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이 닿지 않은 길을 걷고 싶은 게 모든 산꾼들의 소박한 바램일 것.
기백산은 이런저런 코스로 세 번이나 올랐었기에 다른 루트를 찾고 있었다.
용추계곡은 1,000m급의 산들을 좌우로 품고있어 베이스캠프로 이용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외도 계획은 산행안내를 맡아달라는 엄대장의 부탁으로 켄설되고 다시 한 번 추억의 산길을 오르기로 하였다.
정상에서 누리게 될 전망을 기대하면서...
더 이상 기운을 주체하지 못한 대간줄기는 남덕유산에서 가지 하나를 더 친다.
남령을 지나 월봉산에서 금원 기백을 거쳐 광제 집현산까지 장장 160km를 달려 남강댐에 몸을 푸니 이를 진양기맥이라고 부른다.
진양기맥상에서 유달리 우뚝 솟은 기백산(箕白山·1331m)은 함양과 거창의 군계(郡界)에 놓여있어 두 지역의 날씨변화를 제일 먼저 알려줘
'비의 징조를 안다'는 의미의 지우산(智雨山)으로 불렸다.
이는 일기예보가 없던 옛날에 높은 산에서 비구름이 묻어오는 것으로 날씨를 점쳤던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서 비롯된다.
지우산에 비내리면 지우천(智雨川)엔 물길이 넘쳐 용추계곡(龍湫溪谷)이 된다.
계곡이 깊고 수려할 뿐아니라 크고 작은 암반과 소가 많아 숱한 용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용이 되고팠던 용추폭포의 이무기는 108일 금식기도를 채우지 못하고 성급하게 승천하다 그만 꼬꾸라졌다는 전설이 있다.
해인사보다 규모가 컸다는 대가람 장수사(長水寺)는 일주문 외엔 이렇다할 유물하나 남겨놓지 못하고 황량한 공터로만 남아있어 쓸쓸함을 더한다.
용추계곡을 중앙으로 마주보는 황석산성에선 임진왜란시 왜군과 맞섰던 함양군수 조종도와 안음현감 곽준이 전사하였다.
또한 마지막까지 맨주먹으로 싸우다 죽은 안의면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특히 용추사에서 마주보이는 피바위는 아녀자의 몸으로 왜군에 항거하다 천길 절벽으로 몸을 날린 옥녀부인과 부녀자들의 슬픈 역사가
40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한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진양기맥
휴가철을 맞은 용추계곡은 인파로 넘쳐난다.
통제원의 안내에 따라 우리 버스는 장수사지로 올라와 주차를 한다. (사진은 일주문이 있는 아래의 주차장 쪽을 바라보고 잡았다.)
대강 채비를 갖추고 금방 기백산 들머리에 닿는다.
안내판과...
이정표가 있는 들머리. (기백산 4.2km)
너덜 같기도 하고 또 박석을 깔아놓은 듯한 오름길을 서서히 고도를 높혀간다.
이정표는 귀찮을 정도로 친절히 안내한다.
# 2
# 3
우측 겨드랑이 밑으로 도숫골 물소리가 요란하게 따라오더니 이젠 도숫골을 건넌다.
잦은 태풍의 영향인 듯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오고 기온은 그리 높지는 않다.
도숫골릐 건너면서 만난 이정표.
계곡을 밀어내고 능선으로 붙으면서 만나는 주능 안부.
주능 안부의 이정표.
우리는 능선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산중 뷔폐식당을 차렸다.
훨씬 수월해진 오름길.
조망처에서 바라보는 황석산 라인.
우측 능선으로 이어진 정점에 금원산이 고개를 내밀고,좌측으로 월봉산과 더멀리 남덕유의 실루엣이 아련한 자태를 드러낸다.
정상부위에 자리잡은 누룩덤이 한층 가까이 다가오고 멀리 말잔등같은 능선이 금원산까지 이어져 있다.
당겨본 누룩덤의 모습은 영락없이 누룩을 포개놓은 것 같기도 하고,다시 보면 책을 포개놓은 듯도 하다.
나란히 서 있는 또다른 암봉 역시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다시 한 번 기백산 고스락에 섰다. 함양군에서 세운 새 정상석이 기백산의 품격을 높혀준다.
.
