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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17 - 제1차 세계대전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 케말 파샤 - 아타튀르크!
오스만 제국의 중앙 행정조직은 술탄 혹은 파디샤 본인과 대재상 (베지르 아잠), 니칸즈 (총재) 가 주축이
되었으며, 루멜리 (유럽) 와 아나돌루 (아시아) 지역을 담당하는 두 명의 데프테르다르
(재무대신) 에다가 두 명의 카디아스케르 (군 사법관) 의 총 7명이 참석하는 디완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최고 종교 기관인 셰이훌 이슬람은 참가 권한이 없었는데, 오스만 제국에는 정교분리 풍조가
있었기 때문이며, 디완은 전성기인 쉴레이만 대제때는 일주일에 네번 소집
되었으며 거대한 영토에 비해 인구는 적었으니 1500년대의 인구가
1,100만~1,500만명이었고 1683년의 제2차 빈 공방전때 인구가 3천만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중국 및 인도는 1억명을 넘는 수준이고, 고대 로마 제국 동부의 인구가 3천 4백만명 정도에 프랑스
인구가 2천만명을 넘었으며 동시대 유럽 전체의 인구가 1억 2천만이 넘어 오스만의
4배나 되었는데 3천만명도 오스만 제국이 전성기때 인구로, 최정점을 찍은 1856년에
3천5백만명, 코스탄티니예 주변과 중동 일대만 간수한 말기인 1914년에는 2,000만명도 안됐습니다.
1914년 작은 영토인 한반도 인구가 1500만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으며, 395년 동로마의 인구가 3천만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오스만의 영토는 분할통치 동로마 지역의 영토에서 마그레브와 메소포타미아를
더한 영토인데다가 천년 넘게 후대의 제국인걸 감안하면 영토 대비 인구는 엄청 적은 나라라 할 수 있습니다.
1906년 무슬림 인구 비중이 74% 에 불과했으니 그리스인이 14.6%, 아르메니아인이 5.5%, 불가리아인 3.7% 등
기독교인 인구도 많았으며 유럽에서 인구가 적었던 이탈리아 보다 1천만 이상이나 적었고 오스만이 망하고
들어선 신생 튀르키예 공화국(터키) 도 인구가 1,463만명에 불과했는데, 당시 그리스 인구가 750만 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1453년 제노바를 시작으로 특권증서를 부여했는데, 상인이 오스만 제국 내의
한정된 지역에 거주하는 것을 허용하고 즘미(zımmi, 비무슬림) 상인의 중개를 통해
오스만 제국의 상품을 교역할수 있는 권한, 오스만 제국에 대사를 파견할 권리, 외국인의
안전보호 보장과 조계지내 군사징집, 지방세, 거주지 수색의 면제, 조계지내 치외법권을 포함합니다.
유럽 국가들이 파견하는 상주 대사는 포로이자 인질로 취급되었고 오스만 조정의 심기가 불편해지거나
분쟁이 벌어지면 투옥당했는데, 18세기까지 유럽의 국제법은 오스만에서 준수되지 않았으니
오스트리아 대사는 스파이 혐의를 받아 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갤리선의 노예" 로 팔리기도 했습니다.
17세기 말까지도 오스만에 서유럽 언어를 구사하는 관료가 없어 영국과 네덜란드 주선으로 조약을 체결해야
했는데, 유럽 열강과의 전쟁을 최소화하고 외교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상주대사 파견이
필수라는걸 절감한 18세기부터 전문 외교관을 훈련시키기 시작했으니 이들 대부분은 개종한 기독교도였습니다.
카피튈라시옹(특권증서)은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 이후 1914년에 무효화되고 1923년 로잔 조약으로 해소되는데,
청나라와는 17세기, 18세기엔 별 다른 마찰 없이 지내다가 위구르 무슬림 야쿱 벡의 반란이 일어나자
오스만 제국은 위구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야쿱 벡을 에미르로 인정하고 군사 고문까지 파견해 지원합니다.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중심지는 명실공히 루멜리아(유럽), 즉 발칸반도였으니, 유럽 영토에서의
세입은 16세기 오스만 정부 수입 절반이었고 18세기에는 3분의 2를 차지하며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동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이후는 해상 무역로를 통제하며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입니다.
