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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1)
건강한 나라를 위하여
又松 鄭 雲 宗 지음
발행 태봉출판사
미수(米壽)에 다시 책을 내면서
내 나이 벌서 88세, 아무리 100세 시대라 해도 살만큼 산 나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평생 글을 쓰며 살아온 지난 60년 세월이 정말 꿈만 같다.
내가 신문기자가 된 것은 1965년 7월 어느 날 오후 창간작업이 한창인 신아일보 장기봉 사장을 만나 긴 면담의 시간도 없이 내가 첫눈에 드셨는지 그때 실세였던 정도현 편집국장에게 조사부에 앉히라는 지시에 따라 매일 신문 스크랩하는 업무가 주어진 것이 그 첫 출발이었다. 그때로부터 꼬박 60년, 부끄럽지만 글 쓰는 직업으로 한평생을 살아온 한 인간의 고뇌에 찬 증언이 ‘건강한 나라를 위하여’란 이름으로 얼굴을 내밀어본다.
책 제목에 ‘건강한 나라’를 강조한 것은 내가 처음 세상에 내놓은 자서전 ‘건강한 사회를 위하여‘에서부터 나라 걱정을 하며 한평생 글을 썼기에 갈수록 나라 걱정이 태산 같아진데 연유한다면 과욕일까. 가정 사회가 건강해야 나라도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전제위에서 이 책이 우리가 처한 국가 사회의 현실을 바로 진단하고 무엇이 나라의 건강을 위해 필요한가를 생각해 보는데 도움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말로는 ‘문화 대 국민’이라고 자처하면서 민도는 후진국에서 헤매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여생 이 책으로 유언을 대신하고 싶다.
뒤늦게 족보를 보고 안일이지만 선친께서 내 이름대신 쓰기를 원하셨던 자(字)가 치국(致國)이었다. 致家 보다 치국을 앞세우신 아버님의 깊은 뜻을 이 제야 깨닫게 된 것은 일생동안 써온 글이 나라걱정과 무관하지 않았음에 새삼 놀라움과 함께 아버님께서 자식의 운명을 일찍이 간파하신 것 같아 새삼
경탄을 금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지난날 내가 글을 써야 했던 그 많은 소재들을 돌이켜보면 나라 안팎 사정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나라 전체로 보면 시련과 좌절, 도약과 웅비로 희비가 엇갈린 반세기, 글의 소재도 시국과 무관하지 않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어린나이에 8·15 광복의 기쁨을 맞는 가 했더니 6·25 전쟁으로 온 나라가 초토화 되고 4·19, 5·16, 6·3사태, 10·26, 12·12, 5·18, 6·29, 문민정부, IMF,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그리고 박근혜 이명박 노무현 문재인 윤석열 정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평생 우리가 겪으며 산 격동의 역사였다.
예상치도 못한 대통령 탄핵으로 정국이 소용돌이치고 8·15 광복 직후의 좌우대립보다 더한 남남갈등으로 홍역을 치르면서 글 쓰는 직업도 그 만큼 피곤했고 고통스러웠다. 평생 언론에 몸담았지만 과연 ‘파사현정 정론직필’을 사명으로 하는 언론인으로 부끄러움이 없었던가.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음도 솔직히 고백한다.
다시 한 번 미수(米壽)가 되도록 옆에서 버팀목이 되어준 아내와 아들 딸 4남매에게 고맙다는 말을 빼놓을 수 없고 이런 저런 인연으로 지금까지 나와 애환을 함께한 친척 친지들에게 감사하며 보잘 것 없는 이 책이 88년을 살아 온 한 인간의 가식 없는 족적으로 부족하지만 인생을 새롭게 설계하는 젊은이들에게 반면교사로 비쳐 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책 출판에 도움을 준 태봉출판사 조성한 사장과 박서연 실장 그리고 원고를 깔끔하게 정리해 준 큰 딸 順澤의 노고에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2024년 1월
정발산 寓居에서
저자 정 운 종 씀
0 현대가정의 위기
해마다 가정의 달을 기념하면서 필자는 언제나 현대가정의 위기를 걱정하곤 했다. 존비속 살해가 줄을 잇고 있는 현실을 보며 우리사회가 왜 이처럼 비정해 졌는지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존비속 살해의 유형도 가지가지다. 용돈을 주지 않는다며 아들이 아버지를 숨지게 한 날 부산에서는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흉기로 찔렀다. 얼마 전 서울 서초동에서는 어머니를 모시지 않는다며 시누이가 올케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어린이날이었던 지난해 5월 5일에는 오산시 은계동에 사는 백수 아들(35)이 잔소리하는 아버지(69)를 흉기로 찔렀다. 경기도 시흥시에서는 부부싸움을 하던 중 남편이 부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광주 남부 경찰서는 자신이 낳은 아이 3명 모두를 버린 20대 주부와 생후 4개월 된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비정한 엄마를 검거 했다. 한 울타리 안에서 가족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비정한 사건이 이처럼 수도 없이 발생하고 있다.
경찰 통계에 따르면 최근 5년 동안 존속살해 범죄는 65% 급증했다. 존속살인의 경우 2008년 44건, 2009년 58건, 2010년 66건으로 2년 사이에 50% 늘었다. 전체 살인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2008년 4.0%, 2009년 4.2%, 지난해 5.3%로 증가 일로다. 미국(2%), 프랑스(2.8%), 영국(1%)에 비해 훨씬 높은 수치다.
지난해에는 존속살인이 5.5일에 한 번꼴로 발생했다. 과거에는 부모의 재산이나 보험금을 노린 경우가 많았으나 요즘은 너무 쉽게 가족을 해친다. 부모 자식 간의 사소한 갈등도 살인으로 이어진다. 영화에서 다루던 자극적인 소재, ‘패륜 범죄’가 스크린을 넘어 현실에서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일각에선 스크린을 모방한 범죄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범죄 예방을 위해 반면교사로 삼겠다는 것이 오히려 패륜범죄를 부르고 있는 아이러니 한 현실을 보며 매몰 될 대로 매몰된 윤리도덕, 가족관 혈연관의 붕괴 현상을 보게 된다.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의 털끝 하나라도 훼손하는 것 자체가 불효라는 동방예의지국의 전통적인 윤리관은 어디에서고 찾아 볼 수 없다. 자기가 낳은 자식의 목숨을 잔인하게도 끊어버리는 엄마는 어머니의 탈을 쓴 들 짐승에 다름 아니다. 얼마 전 한 언론단체는 명화감상 시간에 ‘친정엄마’를 상영했다. 친정엄마의 극진한 자식 사랑의 진수, 그 속에 짙게 깔린 애환을 보는 이로 하여금 눈물을 펑 펑 쏟게 하는 영화다. ‘엄마를 부탁해’ 가 국제적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소식과 함께 ‘마마’ ‘역시 우리엄마’ 등 어머니를 주제로 한 영화가 상영을 앞두고 있다는 것은 우리시대 퇴색해가는 어머니상을 바로 세우려는 영화계의 몸부림만으로 그칠 일이 아니다.
비정한 존비속 학대, 살해 사건들이 5월 가정의 달을 무색케 하는 요즘 윤리 도덕 재무장운동은 어디서 잠자고 있는지, 잘못된 교육관과 물질만능 황금만능주의에 치어 매몰된 인륜 도덕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범국민 윤리 회복 운동에 정부는 물론 사회 각계의 적극적인 호응과 분발이 절실하게 요구 되는 때다.
0 늘어난 패륜범죄
최근 아버지와 금전 문제로 다투다 둔기를 휘둘러 숨지게 한 후 시신을 야산에 암매장한 아들이 경찰에 붙잡혔다. 경북 상주경찰서는 금전 지원을 해주지 않는 부친을 둔기로 때려 숨지게 한 혐의(존속살해)로 아들 A(38)씨를 긴급 체포했다.
우리 사회에 이처럼 패륜범죄가 독버섯처럼 늘어나고 있다. 아파트를 차지하기 위해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는가 하면 부부싸움 끝에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사람의 탈을 쓰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영화에서나 일어날 만한 반인륜적 패륜범죄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어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요즘이다. 돈 때문에 전통적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인륜을 저버리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비극적 현상이 사회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부모에게 욕을 하고 폭행하는 수준을 넘어 고귀한 목숨까지 빼앗는 흉폭화 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짓이 만연하고 있는 것이 요즘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사회 현실이다.
한마디로 비극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저버린 채 가정 구성원에게 끔찍한 짓을 하는 것이 다름 아닌 패륜이다. 인륜마저 내팽개쳐지고 가족해체 현상마저 심해진 이 사회가 결코 온전할 리 없다. 끊이지 않는 패륜범죄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라도 가정에서 갈등 극복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가르쳐 단절된 대화를 복원하는 소통과 서로를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함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사회에 만연한 물질만능주의와 생명경시 세태에 앞서 도덕적 인성함양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패륜범죄 근절과 인간성 회복을 위해 사회 구성원 모두가 발 벗고 나서야 할 때이다. 패륜 범죄가 증가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인간성이 메말라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하루 속히 사회 근간인 윤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범국민적 관심이 모아져야 할때다.
0 실종된 도덕교육
성년의 날은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예의범절과 어른을 공경하고 모시는 충과 효를 주 내용으로 하고 나라가 왜 중요하고 국민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리는 어떠해야하는가를 각인시키는, 도덕적 소양을 일깨워주는 날 이어야한다.
우리는 해마다 5월이면 가정의 달이라 해서 가정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도리를 사회적으로 확산하자며 갖 가지 캠페인을 벌여왔다.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을 보내면 15일은 스승의 날이고 5월 셋째 월요일은 성년의 날이다. 1973년부터 1974년에 걸쳐 각각 4월 20일에 성년의 날 기념행사를 가졌으나 1975년부터는 ‘청소년의 달’인 5월에 맞추어 날짜를 5월 6일로 바꾸었다가 1984년에 이르러 현재와 같이 5월 셋째 월요일을 성년의 날로 정한 것이다. 성년의 날은 그 해에 만 19세가 되는 성년을 각 직장 및 기관 단위별로 한자리에 모아 기관장의 훈화와 모범성년에 대한 표창, 그리고 간단한 다과회 등을 가지며, 청소년들을 위한 범국민적인 행사가 개최되는데, 특히 최근에 와서 우리나라 전통적인 성년례는 성균관(成均館)에서 전통격식으로 행해지고 있다.
0 자살 그 심각한 사회문제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26.0명으로 지난 2021년 기준 연간 자살사망자는 1만3,352(전년대비 1.2%↑)명이다. 2011년 31.7명이라는 최고치를 찍은 이후로 꾸준히 감소하던 자살률은 2018년부터 다시 반등해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국제적으로 봤을 때도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OECD 국가 평균 자살률이 11.1명인 가운데 한국은 23.6명(OECD 표준인구 기준 산출)으로 2003년 이후 자살률 1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자살사망자는 대체로 40~60대에 분포해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자살사망자의 51.1%가 40~60대이나 이는 최근 감소 추세에 있다. 다만 눈에 띄는 점은 2017년 이후로 10~30대 자살률이 증가 추세에 있다는 것이다.
대학생의 자살생각 실태에 대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에 비해 2021년 10대(10.1%)와 20대(8.5%)의 자살률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10대 사망자의 43.7%, 20대 사망자의 56.8%가 자살로 인해 사망할 만큼 한국 사회에서 젊은 세대의 자살은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실시한 자살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과거에 비해 최근 자살에 대한 ‘허용적 태도’가 증가하고 있다. 사회적 분위기가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자살 또한 권리일 수도 있다는 인식이 높아졌다고 풀이할 수 있다. 또한 ‘자살에 대한 예방인식’ 점수는 과거에 비해 낮아졌다고 나타났다. 즉 최근 들어 자살이 쉽게 예방될 수 없고, 자살을 막기 위한 노력이 어려운 것이라는 태도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보고서는 “자살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지식은 증가했으나 실제 자신이나 주변에서 자살과 관련된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대처에 대한 인지도 및 효능감은 오히려 줄어드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서 “또한 여기에는 정신건강의학과 치료에 대한 낙인을 우려하는 인식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자살은 개인문제 아닌 사회문제
자살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닌 사회적 문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가족을 포함한 친척‧친구 등 주변인의 자살을 경험한 사람은 일반 사망보다 강한 심리‧사회적 고통을 경험하며 우울감‧트라우마 등으로 자살위험이 상승한다.
보건복지부의 자살유족 심리부검 면담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유족 중 59.5%가 자살 사고를 가지고 응답했으며 한 명이 자살하면 평균 6명의 유족이 발생한다.
