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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민소통운동본부(CCCC) 원문보기 글쓴이: 평택 소통 김평탁
소통 ! 여러분의 고견과 댓글로 대한 국민<가족> 소통 운동에 적극 동참을 소망합니다 !
박근혜정부에서는 동서남북 소통행정<소통정치>를 하실 줄 압니다. <<미래창조과학기술부 소관 주관하에>>.
"인연을 소홀히 하면 내생에 악연이 되어 다시 만난다. 오다가다 옷깃만 스쳐도 만남은 삼백생의 인연이요,
같은 좌석에 앉아 대화를 하면 오백생의 인연이요,
같은 솥의 밥을 먹으면 칠백생의 인연이라..
같을 피를 나누면 구백생의 인연이요,
부부로 만나는 것은 천생의 인연이니라.......
금생의 인연이 참으로 중하니 어떠한 인연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 이니라... - C C C C - 평택 소통 김 평 탁평택 소통 김평탁
한국나다나엘선양회의 요약<총합>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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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
2011.08.22입니다 .
11.08.30. 12:34
+++ 대한민국 코리아 Corea ! 태극기가 세계만방에 휘날릴찌어다! 대한민국Corea ! 무궁 무궁 무궁화처럼 무궁한 영광이 있을찌어다! 다음카페 한국나다나엘선양회 와 행복한 사람들의 행복과 빛과진리가 세계 만방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찌어다! 우리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2011,8,30 (화) - 무궁화다윗유한호목사 -
샬롬
8월 19일
오늘의 말씀 ① 시편 19장 전문 ② 잠언 19장 전문
오늘의 역사 ① 장면 국무총리 인준, 제2공화국 수립(1960) : 7월 29일 참의원과 민의원의 동시선거로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 참의원 58몀, 민의원 233명이 선출되었다. 이로써 1952년 제1차 개헌(발췌개헌)에서 채택된 양원제국회가 8년만에 비로소 구성되었다. 선거에서 민주당이 민의원 전체의석의 3분의 2이상을 차지하게 되자, 1960년 8월 12일 양원합동회의에서 윤보선을 제 4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8월19일 장면을 국무총리로 인준함으로써 내각책임제의 제2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3.15부정선거 관련자 및 그 부정행위에 항거하는 국민에 대하여 실상 기타 부정행위를 한 자, 반민주행위자와 부정축재자의 처벌근거를 마련하기 위하여 부칙만을 개정하는 제4차 개헌안이 의결되고 1960년 11월 29일 공포되었다. 운석 장면(1899-1966)은 1960년 8월 19일부터 약 9개월 동안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국정을 운영하다 5.16군사쿠테타로 인해 실각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그가 1948년 정계 진출이후 보여준 많은 업적―한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과 한국전쟁시 유엔군 참전을 이끌어 낸 외교적 성과 및 민주당 창당 이후 야당 지도자로서 보여준 반독재 투쟁등―에도 불구하고 그의 치적이나 사상을 논함에 있어 정치가로서 장면이 갖고 있던 어떠한 결함이 5.16 군사쿠테타를 촉발하게 하였는가라는 결과론적 인식틀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종래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정치가로서의 장면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여겨진다. 5.16군사 쿠테타의 주도세력은 『한국군사혁명사(韓國軍事革命史)』(1963)에서 장면을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가로 왜곡함으로서 자신들의 쿠테타를 정당화한 바 있으며, 심지어 그의 주변인물들에게서조차 4.19 이후 혼란기의 난국을 수습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정치적 역량이 결여된―인물이었다는 평가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일례로 장면의 정계 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노기남(盧基南) 대주교는 "내가 보기에는 장박사는 종교인이며 교육가지 정치가의 소양은 없는 편이었다"고 회고하였으며, 그의 지기(知己)였던 민의원 의장 곽상훈도 "운석은 난세(亂世)의 정치가로서 좀 어려운 성격의 소유자다"고 평한 바 있었다. ⇨6월 4일.
② 북한 신포 경수로 착공식(1997) : 북-미 제네바 협상에 따라 케도 즉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가 북한과 경수로 공급협정을 체결한지 1년 8개월만인 1997년 오늘 ! 북한의 함경남도 신포에서 경수로 건설부지 착공식이 열립니다. 케도가 2003년까지 북한에 천메가와트급 경수로 2기를 공급하는 대신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기로 한 협정에 따른 것이였습니다. 착공식은 케도와 북한측 대표 연설에 이어 기념 발파와 현장 방문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본 공사에 앞서 이날부터 시작된 원전 부지 정리 작업에는 남북한 건설인력 2백여명이 투입됐습니다. 그러나 경수로 건설비 분담을 둘러싸고 우리나라와 미국, 일본이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 우리나라가 전체 건설 비용의 70%인 3조5천억원을 부담하게 됐습니다.
