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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립 지음 『인간본성의 역사』 첨언 (3)
팔경산인 박희용
[마르크스의 휴머니즘]
제4부 역동적 자아
(22) 486p 욕구의 생산과 재생산.
[첨언] 욕구의 생산과 재생산이 자기 발전의 동력이자 기제이고, 자기 발전의 총체가 사회 발전이고, 사회 발전의 총체가 국가 발전이고, 국가 발전의 총체가 國史 발전이고, 국사 발전의 총체가 世界史이고, 세계사의 총체가 인류 문명사이다. 그러므로 욕구의 생산과 재생산은 계속돼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이 사상가들이다.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는 그들 사상가 중의 하나이다.
(23) 490p 인간은 사회적 결정요인으로부터 존재론적으로 고립될 수 없다. 그것은 항상 사회적으로 조정된다. 이때의 인간 본성은 ‘인간 본성 일반’이 아닌 ‘각 시대에 역사적으로 변용되는 것으로서의 인간 본성’이다. 그러므로 ‘인간 본성의 끊임 없는 변형’이란 ‘인간 본성 일반’의 불변성을 전제로 한 연후에만 성립될 수 있다.
[첨언] 인간 본성 일반은 불변성이고, 역사적으로 변용, 변형되는 인간 본성이란 말은 상호 모순되어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존재의 양면성이다. 즉 인간 본성의 근본은 같으나, 시대와 역사의 변화에 따라 본성의 활성 모습이 다르다는 말이다.
(24) 490p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이고. ‘노동은 유적 존재의 본질’이다.
[첨언] 인간은 생물이다. 흡수-소화-배설을 반복해야 생존할 수 있다. 동물은 먹이를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지만, 인간은 먹이를 구하기 위해 노동한다. 인간을 지탱하는 지주들 중에서 가장 굵고 튼튼한 것이 노동이다.
마르크스의 오류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육체노동만을 중시한 것이다. 육체노동을 하는 노동자 중에서도 공장 노동자들만을 노동자로 취급했다. 아니다, 농민, 건설 노동자들도 소중하다. 또한 육체노동뿐만아니라 정신노동도 노동이다. 세상은 단순한 육체노동, 공장노동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모든 노동이 고루 역할을 해야 세상이 원활하게 돌아간다.
(25) 491p 마르크스는 소외를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이거나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것으로 현실화한다.
[첨언] 노동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자기와 가족의 생활을 위해 땀 흘리며 일하기 때문이다. 노동이 문제가 되고 결국 사회 개혁과 시대 혁명의 초점이 된 원인은 공장노동의 융성 때문이다. 인구가 폭증하면서 물질적 요구가 폭증하고, 그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공장 건립과 상품 생산이 폭증했다. 그리하여 공장 노동자들이 폭증했다. 자본주의가 상품-금융-군사 자본주의로 변질되면서 노동의 양이 늘어나고 질은 악화됐다. 자아의식에 눈뜬 노동자들의 불만이 응집하여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성공한 사건이 1917년 2월 러시아 노동자 혁명이다. 볼셰비키는 그 혁명의 열매를 낫으로 베어 가로챘다.
(26) 493p ‘소외된 노동’은 ”인간을 기계적 도구로 바꾸고 정신적, 육체적 괴물로 변형시킴“으로써 인류 보편의 ‘유적 속성’을 억압하게 하는, 자본주의의 특징적인 현상이다.
[첨언] 그러므로 ‘소외된 노동’이 아닌 ‘참여하는 노동’이 돼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대량생산과 대형공장 등이 존재하는 한에는 ‘참여하는 노동’은 환상일 뿐이다. ‘참여하는 노동’을 위한 방안으로 적당 상품, 적당 생산, 적당 공장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폭증하는 인구와 폭증하는 욕구를 제어할 수 없다. 현대에는 과도한 욕구와 소비가 문제되고 있다. 인간의 물질적 욕구는 원초적이다. 자유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이러한 부정적인 면을 제어할 수 없다. 이 문제는 통제 공산주의 체체하에서도 제어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연구가 세계 곳곳의 학자들에게서 연구되고 있다. 인구를 적절하게 유지하고, 물질적 욕구를 적당하게 조절하자는 캠페인에 인류가 호응하겠는가? 소수는 가능하다. 그러나 다수 대중은 이기주의 때문에 호응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강력한 사회적, 국가적 통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 시민 민주주의를 숭상하는 시민들은 통제를 거부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따라 인류 미래가 결정된다.