이는 사회경제적 비용을 초래하기도 한다. 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자살의 경제적 손실 추산 결과 1인당 4억900만원의 비용이 발생한다. 이는 총합 5조4,000억원 규모의 손실이며 자살시도로 인한 후유증 및 유족의 신체‧정신질환 등을 고려하면 사회적 비용은 추계된 규모보다 클 것으로 추정된다.
보건복지부의 2020년 응급실 기반 자살시도자 사후관리사업 보고서에 따르면 자살시도자의 35.8%는 ‘도움을 얻으려고 시도한 것이지 정말 죽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라는 응답을 하기도 했다. 그 외에 ‘죽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실제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응답이 22.2%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는 주변의 관심과 도움 혹은 정책적 지원으로 자살이 예방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에 보건복지부는 △사회 자살위험 요인 감소 △자살 고위험군 집중관리 △자살시도자‧자살유족 사후관리 강화 등을 골자로 하는 자살예방 기본계획(안)을 지난 13일 발표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간담회를 열었다. 이를 통해 2027년까지 자살률을 18.2명 수준으로 30% 이상 감소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보건복지부가 기본계획안을 통해 발표한 바와 같이 자살사망자의 대부분(94%)이 사망 전 경고신호를 보임에도 주변인 중 이를 인식한 비율은 22.7%에 불과하다. 심지어 그 중 46.2%는 ‘걱정은 했지만 별다른 대처를 취하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이에 사회적 방파제 역할을 하는 정책 외에도 일반 국민의 자살예방에 대한 인식 개선 및 교육을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자살실태조사에서 나타난 것처럼 자살예방에 대해 일반 국민이 무기력하게 느낀다면 촘촘한 정책을 마련한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가 더딜 수 있다.
특히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자살 고 위험군의 기준 또는 정의 수준을 낮춰 폭넓게 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아직까지는 자살 고 위험군은 자살 시도자 및 유가족 등 두드러진 판단 기준으로 정의되고, 이에 부합해야 자살예방사업에 대한 접근성을 보장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연구원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자살의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 △정신질환 △주변과의 갈등 등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살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적 회복력은 사람마다 다르고 한 개인 안에서도 인생에서 겪게 되는 여러 상황으로 끊임없이 변할 수 있다. 따라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사전 예방적으로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게 사회적 지원 문턱이 낮아질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자살 많은 10대
사망 중 10대 자살이 많은 것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대별된다.
근본적인 원인은 마음의 결핍이다. 부모님이 자신이 원하는 걸 다 들어주지 못하거나, 들어주려 하지 않을 때 그걸 아쉬움으로 넘기지 못하는 이유는 어떤 결핍 때문임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욕구를 채우지 못해도 당장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건 변함없기 때문이다. 아니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도 있다. 바로 그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가 1990년대 이후 인구 10만 명 당 자살 사망자수가 헝가리, 핀란드, 덴마크, 스위스에 세계 5위를 기록하고 있고 자살증가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사실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최근 20년간 국가별 사망유형을 조사한 결과, 부유한 국가일수록 자살률이 높게 나왔다.
서유럽 국가들 가운데 부유한 스위스가 자살률이 가장 높았으며, 상대적으로 부유하지 못한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자살률은 이보다 현저히 낮았다. 이 같은 현상은 선진경제나 고도의 민주주의, 천혜의 기후 조건이 개인의 자살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찰청이 조사한 결과 자살동기의 80% 가량이 경제적인 이유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유 없는 자살’도 많다.
니체는 “나는 그대들에게 자유로운 죽음을 설교한다”고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말했으며, 쇼펜하우어도 자살을 “완전하게 책임질 수 있는 이성적인 행위”라고 말했다. 하지만 칸트는 자살을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의 위반”이라고 했고, 헤겔도 자살을 절대정신에 헌신해야 하는 개인의 의무를 위반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20세기 실존철학자 사르트르와 카뮈도 자살을 단호히 거부했다. 자살의 원인에 대해선 학자마다 여러 견해가 있다. 정신과 의사이던 프랑스의 에스퀴롤은 “자살은 정신병의 모든 특징을 보여준다”면서 “인간은 미쳤을 때에만 자살한다”고 단정했다. 그는 또 자살한 사람이 있는 집안에서 또 다른 자살과 자살기도가 빈발했다는 사실을 알아내 자살에 ‘유전이론’을 도입했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자살을 선택하는 심리상황을 ‘자신이 보호되어 있지 않고 따라서 안정감이 없을 때’와 ‘사회의 윤리적 타락으로 인생의 의미를 잃었거나 느낄 수 없게 되었을 때’등 두가지로 정리했다. 링켈은 자살의 심리적 동기를 △패배감 △자책 △현실도피 등 세 가지로 나누었다.
링켈은 이런 현실과 이상의 부조화나 모순을 억지로 조화시키고 합치시키려는 과정에서 자살이 선택된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는 자기를 파괴하려는 타고난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이런 공격성은 평소 의식하지 못하다가 자아가 약해지면 나타나고 이게 자살과 연결된다고 본 것이다.
이런 철학적-사회학적 논의와 상관없이 통계학적으로 자살에는 일정한 패턴이 발견된다. 독일의 정신의학자 토마스 브로니슈는 최근 국내에 발간된 저서 ‘자살-인간만의 파괴적 환상’(이끌리오 펴냄)에서 이를 소개했다. 자살기도자의 수는 여자가 남자보다 두 배나 많지만, 실제로 자살하는 경우는 오히려 남자가 여자보다 두 배나 높다.
연령별로는 50대 이후 노인층에서 자살률이 더 높고, 배우자가 있는 사람보다는 이혼자, 특히 이혼 남성의 자살률이 훨씬 높다. 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계절별로는 봄, 여름에 자살자 수가 늘어나며, 우울증 환자의 15%는 자살로 삶을 끝낸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문제는 자살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느냐이다. 여러 논의가 있지만 1차적으로 자살을 애당초 시도하지 못하는 사회적 여건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말해 심리적-정신의학적으로 자살 충동을 미연에 방지하는 사회 공동의 노력이 기대된다. 제 목숨 제가 끊는데 무슨 상관이냐 식으로 오불관언( 吾不關焉)한다면 사람이 사는 사회가 아니다.
사랑이 매 마르고 부정부패가 판을 치고, 사회정의와 가치관이 매몰된 사회에서 자살 빈도가 높을 것이라는 분석에도 일리가 있다. 극도의 빈부격차, 사회안전망의 결핍,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의 결여가 이웃의 소외감을 부르고 자살동기를 유발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 무의무탁(無依無托), 어디 한곳 의지 할 곳 없는 노인들을 보살피는 일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자살이 의로운 죽음으로 미화되는 경우도 있으나 종교적인 관점이나 생명의 존엄성으로 보면 자살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되거나 합리화 될 수 없는 죄악임이 분명하다. 자살 학생들의 증가는 학교 교육에도 문제가 많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정서교육과 인성지도 진로지도 등 학생들의 애로와 고민을 제때에 듣고 이를 교육적으로 선도하고 사랑으로 훈육했다면 최소한 수능시험을 비관해 자살하는 경우는 막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자살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닌 사회적 문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가족을 포함한 친척‧친구 등 주변인의 자살을 경험한 사람은 일반 사망보다 강한 심리‧사회적 고통을 경험하며 우울감‧트라우마 등으로 자살위험이 상승한다.
이에 사회적 방파제 역할을 하는 정책 외에도 일반 국민의 자살예방에 대한 인식 개선 및 교육을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자살실태조사에서 나타난 것처럼 자살예방에 대해 일반 국민이 무기력하게 느낀다면 좀 더 치밀한 정책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자살의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 △정신질환 △주변과의 갈등 등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살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적 회복력은 사람마다 다르고 한 개인 안에서도 인생에서 겪게 되는 여러 상황으로 끊임없이 변할 수 있다. 따라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사전 예방적으로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게 사회적 지원 문턱이 낮아질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효사상의 실종
과거 우리사회의 덕목은 웃어른을 공경하는 ‘효의 사상’이었다. 성서도 10계명 중 다섯 번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다. 그만큼 ‘효의 사상’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사회의 ‘효의 사상’이 실종되어 가고 있어 문제다.
부모를 살해하는 존속 살해사건도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얼마전 서울시가 만 15세 이상 된 시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노부모 부양을 자녀가 책임져야 한다”는 질문에 2006년도 60.7%에서 2012년 28.7%로 크게 줄어들었다. 반면 “가족과 정부? 사회가 함께 부양해야 한다”는 질문에 대해서 29.1%에서 50.7%로 크게 증가했다.
고령화사회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대한민국도 성인 1명이 어르신 1명을 책임져야 하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 이와 함께 “노후에 자녀와 같이 살고 싶지 않다”는 부모도 크게 증가했다. 이는 바로 실종되어 가는 우리사회의 ‘효의 사상’에 대한 단면이 그대로 드러난 증거다.
대가족제도에서 핵가족제도를 거친 우리의 가족제도는 개인중심의 가족제도로 전환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웃어른을 공경하는 ‘효의 사상’은 밑바닥을 치고 있다. 모 기관의 의식조사에서 청소년의 74%가 부모를 모시지 않겠다고 대답한 것은, 고령화시대로 치닫고 있는 노인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경고하고 있다. 또한 학교를 비롯한 교회 등 교육기관에서의 ‘효의 사상’에 대한 교육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이와 같이 국민들의 ‘효의 사상’이 실종되어 가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물질문명의 발달의 원인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자녀들에게 기회교육만을 강조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회교육은 부모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이 교육은 결과적으로 출세지향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우리의 아이들은 경쟁사회에서 출세를 목표로 교육을 받았다. 이것은 곧 개인이기주의를 만연케 했다.
또한 기회교육은 인간의 가치관을 흐리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웃을 생각하게 하는 정신을 실종시켰다. 오늘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형제도, 가족도, 친구도 없다. 이들 모두가 사회로 진출하면 경쟁 대상이며, 출세를 위한 적이다. 어찌 보면 서울시가 조사한 결과는 당연하다. 그리고 부모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사결과이다.
그렇다 보니 독거노인의 가정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혼자 힘겹게 살다가 고독사하는 경우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이들에게 자녀가 없는 것도 아니다. 부모와 자녀의 사이가 그만큼 멀어지고 있는 오늘 우리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최근 고령화시대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부모 부양을 둘러싼 가족 간의 갈등이 크게 늘어났다. 노모, 노부가 목숨을 스스로 끊은 안타까운 사건들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부모 부양을 둘러싸고 형제간에 실인사건도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모두가 우리사회의 덕목이었던 ‘효의 사상’이 실종된 결과이다.
과거 우리의 가정은 부모를 부양하는 것을 당연시 했다. 그러나 문명의 이기와 사회제도는 노부모 부양을 어렵게 만들었다. 심지어 노부모의 부양으로 부담과 노부모 부양을 둘러싼 자녀간의 갈등, 부양 스트레스, 경제적인 어려움, 고부간의 갈등 등으로 인해 가족이 해체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에는 날이 갈수록 증폭되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의한 보편타당한 균형을 잃어버리고 있는 현상이다. 이기주의에서 오는 목전의 이익을 차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에서 인간의 본성인 양심이 사장되고 비양심적인 선택을 해서라도 이익을 선택한 것이 인륜의 근본이요 백행지본이라 옛 어른께서 일찍이 알려 주신 인류사회의 천륜인 효가 무너진 것이다.
효의 교육이 국가의 동란과 급속히 밀려 온 서양문화와 1960년대의 경제 일원화 정책과 군사적 국가 경영의 과정에서 자연히 밀려 등한시 해 온 것이 누적된 효의 실종을 야기 시킨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효를 교육하고 효 교육을 일반화하기 위해서는 정책적인 국가의 지원은 절실하다 아니할 수 없다.
성경에도 효 사상 가르쳐
성경에도 건강한 가정을 만들고, 부모를 공경하라고 교훈하며, ‘효의 사상’을 가르쳐주고 있다. “의인이 아버지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언 23:24~25)”, “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로새 3:2)”,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에베소서 6:1)”,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마태복음 19:19)”,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레위기 19:3)” 등이 바로 효의 사상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성경구절이다.
효에 대한 기록은 <시경>·<서경> 등에 많이 있으며 유교의 효사상은 공자에서 비롯되었다. 공자와 맹자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애정이 효의 기본이지만 효는 엄격한 도덕적 의무라고 강조했다. 효의 유교적 개념은 한대에 <효경>으로 집약되었다.
신라의 세속5계 중 '사친이효'는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덕적 의무를 '효'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가족제도는 전통적인 조상숭배신앙으로부터 발전했으므로 유교적 효사상이 곧 유교적 효 윤리의 실천은 아니었다. 고려시대까지 가족윤리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불교였다. 고려 말 가족생활에서 효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효행담을 편찬하고 〈주자가례〉를 보급했다. 이를 통해 불교적 상제례가 유교적 상제례로 바뀌었다.