******1997년 8월19일 오후2시, 북한 함경북도 신포시 금호지구. 발전용량 1,000㎿급 경수로 건설공사 기공식이 열렸다. 북한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경제협력사업을 축복하듯 오랜 가뭄에 시달렸던 이 지역에는 모처럼의 단비가 내렸다. 사업의 시발점은 북미 간 제네바 합의. 북한이 전력생산을 명분으로 건설하려는 영변 원자력발전소가 핵폭탄 원료인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흑연 감속로라는 점에 주목한 미국은 북한과의 오랜 물밑대화를 거쳐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를 이끌어냈다. 북한이 흑연 감속로를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이 책임지고 경수로를 지어준다는 합의에 따라 시작된 공사가 제대로 진행됐다면 1,000㎿급 경수로 2기가 이미 완공돼 전력을 생산하고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종합 공정률 34.45% 상태에서 2003년 공사가 중단됐기 때문이다.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HEU) 개발 의혹으로 중단된 공사는 결국 이어지지 못한 채 2006년 완전 종결되고 말았다. 북핵으로 시작돼 북핵으로 끝난 셈이다. 공사중단은 손실을 불렀다. 미국의 강권으로 총공사비의 70%를 부담한 한국은 11억3,700만달러를 퍼붓고도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청산 절차도 지지부진하다. 공사가 재개되지 않는다면 추가 손실도 불가피하다. ‘경수로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불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여당은 공사비 분담 비율을 정한 장본인이라는 원죄에서, 야당은 청산을 늦춰 손실을 키웠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역사의 반복 가능성이다. 대북 강경책으로 일관하다 북미 직접대화로 뒤통수를 맞고 억지로 돈을 냈던 1990년대 중반과 상황이 비슷하게 돌아간다. ‘퍼주기’가 아니라 ‘털리기’가 재연될까 걱정스럽다. (인터넷한국일보, 2009/08/18)
③ 삼별초, 진도 도착(1270) : 고려 고종 18년(1231), 몽고가 고려에 침입하자 최우의 무신정권은 몽고가 수전(水戰)에 약한 점을 이용,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항전의지를 불태운다. 몽고가 개경환도를 요구하며 침략과 철수를 반복하던 중 최씨정권이 무너지자 고종은 1259년 개경환도를 약속하고 태자를 원나라에 입조하게 함으로써 고려와 원나라의 무력충돌도 29년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실권은 여전히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무신들에게 있었지만 1260년에 즉위한 원종이 이들마저 제거함으로써 개경환도도 순조로워 보였다. 이때 예상치 않은 복병이 등장했다. 최우의 사병(私兵)이었던 삼별초였다. 군사를 일으켜 새 왕을 옹립한 삼별초가 1000여척의 배에 몸을 싣고 강화도를 떠나 진도에 도착한 것은 1270년 8월19일이었다. 삼별초 정부는 몽고의 침략에 시달렸던 영촵호남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제주도까지 점령, 한때는 남해안을 지배하는 사실상의 해상왕국을 이뤄냈지만 상대는 막강한 여촵원(麗촵元)연합군이었다. 결국 1273년 2월, 제주도로 옮긴 마지막 삼별초가 1만여명의 연합군에 패함으로써 장장 3년에 걸친 항쟁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④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발족(1987) : 서울대의 박종철열사가 정권의 잔혹한 물고문으로 죽음을 당하고 이에 분노하여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6월9일 연세대의 이한열열사가 또다시 정권의 최루탄에 맞아 죽음을 맞이하였다. 민중들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으며 이한열열사의 장례식준비를 겸하여 연세대에 모인 전국의 총학생회장들은 운동을 더욱 조직적으로 벌여내기 위하여 조직결성에 합의하기에 이른다. 이어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끌고 나서 그해 8월 19일 충남대에서 역사적인 전대협 1기 출범식을 치루어낸다. 하지만 그때는 출발의 의미가 있었던지라 참여인원은 3천500명에 그쳤고 아직 지구, 지역별로 정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총학생회장들의 협의체수준에 있었다. 1기 전대협은 이어 그해 말 대통령선거에서 후보단일화와 비판적 지지, 그리고 민중후보지지 등 의 입장으로 갈라져 효과적인 대통령선거를 벌여내는데 많은 한계를 가져왔으나 6월항쟁이라는 엄청난 대중항쟁을 이끌어내게 되고 이후 전대협은 한총련이란 명실상부한 전국 대학생들의 구심체로 거듭나게 된다.
⑤ 육영수여사 국민장 엄수(1974) : ⇨ 8월 15일.
⑥ 세계인구회의(1974) : 세계인구회의가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트에서 우리 나라를 비롯한 102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급증하는 인구증가를 막기 위해 1975년도에는 인구증가율을 1.7%로 낮출 것을 토의․채택하고 폐막했다. ⑦ 소련공산당 보수파, 쿠데타 발발(1991) : 1991년 오늘 !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이 추진되던 소련에 쿠데타가 발생합니다. 쿠데타의 주역은 야나예프 연방 부통령과 군 수뇌부, KGB 등 강경보수 인사들 ! 쿠데타가 일어난 뒤 8인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구성됩니다. 크림 반도에서 휴양중이던 고르바초프가 감금되고 대권접수가 발표됩니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을 비롯한 개혁지지 세력들과 대부분의 모스크바 시민들은 쿠데타에 강경하게 저항합니다. 옐친은 쿠데타를 비난하면서 소련 국민에게 총파업 참여를 촉구합니다. 옐친 지지자들은 러시아 공화국 최고회의 의사당에 이르는 길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는 등 쿠데타 세력에 맞섭니다. 쿠데타 군의 총격으로 민간인 한명이 숨지자 반쿠데타 시위대의 저항은 더욱 강렬해집니다 쿠데타 발발 하루만에 국가비상사태위회 위원 8명 가운데 야조프 국방장관과 크류츠코프 KGB의장, 파블로프 총리 등 3명이 위원직 사임을 발표합니다. 쿠데타 발발 사흘째인 8월 21일 KBG 고위 간부들과 상당수의 군 장성들이 옐친에 대한 지지를 표명합니다. 개혁 정책을 거부한 강경 보수파 세력의 쿠데타는 3일천하로 끝납니다. 역사가들은 "레닌은 맨주먹으로 당과 연방을 건설한 반면 고르바초프는 모든 것을 갖고도 소 연방을 지켜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개혁의 키를 공산당에서 찾았다는 것이 그의 비극이었다. 당 자체가 개혁되지 않음으로해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일보도 전진할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의 여류 문명비평가 게일 쉬이는 저서 '고르바초프-세계를 변화시킨 사나이'에서 이렇게 끝맺고 있다. "그는 공산주의 역사의 휴지통에 내던져진 최후의 공산주의 로맨티스트, 세계를 변화시켰지만 자기 나라를 잃어버린 남자였다.“