(27) 494p 6) 인간 개조
[첨언] 인간 개조가 가능한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은 가소성과 함께 복원력을 갖는다. 만들어져서 영원하지 않고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기도 한다. 잘못 만들어지면 다시 고쳐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극소수는 한 번 만들어지면 복원되지 못한다.
(28) 494p 노동의 소외는 인간 본성의 상실이므로, ‘소외된 노동’의 지양은 유적 존재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지양의 현실태는 자본주의의 철폐이다.
[첨언] 노동의 소외를 인간 본성의 상실과 유적 존재의 본래성까지 연결하는 것은 어떤 정치적 목적을 위한 작위적인 논법이다. 소외되지 않는 노동, 즉 즐거운 노동은 자기 자신의 이득과 편리를 위해 노동하는 농업과 가내공업과 같은 것들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생산공장에서 자기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그러므로 노동은 상수가 된다. 문제는 변수, 즉 소외 등 노동에 붙는 여러 가지 부가물들이다. 소외는 그중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소외 문제를 변수 차원에서 해결해야지 상수를 침범하면서까지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교각살우, 소외 때문에 노동을 죽이는 수가 있다. 그러므로 소외를 인간 본성과 유적 존재의 본래성까지 확대 해석하는 것은 노동 본래의 의미를 퇴색하게 하는 오류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철폐’가 아니라 ‘개선, 개혁’이어야 한다. 무조건 자본주의를 철폐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지론은 편협하고 과격하다. 인구가 증가하면 물품 대량생산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공장이 많이 세워져야 하고 노동자가 많이 필요하다. 그 많은 공장을 세우려면 막대한 자본과 복잡한 관리와 경영이 필요하다. 국가가 조달할 수 있는 자본과 관리 인력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민간의 자본과 관리가 경제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생산과 관리, 유통과 소비가 경제 동력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서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서 분배한다는 말은 공상이다. 민간 자본의 과도한 증식과 독점, 노동자의 낮은 임금 등이 문제이지 자본주의 자체는 건강한 경제 동력이다.
(29) 494p 마르크스는 1852년 3월 바이데마이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러 계급의 존재는 오직 생산 발전의 특정한 역사적 국면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계급투쟁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독재 그 자체는 모든 계급의 폐지, 그리고 무계급 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를 이룰 뿐이다“라고 썼다.
[첨언] 마르크스여, 당신이 말한 무계급 사회가 어느 세월에 오는가. 에덴동산에서 노니는 사람들은 무계급 사회다. 마르크스 잠재의식 속에는 에덴동산이 들어 있다. 지상의 공산주의 낙원 에덴동산에서 모든 인간은 순한 양이다. 양 떼에는 계급이 없다. 그가 유물론을 말하며 무신론자라고 항변해도 그는 여호와의 변종 신도이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는 서양 기독교의 변형이다. 하나님 여호와가 선과 악을 한 손에 쥔 절대자이듯이 공산주의자는 지상의 선과 악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절대 권력자들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생전에 여기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사후에 그의 후계자들인 레닌,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등은 도달했다.
(30) 495p 마르크스는 자본주의하에서의 프롤레타리아들의 이중적 위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계급(프롤레타리아)은 근본적으로 질곡에 얽매여 있는 계급이다. 그 계급은 시민사회에서 실존하지 않는 시민사회의 계급이며, 모든 신분을 해체한 계급이다. 그 계급은 사회의 다른 모든 영역을 해방시키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는 계급이다. 그 계급은 완전한 인간 상실이며, 따라서 완전한 인간 회복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획득할 수 있는 계급이다. 이렇게 하여 사회를 해체하는 특수한 신분,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이다.“
[첨언]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를 질곡에 얽매여 있는 계급으로 봤는데, 당시의 시민사회는 이들만이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계급과 계층이 있었다. 질곡에 얽매여 있는 계급은 전체 시민사회 전체의 일부분이었다. 그런 프롤레타리아가 자기 신분을 해체하고 인간 회복을 위해 시위에 이은 폭동으로 시작되는 혁명을 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얽매여 있지 않은 다수의 다른 시민들을 해방시킨다는 것은 이치와 도리에 어긋난다. 작은 일상에 만족하고 소박한 행복을 가꾸며 살아가는 일반 시민들, 소시민으로 규정되는 그들은 일부 과격분자들에 의한 불안한 해방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을 싸잡아 해방시킨다고 설쳐대는 프롤레타리아는 자기들의 불평불만을 사회 전체의 것인양 확대시키는, 불만 이입의 가스라이팅을 즐기는 이상한 자들이다.
