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지마 전투 1945년의 2월 19일 시작한 이오지마 전투는 무척이나 격렬한 전투였다
오늘날 뒤돌아보면 양군의 전투는 다른의미가 숨겨져있다
이오지마에서 온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군은 일본과의 최후결전을 앞두고 그 곤란성을 여론에 호소할 필요가 있었고 만약 이오지마와 오키나와가
빠르게 항복했더라면 원폭투하가 없엇을것이고 빠르게 안정을 찾았으리라고 본다
일본은 일본대본영이 육군파를 소멸시키고 해군파가 득세하는 기회로 보았고 무조건항복을 일본국민들에게
받아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일본의 항복을 뒤로하기전에 일본의 생존전투의 어려움과 일본국민들의 생존스트레스를 무척이나 올리는 작전이었고
일본군 2만 9000명중에 수비병력은 대다수 옥쇄해서 전사 사망률은 96%에 이르는 장렬한 격전지었고
미군역시 전사가 7000명에 이른다
이상한점은 미군은 독가스를 사용하지않았다 하지만 일본군의 몰살을 보면 수상한점은 두가지이다
격전지 벙커전에서는 독가스를 사용하는것은 효율적이고 독가스는 전체사망자의 줄이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화염방사기 등은 효과적이지않는 무기였고 최루가스나 연기등으로 지하방커에 숨은 일본군을 몰아내는것은
가능했으리라본다
이오지마 지휘관은 일본육군 쿠리바야시 중장이었고 애초에 육군파 인 그는 대미개전에 비판적인 인물이었다
이오지마 보병 제 145연대 일본인들은 대부분 전사했고 145연대의 고향은은 가고시마였고 정예육군보병이었다
이오지마가 항복한후에 원자폭탄을 싫은 인디애나 폴리스호가 원자폭탄을 싫고 티니안에 상륙하였다고
전해지고 원폭을 싫은 에놀라게이가 히로시마에 도달한다는 시나리오는 시위졋고
원폭을 내린 후 인디애니 폴리스호는 일본잠수함부대에 걸려서 침몰하고만다
원자폭탄이 완성되었다고 신호를 해야되는데 그 기폭실험장이 이오지마 였다
미국의 이오지마의 깃발 과 알링턴국립묘지 근처에 해병대전쟁기념관이 왜있다구 생각을 하는가?
단순하다 정치적인 원자폭탄 실험 성공의 기념이고 미국해병대 장군 죽음의 기념물이기때문이지
이오지마 기념관과 알링턴 국립묘지가 함계있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일본이오지마는 전후 70년에 넘는 시간이지났지만 폐쇠구역이며 아무나 상륙할수없는 자위대의 기지이다
결과론적으로 이오지마 옥쇄전투는 2차대전 태평양전중에서의 최대전투중에 하나이고 결과적으로 이오지마에 학을 뗀 미군이
원자폭탄투하라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켯고 명분을 내준셈이다 이오지마섬은 일본육군파의 괴멸을 이야기한다
이조미아 전투 성조기 계양이 가지는 의미는 대단하다
미 성조기 계양사진을 둘러싼 논란은 처음부터 있었따 수리바치산 정상 탈환전을 지휘한 해병대대장은 역사 창조를 위해서
처음계양한 것보다 훨씬더큰 성조기를 상률함에 가져와서 다시 찍었다는 내용과 함꼐
가장유명한 전쟁사진은 에초부터 조작 실제로 연촐된 셈이다
미군은 오키나와전을 마무리로 일본육군파를 괴멸하는데 성공하고 오키나와에 미군기지를 내세워서 일본육군세력을 감시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