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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이런 복을 주옵소서(시23:1-6)-2014.1.5
모든 사람들은 새해만 되면 서로에게 덕담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축복을 빌어줍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어떤 복을 빌어주셨습니까? 그리고 어떤 분으로부터 어떤 축복을 받으셨습니까? 주로 나누는 덕담은 비슷합니다. “부자되세요, 건강하세요, 번창하세요, 행복하세요” 라는 말들이지요. 다들 그런 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복을 빌어준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 그런 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저도 수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많은 목사님들과 아는 지인들로부터 축복의 메시지를 참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대부분 스마트폰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너무 삭막하고 마음에 와닿지 않는 축복이라고나 할까요? 별로 나와 상관없는 너무나 통상적인 메시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나에 대한 어떤 정보도 아는 것이 없는 그저 식상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냥 의례적인 인사에 불과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기억해준 것에 감사하고 위안을 삼을 뿐이었습니다.
미안하지만 때로는 별로 열어보지 않고 닫아버리는 메시지도 많습니다. 그리고 읽어보지도 않은 메시지도 많구요. 아마 모르긴 해도 여러분들도 그러실 것입니다. 성의가 없는 메시지가 우리를 참으로 슬프게 합니다. 그냥 두루뭉실하게 모든 자들에게 단체로 복을 빌어주는 것이 좀 식상했습니다. 너무 성의가 없고 인간적인 정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나마도 글을 적어 보내주는 사람은 그래도 양반입니다. 상당수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는 이모티콘으로 한마디의 멘트도 없이 축복의 인사를 날리고 말더라구요. 씁씁하지요? 그래도 감사하자구요. 아무튼 새해 년도에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누구로부터 어떤 복을 받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만복의 근원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한번 찬송가 1장을 불러보십시다. 요즘 들어서 정말 그 찬송이 제 영혼을 울리고 기쁘게 합니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 저 천사여 찬송하세 찬양 성부 성자 성령 아멘”. 여러분은 금년에 어떤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금년에 가장 우선적으로 받아야 할 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각자 나름대로 하나님께 구하는 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어떤 이는 건강이나 물질의 복, 가정과 자녀의 복, 취업이나 승진의 복, 사업이나 번창의 복, 너와 나 관계의 복 등 아주 다양한 복을 간구할 것입니다.
반드시 금년에는 여러분이 소망하시는 복이 성취되는 한 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도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복을 구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산을 보고 복을 빌고, 정한수를 떠놓고 복을 빌며, 해돋이를 바라보며 복을 빕니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연과 우상에게 복을 빕니다. 그런데 은근히 성도들도 그런 생각들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떠오르는 태양은 인간을 축복하지 못합니다.
그 태양을 우리 하나님이 넷째날 창조하신 것입니다. 유독 한국인들과 일본인들만 떠오르는 태양앞에서 소원을 빈다고 합니다. 그냥 찬란한 태양을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복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만복의 근원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창조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진짜 복입니다. 금년에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영육간의 복을 받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금년 새해 첫 주를 맞이하여 우리 교회가 시편23편의 복을 받았으면 합니다.
시편23편은 모든 믿음의 성도들이 제일 사랑하는 시입니다. 본문은 다윗이 목동시절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받았던 복을 경험적으로 묘사한 시입니다. 다윗이 직접 체험한 복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시를 애송할 것입니다. 훨씬 더 현실감이 있고 사실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다윗의 복을 받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다윗이 받은 복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부족함이 없는 복이요, 두려움이 없는 복이며, 끊어짐이 없는 복입니다.
(1) 부족함이 없는 복입니다(1-3절)
사실 다윗의 복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복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받을 수 없는 복도 아닙니다. 받을 수 있는 자격이 필요합니다. 부족함이 없는 복을 받으려면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삼는 자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안에 산다는 성도들이 천태만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적인 목자로 인정하고 사는 성도가 있는가하면, 자신의 필요를 따라 수많은 목자중에 한 분정도로 인정하고 사는 성도도 있고, 마치 자기가 목자인 것처럼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본문 속에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절대적인 목자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부족함이 없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인간의 입이요, 보아도 보아도 만족함이 없는 것이 우리의 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도한 욕심을 부립니다. 있는 사람은 더 가지려고 몸부림을 치고, 없는 자는 가지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기에 인간관계에 금이 갑니다. 부모형제간에 의가 끊어집니다. 신앙도 유사시에는 헌신짝처럼 팽개쳐 버립니다. 모두가 만족이 없어서 저지르는 죄악입니다.
야고보서1:15절은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에덴동산에 죄가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에덴동산에는 수많은 종류의 실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임의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의 그릇이 커보인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욕망을 두고 한 말이지요.
