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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민주주의 확충
“타인이 자신을 대표하도록 떠맡긴 인민은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다.”
“언제나 스스로 잘 다스리는 인민은 결코 지배당하지 않는다.”
Jean-Jacques Rousseau
“나는 인민 이외에 사회 내 궁극적 권력의 안전한 저장고를 알지 못한다. 만일 인민이 온전한 재량권을 가지고 자치할 만큼 충분히 개명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그 치유책은 그들에게서 재량권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Tomas Jefferson
“빈약한 민주주의(대의민주주의)에서 유권자들은 보통 헌정위기와 정부배임 때만 행동한다. 평소 이들은 다스리는 일을 태평하게 타인에게 떠맡기고 자신들의 에너지를 온통 사적 영역 에 쓰려고 아껴둔다.” Benjamin R. Barber
Ⅰ. 대의민주주의 위기와 엘리트 카르텔
극심한 정치인불신은 1987년 이후 총선 때마다 국회의원의 과반수 교체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국회의원의 자질과 도덕성이 향상되었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 깊어지는 국회와 국회의원에 대한 불신은 정치에 대한 혐오감과 냉소주의를 낳고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
2014년 4월 304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참사의 배경에는 선주의 탐욕과 비윤리적 경영을 조장하고 선사의 로비에 놀아난 정관마피아가 자리하고 있음이 들어났다. 부패연구자인 Michael Johnston(2005)은 한국을 정관마피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엘리트카르텔 부패국가”로 분류했다.1)
세월호참사로 여론의 압력에 2015년 제정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은 세월호참사의 구조적 원인으로 지적된 공직자의 이해충돌 직무수행을 막는 핵심 규정을 삭제했다. 세월 호참사라는 국가적 비극도 온전한 부패방지법의 제정을 담보할 수 없었다.
1) Johnston(2005)은 부패유형을 독재형(중국과 인도네시아), 족벌형(러시아와 필리핀), 엘리트카르텔형(한국 과 이탈리아), 시장로비형(미국과 일본)으로 구분한다.
그는 한국에서 정치인, 청와대, 관료, 군인, 기업가, 언론, 동향(同鄕), 동창 엘리트들이 뭉쳐 권력기반을 제공하고 부패를 통해 이익을 챙긴다고 진단했다.
정치인카르텔은 대선공약을 거짓 약속으로 만들었다.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아 2012년 대선에서 채택된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공약은 끝내 여당의 기득권 고수와 제1야당의 포기 번복으로 파기되고 말았다.
정치인카르텔은 망국병으로 일컬어지는 지역주의 정치를 극복하고 승자독식 다수결민주주의 병폐를 예방하는데 기여할 국회의원 비례대표선거제의 도입을 번번이 무산시켰다. 마침내 2015년 2월 중앙선거 관리위원회가 앞장서 대안을 제시했고 제1야당이 제3의 대안을 내놓았지만 기존 선거제도가 보장하는 기득권 상실을 우려한 정치권의 반발과 냉소적 반응으로 또 다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사실 권력을 시민 곁으로 이동시키는 지방분권개혁이 막대한 인력과 예산 투여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정체와 후퇴를 면치 못한 까닭은 중앙집권체제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정관엘리트의 저항과 반격 때문이다 (최창수, 2014: 53-74; 유재원, 2015: 249-272).
정관엘리트는 중앙집권적 지방자치체제 개편 시 지방이양일괄법안의 접수거부, 자치경찰법안의 심의거부, 연간 2조6천억 원에 달하는 세수감소를 초래한 취득세율 50%의 일방적 감축 등을 통해 지방분권개혁을 지연시키고 방해해왔다. 국민의 공분을 야기해온 국회의원 특권도 정치인카르텔의 폐단이다.
국회의원 특권은 무려 200건이 넘는다고 한다.
국회의원 특권에는 불체포 면책특권을 비롯해 초선 의원에게도 지급되는 평생연금 월 120 만원, 의원실 주유비 연 5천만 원, 차량유지비, 교통경비 450여만 원, 연2회 이상 해외시찰경비, 공항 VIP주차장과 귀빈실 이용, KTX와 선박 공짜탑승, 항공기 비즈니스좌석 등의 특권이 포함된다.
게다가 국회의원마다 후원회를 조직해 매년 1억5천만 원(선거가 실시되는 해에는 3억 원)을 모금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국회의원 특권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국회의원이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기 전에는 누구 도 국회의원 특권에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장은 먼저 정치인 카르텔을 막는 근본적 방안으로서 직접민주제의 논거와 숙의과정을 살펴본다.
둘 째, 직접민주제의 효과에 관한 경험적 연구결과를 일별한 후 직접민주주의 반대론자들의 주장과 그에 대한 반론을 검토한다.
셋째, 우리나라 직접민주제의 실태를 점검하고, 직접민주제를 가장 진지하고 광범위 하게 오랜 세월 운용해온 스위스와 미국의 경험을 토대로 직접민주제 설계지침을 정리한다.
끝으로 이 설계지침에 비추어 2017년 4월 국회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위원회가 제시한 개헌안(이하 ‘국회개헌특위 시안’이라 칭함)에 포함된 직접민주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모색한다.
Ⅱ. 직접민주제의 논거와 숙의과정 1. 정치인의 지대추구행위와 카르텔 인간은 누구나 정치제도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한다. 오늘날 정치인이 불신의 대상으로 지탄받지만, 정치인을 보통 사람보다 더 사악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정치인도 보통사람처럼 자기이익 증진에 관심을 갖는 존재일 뿐이다. 정치인은 물질적 이익뿐만 아니라 존경과 특권을 더 많이 누리고 싶어 하는 보통사람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정치에 투신하는 사람은 보통사람보다 이런 욕망이 좀 더 강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은 종종 세 가지 방식으로 공익에 반하는 자기이익을 추구한다.
(1) 정치인은 자신의 이념이나 불충분한 정보 또는 개인적 이익을 위해 시민의 선호와 동떨어진 결정 을 내릴 수 있다. 이를테면 정치인은 흔히 시장가격을 활용하기보다 시장에 직접 개입하기를 더 좋아한 다. 일반적으로 규제가 정치인에게 더 큰 지대(地代)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2) 정치인은 자신의 보수를 올리고 연금과 해외연수경비, 교통비 등 부가급여를 증액하며 보좌관을 증원하고 정당보조금을 늘리는 데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행정공무원의 특권 남용을 의회가 막고, 지방의원의 보수는 주민대표 등으로 구성된 의정비심의회에서 정한다. 그러나 현행 헌법과 법률은 국회의원이 자신의 보수를 비롯한 모든 특권을 스스로 정하도록 방치하고 있다.
직접민주제가 작동하는 스위스에서는 다르다. 1992년 스위스국민은 연방의회의 의원세비 인상결정을 국민투표에 부쳐 72.4%의 반대 로 무효화시켰다.
이처럼 국민의 견제를 받는 스위스 정치인은 국민의 신망과 존경으로 보상받는다. 스 위스 에서는 종종 집회에 참석한 정치인이 기립박수를 받는다. 2015년 12월 취리히에서 만난 은퇴정치인 Hans Ulrich Stöckling씨는 젊은 시절부터 변호사로서의 고소득을 마다하고 장크트 갈렌 캔톤 의원과 행정위원(윤번제 지사)으로 봉사한 삶을 큰 보람과 행복으로 여긴다고 고백했다.
2016년 OECD 보고서는 스위스인의 정부신뢰도를 77%로 세계1위로 평가했다.
한국인의 정부신뢰도는 고작 28%로 OECD국가 평균 46%보다 무려 18%나 낮았다.
(3) 정치인은 반대급부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특혜를 주는 부패를 자행할 수 있다. 예컨대 세월호참사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 선박 폐기연한을 20년에서 30년으로 연장시킨 개정법안을 의결한 국회 해양수산위원은 선박회사의 로비자금으로 해외유람을 다녀온 것으로 밝혀졌다.
국회는 여론에 떠밀려 부패방지법을 제정하면서도 위헌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50여 년 전 미국 연방의회가 통과시킨 알맹이 규정을 삭제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정치인들은 가능하다면 일반시민의 이익에 반하는 카르텔을 형성하여 자신의 지대추구기회를 보호하고 확장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신의 지대추구행위가 유권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견제되는 경우 개별 정치인은 카르텔에서 벗어나 행동하려 한다.
예컨대 여론과 시민사회의 요구를 수용한 일부 국회의원들은 기초선거정당공천제 폐지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자당의 대선공약을 파기하는 부담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장 · 군수 · 구청장과 지방의원 후보공천권을 고수하려는 절대다수 국회의원의 지대추구 카르텔을 깨는 데 역부족이었다.
이들의 도전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것처럼 무모했다. 정치인카르 텔에 도전하는 정치인은 정치인카르텔을 관리하는 정당지도부의 가혹한 반격을 각오해야 한다. 정당지도 부는 해당 정치인을 영향력 있는 위원회에 배속하지 않거나 심지어 공천에서 탈락시켜 의원직을 박탈한다.
2. 정치인카르텔을 제재하는 기존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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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헌법질서 설계자들은 정치인카르텔의 지대추구행위를 제재하는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왔다. 오늘날 정치인카르텔의 지대추구행위를 저지하기 위해 널리 활용되는 민주적 제도는 세 가지다.
(1) 정치인의 지대추구행위, 특히 부패를 예방하기 위해 강력한 법률을 제정할 수 있다. 부패방지법은 핵심 내용이 규정되고, 쉽게 회피할 수 없으며, 철저히 집행될 경우에만 효과가 있다. 그러나 최근 여론 에 떠려 제정된 부패방지법에는 알맹이 규정이 빠졌다. 게다가 정치인 부패는 좀처럼 발각되지 않으며, 빙산의 일각처럼 드러난 부패에 대한 법집행조차 지나치게 관대하게 처벌받는다. 정치인이 스스로 정한 특권은 매우 다양하고 미묘해서 감지하기조차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정치인카르텔을 규제하는 법률은 시민선호와 동떨어진 정치인의 결정을 예방하거나 교정하지 못한다.
(2) 정치인카르텔을 제재하기 위해 감사기관이나 특별법원을 설치한다. 모든 민주국가에는 정치인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감사기관과 법원이 있다. 그러나 (준)사법적 제재는 사후적으로 매우 한정된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다. 국회가 대법원 판사, 헌법재판소 재판관 추천권과 임명동의권을 행사하고, 감사원장 과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그리고 현재 검찰개혁의 대안으로 고려되는 공직자비리수사처의 장 등의 인사청문권과 임명동의권을 행사하는 경우에 (준)사법적 제재의 효과는 더욱 제한된다.
사실 사법부가 정치인들과 대척을 이루며 정치인카르텔을 견제할 유인은 희박하다. 게다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무전유죄 유전무죄,’ ‘전관예우’의 사법계 악습은 사법부로부터 정치인카르텔을 엄단할 도덕적 정당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더욱이 준법에 초점을 맞추는 법원의 판결은 정치인의 결정과 시민의 선호 사이의 간극을 종 종 더 벌려놓는다(Frey & Stuzer, 2006: 48).
(3) 정치인카르텔에 재갈을 물리는 제도로서 권력분립제와 양원제 및 정당경쟁이 활용된다. 권력분립제와 양원제는 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예방하고 권력의 상호 견제를 유도한다. 그러나 권력분립제와 양원제는 권력기관 간 타협과 거래관계 형성으로 정치인카르텔 견제제도로서 한계를 노정한다.
정당 간 경쟁 촉진도 정치인카르텔을 저지한다. 특히 정치체제에 신생 정당과 정치인의 진입보장은 기성 정당들과 정 치인들을 시민선호에 더 민감하게 부응하고 특권과 부패에 더 조심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다수대표제로 특권을 누리는 양대 정당은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을 비례시키는 국회의원 비례대표제 도입에 반대함으로 써 소수정당의 부상과 신생정당의 진입을 가로막아왔다. 게다가 정당경쟁의 효과는 단기적이다. 이를테면 진보적 정당과 정치인이 제도권에 진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과거의 비판적 태도를 바꾸어 특권을 누리는 기존 정치계급에 합류하기 일쑤다.
