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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nel 12, The Good Samaritan Window, Chartres Cathedral. (사진: 위키피디아) |
강도보다 강도 만난 이웃을 보라
대구경북 지역에서 코로나19 감염이 집단 발생하면서 병상이 모자라 쩔쩔매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수련원이나 기도원 등 환자 수용이 가능한 건물이 있는 교회들은 앞장서서 건물을 제공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교회당까지도 환자 수용시설로 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성금 모금과 자원봉사에도 적극 나서야 합니다. 신자 개개인의 자원봉사만이 아니라 교회가 조직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모든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질 때 장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심 산과 예루살렘 중 어느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되느냐는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신령과 진정〕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요 4:21, 23)
또 예수께서는 화목하는 일을 예배의 전제 조건 즉, 우선하는 것으로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 (마 5:23-24)
이웃들의 원망을 들으면서 교회당 예배를 고집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건 또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는 일인데 위험을 무릅쓰는 모든 일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사랑과 생명 살림을 위한 위험 감수일 때만 복음적 가치가 있습니다.
유럽에서 인구의 3분의 1이 죽어 나간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병마를 피해 마을을 떠났지만 오로지 예수님을 신실하게 믿은 사람들만이 마을에 남았습니다. 그들은 전염되어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환자를 돌보는 일에 자신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표상입니다. 우리도 재난의 때를 당하여 시시비비나 책임 소재를 논하기에 앞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먼저 도와야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원죄가 이끈 재앙
사스, 메르스, 코로나19 등 전염병은 10년 주기, 7년 주기… 점점 그 간격을 좁히면서 우리를 더 매섭게 위협할 것입니다. 인류가 이루어낸 첨단의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대처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 되어갑니다. 통제 불능의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전염병뿐이겠습니까? 우리의 탐욕으로 인해 파괴된 환경으로부터 오는 재앙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인류 문명의 발전은 항상 두 얼굴을 지닙니다. 한 면은 편리함과 안락함을 주지만, 다른 한 면은 그 대가로 빈곤과 재앙을 초래합니다. 기술 발전은 경제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에 따른 실업은 또 다른 사회문제가 되어 오히려 경제의 발목을 잡습니다. 사람이 할 일을 점점 기계가 하게 되니 실업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몰린 도시는 편리함도 많이 있지만 전염병이나 천재지변에 취약합니다. 특히 세균전, 화학전, 자살폭탄 공격 등 여러 형태의 테러에 무방비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인간관계를 최소화하는 아파트의 구조와 삶의 방식은 정서불안과 각종 정신질환자를 양산합니다.
인간의 탐욕은 아프리카 정글 깊은 곳까지 도로를 내 온갖 희귀 야생동물을 포획하여 박제하거나 잡아먹기까지 합니다. 그 결과 인간 사회와 안전거리를 충분히 둠으로써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던 세균과 바이러스가 이제는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코로나19와 같은 예상할 수 없는 전염병에 걸리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산업 발전에 따른 대기오염과 온난화는 숨조차 쉬기 어려운 지구를 만들었습니다.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 곳곳의 육지가 물에 잠기는가 하면 농경지가 사막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는 농작물과 인공사료로 사육되는 가축 등도 경제 시스템 안에서 탐욕의 수단이 됩니다. 그러니 몸에 좋지 않은 먹거리가 대부분입니다.
70억이 넘는 세계 인구가 먹을 식량은 충분하지만, 탐욕의 경제 시스템에 막혀서 지구 인구 3분의 1이 심각한 기아에 허덕이며 죽어갑니다. 발전과 탐욕이 멈출 수 없는 톱니바퀴를 이루어 당면한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며, 오히려 예기치 못한 재앙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절제되지 못하고 무책임한 발전 지향이 곧 죄임을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이 죄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원죄와 맥이 닿아 있습니다.
원수·가라지도 함께 오를 피난 방주
자기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까지 탐하므로 인류는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는 탐욕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시면서 당신의 출현이 하나님 나라의 출현임을 역설하셨습니다. 인류가 타락하게 된 원죄를 회개하고 참사람이 되어라, 여기에 참사람의 원형인 내가 너희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발전은 아편 같은 안락함을 안겨주면서 인류를 점점 더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변모됨으로써 적그리스도의 통치가 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원래의 사람으로 돌아갈 때 자연도 에덴의 모습으로 자연다워질 것입니다. “사람과 자연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관계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남을 고대하는 자연(롬 8:19)이 걸어오는 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들이 허락하는 것과 그들이 거절하는 것에 대해서도 겸손하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달라이라마)
절약과 책임 있는 소비를 통해 자연을 아끼고 보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년을 만들 때 자연의 안식에 대해서도 말씀하신 점을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개발과 정복이 능력이 아니라 서로 보호하고 함께 화평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안식이요 질서 회복의 근간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질서의 반대 또는 대안을 그냥 질서라 하지 않고 화평이라고 한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요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 진정한 질서는 통제가 아니라 화평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류와 모든 피조물 사이에 화평케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고후 5:18-19)
우리가 정말 회개해야 하는 죄는 하나님처럼 되려 한 원죄임을 깊이 실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모습으로 우리의 삶과 모든 것을 되돌려야 합니다. 이제 곧 본격적인 재앙의 시대가 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제 곧 종말의 때가 와서 고난당하는 시기가 온다고 한 것입니다.(딤후 3:1-5) 지금이 그때임이 분명합니다. 성경은 그때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매매가 금지되는 시대라고 합니다.(계 13:16-17) 우리가 성경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이같은 재앙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발전 지향의 원죄를 회개하고 매매가 필요 없는 피난 방주를 예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때에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대재앙들에 대비한다는 의미에서 꼭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 오두막공동체에서는 이때를 대비하는 ‘생태자립마을 복지공동체’를 설계하고 꾸려나가는 중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탈(脫)바벨론 하지 않으면 모두가 같은 재앙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계 18:4) 우리는 충분히 대비하기 위해 속히 결단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에스겔이 말하는 ‘소돔이 망한 진짜 이유’에 대한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으려 합니다. 에스겔은 오늘날 우리와 처지가 다르지 않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경고했습니다.
네 형은 그 딸들과 함께 네 왼쪽에 거주하는 사마리아요 네 아우는 그 딸들과 함께 네 오른쪽에 거주하는 소돔이라 네가 그들의 행위대로만 행하지 아니하며 그 가증한 대로만 행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적게 여겨서 네 모든 행위가 그보다 더욱 부패하였도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우 소돔 곧 그와 그의 딸들은 너와 네 딸들의 행위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겔 16:46-50)
스스로 잘 믿는다고 자긍하면서도 중요하고 세세한 주님의 말씀 실천은 경히 여기며, 교리에 대한 신봉만으로 구원에 이를 줄 믿고 여유작작하며 태평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당할 심판적 재난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재난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강도보다 ‘강도 만난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먼저 그리고 최선을 다해 베푸는 일입니다. 또 강도들이 우글대는 바벨론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원래적 삶의 장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요 피난 방주입니다. 나만을 위한 피난 방주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웃과 자연 모두를 아우르는 방주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거기에는 원수와 가라지도 함께 탈 자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판단과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믿음으로 사랑의 길만 갈 때 우리는 원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이렇게 자유케 된 자들을 하나님은 구원하시고자 찾고 계십니다.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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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만을 위한 피난 방주만, 저는 지금까지 구하고 구하고있었다는 사실과 이제는 우리모두를 아우르는 방주를 만들때 나도살고 이웃도 살고 자연도 살릴수 있다는것을 이제는 알게되었고, 나만을위한 피난 방주만을 만드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지않기위해 이제는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