오늘의 현대인들은 만족이 없습니다. 물질에 대한 만족을 모릅니다. 건강에 대한 만족도 모릅니다. 아내와 남편에 대한 만족도 모릅니다. 교회에 대한 만족도 부족합니다. 삶에 대한 만족과 현실세계에 대한 만족도 부족합니다. 항상 부족하다고 징징거립니다. 만족을 모르는 인간은 자기를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대적 박탈감과 상실감으로 느끼게 됩니다. 의욕을 상실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성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만족을 모르면 감사가 없고 불평만 토해냅니다. 만족을 모르는 인간이 최고로 불행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부족하지 않고 불행하지 않습니다. 만족은 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국가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부동의 1위였습니다. 대부분 가난한 나라들이 자기 만족도가 높습니다. 이것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사람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빈곤한 나라들보다 부자 나라들이 훨씬 더 자살률이 높고 범죄율이 높습니다. 왜 그렇게 잘사는 데 불행한 일이 많을까요?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4:11절을 통해서 자신의 자족함을 고백합니다. 그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한마디로 가난도 적응할 수 있고, 부요함에도 적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비천하다고 죽고 싶고, 부요해도 교만치 않는 비결을 배웠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현실적으로 조금만 어려워지면 금방 죽을 것 같이 한숨을 쉬고,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오만방자하여 믿음까지 파선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잖아요.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복을 누린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복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많이 가지고 거지같이 사는 인생이 있고, 전혀 없는데도 왕자처럼 당당하게 사는 인생도 있습니다. 똑같은 인생을 살면서 부족하다고 불평하며 사시렵니까? 아니면 없어도 감사하며 사시겠습니까? 바울은 이런 놀라운 비결을 어떻게 얻을 수 있었을까요? 빌립보서4장13절을 보십시오.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기서 모든 것은 어떤 상황이나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가난이나 부요함이 만족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윗도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 비결은 여호와가 자기 목자가 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 때문에 만족한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만족은 자기가 왕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돈이 많고 명예가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백성들의 인기가 높아서도 아닙니다. 다윗의 만족함은 여호와가 목자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모든 것이 주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다”(대상29:11). 복음송(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었네).
어린애도 엄마 품에 있을 때 가장 평안하고 만족합니다. 젖먹는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만족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엄마가 어떻게 생긴 것과 상관없습니다. 아무리 거대한 궁궐속에 산다해도 엄마 품속이 최고입니다. 양들도 자기 목자 품에 있을 때 부족함을 모릅니다. 자기 목자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5절 후반을 보십시오. “.....내 잔이 넘치나이다”.
(2) 두려움이 없는 복입니다(4절)
아무리 자기안에 부족함이 없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두려움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부족함이 없는 복과 두려움이 없는 복은 차이가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만족함속에 찾아오는 두려움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아내가 너무 예뻐서 직장에 가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푼수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데리고 다니시지요. 농담이지만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디다. 자기는 이마에 만원짜리 하나만 붙여가지고 다니면 전혀 안전하답니다. 사람들이 만나도 이마에 만원만 떼어가고 만답니다.
어떤 이는 너무 부자여서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부자 동네에 가면 이중삼중으로 방범창을 달고 경비원을 두고, 그것도 부족해서 CC카메라를 곳곳에 설치해 놓았는데도 초인종만 누르면 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가난한 동네는 대문 활짝 열어놓고 아무나 와도 좋습니다. 세상은 두려움의 공간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은 더욱 그러합니다. 사람도 두렵고, 사건도 두렵고, 사물도 두렵습니다. 아니 사는 것 자체가 두렵습니다.
나폴레옹이 세인트헤레나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한 사람이 찾아와서 조용히 물었습니다. '폐하, 지나온 날을 회상할 때 살아온 생에서 행복한 날이 얼마나 됩니까?' 그때 나폴레옹은 잠잠히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하는 듯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전 생애에 걸쳐서 행복한 날은 단 일주일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서 '오대양에 넘실거리는 파도는 세상에 오고 간 사람들의 눈물이고, 육대주에 부는 바람소리는 세상을 살아간 인생들의 한숨소리와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것은 평안이요, 행복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깜짝깜짝 놀랄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때문에 놀랍니다. 돈 때문에 놀랍니다. 배우자 때문에 놀라고, 자기 자녀들 때문에 놀랍니다. 예기치 못한 사건사고 때문에 놀랍니다. 두렵기 때문에 놀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생기면 매사에 자신감을 잃어버립니다. 자신의 잠재력을 상실합니다. 심령이 파괴됩니다. 행복이 사라집니다. 여러 가지 불쾌하고 불미스럽고 불행한 일만 생깁니다. 그래서 잠언17장22절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알렉산더 카렌박사가 이와 관련된 실험을 했습니다. 사형수를 대상으로 말입니다. 한 사형수에게 내일 12시에 당신이 처형됩니다라고 통고했더니 얼굴색이 완전히 창백해지더랍니다. 그리고 내시경 검사를 해보았더니 위가 창백하더라는 겁니다. 다시 시간이 얼마 지난 다음에 사형수에게 당신의 행실을 감안하여 감형이 내려졌습니다라고 통보하였답니다. 그랬더니 그의 얼굴이 환해지고 밝아지면서 상당히 평화스럽더랍니다. 그리고 다시 내시경을 해보았더니 위의 상태가 정말 평화스럽고 밝아졌더랍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사람의 얼굴색과 위의 색깔이 같다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평안입니다. 평안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두려움은 평안을 대적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믿음의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두 가지의 가장 큰 대적이 있는데 의심과 두려움입니다. 성도들이 의심은 믿음의 적인 줄을 아는데 두려움이 믿음의 적이라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믿음을 파괴하는 강력한 적입니다. 믿음이 있다하면서 의심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첫 번째 인사말씀도 평안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이런 고백을 합니다(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습니다. 안전지대가 없습니다. 그렇게 위험하고 지뢰밭 같은 세상을 살면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주님은 평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대적하는 원수마귀 악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위험한 장소에서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사건과 사고를 막아주십니다. 우리를 위경에서 건지시고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두려움이나 염려와 근심, 걱정거리로부터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주시고 안전하게 보호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격변하는 정세속에서도 깜짝 놀라지 아니하며 우리를 평안케 하실 것입니다. 풍랑이 일어도 주님안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폭풍 구름 몰아치고 하늘 덮어도 나 주의 믿음갖고 실망치 않네”. 왜냐면 주님의 손에는 지팡이와 막대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양을 치는 목자의 손에는 항상 지팡이와 막대기가 있습니다. 지팡이는 안내하는 도구요, 막대기는 공격하는 도구입니다.