사실 정당경쟁의 근원적 한계는 집권 여당의 실정이 야당의 차기 집권에 유리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야당은 심지어 여당의 실정을 반기고 심지어 촉진시키기도 한다. 그 폐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다. 이런 폐단은 극단적 승자독식 다수결민주제를 채택한 한국정치에서 더욱 심각하다. 그러므로 정치인카르텔에 대한 세 가지 전통적 제재방안, 즉 규제법률, 감사기관과 법원의 통제, 그리고 정당과 정치인 경쟁은 건강한 민주주의에 필요하지만 정치인의 지대추구행위를 막는 데 충분치 못하다.
3. 대의제의 한계를 교정․보완하는 직접민주제
정치인의 지대추구행위를 막는 가장 강력하고 근본적인 수단은 시민이 직접 입법자로서 대의제의 일탈 을 교정․보완하는 시민발안과 시민투표다.
시민발안은 시민에게 정치계급의 이익에 반하는 의안을 발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래서 시민 발안은 정부와 의회가 논의하고 싶지 않은 사안, 이른바 ‘무의사결정(non-decision making)’ 사안을 정 책의제로 부각시켜 정치계급의 기득권에 도전한다. 시민투표는 정치인카르텔 밖에 있는 시민에게 최종 결정권을 주는 직접민주제도로서 성공하는 경우 정 부와 의회가 결정한 사항을 무효화시키는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한다. 시민투표는 정치계급의 부당한 간섭이 없을 경우에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현행 헌법은 정치인카르텔에 도전하는 시민의 직접참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지방 수준에 마련된 직접민주제 역시 제도 미비로 정치계급의 지대추구행위를 적절히 견제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 들은 종종 국익과 공익의 증진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내세우며 시민의 직접통제를 피한다. 그러나 시민이 최종최고의 입법권을 행사하는 준직접민주제의 나라인 스위스는 다르다.
스위스에서는 정치인들이 원치 않고 때로 반대하는 사안일지라도 의무적으로 혹은 일부 시민의 서명으로 시민투표에 회부할 수 있다. 시민투표를 통해 정치인카르텔을 저지시킨 두 가지 스위스 사례를 살펴보자.
사례 1
19세기 스위스 연방하원은 다수제로 선출되었다. 최대 정당인 급진민주당은 이 선거제도의 덕으로 70 여 년 동안 제1당으로서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기존 선거제도의 혜택을 톡톡히 누린 급진민주당은 득표와 의석의 불비례로 인한 소수정당의 불이익을 해소하고 신생 정당의 의회진입을 허용하는 비례대표제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줄곧 반대했다.
그러나 1918년 소수당인 사회당의 주도로 총파업 이 단행된 후 비례대표제 도입을 요구하는 국민발안은 국민투표에 부쳐져 다수 국민과 다수 캔톤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비례대표제가 도입된 후 실시된 1919년 하원의원선거에서 급진민주당은 일거에 과거 의석의 40% 이상 잃었다. 이후로 스위스 연방정치는 1당 지배의 정치에서 몇 개의 정당이 권력을 분점 하는 정치로 전환되었다. 국민발안으로 제시된 비례대표선거제가 국민투표로 채택되어 스위스 정치체제 는 승자독식의 다수결민주주의에서 포용융화의 권력공유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중대한 전기를 맞았다.
사례 2
2차대전 전까지 긴급연방법률은 국민투표의 대상이 아니었다. 정부와 국회는 국민의 승인을 일일이 받을 필요 없이 정책을 펴기 위해 정작 긴급하지 않은 사안을 긴급연방법률 · 명령으로 종종 선언했다. 이에 따라 1946년 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긴급연방법률 · 명령의 남용을 막는 국민발안이 제기되었다. 국민발안 이 국민투표에 회부되자, 연방정부와 연방의회는 국민발안이 국익에 저촉되므로 반대해줄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다수의 투표자는 국민투표에서 국민발안에 찬성했다. 이후 정치인들은 연방법률을 제정할 때 시민이익을 더 신중히 고려하고 긴급연방법률 · 명령의 선언을 삼가게 되었다. 긴급연방법률 · 명령의 남발을 막는 국민발안이 국민투표로 확정된 이후 지난 70년 동안 긴급연방법률 2건과 헌법적 근거가 없는 긴급 연방명령 11건이 국민투표에 회부되었을 뿐이다.
스위스 직접민주제 역사에서 정치엘리트의 의견과 시민의 의견이 상충되는 경우가 많다. 스위스 정치인들은 카르텔 밖에서 발생하는 직접민주제의 활용 움직임을 가능한 한 빨리 차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직접민주제 활용의 움직임은 종종 각종 결사체나 카르텔의 주변부에 참여하는 소수정당 에서 나타난다.
정치인들은 이런 움직임을 포용하는 과정에서 시민이익을 고려하고 이기적 지대추구행위를 어느 정도 자제하게 된다. 결국 시민투표는 정치인카르텔이 작동할 가능성이 적은 바람직한 결과를 초래한다. 시민발안도 수많은 이슈를 패키지로 묶어 임기 동안 선출된 대표에게 일임하는 대의제와 달리 시민이 자신의 선호에 부응하는 이슈를 정책의제로 제기해 직접 결정함으로써 정치인카르텔의 지대추구 행위를 제어한다.
4. 숙의과정으로서의 직접민주제 시민투표를 단지 투표행위로만 이해하는 것은 단견이다. 시민투표의 진정한 가치는 투표 전 숙의과정 에서 확인된다. 헌정질서는 정책의제로 상정될 이슈가 무엇인지를 결정한다.
대의민주제에서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이 익에 부합되지 않는 이슈가 정책의제로 채택되는 것을 가로막는 데 익숙하다. 정책의제를 설정하는 권한 은 투표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적절히 설계된 시민투표제는 투표 전 참여자들이 규칙에 따라 서로 논점을 교환하도록 만드는 민주적 소통제도다.
시민투표는 Jürgen Habermas(1983, 2001)가 제시한 “이상적 담화과정(ideal discourse process)"의 다양한 조건을 충족시킨다.
토론의 적실성은 논의되는 이슈의 중요성에 따라 시민참여 수준 을 결정한다. 일부 시민투표는 격렬한 토론을 유발한다. 예컨대 스위스의 유럽경제지역(EEA) 가입여부 를 묻는 국민투표는 통상적인 40% 투표율의 두 배에 달하는 80%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반면 투표자에 게 덜 중요한 이슈를 다루는 국민투표의 토론 열기와 투표참여율은 25%까지 하락했다. 토론의 강도와 투표참여율의 편차는 다수결제도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투표역설’에 관한 연구결과를 무색케 한다.
시민투표의 기능 중 하나는 이슈에 대한 시민의 정보수준을 크게 향상시키는 것이다. 더욱이 이슈에 대한 논점의 교환은 투표자의 선호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투표자의 선호형성은 정치계급에 의해 영향 을 받지만 일방적으로 통제되는 것은 아니다. 투표자는 오직 결과만 고려하여 투표하지 않는다. 투표자는 참여과정 자체에서 만족감을 느낀다. 사회 심리학은 자기결정(self-determination)이 자율성・유능성・관계성 욕구를 충족시키는 유력한 내재동기 요인임을 확증해왔다(Ryan & Deci, 2002).
아울러 직접민주제는 시민의 소외감과 무관심을 완화할 뿐만 아니라 시민 상호간 공동이해와 합의에 기초한 사회계약을 강화한다.
그리고 시민투표의 의미는 어느 쪽이 다수의 지지를 얻는가에 그치지 않는다. 시민투표는 전체 시민이 특정 이슈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그 이슈와 관련된 소수가 어디에 어느 규모로 존재하는지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정당은 지지기반을 확장하기 위해 특정 이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Ⅲ. 직접민주제의 효과
1. 스위스와 미국의 직접민주제 스위스 직접참정의 뿌리는 13세기 말까지 소급될 수 있지만, 캔톤과 코뮌 수준에서 직접민주제가 확산 된 것은 19세기 초․중반이었다. 제네바 출신 민권사상가 Jean-Jacques Rousseau의 「사회계약론」(1762, 2010)의 ‘주권은 대표될 수 없다.’는 국민주권사상과 1798년 Napoleon이 세운 헬베티아공화국의 평등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1830년 파리 7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여러 캔톤에서
주민투표로 헌법을 제정하고 선택적 법률주민투표제를 도입한 ‘자유주의 갱생(Liberal Regeneration)’ 운동이 전개되었다.
1848년 연방이 출범할 때 연방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1848년 연방헌법은 의무적 부분 및 전면 개헌 국민투표와 전면 개헌 국민발안을 규정하였다. 이어 1860년대 대의제의 귀족주의 성향에 대한 캔톤들의 저항운동이 연방 수준으로 확산되어 1874년 연방법률과 명령에 대한 선택적 국민투표제가, 1891년 부분 개헌 국민발안제가 각각 도입되었다.
오늘날 스위스국민은 매년 코뮌 ․ 캔톤 ․ 연방 수준에서 제기되는 20-30건의 정책쟁점들을 보통 춘하추동 네 차례의 투표로 결정한다. 게다가 스위스 대다수 코뮌과 일부 캔톤은 시민발안과 시민투표 이외 집회 민주주의(assembly democracy)를 추가적으로 시행한다.
스위스의 2,324개 코뮌 중 약 80%(보통 인구 2만 명 미만의 코뮌)가 매년 몇 차례 주민이 공공장소에 모여 주민대표를 뽑고 세입세출예산안을 확정하 며 중요한 사안을 직접 결정하는 코뮌총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글라루스 캔톤과 아펜젤내곽 캔톤은 오늘 날까지 각각 매년 4월 마지막 일요일과 5월 첫 일요일 광장에서 캔톤총회인 란쯔게마인데 (Landesgemeinde)를 개최하는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스위스인의 관심과 애정은 남다르다. 한 설문조사에서 “당신이 스위스 국민으로 서 자부심을 느끼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60% 이상의 응답자들이 정치라고 응답 했다. 유럽 한가운데 위치한 스위스가 EU 가입을 미루어온 주된 이유도 EU 가입으로 직접민주주의가 손상될 것을 대다수 국민이 우려하기 때문이다. 스위스국민은 1992년 유럽경제지역(EEA) 가입 여부를 묻는 시민투표를 부결시킨 데 이어 2001년에는 EU가입을 위한 협상재개 여부를 묻는 시민투표도 부결 시켰다. 연방정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스위스 국민은 EU가입으로 시민투표 대상에 해당되는 사안 중 약 10-20%가 제외될 것을 걱정해 반대한 것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주정부와 지방정부에 횡횡하던 ‘머신정치(machine politics)’2)의 부패를 척결할 개혁방안으로서 스위스의 직접민주제를 벤치마킹해 도입했다. 특히 미국의 서부와 북서부의 농부와 자영업자 및 노동자는 철도자본을 위시한 금융산업자본과 유착된 정관엘리트 카르텔의 부패에 저항해 직접민주제를 도입했다. 1898년에서 1918년 사이에 22개 주에서 주민발안과 주민투표 및 주민소환이 제도화되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델라웨어 주를 제외한 49개 주에서 주의회가 제안한 주헌법 개정안을 주민투표로 확정한다. 중서부지역을 중심으로 27개 주에서는 주헌법과 법률의 개정 등에서 주민발안과 주민투표가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현재 지방정부의 90%가 주민투표제를, 58%가 주민발안제를, 69%가 주민소환제를, 그리고 36%가 주민청원제를 두고 있다.
아울러 개척시대부터 시작된 뉴잉글랜드지역의 집회민주주의는 독립전쟁과 건국 및 노예해방의 진원지로서 이후에도 인권․평화․반핵․환경운동을 선도해왔다. 오늘날 약 1,100개 타운에 사는 주민은 매년 몇 차 례 열리는 타운미팅(town meeting)에서 각 부문의 주민대표를 선출하고 세입세출예산을 의결하며 재산 세율 결정 등 주요 안건을 직접 결정한다. 타운미팅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뉴잉글랜드지역은 미국에서 사회적 자본이 가장 충실하게 형성되고 1인당 주민소득 수준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2. 행정효율 제고, 갈등 진정, 탈세 방지, 행복 증진 스위스와 미국의 경험은 직접민주제가 정치인카르텔의 지대추구행위를 제어함으로써 행정효율을 향상 시키고, 갈등을 진정시키며, 조세도의를 높이고, 행복을 증진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표적 연구결과를 통해 확인된 직접민주제의 긍정적 효과를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Feld & Kirchgässner(1999, 2001)는 재정에 관해 주민에게 더 많은 결정권을 준 캔톤에서 경제적 성과가 1인당 GNP 기준으로 15%나 더 높은 것을 확인했다.
