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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날이네요. 우리는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태어난 사람들이지만 전쟁이 중단된 직후에 국민학교를 다니느라 알게 모르게 전쟁의 후유증을 겪었지요. 물론 부모세대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참상을 알고 배우고 지나왔지요. 상처를 자꾸 파내는 앵벌이 같은 행동은 아니지만 잊지 않고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은 상처를 잘 마무리 하면서 후세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깨우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 여생(餘生)
58살에 귀국한 황제는 객지에서의 강행군 탓인지 성격상의 단점을 많이 보이는 쪽으로 변했
다. 62살에 죽을 때까지 병마에 시달렸고 에너지가 졸아드는 현상을 보였다. 그렇게 강건했던
사람이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모한 것일까? 해야 할 업적을 마쳤다는 自評으로 사람도 변했다
. 남에게 인기를 끌거나 뭔가를 배려 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결국 “티볼리(Tivoli)-로마 시
동쪽 30km”에 지은 별장에 은거했다. (※ Tivoli는 우리나라 인기 차종의 이름인데)
● 후계자 문제
귀국 후 2년 AD136년 후계자 선정에 들어갔다. 자식은 없었다. 이런 경우 후계 자 문제는
피비린내를 풍길 수 있다. 적절한 인물을(아일리우스) 택해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공표했으나
1년간 준비 중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를 황제 묘에 묻어줄 만큼의 대우는 해주었으나 ‘아우
구스 투스’ 황제 묘는 만원이라 새로 지었다. 로마 市의 테베레 강변에 있는데 가톨릭이 사용
할 목적으로 나중에 이름을 바꿨다. 지금의 이름은 “카스텔 산탄젤로 (Castel Sant’Angelo-
천사의 성)”이며 유명한 관광명소다. 바로 앞의 다리도 유명한 건축물이다.
마지막 5賢帝가 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본명: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가 영특해서
눈여겨보았으나 16살 밖에 안 되었다. AD138년 1월 62살의 황제는 쓸만한 원로원 의원에다
내각 member인 52살의 ‘안토니누스’를 불러 양자를 제안했다. 10살 차이에도 양자는 문제가
없었나 보다. 조건은 ‘아우렐리우스’와 폐병으로 죽은 ‘아일리우스’의 아들을 양자로 삼는 것이
었다. 이를 수락하고 절차를 마쳤다.
● 죽음
기력이 다해가는 늙은이는 곡기를 끊고 죽는 것이 로마 사회의 명예였다. 황제는 단검으로
자살할 힘도 없었다. 짜증을 내고 원로원을 괴롭히고 하는 통에 ‘안토니누스’가 바닷가 별장에
모셨다. 얼마 안 있어서 AD138년 7월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63살이었다. 재위 21년. 원로
원은 말년에 공포스럽게 군 죽은 황제의 신격화를 거부했다. 자칫하면 기록말살형도 나올 수
있었다. 후임 황제의 온건한 태도와 요구로 간신히 신격화 되었다. 업적이 통째로 사라지는
위험한 상황이 올 뻔했다.
▶ 로마제국을 평가하는 마음에 드는 연설이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죽은 지 5년 뒤
AD143년 4월 21일 로마 건국기념제가 열렸다. 여기에 소아시아 태생의 철학자 ‘아일리우스
아리스테데스’가 초빙되어 강연한 것이다.
” 나 같은 그리스 人도 어느 민족도 신분증과 안전에 대한 걱정 없이 가고 싶은 곳은 다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로마 시민이 아니라도 된다. ‘호메로스’가 노래한 “地上은 萬人의 것이다.
”를 실현했다. 로마 인은 모든 땅을 측량하고 기록하고 왕래할 수 있게 정비했다. 방위체제도
확립하고 모든 인종이 함께 살 수 있는 법률도 정비했다. 로마인 당신들은 누구든 질서있고
안정된 사회에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가르쳐 주었다.” 물론 로마圈의 세상에 해당되
는 말이다.
경험 많은 정치가나 사회학자도 아닌 26살의 젊은이가 이런 말을 한 것은 다음 세대 주자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고 로마제국은 중소기업을 괴롭히는 현세의 재벌과 비슷한 체제로 자주
묘사되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은 그럴 자격 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조상과 현대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많이 다른 것 같다 는 생각이 든다.