한번 프롤레타리아는 계속해서 프롤레타리아였다. 수십만 명의 프롤레타리아가 공장을 이탈하여 혁명에 참여했지만 다시 공장 현장으로 회귀했다. 세포 대표자들 소수만 볼셰비키 당원이 되었을 뿐이고 대부분 노동자는 다시 노동자로 현장에 섰다.
스탈린 러시아 공산당이 발간한 『러시아혁명사』에서도 마르크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대부분이 지지한 당파는 볼셰비키 공산당이 아니라 멘셰비키 사회노동당이었다. 2월혁명을 주도한 세력은 볼셰비키가 아니라 주부들의 시위에 이은 소비에트 노동자들이었다. 10월혁명은 볼셰비키들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이용해서 일으킨 무력 찬탈극이었다.
(31) 496P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의식이 아니다. 반대로 그들의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첨언] 반대로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철학자들의 몫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에 해당한다. 사람은 자연의 산물이고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자기가 존재하는 현실과 현장의 모습대로의 의식을 갖는다. 그러므로 공장 노동자는 공장 노동자다운 의식을 갖는다. 공장은 기계이므로 기계의 의식을 갖는다.
그러한 공장 노동자들이 원하는 해방이란 무엇인가? 가장 큰 것은 노동을 안 하는 편안함일 것이다. 그러나 노동을 안 하면 생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공장에 속하게 되고, 공장 노동자의 의식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의식과 존재의 관계가 빤한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고 복잡한 의미를 부여하여, 이러한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라고 보는 까닭이 무엇일까?
(32) 499p 마르크스는 모든 인간은 강제적 생산 활동의 압박에서 벗어나서 ”사냥꾼이나 어부, 양치기, 학자가 되지 않고서도 마음먹은 대로 오늘 이 일을 하고 내일 저 일을 하면서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소 먹이는 일을, 저녁 후에는 토론을 할 수 있다“(1845~46, 『선집』 1, 214)고 말한다.
[첨언] 평범한 사람들 이하는 이 말 한마디에 혹하지만 상식을 아는 사람이라면 믿지 않을 것이다. 특히 불평불만이 가득한 하층계급 군중들에게는 하늘에서 내리는 복음으로 들릴 것이다. 마르크스 말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상당한 자본가이다. 또한 토론을 할 수 있을 수준의 지식인이다. 그래야 하루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권을 가진 사람은 왕족과 귀족 그리고 상류층 저명인사들 뿐이다. 보통사람이 그만한 자본과 지식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한평생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말은 ”가난한 자들이여, 부지런히 노동하여 부를 쌓아라“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여 왕족, 귀족, 상류계급이 가진 특권을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빼앗아 우리들의 것으로 만들자!“가 된다.
마르크스의 말은 허황한 공론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말이다. 프롤레타라아가 실천하면 모두 다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저녁 후에는 토론을 할 수 있다“는 불가하다.
이런 글을 써서 남긴 마르크스는 학자가 아니다. 학문의 형식을 빌어 정치적 선동문을 쓸 줄 아는 하나의 지식인일 뿐이다. 그의 글이 유명한 이유는 프롤레타리아를 격동시킬 줄 아는 화법 때문이다. 심리와 욕구 파악에 매우 능숙하다. 그러나 학자의 글은 진실과 함께 평화를 담아야 한다. 스스로 노력하여 유토피아에 오를 생각보다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아서, 약탈하여 부자 행세를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글을 쓴 자는 진실과 평화가 아니라 허위와 폭력이 두뇌에 담긴 자이다.
내가 마르크스 선집을 읽지는 않았지만, 읽을 생각도 없지만, 마침 홍일립이 지은 이 책 속의 유명한 학자 중의 한 인물로 수록되어 있고, 그의 많은 말 중에서도 위의 말을 읽고는 다시금 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듦을 금할 수 없다. 한 단지의 장맛을 손가락 끝에 찍힌 장으로 알 수 있다. 마르크스의 심저에는 무서운 암흑이 도사리고 있다.