예산안을 시민투표에 부치는 코뮌 역시 그렇지 않은 코뮌보다 1인당 공공지출이 10% 적었다. 그리고 예산안을 시민투표로 결정할 수 있는 캔톤은 그렇지 않은 캔톤보다 조세회피비율이 30%나 낮은 것으로 밝혀졌다.
예산안을 시민투표에 부치는 코뮌은 그렇지 않은 코뮌보다 부채비율이 25%나 낮았다. 직접민주제를 활용하는 코뮌은 그렇지 않은 코뮌보다 쓰레기 처리비용도 20%나 저렴했다.
Kriesi et al.(1995)은 직접민주제가 과격한 사회운동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음을 확인했다. 직접민주제를 일상적으로 활용하는 스위스는 과격한 사회운동의 비율이 26%에 불과한 데 비해, 그렇지 않은 프랑스는 56%에 달했다. 독일과 네덜란드의 과격한 사회운동 비율은 스위스와 프랑스의 중간수준이었다. 직접민주제의 개방적인 정치적 기회구조가 급진적 사회운동의 정당성과 성공가능성을 떨어뜨린 것으로 보인다.
머신정치란 정치적 보스가 지지자들에게 공직, 복지편익, 공공사업, 후견 등의 이권과 이익을 제공하고 그 반대급부로 그들의 표와 지지를 얻어 유지하는 부패정치를 말한다.
스위스 직접민주제의 효과에 관한 자세한 논의와 경험적 연구결과는 (안성호, 2005: 253-342)를 참고할 것.
아울러 Kriesi & Wisler(1996)는 직접민주제의 개방성 수준이 낮은 프랑스어권과 이탈리아어권 캔톤이 독일어권 캔톤보다 사회운동이 더 과격한 양상을 띤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Pommerehne & Weck-Hanneman(1996)은 탈세금액이 직접민주제를 활용하는 캔톤이 그렇지 않은 캔톤보다 평균 1,500프랑 적은 것을 확인했다.
Frey(1997) 등의 경험적 연구도 직접민주제의 탈세감축 효과를 밝혀냈다. Frey & Stutzer(2003)은 시민이 직접민주제를 쉽게 활용할수록 부패 수준이 낮아짐을 확인했다. Frey & Stutzer(2000)는 직접민주제의 행복증진 효과를 확인했다. 이들은 직접민주적 개방성―캔톤의 직접민주적 개방성 수준을 1등급에서 6등급까지 구분함―이 1등급 상승함에 따라 약 1,700프랑에 상당 하는 행복도가 높아지는 것을 발견했다.
3. 시민의식과 헌정애국심 함양 직접민주제는 정치인들이 시민선호에 부응하도록 유도하는 효과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슈에 대한 정보 수준을 높이고, 정치인과 대의기관에 대한 시민의 신뢰를 높이며, 시민의 준법의식을 향상시키고, 시민의 정치적 효능감도 제고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Benz & Stutzer(2004)는 시민이 정치과정에서 발언권과 의사결정권을 더 많이 행사할수록 정치적 사 안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아울러 정치적 참여가능성은 공적 토론을 활성화시켜 투표자의 정보수준을 높인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Feld & Frey(2002)는 직접민주제가 시민의 정부신뢰도와 정책순응도를 높이고 준법의식도 향상시킨 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은 이 현상을 정부와 시민 간 신뢰의 “심리적 계약”으로 설명했다. 정부가 시민을 믿고 직접참정기회를 넓게 열어줄수록, 시민은 그 대가로 정부를 신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심리적 계약” 개념은 일찍이 “믿음이 부족하면 불신받기 마련이다(信不足焉, 有不信焉).”이라고 설파한 노자(老子)(「도덕경(道德經)」 제17장)의 통찰을 연상시킨다.
Bowler & Donovan(2002)는 직접민주제의 정치적 효능감 제고효과를 확인했다. 직접민주제가 시민의 소외감과 무력감을 해소하고 관객으로 전락한 시민을 정치과정에 적극 참여하는 능동적 시민으로 전환시키는 효과가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들의 연구결과는 Tocqueville의 관찰과 일치한다. Tocqueville(1835)은 뉴잉글랜드 주민의 뜨거운 애향심과 능동적 시민정신은 출생지에 대한 애착이 아 니라 “독립국가에 준하는 막강한 자치권을 갖는 타운”에서 자치를 체험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주인의식이 었다. 역사학자 Halbrook(2000: 248-252)은 2차대전때 스위스가 히틀러의 침공야욕을 꺽은 비결이 국가 위기에 직면해 고도의 국민통합을 촉진하고 결사항전의지를 북돋운 지방분권적 연방제와 직접민주제, 그 리고 시민군에 있다고 진단했다. 민족과 종교와 언어가 다른 스위스국민이 적의 침공위협에 직면해 결사 항전의 의지를 불태운 애국심의 원천은 연간 20-30건의 주요 국사와 지방적 사안을 주권자로서 직접 결정하도록 보장한 헌정체제에 대한 주인의식과 뜨거운 애정, 곧 헌정애국심이었다.
4. 중앙집권화 차단 스위스의 경험은 직접민주제가 중앙집권을 차단하는 유력한 제도임을 입증한다. Blankart(2000)는 독 일이 2차대전 이후 스위스보다 훨씬 더 중앙집권화된 까닭이 연방수준에서 직접민주제를 활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독일에서는 1949년 연방․주․게마인데에 각각 배타적으로 배정되었던 세원(稅源)이 1999년까지 대부분 연방정부의 관할로 이관되어 전체 세금수입 중 연방정부의 세금수입 백분비가 1950 년 61.1%에서 1995년 93.0%로 급증했다. 반면 연방정부의 세금이 국민투표로 결정되는 스위스에서는 1917년부터 1999년까지 연방소득세와 연방소비세를 인정하는 국민투표가 23차례 실시되었지만 연방소득세와 연방소비세 인상 헌법개정안의 약 40%가 첫 국민투표에서 부결된 결과 전체 세금수입 중 연방정부의 세금수입 백분비가 1950년 60.1%에서 1995년 44.1%로 오히려 떨어졌다(Blankart, 2000: 32).
요컨대 연방수준에서 직접민주제를 활용한 스위스 연방정부의 세금수입 백분비는 1950년에서 1995년 사이에 16%나 하락한 반면, 연방수준에서 직접민주제를 활용하지 않은 독일 연방정부 세금수입 백분비는 32%나 상승한 것이다. 직접민주제의 지방분권화 효과는 주정부와 지방정부에서도 확인된다. 1990년부터 1999년 사이에 미국 주들 간 세출에 관한 연구(Matsusaka, 2004: chap. 4)는 주민발안제를 채택한 주정부가 그렇지 않은 주 정부보다 1인당 평균 13% 더 적게 지출하고 지방정부 수준에서는 4% 더 많이 지출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주민발안제를 채택한 주에서 더 지방분권적인 세출패턴이 확인된 것이다. 비슷한 결과가 1980년부터 1998년 사이에 스위스 캔톤에서도 밝혀졌다(Schaltegger & Feld, 2001). 예산주민투표를 청구하는 직접 민주제가 더 개방적인 캔톤일수록 덜 중앙집권적인 예산구조를 가진 것으로 밝혀졌다.
Ⅳ. 직접민주제 반대론과 그에 대한 반론
지난 20-30년 간 직접민주제의 긍정적 효과가 입증되었지만, 직접민주제에 대한 부정적 관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권위주의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주의국가에서도 직접민주제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지배적이다. 직접민주제의 도입으로 지대추구기회가 없어지는 기성 정치계급뿐만 아니라 정치인 카르텔의 전리품을 나누어 갖지 않는 지식인조차 직접민주제 확충에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다. 적지 않은 지식인들은 일반시민보다 더 현명한 자신들이 결정권을 갖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들은 사회적 후생을 결정하는 ‘철인왕’의 역할을 자임하며 자신들이 결정권을 행사하는 대의적 헌정질서를 옹호한다. 이제 완고한 대의민주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직접민주제 반대논거를 차근차근 점검해보자.
1. 시민은 복잡한 이슈를 이해할 수 없는가?
직접민주제 반대론자들은 복잡한 정책이슈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보통시민에게 결정권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대규모 지식정보사회에서 제기되는 복잡한 정책이슈의 결정은 유권자 를 대표하는 전문정치인에게 맡기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복잡한 이슈에 대한 시민의 이해력 부족을 지적하는 직접민주제 반대론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타당하지 않다.
(1) 정당과 대표를 결정하는 시민의 능력을 믿으면서도 구체적인 정책이슈를 결정하는 시민의 능력을 불신하는 것은 모순이다.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정당과 대표의 결정은 구체적 정책이슈의 결정보다 어렵다. 투표자는 선거투표로 정당과 대표를 선택할 때 정당과 대표가 앞으로 제기될 수많은 정책이슈에 대 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 헤아려야 한다.
(2) 시민투표에 참여하는 투표자는 정책이슈에 관한 구체적 지식이 아니라 정책이슈에 포함된 핵심 문제를 파악하면 충분하다. 그런데 정책이슈에 포함된 주요 문제는 기술적 판단보다 원칙의 결정을 요구 한다. 투표자는 정치인 못지않은 원칙결정능력을 가지고 있다.
(3) 정치인이 보통시민보다 항상 더 유능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시민은 종종 특정 영역에서 정치인보다 유능하다. 더욱이 일반의원은 재량권이 거의 없다. 흔히 일반의원은 정당지도부가 설정한 당론과 특 정 분야 전문가의 결정에 따라 기계적으로 투표한다.
(4) 직접민주제에는 시민의 합리적 결정을 돕는 다양한 장치가 있다. 정당, 이익집단, 시민단체, 전문가집단, 언론 등은 시민의 판단을 돕는 정보와 지식을 제공한다. 투표자는 투표 전 토론과 숙의과정을 통 해 정책이슈에 대한 합리적 관점을 정립할 수 있다.
(5) 직접민주제는 정책이슈에 대한 시민정보 형성을 촉진시킨다. 직접민주제는 시민에게 정책정보를 수집할 동기를 부여하고, 정치적 행위자와 언론으로 하여금 이에 부응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만든다.
2. 시민은 무관심하고 참여하지 않는가?
직접민주제 반대자들은 일반시민이 정책이슈에 무관심하며 투표에도 참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직접민주제의 낮은 투표율이 야기하는 민주적 정당성을 비판한다. 그러나 시민의 무관심과 투표율 저조를 직접민주제의 치명적 결함으로 단정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설득력이 없다. 이 절의 이하 논의는 (Frey, Stutzer, & Neckerman, 2011: 113-116)의 직접민주제 반대론과 그에 대한 반론에서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어 확장시킨 것임.
(1) 일반시민, 특히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시민은 공적 이슈에 무관심하고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많은 경험적 연구결과와 상반된다. 최근 인도의 풀뿌리지방정부인 그람판차트(gram pancharts) 주민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Bardhan et al., 2015: 305-324), 마을주민은 자치프로그램에 높은 관심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투표와 마을모임에도 평균 수준 이상의 참여율을 보였다. 특히 토지가 없거나 낮은 카스트에 속한 주민은 여느 주민보다 공적 이슈에 관심이 더 적고 참여율이 더 떨어진다는 주장은 확증되지 않았다.
(2) 시민의 관심과 투표참여율이 언제나 낮은 것은 아니다. 중대한 정책이슈가 등장하면 투표참여율은 크게 상승한다. 스위스 연방 수준에서 평균 투표참여율은 45% 정도이고 예외적으로 25%까지 하락하지 만, 시민의 관심을 끄는 사안의 투표율은 70-80%대로 크게 상승한다. 예컨대 1992년 스위스의 유럽경제지역(EEA) 가입여부를 결정짓는 국민투표의 투표율은 무려 78.7%였다.