******* 고르바초프, 쿠데타로 하야(1991) : 1985년 3월 체르넨코의 뒤를 이어 당서기장에 선출된 고르바초프(M. S. Gorbachyov)는 개혁과 개방 정책을 추진하여 소련뿐만이 아니라 동구권에도 큰 변화를 야기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1990년, 고르바초프는 소련 최초의 민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고르바초프는 대통령 당선 이후 개혁과 개방 정책을 가속화하는 한편, 1991년 7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계급투쟁을 폐기하는 새로운 소련공산당 강령을 입안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은 보수 강경파 군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1991년 8월 19일 쿠데타로 하야했다. 그러나 쿠데타의 실패와 함께 3일만에 대통령에 복귀한 고르바초프는 공산당을 해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완전 결별을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는 옐친이 주도한 소비에트 연방 해체와 독립국 연합 탄생으로 1991년 12월 25일 대통령직을 사임했으며, 2001년 5월에는 독일 역사다큐멘터리 진행자로 변신하여 세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⑧ 루이 다게르 사진기 원리 공개-사진의 날 효시(1839) : 8월 19일, 빠리 시민들은 흥분과 기대로 술렁거리며 과학원으로 몰려 들었다. 마치 빠리 시민 모두가 과학원의 방청석으로 들어가는 듯 하였다. 사진술, 그 신비한 발명을 공표하는 자리였다. 니에쁘스(J.N.Niepce:1765-1833)와 다게르(L.J.M.Daguerre :1787- 1851)가 공동으로 연구한 사진술을 프랑스의 과학원과 예술원이 합동으로 이날 세상에 공표하였던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그 비법을 사들여 온 세계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공개하였다. 다게르라는 사람은 원래 화가로서 스위스의 알프스 산과 같은 웅장한 자연을 대형의 투명한 스크린에 그린 그림과 특수한 조명을 이용해서 보여주는 디오라마(Diorama)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그 또한 디오라마의 밑그림을 그릴때 카메라 옵스쿠라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1829년 12월에 헬리오 그라프를 완성시켰던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의 제안으로 동업관계를 형성하여 사진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는데 니엡스의 죽음으로 동업기간은 4년에 그치고 다게르 혼자서 연구를 계속 진행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동업관계를 맺은지 10년이 지난 1839년 12월 7일에야 비로소 최초의 실용적인 사진처리 방법을 고안해 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다게레오 타입'이라 불러지는 사진으로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발표되었는데 헬리오 그라프와는 달리 인간의 눈으로도 관찰하기 힘든 세부 디테일까지도 보여주는 놀라운 사진기법이었다. 이 날은 결국 세계 사진의 날이 되었다. ******사진을 찍을 때 한쪽 눈을 감는 이유는 마음의 눈을 위해서이고, 찰나에 승부를 거는 것은 사진의 발견이 곧 나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말이다. 사진. 자신의 모습을 소유하고, 죽은 뒤에도 후세에 남기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 발명이다.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빼앗긴다는 미신이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한 적도 있지만 요즘은 많은 사람이 손에 카메라폰을 들고 다니는 세상이다. 근대 사진술의 시조는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로 평가받는다. 그는 은판을 수은 증기에 쐬어 이미지가 드러나게 한 뒤 그 원판을 소금물에 담가서 이미지를 정착시키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 은판 사진술은 1839년 8월 19일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와 미술아카데미의 합동회의에서 공표됐다. 이날은 사진의 공식 탄생일로 인정받고 있다. 다게르는 원래 스위스 알프스산과 같은 웅장한 자연을 대형의 투명한 스크린에 그리는 풍경화가였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지 않고 기계적으로 형상을 담아낼 수 있는 사진 연구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1829년 사진 발명을 목적으로 하는 회사를 설립한 뒤 10년. 다게르는 은판사진술을 이용해 형상을 영구히 정착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프랑스 정부는 그의 이름을 따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으로 불린 은판사진술을 매입하고 다게르에게 연간 6000프랑의 연금을 주었다. 이어 이를 상세히 다룬 입문서가 발행됐고 다게레오타입용 사진기가 파리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다게레오타입은 장시간 노출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풍경이 아닌 인물 사진을 찍기 위해선 10~20분 사람이 움직일 수 없었다. 이후 사진 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디지털카메라와 카메라폰의 보급으로 대중은 사진찍기에 열광하고 있다. 만약 다게르가 환생해 이 광경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여기서 재미있는 얘기 한 토막. 미국 프로야구 콜로라도 로키스의 투수 김병현은 지독히도 사진을 싫어하는 선수다. 사진기자 카메라를 박살내며 폭행 시비로 문제를 일으킨 적도 있다. 카메라를 싫어하는 이유? 사진을 찍으면 그 안에 내가 갇힌다는 느낌이 든다는 게 그의 얘기다. (김상수 기자 ssoo@donga.com.2006)
⑨ 소련 유인위성 살류트 6호, 175일간 체류 마치고 귀환(1979) : 1971년부터 러시아에서 발사한 소형의 우주 정거장이다. 무게 25톤에 길이 14m로, 한번에 2명의 우주 비행사가 생활했다. 7대의 살류트가 발사되었는데 1982년 살류트7호를 마지막으로 더 큰 미르로 대체되었다. 살류트7호는 1991년 지구 대기권으로 들어와 타 버렸다. 그 중 살류트 6호는 175일간 우주에서 체류하고 귀환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⑩ 일본군 여순(旅順) 총공격 개시(1904) : 1904년 러․일 전쟁시 일본 제 3군 사령부 내목회전 대장이 강력한 요새진지에서 저항하고 있는 러시아군을 함락시킨 작전으로서, 일본군은 3개월동안 3차의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막대한 인원과 장비의 피해를 입고 번번히 실패하자, 내목회전 대장은 많은 연구끝에 총 8개의 갱도를 54일만에 굴착한 후 이를 이용하여 사전에 특공대를 침투시킨 후에 총공격을 개시, 러시아군을 전멸시켜 여순 요새지를 탈취함으로써 만주 침공의 발판을 제공하였다.