(33) 500p 공산주의 유토피아에서는, 인간과 자연은 본질에서 완전한 통일을 이루며, ”인간이 관철된 자연주의인 동시에 자연이 관철된 인간주의“를 구현하게 된다.
[첨언] 좋은 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몽상가였다. 논리가 아니라 감정으로 프롤레타리아를 현혹해서 충동시켰다. 마르크스가 말하고 논하는 ‘유토피아’는 지극히 私的이다. 현실성이 없는 몽롱한 사기극이다. 인류의 시작부터 끝까지 유토피아는 없다. 종교가들은 ‘마음의 유토피아‘를 말하며 대중을 위로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허구일 뿐이다. 노동하여 가족이 일용할 양식을 벌어야 하는 하루하루만 있을 뿐이다. 다만 노동의 질과 양이 문제일 뿐이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생각할 때는 사후에 추종자들이 자기 사상을 어떻게 변화, 곡용, 변질, 왜곡시켜서 이용, 악용할지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르크스 그도 말년에 자기 사상의 편협성과 과격성을 염려했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가 뿌린 과학적 공산주의 씨앗이 그의 사후에 지구 곳곳에서 어떻게 성장했는가를 인류문명사 20세기가 보여주고 있다.
유적 존재며 체강동물인 인간에게 노동이 생존과 생활의 필수라면, 허황한 에덴 동산식 공산주의 유토피아보다는 노동의 질과 양을 공평하게 하는 사회제도가 현실적 유토피아가 아니겠는가. 진실과 평화가 담보된 사회제도에 의한.
(34) 502p ‘인간 본성의 힘’에 대한 믿음은 마르크스가 인간의 불변적이고 자연적인 본성에 만족하지 않고 인간 본성의 풍부한 확장성을 희망했다는 징표이다.
[첨언] ‘인간 본성의 힘’에 대한 인식과 이해는 자고로 다양하다. 마르크스도 그중 하나다. 마르크스는 그 힘을 공산주의 혁명의 동력으로 보았다. 그러나 순리와 평화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힘이 더 많고, 더 좋은 방향으로 세상의 변화를 이끈다. 자본주의가 초기에는 많은 부작용을 초래했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조금씩 수정되고 있다. 그 수정의 동력은 ‘인간 본성의 힘’의 근본인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에서 나온다. 반대로 공산주의에서는 자유주의가 무시되기 때문에 자기 변화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정한 범위까지 성장하면 정지되거나 퇴화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창의적인 내부 동력의 고갈로 인해 고사한다. 고사하지 않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붙들고 씨름하며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한다. 그러나 그것도 장기적으로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어느 체제의 시회에서든지 역사를 움직이는 ‘인간 본성의 힘’은 새로 태어나는 세대들에 의해 충전되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세계 각국에는 20세기적 의미의 프롤레타리아는 없다. 있어도 극소수이다. 그래서 공산주의 국가들도 마르크스-레닌식의 고전적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국에 적합한 공산주의로 변용시켜 활용하고 있다. 노동은 여전히 중요하고 노동계급도 여전히 존재한다. 구시대와 달리 노동의 질과 양도 개선됐고 노동자들도 고학력이다. 마르크스-레닌의 망령이 한 세기 만에 무대에서 퇴장했다. 그리하여 21세기는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 경쟁이 아니라 세계 모든 국가가 자국중심주의가 됐다. 이념에 따라 두 개의 진영에 줄 서는 게 아니라 국익에 따라 이합집산하고 있다. 21세기에는 세계 각국의 ‘인간 본성의 힘’이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 긍금하다.
(35) 505p 마르크스는 「수고」 이후 몇 년 동안의 주된 과제는 인간 본성의 역동성과 가소성을 역사발전의 동력과 연결시킴으로써 역사발전의 합법칙성을 정당화하는 사적 유물론을 정식화하는 데 있었다.
