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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의 詩
생명과 자유의 종·사랑과 평화의 종소리
『님의 침묵』 : 만남의 시, 희망의 시
조선조 중엽 평생을 산림에 묻혀 살면서 나라의 청의(淸意)를 일으키고 언로를 바로 열고자 진력했던 남명(南冥) 조식(曹植)은 "천석들이 종을 봐라! 거대한 방망이가 아니고는 때려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시구를 남긴 적이 있다. 이 천석종(千石種)의 비유는 만해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혁혁한 독립투사이고 높은 경지의 선승이고 개혁승이자 불후의 명작 「님의 침묵」의 시인으로서 만해는 근세사 초유의 입체적 성격을 지닌 천석종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만해는 작게 치면 작은 대로 향그러운 소리가 나지만, 크게 치면 칠수록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큰 범종 소리로 우리의 심혼을 우렁차게 일깨우는 민족의 종, 역사의 종, 자유의 종, 평화의 종으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말이다.
만해 문학의 특징은 바로 불교 사상과 독립 사상이 탁월하게 예술적으로 결합된 데서 드러난다. 자유와 평등 사상, 민족 사상과 민중 사상으로 요약되는 만해의 불교적 세계 인식과 독립 사상은 만해 문학의 뼈대이자 피와 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해 문학은 불교 사상과 독립 사상, 문학 사상이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1925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창작하고 1926년 서울 회동서관에서 간행된 시집 『님의 침묵』의 전체 내용은 이별하는 데서 시작되어 만남으로 끝나는 극적 구조성을 지닌 한 편의 연작시로 볼 수 있다.
곧 시집 『님의 침묵』은 시 전편이 '이별-갈등-희망-만남'이라는 구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멸[正]-갈등[反]-생성[合]'이라는 변증법적 지양을 목표로 하는 극복과 생성의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만해의 시편들은 단순한 이별의 시가 아니라 만남의 시이고, 절망의 시가 아니라 희망의 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집 『님의 침묵』은 표면적으로는 사랑을 노래한 연애시이고, 내면적으로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자 하는 광복의 시이자 저항 시로서 성격을 지닌다고 하겠다.
그는 이곳에서 시집 『님의 침묵』을 썼다.
이별은 만해 시 전체의 대전제로서 생성에 이르는 방법적인 원리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자율적인 법칙으로 작용한다. 님을 이별한 시대, 일제강점기는 바로 침묵의 시대, 상실의 시대인 것이며 그러기에 언젠가 맞이하게 되는 만남의 시간은 바로 참된 낙원 회복의 시대, 광복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만해의 시는 기다림의 시 또는 희망의 시라고 이름할 수 있다.
부정적 세계관과 민중 의식
만해 시는 도처에 부정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 즉, '못 한다 / 아니 한다 / 없다 / 말라' 등의 부정적 종지법(終止法)이 상당수에 달한다. 이와 같은 부정적 사유와 비극적 세계 인식은 만해가 당대 사회를 상실의 시대, 모순의 시대로 파악하는 데서 비롯된다. 만해는 일제의 강점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근본적으로 모순된 것이며, 이에 대한 타파와 극복만이 정상적인 질서를 회복하는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만해의 일관된 일제에의 저항과 투쟁 정신은 그대로 시를 통한 부정적 세계관으로 상징화된 까닭이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 「당신을 보았습니다」 중에서
이별이 더 큰 만남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적 원리였던 것과 같이 부정은 참다운 긍정을 이룩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전제 조건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무(無)와 존재의 변증법이라는 존재론의 시로서의 성격뿐만 아니라 일제강점을 비판하고 그에 저항한 저항 시로서의 만해 시의 참된 면모가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님의 침묵』의 특징은 신성과 세속의 갈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님의 침묵』의 전편(全篇)을 통독하면 일견 많은 시편들이 대중가요와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나의 노래는 세속의 노래 곡조와는 조금도 맞지 않습니다"라는 구절에서처럼 끊임없이 신성 지향을 갈망하면서도 본능적이며 인간적인 정감이 시의 밑바탕에 깔려 있으며 또 그것이 직설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님의 침묵』에는 숱한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것도 특징이다.
녜 녜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려다가 초를 거꾸로 꽂었습니다 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숭보것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이 실컷습니까.
다만 님의 거문고 줄이 완급(緩急)을 잃을까 저어합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워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녜 녜, 가요, 이제 곧 가요.
- 「사랑의 끝판」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만해 한용운의 민중 정신을 잘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중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 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 바로 이 지점에서 참된 민중시로서 만해 시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다.
만해 시의 전통성과 주체성
여기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님의 침묵』에서 사랑을 호소하는 주체가 여성으로 나타나 있으며 시적 분위기 또한 여성적인 정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여성 주체가 활용됨은 물론 여성운(女性韻)과 여성적 상관물들이 등장하여 여성적 한과 마조히즘적 성향이 주조를 이루는 것이다.
언제인지 내가 바닷가에 가서 조개를 주웠지요.