(3) 높은 투표율이 언제나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유권자가 정책이슈를 중요치 않다고 생각하거나 정책이슈에 대해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경우 투표불참은 합리적 선택이다. 이런 경우 투표에 불참해 결정권을 정책이슈를 중시하고 정책이슈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갖는 투표자에게 맡기는 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4) 평균 투표율 45% 정도인 스위스5)에서 낮은 투표율이 민주적 정당성을 심각하게 손상시킨다는 증거는 없다. 스위스국민은 시민투표의 결과를 흔쾌히 수용해왔고 최근까지 직접민주제를 코뮌・캔톤・연방 수준에서 꾸준히 확충해왔다. 스위스 코뮌주민은 참석률이 5% 미만인 코뮌주민총회의 결정도 주민의 총의로 순순히 받아들인다. 필자는 2015년 12월 시르나흐(Sirnau) 코뮌(주민 7,496명)을 방문해 유권자의 3%에 불과한 150명이 모인 주민총회의 저조한 참석률에 적잖게 놀랐다. 낮은 참석률에도 불구하고 2016년도 예산안을 비롯해 7명의 외국인거주자의 시민권 부여와 지방세율 결정 등 중요한 사안을 결정 했다. 이렇게 낮은 참석률이 의사결정의 정당성을 해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시장과 행정위원은 주민 총회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주민은 아직 한 번도 없었으며 낮은 참석률 때문에 집회민주주의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 바 없다고 대답했다.
(5) 의회의 표결은 시민투표 결정과 다르다. 의원은 모든 정책이슈를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투표를 하는 것도 아니다. 의회에서 의원은 자신이 소속한 상임위원회의 정책이슈에 대해서만 진지하게 검토한다. 다른 정책이슈에 대해서는 정당지도부가 설정한 지침에 따른다.
3. 시민은 쉽게 조종당하는가?
직접민주제 반대론자들은 시민발안과 시민투표가 풍부한 자금과 강한 조직력을 갖춘 이익집단에 의해 휘둘린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직접민주제에서 시민의 선택은 부유하고 조직화된 이익집단의 선전과 동원 으로 쉽게 조종당한다고 비판한다.
스위스에서는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투표일을 하루가 아니라 2-3일로 늘리고 우편투표제를 도입하며 전자 투표제를 시도해왔다.
직접민주제가 부자들과 조직화된 이익집단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약점은 직접민주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의회와 정부가 부유하고 조직화된 이익집단의 로비와 압력에 의해 포획당하는 경향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직접민주제와 대의민주제 중 어느 쪽이 이익집단의 로비와 압력에 더 취약하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할 때 고려해야 할 점은 이익집단이 상대하는 사람의 수가 직접민주제에서보다 대의민주제에서 훨씬 더 적다는 것이다.
이익집단은 소수의 정치인들을 상대하는 것이 모든 유권자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 저렴하고 용이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전통적 대의민주제 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이익집단은 직접민주제의 확충에 반대한다.
4. 시민은 감정적으로 결정하는가?
직접민주제 반대론자들은 투표자가 감정에 휩쓸려 투표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이성보다 감성의 지배를 더 받는 존재이며, 특히 대중의 집단적 격정이 직접민주제의 합리적 결정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판단이 이성 못잖게 감성의 영향을 받으며 격정적 대중심리가 직접민주제에 의한 의사결정의 합리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2002년 7월 독일 하원은 연방정부 수준의 직접민주제 도입법안을 감정적 결정의 우려를 이유로 부결시켰다. 그러나 시민의 감정적 결정을 직접민주제 확충의 반대논거로 제시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로 옳지 못하다.
(1) 직접민주제에서 감정에 치우친 그릇된 결정에 대한 지나친 우려는 직접민주주의 정책과정에서 정 부, 정치인, 이익집단, 전문가, 시민단체, 일반시민 간에 광범위하게 형성되는 공론화과정을 간과한 것이다.
150년 이상의 스위스 직접민주제 경험에서 시민의 감정적 선택으로 그릇된 결정을 초래했다고 단정 할 수 있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스위스에서 CEO의 보수를 최저 직원보수의 12배로 제한하려 는 국민발안과 근로자의 최저 임금을 두 배 이상 올리려는 국민발안이 우려와 달리 부결되었다. 스위스 직접민주제는 미국 캘리포니아 직접민주제가 결여한 ‘숙의과정’이 구비되어 있어 시민의 감정적 선택을 제어한다. 직접민주제가 대의민주제와 적절히 결합된 스위스에서는 대중선정주의가 야기한 ‘캘리포니아 질병(Californian disease)’이 없다.
(2) 감정적 결정의 위험성은 직접민주제에만 해당되는 결함이 아니다. 우리는 의회가 여야 간 감정적 격돌로 교착상태에 빠지고 심지어 주먹다짐까지 벌이는 장면을 종종 목격한다. 그래서 의회는 의견이 충돌할 가능성이 있는 안건을 다루는 회의규정을 따로 마련하기도 한다. 요즘 존폐의 논란을 빚고 있는 국회선진화법은 입법과정에서 감정적 결정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5. 빈번한 시민투표가 시민을 혼란에 빠뜨리는가?
직접민주제 반대론자들은 빈번한 시민투표가 투표자를 혼란에 빠뜨린다고 주장한다. 잦은 시민투표는 시민에게 과부하와 피로감을 주어 낮은 투표참여율과 저질의 결정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시민투표의 과부하 문제는 직접민주제 확충의 반대논거가 아니라 직접민주제를 설계할 때 고려할 사항 이다. 실제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종종 20건 이상의 안건이 한꺼번에 시민투표에 붙여져 투표자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경우 흔히 투표자는 몇 건의 두드러진 이슈에 관심을 집중하고 다른 이슈에 대해서는 덜 신중해지거나 우발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시민투표에 부쳐지는 안건의 과다로 인한 투표자의 과부하 문제는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
(1) 안건이 많은 경우 연중 투표회수를 몇 차례 나누어서 시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 스위스에서는 연간 20-30건의 주요 국사와 지방적 사안을 계절별로 네 차례로 나누어 시민투표에 부친다. 따라서 1 회에 5-8건의 안건이 시민투표에 붙여지는 셈이다. 물론 5-8건의 안건을 숙지하고 판단을 내리는 일도 투표자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준다. 그러나 유권자의 평균 45%는 이런 부담을 입법자로서 감당해야 할 권리이자 의무로서 인정하고 시민투표에 기꺼이 참여한다.
(2) 시민투표에 부쳐지는 안건 수는 서명요건 강화로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서명요건 강화는 정치인카르텔에 대한 직접민주제의 제재능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서명요건이 지나치게 까다로운 직접민주제는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해버린다. 한국의 주민투표는 도입 된지 12년 동안 오직 8건 실시되었고, 이중에서 단 2건만 주민발의로 실시되었다.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에 도입된 재정주민투표는 지금까지 단 한건도 활용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 주민투표제가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한 까닭은 지나치게 폐쇄적으로 설계된 제도 탓이다.
6. 직접민주제는 포퓰리즘을 조장하는가?
직접민주제 반대론자들은 직접민주제가 인기에 영합해 중장기적으로 효과가 나타나는 필요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직접민주제는 인플레이션이 기승을 부리고 과도한 재정적자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꼭 필요하지만 인기 없는 긴축정책의 채택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민주제가 인기에 영합하는 결정을 초래한다는 주장은 일반시민의 판단능력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당장 인기 없는 정책을 추진하는 정당한 이유가 제시된다면, 주권자인 시민이 그 정책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 스위스에서 세금인상은 시민이 직접 결정하므로 GDP 대비 국민부담률 (28-29%)은 여느 선진국보다 낮지만 재정이 부족해 공공서비스가 과소 공급된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스위스는 낮은 세금수입으로 양질의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나라로 명성이 높다.
6) 1848년 스위스연방이 출범한 이후 2015년까지 실시된 국민투표 606건 중 32%인 194건이 서명 없이 실시된 의무적 국민투표였다. 전체 국민투표 중 대략 3분의 1이 의무적 국민투표인 셈이다. 나머지는 국민발안국민투표 202건, 선택적 국민투표 171건, 연방의회의 대안에 대한 국민투표 39건이었다.
국민부담률(%) = [(세금+사회보장기여금) ÷ GDP] × 100.
캔톤과 미국 주의 경험은 직접민주제 활용이 더 쉬울수록 재정적 안정성은 더 높아진다는 것을 입증했다 (안성호, 2005: 272-274).
7. 직접민주제는 리더십을 무력화시키는가?
앞서 살펴본 직접민주제의 포퓰리즘 성향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정치인카르텔 타파를 시도하는 직접민주제가 국민 국가의 운영에 불가피한 대의민주제를 훼손시키고 건전한 정치적 리더십까지 무력화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오늘날 직접민주주의 옹호론자는 대의민주제의 순기능을 인정한다. 따라서 대의민주제를 직접민주제로 전면 대체하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대의민주제의 약점인 정치인의 지대추구행위를 예방하고 교정하기 위해 직접민주제를 대의민주제에 접목시킬 것을 요구한다.
스위스 직접민주제는 대의민주주의를 대체하지 않는다. 스위스국민은 대의민주주의 결정을 대체로 존중한다. 1848년 스위스연방 출범이후 2015년까지 제기된 선택적 국민투표 총 177건 중 99건은 가결되었다. 그리고 이 기간에 제기된 국민발안에 대해 연방의회가 제시한 대안 39건 중 23건이 국민투표에서 가결되었다. 국민발안과 연방의회의 대안이 함께 제시된 경우 연방의회의 대안을 선택한 백분비가 59% 에 이른 것이다. 스위스국민은 대의기관의 권고와 의견을 순순히 따르지는 않지만 신중히 검토한 후 대 체로 수용한다.
준직접민주제의 스위스 정치에서 ‘스타 정치인’은 스위스 정치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스위스국민은 튀는 정치인, 비상한 능력을 지닌 카리스마적 정치인을 경계하고 우려한다. 스위스에서 정치인으로 성공하려면 이웃집 아저씨같이 친근하고 겸손하며 근면해야 한다. 스위스 정치인에게는 개인의 특출한 능력보다 협동과 융화를 중시하는 팀리더십 또는 동료리더십(collegial leadership)이 요구된다.
8. 시민투표는 중대한 이슈를 다룰 수 없는가?
직접민주제 확충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교육수준이 낮고 정보도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하며 감정적으로 결정하는 경향이 있는 시민이 중대한 정책이슈를 직접 다루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은 시민투표 대상을 비교적 경미하고 중요성이 낮은 이슈에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04년 주민투표법은 바로 이런 주장을 반영해 제정되었다. 주민투표법 제7조는 “지방자치단체의 예산 ・ 회계 ・ 계약 및 재산관리에 관한 사항과 지방세・사용료・수수료・분담금 등 각종 공과금의 부과 또는 감면에 관한 사항”과 “행정기구의 설치・변경에 관한 사항과 공무원의 인사・정원 등 신분과 보수에 관한 사항”은 주민투표에 부칠 수 없다고 규정한다. 요컨대 재정과 인사 및 조직과 같은 중대한 사안은 주민투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스위스에서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을 시민투표에 회부해 시민이 직접 결정하고, 다소
덜 중요한 사항을 의회가 의결하도록 한다.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전문 정치인들에게 맡길 수 없을 때 시민이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주권자로서 직접 결정한다. 직접민주제의 대상이 된 중대한 정책이슈는 가치판단을 요구하는 몇 가지 핵심 원칙으로 압축될 수 있다. 핵심 원칙이 내포한 가치판단의 최종 결정자는 오직 주권자인 시민뿐이다. 시민의 대표가 시민의 가치판단을 대신하는 것은 기껏 차선책일 뿐이다.
9. 시민투표는 진보를 방해하는가?
직접민주제 반대자들은 종종 일반시민이 변화를 싫어하기 때문에 시민투표를 통해서는 ‘대담하고 새로 운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시민투표는 종종 보수적 성향을 띤다. 스위스와 미국에서 직접민주제 도입을 주도한 진보세력이 직접민주제에 의해 걸었던 당초 기대는 지나쳤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보수적 결정이 반드시 바람직하지 않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정치계급의 지대추구행위를 조장하는 결정을 거부하는 보수적 결정은 바람직하다.
아울러 시민발안에 대한 시민투표의 보수적 성향은 때로 점진적 변화를 유도한다.
