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비난하거나 과하게 거짓되게 칭찬하고 나면
너무너무 괴롭고 그 말들이 계속 생겨나서 괴롭습니다.
비난하는 그 순간 그 마음에 사띠를 두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뱉어버립니다.
뱉어버리는 그 순간에는 시원한 것 같지만
그 후에는 너무너무 괴롭습니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 순간 마음은 도사로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를 비난하는 말을 듣거나 남들과 비교해서
어떻다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정말 아주 많이 요동치고
도사를 일으킵니다.
남들보다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고
남들과 비교하는 마음이 큽니다.
남들로부터
비난이나 칭찬을 들으면 마음이 크게 반응해서 괴롭습니다.
칭찬도 처음에는 좋아하다가 나중에 괴로움으로 다가옵니다.
도사도 처음에 일어났을 때
사띠와 지혜로서 지켜보지 못하면 그 힘이 커지고 가속도가 나서
그 힘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 버려서 그 괴로움이 오래 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 도사와 로바로 살고 있다는 것이 조금 이해되었습니다.
가정생활도 그렇고 직장생활도 그렇고.. 이 도사와 로바가
의도와 생각이 일어나도록 합니다.
듣고 보면서 너무나 많은 생각과 의도가 일어나고
이 의도로 인해서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을
조금 이해하게 됩니다.
듣고 보면서 로바/도사가
이 듣고 보는 대상들로 인해 커지고 힘을 얻고 활발히
활동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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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글>
그래서 마음을 볼 줄 알아야 하고
마음의 성질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하는 겁니다.
우선 먼저 무슨 마음이 되었든지..
낄레사가 되었든지.. 뭐가 되었든지 일어나는 마음들은
다 받아들여놓고 봐야만 합니다.
받아들이는 것도 마음의 성질입니다.
마음으로 아는 것이, 받아들여질 때 지켜볼 수 있는 마음으로
터닝 찬스가 될 수 있습니다.
'아~ 괴로워~!!' 하는 순간,
보는 마음에 도사(낄레사)가 들어가기 때문에
마음이 보이지 않을 뿐더러 마음으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는 마음 아는 마음.. wacthing mind knowing mind..
언제나 대상과 아는 마음이 함께 해야만 합니다.
쉐우민 큰 사야도께서는
..<오직 두 마음이 있을 때 참 마음이라 한다.
만일 한 마음만 있다면 내가 항상 거기에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는 마음 하나로 볼 때는
내가 들어가서 온갖 위에서 언급된 그러한 내용들이
다 아만/자만/교만으로 일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선 일어나는 것들을 다 받아들여놓고 대상으로
단지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더라도 지켜보면서
'아~ 마음이란 게 그렇구나' 라고 이해할 줄도 알아야 하며,
'일어날테면 일어나거라~ 될테면 되거라' 하는
마음으로도 지켜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아울러 지금껏
'여태 살아오면서 알지 못하고 모하로 살아갈 때
참으로 이렇게 많은 업을 지어가는구나' 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띠와 지혜.. 법으로 살아가는 것과
낄레사 탐진치.. 나(자아)로서 살아갈 때 어찌되겠구나를
배우면서 교훈도 얻어내야 됩니다.
이미 지혜를 갖추고서 지혜 있시 보는 게
번뇌를 허용하지 않는 가장 수승한 힘이 됩니다.
지금과 같이 지켜보면서
일어나는 많은 마음들의 성질에 대해서 알아두고 배우는 것도
그러한 지혜가 나는 원인/결과입니다.
그래서
능숙하게 할 줄 아는 지혜야 말로
번뇌를 허용하지 않는 아주 힘이 좋은 수승한 지혜가 되어서
법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반응하거나 일어나는 번뇌들한테 당했다는 생각만으로
자책하고 괴로울 수 있겠지만 지켜볼 수 있고 지켜볼 줄 안다면
별 문제는 없습니다.
여지 껏
모르고 살아왔던 마음의 성질에 대해 배우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참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기뻐해야 되지 않을까요?
수행에 대하여.. 사띠에 대하여..
아는 마음과 지켜보는 마음에 대하여 감사의 마음까지
되새겨질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공양 후 보살님이 말하였습니다.