효는 유교만의 것은 아니며 시대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 주대(周代)의 기록에 나타난 효의 내용은 살아 있는 부모에 대한 봉양·존경·복종과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에 대한 추모로 나누어지며, 특히 상제례를 통해 조상숭배의 새로운 형식으로 정립되었다. 또 당시의 가족제도인 종법(宗法)을 유지하는 도덕규범이었다. 효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공자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덕을 '인'(仁)이라고 하면서 그것의 근본 내용으로 제(悌)와 효를 들었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 생길 수 있는 구체적인 효의 실천방법을 제시했다. 이후 맹자는 요순(堯舜)의 도를 효제로 이해하면서 백성들에게 효제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주요내용이라고 했다. 공자와 맹자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자연스러운 애정이 효의 기초이지만 애정과 도덕적 의무를 명확히 구별하여 효는 엄격한 도덕적 의무라고 강조했다. 물론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자식의 부모에 대한 일방적인 도덕적 의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맹자〉에 보이는 오륜(五倫)에서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고 했고, 이는 〈논어〉의 '부부자자'(父父子子), 〈예기〉의 '부자자효'(父慈子孝)와 함께 부모와 자식 상호간에 도덕적 의무가 성립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공자·맹자의 시대부터 이미 유교의 부자윤리에서는 자식의 부모에 대한 도덕적 의무가 거의 일방적으로 강조되었다. 자식의 효도는 부모의 자애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식의 효도와 부모의 자애가 동일한 가치 또는 중요성을 갖는 도덕적 의무는 결코 아니었다.
유교사상에서 강조하는 효는 부모를 섬기는 것과 부모를 부양하는 것으로 요약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효는 부모에 대한 물질적 봉양보다는 공순한 정신적 자세를 중시했다. 부모를 섬긴다는 것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부모를 위해 힘쓴다는 것을, 또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공경과 예의를 다해 모신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부모와 조상에 대한 제사를 효의 표현으로 간주하여 특수한 유교적 상례로서 부모의 3년상을 제시했다.
효에 관한 이러한 유교적 설명은 한대(漢代)에 이르러 효경(孝經)으로 집약되었다. ‘효경’은 효에 관한 공자·맹자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나름대로 특징적인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효경에서는 이전보다 더욱 효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다른 모든 덕행을 효에 종속시키는 경향을 보여준다.
공자와 맹자는 인의 근본으로 또는 요순의 도로 효와 함께 제를 들었으나, 효경에서는 효만을 덕의 근본으로 강조했으며 모든 덕행은 궁극적으로 효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변화는 종족제도가 붕괴되고 가부장가족이 사회구성의 기본단위로 확립된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효경에 보이는 효의 또 다른 특징은 정치적 지위에 따른 신분적 차이에 의해 실천하는 효의 내용이 다를 뿐 아니라 효의 가치도 다르다고 본 점이다.
또 효경은 사람의 도리인 효를 자연에 존재하는 천지의 이법(理法)에 따른 것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도 특징적이다. 이와 같이 효를 자연에 존재하는 도리로 파악하는 것은 효를 존중하여 효를 움직일 수 없고 어길 수 없는 도덕법으로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효사상을 담고 있는 효경은 한대 이후에 중국 역대 왕조의 교육제도에서 가장 기초적인 교과목으로 정해짐으로써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효경이 효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위주로 한 것이라면 효행담은 뛰어난 효행을 보여준 인물들의 행실을 모범삼아 이를 널리 선전함으로써 효윤리를 보급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효경이나 효행 담에 의해 효윤리가 보급되고, 또 국가는 제도나 형률을 통해 효윤리의 실천을 권장하거나 강제함으로써 효는 중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도덕규범으로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중국사회에서 효 윤리가 갖는 영향력은 불교적 효사상을 성립시킨 사실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의 효 사상을 살펴보면, 효 윤리는 자식이 항상 공경하는 마음가짐으로 부모를 섬겨야 하고, 부모에 대해서는 순종해야 하며, 또 부모를 위해서라면 자기희생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효행은 부모가 살아 계실 때뿐만 아니라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되어야 하며, 이 경우 효행은 상제례, 특히 〈주자가례〉에 따른 예제의 실천이 주된 내용이었다.
효경(孝經)에 보면 공자가 효도에 관하여 그의 제자 증자(曾子)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나온다. 증자의 문인이 기록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 효는 우선 모든 덕의 근본이며, 모든 교육의 발생 이유라고 본 것이다. "무릇 효도는 덕의 근본이다. 모든 가르침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즉 공자가 말 한대로 인, 의, 예, 지, 신이 모 두 덕이지만 그중에서도 인이 가장 온전한 마음의 덕이 된다. 仁이란 사랑을 의미하는데 사랑 중 에서는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다는 논리다. 부자 , 군신, 부부, 형제, 붕우간의 사귐을 모두 도라고 하지만 그 중에서 친히 낳아 무릎 아래서 기른 것이 제일 먼저인 까닭에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가장 근본이 된다. 근본이란 뿌리 와 같아서 근본이 서면 도가 생기고, 그 도로써 어른을 받들면 敬老가 되고 가정에서 베풀면 부 부가 화락하고, 친구끼리 지키면 신의가 생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가르침이 효에서 기원 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효는 하늘의 도이고, 땅의 도이며, 사람의 도이다. "효란 하늘의 불변의 원리이며 땅의 올 바른 길이며 백성들의 행할 행위이다." 여기서 효는 그 원리가 하늘과 땅, 즉 자연의 이법에 근거 하고 있다는 철학적 근거를 엿볼 수 있다. 유교에서는 우주 그 자체를 긍극적 존재로 파악하고 그 우주는 영원히 生生하는 것으로서 본질을 삼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인간은 우주내의 존재로 서 우주의 이법을 타고난 우주의 일부분임으로 마땅히 우주의 이법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 그리 하여 유교에서는 부부간의 평등한 性的 사랑에 윤리의 근간을 두지 않고 父子相承의 수직적 원리 에 근간을 둔다. 왜냐하면 부자간의 혈연적인 친애의 감정이 우주의 생생의 원리와 결부되기 때 문이다. 즉 인간이 갖고 있는 생생의 친애의 감정을 살려 이를 윤리화한 것이 효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는, 신체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훼상하지 않음이 효의 시작이며, 입신하여 도를 행하 고 이름을 후세에 날려 이것으로써 부모를 빛나게 하는 것이 효의 완성이라고 말한다. 효도란 자기 몸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일이니 자기 몸은 모두 부모에게서 생긴 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자식 된 자는 제 몸을 아끼고 소중히 여겨서 감히 조금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도 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효를 다했다고는 할 수 없다.
셋째로는, 다섯 가지 효를 구별하여 말하고 있다.
1) 어버이를 사랑하는 자는 감히 남을 미워하지 못하고, 어버이를 공경하는 자는 감히 남을 업신여기지 못하니, 사랑과 공경을 다하여 제 어버이를 섬기면 德敎가 온 백성에게까지 미쳐서 사 해에 모범이 되니, 이것이 天子의 효이다.
2) 윗자리에 있으면서 남에게 교만하지 아니하면 지위가 높아도 위태롭지 않고, 욕망을 제어하고 법도를 삼가하여 지키면 권세가 차도 넘치지 않는다. 지위가 높아도 위태롭지 않으면 그것으로써 오래도록 귀함을 지키게 될 것이요, 권세가 차도 넘치지 않으면 그것으로써 오래도록 부를 지키게 될 것이다. 이렇듯 부귀가 그 몸에서 떠나지 않게 된 연후에 사직을 보전하고, 백성을 화평하게 할 수 있으니, 이것이 제후의 효이다.
3) 선왕의 法服이 아니면 감히 입지 않고, 선왕의 法言이 아니면 감히 말하지 않고, 선왕의 덕 행이 아니면 감히 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법이 아니면 말하지 않고, 도가 아니면 행하지 않으며, 이로써 입으로 말을 선택하지 않으면 몸으로 행동을 선택하지 않게 된다. 말이 천하에 가득 차더라도 그 입에 과실이 없고, 행동이 천하에 가득 차더라도 원망과 증오가 없게 된다. 이 삼자 가 갖추어진 연후에야 그 녹위를 보전하고 그 종묘를 수호할 수 있으니, 이것이 경대부의 효도이다.
4) 아버지를 섬기는 것을 기준삼아 어머니를 섬기면 그 사랑하는 마음이 같을 것이고, 아버지를 섬기는 것을 기준삼아 임금을 섬기면 그 공경하는 마음이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머니를 섬기 는 데는 사랑하는 마음을 취하고, 임금을 섬기는 데는 공경하는 마음을 취하니, 이 두 가지를 겸 한 것이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효로써 임금을 섬기면 충이 되는 것이고, 悌로써 어른을 섬기면 곧 順이 되는 것이다. 충과 순을 잃지 않고 윗사람을 섬긴 연후에야 작록을 보존하고 제사를 지키게 될 것이니, 이것이 선비(士)의 효이다.
5) 천시에 순응하여 땅으로부터 이익을 취하고, 근신 검약함으로써 부모를 봉양하니, 이것이 庶人의 효이다.
넷째로는, 효로써 다스릴 것을 말한다.
효로써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천자의 경우에는 공, 후, 백, 자, 남 등의 제후들을 소홀히 대하 거나 버리는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제후의 경우에는 홀아비와 홀어미와 같은 천하고 가련한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며, 관직이 없는 선비나 농민이나 공인이나 장사치까지도 추호도 업신여기지 않음을 말한다.
다섯째, 효도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효자는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 평소 슬하에 있을 때는 그 공경하는 마음을 다하고, 봉양함에 있어서는 부모가 즐거움을 다하도록 하고, 부모가 병이 나셨을 때는 근심을 다하도록 하고, 부모가 돌아가시면 슬픔을 다하도록 하고, 제사에 있어서는 엄숙한 마음을 다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고 부모를 섬기는 자는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않고, 남의 밑에 있어도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고, 같은 무리 중에 있어도 다투지 않는다. 또한 부모를 섬기는 자가 자기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悖德이고, 자기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공경하는 것 은 悖禮가 된다.
여섯째, 효도는 부모 섬김에서부터 외적으로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하늘과 땅에서 받은 만물의 성품 중에서 사람이 가장 귀하다. 사람의 행실 중에서 효보다 큰 것 이 없고, 효에 있어서는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부자의 도리는 천성이다. 부 모를 섬기는 마음을 임금에게 옮기면 충이 된다. 군신의 도리는 의리이다. 집안에서 형을 우애로 서 섬기고 그 마음을 어른에게 옮기면 공순이 된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기 집을 다스리는 마음으로 정사를 다스리면 직책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백성들이 그를 숭앙 하게 되고, 이름을 기억하여, 그 몸은 비록 죽더라도 그 언행은 영원히 후인들의 사표로서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퇴계 이이(李珥)의 효사상
퇴계 이이(李珥)의 효 사상은 격몽요결 擊蒙要訣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젊은이들에게 입지(立志)·지신(持身)·효행·제례·지인(持人) 등을 가르치기 위한 수신서이다. 그는 첫머리에서 오륜을 풀어 부자(父慈)·자효(子孝)·신충(臣忠)·부부별(夫婦別)·형제우(兄弟友)·붕우신(朋友信)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이의 시대에 이르면 수신과 효행에 구체적 조건이 따르고, 아비의 자애보다는 자식의 효도에 중점이 두어진다. 그리하여 공순(恭順)·수종(隨從)·부양(扶養)·안락(安樂)·제사(祭祀, 遺志繼承) 등이 효의 5대 원리라 할 만큼 강조되었다.
부자(父慈)의 도에 대해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이, 이황에서 이이에 이르는 조선시대의 정통 도학에 있어서는 효 관념이 성리학의 우주론이나 인간론의 이해를 통해 인간의 내면적·보편적 규범으로 확립되었다.
17세기 말부터 18, 19세기에 이르면서 점차 정통 성리학에 대한 비판 의식이 일어나면서 효에 대한 의식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이익(李瀷)의 경우를 보면, 성호사설 권3에 충효를 말하면서 충이 앞서고 효가 뒤를 따르며, 충에 이르려면 효가 있어야 하고, 효가 아니면 곧 불충(不忠)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곧 효보다 충을 우선하는 태도이다.
성리학에 비판적이었던 소수의 실학자들은 치인양성(治人養性)에 주목적을 두었던 성리학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과거제 폐지와 양반의 취업 등을 주장하였다. 즉, 국가 의식을 가족 의식보다 우위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효가 이루어지면 다른 덕목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생각했던 조선 초기의 사상에 반기를 든 셈이다.
