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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상봉 |
누군가 나를 24시간 쳐다보고 있다면, 내가 어딘가를 가려고 차를 타거나 걸어 나올 때 계속해서 나를 뒤따라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몇 달을 계속 산다면 어느 순간 나를 보고 있는 그 사람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언제나 주위를 둘러보는 야릇한 버릇이 생기게 된다. 군부독재 시절 정신과 상담을 하러 오는 사람들 중에는 누군가 자신을 끊임없이 감시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 내 방에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심지어는 내 머리에 칩을 심어 놓아 나를 감시한다며, 그래서 한 잠도 못 잔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는 것이다.
시간이 한참이 지났지만 지금도 정의구현전국 사제단이나 인권위 사무실에는 같은 내용을 가지고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그야말로 망상이다. 환청이며, 환시, 환상이다. 사실은 아무도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늘 불안에 떠는 사람들로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군부독재 시절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나 나옴직한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24시간 나를 감시하는 상황이 2009년 대한민국에 분명히 있다.
24시간 감시받는 용산 사람들... 그리고 그 날 새벽 용산에 사람은 없었다
용산이 바로 그 곳이다. 지난 1월 20일 이후 유가족들과 용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그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유가족이 어딘가를 가려고 차에 타면 경찰차가 그 뒤를 따라붙는다. 지금 유가족이 밤이 되어 머무는 삼호복집 2층에도, 분향소가 있는 남일당 건물과 사제단 천막에도 그 주시하는 눈길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분명한 인권침해이다.
하긴 용산 4구역이 재개발된다는 바로 그 순간부터 사람들의 인권은 무시당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을 나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미 용산에 남아있는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안 나가는 것들, 치워야 하는 물건이 되었다. 오랜 삶의 터전에서 멀쩡하게 장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날아오는 폭언과 폭행, 억지와 모욕은 끝이 없었다. 며느리 앞에서 뺨을 맞는 시아버지, 자고 일어나면 깨져나가는 유리창과 문 앞에 수북이 쌓여있는 오물들, 온통 빨갛게 X자와 철거라고 써진 벽면들, 밤늦게까지 소란을 피우고 문을 두드리고........ 사람에게 할 짓이라고 볼 수 없는 일들이 하루 종일 일어나는 그곳에서 구청 직원도 경찰도 그들을 지켜주지 않았다. 그래서 쫓기다시피 망루를 만들어 올라간 그 순간 그들은 이미 테러리스트로 규정되었다. 이 사회에서 사라져주어야 할 대상, 도심 한복판에 괴물이 나타났다고 경찰과 보수언론들은 떠들어대기 시작하였다. 결국 망루에 오른 지 만 하루도 못되어 그들은 처참하게 진압되었다.
다섯 명의 철거민과 한 명의 경찰은 그렇게 죽었다. 그 날 새벽 용산에 사람은 없었다. 사람이라 존중받아야 할 대상도 없었고, 그가 사람이라고 존중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 날, 아니 그 훨씬 이전부터 용산에 재개발 이야기가 돌면서부터 존중받아야 할 존중해야 할 인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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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상봉 |
방패 뒤에서, 방석모 속에서 흘리는 눈물
심각한 것은 침해받은 철거민들의 인권만이 아니다. 남일당 건물을 중심으로 세 군데에서, 삼호복집 앞에서 24시간 유가족들과 철거민들의 동태를 지켜보는 화석같이 서 있는 전·의경들이 있다. 미사를 드리면서 그들을 보노라면 생명이 없는 듯하다. 플랜카드 하나 붙이는 데에도, 스티커 한 장 벽에 붙이는 데에도 달려들어 채가고 끊임없는 분쟁에 방패막이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인권 또한 말할 수 없다.
명령 한 마디 외치고 뒤로 숨어 버리는 지휘관의 지시에 마치도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그들에게 어떤 인권도 찾아볼 수 없다. 방패 뒤에서, 방석모 속에서 흘리는 눈물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치상황에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도저히 사람이 할 일이 아닌 것을 단지 의무복무라는 이름으로 내려진 국가 공권력의 부당한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처지에서 인권은 사치스런 이름일 뿐이다. 일찍이 그 부당성에 항거하여 양심선언을 했던 이길준 이병의 심정은 그것을 대변하는 것이리라.
또 하나! 일그러진 인권의 모습을 보는 것은 거친 몸짓으로 끊임없이 다가오는 용역회사의 직원들이다. 같은 동네에 살았던 사람들, 옆자리에 앉아 술 한 잔 같이 했음직한 사람들과 욕설과 폭력으로 맞대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돈이다! 돈은 그들의 인격과 인권도 사버렸다.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그들이 과연 편안할까 하는 것이다. 거친 몸싸움이 끝난 돌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무너져버린 인간의 비참함을 본다. 마음 한 구석 얼마나 괴로울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그들을 보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형제들끼리 싸워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카인과 아벨의 형제 살인을 보는 것 같아 더욱 가슴 아프다.
이렇게 용산과 관계되는 그 모든 것에서 인권은, 사람의 모습은 처참하게 무너져 버렸다. 빼앗긴 자에게서도, 빼앗는 자에게서도....... 지나가는 말로 듣는 가슴 아픈 소리들이 있다. 이 지경이라면 이 나라에서 살기 싫다고, 이민가고 싶다는 말을 들을 때면 이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 참 가슴 아프다.
서러운 사람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마음들
그러나 돈 때문에, 거대 자본의 욕심 때문에, 그와 손잡은 못된 정권의 협잡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인권이, 인격이 살아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또한 용산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음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용산에는 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어렵고 억울했던 사람들, 지치고 서러운 사람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마음들이 죽었던 사람들을 다시 용산에 살게 한다. 매일 미사에 나오는 사람들, 고사리 손으로 예쁜 저금통 분향소 한편에 놓고 간 예쁜 마음들, 걱정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지나가는 사람들, 마음이 아파서 차마 말을 건넬 수 없다고 흐려 쓴 글씨가 적힌 메모와 함께 전해진 건강음료 한 상자........
이 작고 예쁜 마음들이 죽었던 용산의 사람들을, 인격을, 인권을 살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기 시작할 때 인권은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고 말이다. 유엔에서 선포된 인권의 날이, 인권이란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고 천명한 그 어느 선언보다도 더 가슴 저리게 알려주는 교훈이다. 그렇게 인권은 사람들에 의해서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용산은 우리를 또 희망차게 한다. 죽었던 것들이 있다면 다시 살릴 수 있다고 웃음 짓게 한다. 유가족들의 해맑은 웃음이 살아나고, 철거민들의 무거운 어깨가 들썩이는 춤으로 풀어지고, 전경들의 생명 없는 눈들이 보람찬 하루의 맑음으로 빛나고, 용역회사 직원들의 어이없는 몸짓이 누군가를 돕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것을 꿈꾸는 것이 헛된 망상만은 아닐 것이다. 그 모두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권이 죽었던 용산에서는 다시금 더 아름답고 찬란하게 인간의 소중함을 살려낼 것이다.
*2009년 인권주일에 천주교 인권위원회에서 강론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집필된 글입니다.
나승구 (서울대교구 신월동성당 주임신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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