또한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무역을 중개하면서 아시아의 향신료와 비단 등을 유럽에 팔았고,
유럽의 황금과 은을 받아챙겼는데, 오스만 제국은 아시아로 향하는 동지중해 무역로들을 '막아버렸다'
했으니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과 이슬람 국가들에 비싼 무역세를 지불하면서 아시아와의 무역을 했습니다.
고관세, 고세율은 종교 문제와 함께 유럽과 오스만 제국간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못했던 핵심적인
이유이니, 셀림 1세의 재위기에는 무슬림 상인들은 2% 관세만 지불하면 되었던 것에
반하여, 유럽의 기독교 상인들은 4% 에서 5% 에 달하는 관세를 오스만 정부에 납부해야 했습니다.
신대륙 개척이 완료되는 시점까지 유럽의 대인도 무역은 육로인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반도를 경유
하거나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흑해를 건너는 경우가 많았지만, 신대륙 개척이 완료되고
점차 유럽과 신대륙간의 무역경제가 안정적으로 구축되면서 굳이 육로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직접 진출하고, 영국을 필두로 해양과학기술(위도 및 경도 측정법
발달, 시계측정법의 발달, 돛의 배치 변경, 항로 제정, 조선술의 발달 등) 과 행정기술(해사보험과 보험
회사의 탄생, 해사정보지의 발간, 주식시장의 개설, 해양 관련 법령의 제정 등)이 발달하면서 해양무역
의 안정성과 직접 무역을 통한 수익 증가로 이어지면서 아나톨리아 반도를 경유할만한 이유가 사라집니다.
러시아 제국도 시베리아 개척을 통해 중국과의 무역 경로를 새로이 뚫고 시베리아 각지에 안정적인 자원수급
기지를 개설하면서 오스만 제국을 통한 중계무역의 중요성이 이전보다 낮아졌고, 더욱이
중앙아시아 여러 토후국을 합병하면서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주된 시장 중 하나를 뺏어가는 효과도 생깁니다.
동유럽, 북아프리카 영토가 독립하던 제국 말엽에 의회 의석은 142명의 튀르크인 의원들 외에 아랍인 의원 60명,
알바니아인 의원 25명, 그리스인 의원 23명, 아르메니아인 의원 12명, 유대인 의원 5명, 불가리아인
의원 4명, 세르비아인 의원 3명, 블라흐인 의원 1명등 절반 가량의 의석이 비튀르크인들이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차 대전이 발발해 독일측인 동맹국에 참전한 오스만 제국은 전쟁에서 패하면서 영토가
영국과 프랑스, 그리스와 쿠르드 및 아르메니아등에 찓겨나갈 위기에 일어난 사람이 1차
대전의 영웅으로 아타튀르크라고 불리게 될 케말 파샤로 갈리폴리(겔리볼루) 전투로 두각을 드러냅니다.
1914년 9월에 러시아는 동맹국인 프랑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하여 점거하고 있던 갈리시아
지방에서 나와 실레시아 지역을 공격하러 진군해야 했는데, 이때
독일과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군의 보급선을 차단하여 러시아 군대는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독일의 선물로 오스만 해군 소속이 되었음에도 독일 해군의 장교와 병사들만 탑승해 있던 괴벤함등 전함
2척이 10월 말에 자기 멋대로 러시아의 세바스토폴 항구를 기습 공격해 버렸고, 러시아는
11월에 오스만 제국에게 선전포고하여 캅카스 방면을 공격하기 시작해 오스만도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캅카스 전역에서 오스만은 1914년 말에 러시아의 공격을 잘 막았지만, 청년 튀르크당 3대
실권자 중에 한명인 엔베르 파샤가 한겨울에 눈덮인 산악 지형에 대한 무리한
공격을 가한 끝에 1914년 12월~ 1915년 1월에 벌어진 사르카므쉬 전투에서 대패하고 맙니다.