1,800년 뒤의 전문가들은 이렇게 평한다. “속주민들이 대표를 로마로 보내 신청한 것이 아니
라 ‘하드리아누스’황제가 친히 속주로 가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이 황제가 죽은 뒤 원로원에서 탄핵 비슷한 것을 하려고 했다는 얘기를 들으며 참 어리석은
짓을 할 뻔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 보면 현세의 어느 나라 의회든지 당리 당략에 따라
합리적 판단을 제쳐두고 이해득실 에 따라 행동하는 정치인들의 논리와 같음을 보게 된다. 그
와 같은 황제는 없었기 때문이다. 좋은 남편은 절대 아니었지만 참으로 부지런하고 열정이
있는 황제라고 생각한다.
제 3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재위 AD138년 7월 10일~AD161년 3월 7일)
“재수가 좋은 과부는 넘어져도 가지 밭에 넘어진다.”는 다소 야하지만 실감가는 농담이 있다.
이 황제는 가장 “안정되고” “행복한 시기”에 황제의 자리를 넘겨 받았다. 한 마디로 새로운
일을 벌여야 할 이유가 없는 시기에 황제가 된 것 이다. 열불나게 뛰어다닌 ‘트라야누스’나
‘하드리아누스’ 황제들처럼 일을 만들거나 해결할 필요가 없었다. 눈에 띄는 흥미거리가 없는
연예인을 연예부 기자들이 쑤셔도 나올 게 없는 경우처럼 당시나 후세의 史家들에게는 참
재미없는 황제다. 요즘 TV를 보면 오락 프로그램에서 “방송 분량이 안 나온다”고 찧고 까불면
서 요란을 떠는 걸 보는데 이 황제가 방송분량이 안 나오는 그런 황제다.
AD96년 ‘네르바’ 황제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AD180년)까지 5명을 “5賢帝” 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황금시대”라고 불렀다. 5명 중 가장 유명한 이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
스’, ‘아우렐리우스’지만 “黃金”자를 붙이는 황제들은 ‘아우렐리우스’를 빼고 ‘피우스’를 넣는다.
‘피우스’는 재위기간도 23년으로 긴 편이다. ‘마키아벨리’가 말한 지도자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은 “역량”, “행운”, “시대적 필요성”인데 ‘피우스’가 여기에 맞았다는 것이다. 日本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국회의원 선거 때 “나서고 싶어하는 사람”보다 “내세우고 싶은 사람”
을 뽑자는 말이다. ‘피우스’는 후자의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다. ‘피우스’는 같은 속주 출신이라
도 전임 황제와 달리 남 프랑스의 “님”이라는 로마화 한 자치도시의 갈리아人 집안 출신이다.
갈리아 사람도 황제가 되다니.. 로마인들은 참 대단하다. 원로원의 귀족들이 그렇게 권위를
세워도 이런 황제를 받아주는 것을 보면 말이다.
상대적으로 그리스 사람들은 턱도 없는 일이다. 〔※ 우리는 어떤가? 통치자와 남자 양반들이
지지리도 못나서 나라가 박살이 나고 강제로 끌려 갔다 온 자기네 여자들을 오랑캐하고 섞였
다고 해서 “화냥년=환향녀”라고 부르며 박대하던 옹졸한 선비정신(유교정신=성리학 정신) 말
이다. 하기야 그때 그 자리에 누가 있은들 별 수가 있었겠는가? 유교를 통치철학으로 택한
선조들의 잘못이지.〕
‘피우스’는 AD86년 라누비오에서 태어났다. 로마 시에서 가깝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집정관
출신이라 유복했다.
- AD111년 회계감사관 당선
- AD116년 원로원 입성 및 법무관에 선출
- AD120년 집정관에 선출 –내각 활동
- 49~50세 : 아시아 속주 총독
이 황제는 戰線勤務 경력은 없다. 행정 경력의 평가는 우수했다. 先帝들이 워낙 잘 다져 놓아
군사적 역량이 없어도 되는 “태평성대”이고 물결을 잘 타고 넘어가 “현제(賢帝)”의 대열에 들
수 있었다. 이 황제는 근검 절약했다. 심지어 “황제 즉위 하사금”도 황제 금고가 아닌 개인 돈
으로 지불했다고 하는데 그 대상이 368,000명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심한 과로와 혹사(酷使)
를 하지 않았다. 혹사는 죽음이다. 그래서 75살까지 잘 살았다.
● 인격자
‘하드리아누스’가 독단적 통치자라면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뭐든지 묻고 협의하는 타입이었
다. 그는 키도 크고 상당한 미남이고 기품도 있으며 온화한 품성의 소유자였다. 한 마디로
온화하고 온건한 해결방식, 균형감각이 훌륭하며 허영심이 없는 사람이다. 중간다리를 정확
하게 잘 골랐다.