이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의 국난을 겪은 새 시대에 일어난 충효 사상의 변화라고 할 것이다. 이른바 ‘서양과의 만남’, 그리고 근대화의 물결과 접하면서 실학자들은 상공업 진흥을 위해 양반도 노동해야 하며 과학을 배우고 서양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러한 풍조가 일어나자 윤리관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그 예로서, 동학의 효 관념을 보면, 팔리훈강령(八理訓綱領)에서 효행에 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대효(大孝)란 지효(至孝)를 말함이다.
한 사람이 능히 한 나라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또 능히 천하의 사람들을 느끼도록 하나니, 천하의 지성이 아니면 어찌 이에 이르리오. 사람이 느끼면 하늘도 또한 느끼느니라.” 이처럼 효의 어려움을 말하고, 효행의 실천을 안애(安哀)·쇄애(鎖愛)·순지(順志)·양체(養體)·양구(養口)·신명(迅命)·망형(忘形) 등으로 가르쳤다.
천도교의 효 사상은 유교와 달리 충과 연결시키지 않고 천의(天意)와 연결시킨 특징이 있다. 실천 윤리는 크게 다를 바 없지만, 효가 어려운 이유를 천의에 맞게 지신하기 어려움과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개화 사상이 일어나면서 윤리적 가치는 분화되어 나타난다. 19세기에 이르면 가족 윤리와 국가 윤리, 그리고 ·사회 윤리를 따로 생각하게 된다. 즉, 효·충·신을 덕목으로 하되 그 대상을 부모-자식, 임금-신하, 이웃-이웃의 인간관계로 설명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충·효·신의 기능이 나누어지고, 각 덕목이 독립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효 사상은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으나 시대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전통 사회에서 효 윤리는 가족을 결속시키고 사회 풍속을 순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반면 효도 예절이 형식적으로 고정화·관습화되어 개인의 진취적 기상을 억압하고 사회의 합리적 개혁을 둔화시켰던 부정적 측면도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효의 본질을 재인식하고 그 참된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요구된다.
효는 부모의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
효에 관해 가장 알기 쉽게 풀이한 것으로 송강가사 속 오륜가를 들 수 있다. 오늘날 전하는 송강의 '훈민가'가 바로 그것이다. 모두 16 수로 되어 있는 훈민가중에 효도에 관한 것으로는 다음의 두수가 있다.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두 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하늘같은 가 없은 은덕을 어대 다혀 갚사오리.
이는 부모의 은덕을 깨닫고 효행을 제창한 작품이다. 비록 훈계적이기는 하나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작품이다.
어버이 살아 실제 섬길 일만 다 하여라/지나간 후면 애달프다 어떠하리/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부모님의 생전에 효행을 힘쓰라고 주장한 작품이다.
효도란 결국 부모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효도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양(養志)의 효도요, 둘째는 양구체(養口體)의 효도이다. '양지'란 부모님의 뜻을 잘 받들어 드리는 것으로, 부모님을 정신적으로 편안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효도이다. '양구체'란 부모님의 몸을 물질적으로 봉양하는 것으로, 부모님을 육체적으로 편안하게 해드리는 효도이다. 양지의 효도와 양구체의 효도는 모두 중요하다.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것 못지않게 부모님의 몸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효도도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어느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부모님의 뜻을 받드는 '양지'의 효도라고 말할 수 있다. 좋은 음식으로 구미를 맞추어 드리고, 값진 의복과 풍족한 생활환경을 만들어 드리면서 겉으로만 화려하게 효도를 하는 것보다는 자식이 부모의 뜻을 잘 받들어 정신적으로 편안하고 즐겁게 해드리는 것이 더욱 소중한 효도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따스한 얼굴과 말씨 그리고 정성이 담긴 손길이다. 진정으로 부모를 가난하고 쓸쓸하게 만드는 것은 초라한 집이나 남루한 옷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물질적 봉양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린애와 같아진다는 말을 한다.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를 잘 생각해 보자. 어린아이는 아주 작은 일에 대해서도 기뻐하고 슬퍼한다. 나이가 많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아주 작은 일에 기뻐하고 노여워한다. 그러므로 자식들은 부모님을 모실 때 이러한 마음을 잘 헤아려야 한다. 크고 좋은 것만을 해드려야 효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작은 것일지라도 진심과 정성스런 마음이 담겨 있다면 부모님께서는 기뻐하신다.
효도란 이와 같이 부모의 마음을 즐겁고 편안하게 해드리는 양지의 효도가 최상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부모의 마음이 즐겁고 편안할 것인가?
부모는 모두 당신의 자식이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인간으로서의 바른 심성을 지니고, 올바른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돈을 많이 벌어 큰 부자가 되는 것도 좋고, 높은 관직에 올라 명예를 높이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정신과 신체가 모두 건강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가 더불어 산다. 따라서 먼저 이웃을 사랑하고 존경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신의와 예절을 지키고 남에게 후덕하고 친절, 명랑해야 한다. 그에 앞서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고 가족 간에는 언제나 화평해야 부모에게 효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한다. 이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감정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0 심각한 저 출산 인구감소
고령사회와 함께 심각한 현실은 저출산 인구감소 현상이다.
국민 10명 중 9명 이상이 저출산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출산 가능한 만 49세 이하 2명 중 1명은 자녀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그리고 20대는 ‘무자녀 생활의 여유 및 편함’을, 30대는 ‘경제적 불안정’을 40대는 ‘아이 양육 및 교육 부담’ 등을 이유로 꼽았다. 출산 인식 개선을 위해선 연령별 섬세한 정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세계 꼴찌다. 한 해 출생아 수는 2012년 약 50만 명에서 2022년 25만 명으로 10년 만에 절반으로 줄었다. 게다가 지방의 경우 인구유출 가속화로 인해 인구감소와 지역격차의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다.
"생산가능 인구가 1% 감소할 때 GDP는 0.59% 줄고, 피부양 인구가 1% 증가하면 GDP는 0.17% 감소한다"는데 인구구조의 변화로 국가경쟁력이 급전직하하게 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고도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저출산·고령화에 대한 문제인식이 낮았다고 볼수 있다. 특히 노동시장과 산업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혁신을 미뤄왔고, 경제성장률 하락을 완화시키기 위한 성장전략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저 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문화체육관광부와 공동으로 저 출산에 대한 국민의 인식 변화를 살펴보고자 지난 최근 ‘저출산 인식조사’를 실시, 발표한바있다.
그 결과 응답자의 95.5%(매우 84.9%+조금 10.6%)는 한국사회의 저출산문제가 심각하다고 응답했다. 그 원인으로는 ‘경제적 부담 및 소득 양극화(40.0%)’와 ‘자녀 양육·교육에 대한 부담감(26.9%)’, 만혼과 비혼 증가(28%) 등을 꼽았다. 결혼제도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81.0%(매우 34.2%+대체로 46.8%)가 다양한 형태를 인정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 중 76.8%(매우 31.5%+대체로 45.3%)는 프랑스의 ‘팍스제도’로 불리는 결혼제도를 도입한다면 저출산 문제 극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봤다. 팍스(PACS) 제도는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사는 동거커플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제도다. 국내에서도 인식개선을 통해 동거를 합법적으로 인정하자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결혼에 대한 인식 조사에서 42.4%는 ‘가능하면 하는 것이 좋다’고 답했지만, 38.1%는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답했다. 19.6%만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했다.
출산에 대한 인식도 44%는 ‘가능하면 하는 것이 좋다’고 했지만, 33.6%는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봤다. ‘반드시 해야 한다’라는 응답은 22.5%에 그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추후 자녀 계획 여부에 관한 설문에서 만 49세 이하 응답자의 49.0%는 향후 자녀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는 연령별로 달랐다. 20대는 △무자녀 생활의 여유 및 편함(40.3%) △아이 양육 및 교육 부담(24.3%) △경제적 불안정(22%) 등의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 30대는 △경제적 불안정(38.8%) △아이 양육 및 교육 부담(15.5%) △무자녀 생활의 여유 및 편함(7.9%) 등의 순이었다. 40대는 △자녀를 출산할 나이가 지나서(30%) △아이 양육 및 교육 부담(27.6%) △경제적 불안정(16.3%) 등이 주된 이유였다.
가능한 모든 지혜를 모아 저출산 인구감소에 대비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장래는 암울할 뿐이다.
0-지구촌시대 다문화 가정
오늘은 우리 사회에서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이야기인 다문화사회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다문화사회는 어떤 면에서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긍정적인 측면도 많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현상이에요. 저는 이번 글에서 다문화사회의 장단점을 소개하고, 다문화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함께 알아보시죠!
다문화사회의 등장 배경
다문화사회는 다양한 문화, 언어, 종교, 국적 등을 갖고 있는 사회를 의미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접하는 현상으로서, 과거에 비해 이주, 국제결혼, 외국인 근로자의 증가 등으로 인해 다양한 문화가 한 지역 또는 한 국가에서 공존하는 사회가 형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문화사회의 등장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글로벌화의 발전은 다문화사회의 등장을 촉진시켰습니다. 세계 각국의 경제적, 정치적 연결이 강화되면서 사람들의 이동이 더욱 쉬워졌고, 이주 현상이 증가했습니다. 이에 따라 다른 문화와 접촉하는 기회가 늘어나며, 다문화사회의 형성이 가속화되었습니다.
둘째로, 인구 구조 변화가 다문화사회를 만들어갔습니다. 선진국들에서는 출산율이 하락하고 고령화가 진행되는 동시에 이주민의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문화사회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셋째로, 세계 각국에서의 정책 변화도 다문화사회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주민들이 문화적, 종교적인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들에게 필요한 임시 보호나 도움을 제공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이 시행되었습니다.
다문화사회의 이해
다문화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문화 간의 상호작용과 공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각 문화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서로 다른 문화 간의 상호작용은 새로운 가치와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다문화사회는 이러한 상호작용과 공존을 통해 동시에 갈등과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문화사회의 이해를 위해서는 상호문화적인 접근을 취해야 합니다. 이는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호문화적인 접근은 문화 간의 갈등을 예방하고 해소하는데 도움을 주며, 다문화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다문화사회에서의 긍정적 효과
다문화사회는 다양한 문화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여러 가지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첫째로, 문화 다양성은 창조성과 혁신성을 촉진시킵니다. 다른 문화와의 접촉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관점을 제공하여 혁신적인 사고와 창조적인 활동을 유발합니다.
둘째로, 다문화사회는 경제적인 이점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다양한 문화를 갖고 있는 사회는 국제적인 경쟁력을 강화시킬 수 있으며, 다른 문화와의 협력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수출입을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셋째로, 다문화사회는 사회적 통합을 촉진시킬 수 있습니다. 상호문화적인 접근을 취하고 문화 간의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사회는 갈등과 분쟁을 예방하고, 모든 구성원이 공동체로서 함께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다문화사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
하지만, 다문화사회에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인식과 갈등도 존재합니다.
첫째로, 문화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서로 다른 문화 간의 가치관, 행동양식, 언어 등의 차이는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문화적인 차이로 인한 사회적 분열 역시 다문화사회의 부정적인 인식 중 하나입니다. 서로 다른 문화가 공존하더라도 상호간의 이해와 협력이 부족하면 각 문화 사회는 이기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사회적인 분열이 심화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이주민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도 다문화사회에서 나타나는 부정적인 인식 중 하나입니다.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이주민들은 사회적인 소외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 있으며, 이는 다문화사회 내에서의 부정적인 인식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다문화사회 내의 현실적 문제점
다문화사회는 다양한 문화 간의 상호작용과 공존을 통해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지만, 동시에 현실적인 문제점도 안고 다.
첫째로, 언어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은 어렵고, 이는 사회적인 차별과 소극성을 초래할 수 있다.
둘째로, 문화적인 갈등과 분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 간의 가치관, 행동양식의 차이는 갈등의 원인이 되며, 이는 사회적인 분열과 혐오를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셋째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다문화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주민들은 언어 및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적응과 진출이 어려울 수 있으며, 이는 경제적인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론적인 시각으로 다문화사회 진단하기
다문화사회를 이해하고 진단하기 위해서는 이론적인 시각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이론 중 하나는 문화 대립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서로 다른 문화가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을 문화 간의 가치와 신념의 충돌로 설명합니다.
또 다른 이론으로는 상호문화주의 이론이 있습니다. 이 이론은 서로 다른 문화 간의 상호작용과 공존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상호문화적인 접근과 문화 다양성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이론들을 바탕으로 다문화사회를 진단할 때는 문화 간의 갈등과 공존, 상호문화적인 접근의 부재 등을 분석하여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도출할 수 다.
부정적 인식을 넘어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방법
다문화사회에서 부정적인 인식을 넘어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 상호문화적인 접근을 취해야 합니다.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문화 간의 상호작용과 공존을 촉진해야 한다.
