호하면서 병으로 인해 생긴 아무것도 아닌 사건인 것처럼 말한다.
신하들은 사도세자가 왕이 되면 그의 습관적 살인이 모두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던 것일까? 그러나 그 기대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세자는 죄책감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무고한 백성을 더 죽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버지 영조에게 반발해 두 번이나 우물에서 투신자살 소동을 벌인 불효를 저질러도 영조가 너무 심하게 대했기 때문이라 말하고,
죄 없는 백성을 무수히 죽여도 병에 의한 것일 뿐이며 기본적으로 세자의 자질은 훌륭했다고 설명한다.
친어머니가 영조의 신변이 위험하니 세자를 죽이자고 말해도 오히려 궁중의 여인이 국본을 흔들었다고 말하고 만다.
당시 신하들이 한 이야기다. 당시 신하들의 태도도 문제가 많지만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은 그 태도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 (삭제된 승정원일기(영조 38년(1762) 5월 29일 기사)
왜 세자의 살인은 제대로 언급되지 않을까? 그 출발점은 『승정원일기』가 삭제된 영조52년 2월일 것이다.
정조의 효심은 아버지를 흉악한 살인마로 내버려 둘 수 없었고 그래서 일기는 오려지고 세검정에서 씻겨 사라졌다.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승정원일기』는 사도세자 관련 부분에서는 유독 너덜너덜하다.
오려지고 통째로 찢겨져 나갔다. 찢겨져 나간 곳이 100여 곳이 넘는다. 여기에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이 있었을 것이다. 『승정원일기』 곳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아래 한 장은 칼로 삭제되었다. 병신년 전교로 인해 세초했다.[此下一張刀削 丙申因傳敎洗草]”
그 후 민간기록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정조는 『현륭원지』를 작성하면서 단 한군데에서도 사도세자의 비행을 언급하지 않는다.
현륭원지』를 읽은 사람이 어찌 사도세자가 흉악한 연쇄살인범임을 알겠는가?
게다가 영남학자들은 만인소를 올리면서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밝히겠다고까지 했으니...
역사의 조작을 반드시 악인이 하는 것만은 아님을 잘려나간 『승정원일기』는 잘 말해준다.
진실을 오려내는 역사조작을 효심 가득한 계몽군주 정조가 시도했고 결국 성공했다.
그래서 오늘날 경기도당굿에서는 수많은 연쇄살인을 저지른 사도세자를 신처럼 모시며,
방송드라마는 당쟁으로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를 그려 시청자들은 눈물로 그를 동정하게 되었다.
시중 서점에는 사도세자의 정신질환조차 인정하지 않으면서 사도세자는 성군의 자질을 지닌 인물이라고 단정하는 역사서까지 진열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어머니가 당쟁에 사로잡혀 자식을 죽였다는 설명도 별다른 의심 없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효심 가득한 정조가 저지른 역사조작, 250년이 지난 지금도 얼마나 성공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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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글이 있어서 퍼와봅니다.
역사의 조작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았지만, 사실 저걸 조작이라고 하기엔 실록에 그 정황이 너무 노골적으로 나와있지요.
아래는 정조가 세손시절 승정원 일기의 내용을 지워달라 애원하는 기사입니다.
『 왕세손(후에 정조)이 수은묘(垂恩廟:사도세자의 묘)에 나아가 전배(展拜)한 뒤에 재실(齋室)에 나가 여러 대신(大臣)들을 소견(召見)하고 하령하기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경들을 소견하였다.”
하고, 이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목메어 스스로 견디지 못하다가 하령하기를,
“그때의 처분을 내가 어찌 감히 말할 수 있으랴마는,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볼 수 없는 말이 많이 실려 있어서 세상에 전파되어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더럽히는데, 이제 내가 구차하게 살아서 지금에 이른 것도 이미 사람의 도리로 견딜 것이 아니거니와, 완고하게 아는 것이 없는 체한 것은 다만 대조(大朝)께서 위에 계시고 또 그때의 처분에는 감히 의논할 수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내 그지없는 아픔을 생각하면 어찌 일찍이 먹고 숨쉬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늦추어진 적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제 또 대조의 명을 받아 외람되게 송사(訟事)를 듣고 판단하는 책임을 맡았으니, 모년(某年)의 일기(日記)를 어찌 차마 볼 수 있겠는가? 이것을 버려두고 태연하게 여긴다면, 이것이 어찌 아들의 도리이겠는가? 지금의 의리로는 모년의 일에 대하여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다시는 눈을 더럽히고 이[齒]에 걸지 말아야 옳을 것이다. 사초(史草)로 말하면 명산(名山)에 감추어 만세(萬世)에 전하는 것이므로 사체(事體)가 중대하여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마는, 일기는 이것과 달라서 그것이 있든 없든 관계되는 것이 없다. 이제 이것을 내가 청정(聽政)한 뒤에도 둔다면 장차 무슨 낯으로 백료(百僚)를 대하겠는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많으나 억제하고 차마 말하지 못한다.”
하고는 눈물이 비오듯하니, 좌우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정조가 세손 시절 승정원 일기에 기록된 사도세자에 관한 기록을 지워달라 애원하는 장면.