⑪ 연합군 디에프 상륙작전 실패(1942) :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오늘 !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디에프에서는 독일군과 연합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연합군의 구성은 캐나다군 5천명과 영국군 천명 그리고 최정예 미군 유격대원 50명 ! 하늘과 바다에서 총공세를 펼친 연합군 ! 튼튼한 요새를 구축한 독일군은 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냅니다. 연합군의 참패로 끝난 디에프 상륙작전 ! 연합군의 70%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됩니다. 22개월 뒤 펼쳐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연합군은 디에프 상륙작전의 실패를 딛고 승리를 쟁취합니다.
⑫ 이슬람교 이스마일파 종교집회(1946) : 1946년 오늘 ! 이스마일파 이슬람교도들이 파키스탄의 카라치에 대규모로 몰려듭니다. 이스마일파 영적 지도자 아가칸 3세를 만나기 위해섭니다. 이슬람교 시아파의 분파인 이스마일파 가문의 종교지도자 아가칸 3세 ! 집회에 모인 신도들은 아가칸 3세 몸무게 만큼의 다이아몬드를 저울에 달아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습니다.
⑬ 프랑스 작가 교도소 기자회견(1967) : 남미 볼리비아의 한 군사 감옥 ! 1967년 오늘 수감중인 프랑스의 작가 레지스 드브레가 기자회견을 합니다.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를 도운 혐의로 구속된 드브레는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단지 체 게바라를 취재했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합니다. 볼리비아에서 석방된 후 프랑스로 건너가 대중매체의 영향력에 대해 연구한 레지스 드브레는 1981년 사회당의 미테랑 당수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미테랑 대통령의 제3세계 정치 자문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⑭ 여배우 가보르 패물 강탈(1970) : 1970년 오늘 뉴욕의 한 호텔에서 헝가리 태생의 미국 여배우 자자 가보르가 강도들에게 패물 60만달러어치를 빼앗깁니다. 총을 든 강도 두명으로부터 빼앗긴 패물은 다이아몬드 귀걸이 셋트와 50만달러 상당의 다이아몬드 반지 ! 가보르는 죽음의 문턱까지 간 악몽의 순간등을 증언합니다. 열 다섯살때인 1938년 미스 헝가리에 뽑힌 가보르 ! 미국으로 건너와 1950년대 헐리우드의 스타가 됩니다. 영화 <악의 접촉> 등의 작품에서 휼륭한 연기를 보였지만 호화스러운 생활과 여덟차례의 결혼으로 더욱 유명해집니다.
⑮ 히틀러 독일 총통에 취임(1934) : ⇨ 4월 30일.
⑯ 유고 최대규모 반정부 시위(1999) :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유고연방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사상 최대규모의 반정부 시위에 10만명 이상의 군중이 집결했다. 시위가 시작된 직후 최루탄 1개가 터져 시위대 수십명이 몸을 피하는 과정에서 1명이 부상 당했다.
⑰ 세기의 결혼 : 1478년 8월19일 겐트. 당대 최고의 부자 마리 드 부르고뉴(Mary of Burgundy)의 결혼식이 열렸다. 요즘의 네덜란드와 벨기에ㆍ룩셈부르크는 물론 프랑스와 독일까지 퍼져 있던 부르고뉴는 당시 가장 부유했던 지역. 때문에 마리에게는 무수한 청혼이 쏟아졌다. 콜럼버스의 항해를 지원한 이사벨 여왕과 훗날 결혼하게 될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왕자를 비롯해 수많은 왕족들이 영토와 재산을 노리고 마리에게 매파를 넣었다. 심지어 프랑스는 신부보다 13세나 어린 코흘리개 왕자와 결혼시키자고 우겼다. 부친인 ‘대담공 샤를’이 스위스군과 벌인 낭시전투(1477년)에서 전사해 혈혈단신이 된 뒤 마리의 성가는 더욱 높아졌다.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보증수표인 마리와 결혼에 성공한 주인공은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마리는 생전의 부친이 적대시한 프랑스 왕실에 맞서기 위한 방편으로 언어마저 통하지 않는 그를 택했다. 20세기 초까지 유럽 최고 명문 중 하나로 군림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반이 여기서 닦였다. 결혼 당시 20세인 마리는 두 살 연하인 신랑 막시밀리안과 찰떡궁합을 과시했으나 결혼 4년 만인 1482년에 사냥 중 낙마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마리가 죽은 후 막시밀리안은 침식을 잊을 만큼 상심했으나 합스부르크 가문은 날개를 얻었다. 탄탄한 재력을 바탕으로 막시밀리안은 아내 사망 4년 뒤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도 뽑혔다. 부르고뉴의 드넓은 영지와 모직ㆍ조선 등 알짜배기 산업의 상속권은 장남 ‘미남공 필립’을 거쳐 친손자인 카를 5세가 물려받았다. 이사벨 여왕의 외손자이기도 했던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 전역, 이탈리아 중남부까지 통치하며 최강국 스페인의 시대를 열었다. 마리와 막시밀리안의 결혼은 근대를 향한 이정표였던 셈이다. (2008.서경.인터넷한국일보)
⑱ 바그다드 유엔본부 폭탄테러(2003) : 2003년 오늘 이라크 바그다드 주재 유엔본부가 있는 카날호텔에 폭탄을 실은 차량 한 대가 돌진했다. 이 차량폭탄테러로 유엔의 이라크 특사를 비롯한 유엔 직원 24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다쳤다. 이날 테러는 미군이 아닌 유엔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9.11테러를 주도한 알 카에다 등 이슬람 테러조직의 공격으로 추정됐다.
