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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라 감사하라
신명기 8:11-20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살아왔다. 어느 것 하나라도 내 마음 대로 할 수 없는 우리 모습이지만, 지금 내가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감사를 통해 은총의 시간, 은총의 평생을 이어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난 목요일에 대학수능시험이 있었다. 일찍 수험생을 학교에 보내고, 색동교회에서 열네 명의 어머니들이 세 차례 기도회로 모이며, 서로 마음으로 격려하고 응원하였다. 엄마가 내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또 특별해 보였다. 만약 지금 엄마가 없는 아이들은 누가 저렇게 응원을 해줄까? 엄마가 꼭 필요하더라. 인생에서 가장 큰 그늘이더라.
드라마마다 국민 어머니 역할을 하는 분이 있다. 김혜자 씨인데, ‘마더’란 영화에서도 어수룩하고 앞가림을 못하는 바보의 엄마 역할을 하였다. 못난 아들은 수시로 사고를 치는데, 행여 아들이 억울할까 싶어 엄마는 악착같이 감싸고 편든다. 한번은 아들이 우연한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몰리게 된다. 경찰도, 변호사도 믿을 수 없으니 엄마는 아들의 혐의를 벗기기 위해 모진 애를 쓴다. 결국 자기 아들은 혐의를 벗지만, 엉뚱한 다른 사람이 꼼짝없이 범인으로 몰린다. 그때 어머니는 그 어수룩하고 억울한 범인에게 묻는다.
“넌 엄마가 없니?”
엄마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힘인가?
부모가 없는 사람을 고아라면,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은 영적고아이다. 엄마의 마음 없이 살기도 벅찬데, 하나님의 은혜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각박할까? 하나님을 믿고, 자녀가 된 일은 얼마나 큰 특권인가? 내게 기도할 대상이 있고, 고장 난 내 인생을 고치고, 다시 회복할 소망을 품게 하는 능력,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신앙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는 한 마디로 ‘감사하는 사람’이다. 감사란 하나님을 향한 열린 태도다. 감사하는 생활은 곧 하나님의 뜻이다. 감사는 우리를 온전하고 거룩하게 만든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1)
신명기 8장은 모세가 자기 백성에게 한 유언의 일부이다. 죽음을 앞두고 그를 따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말들이어서 모세의 고별설교라고 부른다.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때가 임박하였지만, 모세는 함께 갈 수 없다. 지난 40년 동안 백성들을 입히고, 먹이고, 돌보던 엄마와도 같던 모세는 동행할 수 없다. 엄마 노릇을 하던 지도자를 잃게 된 상실감은 얼마나 클까?
이제 모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백성을 향해 쓴 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마치 엄마의 잔소리처럼 지극히 단순하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복을 받겠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다른 길을 간다면 망할 것이다.
신명기의 말씀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라. 하나님을 사랑하다면 그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라.
모세는 하나님과 언약백성으로 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한다. 지금 모세는 출애굽의 경험이 없는 신세대를 향해 말한다. 장차 하나님을 잊고 살지도 모를 그런 사람들을 향해 설교하는 것이다. 너희는 광야시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실 누구나 자기만의 광야시절이 있지 않던가? 과연 여러분의 광야는 언제, 어디, 누구와 함께였는가?
모세의 메시지가 참 귀하다. 얼마나 중요했으면 예수님께서도 신명기 8장을 인용하셨다.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실 때 일이다. 마귀, 곧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을 유혹하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고 떠보았다.
40일을 굶주린 예수님을 유혹하기 가장 쉬운 것은 음식이다. 마귀에게 유혹을 당하는 순간, 모세가 말한 광야의 교훈을 떠올리셨다. 예수님이 거절하면서 대답하신 말씀이 여기 있다.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광야 40년 동안, 그들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다. 광야에서 일용할 양식과 물을 얻으려면 내 힘으로 할 수 없다. 늘 하늘만 바라야 했다. 모두가 고생하던 그 때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지내던 시기였다. 광야의 만나를 일용할 양식으로 살던 시절에는 남다른 부자도, 남다른 가난한 사람도 없었다.