이를테면 2013년 11월 24일 스위스에서 CEO의 연봉을 동일 기업 최저 연봉자의 12배까지만 허용하자는 국민발안에 대해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찬성 진영은 주요 대기업의 임금격차가 100-200배나 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 장했다. 그러나 반대 진영은 이 국민발안이 통과되는 경우 많은 기업들이 스위스를 떠나게 되어 스위스 경제가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국민발안은 투표자 65%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국민투표의 효과는 투표결과로 끝나지 않는다. 이 국민발안 국민투표는 투표운동과정에서 국민에게 CEO 의 지나친 고액 연봉의 부작용과 병폐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고, 투표가 종결된 후 개별 기업에서 CEO 의 고액 연봉을 자제하고 삭감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실로 90%가량 부결되는 스위스 국민발안 국민투표의 진정한 효과는 투표결과가 아니라 투표운동과정의 시민교육과 이에 따른 점진적 사회개혁의 확산에 있다. 더욱이 역사적으로 시민투표는 종종 소수권익을 보호하고 범사회적 의사결정의 교착을 타개하는 진보 적 절차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안성호, 2005: 283-296).
예컨대 스위스 베른 캔톤에서 소수 주라지역 분리주의운동은 사소한 폭력과 소요를 수반했지만 일련의 시민투표를 통해 대체로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이처럼 직접민주제는 다문화사회 스위스를 태생적 언어・지역・종교 갈등을 폭력과 유혈충돌을 최소화 하면서 평화적으로 해결하도록 만들었다. 미국에서도 시민투표제가 사회적 진보를 가로막고 사회를 불안 하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가 기우이며 오히려 ‘인정된’ 소수를 보호하고 점진적 사회변화를 유도하는 효과 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스위스의 시민투표는 엘리트의 지대추구를 견제하면서도 현상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띠는 데 반해, 시민발안은 혁신기능을 수행한다(안성호, 2005: 258-261). 스위스와 미국에서 직접민주제 도입을 주도한 진보세력은 한동안 지배적 정치세력으로 권력을 향유했지만 결국 자신들이 도입한 시민투표에 의해 기득권을 잃었다.
10. 시민투표는 ‘다수의 전제’를 초래하는가?
직접민주제 반대론자들은 시민투표가 민주주의의 근본 문제인 ‘다수전제’의 수렁에 빠질 것을 우려한 다. 시민투표의 다수전제가 소수 권익을 침해하고 시민주권을 훼손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투표가 반드시 다수전제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경제・사회・종교적 균열이 서로 교차하는 경우에는 어떤 다수도 항구적 다수로 군림할 수 없으며, 소수일지라도 항구적 소수로 소외되지 않고 언제라도 다수에 편입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사회집단도 다른 사회집단을 적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스위스의 경험은 적어도 헌정질서에 포용된 전통적 소수, 즉 언어적・종교적・지역적・사회경제적 소수도 다수전제로 인한 피해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런 현상은 미국에서도 확 인되었다(Cronin, 1989; Frey & Goette, 1998; Hajnal et al., 2002). 그러나 아직 헌정질서에 포용되지 못한 ‘분리・고립된 소수’는 시민투표에서 다수전제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최근 스위스 시민투표에서 아직 분리・고립된 소수인 무슬림들은 차별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분리・ 고립된 소수의 차별문제는 대의민주제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문제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11. 시민투표는 고비용을 유발하는가?
직접민주제 반대론자들은 시민투표의 고비용을 비판한다. 이들은 의회 결정이 시민투표 결정보다 저렴하다고 주장한다. 사실 한국에서 주민투표를 실시할 때마다 막대한 주민투표경비 문제가 제기되었다. 단 한 건의 정책이슈를 처리하는 데 수십억 원 내지 수백억 원이 소요되는 주민투표를 재정난에 허덕이는 지방자치단체의 부담으로 과연 실시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억지가 아니다. 그러나 시민투표의 고비용 문제는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직접민주제 반대논거로서 설득력이 없다.
(1) 시민투표경비는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현행 주민투표법은 주민투표를 발의한 지방자치단체장 이 소속된 지방자치단체의 부담으로 선거관리위원회가 맡도록 규정한다. 공정성 확보를 위해 주민투표 관리를 선관위에 맡긴 입법취지는 이해한다.
그러나 주민투표의 고비용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선관위 관리가 고비용 문제해결의 걸림돌이라면 주민투표 관리권을 지방자치단체로 이관하고 투개표 과정에서 시민자원봉사를 활용하는 등 획기적인 경비절감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아울러 주민투표와 선거 의 분리를 규정한 주민투표법도 고쳐야 한다.
스위스와 미국처럼 선거 때 시민투표를 실시하면 경비 절감과 더불어 투표율까지 높일 수 있다. 게다가 네댓 건의 안건을 모아 동시에 시민투표를 실시하면 시민투표경비를 크게 절감할 수 있다. 다만 국가정책에 대해 중앙행정기관장이 발의한 주민투표의 경우에는 국가가 주민투표경비를 부담한다. (주민투표법 제27조). 11) 지방자치단체의 관할구역에서 선거가 실시될 때에는 선거일 전 60일부터 선거일까지의 기간을 선거일로 정할 수 없다(주민투표법 제14조).
(2) 적정 수준의 시민투표경비는 정치인카르텔을 제어하여 시민의 선호와 동떨어진 정치적 결정을 예방하고 교정하는 비가시적 비용절감 효과를 감안할 때 충분히 감내할 만한 것이다. 약 150년 동안 일상화된 시민투표가 스위스 번영의 헌법적 토대를 이루어왔다는 사실은 적정 수준의 시민투표경비가 불가피한 비용이 아니라 공동체 발전을 위한 투자임을 입증한다. 더욱이 최종 결정권이 시민에게 있으면 의회 와 정당에 지금보다 더 적은 돈이 필요하다(Frey & Stutzer, 2006: 71).
Ⅴ. 한국 직접민주제의 실태
한국의 헌법은 국민주권을 천명하고 있지만 중앙을 직접민주제의 사각지대로 방치하고 있다. 2000년 대 이후 지방에는 다양한 직접민주제가 도입되었지만 실효성 있는 직접민주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직접민주제의 양대 기둥인 주민투표제와 주민발안제는 무늬만 직접민주제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1. 직접민주제의 사각지대인 중앙 한국의 헌법은 대의민주주의를 헌정질서의 기본 원리로 채택하고 있다. 1990년대 초 대법원판사들은 방청인이 사전 허락을 받고 지방의회 회의장에서 발언하는 완주군의회 조례를 대의민주주의 헌법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위헌으로 판정했다. 헌법이 인정하는 청원권은 부탁이나 탄원에 그쳐 직접참정제로 볼 수 없다. 대통령이 발의하는 국민투표제는 국민 주도의 진정한 직접참정제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헌법개정을 확정하는 국민투표는 사실상 공허한 제도다.
1) 헌법 제1조의 국민주권 선언 우리나라 헌법은 국민이 주권자임을 천명하고 있다. 헌법 제1조는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국민주권원리를 규정한다. 국민이 주권자임을 선언한 헌법 제1조는 국민이 국가의사의 최고최종 결정권자임을 명시한 것이다. 그 러므로 헌법 제1조는 국민이 직접 결정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사를 갖는 경우 대의기관인 정부와 국회가 이를 대신하거나 방해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국민에 대한 정부와 국회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한 헌법의 일부 규정은 제1조의 국민주권원리 를 침해한다. 특히 헌법의 일부 규정은 국민의 직접참정권 행사를 사실상 봉쇄한다.
2) 국민의 직접참정을 가로막는 헌법
현행 헌법은 국민의 헌법안·법률안발의권과 국민투표청구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1) 현행 헌법은 헌법개정발의권을 국회의원과 대통령에게만 부여한다. 헌법 제128조는 국회재적의원 과반수 또는 대통령만 개헌을 발의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 헌법규정에 따라 주권자인 국민은 국회의 원과 대통령이 원치 않는 개헌안을 발의할 수 없다. 본래 국민의 개헌발의권은 유신헌법 이전까지 인정되던 국민의 참정권이었다. 1954년 제2차 개헌 때 도입된 국회의원 선거권자 50만 명 이상의 개헌발의권은 1972년 유신정권에 의해 계엄령 하에서 강행된 제6차 개헌으로 폐지되었다.
(2) 현행 헌법 제52조는 법률안발의권을 오직 국회의원과 정부에게 한정한다.
이 헌법규정에 따라 주권자인 국민은 국회의원과 정부가 원치 않는 국민적 관심사항을 법률안으로 발의할 수 없다.
(3) 현행 헌법은 대통령의 국민투표청구권만 인정한다.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헌법으로부터 국민투표청구권을 부여받지 않는 국민은 정치인카르텔을 제재할 효과적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
국민은 공허하게 불만을 털어놓고 읍소하면서 정부와 국회가 개과천선하길 무한정 기다리거나 탄핵 촛불집회처럼 엄동설한의 고통을 감내하며 거리와 광장에서 분노를 폭발시키는 수밖에 없다. 공허한 헌법개정국민투표 현행 헌법 제130조 제2항은 헌법개정안을 국회가 의결한 후 30일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유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과반수의 찬성으로 확정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에 따르면 국민이 헌법개정안의 최 종 결정권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헌법 제130조 제1항을 보면 생각이 바뀌게 된다. 헌법 제130조 제1항은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 회의 의결은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은 절대다수 국회의 원의 지지를 얻은 헌법개정안만 국민투표에 회부된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인카르텔 제재를 겨냥하는 헌법개정안이 절대다수 국회의원들의 지지를 얻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공허한 국민투표제도라고 아니할 수 없다.
2. 지방 직접민주제의 외화내빈 그동안 한국 지방에는 다양한 직접참정제가 도입되었다. 1999년 한국형 주민발의제도인 조례제정개폐 청구제도와 주민감사청구제도를 도입하는 지방자치법 개정이 이루어졌고, 2004년에는 주민투표법이 제 정되었다. 2006년 주민소송제를 규정한 지방자치법 개정에 이어 2007년 주민소환법이 제정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직접참정제의 도입으로 바야흐로 지방수준에서나마 직접참정의 새 시대가 열린 듯했지만, 그 운영실적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직접참정제가 도입되었지만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정치인에 대한 국민불신은 여전하다.
2014년 12월 국무회의에서 전국의 대도시 자치구의회의 전면 폐지를 의결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시민은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 모 일간지 칼럼에 자치구의회 폐지의 부당성을 지적한 필자에게 항의성 전화를 건 독자들이 있을 정도로 지방자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주의가 팽배하다. 혹자는 직접민주제가 문화가 다른 한국에는 맞지 않는 제도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직접민주제 의 세부 내용을 검토해보면 실패원인이 문화가 아니라 제도에 있음이 드러난다. 한마디로 현행 직접민주제는 주민의 직접참정을 촉진하기보다 오히려 제한한다. 무엇보다 직접민주제의 양대 기둥인 주민투표제 도와 조례제정개폐청구제도는 통제의 주체인 주민의 권한과 행동을 과도하게 규제하면서 주민통제의 대 상인 지방자치단체장과 의회의 우월적 지위와 역할을 인정한다.
1) 주민투표를 제한하는 주민투표제 지방자치단체의 중요한 결정사항에 관한 주민의 직접 결정권을 인정하기 위해 제정된 주민투표제도는 발효된 지 12년이 지났지만 오직 8건만 활용되었다. 8건 중 주민이 청구해 실시된 주민투표 (referendum)는 단 2건으로 서울시 무상급식지원 건(2011. 8. 24)과 영주시 면사무소이전 건(2011. 12. 7)뿐이다. 나머지 6건은 중앙행정기관장과 지방자치단체장이 요구해 실시된 관제(官製)주민투표 (plebiscite)다. 6건의 관제주민투표 중 중앙행정기관장이 요구한 5건은 행정자치부장관이 청구한 제주도 행정구조개편 건(2005. 7. 27), 제1차 청원・청주합병 건(2005. 5. 29), 제2차 청원・청주합병 건(2012. 6. 27), 완주・전주합병 건(2013. 6. 26), 산업자원부장관이 청구한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유 치 건(2005. 11. 2)이다. 그리고 1건은 지방자치단체장이 요구한 남해화력발전소 유치동의서 제출 건 (2012. 10.17)에 대한 주민투표였다. 한국 주민투표제의 폐쇄성은 인구 1천만여 명의 서울시와 인구 830만 명의 스위스의 시민투표 활용빈 도를 비교하면 확연히 드러난다. 서울시에서는 2004년 주민투표법이 제정된 지 12년 동안 단 한 건의 주민투표만 실시되었다. 이 주민투표조차 유권자 3분의 1 이상의 유효투표율제로 말미암아 개표도 못한 채 무효 처리되었다. 반면 서울시보다 약 2백만 명이 적은 스위스에서는 같은 기간 동안 줄잡아 300 건12)의 중요한 국사와 지방이슈가 시민투표로 결정되었다. 스위스에서 300건의 시민투표가 실시되는 동 안 서울시에서는 단 1건의 무효화된 주민투표가 실시된 것이다. 300 대 1, 이는 곧 한국 주민투표제도의 극단적 폐쇄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수치다.
