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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어르신 빈소를 찾다 ©최영숙
2월 1일 김복동(金福童, 1926년 4월 24일 - 2019년 1월 28일) 대한민국의 인권운동가이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던 김복동 할머니의 장례식이 있었다. 할머니는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14세 무렵 위안부로 끌려가 나라 잃은 여성으로서 혹독한 삶을 살았다
▲ 윤미향(정의기억연대 대표) 김복동 어르신 관 위에 "훨훨 날아 평화로운 세상에서 길이길이 행복을 누리소서"기원을 적다 ©최영숙
윤미향(정의기억연대 대표)는 김복동 어르신 관 위에 "훨훨 날아 평화로운 세상에서 길이길이 행복을 누리소서"라고 기원을 적었다.
▲ 윤홍조 마리몬드 대표가 눈물 짓다 © 최영숙
김복동 어르신은 위안부 피해자임을 말하기도 힘든 시절, 피해자 등록을 하면서 가족과의 연도 끊겼다고 한다. 그 후 세계 여러 곳을 돌며 여성의 인권을 신장시키기 위해 활동했다. 67주년 세계 인권 선언의 날을 맞아 대한민국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2015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훈장을 받았다. 1993년 유엔인권위원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처음으로 파견되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유럽 등 여러 곳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 서울시청 전광판에 김복동 할머니의 생전 화면이 뜨다 © 최영숙
6시 30분 세브란스 병원에서의 발인식이 끝나고 서울시쳥으로 향했다. 서울시청 전광판에는 김복동 할머니 인터뷰 내용이 자막이 나왔다. 27년 전 수요 집회에 나가면 "남사스럽게 뭣 하러 저런 짓 하냐고" 손가락질 하던 행인들의 지적에 상처받았을 피해자 분들의 삶을 보면서 나는 또 어떠했는가? 싶었다. 감추고 싶지는 않았는지, 속상함이 창피함을 넘지 못했던 미숙함은 없는가 물었다. 이제는 많은 이들이, 세계가 어르신들의 아픔을 동조한다. 그렇게 되는데 27년이 걸렸다. 그러함에도 아직도 일본의 사과를 받지 못하고 천추의 한을 품은 채 할머니들이 돌아가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등록된 할머니들이 23분이 남았다.
▲ 2014년 1월28일 황금자 할머니 장례식에서 © 최영숙
그러나 여자로서 차마 겪기 힘든 고통의 세월을 살아내신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은 고귀했다. 2014년 1월2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황금자 할머니 장례식이 강서구민장으로 치러졌다.
1924년 함경도에서 태어난 황 할머니는 13살 때 길을 가다 일본순사에게 잡혀 흥남의 유리공장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1940년에는 간도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로 갖은 고초를 겪었다. 황 할머니는 광복 후 고국으로 돌아와 식모살이와 폐품수집으로 어렵게 살았다. 여자아이를 입양했지만 그 아이도 10살 때 사망하여 홀로 외롭게 사셨다.
황 할머니는 1994년부터 강서구 등촌2동에 거주하며 겨울에도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겉옷을 입고 냉방에 지내셨고 정부보조금을 쓰지 않고 아끼셨다. 폐품수집과 정부보조금을 아낀 돈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총 1억 원을 장학금으로 강서구에 냈다. 또한 남은 재산도 사회에 환원하는 유서를 작성했다.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 떠나셨다.
김복동 어르신도 2012년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쉼터'에서 함께 기거하는 길원옥과 함께 '나비기금'을 발족시켰다. 나비기금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일본의 공식 사죄와 함께 이뤄질 법적 배상금 전액을, 전 세계 '전쟁 중 성폭력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각종 폭력에 고통 받는 여성들을 위해 기부하는 기금이다. 당신들을 위해 쓰시고 가셔야할 유산들을 모두 사회에 환원을 하셨다. 부끄럽고 죄송할 따름이었다.
▲ 김복동 어르신 나이와 맞게 94개의 만장을 들고 뒤 따르다 © 최영숙
서울시청에 집결한 1000여 명 시민들은 ‘일본군 성노예 조속 사과’, ‘아베 없는 일본! 평화로운 동북아’, ‘통일의 나비가 되어다오’, ‘당신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나 같은 희생자가 다시는 없기를’, ‘우리의 영웅! 김복동’, ‘민족의 힘을 키우자’, ‘일본은 사죄하라’ 등의 할머니 연세와 맞게 94개의 만장과 노란나비를 들고 뒤따랐다.
▲ 일본의 사죄를 소리쳐 외치다 © 최영숙
시민들은 일본대사관 앞에서 김복동 할머니가 그토록 원했던 '일본의 사죄'를 소리 높여 외쳤다.