둘째로, 교육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교육을 통해 다문화사회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높일 수 있으며, 다문화 교육과 다문화 교육자의 양성을 통해 상호문화적인 태도와 관련 지식을 전달할 수 있다.
셋째로, 다문화사회를 위한 정책과 제도의 개선이 필요합니다. 이주민들의 권리와 복지를 보장하고, 다문화사회 내의 갈등 해결을 위한 정책과 제도를 마련해야 합니다.
다문화 사회 도전과 과제
다문화사회의 미래 전망은 현재의 노력과 정책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긍정적인 변화와 고령화, 출생률 등의 변화에 따라 다문화사회는 더욱 다양성과 복합성을 가지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다문화사회의 미래는 여전히 도전과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주민들의 사회적 통합과 경제적인 활동의 증진, 문화적인 갈등의 예방과 해소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계속해서 노력이 필요하다.
다문화사회는 다양한 문화 간의 상호작용과 공존을 통해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문화사회의 도전과 과제에 대해 인식하고, 상호문화적인 접근과 정책 개선을 통해 다문화사회를 더욱 긍정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0 한국병 무엇이 문제인가
건강은 사람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다.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건전한 정신도 기대할 수 없다. 사람이 건강을 잃을 때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이치에서 볼 때 아무리 이상적인 국가사회를 건설하려 해도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건강치 못할 경우 모든 것이 뜻대로 성취되기 어려워진다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라 하겠다. 한국병을 퇴치하겠다는 것은 이래서 설득력을 갖는다.
옛 부터 내려오는 말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했다. 윗사람 자신이 깨끗지 못하면 아랫사람들도 덩달아 깨끗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다. 위에서 썩고 오염된 흙탕물이 흐르는데 아래가 어찌 맑을 것을 기대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지향하는 건강한 사회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존중돼야 할 상식과 순리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우선 상식과 순리가 존중돼야 한다. 상식은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 그 구성원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말한다. 억지가 통하지 않고 이치대로 돌아가는 것이 곧 순리다. 상식을 부정하고 순리가 통하지 않을 때 그 사회는 바른 사회가 아니다. 합리적인 사회란 쉽게 말해 상식과 순리가 지배하는 사회라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는 너무도 상식과 순리가 외면돼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슨 연(緣)이라 해서 끼리끼리 모이고 그들 집단의 이기주의가 판쳐 왔으며 법과 질서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갖 편법과 부조리가 더 판을 쳤던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썩어도 이렇게 철저히 썩은 줄은 몰랐다”는 개탄의 소리가 국민들 사이에 없지 않은 것도 따지고 보면 상식과 순리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제도적 모순이나 허점이 부정부패로 이어진 상관관계도 근본은 상식과 순리가 매몰된데 기인한다. 제대로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서서는 손해라는 인식, 무슨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문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편법주의가 사회 안에 팽배할 때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타성이 싹트기 쉽다는 점에서 다 같이 자성할 필요가 있다.
합리적인 사회가 되려면 먼저 시시비비가 분명해야 한다.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해야 한다는 말이다. 개인의 양심이 가치판단의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본다면 최소한 양심(良心)이 지배하는 사회가 곧 합리적인 사회인 것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슴에 손을 대고 생각해 볼 때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일단 건강하다는 진단을 받게 될 것이다. 양심에 호소해 부끄럽고 떳떳치 못한 일이 많을 때 일단 그 사회는 건강진단을 새로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합리적일 때 결과 또한 정당하다는 논리는 신뢰사회 일 때 설득력이 있다. 믿음이 통하는 사회, 신의와 성실이 존중되는 풍토에서는 불신보다 신뢰가 더 설자리가 많기 때문이다.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숙원처럼 강조해 왔던 지난날의 역사에서도 문제는 불합리한 사회에 있었다. 불합리한 사회에서는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 역사는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다. 인간에 있어 이성이 마비되고 불합리한 사고와 행동이 앞설 때 그 결과는 온갖 모순을 낳고 갈등을 부르게 마련이다.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에 있어 상식과 순리는 생명선과도 같은 값진 덕목이다. 비리와 부조리, 그리고 부정부패가 문제되고 있지만 이 모두가 가치관의 매몰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시급히 요구되는 것이 곧 정의의 수립과 가치관의 회복이다. 다시 말해 참된 법치주의를 확립하자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가리켜 법치주의라 정의하고 있지만 위로는 국가권력에서부터 아래로는 국민 개개인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법과 질서에 따라 모든 것이 행해질 때 민주주의는 생명력을 갖게 된다. 법이 있어도 있으나 마나라면 민주주의는 법치주의이기는 커녕 무법천지나 다름없게 된다. 법은 두고 보라는 것이 아니라 지키라는 것이다. 다 같이 지키기로 약속된 것이 법이며 아무리 금과옥조라도 지키지 않으면 휴지나 다름없는 것이다.
법이 지배하는 사회
건강한 사회는 이런 맥락에서 법이 지배하는 사회로 이해돼야 한다. 양심과 도덕이 앞서고 법이 있어 법대로 되 어 지는 사회라면 범죄는 생겨날리 만무하다. 법을 어기고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취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사회는 어지러워지고 범죄가 싹트는 것이다.
법이란 또 공정과 공평이 생명인 동시에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이처럼 중요한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법을 어기고, 또 그 법을 어긴 사람이 더 잘 살고 큰소리친다면 누가 법을 따르고 존중하겠는가. 법이 엄격하게 집행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법을 지키고 존중할 수 있도록 사회 구성원 모두가 준법정신을 생활화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이를 위해 정치집단은 말할 것도 없고 공직사회와 경제 분야 등의 모든 지도층에 만연된 배금주의, 사치 낭비풍조도 배격돼야 한다. 황금만능주의는 돈이면 무엇이고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란 말도 있지만 돈이면 죄지은 사람도 풀려나고 돈 없으면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면 이보다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일은 없을 것이다.
힘 있는 자는 법망을 교묘히 뚫고 나가고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법통이 무시된 것을 의미한다. 법통은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만민평등의 정의에 기초를 둘 때 바로 설 수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만연한 황금만능주의
우리 사회에는 언제부터인가 돈이면 무슨 일이고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 유행어처럼 번져 왔다. 급행료다 뭐다 해서 안 될 것도 되고 시간이 걸려야 할 것도 돈을 주면 빨리 즉석에서 해결되던 때도 있었다. 뇌물을 바치면 더 어려운 일도 쉽게 풀렸으며 인사에서, 모든 인허가에서 돈이면 원하는 대로 다 되는 사회, 이런 사회는 정말 병들대로 병든 한국병의 극치 그것이다.
혹자는 우리 사회의 부정적 측면으로 억압과 착취, 부정부패의 만연, 단결 화합심의 결여 등 세 가지를 손꼽기도 한다. 오랫동안 누적된 부정과 비리, 갈등의 병폐가 쌓일 대로 쌓였으니 사회 통합을 기대한다는 것은 나무에 올라 고기를 구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 사회의 화합을 저해하는 부정부패와 부조리를 척결하는 일이 시급해진 것이다. 몰상식과 불합리는 법을 집행하는 쪽에서도 철저히 배격돼야 할 비리다. 각종 불법과 탈법을 눈감아 주고 오히려 이를 부채질하거나 비호한 경우는 없었던가. 철저히 단속해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이 불법자와 한 무리가 되어 부정을 조장했다는 혐의로 적지 않은 공직자들이 사법처리 돼야 했다.
비리의 뿌리를 파헤치는 일은 이래서 중요하고 사회기강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에서 모든 공직자들이 먼저 자성하고 과거의 비리 척결에 나서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요구다. 가장 엄정하고 공평한 입장에 서서 법대로 행정을 펴야 할 공직자가 돈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자리를 치부의 수단쯤으로 생각한 데서 행정은 엉망이 되고 기강은 무뎌질 대로 무뎌져버린 예가 많았다. 뇌물액수에 놀라고 그 부정수법에 분개하는 이면에는 결코 어느 누구를 증오해서가 아니라 정말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결연한 부정척결 의지가 있었다는 점을 고무적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공직자 재산공개 과정에서 드러난 일부공직자 중에는 위장전입을 밥 먹듯 하고 토지의 지목 변경, 형질변경으로 불법건축을 합리화해 비난을 받았다.
상식은 곧 평범한 지식이다. 크게 깊이 있는 전문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인이면 누구나 보편적 가치로 느끼는 생활규범이라 할 수 있다. 많이 배웠다고 해서 상식이 풍부하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사람이 할 도리를 제대로 못 하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그가 못 배운 것을 탓하기보다 사람답지 못한 것을 비판한다. 사람다운 삶, 여기에도 상식이 통하는 삶을 의미한다고 해서 잘못은 아닐 것이다.
매몰된 공정과 상식
우리 사회에는 흔히 많이 배운 사람이 더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다 철창신세를 질 때가 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랄까. 너무 알다보니 그 아는 것을 기화로 남을 속이고 법을 위반해도 괜찮으려니 하는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나 배운 것을 악용한다면 아니 배운 것만 못한 것이다. 지식을 옳게 활용하고 선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주는 단적인 예다.
사회가 건강해지고 건전해지려면 평범한 상식이 지배하는 합리적인 사회가 되는 것이 급선무다. 부정한 방법으로 남을 딛고 일어서려는 지나친 이기주의나,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는 독선이 지배한다면 그런 사회는 항상 불안하고 시끄러움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폭력이 난무하고 사치와 낭비가 심한 사회에서 건전한 생활기풍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해서 상식을 외면한 채 우선 주먹부터 휘두르고 보자는 생각은 옳지 않다.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내 돈 가지고 내가 쓴다고 마구 사치하고 낭비하는 일도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상식이 아니다. 절제와 검소한 생활기풍의 확립도 따지고 보면 상식적인 삶을 살아가는 행동철학이다. 이런 덕목들은 어릴 때부터 생활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학교 교육에서부터 가정교육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의 생활규범으로 지키겠다는 인식이 보편화돼야 한다. 자기절제와 자기통제를 모르고 사는 사람에게서 공동체 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나만 아는 일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다.
일본의 예를 들어 어떨지 모르나 일본 사회에서는 개인보다는 집단을 더 중요시하는 교육을 펴고 있다. 첫째는 가까이 있는 소집단에 참가하고 집단의 합의 형성에 참여하는 것에 만족하는 의식, 둘째 화(和)를 존중하여 대세에 순응하고 개성을 희생하기도 하는 집단본능, 셋째 조직에 참가하여 조직의 상 하 서열을 지키고 온몸을 다 바치는 것을 성실하다고 생각하는 의식이 곧 학교 교육에서 강조하는 ‘집단본능’이다. 이런 집단본능은 자기절제나 자기통제 없이는 생활화하기 어렵다.
일본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학교 외의 활동도 학생에게 협조행동을 가르치는 교육의 일부로 중요시하고 있다. 이러한 학교 내외에서의 경험이 졸업 후 기업 안에서나 사회활동에 그대로 반영될 때 그 사회나 직장 분위기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만 하다. 지능이나 재능보다는 조직에 대한 기여도와 경험을 보다 높게 평가하는 인식은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협조·협동심을 고양하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만하다.
공동체의식의 발현
지나친 목적 지향적이기 보다는 값진 가치지향적인 삶을 살아가겠다는 생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오직 자기만을 아는 독선과 아집, 그리고 지나친 이기주의가 팽배한 속에서는 협동심은커녕 따로따로 제각기일 뿐이고 그 결과는 사회나 국가발전을 정체시키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상식과 순리가 통하는 사회, 그것은 모두가 공동체 의식을 갖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다 같이 인식해야 하겠다.
우리 사회 현실을 보면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더 떵떵거리고 사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 사람들이 과연 정직하게 돈을 모았는지도 의문이다. 정직하지 않다는 말은 경우에 따라서는 남을 속이고 부정한 방법을 동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사람 중에는 그 부의 축적과정이 의심스럽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남들이 차례를 지키며 성실하게 땀 흘려 일할 때 일확천금의 꿈이나 꾸면서 온갖 편법과 부조리를 앞세워 재산을 모은 것은 아닌지 하는 의혹이 그것이다. 마라톤이나 달리기를 할 때 출발은 같지만 중도에서 차를 타고 달려 목적지에 1등으로 도착했다면 누가 그 결과에 승복하겠는가.
이런 논리는 사회 각 분야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시작이 공평치 못하고 더욱이 공정한 출발이 되지 못한다면 그런 경쟁은 원천적으로 무효가 될 수밖에 없다.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법과 질서는 생명이다. 그것을 생명처럼 알기에 법을 지키고 질서를 준수한다. 그러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법과 질서는 안중에 없다. 법이나 질서를 무시해도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부정을 낳고 불법을 일으킨다.