2) 허울뿐인 조례제정개폐청구제 조례제정개폐청구제도 역시 부실하긴 마찬가지다. 일정 수 이상의 유권자 연서로 해당 지방자치단체장 에게 조례제정・개정・폐지를 청구하는 조례제정개폐청구제도는 2000년부터 2014년까지 15년 간 학교급식 등과 관련해 213건의 조례안이 청구되었다. 이중 가결된 원안 또는 수정안은 109건(51%), 부결된 안건은 27건(12.7%), 각하・철회・폐기된 안건은 71건(33.3%), 기타는 6건(2.8%)이었다. 대다수 주민발 의 조례안이 의회의 일방적 판단으로 수정가결・부결・각하・철회・폐기 또는 심의가 거부된 셈이다.
의회가 일방적으로 원안을 수정하여 가결하거나 부결 또는 심의를 거부할지라도, 주민은 속수무책이다. 의회가 주민이 제안한 조례안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행사하는 현행 조례제정개폐청구제는 그야말로 허울뿐인 주민발안제다.
3) 주민소환제
주민소환제는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에 대해 소환투표를 실시하여 임기 중 해직시키는 직접참정제도다. 청구사유는 제한이 없다. 청구요건은 광역지방자치단체장의 경우에 유권자 총수의 10% 이상, 기초지방자치단체장의 경우에 유권자 총수의 15% 이상, 그리고 지방의원의 경우에 유권자 총수의 20% 이상의 연서를 받는 것이다. 2006년 주민소환법이 발효된 후 현재까지 10년 동안 8건의 주민소환투표가 실시되어 2건이 소환에 성공했다. 경기도 하남시의원 2명이 소환투표 결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나머지 6건은 소환투표를 실시했지만 유권자 3분의 1 이상 유효투표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무효 소환투표로 처리되었다. 그동안 주민 소환이 추진되었으나 신청취하 또는 연서명부 미제출 등의 사유로 중도에 종결된 사례는 약 60건에 달 한다.
Ⅵ. 직접민주제의 설계지침과 설계안
1. 직접민주제의 설계지침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직접민주제가 제대로 설계되지 못하면 기대한 성과를 거둘 수 없다.
참여정부 시절 큰 기대를 걸고 제주특별자치도에 도입된 재정주민투표제 역시 예상치 못한 함정에 빠져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했다. 필자는 제주특별자치도특별법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스위스와 미국의 재정주민 투표제를 벤치마킹해 특별법 제28조에 “도조례로 정하는 예산 이상이 필요한 대규모 투자사업은 주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는 규정을 넣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재정주민투표제는 제주특별자치 11년 동안 단 한 번도 활용되지 않았다. 제주도의회가 재정주민투표에 회부될 1회 지방비 투자사업 규모를 “연간 3천 억 원” 이상으로 지나치게 높게 책정했기 때문이다. 주민투표에 회부될 투자사업 규모를 조례로 위임한, 일견 대수롭지 않은 법률규정이 큰 기대를 걸고 도입한 직접민주제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비례대표 지방의원은 소환대상에서 제외된다(주민소환법 제7조).
실로 직접민주제의 성패는 설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에서 직접민주주의를 가장 오랫동안 진지하게 운용해온 스위스와 미국의 경험에 기초해 직접민주 제를 설계할 때 준수해야 할 지침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직접민주제 확충은 대의민주제의 실패를 예방․교정하고 보완함으로써 더 나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대의민주제와 완전히 분리된 제13호 주민발안(Proposition 13)이 재정위기를 초래 한 ‘캘리포니아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대의민주제와 적절히 접목된 직접민주제가 필요하다.
(2) 직접민주제는 정부(의회)와 시민이 상호작용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숙의과정 을 촉진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정부(의회)가 시민발안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거나 대안을 제 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정부(의회)가 대안을 제시한 경우 그 대안과 시민발안을 함께 시민투표에 회부해야 한다.
(3) 시민 주도의 직접민주제로 설계되어야 한다.
정부가 통제하는 관제시민투표(plebiscite)는 진정한 시민투표(referendum)가 아니다. 계엄령 하에서 실시된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는 관제시민투표의 대표적 사례이다. (4) 가장 중요한 사안은 시민투표로, 중요한 사안은 의회가, 덜 중요한 사안은 집행부가 결정하는 원 칙이 준수되어야 한다. 시민투표 대상의 과도한 제한(예: 주민투표법 제7조 제2항 3호-5호에 규정된 재 정․조직․인사 등에 대한 시민투표 활용금지)을 풀고, 투표청구 서명요건을 완화해 시민투표의 활용을 임의로 가로막지 말아야 한다. (5) 의무적 시민투표제와 재정주민투표제의 도입이 필요하다.
시민이 직접 결정해야 할 중대한 사안은 의무적 시민투표제로 지정해야 한다. 특히 세금을 비롯한 중대한 재정적 사안은 반드시 의무적 또는 선택적 재정시민투표로 결정해야 한다.
(6) 시민에게 자유로운 의제설정 기회를 부여하는 시민발안제도로 설계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지방자치법 제15조 제2항에 규정된 조례제정개폐청구 대상에 대한 지나친 제한을 풀고, 주민이 발의한 조례제 정개폐청구에 대한 의회의 최종 결정권을 주민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
(7) 유효투표율제는 폐지되어야 한다.
현행 주민투표법 제24조에 규정된 “주민투표권자 3분의 1 이상 의 투표”만을 유효투표로 인정하는 것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결정권을 행사하도록 만들어 투 표참여를 가로막고 주민을 엘리트 대의정치의 구경꾼으로 전락시킨다. 유효투표율과 같이 참여와 승인의 문턱을 설정하는 것은 현상(現狀)을 유지하려는 정치계급에 유리할 뿐이다.
(8) 서명기간은 적어도 6개월 내지 1년 이상이 필요하다. 서명기간이 너무 짧은 시민발안과 시민투표 제는 결국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한다. 투표운동기간도 6개월 이상 보장되어야 한다. 직접민주제를 통 한 심사숙고와 진지한 토론은 충분한 시간을 요구한다.
(9) 몇 개의 안건을 한데 모아 시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 시민투표의 건수가 많아지는 경우 연간 몇 차례로 나누어 실시하는 방안을 강구할 수 있다.
(10) 서명과 투표운동을 선거와 분리할 필요는 없다. 선거와 관계없이 서명을 받고 투표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선거일에 시민투표를 실시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선거투표와 시민투표를 동시에 실시하면 투표율을 올리고 비용을 줄이는 장점도 있다.
(11) 직접민주제의 운영경비는 시민자원봉사와 정보통신기술을 적극 활용하여 현행 선거관리위원회의 과도한 투개표 관리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12) 개헌 국민투표의 경우 일부 인구밀집 지역의 주민이 인구과소 지역의 주민을 구조적으로 소외시킬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인구과소 지역을 배려한 표결방법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스위스에서 개헌 국민투표의 안건은 국민과 캔톤의 투표에 회부하여 이중 과반수 찬성을 얻을 때 채택된다.
(13) 시민발의 및 투표운동 기간에 사용된 기부금과 후원금은 투명성 원칙에 따라 철저히 공개되어야 한다.
2. 국회개헌특위 시안의 직접민주제 평가와 대안
최근 개헌논의 과정에서 중앙정부 수준의 직접민주제 도입에 관한 관심이 크게 부각되었다. 2016년 2 월 17일 지방분권개헌국민행동(2016)은 전문가들이 작성한 헌법개정시안을 전체회의를 거쳐 확정한 헌법개정안을 발표했다.
이 헌법개정안은 헌법과 법률에 대한 국민발안제와 국민투표제, 그리고 국민소환 제를 포함했다. 같은 해 대화문화아카데미(2016)가 제안한 헌법개정안, 그리고 2017년 나라살리는 헌법 개정국민주권회의(2017)와 지방분권개헌국민회의(2017)가 발표한 헌법개정안도 이와 유사한 내용의 직접민주제를 포함했다.
중앙정부 수준의 직접민주제 확충에 대한 큰 관심은 2016년 9월-10월 수원시가 전문가와 시민사회운동가 및 공무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델파이조사에서도 확인되었다. 때마침 2016년 11월부터 수개월째 엄동설한에 광화문과 전국 주요 도시에 모인 연인원 1천7백만 명의 촛불집회는 직접 참정의 헌정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명령으로 해석될 수 있다. 2017년 4월 26일 토론회에서 공개된 국회 개헌특위 시안은 이런 시대적 요청을 반영한 다음과 같은 직접민주제 규정을 포함했다.
1) 국회개헌특위 시안의 직접민주제 <법률 국민발안제, 법률 또는 주요 국가정책 국민투표제, 국민소환제> “제41조 ① 국회의원 선거권자 50만 명 이상은 법률안을 발안할 수 있다. 법률안이 발안된 날로부터 1년 이내에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국민투표에서 국회의원 선거권자 3분의 1 이상의 투표와 투표 자 과반수의 찬성으로 법률안은 확정된다. 국민발안의 절차는 법률로 정한다. ② 국회의원 선거권자 50만 명 이상은 국회가 제정한 법률의 폐지를 목적으로 또는 국가 주요 정 책에 대해 국민투표를 청구할 수 있다. 해당 법률안의 폐지 또는 해당 주요 정책의 결정은 국민투표 에서 국회의원 선거권자 3분의 1 이상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국민투표의 절차는 법률로 정한다. ③ 국회의원 선거권자 50만 명이 이상은 선출직 공무원의 임기가 만료되기 전에 그 사유를 적시 하여 소환할 것을 청구할 수 있다. 국회의원 선거권자 3분의 1 이상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으로 소환을 결정한다. 소환이 결정되면 해당 공무원은 그 직을 상실한다. 국민소환의 대상과 절차 등은 법률로 정한다.”
<헌법개정에 대한 국민발안/투표제> “제128조 ① 헌법개정은 국회의원 선거권자 100만 명 이상이나 국회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 또는 대통령의 발의로 제안된다. 제130조 ① 국회의원 선거권자가 제안한 헌법개정안은 공고가 끝난 날부터 3개월 이내에 국민투표에 회부하여 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의 과반수의 찬성으로 확정된다. ② 국회의원 또는 대통령이 발의한 헌법개정안은 공고가 끝난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국회에서 재 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확정된다. ③ 제2항에서 의결된 헌법개정안에 대해 30일 이내에 국민투표청구가 있는 경우에 헌법개정안은 청구일로부터 90일 이내에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 의 찬성을 얻어야 확정된다. ④ 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대통령은 즉시 이를 공고하여야 한다.”
2) 국회개헌특위 시안 직접민주제의 문제점과 대안
국회개헌특위 시안에 헌법과 법률 및 국가 주요 정책에 대한 국민발안제와 국민투표제, 그리고 선출직 공무원에 대한 국민소환제가 포함된 것은 민주주의 헌정사에 기록될 만한 의미 있는 진전이다. 그러나 국회개헌특위 시안에 포함된 직접민주제는 앞서 제시된 직접민주제 설계지침에 비추어볼 때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만일 이 시안대로 개헌이 성사되면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도약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국회개헌특위 시안에 포함된 직접민주제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유효투표율을 폐지해야 한다. 국회개헌특위 시안에 포함된 법률발안/개정, 주요 국가정책, 헌법개정, 선출직 공무원 소환청구에 대한 국민투표는 모두 “국회의원 선거권자 3분의 1 이상” 또는 “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가 투표에 참여한 경우에만 개표를 허용하는 유효투표율을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유효투표율을 도입한 취지는 투표결과가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유권자 3분의 1 또 는 과반수가 참여한 투표이어야 한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유효투표율의 근본적 문제점은 유권자의 투표참여 동기를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투표결과가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좌우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효투표율제도는 직접민주제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우려가 크다. 실제로 지방에 직접민주제가 도입된 이후 이따금 실시된 주민투표가 직접민주제를 무력화시키려는 사람들에 의한 투표불참 유도로 말미암아 유효투표율에 미달해 무효 처리된 사례가 적지 않다. 외국에서 유효투표율제를 두는 사례가 있지만 직접민주제를 오랜 세월 가장 빈번하게 성공적으로 활용해온 스위스는 일체 유효투표율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스위스에서 투표율이 낮아 국민투표 결과의 정당성이 의심받은 사례는 없다.