⑲ 기타 오늘의 역사 ⑳㉑㉒㉓㉔㉕ 1839 독․소, 통상협정 조인 1902 개국 기원 사용 1907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에 해산령 1911 프랑스-일본, 통상항해조약 조인 1914 남감리교 한국선교연회 발족 1938 장개석, 공산당계 단체에 해산명령 1939 독일 소련 통상협정, 베를린서 조인 1945 조선기독청년동맹 창설.한국기독교 청년의 연합조직.해방이후 건국.전교.봉사활동의 연합적 성취를 목적으로 결성. 1947 대한성서공회 재단법인 인가 받음 1947 대동청년단 결성 1953 이란 쿠데타 1960 소련 개 2마리 태운 인공위성선 2호 발사 1961 섬진강 수력발전소 댐공사 기공 1964 한국, 국제의원연맹(IPU) 가맹 1969 사단법인 흥사단 설립 1971 서울대 문리대 교수들, 대학 자율화등 요구 1979 소련 우주선 소유즈 34호,우주체재 175일 기록세우고 귀환 1980 사우디아라비아 여객기 리야드에 불시착 폭발. 301명 사망 1980 국보위, 사학 운영쇄신책 발표 1981 한계령 도로 개통 1982 국방부, 북한주민 이현주 귀순을 발표 1989 동독시민, 헝가리 경유해 오스트리아 탈출 러시 1991 한민족과학기술자학술대회 개막(중국 연길), 남북한 및 해외 동포 등 관계자 300며명 참석 1993 국회,김영삼 대통령의 금융실명제 승인
오늘의 인물 ① 강감찬(姜邯贊 ; A.D 948.6.10 - 1031.8.19) : 귀주대첩의 명장, 고려 제3대 정종 3년(A.D 948) 금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엔 작고 못생겼으나 재주와 용맹이 뛰어났다. 0983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이라는 벼슬에 올랐고, 한림학사․이부상서 등을 지냈다. 강감찬은 침착하고 의지가 강했으며, 학문과 지략에 뛰어났다. 1010년에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오자 대부분의 신하들은 항복을 주장하였으나 강감찬은 이에 끝까지 반대하고 하공진을 적진에 보내 설득시켜 물러가게 하였다. 그 뒤 서경유수, 문하평장사를 역임하며 왕의 총애를 받았다. 1018년에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의 10만 대군이 다시 쳐들어오자, 70세의 나이로 상원수가 되어 홍화진에서 거란군을 물리쳤다. 이듬해 자기 나라로 되돌아가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무찔러 이겼는데, 이것을 '귀주대첩'이라고 한다. 그 후 강감찬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과 글을 벗하며 조용히 살았다. 저서로는 <구선집> <낙도교거집> 등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서울시 관악구에 있는 낙성대는 그가 태어난 사적지이다. ⇨5월 25일. ⇨6월 10일.
② 김종직(金宗直 ; 1431 - 1492.8.19) :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 . 본관 선산(善山). 자 계온(季穩) ․효관(孝官). 호 점필재(占畢齋). 시호 문충(文忠). 경남 밀양 출생. 1453년(단종1)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정자(正字) ․교리(校理) ․감찰(監察)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를 지냈다. 성종(成宗)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함양군수 ․참교(參校) ․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다. 도승지 ․이조참판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 ․한성부윤 ․공조 참판(工曹參判) ․형조판서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문하생으로는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남효온(南孝溫) 등이 있다.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이미 죽은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그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고,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등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구미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畢齋集)》, 저서에 《유두유록(流頭遊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고, 편서에 《동문수(東文粹)》 《일선지(一善誌)》 《이준록(彛尊錄)》 등이 있다
③ 이남규(李南珪 ; 1855 - 1907.8.19) : 대한 제국 의사(義士). 독립운동가. 충남 예산 출생. 을사 조약 후 일본침략에 항거, 1907년 의병 봉기 후 투옥, 석방, 온양에서 순국했다. 항일투쟁상소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수당 이남규 선생 ! 서울 미동에서 출생., 선생은 1875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승문원권지부정자․형조참의․영흥부사․안동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일제의 침략 책동시기인 1893년부터 1905년까지 명성황후 시해 및 친일정권 수립의 만행을 규탄하는 '청절왜소' 등 항일 상소투쟁을 통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단발령에 반발해 예산으로 귀향, 충남 홍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을 숨겨주다 공주감옥에 투옥됐다. 선생은 1907년 군대 해산으로 의병활동이 확산되자 일본군에 체포돼 압송중 장남과 함께 일제에 의해 피살됐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997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④ 이원철(李源喆 ; 1896.8.19 ~ 1962) : 기독교인, 천문학자, 교육자, 성경번역가. 호는 우남. 1919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를 졸업하고 이듬해 미국에 건너가 미시간주립대학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전공, 1926년 《항성분광분석(恒星分光分析)》이라는 논문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귀국, 연희전문 교수․중앙기독교청년회 이사를 역임하고, 8․15광복 후 중앙관상대장으로 6년간 재임하였다. 대한민국학술원 회원․한국천문학회장을 역임하면서 한국 천문학계 발전에 기여하였다. 여러 차례 천문 기상 국제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새로운 별을 발견하여 '원철스타'라 명명하였다.
⑤ 이찬범(李燦範 ; 1915 - 1967.8.19) : 서울의대 흉곽내과 과장. 교수. 의학박사. 우리 나라 최초로 심장수술을 성공적으로 해 낸 권위자. 결핵학회 회장(3대) 역임.
⑥ 파스칼(Blaise Pascal ; 1623.6.19 - 1662.8.19) : 파스칼은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이자 <명상록 Pensees>으로 유명한 그리스도교 사상가이다. 일찍부터 수학에 천재적 재능을 나타내어 17세에 <원추곡선론 Essai pour les coniques>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22세에는 최초의 계산기를 발명했다. 또한 물리학에도 관심을 가져, 1648년에는 수은 기압계를 만들어서 대기압에 관한 토리첼리의 가설을 증명했고, 6년 뒤에는 피에르 드 페르마와 함께 근대 확률이론의 기초를 확립하는 등 과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일찍이 얀센주의적 신앙을 받아들였던 그는 1654년 강력한 신앙적 체험을 한 뒤, 포르루아얄 수도원에 들어가 엄격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1656~57년에 쓰여진 <시골 친구에게 쓴 편지 Les Provinciales>는 예수회의 공격에 맞서 앙투안 아르노를 변호한 글로, 그리스도교의 진정성을 회복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교 호교론을 집필하기 위한 단상들을 써 모으기 시작했고, 이는 사후에 <명상록>으로 정리․출간되었다. 인간의 실존적 비참과 신앙의 신비를 갈파한 이 작품은 그리스도교 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동시에, 장 자크 루소, 앙리 베르그송 등 후세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6월 19일.