허물어진 돌탑에 초라하게 선 예전의 정상석은 이렇게 홀대를 받는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금원산과 이어진 능선. 기백산과 금원산은 3.5~4km의 잘빠진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일행이 가져온 산성탁주 한 모금은 정상주로서 손색이 없다.
누룩덤 아래의 30도 경사진 바위를 건넌다.
머리위에는 누룩덤(일명 책바위)이 보이고...
돌아본 누룩덤.
잘빠진 암릉 너머로 제2의 누룩덤과 금원산이 보인다.
좌측으로 우리가 내려갈 시흥골이 깊어 보인다.
진행능선 우측으로 금원산에서 흘러내리는 능선 끄트머리에 현성산의 암봉이 도드라져 보인다.
제2의 누룩덤.
준수한 모습의 매끈한 능선길은 산객의 질주본능을 자극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바쁠 것도 없는 산중에서 한 때의 망중한은 장수의 보약이 틀림없으리라.
돌아본 누룩덤.
돌아본 모습.
숲속 한 켠의 원추리 한 송이.
터닝 포인터이다. 우리는 좌측 시흥골(사평입구 2.9km)로해서 원점회귀를 해야하고,금원산은 직진으로 2.5km가 남아 있다.
자세한 이정표
다시 만나는 이정표.
물소리가 들리더니 좌측 암반으로 타고 내리는 몇십 미터의 와폭이 볼 만하다.
계류를 건너고...
이정표
.
하산길은 이어진다.
우측 아래의 시흥폭포는 수림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물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려 귀가 먹먹하다.
깨끗한 암반을 한참이나 흐르는 와폭의 물보라는 주위 수림을 온통 물방울로 흠뻑 적시고 있다.
이정표.
사평마을(황석산장)에 닿기 전에 세워진 이정표
조그만 다라를 건너기 전의 황석매점(황석산장)이 우리가 내려온 지점.(다리를 건너면 화장실이 있다.)
계곡 우측으로 뚫린 우리가 내려온 길.
안내판.
이정표엔 거망산이 3.36km, 기백산이 4.4km이다.
땀에 절은 모습으로 용추계곡으로 내려가서 홀라당 용추계곡수에 전신을 담근다.
그 알싸한 느낌~
주차장으로 내려가다 만나는 거망산 들머리(지장골)의 이정표와...
이웃하고 선 지장골 안내판.
용추사 철다리를 건너...
고색이 창연한 담벼랑을 따라 들어가면...
만나는 용추사.
용추사(龍湫寺)는 신라 소지왕 9년(487)에 각연대사(覺然大師)가 창건한 옛 장수사와 4대 부속 암자중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이다.
6.25동란때 소실되어 1953년 안의면 당본리에 있는 봉황대에 별원을 차려 놓았다가 옛터의 복원을 추진하여 1959년 재건하였다.
주변 경관이 수려한 자연속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 장수사의 흔적을 간직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4호인 『덕유산 장수사 조계문(德裕山長水寺 曹溪門)』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보존 되어 있으며, 이곳 장수사에서 설파 상언대사(雪坡 尙彦大師)가 전국의 승려들을 모아놓고 화엄경(華嚴經)을 강의 했던 유명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안내판.
명부전(冥府殿) 계단 아래에 주지스님인 선해(善海)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명부전에는 경남 유형문화재 제380호인 용추사지장시왕상(龍湫寺地藏十王像)이 있다.
지장상을 중심으로 향우측에 도명(道明), 반대쪽에 무독귀왕(無毒鬼王)이 시립하고 있으며, 그 좌우측에는 시왕상(十王像)이 각 5구씩 배열되어 있다.
용추사지장시왕상(龍湫寺地藏十王像)
지장보살상은 등을 세우고 얼굴을 약간 내민 상태의 가부좌 모습으로, 양손은 별조하여 끼웠으며 제1지와 제3지를 구부려 맞대고 있다.
상호는 방형으로 가늘고 긴 눈, 우뚝 솟은 콧등이 특징이 있으며, 목은 짧은 편으로 삼도를 얇게 각인하고 있다.
대웅전 우측에 있는 삼성각 주련(柱聯 )엔...
隨緣赴感澄潭月(수연부감징담월) 인연 따라 감응함은 맑은 못에 달 비친 듯
空界循環濟有情(공계순환제유정) 허공계 돌고 돌며 중생을 제도하네.
삼성각(三聖閣)의 내부모습.