엔베르의 계획은 예상을 깬 공격으로 캅카스 전선을 돌파해 당시 세계에 몇개 없던 유전 지대인 러시아의
바쿠유전을 점령하겠다는 것이었으니, 아직 석탄을 주로 쓰던 시절이기는 하지만, 드레드노트급
전함은 석유를 연료로 사용했고 막 군에 도입되기 시작하던 트럭과 비행기도 석유를 연료로 사용했습니다.
러시아군의 반격 과정에서 러시아군 소속의 아르메니아인 사단과 일부 아르메니아계
현지인이 튀르크계 주민들을 죽이자, 오스만 제국이 자신의 패배한
원인을 전부 아르메니아인에게 돌리며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영국은 꽉 막힌 서부전선 참호전의 교착을 풀어줄 돌파구를 찾을 겸, 독일에 고전하면서 오스만까지 상대하던
러시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프랑스와 연합한 함대를 보내 2월에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려 했으나 터키군이 설치함 기뢰에 전함 2척을 잃고 또 2척이 대파되는 피해만 입고 철수합니다.
튀르키예어로는 가까이에 트로이 유적으로 유명한 차낙칼레라는 도시가 있기 때문에 차낙칼레 전투
라고 칭하니 이곳에서는 매년 기념행사를 벌이고, 참전용사들의 후손들이 함께 모여 행사를
갖는데 고조 ~ 증조할아버지 시절엔 총부리를 겨눴던 사람들이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차낙칼레 잔투는 겔리볼루 전투 Gallipoli Campaign 라기도 하는데, 다르다넬스 해협 유럽쪽에 위치한
갈리폴리 (겔리볼루) 에 1차 세계대전때 영국, 호주, 뉴질랜드, 프랑스군 이 상륙전을 펼치는데
오스만 투르크는 케말 파샤가 지휘해 방어에 성공하니 터키는 5지역 전투중 유일하게 승리했던 곳 입니다.
이에 훗날 터키의 아버지, 아타튀르크라고 불리게 되는 케말 파샤는 제19사단을 지휘해
다르다넬스 해협의 겔리볼루 반도로 급히 달려갔는데 영국과 프랑스
해군의 치열한 함포사격에 이어 영국과 호주, 뉴질랜드등 연합군이 상륙 합니다.
다르다넬스 해협에는 독일 육군대장 잔더스 장군이 차낙칼레 주둔 오스만 육군의 사령관으로 있었지만
오스만 육군 장병들은 따르지 않자, 무스타파 케말 육군 대령(훗날 아타튀르크)이 잔더스 장군의
지휘안을 조율하면서 참모장으로 오스만 육군을 독였기에 그가 사실상 사령관이나 다를바 없었습니다.
2월 19일 영국과 프랑스 연합함대가 요새를 공격했지만, 오스만군의 요새 해안포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으니
7일간 포격전 끝에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은 피해가 크진 않았으나 기뢰제거에 진전을 보지 못하는데,
연합군 함대가 입은 피해 다수는 기뢰에 의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오스만군의 포격이 무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뢰 제거를 담당한 함선들은 징발된 배이며 민간인 선원들은 오스만군의 포격에 겁먹고 도망가는 바람에
기뢰 제거는 영영 불가능해지니 카든 제독이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교체되었으며, 3월 18일 2차
공격을 시도했으나 16척 중 전함 세척이 침몰하고 세 척이 대파되는 참패였으니 영국 함대
총사령관 피셔 제독은 해군상 처칠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사퇴해버렸고 처칠도 그 책임을 물어 해임됩니다.