⑦ 빌 클린턴(Bill Clinton ; 1946.8.19 ~ 2005.8.19현존) : 미국의 정치가. 본명은 William Jefferson Blythe IV이며, 아칸소주(州) 호프 출생이다. 유복자로 태어나 결손가정에서 소년시절을 보내고, 15세 때 아칸소주의 우수학생으로 뽑혀 백악관을 방문, 대통령 J.F.케네디와 악수하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정치가가 될 결심을 하였다. 1968년 조지타운대학을 졸업, 이어 2년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로즈(Rhodes) 장학생으로 유학하였으며, 그후 예일대학교 법학대학원에 입학, 졸업과 동시에 아칸소대학 법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72년과 1976년 대통령선거 때 민주당후보인 G.맥거번과 J.카터의 선거운동을 지휘하였다. 1976년 아칸소주 법무장관이 되었으며, 1978년 32세에 미국 최연소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민주당 우파에 소속되어 1992년 현직 대통령 G.H.W.부시를 누르고 제42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사상 3 번째로 젊은 46세의 대통령이 되었다. 전후(戰後)세대로서 최강의 군사력과 적극적인 경제정책으로 미국을 새롭게 탄생시킨다는 노선을 지향하면서 1993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6년 4월 한국의 제주도를 방문, 대통령 김영삼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1997년 12월 백악관 여직원이던 르윈스키와의 성추문 사건이 공개되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98년 10월, 하원은 클린턴에 대한 탄핵조사안을 가결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탄핵안도 가결하였다. 그러나 1999년 탄핵소추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실용적인 경제 및 대외정책에 크게 힘입어 70%에 이르는 지지도를 얻었다. 법학박사. 변호사. 1979년만 32세에 최연소 주지사. 18번의 선거를 통해 16번을 승리했다. 침례교 신자.
⑧ 코코 샤넬( Gabrielle Chanel ; 1883.8.19 ~ 1971.1.10) : 프랑스의 복식 디자이너. 프랑스 소뮈르에서 출생했다. 별칭은 코코(Coco)이다. 1910년 파리에 여성 모자점을 열고 모자 디자이너로 활동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여성복 디자이너로 전향하였다. 간단하고 입기 편한 옷을 모토로 하는 디자인 활동을 시작하여 코르셋 등 답답한 속옷이나 장식성이 많은 옷으로부터 여성을 해방하는 실마리를 만들었으며, 여성복에 저지라는 소재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오늘날 샤넬 슈트라고 불리는 카디건 스타일의 슈트를 발표하여 유명하게 되었다. 약 15년간 가게를 닫았으나 1954년 다시 문을 열었다. 장식이 생략된 옷의 본체에 브레드나 코드의 테두리를 붙이고, 당시에는 보기 드문 크고 작은 색유리나 크리스털 글라스의 액세서리를 붙이기도 하였다. 간단하고 입기 편하며 활동적이고 여성미가 넘치는 샤넬 스타일은, 유행의 변천 속에서도 별로 변함이 없이 오늘날에도 애용된다. 또, 그녀가 만든 향수 샤넬 No.5도 유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모델의 모자라는 암호명으로 나치스첩보원으로 활동하였음이 사후 20년이 지난 1995년에 확인되어 충격을 주었다.
⑨ 에네스쿠(George Enescu ; 1881.8.19 - 1955.5.5) : 루마니아의 바이얼린 연주자. 작곡가. 대표작은 관현악곡 <루마니아 광시곡 제1번 A 장조>. 리스트의 <헝가리아 광시곡 제2번>과 더불어 가장 많이 연주되는명곡이다. 오페라 <오디푸스 왕>도 유명하다.
⑩ 제임스 와트(James Watt ; 1736.1.19 - 1819.8.19) : 영국의 발명가․기술자. 스코틀랜드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 시절부터 기계를 좋아하였다. 1774년에 버밍검에 증기기관 제작 공장을 세웠고, 증기 기관․조속기․압력계 등을 발명하여 영국 산업 혁명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와트는 영국의 공학자 뉴커먼(1663-1729)이 설계한 증기 기관을 개량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었다. 와트의 연구에 힘입어 영국에서는 산업 혁명이 일어났다. 새로 개발된 와트 증기 기관은 1800년대의 영국 산업에 필요한 동력의 대부분을 공급했다. 일량이나 힘의 단위인 와트(W)는 제임스 와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전구나 난방기와 같은 대부분의 전기 장치에 사용되는 힘의 값은 와트(W)로 표시한다
⑪ 가르시아 로르카(Garcia Lorca ; 1898.6.5 ~ 1936.8.19) : ⇨6월 5일. 스페인 내전이 터지고 얼마 뒤인 1936년 오늘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고향 그라나다 부근의 한 과수원에서 프랑코 반란군에게 살해당했다. 38세였다. 그를 쏘아 죽인 군인들은 자신들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 한 사람의 생애를 끝장내고 있다는 것을 몰랐으리라. 물론 그걸 알았다고 해도 그들이 마음을 바꾸었을 것 같지는 않다. 전쟁과 살육의 광기 속에서, 그 분노와 공포와 증오 속에서, 예술적 재능이라는 것이 얼마나 값나가 보이겠는가. 가르시아 로르카는 극작가로서도 어엿하다. 팔자 사나운 여자들의 삶을 그린 피의 결혼 예르마 베르나르다 알바가(家)가 흔히 그의 3대 비극으로 꼽힌다.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는 김지하를 연상시키는 바가 있다. 두 사람 다 본질적으로 정치시인이라기보다 뛰어난 서정시인이었음에도 정치적 이유로 파시스트들에게 험한 꼴을 당했다는 점이 그렇고, 자기 고향의 전통적 연행예술의 리듬을 시 속에 옮겨온 것도 그렇다. 시를 솟아나오게 하는 힘으로서 가르시아 로르카가 설정한 소위 두엔데도 김지하의 신비주의와 어울리는 바가 있다. 가르시아 로르카의 고향 그라나다는 아름다운 도시다. 프란시스코 타레가의 기타 독주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소재가 된 알함브라 궁전이 바로 거기 있다. 그 곳 사람들은 고향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부심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그라나다의 장님이라는 속담에 담았다. 오늘의 주인공 가르시아 로르카도 자기 고향을 이렇게 불멸화했다.