지팡이는 마치 시각장애인의 길을 안내하는 눈과 같은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출애굽의 도구입니다. 능력의 지팡이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우리를 인도해가는 지팡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안전합니다. 그러나 어떤 지팡이냐가 중요합니다. 아무 구실도 못하는 세상의 썩은 지팡이는 있으나 마나입니다. 인간은 주님의 지팡이가 필요합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주님의 지팡이가 가장 안전한 지팡이요, 능력의 지팡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막대기가 필요합니다. 막대기는 외부의 침입하는 세력들을 쫓아내는 무기입니다. 목자들은 막대기를 휘둘러서 양들을 지켜냅니다. 한마디로 공격용 무기인 셈이지요. 지팡이가 방어용 무기라면, 막대기는 공격용 무기입니다. 이처럼 참 목자이신 우리 주님의 손에는 자기 양을 인도하는 두 개의 도구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양되는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어떤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떤 상황이나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건 속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안위함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런 찬양을 부릅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이 있으랴(찬송가455장). 한마디로 두려움에서 자유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두려움이 없을 수는 없지요. 그러나 그런 두려움이 나를 지배하고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어떤 두려움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금년에 우리 모두가 두려움이 없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평안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영혼이 평안하고 육신도 평안하며 삶의 모든 것이 평안한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3) 끊어짐이 없는 복입니다(6절)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는 복도 중요하고 두려움이 없는 복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더 중요한 복은 끊어짐이 없는 복입니다(6절). 일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복이나 두려움이 없는 복은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우리가 받을 복은 영원한 복이어야 합니다. 잠시 잠간 우리가 누리는 부족함이 없는 복이나 두려움이 없는 복은 이방인들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복은 신령한 복이요, 영원한 복입니다. 그 복은 선하심과 인자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받되 평생 받아야 합니다. 이른바 끊어짐이 없이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끊어짐이 없어야 합니다. 깊은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 친밀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더 힘써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끊임없는 교제와 소통을 가져야 합니다. 일시적으로나 제한적으로 교제하거나 소통하는 것은 불행합니다. 그분을 알고 그분 안에서 끊임없는 교제와 친밀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안됩니다.
다윗은 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말씀에는 감사와 다짐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자기 평생동안 하나님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이끌어주신다는 감사의 고백과 함께 자기도 역시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겠다는 충성된 서약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평생토록 하겠다는 고백이요, 영원한 다짐입니다. 자기 기분이나 감정이나 컨디션이 좋을 때만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변함없이 하겠다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바로 우리가 이런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끊어짐이 없는 복 말입니다.
이런 복을 받으려면 반드시 조건이 있습니다. 양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벗어난 양은 사나운 늑대나 이리, 시랑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물려죽게 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이 우리 안에 있을 때 보호를 받는 것처럼 성도된 우리도 주안에 있을 때만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집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행복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집을 벗어나면 위험해집니다. 목자없는 양이나 길을 잃어버린 양은 생명이 위험합니다. 최초의 인간이 에덴이라는 하나님의 집에 있을 때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죄악으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순간 위험에 노출되고 불행해졌습니다. 한마디로 복의 고리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말할 것 없이 성전 안에 있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여호와의 집에 있을 때 가장 큰 복을 받은 자입니다. 금년 한 해동안 성전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심으로 끊어짐이 없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성전중심의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과 영원히 끊어짐이 없는 복을 받는 축복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집에 심기운 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 시편23편의 다윗이 받은 복을 기억하여 금년에 이런 복을 받아 누리는 증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아 부족함이 없는 복을 받으시고, 두려움이 없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끊어짐이 없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금년에 우리 모두 다 축복의 증인들이 되십시다. 할렐루야!!!(20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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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내게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