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li Marleen 레오나드 코헨의 노래 famous blue rain coat 에 보면 릴리 마를렌..이야기가 나옵니다.. 아군과 적군이 동시에 사랑한 여인... 릴리 마를렌에 대해 더 상세 내용이 필요할 것 같아...아래글 옮겨봅니다.. 아래의 글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린 Charles.W.Smith 라는 분의 글입니다... 릴리 마를렌이란 동명의 영화도 제작되었더군요.. Musik : Nobert Schultze/gesang: Lale Andersen 듣기 북아프리카 사막에 어둠이 깔리자 우리 대대의 전차들이 모여들어 둥글게 방어진을 치고 있었다. 나의 전우들은 라디오를 가운데 놓고 둘러서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들 가운데 하나가 손가락을 입술에 대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라디오에서 집합나팔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부드럽고 매혹적인 목소리의여자가 독일어로 부르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내가 그때까지 들어본가장 잊을 수 없는 멜로디였다. 병영의 정문앞에 서 있는 가로등 ..그녀는 아직 그 앞에 서 있네... 나는 그 노랫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우리들 대부분이 그 뜻을 몰랐다. 우리는 독일군이 아니라 영국군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국 제8군의 병사들 즉 "사막의 쥐"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웬일인지 우리의 생각과 기억속에 깊이 스며드는 그 신비스런 목소리에 매혹되고 말았다.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우리와 대치하고 있던 독일군 병사들도 똑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때는 1942년 봄이었고 양측 병사들은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와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 노래속의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국적이 다른 수많은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여인의 노래 를 부르고 있다. 그 여인의 이름은 Lili Marleen 이었다. 릴리는 대체 누구였을까? 그리고 그녀는 어떻게 국경과 언어와 세대를 초월하여 모든 병사들의 애인이 되었을까? 릴리의 이야기는 1915년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시작된다. 베를린의 어느 안개낀 4월의 밤에 젊은 사관후보생이며 풋내기 시인인 한스 라이프(Hans Leip)가 막사 바깥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길 건너편의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는 가로등을 안개가 을씨년스럽게 휘감고 있었다. 라이프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 청과물가게 주인의 아리따운 딸의 품에안겨 있었다. 릴리라는 애칭을 가진 아가씨였다. 그가 꿈꾸듯이 릴리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안개속의 흐릿한 가로등 불빛 아래 마를렌의 모습이나타났다. 라이프가 어느 화랑에서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 마를렌은 청록색의 눈을 가진 사랑스런 미인이었다. 마를렌은 그때 부상당한 군인들을 간호해주기 위해 가까운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마를렌이 손을 흔들면서 인사말을 건넸을 때 마침 위병하사가 정문에 나타났다. 래서 라이프는 인사에 답례를 보낼 수 없었다. 그는 마를렌이 안개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쓸쓸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날밤 막사로 돌아온 라이프는 침대에 누워서 릴리와 마를렌의 모습을 머리속에 그리다가, 문득 영감이 떠올라서 두 아가씨의 이름을 한데 묶은여인을 소재로 시를 지었다. 그는 그 시에다 "젊은 초병의 노래"라는 제목을 붙였다. 병영 바깥 가로등 불빛 아래 서있는 한 병사가 자기 애인 릴리 마를렌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그때 집합나팔이 울린다. 병사는 릴리와 함께 더 있고 싶지만 나팔소리가 다시 울린다. 그는 애인 곁을 떠나면서 생각한다. 