그 빛깔은 은색, 진한 초록빛 라 시에라, 달빛이 스치면 커다란 터키 구슬이 되지 실백편나무들이 잠 깨어 힘없는 떨림으로 향을 뿜으면 바람은 그라나다를 오르간으로 만들지 좁다란 길들은 음관이 되고 그라나다는 소리와 빛깔의 꿈이었다네. (고종석,2003)
⑫ 마누엘케손(Manuel (Luis) Quezon (y Molina) ; 1878.8.19 - 1944.8.1) : 필리핀 연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필리핀의 정치가․독립운동가이다. 마닐라의 산토토마스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1899년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이끄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케손은 필리핀이 독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국과 협상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1909년 미국 하원의 필리핀 상주 대표로 임명되자 미국 정부로부터 필리핀 독립을 승인받기 위해 투쟁했다. 그는 1916년 미국 의회에서 존스 법이 통과되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법안은 필리핀의 독립을 약속했으며 독립에 필요한 몇몇 사전 조치를 규정했다. 1916년 마닐라로 돌아와 새로 구성된 필리핀 상원에 진출해 상원의장이 되었다. 그는 또한 1934년 타이딩스-맥더피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법안을 근거로 독립공화국 수립의 전단계인 연방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필리핀의 완전독립 시기도 보장받게 되었다. 1935년 9월 17일 케손은 필리핀 연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재임하는 동안 군대를 재조직하고 정부 내의 부정부패를 없애는 작업을 추진했다. 1941년 재선되었으나 1942년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하자 미국에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자서전 <위대한 투쟁 The Good Fight>(1946)을 썼으며, 필리핀의 완전독립을 보지 못한 채 결핵으로 죽었다.
⑬ 오빌 라이트 출생(1871) : ⇨1월 31일.
⑭ 아우구스투스(Augustus ; B.C.63 - A.D.14.8.19) :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재위 BC 27-AD 14).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이다. 서민 출신이나 그의 어머니가 카이사르의 질녀로 아버지가 죽은 후 카이사르의 보호를 받았다. BC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에 그의 유언장에 양자 및 후계자로 지명되어 있음을 알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개명하였다. 카이사르의 유병(遺兵)을 장악하여 BC 43년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제2회 삼두정치(三頭政治)를 시작하면서 반대파를 추방하였다. BC 42년에는 필립피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암살자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하고 로마 세계를 3분하여,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그리고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각각 장악하였다. 그러나 레피두스를 탈락시킨 후부터는 안토니우스와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BC 31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한 후 패권을 잡았다. 그는 장군으로서의 역량은 빈약하였으나 아그리파를 비롯하여 여러 부장의 조력과 나아가 전 이탈리아, 그리고 전체 속주(屬州)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아내어 신중하게 일을 처리함으로써, 100년에 걸친 공화정 말기의 내란을 진정하였다. 질서회복 후에는 비상대권을 원로원과 민중에게 돌려주었고, BC 27년에는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칭호를 원로원으로부터 받았으며, 공화정의 명목을 유지하면서 실질적인 제정(帝政)을 시작하였다. 그는 시민 가운데의 프린켑스(제1인자)로서, BC 23년 프로콘술(속주의 장관)에 대한 명령권과 호민관의 직권(職權) 등의 공화정체의 권한을 수중에 넣고 프린키파투스, 즉 원수정(元首政)을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때부터 로마 제정의 시초로 삼지만, 프린키파투스라고 불러야 될 것이다). 그는 속주를 원로원 속주와 황제 속주로 구분하였고, 또 군단 수를 28로 정하여 내외의 수비를 견고히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숙적인 파르티아를 무찔렀지만, 9년에 토이토부르거전투에서 게르만 군대에게 패배하여 3개 군단을 잃고 나서 수세로 변하였다. 한편, 신분질서를 다시 수립하고, 풍기 숙정 등을 단행한 것 외에도 치안과 식량 문제에 마음을 써서 로마시(市)의 질서를 정비하였다. 또한 대규모 건축사업도 일으켜, 벽돌의 도시 로마를 대리석의 도시로 변경시켰다고도 한다. 특히 내정의 충실을 기함으로써 41년간의 통치기간 중에 로마의 평화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리비우스 등이 활약하는 라틴문학의 황금시대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후계 문제로 고민하다가 결국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공동 통치자로 임명한 후 티베리우스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제2대 황제가 되었다.