당신은 나의 치마를 걷어 주셨어요, 진흙 묻는다고.
집에 와서는 나를 어린아기 같다고 하셨지요,
조개를 주워다가 장난한다고.
그리고 나가시더니 금강석을 사다 주셨습니다, 당신이.
나는 그때에 조개 속에서 진주를 얻어서
당신의 작은 주머니에 넣어 드렸습니다.
당신이 어디 그 진주를 가지고 계셔요.
잠시라도 왜 남을 빌려 주셔요.
- 「진주」
이러한 여성주의는 불교의 관음 사상 또는 인도의 여성 사상에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한국 시가의 전통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향가, 고려가요는 물론 많은 시조, 한시, 가사, 민요 등의 저변을 이루는 것이 여성적인 분위기와 주체, 그리고 이와 상통하는 한과 눈물의 애상적 정서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왕권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여성주의의 「사미인곡」을 쓴 것처럼, 만해도 님이 침묵하는 시대에 잃어버린 조국과 민족에 대한 회복의 소망을 역설화한 여성주의적 방법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만해 시의 여성주의는 정감적인 호소력을 유발하기 위한 표면적 기법일 뿐 그 내면에는 저항과 극복정신이 잠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주의적인 부드러움과 애한의 정조는 실상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표층적 응전 방식일 뿐 내면에 흐르는 선비 정신으로서의 저항 정신 및 극복 정신과 조화되어 한국 문학의 총체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만해 시가 절망을 이기는 극복 시로서 그 전통적인 면모가 선명히 드러난다.
만해 시의 방법, 은유와 역설의 시학
아울러 만해 시는 은유와 역설 등 시의 방법과 산문적인 개방을 지향한 자유시로서의 형태를 완성시킴으로써 현대 시적 특징을 확보하게 된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알 수 없어요」 중에서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님의 침묵」 중에서
이 점에서 만해의 시는 타고르 등 외래 시의 영향을 지적할 수 있겠으나 그보다는 전통 시에서 그 정신과 방법상의 맥락을 계승하고 있다. 실상 만해 시는 신문학사 초기의 각종 문예사조의 범람 등 서구 지향의 홍수 속에서 전통적인 시정신의 심화와 확대를 통해서 전통 정신의 현대적 계승을 성취한 것이다. 만해 시의 탁월한 은유와 역설 역시 서구 현대 시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불경이나 한시 등 전통 시에서 연원한 것이 확실하다는 점에서 만해 시는 민족 주체성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민족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만해의 사상, 생명 사랑의 철학과 평화 사상
한편 전체적인 면에서 만해의 사상은 첫째, 생명 사랑의 정신으로부터 출발한다.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라고 한 「군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만해 사상의 근저에는 생명에 대한 가없는 사랑으로서 생명 사상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둘째, 만해의 사상은 자유 사상과 평등 사상이라는 인류사적 대의를 근본 정신으로 하고 있음을 본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나룻배와 행인」
시집 전체에서 '나와 너'가 바로 하나이고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사유 전개 방식이 그러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나는 너'라고 하는 자타불이(自他不二) 사상은 바로 이처럼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며 평등하게 살아간다는 자유 사상, 평등 사상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모습이라고 하겠다.
셋째, 만해 사상은 민족 사상과 민중 사상이라는 민족사적 특수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종교나 사상에는 국적이 없는 것이 원칙이지만, 종교인에겐 국적이 있고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나라 사랑으로서 민족 사상·조국 사상이며, 그 민족의 구성원이 생산 주체인 민중을 바탕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민족 사상은 민중 사상을 얼개로 하여 전개되는 것이 특징이다.
넷째로는 진보 사상과 통일 사상을 들 수 있다. 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쓴 것이나 「조선 독립의 서」를 써서 불교의 근대화 운동, 사회의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것도 바로 이러한 진보 사상과 통일 사상의 구현을 향한 노력의 일환임은 물론이다.
만해의 저서와 유품, 친필, 일대기가 전시되어 있다.
다섯째로는 평화 사상과 사랑의 철학을 들 수 있다. 조선 독립과 평화가 바로 동아시아 평화의 관건이고 세계 평화의 기초가 됨을 역설한 것이나, 시집 『님의 침묵』 전체가 사랑의 드라마로 짜여진 것도 바로 이러한 만해의 평화 사상과 사랑의 철학을 반영한 것임은 물론이다.
만해, 그 풍란화 매운 향내
이처럼 만해의 문학은 우리 민족과 인류에게 험난한 역사를 살아가는 예지와 용기를 가르쳐 주며, 현실적인 생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신념과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점에서 참된 의미를 갖는다. 또한 그의 문학이 한국 문학에 있어 가장 부족한 요소인 종교적 명상의 진지함과 형이상학적 깊이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역사와 현실 상황에 치열하게 대응하면서도 자기 마음 안으로 물러나 정관(正觀)하고 투시하는 구도자적 삶 속에서 만해와 그의 시가 견지한 미적 거리와 형이상적 주제의 진지함은 한국 문학의 원숙을 위해 참으로 값진 교훈이라고 하겠다.