러시아 전선으로 배속된 라이프는 릴리도 마를렌도 다시 보지 못했다. 20여년이 흐른 후 자신의 시집을 펴내면서 라이프는 "젊은 초병의 노래"를 그 속에 넣었다. 베를린에 살던 작곡가 노르베르트 슐체가 그 시를 읽고 곡을 붙여서 "릴리 마를렌"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만들어 테너가수인 얀 바에른에게 주었다. 그러나 얀은 "너무 단조롭다"는 이유로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만약 나에게 무슨일이 일어나면 다른 남자가 나의 애인과 함께 저 가로등 밑에 서 있게 될까? 아니면 나의 영혼이 와서 다시 한번 릴리를 포옹할까? 전처럼. 릴리 마를렌?" Schultze는 "릴리 마를렌"을 Lale Andersen 이라는 이름의 한 나이트클럽 가수에게 주었다. 랄레는 그 노래의 애수적 분위기에 어울리는 육감적이고도 매혹적인 목소리를 지닌 인상적인 금발의 여가수였다. 1939년에 엘렉트롤라社가 그 노래를 레코드로 제작했다. 그 때는 이미 2차 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에 "릴리 마를렌"은 700장밖에는 팔리지 않았다. 이때 나온 레코드는 오늘날 값이 한 장에 300달러나 나간다. 그 노래는 그 뒤 2년간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한 뒤 독일군은 발칸반도와 북아프리카 주둔군을 위한 방송인, "라디오 베오그라드"를 개국했다. 이 방송국의 국장은 방송에 쓸 레코드를찾았다. 그 때 한 병사가 "라디오 빈"방송국 건물의 지하실에서 먼지에 덮인 레코드들을 찾아내었는데, 그 가운데 안데르센이 취입한 "릴리 마를렌"도 끼어 있었다. 그래서 그 노래는 1941년 8월 18일 저녁에 처음으로 방송전파를 타게 되었다. 당시 독일군의 아프리카군단의 전차부대 장교로 있었던 필자의 처남은 그 때 그 노래를 처음 들었다. "난 넋을 잃을 정도로 매혹되었지요." 그가 나중에 내게 한 말이다. 다른 수많은 장병들도 마찬가지로 그 노래에 매혹되었다. 베오그라드 방송국에 그 노래를 다시 들려달라는 청취자들의 요청이 쇄도했다. 그 노래는 곧 후방인 독일 국내에서도 인기곡이 되어 베를린방송에도 정규적으로 방송되었다. 한 독일인 어머니는 작곡자인 슐체에게 이런 편지를보냈다. "나의 아들은 전사했습니다. 그애는 마지막 보낸 편지에서 "릴리 마를렌"에 관한 얘기를 썼어요. 그래서 나는 당신 노래를 들을 때마다 아들을 생각한답니다." 독일 아프리카군단의 사령관인 에르빈 롬멜장군은 이 노래를 자기 부하들을 결속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는 매일 밤 "릴리"를 방송하라고 지시했다. 매일밤 9시 55분에 나가는 이 노래는 "라디오 베오그라드"의 방송종료를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전쟁이 거의 끝날 때까지 이 시간이 되면 수많은 병사들이 라디오에 귀를 귀울였다. 칼튼 잭슨은 자신의 저서 [위대한 릴리]에서 나치독일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가 "릴리"를 싫어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영국을 폭격하라" 같은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과장되고 힘찬 노래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안데르센이 취입한 레코드의 원본을 파기해 버리라고 명령했다. 1943년 1월 스탈린그라드가 소련군에게 탈환되고, 30만명의 독일군이 전멸한 후 괴벨스는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하면서 "이 노래속에는 죽음이 난무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괴벨스가 알지 못했던 제 2의 원판이 중립국인 스위스로 보내졌다. 그래서 괴벨스가 이 노래의 방송을 금지시킨지 사흘만에 "릴리"는 다시 전파를 타게 되었다. 괴벨스는 이 노래를 잠재울 수 없게 되자 이 노래를 부른 가수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는 안데르센을 감시하도록 하고, 그 여자가 유태인의 친구라는소문을 퍼뜨렸다. 안데르센에게는 실제로 친한 유태인 친구들이 있었다. 그 여가수는 스위스에 있는 한 유태인 친구에게 독일을 탈출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안데르센은 군부대 위문공연차 이탈리아로 갔다가 공연이 끝난 후 기차로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밀라노역 플랫폼에서 2명의 게슈타포 요원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녀는 베를린으로 압송되어 왔다. 한 나치관리가 그녀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을 보여주었다. 게슈타포가 중간에서 편지를 가로챈 것이었다. 