(2) 헌법에 충분한 서명기간과 투표운동기간을 명시해야 한다. 적어도 6개월 내지 1년 이상의 서명기간이 보장되지 않으면 국민의 직접민주제 청구권이 유명무실해 질 수 있다.
투표운동기간도 6개월 이상 확보되어야 심사숙고와 진지한 토론이 가능하다. 그런데 국회개헌특위 시안은 서명기한과 투표운동기간 을 포함한 직접민주제의 주요 절차를 법률에 위임하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을 통제할 직접민주제 의 핵심 절차를 결정하도록 일임한 것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과 함께 도입된 재정주민투표제가 주민 투표에 회부될 사업의 연간 지방비 부담액을 조례로 정하도록 위임한 특별법 조문에 따라 비현실적으로 높게 설정한 조례를 제정하여 11년째 단 한 번도 시행되지 못했던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참고로 스위스연방헌법 제138조와 제139조는 개헌국민발안의 경우 18개월의 서명기간을 보장한다.
그리고 스위스연방헌법 141조는 법률에 대한 선택적 국민투표의 경우 법률이 공고된 이후 100일의 서명기간을 보장 한다.
(3) 직접민주제 청구요건의 완화가 필요하다. 국회개헌특위 시안은 법률안 발의요건과 법률 또는 주요 국가정책에 대한 국민투표 청구요건을 국회의원 선거권자 50만 명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개헌 국민투표 청구요건을 국회의원 선거권자 1백만 명으로 규정한다. 청구요건을 너무 높게 설정하면 직접민주제 활용 이 어려워진다. 반면 청구요건을 너무 낮게 설정하면 직접민주제의 과도한 사용으로 정체의 안정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필자는 국회개헌특위 시안의 직접민주제 청구요건이 너무 높아 직접민주제의 활용을 어렵게 할 것으로 판단한다. 법령 또는 주요 국가정책에 대한 국민투표는 유권자 30만 명이, 개헌 국민투표는 유권자 60만 명이 청구할 수 있도록 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스위스 성공사례를 벤치마킹 한 것이다.
스위스연방헌법은 법률에 대한 국민투표를 유권자 5만 명(인구의 약 0.6%)이, 개헌에 대한 국민투표를 유권자 10만 명(인구의 약 1.2%)이 청구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4) 정부(국회)가 국민발안의 채택 또는 거부를 권고하고 그 발안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발안의 목적은 대의제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주요 정책의제를 국민이 직접 제기하는 기회를 제공 하여 정부의 정책혁신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발안은 때로 현실적합성이 떨어지거나 특수이익 을 옹호하는 등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제13호 주민발안 사례는 주정부의 개입 없이 부동산개발업자 주도로 졸속 처리되어 결국 주재정의 위기를 초래한 대표적 주민발안 실패사례이다. 국민발안이 이런 ‘캘리포니아 질병’을 예방하고 숙의 민주적 절차를 거친 고품질의 국민투표결과를 얻으려 면 정부(국회)에게 국민발안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고 필요한 경우 대안을 제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문제는 국회개헌특위 시안이 헌법개정과 법률 국민발안에 대한 정부(국회)의 입장표명과 대안제시를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국회)가 국민발안의 형식과 내용의 일관성 요구에 부합되지 않거나 국제법의 의무조항에 위배되는 경우 이 발안의 전부 또는 일부를 무효로 선언할 수 있도록 하고, 국민발안의 채택 또는 거부를 권고하거나 국민발안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5) 국민발안에 대한 대안이 제시된 경우 표결절차에 관한 헌법규정이 필요하다. 헌법개정안은 국민투표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으로 확정하고, 대안을 함께 국민투표에 회부하여 원안과 대안이 모두 투표자의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경우 찬성률이 높은 안으로 확정하도록 규정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스위스연방헌법 제139조b는 “① 국민은 그 발안과 대안에 대해서 동시에 투표한다. ② 국민은 그 발안과 대안 모 두에 찬성 투표할 수 있다. 국민은 세 번째 질문에서 발안과 대안이 모두 채택된 경우에 선호하는 안을 지적할 수 있다. ③ 만일 세 번째 질문에 의해 한 개안이 국민으로부터 더 많은 표를 얻고, 다른 안이 캔톤으로 부터 더 많은 표를 얻은 경우, 세 번째 질문에서 국민의 득표백분비와 캔톤의 득표백분비를 합 해 그 합계가 더 큰 안이 최종 채택된다.”고 규정한다.
(6) 개헌 국민발안의 경우 일반적 발안의 형태와 구체적 초안의 형태로 나누어 규정할 필요가 있다.
국회는 일반적 형태의 국민발안에 동의하는 경우 국민발안에 기초해 개헌안을 작성해 국민투표에 회부하도록 하고, 국민발안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곧바로 국민투표에 회부하여 다수 국민이 국민발안에 찬성 시 국회는 국민발안이 지시하는 헌법안을 작성하도록 한다. 그리고 구체적 초안의 형태로 발의된 국민발안은 국민투표에 회부한다. 참고로 스위스연방헌법 제139조 제4항과 제5항은 “④ 만일 연방의회가 일반적 형태의 국민발안에 동의하는 경우, 연방의회는 국민발안에 기초해 부분개정안을 작성하여 국민과 캔톤의 투표에 회부한다. 만일 연방의회가 국민발안을 거부하는 경우, 연방의회는 국민발안을 국민투표에 회부 한다. 국민은 그 발안의 채택여부를 결정한다. 만일 국민이 국민발안에 찬성하는 경우, 연방의회는 국민 발안에 상응하는 헌법안을 작성한다. ⑤ 구체적 초안의 형태로 발의된 국민발안은 국민과 캔톤의 투표에 회부된다. 연방의회는 국민발안의 채택 또는 거부를 권고한다. 연방의회는 국민발안에 대한 대안을 제시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7) 개헌 국민투표에 회부된 안건은 투표자의 과반수와 시․도의 과반수 찬성으로 채택되며, 한 시․도 내의 주민투표 결과는 해당 시․도의 결정으로 간주되도록 한다. 개헌 국민투표의 경우 표결요건으로 이처 럼 국민과 시․도의 이중 과반수 찬성이 필요한 까닭은 일부 거대 시․도 주민의 의사에 의해 작은 시․도 주민의 의사가 일방적으로 무시되는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서이다. 이중 과반수 찬성 요건은 개헌 국민투표 가 민주적 정당성과 함께 연방주의적 정당성을 지닐 것을 요구한다. 참고로 스위스에서 개헌 국민투표의 안건은 국민과 캔톤의 투표에 회부되어 국민의 과반수와 캔톤의 과반수 찬성으로 채택된다.
1987년 이전까지 투표자는 원안과 대안 중 하나만 찬성할 수 있었다. 이 투표방식은 종종 원안과 대안 모두를 부결시키거나 정부가 원안을 부결시키기 위해 미끼제안을 포함시킨 대안을 제시하는 책략으로 악 용될 수 있었다. 1987년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투표자가 원안과 대안에 ‘이중 찬성(double yes)’을 할 수 있는 정부발의 헌법개정안이 국민투표로 채택되었다.
3) 개정헌법에 포함되어야 할 기타 직접민주제 관련 규정 제10차 개정헌법에는 위에서 논의한 국민발안/투표/소환제 이외에 적어도 두 가지 직접민주제와 관련 된 규정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
(1) 유권자 최저연령을 현행 19세에서 18세로 인하해 헌법에 규정해야 한다. OECD 35개 회원국 중 유권자 최저연령이 19세인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나머지 33개국은 18세, 오스트리아는 16세가 되면 투표할 수 있다. 이미 지난 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18세 인하를 제안한 바 있다. 지난 2017년 대선 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및 정의당은 투표연령 인하를 당론으로 결정했고, 바른정당도 찬성하는 의원이 상당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권자 최저연령 18세 인하는 정당의 유․불리를 떠나 포용성 확대로 민주적 의사결정의 정당성을 제고할 뿐만 아니라 조기 정치교육이라는 장점도 있다. 투표연령 18세 인하로 ‘교실의 정치화’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최근 한국을 방문한 독일의 한 정치교육학자의 조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녀는 “한국은 투표연령 18세 인하를 논의하고 있지만, 독일은 이보다 낮은 16세로 내리려는 논의가 한창이다. 투표연령 인하는 학생이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인류발전에 기여할 방법을 찾아 실천하도록 돕는 교육의 이상과도 부합한다.”고 역설했다. 참고로 스위스연방헌법 136조는 정치적 권리를 다음 과 같이 규정한다. “① 18세 이상의 모든 스위스 시민은 정신적 질병이나 무능 때문에 법률적 능력을 결여한 경우가 아닌 경우에 모든 연방적 사안에 대해 정치적 권리를 가진다. 모든 시민은 동일한 정치적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② 모든 스위스 시민은 연방의회의 선거와 국민투표에 참여할 수 있으며, 연방적 사안에 대해 국민발안과 국민투표청원을 개시하거나 서명할 수 있다.”
(2) 지방정부의 직접민주제 활성화를 촉진하는 헌법규정을 두어야 한다. 제10차 헌법에 대의민주주의 와 직접민주주의를 적절히 결합할 것을 규정한 조항을 둠으로써 지방의 직접민주제를 활성화해야 한다. 그동안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주민과 시민단체 회원의 지방의회의 회의 방청권조차 현행 헌법의 대의민 주주의 원리에 위배된다고 판결16)하여 지방정부에 대한 주민통제를 제한하고 지방자치에 대한 주민불신 을 조장해왔다.
3. 지방의 직접민주제 개편 1) 주민투표법 전면개정 2004년 주민투표법 제정은 지방자치법에 규정된 주민투표법의 10년 입법지연을 깨고 지방자치에 주민 주권을 실현할 직접참정의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참여정부 지방분권정책의 대표 적 성과로 홍보된 주민투표법은 오히려 주민투표를 제한하는 법률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2017년 7월 헌법재판소는 기장군의 한 시민단체가 제기한 군의회의 상임위원회 방청불허 위헌소송에 대 해 주민의 권리보호이익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결정을 내렸다. 다만 8명의 재판관 중 3명의 재판관(안창호, 강일원, 이선애)은 대의제에 대한 주민통제를 중시하여 군의회의 상임위 방청거부가 주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였고 의사공개원칙을 위반하였다는 반대의견(2016헌마53)을 제시하였다.
(1) 주민투표법은 가장 중요한 사항을 주민투표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주민투표법 제7조는 ① 지방자치단체의 예산・회계・계약 및 재산관리에 관한 사항, ② 지방세・사용료・수수료・분담금 등 각종 공과금의 부과 또는 감면에 관한 사항, ③ 행정기구의 설치・변경에 관한 사항, ④ 공무원의 인사・정원 등 신분과 보수에 관한 사항, ⑤ 다른 법률에 의하여 주민대표가 직접 의사결정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는 공공시설 의 설치에 관한 사항(다만 지방의회가 주민투표의 실시를 청구하는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을 주민투표에 부칠 수 없도록 제한한다.
재정과 인사 및 조직과 같은 중대한 사항을 주민투표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직접민주제의 본질과 기능 을 결정적으로 훼손시킨다. 생업에 종사하는 시민은 중요성이 떨어지는 사항을 일일이 결정할 정도로 한 가하지 않다. 너무 중요한 사항이기 때문에 주민이 직접 결정하기 위해 주민투표가 필요한 법이다. 게다가 “주민대표가 직접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공공시설의 설치에 관한 사항”을 주민투표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주인-대리인관계(principal-agent relationship)를 뒤엎은 것이다. 주권자인 주민이 직접 결정 할 수 없거나 위임한 사항만 주민대표가 결정하도록 개정해야 한다. 의무적 재정주민투표제의 도입이 필요하다.