어떤 상대방과 대화하면서 그 상대방한테
실컷 퍼붓고 난 다음에야 뒤늦게 알아차리고 후회하고
또 괴로웠다고..
알아차림이 없을 때는
다름 아닌 독 묻은 화살을 두 번만 맞는 게 아니라
평생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텐텐텐..
심장이 있는 정 중앙의 가슴으로 날아가게 됩니다.
삶과 죽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수행초기에 들어두었던 쉐우민 큰 사야도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띠가 있으면 사는 것이요, 사띠가 없으면 죽는 것이다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란,
지금 현재 일어난 것을 알면 되는 것이지
이미 지나간 과거나 아직 돌아오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이라는 것이 이미 지나간 과거나 아직 돌아오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생각을 안 하겠다고 한다고 해서
안 일어나는 것입니까?
일어나는 것은
일어나는 조건이 갖추어지게 되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보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알아차리고
지켜봐야 할 뿐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내가 해야 할 일은
견해와 생각을 바르게 갖추고서 단지 일어나는 것이거나
대상으로 마음으로 자연의 이치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음가짐이나 마음상태가 어떻게 달라지는가까지 볼 수 있다면
더욱 좋습니다.
비난과 칭찬.. 명예와 불명예.. 이익과 손해.. 고통과 행복 등
세간 팔풍경계에 휘둘리는 것도 다 탐/진/치 번뇌에서
비롯됩니다.
일어나는 것들이 다 dukkha(둑카)이거늘
마음의 성질을 볼 수 없고 볼 줄도 모르기 때문에
그저 대상 쪽에만 관심을 두고 좋다, 나쁘다 등 깊게 빠져버리기
일쑤입니다.
마음의 성질을..
보이는 성질을 대상으로 하여 보십시오.
대상과 아는 마음이 함께 하는지를 체크해 보십시오.
아는 마음을 다시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사띠의 힘이 좋아야 지혜의 힘도 좋아집니다.
마음의 성질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사띠가 좋아집니다.
몸보다는 마음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은 사띠를 놓치지 않습니다.
항상 대상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나요?
부처님께서도 말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지혜를 갖추고 지혜 있시
말하고 듣는 것입니다.
바르지 못하거나
쓸데없는 말보다는 서로 유익하고 이익이 있는 말..
해서도 괴롭지 않고 들어서도 괴롭지 않은 말..
그리고 꼭 해야 할 말은 해야 합니다.
身/口/意 3행을 단속하고 바르게 한다는 말도
이것입니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대수가 아니라
지혜가 있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담마에 대한 설법이나 법문은
번뇌가 붙지 않아서 들으면 들을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평온해질 뿐입니다.
번뇌가 없게 하려면
항상 알아차림이 있도록.. 깨어 있도록 하면 됩니다.
선법이 있게 하려면 불선법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번뇌에 대하여.. 마음에 대하여..
일어나는 것, 보이는 것, 대상에 대하여 이해한 앎의 지혜를
이미 갖춰놓는다면 그 이상 말할 것 없이 더욱 완전해질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당부하신 부처님의 진정한 메시지와
담마에 대한 이해는 매사에 지혜로서 살아가는 것,
지혜 있시 생활하는 것, 지혜로서 보는 것이 그것이요,
정견과 정사유.. 팔정도(중도)행이 그것임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법으로 일할 때 법이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자등명 법등명이 따로 없습니다.
*
_(2016년 11월 흐린 가을날의 오후 카톡메시지의 답글을 쓰며..
사사나 스님)_
첫댓글 글을 다 읽고 들어오는 첫 느낌은
"한편의 훌륭한 법문을 읽었구나" 입니다.
좋은 법문 감사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_()_
가을은 더없이 수행에 매진할 수 있는 계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 저 또한 사야도 법문을 읽어감에 감로수와 같으니 말입니다.~()
스님
건강은 어떠신지요.
카페 글을 통하여 편찮으신줄 알았으나 연락도 못 드리고 죄송합니다.
늘 좋은 법문에 감사드리며
쾌차하시길 기원합니다.
합장()()()
아~ 굿데이님, 오랜만이군요. 반갑습니다.~^^*
지금은 선원에서 조리 중입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흘러가야 싶습니다.
더욱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원만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