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이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을 완전하게 하는 일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은 로마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또 그 일에 대해 반대하지도 않았다. 다만 갈릴레이가 그것을 절대의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바라지 않던 바를 갈릴레이는 그 후 여러 해에 걸쳐 증명도 하지 않은 채 주장해 버렸다. 1633년의 재판은 그 때문에 열렸던 것이다. 그때의 재판 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갈릴레이는 공정하고도 적절한 처우를 받았는데, 종종 인용되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그리고 기록을 보아도 분명하지만, 갈릴레이는 애당초 압력을 받기 전에 먼저 주장을 철회했다.
갈릴레이가 유죄가 된 것은 불복종이라는 죄목에 따른 것이지 이단이라는 죄목 - 교회가 이단이란 죄목으로 처단하기를 바랐다면 손쉬운 일이었을 테지만 - 때문은 아니었다. 또한 갈릴레이는 앞으로 태양 중심의 우주론을 우주의 현실이라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금지당하기는 했으나 천문학적, 수학적 작업 가설로 주장, 논의, 부연하는 것까지 금지당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연구를 더 진척시킬 수 있는 길은 오히려 의도적으로 열려있었다
갈릴레이가 재판 기간 중에 감옥에 있었고 고문을 받았다는 따위의 말은 다 후세에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확실히 갈릴레이는 재판받는 동안 이단 심문소의 수인 처지였으나 독방에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바티칸 궁전 안에 주거를 할당받고 자기 하인의 시중까지 받을 수 있었다. 갈릴레이는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피렌체 대사관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어쨌든 갈릴레이는 피렌체 아카데미의 수학자였으며, 영사이자 피렌체 2백인 참사회의 멤버였고, 로마에서도 코스카나 공작의 비호를 받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법정은 갈릴레이에게 형식적인 금고형을 선고했지만 갈릴레이는 실제로 감옥에 들어갈 필요 없이 재판이 끝나자마자 로마를 떠날 수 있었다. 그로부터 한동안 시에나 대주교 밑에서 지내다가 만년의 몇년은 피렌체 근교의 알체체트리 마을에 살면서 연구를 계속했다. 그곳에서 집필한 최후의 대저작이 『두 개의 과학에 관한 대화』로서 갈릴레이는 기계물리학의 기초를 세웠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