힘들수록 누구나 하나님을 떠올리고, 간구한다. 시어도어 베케트는 이런 말을 한다. “우리 눈은 바깥세상이 어두울 때 내면을 보게 된다”. 힘들고 괴로울 때, 나를 도우실 하나님을 바라게 된다.
2)
모세는 거듭거듭 말한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11).
엄마의 마음으로 모세는 권면한다. 광야에서 태어난 신세대를 향해 광야시절의 고난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한다.
사람들은 형편이 나아지면 과거 고생하던 시절을 쉽게 잊어버린다. 모세는 백성들이 나중에 형편이 나아져 행여 하나님을 잊게 될까 염려하면서, 몇 가지 예를 들어 경계하고, 경고한다.
첫째는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13). 내 배가 지금 만족스러우면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내 배가 부르면 고생스런 과거를 쉽게 잊는 법이다.
둘째는 “네 마음이 교만하여”(14)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본인이 잘나서 이만한 성취를 이루고, 쉽게 성공했다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자기만족과 교만에 빠지는 순간,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다.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17).
그러나 성경은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는 분 또한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18).
그러기에 하나님은 광야에서 사람들의 몸을 낮추고, 겸손하게 하셨다. 광야의 시험을 치룬 후 곧 다다르게 될 가나안 땅은 복을 주시려는 과정이었다.
사람에게는 역사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무슨 자격시험을 통과하려는 역사공부는 진정한 역사수업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참된 역사수업을 일깨워 준다.
예배는 일종의 ‘기억의 제사’라고 말 할 수 있다. 특히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일은 대표적이다. 모세의 고별설교가 계속되는 신명기 26장에 보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제사장의 입을 통해 자기 조상들의 과거를 회상한다.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신 26:5).
그들은 애굽에서 겪은 고난과 출애굽, 40년 광야생활과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한다. 그리고 첫 열매인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것이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신 26:10).
그리고 나서 감사의 잔치를 벌였다. 이런 점에서 감사는 역사적이고, 삶의 중심축이며, 공동체적이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해보라. 마음이 넉넉해지고, 어떤 경우든 긍정적인 마음을 품으며,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힘을 얻게 된다. 더 나아가 이웃을 돌볼 마음을 갖도록 한다.
2001년 독일 복흠교회 감사절기에 멀리 카자흐스탄에 사는 두 사람을 초청한 일이 있다. 국립 고려극장 극장장인 김겐나지 씨와 가수 문공자씨다. 문공자씨는 현재 인민배우가 되었다. 나는 1999년에 처음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을 방문하면서, 그때 배운 것이 있다. 같은 한국 사람인데 가난한 나라로 이주한 사람은 가난하게 살고, 부자 나라로 이민 간 사람은 부자로 살더라는 것이다.
러시아로 갈 때와 독일로 올 때에 그 당시 우리 민족의 형편이 달랐다. 고려인들의 경우 나라가 망했고, 너무 가난해 불법으로 국경을 넘은 식민지 백성이었다. 그런 반면에 독일에 온 사람들은 비자를 받은 당당한 노동이민자였다. 그들은 대부분 학력도 높고, 3년 이후를 바라보면서 힘든 광산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초청할 마음을 품은 것은 카자흐스탄 알마타에 살던 김겐나지 씨가 저녁 늦게 나를 그 집으로 데려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 아내 문공자 씨는 노래를 불러 주었고, 자기가 살던 사할린 동포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려인 이야기가 담긴 비디오를 보고, 소련 땅 전국으로 위문공연 다니던 이야기를 하였다.
그날 밤, 깊이 공감하였다. 평생 조국과 고향을 떠난 자기 동포들을 위문공연하며 살아온 그들 부부를 이번에는 우리가 위로하고 싶었다.