지방세와 연간 일정액 이상의 지방비가 소요되는 대단위 사업 등 중요한 재정사항은 자동적으로 투표에 부쳐져야 한다. 재정주민투표의 긍정적 효과는 스위스와 미국 사례를 통해 누누이 입증되었다(안성호, 2005: 270-281). 재정주민투표제 성공의 선결조건은 획기적 재정분권이다. 아울러 연간 지방비 부담액(3천억 원)을 터무니없이 높게 설정한 제주특별자치도 조례 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도록 예방책을 마련해야 한다. (2) 주민투표법은 최저 유권자 5%의 서명을 주민투표 청구요건으로 설정하고 있다. 주민투표법 제9조 는 주민은 유권자 총수의 20분의 1 이상 5분의 1 이하의 범위 안에서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정하는 수 이상의 서명으로 주민투표를 청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인구 100만 명 이상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유권자 5% 기준을 충족시키기란 쉽지 않다. 인구 중 70%가 유권자라고 가정할 때 인구 100만 명의 도시에서 주민투표를 청구하기 위해서 3만5천 명의 서명을 받아 야 한다. 인구 수백만 명의 광역지방자치단체에서 유권자 5% 서명요건은 상당한 재력과 조직력을 갖춘 단체가 아니면 엄두도 내기 어렵다. 서울시에서는 무려 3여만 명의 서명을 받아야 주민투표를 청구할 수 있다. 인구 8백30만 명의 스위스의 선택적 국민투표 청구요건인 유권자 5만 명 서명과 비교할 때 과도 한 청구요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과도한 청구요건이 주민발의 주민투표의 활용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3) 주민투표법 제24조는 “주민투표에 부쳐진 사항은 주민투표권자 총수의 3분의 1 이상의 투표와 유효투표수 과반수의 득표로 확정”되며, “전체 투표수가 주민투표권자 총수의 3분의 1에 미달되는 때에는 개표를 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유권자 3분의 1 유효투표율 요건은 주민투표의 정치인카르텔 견제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유효투표 율제로 인해 무효 처리된 주민투표는 서울시 무상급식에 관한 주민투표 외에도 그동안 실시된 8건 중 6 건의 주민소환투표가 있다. 주민투표의 남발을 막으려는 의도로 도입된 유효투표율제는 투표자를 처벌하여 투표불참을 유도하여 주민투표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확산시켰다.
스위스에서는 유효투표율제도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편투표제 도입, 투표일 연장, 전자투표 실험을 통해 투표율을 높이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심지어 투표불참자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경우도 있다. 유효투표율제도가 없는 스위스 에서는 투표남발 사례가 없다.
(4) 주민투표법은 선거와 주민투표의 분리를 규정한다. 주민투표법 제 11조는 “선거일 전 60일부터 선 거일까지 그 선거구에서 서명을 요청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동법 제14조는 이 기간에 주민투표일을 정할 수 없도록 제한한다. 아울러 동법 제21조가 주민투표발의일로부터 주민투표일 전일까지 투표운동기 간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 기간에는 투표운동도 금지된다.
이처럼 주민투표와 선거의 철저한 분리는 혼란과 타락을 예방하려는 선의의 입법 취지에도 불구하고 스위스와 미국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지나친 규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스위스와 미국에서는 선거와 동시에 시민투표를 실시해도 부작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민투표를 선거일에 실시하여 투표율을 올리고 경비도 절약한다.
(5) 주민투표법은 전반적으로 주민에 대한 주민대표의 우월성을 인정한다. 주민투표법 제8조와 제9조 는 중앙행정기관장이 국가정책에 관한 주민투표를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요구할 수 있고, 지방자치단체장 이 지방의회의 청구 또는 직권에 의해 주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아울러 주민투표법은 주민투표의 관리과정에서 지방자치단체장의 주도적 역할도 규정한다.
이와 같은 관주도 주민투표제는 그동안의 주민투표 활용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지난 12년 동안 실시된 8건의 주민투표 중 6건은 국가정책 수행을 위해 장관이 발의한 5건과 국가정책에 대한 주민의사를 묻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장이 발의한 1건이었다. 주민발의는 단 2건뿐이었다. 관제 주민투표(plebiscite)는 주 민 주도의 진정한 주민투표(referendum)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 조례제정개폐청구제도의 전면개편 조례제정개폐청구제도 역시 제도미비로 지방의회의 대표성 실패를 보완・예방・교정하는 직접참정제도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1) 조례의 제정과 개폐의 청구요건은 주민투표 청구요건보다 덜 까다롭다. 지방자치법 제15조는 시・ 도와 인구 50만 이상의 대도시에서는 유권자 총수의 10분의 1 이상 70분의 1 이하, 시・군 및 자치구에 서는 유권자 총수의 50분의 1 이상 20분의 1 이하의 범위에서 조례로 정하는 유권자 수 이상의 연서로 조례의 제정・개폐를 신청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조례제정개폐청구제도의 활용빈도는 15년(2000년-2015년) 동안 213건으로 주민투표제 활용빈도인 12년(2004년-2015년) 동안 8건보다 꽤 높다. 그 이유는 조례제정・개폐 청구요건이 주민투표 청구요건 보다 덜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례제정개폐 청구요건은 아직 스위스와 미국의 시민발안 청구요건 보다 훨씬 더 까다롭다. 가령 스위스의 한 시민이 연간 투표로 결정하는 평균 25건 중 10건이 한국의 조례제정개폐청구에 해당되는 26개 캔톤과 2,324개 코뮌의 주민발안 안건이라고 가정해보자. 캔톤과 코뮌의 이슈는 캔톤・코뮌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국의 조례제정개폐청구제도 활용빈도 213건을 계산하는 방식으로 스위스 캔톤과 코뮌에서 활용된 주민발안 건수를 계산하면 무려 수만 건에 달한다.
사실 스위스에서 주민발안 서명자 수는 캔톤과 코뮌마다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매우 낮다(안성호, 2005: 231-232). 흔히 유권자 1천-1만 명은 캔톤헌법의 개정을 발의할 수 있다. 심지어 글라루스 캔톤과 아 펜젤내곽 캔톤에서는 단 한 명의 유권자가 캔톤헌법 전면개정안을 발의할 수 있다.
(2) 매우 중요한 사항은 조례제정개폐청구의 대상에서 배제된다. 지방자치법 제15조는 “지방세・사용료・수수료・부담금의 부과・징수 또는 감면에 관한 사항”과 “행정기구를 설치하거나 변경하는 것에 관한 사항이나 공공시설의 설치를 반대하는 사항”에 대해서는 조례제정개폐청구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스위스와 미국에서는 지방세가 가장 중요한 주민발안의 대상이다. 심지어 스위스에서는 군대폐지 국민 발안까지 수용하여 국민투표에 회부했다. 물론 군대폐지 국민발안은 국가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국민투표에 부쳐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국민을 믿고 국민투표에 회부되었다. 이와 같이 스위스 시민발안 대상에는 사실상 제한이 없다.
(3) 현행 조례제정개폐청구제도의 가장 심각한 결함은 일정 수의 유권자가 서명요건을 갖추어 발의한 조례안 중 대다수가 의회에서 일방적으로 수정가결 또는 부결・각하・철회・폐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례 안을 발의한 주민은 의회의 일방적 조치에 대해 속수무책이다. 현행 제도는 주민이 발의한 조례안의 견 제 대상인 의회가 조례안의 최종 결정권을 행사하도록 방치하고 있다. 주민발의 조례안은 발의한 주민이 스스로 철회하지 않는 한 주민투표에 회부되어 주민이 수용 여부를 최종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진정한 주민발안은 반드시 주민투표를 거쳐 최종 확정되어야 한다.
주민소환제의 과제 주민소환제를 선출직 공직자에 대한 좀 더 강력한 주민통제수단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개혁이 필요하다. (1) 소환투표 청구요건이 까다롭다. 주민소환법 제7조는 시・도지사는 유권자 총수의 100분의 1 이상, 시장・군수・자치구청장은 유권자 총수의 100분의 15 이상, 지방의원은 유권자 총수의 100분의 20 이상 서명으로 소환투표 실시를 청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시・도지사와 광역지방의원에 대한 소 환투표를 청구할 때 당해 시・도 관할구역 안의 시・군・자치구 전체의 수가 3개 이상인 경우 3분의 1 이 상의 시・군・자치구에서 유권자 총수의 1만분의 5이상 1천분의 10 이하의 범위 안에서 대통령령이 정하 는 수17)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당해 시・도 관할구역 안의 시・군・자치구 전체의 수가 2개 주민소환법시행령 제2조에 의하면, 시・도지사는 해당 시・군・자치구별 유권자 총수의 100분의 10 이상, 시장・군수・자치구청장은 해당 읍・면・동별 유권자 총수의 10분의 15 이상, 지방의회의원은 해당 선거구 안 의 읍・면・동별 유권자 총수의 100분의 20 이상의 서명으로 소환투표를 청구할 수 있다. 다만 이 방식으로 산정된 서명인 수가 소환대상자의 선거구 유권자 총수의 1만분의 5 미만인 경우에는 1만분의 5, 1만분의 100을 초과하는 경우에는 1만분의 100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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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경우 각각 유권자 총수의 100분의 1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이 제도가 시행된 지 9년 동안 시도된 60여 건의 소환투표 청구서명을 받는 작업이 청구요건을 충족 시키지 못했다. 청구인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청구인의 고른 지역분포를 요구하는 조건이 너무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물론 서명요건의 완화는 소환투표 청구의 남발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지방정치인에 대한 심각한 주민불신을 해소하려면 소환투표 청구의 중도 포기사례를 크게 줄여야 한다. 스위스와 미국의 경험은 서명요건 완화로 인한 활용빈도 증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주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적절히 설계된 주민소환제는 장기적으로 자주 활용되지는 않을지라도 선출직 공직자의 일탈을 막고 근신을 촉구하는 심리적 효과가 크다. (2) 주민소환법 제22조는 주민소환이 유권자 총수의 3분의 1 이상의 투표와 유효투표 총수 과반수의 찬성으로 확정되도록 규정한다. ‘유권자 3분의 1’ 유효투표율제는 주민소환제도를 무력화시켜온 주범이 다. 이 제도가 시행된 지 9년 동안 실시된 8건의 주민소환투표 중 6건이 유효투표율제의 장벽을 넘지 못 해 소환에 실패했다. 결국 유권자 3분의 1 유효투표율 요건이 선출직 공직자의 보호막 역할을 수행했다.
Ⅶ. 맺음말
대의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유일하고 최종적인 대안으로 간주하는 견해는 민주주의의 발전 가능성을 가로막는 위험한 발상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민주주의는 세 단계를 거쳐 발전해왔다고 볼 수 있다. 첫 단 계는 아테네와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발달한 고전적 직접민주주의이다. 고전적 직접민주주의는 대면 접촉이 가능한 도시국가에서 참정권이 남성에게만 주어져 여성과 노예를 배제시켰다. 그러나 민주주의 원칙은 준수되었고 여기서부터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가 태동했다. 둘째 단계는 대의민주주의이 다. 미국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은 민주주의를 간접참여의 대표원리로 확장하여 국민국가의 거대한 영토에 적응시켰다. 셋째 단계는 준직접민주주의이다. 스위스의 준직접민주주의는 이전의 두 민주주의를 결합해 민주주의의 품질 향상을 도모했다. 미래학자 A. Toffler & H. Toffler(1994)는 지식정보시대 “신문명 창조의 제3물결 정치”는 준직접민주주의를 포함한 분권개혁을 요구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2007년 UN이 채택한 국제지방분권지침은 미래의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의 적절한 결합”이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이번 제10차 국민주권 개헌으로 실효성 있는 국민발안/투표/소환제를 도입하고 지방의 직접민주제를 확충하는 것은 교조적 대의민주주의 맹신으로 위기에 처한 대의민주주의를 구출하고 통일 한국의 신문명을 창조하는 분권국가의 길에 들어서는 역사적 선택이 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