왼쪽으로부터 산신, 칠성, 독성이 모셔져 있으며,탱화는 상주 노악산의 남장사에서 보았던 목각탱화다.
가운데 보이는 칠성여래는 좌우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왼쪽의 산신은 산삼을 왼손에 쥐고 오른손을 호랑이 머리위에 올려놓은 모습이다.
그리고 오른쪽의 독성은 염주와 지팡이를 들고 수행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삼층석탑 앞의 석등 아래엔 수행승이 발우(鉢盂)를 들고 공양하는 모습이 보인다.
용추사 대웅전엔 여의주를 문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길게 내밀고 있다.
곱게 단청을 한 처마밑 주련의 글귀를 자세히 살펴보면...
佛身普遍十方中(불신보편시방중) 부처님의 몸은 온 세상에 두루 계시니
三世如來一切同(삼세여래일체동) 삼세의 여래가 모두 같은 한 몸이네.
廣大願雲恒不盡(광대원운항부진) 크나큰 원력은 구름같이 항상 다함이 없어
汪洋覺海渺難窮(왕양각해묘난궁) 넓디넓은 깨달음의 세계 아득하여 끝이 없네.
처마를 완전 받치고 선 두 마리의 용두(龍頭)
용의 몸통은 대웅전 대들보를 뚫고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 있다.
용추폭포가 있어 용추계곡과 용추사가 생겼을까? 龍을 형상화한 용추사의 모습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대웅전엔 삼존불(三尊佛)이 모셔져 있다.
두 기의 석등 중 좌측의 석등 아래엔 석등을 엎드려 받치고 있는 두 사람의 고통스런 모습이 보인다.
강화도 전등사 처마를 받치고 있던 나부의 모습과 전설이 생각난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엎드린 고통스런 모습 뒤에도...
역시 무거운 등짐 진 고통스런 모습이 있다. 사찰을 중창할 때 농땡이를 친 죗가가 커서일까?
아니면 부정으로 자금을 횡령한 죄를 저질렀나? 우째 익살스럽기도 하지만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 같다.
절문을 나서려 하는데, 정면으로 보이는 산자락에 전설의 피바위가 보인다.
살짝 당겨보며 400여 년 전의 피의 전설을 떠올린다.
의분(義憤)의 옥녀부인과 조선의 애국열녀들은 왜군들의 잔학한 총칼을 피해 피바위에서 몸을 던졌으니 지금도 붉은 선혈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남아 있다고 한다.
절문을 나서 계곡의 우렁찬 폭포소리를 향하여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도로를 따라 내려가야만 폭포의 전체를 감상할 수 있다.
엊그제 내린 많은 비의 영향으로 용추폭포는 대단한 위용을 자랑한다.
폭포수가 뿜어내는 서늘한 기운이 확 밀려온다.
마침 전날까지 장맛비가 쏟아져 높이 18m에 달하는 이 폭포는 위용이 대단하다.
밤새 내린 비를 잔뜩 품고 무서운 기세로 폭포수를 토해내고 있다.
폭포 아래에서 더위를 식히는 피서객들.
우리 버스가 대있는 주차장의 용추사 일주문은 원래 장수사의 일주문이였다.
용추사는 신라 소지왕 9년(487) 각연대사가 지은 장수사에 속해있던 암자였고,장수사는 6.25 전쟁때 불타 버리고 문만 남아 있다가 1975년에 복원되었다.
화려한 팔작지붕에 다포계 건물로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하는 공포가 빽빽하게 있으며 일주문으로는 대단히 큰 규모이다.
남쪽으로 향한 정면 현판에 덕유산장수사조계문(德裕山長水寺曹溪門)이라 새겨져 있다.
안내판
.
대가람이었던 장수사는 해인사보다 규모가 컸다고 했다.
현재 일주문은 기둥이 두 개인데 하나는 싸리나무 하나는 칡나무로 세아름씩이나 되며 경남 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어 있다.
단청은 많이 바래져 있지만...
용트림하듯 뒤틀린 기둥의 배흘림이 아주 돋보인다.
수백 년 영화(榮華)는 한 줌의 재로 화하고 숱하던 고승(高僧)과 선사(禪師)들도 다 사라졌다.
남은 장수사지(長水寺址)엔 현대인들의 어지러운 발길만 무성하다.
쓸쓸하게 겨우 버티고 선 장수사 일주문만이 무심(無心)한 산객(山客)의 허트러진 상념(想念)을 붙들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