⑮ 폴링(Pauling, Linus Carl ; 1901.2.28 ~ 1994.8.19) : ⇨2월 28일. 미국의 물리화학자. X선 회절을 이용하여 복잡한 이온 결정의 구조를 밝혀냈다. 단백질의 분자 구조에 대한 연구를 하여 특정 단백질의 나선 구조를 발견하였다. 1954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았고 1962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⑯ 빌프레도 파레토( ; 1848.7.? - 1923.8.19) : 경제학자 “백화점 매출액의 80%는 20%의 단골손님에서 나온다.” “회사 전체 실적 중 80%는 20%의 우수 인재가 올린다.” ‘20 대 80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파레토 법칙’은 이렇게 현대 경영학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이다.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빌프레도 파레토는 혁명의 해였던 1848년 7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해 프랑스에서는 루이 필리프 정권이 무너지고 제2공화국이 선포됐으며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는 3월 혁명으로 재상 클레멘스 메테르니히가 실각했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인 파레토의 할아버지는 나폴레옹에게 협력한 공로로 후작 작위를 받았지만 정국이 혼란스러워지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파레토는 11세 때 복권된 아버지, 프랑스인 어머니와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가 토리노의 기술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철도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1880년대에 아버지, 어머니가 잇따라 타계한 뒤 그의 삶은 크게 바뀌었다. 41세 때 일을 그만두고 12세 연하의 러시아 여성과 결혼하면서 경제학 연구를 시작했다. 한계효용이론을 고안해 ‘근대 경제학의 시조’로 불리는 로렌초 발라의 뒤를 이어 45세 때 스위스 로잔대의 경제학 교수로 취임했다. 그는 ‘가장 바람직하게 자원이 배분되는 상황’이라는 완전경쟁의 개념을 발전시켜 ‘모든 개인의 만족도를 조금도 더 개선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파레토 최적’ 개념을 고안했다. 소득 분포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어떤 사회든 전체 부의 80%는 20%가 소유한다’는 유명한 연구는 통계 분석을 통해 나왔다. 일설(一說)에 따르면 파레토는 20%만 열심히 일하고, 나머지 80%는 노는 일개미들의 모습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선동, 금권 정치가 횡행하는 대중 민주주의를 혐오한 그는 만년에 엘리트의 지배를 지지했다. 이 때문에 파레토의 강의에 등록했던 것을 근거로 ‘파레토의 제자’를 자처했던 무솔리니가 파시즘을 주창하는 데 이론적 틀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첫 번째 아내가 요리사와 도주한 뒤 동거하던 40세 연하의 여인과 임종을 앞두고 결혼했다. 1923년 8월 19일 75세로 숨진 그는 스위스 제네바의 호반 마을인 셀리니에 묻혔다. 파레토 법칙은 최근 인터넷 시대를 맞아 도전을 맞고 있다.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에서 흥행성이 없는 80%의 책 매출이 잘 팔리는 책 20%의 매출을 추월한 것을 근거로 고안된 ‘롱테일(long tail) 법칙’이 바로 그것. 미국 인터넷 비즈니스 잡지 와이어드의 크리스 앤더슨 편집장이 만든 이 법칙은 ‘역(逆)파레토 법칙’이라 불린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2008)
⑰ 기타 오늘의 1631 영국의 시인, 문학비평가 드라이든 출생 1646 헨더슨 출생. 스코틀랜드 장로교도. 1686 코텔레리우스 사망.프랑스 고전학자.1648년 소르본느대학에 서 박사학위 받고.1676년 그는 프랑스 대학의 희랍어 교수로 임명되었다. 1692 버로우즈 출생.세일램에서 마술에 미혹당한 사람들 중 가장 두드러진 희생자.처형되기 직전 군중을 향한 연설은 청중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감동을 줌 1695 샤름므 출생.프랑스의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한자명 손장.자 는 옥봉.17세때 예수회 회윈이 되었고 1728년 북경에 도착 하였다. 1800 패티슨 출생.설교와 연설로 유명한 미국의 침례교 목사.그는 탁월한 신앙심을 가진 겸손한 인물. 1864 로빈슨 출생.장로교도.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의 대학교 등지에서 연구함. 1870 미국정치가 버나드 바루크 출생 1890 함석은 출생.기독교인 독립운동가,교육자.자는 치옥.평양의 숭 덕학교 교사로 재직.3.1운동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임. 1895 하워드 출생.감리회 한국 여선교사.한국명 허길래.1955,4,26, 대전보육학원 초대원장으로 취임.초급대학으로 인가를 얻어 초대학장 취임. 1902 미국 유머작가 오그든 내시 출생 1919 미국 출판업자 맬컴 포브즈 출생 1936 스페인의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 사망 1954 이탈리아 총리(1945-53) 데 가스페리 사망 1998 시인 원희석씨 별세
오늘의 샘터 ① 블레즈 파스칼의 말 :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약한 갈대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것을 으스러뜨리기 위해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도 없다. 한 줄기 바람, 한 방울 이슬로도 그것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주가 그것을 으스러뜨린다 해도, 인간은 한층 더 고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그런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 6월 19일
② 마누엘 케손의 말 : "미국인들에 의해 운영되는 천국 같은 정부보다는 차라리 지옥 같더라도 필리핀인들의 손으로 직접 꾸려지는 정부가 낫다. "
③ 파스칼의 명상록 :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외친 파스칼의 명저 ! <명상록>은 인류 영원의 고전 중 하나이며, 여기에 「오직 3종류의 인간이 있을 뿐이다. 신을 이미 발견하고 신에 봉사하고있는 사람, 아직 신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신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 그리고 신을 발견하지도 못했고 신을 구하려고 하지도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첫 번째 사람들은 도리에 맞고 행복하다. 마지막 사람들은 어리석고 불행하다. 그리고 그 중간 사람들은 불행하지만 도리에 맞는다.」라는 구절이 있다<<영적․혼적․육적인 사람>>. ⇨6월 19일 |
의 졸저<원저 편저자 (1973년도 초판)> 평택 소통 김평탁입니다.
1973년 초판 이래 조선일보를 비롯 각 신문들과 각방송국 특히 ytn 을 비롯하여 컴퓨터 인터넷.......오늘까지도 각 방송들과 신문 인터넷의 덕택으로 원저자의 보람을 온 국민들과 함께 만끽하며 감사 만족해 하고 있습니다.
소생은 하나님의 말씀<성경>과 개인<일기>를 60여년 동안 지금까지 쓰고 보존해 오면서,
오늘의 국민 소통 운동과 우리 한민족 한가족 소통 운동을 제창하게 되었으며 다행히도 박근혜정부<한민족미래창조과학기술부>의 탄생을 한없는 기쁨과 소원<소망>을 기대하고 있답니다.
국민 여러분 !
그리고
국내외 동포<가족> 여러분 !
어서빨리 동서남북 우리나라 남북 평화 통일을 이루십시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샬롬 !
2013년 08월 13일 광복절을 앞두고
CCCC C-man 평택 소통 김 평 탁 올림
(국민소통운동본부.017-727-3863,(031)692-3650.경기평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