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참으로 무서운 무기이다. 그래서 언어를 선점하는 자는 승부에서 이길 기회가 많아진다. 법학은 “무기평등의 원칙”을 강조한다. 그래서 법의 최종단계인 소송단계에서 “무기평등의 원칙”이 지켜질 수 있도록, “이당사자대립구조”를 당연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당사자대립구조가 형식적인 무기평등의 원칙으로 희화되지 않도록, 다시 말해 실질적인 무기평등의 원칙이 지켜질 수 있도록 변호사를 소송대리인이나 변호인으로 선임하여 법률전문가의 조력을 받도록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무기평등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즉 적법절차에 의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비웃으며, “무기불평등의 원칙을 고착화”시켜 부당한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50대 50의 팽팽한 대결구도가 어느 순간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그 순간 무기평등의 원칙은 공염불이 되고 만다. 다행히 51%의 힘을 가진 자가 스스로 겸손하고 양심이 있는 자인 경우에는 49%를 존중하고 소수의 의견을 최대한 고려하지만, 그 51%의 힘을 가진 자가 탐욕스럽고 양심이 없는 자인 경우에는 자신이 가진 51%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힘이 99%가 될 때까지 세력을 키우게 되고, 1%로 졸아든 자를 향해 계속 핍박을 가한다. 그리하여 반대쪽이 영원히 도전하지 못하도록 무기불평등의 고착화를 확정지어, 자신을 영원한 강자로 군림케 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이 이러하지 않나 싶어 염려스러운 것이다.
정다운 시인의 “과육”이라는 시 한편을 본다. “미안하다/먼저 내린다/못 견디겠다/무서울 정도로 싫다/싫어졌으니 당신이 원하는 대로/나는 이만//자전거를 주워 타고/이 언덕을 굴러 내려와/벽 앞까지 벽이 노랗게 달려들 때까지/먼저 겁먹는 놈이 지는 거라고/결코 뛰어내리지 않는/당신//잘 익은 토마토처럼, 탁, 터지게 되어 있다//나는 붉고 살이 무르고/꼭지가 이미 졸아든 식물이다/당신이 이기지 않아도/내가 지게 되어 있으니/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을/그만 노려보길//당신처럼 멋지게 터져버리지 못해/미안하다/내가 돌아와서/가족들은 오늘밤 안도한다/중요한 건 그뿐/내 한 몸을 보전했으니/그 몸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겠다” (정다운의 “과육” 전문, 현대시 2012. 5. 호에 발표).
어제 배달되어 온 월간시잡지 “현대시”에 발표된 정다운 시인의 “과육”을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이 나이가 되어 후배시인의 시를 읽으며 눈물이 핑 도는 나의 심약함에 홀로 머쓱해지면서, 누가 볼까 혼자 눈물을 훔쳤다. 시인의 마음을 여러 가지로 여러 각도로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안겨준 시를 읽으며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인생과 동행하는 것, 더불어 함께 사는 것, 참으로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함께 걷던 동지의 길에서 홀로 이탈되어 나오면서, 미안하단다. 그 함께 걷던 이가 옳은 길을 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내가 돌아와 가족들이 오늘밤 안도할 것 때문에 배신의 길에 들어서며 내 한 몸 보전할 의미를 찾으며, 이탈의 핑계를 찾으며 그 한 몸 살아내겠다는 작은 소시민의 아픔이 느껴진다. 내리지 않고 내리막길의 자전거를 주워 타고 벽 앞까지, 벽이 노랗게 보일 정도로 공포스러운 극한상황에 이를 때까지 결코 뛰어내리지 않는 당신, 그 당신도 역시 무기불평등에 시달리는 소시민이다.
시인은 말한다. “잘 익은 토마토처럼, 탁, 터지게 되어 있다”. 당신도 터지게 되어 있고, 나도 터지게 되어 있다. 당신이 이기지 않아도 내가 지게 되어 있으니, 당신처럼 멋지게 터져버리지 못해 미안해 하는 사람들을 그만 노려보라고 한다. 시인의 개인사, 사랑이야기처럼도 들리고, 공공사, 우리 모두의 이야기처럼도 들리는 정다운 시인의 “과육”을 다시 소리내어 읽어본다. 그래도 나는 네 편이라고 절규하는 시인의 내면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나는 내렸다. 그래서 나는 살았다. 그래도 나는 네 편이다. 심정적으로 영원히 네 편이라는 시인의 진실이 들려온다. 하지만, 이것을 용기 없는 변명이라고 비난만 해야 하는가?