처칠이 작전을 강행했을 때부터 해군 단독작전이었기 때문에 상륙할 육군 자체가 없었는데, 육군 중동사령관
해밀턴 장군이 해군을 도와 진격한다는 육해군 연합작전으로 변경한 것은 1차 공격이 실패한 3월
12일 이었고, 2차 공세가 실패할 때는 병력 자체가 준비가 안된 상태였으며 결국 상륙작전은
4월 25일 펼쳐졌고 오스만 제국군은 병력을 회복할 귀중한 시간을 벌었으니 다르다넬스 해전이라 부릅니다.
그 6주의 공백기 동안 무스타파 케말 대령의 오스만 육군은 10만의 병력을 보충받았고, 요새포와 해안포,
방어 진지들도 다시 재구축했기에 앞서 한 영국과 프란스 함대의 포격은 완전히 헛짓이 되어버렸습니다.
4월 25일 영국 해밀턴이 이끄는 연합군 7만명이 겔리볼루 상륙을 강행하자 케말 대령은
장병들을 모아두고 연설을 하는데..... "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말라! 진격을
바라지는 않는다. 오직 그 자리를 지켜달라. 전우를 위해 장렬히 싸우다 죽는 길을 택해달라.”
“ 우리가 무너지면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노예가 될 것이다. 제군에게 미안하지만 오늘은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하여 싸워야만 한다. 이는 개죽음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죽음이 조국을 지키는
밑거름이 될것이며 그대들 이름은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서 무너지면 제군과 같이 시체로 뒹굴고 있으리라."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10월 까지 무차별 공격을 가하며 돌파를 시도했으나 결국 25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부득불 퇴각해야할 처지로 몰립니다. 오스만군도 비슷한 사상자를 냈으니 합계 50만명이
전투에서 죽은 것인데, 하지만 케말은 세계 최강 영국군을 물리쳐 풍전등화의 투르크를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그리고 1916년 4월 26일 상륙작전은 뒤늦게 다시 강행되는데, 영국 육군과 해병대는 해안에 첫
발을 디딘 뒤에야 이 지역이 대규모 병력이 상륙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지형임을
깨닫게 되니 해안의 폭이 워낙 좁아 상륙한 영국군은 그 자리에 못박힌채 고지대에 위치한
오스만군의 대포와 기관총에 맞는 지경이었음에도 영국군은 당초 계획대로 병력을 밀어넣었습니다.
게다가 영국군은 오스만 제국군을 너무나도 얕잡아봤는데, 특히 오스만군의 화기를 별로 신경도 쓰지 않은
탓에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되니, 영국군은 오스만 육군이 저격수를 보유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대비
하지 않았는데 오스만 제국 육군은 7.92mm 마우저 소총으로 무장한 저격수 부대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시골에서 어릴적부터 총으로 늑대나 온갖 동물을 사냥해 사격 솜씨가 출중했는데, 결국 이들
저격수 부대에게 영연방군은 생각보다 많은 피해를 당하고 나서야 부랴부랴 저격수 부대로
맞섰지만 적지않은 피해를 당하고 적군의 정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수세에 몰리던 와중에 수뇌부에서 내놓은 작전이 해군 함포들을 이용한 포격으로 화망을 형성해
오스만군을 참호에서 교착시키고, 그때 그나마 좀 상태가 멀쩡한 오스트레일리아 보병
사단이 일제히 고지로 돌격해 참호를 뺏고 전진한다는 아주 지극히 간단해보이는 작전이었습니다.
의도는 좋았고 성공 가능성도 굉장히 높았는데 막상 작전 개시 당일에 하필 함포를 지휘한 사령관과 보병대
를 지휘하는 사령관의 시계가 일치하지 않았으니..... 해군의 함포 사격은 초저녁에 끝나버렸고,
함포의 화망을 바탕으로 돌격했어야 할 육군이 튀어나왔을 때는 이미 해군의 엄호사격은 다 끝난 뒤였습니다.