일관성 있는 행동에 따른 실천 의지와 저항 정신을 깊이 있는 불교 사상·독립 사상·문학 사상으로 이끌어 올리면서 끊임없이 변모하고 스스로 뛰어넘은 만해의 예술 혼은 우리가 되살려야 할 소중한 정신사적 에너지가 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만해의 시정신과 미학은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가 해방을 맞아 노래한 것처럼 어려운 시대일수록 '풍란화 매운 향내'로서 더욱 그 빛과 향기를 더해 갈 것이 확실하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만해 한용운은 개혁승이면서 독립운동가이고 문학가라는 입체적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승려로서는 만해 한용운보다 더 뛰어난 분들이 당대에 많았고, 독립운동가로도 안중근·윤봉길 등 온몸을 다 바친 분들이 여럿 있다. 아울러 시인으로서도 김소월이나 정지용 등 전문성을 지닌 분들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용운이 근대 시 최대의 인물로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 만해보다 각 부문에 있어 더 뛰어난 분들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만해가 만해인 것은 어떤 한 부문의 전문성이나 업적보다 그러한 세 가지가 함께 일체원융을 이룸으로써 뿜어내는 정신의 열기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일제강점기와 분단 시대의 온갖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근본 동력이자 에너지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그 누구도 쉽게 따를 수 없는 의미를 갖는다.
2. 당대에는 만해보다 육당 최남선이나 춘원 이광수, 벽초 홍명희가 더 우수한 민족운동가이자 문학가, 사상가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육당과 춘원은 오랫동안 문학사에서 중요 인물로 크게 다루어져 왔으나 만해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근년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현상이 역전되었다. 왜 그런 것인가? 인물 유형면에서 살펴보자.
육당이나 춘원은 당대의 선각자이고 천재적인 인물들임에 분명하다. 두 사람 다 역사에도 관심과 지식이 깊고 민족 정신사나 운동사에 있어서도 선구적인 인물이었으나 진정한 역사의식이 부족한 분들이라 평가할 수 있다. 박학다식한 지식인이지만 깊고 투철한 역사의식을 지닌 참된 지성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만해가 심우장(尋牛莊) 냉돌 위에서 순국하기까지 한평생 정신의 일관성을 지킨 데 비해 육당과 춘원은 1930년대 들어 친일 훼절의 길로 접어든 사실이 단적인 예가 된다고 하겠다.
3. 만해가 민족의 사표로서 오랫동안 존경받는 근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만해는 가난한 농촌 지식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정규적인 제도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험난한 현실을 살아가면서 온 몸으로 삶의 본질을 깨치고 자유와 평등·평화의 길로서 참인간의 길을 살아가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만해는 3·1운동을 선구한 행동인으로서의 삶을 통해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족·민중적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 실천적인 인물의 전형에 해당한다. 아울러 고통스런 감옥 생활 가운데서도 자유·평등·평화로서의 세계사적 대의와 함께 정의·양심으로서의 범인류적 보편 가치를 「조선 독립의 서」로서 체계화·논리화함으로써 문화민족의 자부심과 긍지를 드높여 준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아울러 끝까지 민족적 지절을 지키고 순국함으로써 정신의 일관성을 보여 준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독립투사로서 행동인·실천인의 측면과 함께 민족·자유 사상가로서의 측면, 그리고 한평생 진정성과 일관성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삼위일체적인 면이 만해를 만해답게 만들어 주고 민족에겐 불멸의 사표로서 추앙받는 이유가 된다.
4. 만해 시에서 흔히 '님'을 조국이나 민족으로 보고, 그의 시를 투쟁 시·저항시로 보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그럴 수도 있다. 분명 만해는 빼앗긴 시대 국권 회복을 위해 신명을 다 바친 분이기에 그의 문학작품도 그런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각도로만 보는 것은 그의 문학과 정신을 오히려 축소하는 게 된다. 그보다는 시집 『님의 침묵』, 즉 그의 문학을 먼저 예술 작품으로 살펴보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 즉 『님의 침묵』은 사랑에서의 떠남, 즉 이별에서 만남이나 소멸에서 생성을 노래하는 데 근본 뜻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개인적, 사적 차원에서는 연애 시, 사랑 시로 읽히는 데서 시로서의 맛과 멋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만해가 독립투사라는 점, 당대가 빼앗긴 시대라는 점을 공적 차원으로 상승시켜 보면 그것이 국권 상실에서 국권 회복으로 나아가려는 열린 정신을 담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총체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 점에서 만해 시에서 '님'을 조국이나 민족으로 규정짓거나 시를 독립 투쟁의 방편품으로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님의 침묵』, 만해의 문학은 투쟁과 저항을 넘어 보다 큰 사랑과 평화의 길을 노래하고자 한 사랑의 시학·평화의 시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시집 『님의 침묵』의 근본 성격은 이별의 시가 아니라 만남의 시, 슬픔의 시가 아니라 용기의 시, 절망의 시가 아니라 희망의 시라는 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