▲ 영결식은 10시 30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엄수됐다. © 최영숙
영결식은 10시 30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여성운동가 故 김복동 시민장으로 엄수됐다. '바닥소리'의 여는 공연으로 시작되었다. 묵념과 추모영상, 할머니 소개, 추모사, 살풀이 호상 인사와 헌화 순으로 이어졌다.
▲ 14살에 끌려가는 모습을 그린 김복동 할머니 그림 © 최영숙
노란나비들 사이로 14살 일본군에게 끌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김복동 할머니의 그림을 보는데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14살이면 중학교 1학년이 아닌가? 가슴이 저려왔다.
▲ 장순향(한국민족춤협회 회장)의 살풀이 © 최영숙
"이제는 모든 아픔 다 잊으시고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시라고" 살풀이춤을 보면서 기원 드렸다.
▲ 망향의 동산에 안장되다 © 최영숙
김복동 어르신은 망향의 동산에 안장되었다. 돌아가시면서도 '일본의 사죄'를 받기를 원하셨지만 끝내 받지 못하셨다.
▲ 2015 12월 30일 수요 집회에 나오신 이용수 어르신 © 최영숙
2015년 12월 30일 수요 집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1928년생) 할머니가 발언을 했다. “일본은 아직까지 거짓으로 해나왔습니다. 우리들 아직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있기에 저는 끝까지 일본에게 공식적인 사죄와 법적인 배상을 요구합니다. 귀가 먹었으면 귀가 뚫렸을 것이고, 눈이 멀었으면 눈을 떴을 것입니다. 24년간 외쳤습니다. 일본에게 사정하는 것 아닙니다. 일본은 가만히 있어도 사죄를 해야 합니다. 내가 집집이 찾아가 내가 일본에게 이렇게 당했습니다. 말 할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 나옵니다. 아베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립니다. 죄를 지고도 죄를 모르고 거짓말만 하는 아베를 보고만 있어야 하겠습니까?”고 성토했다.
또한 우리 정부에 대하여 “거짓말도 자꾸 하면 늡니다. 거짓말로 타결했다. 해결했다. 맘대로 입을 벌리고 보도했습니다. 미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해결했다는데 기분이 어때요. 어처구니가 없어요. 우리 정부는 뭐하는 겁니까. 외교통상부요. 어제 차관이 왔습니다. 뻔뻔스럽게 와서 벽살 들고 흔들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공휴일이라서. 피해자인 우리에게 협상하는 것을 안내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왜 일본과 짝짝궁이 되어 거짓으로 우리를 두 번 죽입니까? 우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우리는 조선의 딸로서 곱게 자란 죄밖에 없습니다. 나는 위안부가 아닙니다. 나는 이용수입니다. 나를 끌고 가서 위안부를 만들고 그 죄를 모르고 아직도 오리발 내미는 저 일본을 그냥 둬야 하겠습니까?”고 발언을 하면서 서러움과 분함에 울먹였다.
▲ 이용수 어르신 눈물짓다 © 최영숙
수요 집회에서 용감한 투사셨던 이용수(1928년) 어르신이 김복동 어르신을 떠나보내시면서 또 우셨다. "일본에서 꼭 사과를 받아야 한다. 내가 200살까지 살아야 사과를 받을듯하다. 내 나이 92세다. 일하기 딱 좋은 나이다. 꼭 사죄를 받아야 내가 죽어서도 만나서 말 할 수가 있다."하셨다.
▲ ©최영숙
성안에서 올라온 홍민(2001년생)학생은 “작년 8월 15일 수요 집회 때 뵈었다. 당시 어르신이 ”일본은 사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과 못 받고 돌아가셔서 속상하다. 저희보다 어린 나이에 힘든 일 당하시고...” 목이 메어 인터뷰를 이어갈 수 없었다.
▲ © 최영숙
붉은 꽃잎으로 떨어졌던 소녀가 거리의 투사가 되었다. 여성인권운동가로 삶을 마감한 김복동 어르신께 깊은 존경을 드린다. 무너질 수 있었음에도 굳건히 일어섰고, 손가락지를 했던 그 시대에 그 손가락질을 하던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부끄럽고, 죄송하고 당신들의 고통를 함께 느낄 수 있게 생각을 바꿔갔던 것이다. 장장 27년 동안, 한 결 같이 한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생각했다. 일본은 카운트다운을 세고 있을지 모른다. 시간이 가면 생존 위안부 피해자가 0로가 될 테니까. 이제 공식적인 위안부 할머니들이 23분밖에 남지 않았다. 역으로 말하면 그만큼 시간이 없는 것이다. 어르신들의 한을 기억하고 있는 또 다른 '내가 김복동', 황금자' 등이 수요 집회를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너무 늦었지만 그만 이 역사의 고리를 끊고 양국이 새롭게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댓글 아! 부디 다음 세상에서는 전쟁 없는 곳에서 편히 쉬소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곳에서는 그 절망과 고통 한 줌도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