공정방송쟁취를 위한 엠비시파업 100일째로 접어든 지난 8일, 방현주 아나운서는 임신 6개월의 몸으로 파업에 계속 참여하고 있다. 반면에 양승은 아나운서는 종교적 이유로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생뚱맞은 변명과 함께 노조를 탈퇴함과 동시에 파업을 중지하고 방송현장으로 복귀하여 주말뉴스데스크앵커보직을 맡았다. 그녀의 변신에 김재철 엠비시 사장의 말 한마디가 신의 계시였단 말이냐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방현주 아나운서는 자신의 새 생명에게 거짓말하는 어머니로 살아갈 수 없음에 새 생명에게 진실이 무엇이고 정의가 무엇인지를 교육하기 위해 거짓 보도가 강요당하는 현재의 엠비시체제에 반대하며 파업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양승은 아나운서는 자기의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충실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아 더 이상 파업을 계속할 수 없다며 파업불참의 변을 주장한다. 방현주 아나운서나 양승은 아나운서나 둘 다 과육이다. 양비론에 모든 것을 맡기고 진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냥 다 불쌍한 과육, 붉고 살이 무르고, 벽에 부딪히면 잘 익은 토마토처럼, 탁, 터질 수밖에 없는 인간 본연의 불쌍함이 느껴질 뿐이다. 다만, 다만, 다만, 다만 그 뒤에 숨어 있는 51%의 음흉한 세력이 무서울 뿐이다. 전면에 나서지 않은 채 리모콘을 작동하고 있는 그 51%집단이 두려울 뿐인 것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위 예에서 엠비시 노조원들 사이에 당근과 채찍을 제공하여 그들의 단결을 와해시키려고 획책 한다. 참 무서운 집단이다. 하지만 참으로 가소로운 집단이기도 하다. 단결된 과육이 으깨어지고 바스라져 맛있는 쥬스가 되고, 더 발효되면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기도 하는 맛있는 와인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과육도 무섭지만, 와인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과육을 와인으로 만드는 그들은 앞으로 더 큰 무기 앞에서 아마 박살이 나지 않을까 싶다.
두려움의 실체는 세상 어느 것도 아닌 자신의 마음이다. 자신의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면 세상 모든 것이 두려워지지만, 자신의 마음에서 스스로 두려움을 떨쳐내 버리면 이 세상 어느 것도 두려운 것이 없어져 버린다. 두려움은 그렇게 존재하지 않은 유령에 불과하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정녕 51%에 의해 점령당해버린 사회인가? 49%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희망이 상실된 세상인가? 나는 이 칼럼난을 통해 매주 어찌 보면 공허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한다. 내가 말하는 내용이 매주 다른 이야기인 것 같지만, 실은 단 한 가지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는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힘을 다 가진 것 같은 51%이지만, 그 51%는 저절로 익어 터져버리는 과육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때가 되면 저절로 붉어지고, 저절로 물러지고, 저절로 터져버리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지만, 그 시기를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다면, 그래서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면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시기를 앞당기는 노력을 모두 함께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국회의원 비례대표후보자 선출을 둘러싼 당원투표에서의 부정투표시비로 정국이 어수선하다. 진보의 생명은 “진실,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진보에서 그러한 공적 가치가 부정되면 존재의의를 상실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통합진보당은 지금 최대위기상태에 놓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보수언론과 방송은 최대의 먹잇감을 찾은 듯 통합진보당, 아니 진보세력을 향해 집중공격을 가하고 있다. 똥 묻는 개 겨 묻은 겨 나무라는 꼴이다. 저축은행 비리가 극에 달한다. 오죽 하면 저축은행업계 제1위였던 솔로몬저축은행이 퇴출이 될 수 있는가, 보수의 극단적 부정부패를 보여주고 있는 현상이다. 솔로몬저축의 임석회장이 이명박 대통령이 속해 있던 소금회(소망교회금융인모임)의 회원이었다니, 참 잘 하는 일이다. 왕차관(이 말을 쓰고 있지만 무슨 개뿔 같은 왕차관, 썩은 내 나는 비리차관이지, 안 그런가?)이라며 이명박, 이상득 두 사람 뒤에 숨어 호위호가하던 보수인물의 구속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당내후보투표부정은 통합진보당의 자업자득이라, 진보정당으로서는 뼈를 깎는 반성으로 이를 감수해야 한다. 문제는 당내 주류와 비주류가 내부권력투쟁을 벌리고 있는 양상으로 전개되지 않도록 자중해야 한다. 이는 보수언론이 요구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따르는 꼴이 되어 자멸, 공멸의 길로 치닫는 지름길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류와 비주류의 구성원들도 사람인지라 자꾸 상대방을 공격하다 보면 감정싸움으로 번지게 되면 본질, 잘못을 고치려는 자기정화보다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공격에 집중하다가 스스로 무너지는 더 큰 우를 범하게 된다는 점을 경고해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러러면 철저하게 반성해야 한다. 왜 그런 내부적 부정부패가 양산될 수 있도록 방치하는가? 그러기에 철저한 자기반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언제부터인지 통합진보당을 보도하면서 “당권파와 비당권파”라는 용어를 보수언론들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당내 세력관계를 보도할 때는 “주류와 비주류”라는 용어를 약속한 듯 사용해 온 보수언론들이 유독 통합진보당을 보도할 때는 “당권파와 비당권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무의식적이지만 북한이나 중국의 공산당 일당과 대비시켜 국민을 세뇌하는 교묘한(?) 표현방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통합진보당의 내부관계를 “당권파와 비당권파”의 투쟁관계로 묘사함으로써, 마치 북한 공산당이나 중국 공산당 일당체제에서의 “당권파와 비당권파”를 연상케 하여 양자를 동일시시키는 착시현상교육을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 교묘한 언론조작의 한 형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다운 시인은 말한다. 너도 과육이고, 나도 과육이라고, 우리 모두 과육이라고. 하지만 어쩌랴, 과육이니까 내릴 수 없고, 내릴 수밖에 없고, 그래도 우리는 모두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더불어 터져 와인이 될 때까지. 자, 이번 주말에는 사랑하는 이와 와인 한 잔 어떠세요? 태평스럽다고요? 살다 보면 그럴 때도 한 번쯤은 있어야 하지 않나요? 자, 과육입니다. 과육일 때는 안주가 되고, 발효하면 와인이 되는, 결국 과육입니다, 과육.
법률저널 2012년 5월 11일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