여기서 다시 포격을 하고 보병대가 돌격했으면 성공할 수도 있었으나 외부의 전황을 전혀 모르는
최고사령부는 그냥 계속해서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오스트레일리아 사단인 호주-
뉴질랜드 군단(ANZAC) 은 몇 m 도 달리지 못하고 기관총의 화망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했습니다.
단 하루만에 오스트레일리아 사단중 8천명이 무인지대의 백골이 되었고 1만 8천 명은 부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으며 연합군은 상륙지점에서 1마일도 전진하지 못하고 해안에 발이 묶이게 되었으며
거기다 보급을 두 세계대전 동안 다 책임진 미국이 참전하기 2년 전이라 보급이 정상일리 만무했습니다.
물 조차 현지에서 구하지 못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실어오는 물탱크에 의지해야 했으며
게다가 인근 해역은 기뢰밭이라 제때 보급되는 물자가 없다시피 했으니, 안 그래도 간당
간당한 보급 쿼터 상당량을 식수에 할당해야 했으니 당연히 그만큼 탄약 보급량은 줄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영국군은 전봉준 동학군의 공주 우금치 전투처럼 병력을 끊임없이 축차투입해 박살이 나는 수순을
무한 반복했고 전투가 중반을 넘어서자, 오히려 오스만군이 요새와 참호에서 튀어나와 연합군을
해안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는데 하마터면 해안가에 상륙시킨 협상국 병력이 몰살당할뻔한 상황까지 벌어집니다.
게다가 보름도 안되는 기간 동안 영국 해군의 전함 세척이 추가로 날아갔는데 그나마 영국군에게 불행중
다행으로 가치가 낮은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라? 1915년 5월 13일 새벽 1시 카노푸스급 전함
5번함 HMS 골리앗(Goliath)이 연합군 구축함들의 경계를 뚫고 잠입한 오스만 제국
해군의 구축함 무아비네티 밀리예(Muavenet-i Milliye) 에게 어뢰 공격을 당해 굉침. 전사자 570명.
영화 “갈리폴리 전투”는 1981년 호주에서 멜깁슨 을 주연으로 만들어진 영화로 터키
다르다넬스 해협의 유럽쪽 이스탄불의 남쪽 도시 갈리폴리가 전장터
인데 이후 터키에서도 같은 이름인 “겔리볼루 전투” 라는 영화가 만들어 졌습니다.
갈리폴리는 “아름다운 도시”라는 뜻의 그리스어 “갈리폴리스”에서 유래했으니 고대
그리스인의 식민도시로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뒷굽에 해당하는
지방을 살렌토 반 로 풀리아주에 속하는데 서쪽해안에 갈리폴리 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처칠은 강공 을 주장했으니 함포 사격이 끝나면 바로 육군이 돌격하는데 육군과 해군의
시계가 서로 달라 포연이 사라진 후에 육군이 뒤늦게 공격 하다 보니 손실이 컸습니다.
이는 19세기 초에 나폴레옹 에 대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가 합동작전을 폈으나....
두나라가 사용하는 달력이 서로 달라 성사되지 못한 것 과도 같습니다.
러시아 는 1,850년전인 기원전 45년 11월 1일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만든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었던데 비해 유럽은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십삼세가 종래의 율리우스력을 고쳐서 만든 그레고리우스력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푸쉬킨의 출생연도 는 율리우스력으로 1799년 5월 26일이고 그레고리우스력으로는 1799년
6월 6일이 되는데 왜 서로 달력을 일치시키지 않았느냐 하면 그리스정교(러시아정교)
에서는 로마 가톨릭이 우상숭배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독자적인 길을 고집했던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 육군 57연대는 총알도 포탄도 모두 바닥이 나니 돌을 던지다가 "오늘
우린 죽기 위하여 싸운다!" 를 외치며 착검 돌격을 하는데, 일본 사무라이도 아닌 것이....