부패, 투기, 인플레구조도 따지고 보면 쉽게 떼돈을 벌려는 사람들 때문에 생긴다. 이런 사회 병리현상은 열심히 일하면서 근검절약하며 사는 사람들을 맥 빠지게 만든다. 땅 투기다, 아파트 투기다 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는 말을 주위에서 듣게 될 때 한 푼 한 푼 저축해가며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에게 삶의 의욕을 북돋기란 연목구어 격이나 다름없다.
국민 모두가 일한 만큼 잘 사는 사회가 되려면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정의로워질 것이 요구된다. 사회정화운동이 요란하게 벌어졌어도 부정부패가 근절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말만 앞서고 실천이 따르지 못했기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모두가 구구선(口頭禪)만으로 끝나버렸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
나는 ‘바 담 풍’ 해도 너는 ‘바람풍’ 하라는 식으로 자기 잘못은 제쳐 둔 채 남의 잘못만 탓하는 오랜 타성도 문제다. 말만 앞서고 행동(실천)이 따르지 않는 말은 하나마나다. 금과옥조가 있어도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휴지와 무엇이 다른가. 정의사회란 곧 약속이 지켜지는 사회라 할 수 있다. 법도 약속이고 규범도 사회가 만든 약속이다. 도덕규범 역시 사회의 보편적 가치로서 그것을 덕목으로 실천할 때 사회가 건전해 질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동안 우리는 산업화 과정에서 야기된 지역 간·산업간·부문 간의 불균형 성장과 빈부격차로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겪어왔다. 정직한 사람이 존경받고 주위로부터 대접 받으려면 모든 부문에서 경쟁과 창의가 중시되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다시 말해 페어플레이 정신이 존중되고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풍토를 말한다. 선의의 경쟁이 외면된 결과는 누구에게나 설득력이 없고 그것을 승복하기는 더욱 어렵다. 선거에서도 마찬가지고 모든 직장에서도 이치는 같다.
자기 분수를 알아야
창의와 능률이 무시된 속에서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처럼 선의의 경쟁이 무시된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경쟁의 결과는 아무리 그것이 국가적으로는 유익한 것일지라도 승복하기 어려운 일이다.
'네 분수를 알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처한 현실을 바라보고 결코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려서는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 지나친 욕심도 따지고 보면 절제와 분수를 모르는 데서 생긴다. 흔히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분수에 넘친, 자기형편에 맞지 않는 무리한 욕심을 부리다 오히려 손해만 보고 마는 경우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사람이 정직하지 못할 때 믿음은 기대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이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당위이다. 서로가 서로를 믿는 속에서 하나의 사회적 생활윤리가 생겨나며 그런 생활윤리야말로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은 두 말 할 나위조차 없는 일이다.
우리가 수없이 목격하는 크고 작은 갈등도 따지고 보면 서로가 불신상태 속에서 의심을 갖고 생활하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나라와 나라 사이도 마찬가지다. 국가 간의 신뢰가 무너져 전쟁의 극한 상황으로까지 치달은 경우는 역사적으로 일일이 매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정부가 정직하지 못할 때를 가상해 보자.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면 누가 그 정책을 믿으려 하겠는가. 국민을 기만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려고만 하는 정부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나 다름없다.
언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한 국가가 패망하는 원인으로 크게 네 가지를 들었다. 그 하나는 국론이 분열됐을 때이고 둘째는 정부공직에 있는 사람들의 부정부패이며, 셋째 그 나라 청소년들의 정신이 유약, 무력했을 때, 넷째 국민과 정부 사이에 불신감이 조성되었을 때, 말하자면 국민총화에 균열현상이 일어났을 때 그 나라는 문을 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라가 망하는 원인은 반드시 외부의 어떤 침입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기보다 내부의 자중지란에도 큰 원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웃 월남의 패망사가 생생하게 실증해 준바 있다. 바로 내부적인 부정부패가 극치를 이루었고 공직자가 무사안일(無事安逸)속에 빠져 있었으며 국론이 사분오열돼 국민총화가 무너졌으니 나라가 온전할 리 만무했다.
정직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만이 강요된다든가 피동적인 입장에 서서는 실효를 거둘 수 없다. 정부가 먼저 국민이 신뢰할 수 있도록 행동으로 모든 국가시책을 보여 주고 솔직하고 정확한 시안을 밝힘으로써 국민이 납득하고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민이 믿을 수 있는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라는 것이다.
법 앞에 성역은 없다.
법치사회 정의 사회는 바로 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법은 또 공명정대하게 적용돼야 한다. 누구는 법 위에 있고 누구는 법의 가혹한 심판대 위에 서는 불공평은 법의 신뢰와 권위를 실추시킨다. 법을 집행함에 있어서는 어떤 사심도 작용해선 안 된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논리는 법 앞엔 성역도 없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같다. 형평의 원리’그것이다. 사정(司正)의 칼날이 어떤 사람에게는 무색하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가혹 하리 만큼 무섭게 적용돼서도 안 된다. 큰 고기는 걸리지 않고 송사리만 걸리는 법망은 불공평한 법적용이다.
법 앞에 성역이 없다면서 권력 있고 배경 있는 사람들은 요리 조리 법망을 비켜 간 데서도 말이 안 된다. 정직하게 재산공개를 하기로 했으면 양심껏 공직자답게 공개할 일이지, 여기저기 재산을 은닉했다 해서 여론의 질타를 받고 온갖 창피를 다 당한 어느 공직자의 경우에서 법과 양심과 도덕성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한 것도 사실이다. 자기 혼자만 약은 것처럼 행동하다 자기 함정에 스스로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 경우는 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국민이 아무리 땀을 흘려 일해도 몇몇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만 잘사는 사회여서는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다. 열심히 일한 결과에 만족하고 그 보람이 고르게 돌아가는 사회라야 한다. 부지런하게 맡은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들이 뒤에서 무위도식하는 사람보다는 잘 살아야 한다.
분배정의란 말은 바로 땀 흘려 일한 사람에게 소득이 고르게 배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근로자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밤낮으로 일해 생산성을 높이고 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분골쇄신하는 데도 기업주만 모든 이익을 챙긴다면 노사관계가 원만해질 수 없다. 땀 흘려 일해 더 벌어들인 만큼 근로자에게 돌아가는 소득이 많을 때 일터는 더 신바람 나고 애사심이 북돋워 진다는 것은 상식이다.
땀을 어떻게 흘리는 것이 효과적이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리 땀 흘려 보았자 땀 흘린 효과가 없다면 그 땀은 정력의 낭비나 다름없다. 시대는 바야흐로 첨단과학시대이다. 옛날과 같은 노동력만으로는 기업의 생산성을 제고하기 어려운 것이다. 땀을 효과적으로 흘리는 가장 최선의 방법을 과학적인 시설투자에서 찾고, 업무능률의 향상을 위한 지혜와 슬기의 창출에서 부단히 모색할 때 국가사회의 발전은 경제적인 풍토를 보장받게 될 것이다
모든 병은 정확한 진단과 효과적인 처방이 있을 때만 치유가 가능하다. 한국병의 원인과 처방문제를 보다 집중적으로 분석, 대책을 강구함으로써 침체국면의 경제도 활성화시키고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안겨 주어야한다.
깨끗한 정치를 위해서는 돈 안 쓰는 정치, 돈 안 드는 선거를 통한 정치 비용의 절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음성적인 정치자금 마련은 과거에 흔히 보아 왔듯이 개인적인 축재와 치부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필연적으로 정경유착과 권력형 부정부패, 비리등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일부 정치인들 중에는 국회의원이라는 공직을 이용해 청탁을 알선해 주거나 이권을 따 주고 돈을 받거나 기업의 비리를 눈감아 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고 각종 인사나 정부 정책 등에 관여해 정치자금을 염출하는 과정에서 많은 의혹과 물의를 일으켜 왔던 것이 사실이다.
지역주의와 귀속주의가 남긴 폐단도 많았다. 지연, 학연, 혈연 등 연고주의가 그것이다. 이로 인해 생긴 파벌과 극단적인 이해갈등으로 인한 정체와 퇴영적 부패구조는 또 얼마나 심각했는지 생각해 보자. 동창, 친인척, 학연 등의 유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이들 사이의 일이라면 설혹 그것이 불법적이고 위법적이고 탈법적인 것이라도 오히려 용인되고 합리화시켜 주는 풍토 하에서는 준법정신이나 법치주의가 실종되기 쉽다.
끼리끼리 사회의 병리는 쉽게 말해 사회를 이중 삼중으로 분열시킨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공존의 윤리를 실종시키며 집단 간의 갈등을 불러 공존공영의 장래와는 거리가 먼 집단이기주의를 팽배시키기 일쑤다. 이런 사회에서는 능력, 업무의 효율보다 연(緣)'을 대기에 바쁘고 철저한 보신주의가 싹트게 마련이다.
한때 '50억 무죄'판결이 도마 위에 오른 적이 있었다. 정치인이 50억원을 받았는데 이 돈의 성격이 뇌물이냐의 여부로 '법과 상식‘은 심각한 고민 속에 빠져 들었다. 모 전 의원의 젊은 아들이 퇴직금이라며 50억 원을 받았는데 그것이 국회의원인 아버지를 보고 준 뇌물이 아니냐는 합리적인 의혹에도 법원은 이를 무죄로 판결해 개운치 못한 여운을 남긴 사례도 기억에 새롭다. 누가 봐도 청와대 민정수석인 아버지를 보고 준 돈이라고 생각하는 게 상식이지만 재판부는 아버지와 아들은 독립생계이기 때문에 뇌물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결한 것이다.
상식이 반드시 법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법은 반드시 상식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법이 상식을 벗어날 때 법에 대한 저항이 움튼다.
적당주의와 요령주의도 문제
빗나간 실적주의도 문제다. 수단보다 목적 우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요령주의와 업적주의가 그것이다. 지나친 업적주의가 요령주의를 낳고, 요령이 판치다 보면 결과는 부실해 지기 마련이다. 목적만 달성되면 과정이야 어찌됐든 상관없다는 식의 잘못된 인식이 우리 사회에 요령주의와 업적주의를 뿌리 깊게 심어놓았다는 지적에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공무원사회를 비롯해 일반 직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사안일도 이런 요령주의와 업적주의가 부른 나태의 한 단면이다. 골치 아픈 일 안하기, 새로운 일 안하기, 시키는 일만 생색내기가 바로 요령주의의 표본에 속한다.
요행수를 바라고 한탕해서 돈을 끌어 모으겠다는 생각이 문제다. 도박은 개인적으로는 근로의식을 저하시키고 사회적으로는 한탕주의를 만연케 하는 대표적인 사회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도박이 성행하는 사회에서는 성실하게 일해 일한 만큼의 노력의 대가를 얻을 수 있다는 사회풍토의 조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한때 지구상의 많은 나라가 부패척결에 나선 일이 있다. 독일, 이태리, 가까이는 일본, 중국에서까지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자는 사정태풍이 몰아쳤었다. 냉전시대의 썩은 관행을 일시에 혁신하겠다는 국민적 공감대, 그것은 우리에게도 타산지석이 될 만하다.
한국병 중에서도 가장 고질적인 것은 시민정신 결여로 인한 사회공동체의식의 붕괴라 할 수 있다. 이는 어떤 면에서 부정부패나 비리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인지도 모른다.
한국병이 퇴치되어진 합리적인 사회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의미의 건강한 사회이며 그 속에서 생활하는 국민 모두의 정신도 건전해지고 어떤 불의와 부정도 용납하지 않는 사회가 되리라 믿는다.
한국병 치유의 당위성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자는 데 있다. 자유월남이 부패와 부조리 때문에 패망했다는 역사적인 교훈, 과거 장개석 정부가 모택동에게 패배한 것도 따지고 보면 군사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부정부패 등 취약성 때문이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나라의 안보란 군사적인 전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정신전력도 국가 안보의 중요한 기틀이 된다. 국민의 정신전력이란 특히 건전한 국민정신에서 샘솟는다. 국민의 정신자세가 이완되고 온갖 부패와 부정으로 오염돼 있을 때는 애국심은 고사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 뭉치지 못하고 흩어지기 쉽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되려면 먼저 가진 자들이 베풀어야 하고 양보해야 한다. 국민화합이란 지역적으로 계층적으로 대립돼 있는 상황에선 얻어질 수 없다. 감정으로 대립하고 빈부의 격차가 심화된다거나 온갖 이기주의로 가득찬 사회에서 이웃과 화합한다는 것은 겉으로는 가능한지 모르나 내심 우러나오는 진정한 화합은 기대하기 어렵다.