나는 독일로 돌아와 고려인의 역사를 소개하며 그들을 도울 방법을 찾았다. 당사자들을 불러서 그곳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초청을 추진하였다. 반대도 많았다. 차라리 그 돈으로 더 많은 후원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하였다. 결국 우리 교회가 모든 경비를 부담하고, 집집마다 숙식을 도왔다.
낯선 이방인 두 사람은 어찌나 겸손하고, 심성이 착하던지 모두 좋아하였다. 늦가을 을씨년스런 독일 한인공동체에 찾아와 훈훈한 인정을 전해주었다. 100배 효과가 있었다. 십여 차례 공연을 주선하고, 또 한인사회에 고려극장의 존재를 알리며 후원을 구하였다. 역시 남을 도울 때 사람 사는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추수감사주일에 특송을 불렀다. 그 중 하나가 고려인들의 노동요였다. 나라 없는 설움과 가난으로 쫓겨난 고려인들의 삶의 감사가 느껴졌다. 얼마나 부지런히 일했던지, 메마른 광야에 물길을 내고 논농사를 지었다.
“이 넓은 논판에 씨 뿌려/ 풍년의 가을이 돌아오면/ 누렇게 누렇게 벼이삭/ 우거 우거져 파도치지/ 에헤라 뿌려라 씨를 활활 뿌려라/ 땅의 젖을 짜먹고 왓싹 왓싹 자라나게”.
3)
독일동포들에게 러시아 동포들을 돕자고 한 까닭은 ‘역지사지’하려는 마음이었다. 처지를 바꿔 생각하면 훨씬 이해하기가 쉽다. 공연을 하는 가수나, 듣는 청중이나 조국과 고향, 어머니를 떠난 같은 처지에서 많이 울었다.
세상이 점점 각박하고, 살기가 팍팍해진다는 말을 한다. 예전 보다 더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고 사는 것은 맞는데, 우리는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는 동안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왔다. 공감능력이다.
사람들은 인간다움을 잃어가고, 함께 살아갈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요즘 인기 있는 ‘미생’ 만화 속 회사원은 이렇게 말한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밀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마라. 밖은 지옥이다”. 너무 경쟁이 치열하고, 우리 사회에 다툼이 많다. 점점 가족은 해체되고, 따듯한 공동체를 찾기 힘들다.
지금과 같은 탐욕의 경제로 우리 사회는 결코 온전할 수 없다. 큰 부자도 한 번에 두끼 음식을 먹지 못하고, 두 켤레의 신발을 동시에 신을 수 없다. 미국에서 23번째 부자인 찰스 피니의 말이다. 그는 자선에서만큼은 가장 큰 부자였다. 겨우 15달러 플라스틱 시계를 차며 살면서도 즐거워하였다.
모세는 거듭거듭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18),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20)라고 한다. 네 하나님이 친밀히 너와 동행하신 광야를 생각하라!
그러기에 우리는 진정으로 마음 속 깊이 사랑과 감사를 회복해야 한다. 신뢰와 협동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날, 추수감사주일 애찬 시간에 우리는 평소처럼 ‘날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를 불렀다. 그때 문공자씨는 러시아어로 감사의 의미가 참 특별하다고 가르쳐 주었다. 감사를 뜻하는 러시아어 ‘블라가다림’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드린다’는 의미라고 하더라.
감사는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가? 그리스도교 신앙은 가난해도 감사할 수 있고,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감사하는 마음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일(마 6:20) 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제는 입에다 “주여,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달고 살아보자. 서로 축복하라! 서로 사랑하라! 분명히 내일이 다시 보일 것이다.
그러기에 감사하는 마음은 나를 다시 설계하게 한다. 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기억하고, 일마다 때마다 간구할 수 있으며, 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언제나 함께하셔서, 날마다 때마다 은총의 예배요, 감사의 제사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