[첨언] 이러한 인간 본성의 역동성과 가소성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분출되어야 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유물론에만 집착하여 역동성과 가소성을 과격한 공산주의 폭력 혁명론의 길을 닦는 도구로 사용했다. 역동성과 가소성의 물을 젖소가 먹지 않고 독사가 먹었다. 역동성과 가소성이 교육과 교화, 문화와 평화의 방법으로 분출되어야 정상이다. 그래야 온건한 사회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36) 506p 그러나 마르크스 이후 100여 년 이상의 역사는 그의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의 생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실제에서 실험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던 ‘파리코뮌’은 처참하게 실패했고, 다음 세기 후발자본주의 제국에 등장한 공산주의는 그의 역사 기획안에는 없는 전체주의의 기형적 변종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그 모두는 지난 역사의 유물로 남게 되었다. 1840년대 마르크스의 인간학은 냉정과 열정이 뒤섞인 혼합물이 되고 말았다.
[첨언] 한 페이지에 걸쳐 저자 홍일립이 마르크스를 예리하고 심각하게 비판하고 있다. 지금 2025년에도 전체주의의 기형적 변종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지구 위에 제국으로 행세하고 있다. 마르크스 공산주의도 아닌 것들이.
그런데 ‘파리코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는 개념이 다르다. 전자는 시민혁명 임시집행부였고 후자는 정권을 장악한 후의 장기적인 공산주의 정치체제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원형은 ‘소비에트’에서 찾아야 한다. ‘소비에트’는 인민민주주의의 소박하면서도 순수한 원형이다. ‘소비에트’의 권력은 강자 한 사람이 장악한 게 아니라 자유로운 중론에 의해 선출된 대표자에게 참여자 모두가 믿고 맡긴 것이다. 그 권력은 항구적이 아니라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의 집행기간 동안에만 갖는 임시적인 것이었다. 다시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소비에트’가 소집되고,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이 ‘소비에트’가 큰 집단이나 국가로 옮겨지게 되면 많은 부작용이 따른다. 그 부작용은 권력의 확대에 따른 필연적인 것이다. 그렇더라도 ‘소비에트’ 본연의 소박함과 순수성을 견지한다면, 좋은 집단, 좋은 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
‘소비에트’는 마르크스 사후에 소련 공장 노동자들이 만들어 낸 제도이다. 마르크스가 ‘소비에트’의 원리를 미리 알았다면 구태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마르크스 역시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이 실천됐을 때의 후과를 예상했을 것이다.
(36) 507p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신의 오류를 잘 알고 있었다. 후기의 마르크스는 인간 본성에 관한 과도한 수사를 하지 않았고, 공산주의 유토피아에 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혁명의 문제를 신중하게 고려할 것을 주문했다. 프랑스 내전을 전후하여 그는 낭만적 혁명주의자들이나 급진적 모험주의자들과 완전히 결별했고, 혁명을 말하지 않았다.
후대의 많은 해석가들은 그 짧은 기간에 쓰인 수사학에서 마르크스이 형상을 그렸고, 그 형상은 마르크스 자신이 지울 수 없는 덫처럼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마르크스 사상의 전모를 보여 줄 수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마르크스 진실의 일부 파편만이 담겨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첨언] 결론에서 저자 홍일립은 비판과 인정, 부정과 긍정을 오가면서 마르크스를 혼미하게 만들고 있다.
후기의 마르크스가 자기가 젊었을 적에 주장한 이론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과 행위를 했다고 하는데,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이용되고 인용되는 사상의 핵심은 1848년의 <공산당 선언>이다. 마르크스는 자기 이론이 과격분자들에게 이용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이용한 자들은 마르크스의 이론이 자기들이 추구하는 목적에 맞게 합리적이고 정당하기 때문에 이용했다. 그러므로 이용한 자들의 잘못보다는 이용당하도록 된 이론을 만든 마르크스의 잘못이 더 크다.
모름지기 학문에 뜻을 두고 평생을 가려는 자라면 젊은 시절에 쓴 글들을 함부로 발표해선 안 된다. 보관하면서 이기고 익힌 후에 나이 50세를 넘어서 비로소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잘못이 거의 없고,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책임질 수 있다. 인생이 무어 그리 바쁜가. 보통 살면 70세 전후이다. 젊어서 반짝 빛나다가 사라지는 유성과 같은 학자가 아니라 행성이나 항성과 같은 학자가 되기를 기획해야 한다. 大器晩成이다.
마르크스 읽기를 마친다. 나는 마르크스를 학자라고 보지 않는다. 시대를 훔친 사기꾼이었다! 2025. 11. 13. 南禪軒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