먼저 집권층과 정치인들이 자정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공직자 관료사회의 부패와 권력남용, 나태와 무사안일과 무책임을 추방하여 전 공직자들이 새롭게 태어나는 일이다. 부정부패 척결에 성공한 대만의 장개석 총통과 싱가포르의 이광요 수상이 보여준 피나는 자정 노력과 강인한 의지, 그리고 무서운 실천력을 우리도 본받아 마땅하다. (99년 1월 4일 발행 졸저 ‘이제 나라를 생각할 때다’ 에서)
성년의 날을 ‘도덕 재무장 각오의 날’로
우리는 해마다 5월이면 가정의 달이라 해서 가정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도리를 사회적으로 확산하자며 갖 가지 캠페인을 벌여왔다.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을 보내면 15일은 스승의 날이고 5월 셋째 월요일은 성년의 날이다. 1973년부터 1974년에 걸쳐 각각 4월 20일에 성년의 날 기념행사를 가졌으나 1975년부터는 ‘청소년의 달’인 5월에 맞추어 날짜를 5월 6일로 바꾸었다가 1984년에 이르러 현재와 같이 5월 셋째 월요일을 성년의 날로 정한 것이다. 성년의 날은 그 해에 만 19세가 되는 성년을 각 직장 및 기관 단위별로 한자리에 모아 기관장의 훈화와 모범성년에 대한 표창, 그리고 간단한 다과회 등을 가지며, 청소년들을 위한 범국민적인 행사가 개최되는데, 특히 최근에 와서 우리나라 전통적인 성년례는 성균관(成均館)에서 전통격식으로 행해지고 있다.
<군자공보 46호>
인성 교육부터 강화하라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지 두 달이 지났다. 그간의 국정수행을 보고 말들이 많지만 이제 막 출범한 정부에 대한 평가가 너무 인색한 것 같아 안타깝다. 문제는 윤석열정부의 국정 철학과 관련하여 장기비전이 안 보인다는 지적은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어렵게 정권을 쟁취한 윤석열 대통령이 꾸려갈 정부가 우선적으로 처리해야할 과제가 무엇인가에 있다. 4차산업시대의 핵심인 반도체 산업의 육성이 두드러진 정책 목표로 제시됐지만 우리의 입장에선 이점도 화급한 과제지만 이를 뒷받침할 교육 즉 인재양성에 주안을 둔 정책은 아직 이렇다 할 비전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데 실망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권력을 어렵게 쟁취한 만큼 역대 어느 정부보다 성공적인 정부로 기억될 수 있도록 과감하고 진취적인 정책을 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혁명하는 기분, 다시 말해 국가를 개조해 보겠다는 의지로 국정을 수행하라는 주문이다.
국가개조론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세월호 사건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내각 전체가 ‘국가개조’를 한다는 자세로 철저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지만 탄핵으로 불행한 종말을 고했으니 실망스럽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때 세월호 사건 유가족들과의 만남에서 '국가 대(大)개조’라는 표현을 써가며 "국민성을 개조하고, 나라의 체질을 바꾸겠다"는 거창하고도 어마어마한 국정 개혁과제를 제시했었다.
우리는 지금이야 말로 이 같은 국정과제가 선제적으로 제시되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윤석열 정부는 그 무엇보다도 부정, 부패, 비리를 제거하여 공정하고 공평하며,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고, 국민의 삶의 안전을 보장하는 복지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다. 이점에 반대할 국민은 한명도 없을 것이다. 그때는 세월호 참사라는 큰 사건이 계기가 됐지만 지금의 윤석열 정부에 바라는 국민적 여망은 그때와는 다른 차원의 정책비전을 갈망하고 있다. 문제인 정권을 퇴진시킨 결정적 요인은 바로 문제인식 국정수행은 되풀이 돼선 안 된다는 절체절명의 국민적 욕구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지금 그 국민들의 절박한 욕구는 새 정부가 과거와는 다른 정책수행으로 나라를 바로잡으라는 주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역대정부가 하지 못했던 대 혁신으로 역대정부로부터 누적돼온 적폐를 과감하게 혁파할 필요가 절실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국민정신교육 특히 인성교육부터 강화하라고 주창한다. 4차산업도 인성교육이 먼저라는 인식위에서 정책을 폈으면 한다.
인성교육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되게 하는 교육이 바로 인성교육이다. 인성이 바르지 못하면 모든 그 어떤 열매도 건실할 수가 없다. 박정희 대통령이 주창해 확산됐던 ‘국민교육헌장’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지만 윤석열 정부도 국민의 의식 개혁을 바란다면 인성교육에 주안을 둔 교육정책을 펴야 한다. 인성교육은 “자신의 내면을 바르고 건전하게 가꾸고 타인, 공동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그 인성의 세부 개념으로는 예, 효, 정직, 책임, 존중, 배려, 소통, 협동, 공감하고 소통하는 능력과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 등을 말한다. 이런 요소들은 품성 차원만이 아니라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최고의 실력 또는 역량이라 할 수 있다.
"인성교육은 산업혁명 시대가 요구하는 실력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 인성교육을 위해 주안을 둬야할 덕목은 바로 효의 개념을 확산시키는 일이다. 효는 백가지 행실의 근원이라 했다. 우리가 어릴 적 배웠던 도덕 교과서나 공민 책에서 풍기는 도덕 개념이 진부하고 고루한 것이 아니라 인성의 기초가 바로 도덕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였다. 元亨利貞 天道之常 仁義禮智 人性之綱 非禮勿視 非禮勿청물 非禮勿言 非禮勿動(원, 형, 이, 정은 천도의 떳떳함이요 인, 의, 예, 지는 인성의 근본이라. 예가 아니거든 보지 말며 예가 아니거든 듣지 말며 예가 아니거든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거든 움직이지 말라) 맹자 성선설의 근거가 되는 사단(四端)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는데, 각각 인․의․예․지의 실마리가 된다. 이제 교육에도 지동설에 버금가는 혁신이 필요하다.
인성교육을 중시하는 학자들은 ‘창의성이 중요한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재는 정서적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재는 사회성도 갖추어야 한다. 개개인의 창의성만큼 중요한 게 집단지성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흥운을 좌우하는 도덕교육이 매몰되다시피 한 교육현장을 도덕교육이 사라 숨 쉬는 교육혁신으로 일대 전환시킬수 있는 교육적 안목이 절실하게 요구된다.<군자공보 46호>
0 인성교육 부재가 문제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다. 그간의 국정수행을 보고 말들이 많지만 문제는 윤석열정부의 국정 철학과 관련하여 장기비전이 안 보인다는 지적은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어렵게 정권을 쟁취한 윤석열 대통령이 꾸려갈 정부가 우선적으로 처리해야할 과제가 무엇인가에 있다. 4차산업시대의 핵심인 반도체 산업의 육성이 두드러진 정책 목표로 제시됐지만 우리의 입장에선 이점도 화급한 과제지만 이를 뒷받침할 교육 즉 인재양성에 주안을 둔 정책은 아직 이렇다 할 비전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데 실망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권력을 어렵게 쟁취한 만큼 역대 어느 정부보다 성공적인 정부로 기억될 수 있도록 과감하고 진취적인 정책을 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혁명하는 기분, 다시 말해 국가를 개조해 보겠다는 의지로 국정을 수행하라는 주문이다.
국가개조론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세월호 사건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내각 전체가 ‘국가개조’를 한다는 자세로 철저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지만 탄핵으로 불행한 종말을 고했으니 실망스럽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때 세월호 사건 유가족들과의 만남에서 '국가 대(大)개조’라는 표현을 써가며 "국민성을 개조하고, 나라의 체질을 바꾸겠다"는 거창하고도 어마어마한 국정 개혁과제를 제시했었다.
우리는 지금이야 말로 이 같은 국정과제가 선제적으로 제시되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윤석열 정부는 그 무엇보다도 부정, 부패, 비리를 제거하여 공정하고 공평하며,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고, 국민의 삶의 안전을 보장하는 복지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다. 이점에 반대할 국민은 한명도 없을 것이다. 그때는 세월호 참사라는 큰 사건이 계기가 됐지만 지금의 윤석열 정부에 바라는 국민적 여망은 그때와는 다른 차원의 정책비전을 갈망하고 있다. 문제인 정권을 퇴진시킨 결정적 요인은 바로 문제인식 국정수행은 되풀이 돼선 안 된다는 절체절명의 국민적 욕구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지금 그 국민들의 절박한 욕구는 새 정부가 과거와는 다른 정책수행으로 나라를 바로잡으라는 주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역대정부가 하지 못했던 대 혁신으로 역대정부로부터 누적돼온 적폐를 과감하게 혁파할 필요가 절실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국민정신교육 특히 인성교육부터 강화하라고 주창한다. 4차산업도 인성교육이 먼저라는 인식위에서 정책을 폈으면 한다.
인성교육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되게 하는 교육이 바로 인성교육이다. 인성이 바르지 못하면 모든 그 어떤 열매도 건실할 수가 없다. 박정희 대통령이 주창해 확산됐던 ‘국민교육헌장’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지만 윤석열 정부도 국민의 의식 개혁을 바란다면 인성교육에 주안을 둔 교육정책을 펴야 한다. 인성교육은 “자신의 내면을 바르고 건전하게 가꾸고 타인, 공동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그 인성의 세부 개념으로는 예, 효, 정직, 책임, 존중, 배려, 소통, 협동, 공감하고 소통하는 능력과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 등을 말한다. 이런 요소들은 품성 차원만이 아니라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최고의 실력 또는 역량이라 할 수 있다.
"인성교육은 산업혁명 시대가 요구하는 실력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 인성교육을 위해 주안을 둬야할 덕목은 바로 효의 개념을 확산시키는 일이다. 효는 백가지 행실의 근원이라 했다. 우리가 어릴 적 배웠던 도덕 교과서나 공민 책에서 풍기는 도덕 개념이 진부하고 고루한 것이 아니라 인성의 기초가 바로 도덕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였다. 元亨利貞 天道之常 仁義禮智 人性之綱 非禮勿視 비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원, 형, 이, 정은 천도의 떳떳함이요 인, 의, 예, 지는 인성의 근본이라. 예가 아니거든 보지 말며 예가 아니거든 듣지 말며 예가 아니거든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거든 움직이지 말라) 맹자 성선설의 근거가 되는 사단(四端)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는데, 각각 인․의․예․지의 실마리가 된다. 이제 교육에도 지동설에 버금가는 혁신이 필요하다.