그가 벌인 사업은 브리타니아에 “하드리아누스 성벽” 北方120km쯤에 가로로 60km의 “안토
니누스 성벽”을 쌓은 일이다. (지금의 영국 글라스고 근처다.) 그가 당한 어려움은 천재지변이
었다. 로마의 큰 불과 속주의 지진과 화재 정도였다. 사후 대책은 ① 황제의 의연금 ② 가까운
군단기지의 병력이 기반시설복구 ③ 속주세 면제 등이다. 헐렁한 통치자는 아니었다.
선대 황제들이 워낙 배우들처럼 튀는 사람이 많다 보니 이 사람이 미지근하게 보인 것은 아닐까?
공무원 숫자도 단속했고 국가 재정도 항상 조정하고 공복다운 공복 노릇을 했다. 심지어 등극
3년만에 황후 ‘파우스티나’가 죽자(복도 없네) 아내의 유산에 자신의 재산을 보태서 “파우스티
나 재단”을 설립했다. 불우한 소년들의 결혼자금을 지원하는 재단이었다. 그는 ‘피우스’가 뜻
하는 “인격자”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이 사람은 “5현제의 마지막 황제”가 된다. 스토아 철학자로 치세나 업적으로 보면 ‘피우스’
황제보다 못하지만 그가 지은 “명상록(瞑想錄)” 때문에 훨씬 유명하다. 이 책은 로마 통치자가
쓴 책으로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戰記”와 “內戰記” 다음으로 나온 책이다. 여러 황제나 ‘술라’
같은 사람들이 전쟁기나 회고록을 썼다고는 하지만 제국 말기의 혼란기와 기독교 시대에
사라져 버렸다.
그는 자기를 이끌어준 할아버지 이하 가족과 양아버지 ‘피우스’ 등을 많이 언급 했으나 자신을
밀어준 ‘하드리아누스’황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평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에 대한 얘기를 보자. “온건하고 심사숙고하고 관대하고 건전하고 남의 말을 들을 줄 알고
결단력도 있고 근면하고 공익을 위하는 사람이다. (좋은 말은 다 썼다. 독단적인 ‘하드리아누스’ 가
싫었을 수도 있다.) 덧붙여 미소년에 대한 정욕도 없다고 했다. ‘하드리아누스’가 미소년
을 워낙 애지 중지했기 때문에 나온 말 같다. 쉽게 말해 “자기 꽈가 아니다.”는 얘기다.
너무 길어서 옮기지는 않았지만 모든 면에서 공평무사(公平無私), 공명정대 (公明正大), 준법
정신(遵法精神), 근검절약(勤儉節約) 등 ‘피우스’에게는 흠잡을 데가 없다. 선대의 황제들이
궂은 일은 다하고 설거지까지 다 마친 “태평성대 (太平聖代)”에 황제가 되었다고는 하나 워낙
품성이 좋아 ‘아우렐리우스’의 극찬을 받은 이 황제는 AD161년 별장에서 갑자기 고열이 나면
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75세였다. 모든 원로원, 시민, 속주민들이 진정으로 슬퍼했다. 역시 파란만장하고 “튀는 별난
사람”은 인기는 좋아도 ‘피우스(자비롭다는 뜻)’ 같은 따뜻한 사람이 더 좋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런 사람만 있다면 과연 이런 大 帝國이 제대로 오랫동안 견뎌낼 수 있을까? (※ 직장에 다닐
때 상사가 이런 두 유형이 있었을 때 나 자신 어떤 사람이 좋은 지 분간하기 어렵다. 출세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이기 보다는 사업적인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이 시대는 아마 전 로마제국을 통틀어도 가장 평화롭고 풍요롭고 민주적(인종, 법치체계 등)
이며 살만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제국 전체를 하나의 가족처럼 통치하는 것을 이상(理想)
으로 삼았다고 판단되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자비로운 안토니누스)’ 황제는 취임 직후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수락하고 아버지같이 통치했다. 著者의 표현대로 하면 ‘트라야누스’ 와
‘하드리아누스’ 황제들은 “통치자” 였고 ‘피우스’는 “아버지” 역할이었다.
첫댓글 이사하며 많은 책을 버렸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아직도 내 서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큰 외손자의 이름을 Marcus로 짓겠다고 했을 때도 적극 찬성했지. 훌륭한 황제였는데 후계자인 무능력하고 불초한 아들 콤모두스란 놈이 로마제국 쇠락의 단초를 제공했다더군.
뒤에 코모두스에 관한 것은 자세히 나옴. 영화처럼 아버지를 죽인 놈은 아니지만 무능하고 못나서 나라를 패대기 친 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