사초는 감히 어떻게 해달라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일기는 중요치 않으니 지워달라 울며 애원합니다.
그러나 영조는 이 요구를 거절하는 듯...하다가 결국 일기를 세초해버립니다.)
임금(영조)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이번에 하교한 것은 나라를 위하고 충자(沖子)를 위한 것이나, 오히려 미진한 것이 있었다. 왜냐하면 비사(秘史)는 의논할 수 없더라도, 《정원일기(政院日記)》로 말하면 천인(賤人)들도 다 보고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더럽히는 것이다. 사도(思悼)가 어두운 가운데에서 알면 반드시 눈물을 머금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유족(裕足)을 끼치는 뜻이겠는가? 비사가 이미 있으니 일기가 있고 없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오늘 시임(時任)·원임(原任)이 마침 입시(入侍)하였으므로 이미 하교하였다. 승지(承旨) 한 사람이 실록(實錄)의 예(例)에 따라 주서(注書) 한 사람과 함께 창의문(彰義門) 밖 차일암(遮日巖)에 가서 세초(洗草)하라. 내 마음은 종통(宗統)에 대하여 광명(光明)하나 이 일은 수은(垂恩)에게 차마 못할 일이었으니, 이번 하교는 병행하여도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일기를 보더라도 다시 그 글을 들추는 자는 무신년의 흉도(凶徒)의 남은 무리로 엄히 징계할 것이다. 다들 반드시 이 말에 따르고 국법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
(정확히 말하면 정조가 직접 조작을 한 건 아니고 세손시절 영조에게 간청을 해 허락을 얻어낸 것이지요.
또 사도세자가 왕손의 어미, 즉 후궁을 때려죽인 것에 대한 영조와 사도세자와의 대화 역시 실록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세자가 입(笠)과 포(袍) 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는데 임금이 문을 닫고 한참 동안 보지 않으므로, 승지가 문 밖에서 아뢰었다.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세자가 죽인 여인)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니, 세자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경언과 면질(面質)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책망하기를,
“이 역시 나라를 망칠 말이다. 대리(代理)하는 저군(儲君)이 어찌 죄인과 면질해야 하겠는가?”
하니, 세자가 울면서 대답하기를,
“이는 과연 신의 본래 있었던 화증(火症)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차라리 발광(發狂)을 하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하고, 물러가기를 명하니, 세자가 밖으로 나와 금천교(禁川橋) 위에서 대죄하였다. 』
(재미있는 건 이 직후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행실을 옹호해주기 급급하고,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지적하는 게 아닌 이 일을 고한 나경언을 죽여야한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합니다.)
제목은 역사 조작이라 이야기 했고 그에 대한 지적을 본문으로 이야기 했지만,
조작하려고 해도 결국에 기록이 남는 것이 또 역사인듯 싶습니다.
이렇게 기록이 다 남아있는 걸 보면요.
첫댓글 정말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었네요!!!
신기신기ㅇㅇ
이미 오래전부터 나오던 얘깁니다...-_-;
그런가요 ㅋㅋㅋㅋㅋ 저는 이쪽은 좀 문외한이라 ㅋㅋㅋㅋ
기록이란 게 참 무서운 거로군요
그런데 궁중에서 모자랄 것 없이 자랐을텐데 저렇게 성질이 포악할 수가.... 천성이 저런 것인가 후덜덜하네요 ....
100명정도를 맨손으로;; 레알 미친 시리얼킬러네요 ㅎㄷㄷ
임오화변은 부자간의 성격갈등이 주원인으로 분석돠는 추세로 아는데 책장사꾼 떡사마가 냅다 당쟁의 희생양으로 들먹이니...
100명이나 죽였다? 이건 아닐꺼 같은데...
100명 이상일 수도 있지요...-_-; <한중록>에도 "하루에도 여럿을 져냈다(죽은 궁인-내관들의 시체를 지고 궐밖으로 나갔다는 의미인듯...)"라는 얘기가 버젓이 나오고... 일각에서는 화완옹주와의 '근친상간'을 거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비슷한 정신병자들의 일반적인 속성이 그러하고, 사도세자가 화완옹주의 얘기를 잘들어줬다는 점도 석연치 않고요...-_-;;
정병설 교수는 세자가 미쳐돌아서 무려 임금인 아버지를 죽이려고 칼을 꼬나들고 나섰다는 얘기도 합니다. <한중록>에는 사도세자가 "내 아모리하고 오리라(내가 누구를 죽이고 오리라)"면서 창덕궁 수구문으로 들어가다가 돌아왔다는 얘기가 나오고,
그 아모리 할 대상이 바로 아버지인 영조라는 것이죠...ㄷㄷ 오죽하면 '생모'가 죽이자고 할 정도였을지 짐작이 안갈 정돕니다.
사도세자와는 달리 "조선을 망친 암탉"으로 악평을 받는 정순왕후의 경우도 매우 악의적으로 평가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마봉춘 <이산>에 나오는 정순왕후를 보고는 참 ㅈㄹ도 가지가지한다고 생각했다는...ㅋ
와 사도세자에대해 다시알게됬네요 그냥인간백정이네...
스크랩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