북마케도니아 출신 연대장 휘세인 아브니 베이 대령이 장검을 쳐들고 맨 먼저 달려나갔습니다.
연대장이 연합군의 총격에 쓰러지자 뒤따르던 부연대장이 연대장의 장검을 쳐들고 진격했으니.... 대장
부터 이렇게 솔선수범을 보이니 사기가 오른 연대원들도 착검 돌격해 결국 전원이 장렬히 전사
했는데, 이 집념 어린 착검 돌격에 연합군의 피해도 장난이 아니었던지라 육상 돌격을 머뭇거리게 됩니다.
사실 연합군이 병력 피해를 감수하고 묻지마 돌격을 했더라면 승산이 있었다고도 하는데.....
그만큼 오스만군은 당시 총알 부족 및 여러 문제에 빠졌지만 연합군이
신중을 기하느라 머뭇거리니 오스만군은 병기와 탄약을 추가로 보급받을 시간을 벌게 됩니다.
그 덕분에 나중에 아타튀르크는 이 57연대 전원의 용기 어린 활약으로 승리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기리면서 연대장의 이름을 딴 훈장을 제정하고 이 연대를 명예 부대
로 헌사했으며 하지만 부대를 재건하지는 않고 영원한 명예 부대로만 남겨뒀습니다.
몇달에 걸친 지지부진한 소모전 끝에 연합군 사령관 이언 스탠디시 몬테이스 해밀턴이 해임되었고,
후임 찰스 카마이클 먼로 장군은 이듬해인 1916년 1월 작전 실패를 인정하고 퇴각을
결정했으니, 8개월 넘게 끈 이 전투로 연합군은 총병력 57만 가운데 25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오스만군도 32만명의 병력 중 80%에 달하는 25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에 이 얘기는 튀르키예 민족주의자들의 미화일 가능성도 있다는 반론이 있으니.... 57연대
공훈비도 갈리폴리 전역 종료후 철십자 훈장을 받고, 메기도에서 전멸한 이후에야
튀르키예에 공훈비가 세워졌다고도 하는데 어쨌든 부대원 전부가 결국 전멸한 것은 맞습니다.
퇴각이 결정되긴 했지만, 10만이 넘는 연합군 병사들이 갈리폴리 반도에 고립된 상황이니 대 병력이 갑자기
철수작전을 진행했다간 고지대에 진을 친 오스만군이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었고, 철수
하느라 정신없는 연합군 진영에 오스만군이 공격을 감행하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몰살될게 불 보듯 뻔합니다.
퇴각을 결심한 찰스 먼로 역시 이 작전을 진행하면서 30~40% 가량의 손실이
발생할 것이라고 내다볼 정도로 상황은 절망적이었으니..... 결국
연합군은 윌리엄 리델 버드우드의 지휘 아래 필사적인 기만작전을 펼치게 됩니다.
대규모 철수는 발각될 위험이 컸기 때문에 연합군은 군함으로 꾸준히 물자를 운송하는 척하며 조금씩 병력을
탈출시키기 시작했으니 영국 군함들은 모래로 가득 찬 보급품 상자를 평소와 다름없이 실어날랐고,
연합군 병사들도 오스만군이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평소와 완전히 똑같은 군율을 유지했습니다.
