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1일 연꽃과 아시아 문화 축제
“어릴 적 외할아버지댁의 작은 정원은, 나에게 정글이었고, 낙원이었고, 또 탐험처였다. 색이 곱고 향기로운 여러 가지 꽃과 그 열매를 좋아했던 다섯 살의 나는, 호기심 반 식탐 반으로 할아버지 정원의 거의 모든 꽃과 열매를 다 맛보곤 했다. 그러다 할아버지에게 혼나기도 하고 독이 있는 꽃에 취해 탈이 나기도 했지만, 알록달록한 꽃과 열매를 보고 있노라면, 참을 수가 없어져 결국 씹어 먹곤 했다. 지금도 들꽃이나 화단의 꽃을 보면 각각 달콤 쌉싸름했던 맛과 씹히는 감촉 그리고 향이, 그 이름보다 먼저 번쩍하고 떠오른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꽃꽂이를 배우시면서 연밥이란 걸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침봉에 예쁘게 꽂혀있던 연밥이었다.) 꼭 샤워기 머리처럼 생긴 깔때기 모양 속에 깊숙하게 박혀있는 연씨를, 손가락으로 살살 돌리면서 구멍을 살살 늘리면 간신히 연씨를 뺄 수 있었다. 옅은 초록색의 속껍질을 돌려 까면 연한 노랑의 연씨가 속살을 드러낸다. 그 아삭하고 고소한 맛이라니! 그러나 정작 연꽃을 맛볼 기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직까지는...”
아침 7시 30분에 뉴저지 팰팍에서 밴을 타고 출발, 차로 4시간 반을 달리는 동안 청년부 법우들과 밀린 이야기도 하고 휴게소에서 커피도 마시며, 오랜만에 야외로 그것도 손꼽아 기다리던 연꽃 축제로 달려가던 중이었다. 남쪽으로 갈수록 하늘이 점점 구름으로 어둡게 내려앉더니, 기어이 후둑후둑 굵은 빗방울을 뿌리는 것이다. 그래도 연꽃 축제가 열리는 Kenilworth 수생 식물원은 비가 심하게 오지 않길 간절히 바라면서.... 도착해보니, 간간히 보슬비가 비치는 정도여서 다행이었다. 몇몇 우비를 입은 아이들과 우산을 준비한 사람들을 지나치며 워싱턴 쪽의 날씨는 분명 아침부터 비가 내렸음을 짐작 할 수 있었다. 행사장에 다다르니, 마침 이송희 선생님의 한국무용 공연이 무대 위에 펼쳐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카메라에서 셔터 돌아가는 소리가 바쁘게 터져 나온다. 나도 그 사이에 비집고 들어갔다. 언제 들어도 흥겨운 장구 소리와 아름다운 한복 속에 깃든 가녀린 듯 힘이 넘치는 춤사위의 매력에, 관중의 눈과 귀는 온전히 무대위에 고정 되어있었다. 휘몰아치듯 숨 가뿐 호흡에 이어 구성진 장단이 한동안 이어지면서 아쉽게 공연이 끝났다. 그 여운을 음미하면서 작년보다 한층 다양해진 부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처음 참석했던 작년보다는 한결 느긋한 마음으로, 한국 부스를 먼저 돌아보았다. 우선 동양화 부채를 그리고 계신 박영자 선생님이 눈에 띠었다. 곱게 한지를 붙인, 접었다 폈다 하는 합죽선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단선 위에 아름답고 단아한 수묵화를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을 담아 한 손에 쥘 수 있게 만들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특히 빨간 매화가 그려진 부채는 한여름의 더위도 물리칠 듯이 고고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동양화 부채가 어른들에게 큰 인기를 끄는 동안, 저만치 떨어진 연꽃 종이접기 코너에서는, 어린이들의 관심을 끌만한 연꽃과 복주머니 등 보기에도 앙증맞은 색색의 종이접기 모형과 다양한 종류와 크기의 색종이와 색한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 사이로, 전통의상을 입은 각 나라 대표 무용수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만의 종이접기에 몰두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매년 열리고 있는 어린이 연꽃 그리기 대회에 출품하기 위해,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중에도 화판 위에 도화지를 끼우고 파스텔로 연꽃을 자기 나름의 표현으로 멋지게 그리는 아이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외국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연꽃 모자 만들기 부스에 올해에도 원적화 보살님이 오셔서 반가웠다. 대한불교 진각종, 법광심인당의 컵 등 만들기 텐트에서는 한 중년의 미국 여성이 배운 것 보다 더 꼼꼼하게 연등을 만들고 있었다. 연주정 전수로 부터 오늘 본 연등 중에서 최고라는 칭찬을 들으며 무척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어느새 출출할때 쯤,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고, 연차시음으로 목을 축이고 나서, 올해 연꽃축제의 큰 변화로 소개되고 있던 여러 아프리카 관련 부스들과 공연단의 무대를 기다리는 동안 짬을 내어 본격적인 연꽃감상에 나서기로 했다.
작년에는 연꽃 장관에 취해 사진도 제대로 못 찍고 허둥대다, 미처 연꽃을 찬찬히 보지 못했다. 지난 일 년 동안 별러왔던 순간이 온 것이다.
“가랑비 그친 연잎속에
또르르 모인 빗방울이
바람에 살랑이는 대로
동글동글, 울렁울렁
자리 잡는듯 하다 그만,
촤르륵! 쏟아져 버렸다.
촉촉하게 빗물에 세수한 연꽃은
조금은 수줍은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가랑비가 다시 내리자,
연잎이 속닥속닥 속삭인다.
연잎과 빗물이 빛여내는
보석같은 투명한 수다에
나도 또르르 귀 기울인다.
투둑투둑 속닥속닥
아뿔사! 연꽃과 그만 눈이 마주쳐 버렸다.”
연근, 연씨 그리고 연잎 차는 먹어 보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연꽃의 맛이다. ‘빗물에 뒤집어진 연꽃잎 중 하나만 뜯어도 될까요? ’ 지나가는 공원 레인저에게 차마 못 물어봤다. 괜히 애꿎게 함께 사진을 찍던 지인에게 재촉한다. “꺽어진 꽃잎은 괜찮잖아.... 하나만 주워 줘, 응?” 어이없는 얼굴로 분홍색 꽃잎 하나를 주워준다. 기대를 잔뜩 하고 한입 두 입 베어 물었다. ‘윽... , 쓰다. 이럴수가 ....’ 흠, 그러고 보니, 장미도 흰색은 맛있다. 다음엔 백련으로.
한걸음 옮길 때 마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행사장에서 공연이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부스에서는 전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의 생일을 맞아 특별한 행사를 준비했고, 또 다른 아프리카의 전통음식 부스에서는 다른 곳에서는 맛보기 힘든 세네갈의 전통음식을 팔고 있었다. 아침에 직접 갈아 왔다는 생강 주스와 히비스커스 주스는 상큼하고 시원했다. 연꽃축제가 매개체가 되어 아시아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와 교류하고 우의를 다지는 자리로 성장하게 된 이번 축제는 여러모로 그 의미가 깊어지는 행사였다고 생각한다. 나 혼자만의 능력으로 충분히 살아갈수도 있는 세상일 지라도, 연못속의 연근이 뻗어나가 듯이 문화와 관습이 다른 이웃이라도 손을 내밀고 서로의 차이점을 배우고 이해한다면, 세상이 조금 더 평화로운 곳이 될것이라고 생각한다.
내년에도 이 경이롭고 아름다운 연처럼 따뜻한 축제에는 더 많은 사람이 참가해 즐겁고 향기로운 하루를 나눌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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