게슈타포는 그녀에게 스파이 혐의를 씌워 가택연금시켰고 강제노동 수용소에 보내버릴 수도 있다고 위협했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안데르센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BBC방송이 나치가 독일의 한 인기가수를 강제수용소로 보냈다는 뉴스를 방송했다. 이같은 영국의 개입이 안데르센의 목숨을 구하는데 도움이 되었던것 같다. 게슈타포는 그녀에게 흥미를 잃은 것 같았다. 안데르센은 그 틈을 타서 몰래 북해의 한 섬에 있는 자기 할아버지 집으로 가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머물렀다. 소설가 존 스타인벡이 언젠가 쓴 것처럼 "노래는 국경을 넘는다." 안데르센이 부른 이 독일 노래를 아프리카 사막에서 롬멜의 군대와 싸우는 영국군 병사들이 애창하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군의 고급장교들은 괴벨스와 마찬가지로 이 노래를 싫어했다. 영국군 병사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특히 가사가 독일어로 되어있는 것이 그들은 못마땅했다. 칼튼 잭슨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영국에 돌아온 제 8군의 몇몇 제대장병들이 어느날 밤 악보출판업자인 J.J 필립스가 자주 드나드는 술집에서 "릴리 마를렌"을 소리높여 노래했다고 한다. 필립스가 그들에게 경찰관이 보면 독일 스파이로 오인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우리가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그렇게 못마땅하면 영어로 된 노래말을 써주시구려!" 한 병사가 소리쳤다. 필립스는 작사자인 토미 코너의 도움을 얻어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래서 "가로등 아래 서 있는 나의 릴리(Tommie Connor)"란 영어 노래말이 나오게 되었다. 영어 노랫말에서는 안개와, 릴리에게 키스하려고 무덤에서 나오는 영혼은 빼버렸다. 새로운 릴리는 싸움터에 나간 애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아가씨로 변했다. 영어로 된 이 노래는 나오자마자 히트했다. 이 노래의 악보는 6개월만에50만장이나 팔렸다. 이 노래의 가사는 집을 떠나 먼 곳에 가있는 병사의 두려움과 애인의 품에 다시 안기고 싶어하는 열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에디트 파이프는 프랑스 군인들에게 이 노래를 불러주었고, 마를렌 디트리히는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미국의 제 5군 장병들은 "릴리"를 노래하면서 피렌체로 입성했다. 라이프의 노랫말은 40개가 넘는 언어로 번안되었다. 이탈리아판 노랫말은 "내 가슴에 장미 한송이를 꽂아줘요"로 시작된다. 프랑스의 가사는 "어두운 밤에 우리의 몸은 함께 뒤엉킨다"로 시작된다. 독일군 포로로부터 "릴리"를 배운 소련군인들은 한층 더 짜릿한 노래말을 만들어냈지만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영화를 보러간 사람들은 10편이 넘는 극영화와 기록영화에서 변형된 "릴리"를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1961년에 나온 고전적 영화인 "뉘른베르크의 재판"에서는 마를렌 디트리히가 스펜서 트레이시와 폐허가 된 뉘른베르크 시내를 걸어갈 때 술집에서 "릴리 마를렌"이 흘러나온다. 이 노래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군 그리고 월남전에 참전한 미군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노병들이 모여서 고독과 흘러간 사랑을 노래할 때면 언제나 이 노래가 등장한다. 이 노래가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었을까? Lare Andersen의 대답은 간결했다. "바람이 왜 폭풍이 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나요?" 전쟁의 잔인하고 추악한 불협화음 속에서 "릴리 마를렌"은 언제나 달콤하고 부드러운 선율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from Charles.w.Smith. in magazine READER DIGEST.
출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원문보기 글쓴이: zgang
첫댓글 verdad, 바람이 왜 폭풍이 되는지 설명해 보시게.german노래해석은 자네가 도와 주어야 하네.
jays,SP레코드 같지? 지직 지직 바늘긁는 소리가 묘한 매력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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