이 방식엔 치명적인 문제점이 하나 있었는데, 오스만군의 눈은 속일수 있어도 10만명 이상의 군인들이 자연그레
만들어내는 소음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점점 고요해지는 연합군 진영을 오스만군이
의아하게 여겨 소규모 정찰분대를 보내기라도 한다면 병력이 빠져 듬성듬성한 참호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윌리엄 버드우드는 역으로 이용해 오스만군을 속일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 철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며칠전
부터 전방 군인들에게 그 어떤 소음도 내지 말고 자리를 유지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며 오스만군이 공격을
감행하면 수가 많던 적던 상관없이 남은 탄약량 따위 신경쓰지 말고 미친듯이 총알을 발사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러한 명령 덕분에 오스만군에게 '연합군 진지가 고요한 것은 사람이 적어져서가 아니라 오스만군의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는 착각을 심어주는데 성공했고, 실제로 병사가 상당수 퇴각해 대부분의
참호가 텅 빈 상태가 된 순간에도 오스만군은 연합군의 반격을 우려해 대규모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연합군은 마지막 순간까지 오스만군을 속였는데, 오스만군 진영에 최대한 가깝게 부비트랩, 지뢰, 화약 등을
매설한 다음 마지막 병사를 태운 배가 해안을 떠나기 직전 점화 스위치를 눌렀는데, 참호전에서 포격은
보병이 파상적인 공격을 펼칠 전조였기 때문에, 이런 거대한 폭발을 적의 엄청난 포격이라고 오해했습니다.
이런 필사적인 기만작전 덕분에 철수는 대단히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연합군은 30%는 희생될거라는 찰스 먼로
의 예상과 달리 단 한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은채 갈리폴리 반도를 빠져나오는데 성공했으니, 아이러니
하게도 전쟁사에 손꼽히는 최악의 삽질작전 이후 전쟁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성공적인 철수작전이 진행된 것입니다.
연합군은 6개월간 전투에서 패배 했는데 오스만 투르크와 영국등 연합군 양측은 각 25만명씩
50만에달하는 사망자 를 냈으니..... 영국 해군장관으로 상륙작전을 입안 했던
처칠의 패배이며 호주와 뉴질랜드는 이날을 앤잭데이 Anzac Day 라고 해서 현충일로 기립니다.
겔리볼루에서 이스탄불 방향인 에제아밧 Eceabat 으로 가는 길은 터키군의 6.25 참전으로
한국 영웅도로 Kore Kahraman lare Caddesi 라는 이름이 붙어있으며
겔리볼루 선착장 Iskele 에서 바다를 건너서 아시아측에 차낙칼레로 가는 페리가 있습니다.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구국의 전투이니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 트란스요르단 등의 해외 영토를 모두
잃어버렸지만 갈리폴리에서 승리함으로써 본토까지 점령되는 것은 막을수 있었습니다.
결국 오스만 국내는 별다른 피해 없이 온존될 수 있었고, 전후에 벌어진 그리스 왕국과의 전쟁에서 배후지로
활약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스만은 러시아와 싸운 캅카스 전선에서는 조금 밀리면서 승패를 주고
받았지만 갈리폴리 전투 이후인 1916년 비틀리스 전투에서 무스타파 케말의 승리로
러시아군의 본토 진격이 저지되었고, 중동 전선에서도 1916년까지는 오스만이 승리한 전투도 꽤 많습니다.
이 전투로 전쟁 영웅이 된 케말 파샤는 장군으로 진급했으며, 이후 군에서 그를 따르는
장교들과 세력이 많아지면서 서서히 권력을 가지게 되며, 그뒤 패전으로
몰락한 오스만 제국의 혁명을 이끌어 왕조를 엎어버리고 귀족 정치와 부패를 척결합니다.
윈스턴 처칠에게는 이 전투에서 보여준 꼴사나운 짓으로 인해 쿠르드족에게 최루가스를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과 같이 정치 인생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암흑기이자 흑역사로 영원히 남게 되었으니...
"처칠의 오만함이 보기 싫다면 '갈리폴리 전투에서 넌 뭐했냐' 고 말해라. 대꾸도 못한다" 며 비웃었답니다.
처칠은 이 말만 들으면 크게 화를 냈고, 친구들도 그의 앞에서 이 전투에 관한 얘기를 거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해군상 처칠은 책임을 해군참모총장 존 피셔 제독에게 떠넘기고 해임했으나 결국 해군장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예비역 육군 중령 신분에 따라 소집되어 프랑스 참호전에 투입되었다가 간신히 생환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