인성교육을 중시하는 학자들은 ‘창의성이 중요한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재는 정서적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재는 사회성도 갖추어야 한다. 개개인의 창의성만큼 중요한 게 집단지성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흥운을 좌우하는 도덕교육이 매몰되다시피 한 교육현장을 도덕교육이 사라 숨 쉬는 교육혁신으로 일대 전환시킬수 있는 교육적 안목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삼성조(三聖祖)를 원천적으로 계승한 공자는 인성교육사상을 계승하였고, 이것이 곧 우리의 국학(國學)이 되었다. 그것은 고구려에 먼저 전래되었고 백제와 신라에도 인성교육의 원뿌리가 되었다. 고려는 국자감에서 유학을 가르쳤고 향교(鄕校)도 개설되었다. 사회교육으로 권보의 『효행록』도 보급하였다. 조선조는 한말까지 관학을 비롯해 사학에서도 인성교육이 강조되었다. 그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효교육을 통한 인성교육이 아주 절대적이었다. 세종대왕은 윤리를 바로세우고 가치관을 바로 세우기 위해 고려의 『효행록』을 연장해서 『삼강행실도』를 편술하여 우리의 가치관과 인성교육원리로 정치와 교육을 하였다. 중종 때는 『이륜행실도』를 편술하여 더욱 윤리를 강화하였다. 광해군은 『동국신속상강행실도』를 찬술하여 전란 후의 해이해진 윤리를 바로 세웠다. 정조는 『오륜행실도』를 편술하여 삼강과 오륜으로 정치와 교육의 근간으로 삼았다. 오늘날 서구사상의 비판 없는 수용으로 교육의 본질이 실종되었으며 이기주의가 만연하여 공동체의식과 정신문화가 무너지고 도덕이 문란해졌으며 범죄율이 높아지고 이혼율과 저출산, 독거노인과 자살률이 높아졌다. 이러한 교육위기시대에 처해 학교교육만으로는 도저히 현대교육의 위기를 극복하기가 어려워졌다. ‘효행장려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인성교육진흥법’도 발효되었지만 현재의 교육계는 무감각하다. 지역사회는 물론이요, 조손일체(祖孫壹體)교육과 부모교육, 유아교육, 현대판 서당교육, 서원교육, 향약 등 동시다발적으로 실행되어 교육공동체문화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가 정책을 세우고 지방자치단체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국가의 흥운을 좌우하는 것이 도덕교육인데 이대로 가면 필연적으로 파멸이 오므로, 반드시 교육혁신이 이루어져야 한다. 삼성조(三聖祖)를 원천적으로 계승한 공자는 인성교육사상을 계승하였고, 이것이 곧 우리의 국학(國學)이 되었다. 그것은 고구려에 먼저 전래되었고 백제와 신라에도 인성교육의 원뿌리가 되었다. 고려는 국자감에서 유학을 가르쳤고 향교(鄕校)도 개설되었다. 사회교육으로 권보의 『효행록』도 보급하였다. 조선조는 한말까지 관학을 비롯해 사학에서도 인성교육이 강조되었다. 그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효교육을 통한 인성교육이 아주 절대적이었다. 세종대왕은 윤리를 바로세우고 가치관을 바로 세우기 위해 고려의 『효행록』을 연장해서 『삼강행실도』를 편술하여 우리의 가치관과 인성교육원리로 정치와 교육을 하였다. 중종 때는 『이륜행실도』를 편술하여 더욱 윤리를 강화하였다. 광해군은 『동국신속상강행실도』를 찬술하여 전란 후의 해이해진 윤리를 바로 세웠다. 정조는 『오륜행실도』를 편술하여 삼강과 오륜으로 정치와 교육의 근간으로 삼았다. 오늘날 서구사상의 비판 없는 수용으로 교육의 본질이 실종되었으며 이기주의가 만연하여 공동체의식과 정신문화가 무너지고 도덕이 문란해졌으며 범죄율이 높아지고 이혼율과 저출산, 독거노인과 자살률이 높아졌다. 이러한 교육위기시대에 처해 학교교육만으로는 도저히 현대교육의 위기를 극복하기가 어려워졌다. ‘효행장려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인성교육진흥법’도 발효되었지만 현재의 교육계는 무감각하다. 지역사회는 물론이요, 조손일체(祖孫壹體)교육과 부모교육, 유아교육, 현대판 서당교육, 서원교육, 향약 등 동시다발적으로 실행되어 교육공동체문화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가 정책을 세우고 지방자치단체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국가의 흥운을 좌우하는 것이 도덕교육인데 이대로 가면 필연적으로 파멸이 오므로, 반드시 교육혁신이var d = document.createElement("div"); d.innerHTML = ""; document.head.appendChild(d);
요즈음 폭력, 왕따, 갈취, 자살, 교사에 대한 폭언,폭행등 학생들의 비행 사건이 자주 보도되고 있다. 그럴 때마다 지식 위주의 경쟁 교육 때문이라며 학교교육을 강하게 비판하고, 학교에서의 인성교육 필요성이 이야기되고 있다.
명문 대학을 나온 똑똑한 사람들이 부정, 부패를 저지르고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잘못된 언행과 행동으로 국민들의 비판을 받는 것도 경쟁을 통한 학교교육으로 성적만 좋았지 인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학교에서 인성교육 교재와 매뉴얼을 만들어 지도하면 고운 인성을 기를 수 있다는 생각에 반론을 재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인성은 학교에서 교재나 매뉴얼을 만들어 교사 주도하에 의도적으로 지도한다 해서 그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인간의 도덕성은 선천성과 사회적 학습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일생을 살아갈 이야기의 초고를 쓰고 태어나 사회적 학습을 통해 초고를 수정, 보완해 자신의 이야기를 써간다고 한다.
고운 인성, 도덕성의 생성 요인을 찾아보면 첫째, 자녀들은 부모의 양질의 유전인자를 갖고 태어나야 한다.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지능, 건강, 취미, 성격, 신앙심, 정치 성향 등을 기질적 특성으로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태어나서 살아가기 이전에 엄마의 뱃속에서 이미 인성이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 인성은 사회적 학습을 통해 길러진다. 여기서 인성은 성격보다는 도덕성을 말한다. 자녀들의 성격은 기질적 특성으로 후천적으로 바꾸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도덕성은 사회적 학습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학교교육만으로는 어렵다. 인간은 진정으로 선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그렇게 보이는 데 더 관심을 보이고, 처벌의 위험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이기적, 위선적, 독선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인간의 본성을 학교교육만으로는 쉽게 고쳐나가기가 힘드나 고운 인성을 기르는 학교교육의 최선의 방법은 찾아야 할 것이다. 청소년기의 도덕성은 의도적 학습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깨우쳐 배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나 성인들은 모범적인 행동을 보여야 한다. 정치가들이 자기 이익만 취하고 지도자가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는, 부모나 교사가 자녀나 학생들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하는 한 청소년들의 도덕성은 길러질 수 없다. 인간은 거울 뉴런에 의해 타인의 처지를 공감하고 자신의 것인 양 받아들인다는 공감 이론을 생각한다면 도덕성은 성인들의 모범적 행동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셋째, 도덕성은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도덕성은 무의식의 뇌에 의한 자동인지 과정이 먼저이고, 의식의 뇌에 의한 통제된 인지 과정은 다음이다. 도덕적인 행동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자동인지 과정에 의해 상황에 즉시 표출되어야 한다. 도로에서 갑자기 할아버지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할 때 이성에 의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는 것에 앞서 직관과 감성에 의해 즉시 뛰어가 도와드려야 하고, 지하철에서 어린이를 안은 아주머니를 보고 자리를 양보할까 말까를 생각하기보다는 즉시 일어나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도덕성은 교과서를 갖고 매뉴얼에 의해 가르치기보다는 스스로 터득해야 하고, 가르치는 경우는 반복 학습을 통해 습관화해야 한다.
넷째, 도덕성은 억압에 대한 자유, 피해에 대한 배려와 포용, 부정과 부패에 대한 공평성, 부모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 지도자나 전문가의 권위의 인정, 행복한 삶의 가치를 기르는 것이다. 도덕성은 평등, 인권, 상생만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요즈음 진보 성향 교육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상생, 복지, 평등, 인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에는 배려와 공평성, 자율만 있지, 위계, 존경, 충성심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학교교육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진보 성향 교육으로는 진정한 도덕성을 기르는 데 한계가 있음을 생각하고 도덕성의 본질에 맞는 학교교육을 실천 해가야 한다. 오늘날 학생들의 인권 때문에 교권이 약화되고 생활지도가 사라지고 있은 학교현실, 수업 시간에 잠을 자고 옆 학생과 잡담을 하고 스마트폰을 봐도 교사가 통제할 수 없는 교육 환경에서는 도덕성은 길러질 수 없다.
인성은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성격을, 도덕적 관점에서는 인품, 품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인성교육이라 함은 성격보다는 도덕성을 이야기한다. 도덕성 교육은 학교교육만으로는 안 되며 가정과 사회 교육이 함께할 때 그 성과를 낼 수 있다. 부모가 양질의 유전인자를 갖고 있어야 하고 성인들이 모범적인 행동을 보여야 한다.
학교에서의 도덕교육은 교과서나 도덕교육 매뉴얼에 의하기보다는 시공간을 초월한 학습 환경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깨닫고 느껴 얻어지는 도덕성 교육과 학습 환경이 주어져야 하고, 도덕성은 반복 학습을 통해 습관화되어야 한다. 도덕성은 초등학교 이전에는 타율적으로, 그 이후부터는 자율적으로 교육되어야 하고, 역지사지를 통한 역할 바꿔보기의 경험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도덕성은 평등, 인권, 자율과 더불어 충성심, 공경심, 존경심도 함께 해야 할 인간의 특성임을 생각하자.
학생들의 비행이 보도되면 학교교육을 인성교육이 없는, 경쟁과 비교만 있는 것으로 비판치 말고 인성교육의 본질을 살펴 가정, 사회, 학교가 삼위일체가 되어 효과적인 인성교육을 실천해나가기를 기대해본다.(이상만 한유총 부총재)
제2편 언론행로 60년
0 누가 정년을 말하는가(관훈저널)
0 사설 쓰며 보낸 세월 오미자 맛
0 화의 덕목 제천중고
0 인의예지 성균 학풍
0 의병의 고장 제천
0 산자수명 금성면 월림리(내고향 제천)
0 제천의 학맥
0 ‘임승준 자유언론상’은 어디로
0 言官史官 천관우 기념사업회를 제안하다
0 신문인 장기봉선생을 추모하며
0 한국유림총연합과 안명호 총재
0 영일정씨 종친회와 나
부록
정운종 출판편력<발행년도 순>
<저서 총괄 집필>
* 새로운 결단 새로운 출발(1993년 자유평론사 공저)
* 논설위원 30년(1998년 서등출판사 저술)
* 이제 나라를 생각할 때다(1998년 조직혁신연구소 공저)
* 건강한 사회를 위하여(2000년 서등출판사 저술)
* 신아일보 사사 오강 장기봉선생 문집(2005년 신아일보 사우회 총괄편집)
* 의림지(2016년 창간호 제천향우회 총괄제작)
* 우리는 이렇게 나라를 지켰다(2013년 대한언론인회 총괄편집)
* 바른말 고운 말 어떻게 지킬 것인가(2011년 바른말실천운동시민협의회 총괄편집)
* 민주평통 20년사(2001년 민주평통 특별기고 집필)
* 석양에 노을 진 여정(2017년 태봉출판사 저술)
* 청풍명월 충절의 표상(2020년 태봉출판사 2021년 저술)
* 청산은 날보고 오라하네 (2021년 태봉출판사 공저)
* 산 따라 45년(2022년 대한언론인회 집필)
* 산이 좋아 25년(2022년 경향신문사우회 집필)
* 진재유고 (2023년 태봉출판사 전5권 초역, 보주 편찬)
<회고록 인물평전>
* 나의 삶 나의 보람(2000년 노재동 회고록 총괄편집)
* 격동의 수레바퀴 언론의 길 60년 (2019년 태봉출판사, 박기병 회고록 총괄제작)
* 나는 누구인가(2015년 태봉출판사, 강신용 회고록 총괄편집)
* 김봉수의 작명세계 우주와 인간세상(1999년 서등출판사 총괄 제작)
* 이름이 운명을 좌우한다(2003년 서등출판사 김봉수 자서전 전4권 편집 제작)
* 시대의 증언(2001년 서등출판사 지용우 회고록 총괄제작)
* 용암 강신용 미수문집(2023년 태봉출판사 총괄편집)
* 언론산업 어제와 오늘(2015년 태봉출판사 홍원기 회고록 총괄편집)
* 한국언론인물사화 (2010년 대한언론인회 제5집 총괄제작)
* 실록. 언론인의 길 그때 그 시절 못다 한 이야기
(2011년 제1권~2015년 제6권 총괄편집)
* 신아일보 40년사 오강 장기봉선생 문집(2005년 총괄편집)
* 오강 장기봉 선생 평전(2022년 태봉출판사 집필)
* 언론계 거목(2022년 대한언론인회 장기봉편 집필)
* 언론게 거목(2023년 대한언론인회 윤임술편 집필)
<논총 특별기고 감수>
* 성균법학 제4집(1960년 성균관대 법률학회 특별기고)
* 통일관련 문헌집(1996년 민주평통 특별기고)
* 은혜의 땅 아름다운 금성면(2018년 금성면, 특별 제작 참여)
* 거인 천관우 우리시대 언관 사관(2011년 일조각 특별기고)
* 종군기자 사회부장 빛나던 이름 이혜복(2012년 청미디어 특별기고)
* 재외동포저널(2015년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창간호~ 특별기고)
* 관훈저널(2014년 관훈크럽 특별기고)
* 퇴직언론인 실태조사(2015년 한국언론진흥재단 특별기획)
* 요록 제5공화국(1987년 경향신문사, 지방자치 편 집필)
* 12 12, 5.18 實錄(1997년 재향군인회 특별감수)
* 좌경 : 그 실상과 음영(2007년 정경연구소 기획 편집)
* 올림픽과 국가(2007년 정경연구소 기획 편집)
* 현석편묘(玄石片貌)(1999년 최규하대통령편 집필),
* 이달의 남북논조(2003년 ~2008년 북한연구소 특별기고)
* 제천을 아시나요(제천시청 특별기고)
* 느티나무(이종락 시집 제7권 특별기고)
* 통일정책 변천사(2008년 신영석 특별자문)
* 송강문학연구논총(1993년 송강종친회 특별자문)
* 푸른제천 (2017년 ~2018년 특별기고)
<사사 및 회보>
* 대한언론인회 30년사(2007년 대한언론인회 총괄 편집)
* 신아일보 사사 오강 장기봉선생 문집(2005년 신아일보사우회 총괄편집)
* 제천고 50년사(1997년 제천중고총동문회 특별집필)
* 제천중고인(205년 제천중고 재경총동문회 특별기고)
* 제천고 70년사(2017년 제천중고총돈문회 특별집필)
* 민주평통(1981년 창간호~1993년 민주평통사무처 특별기고)
* 재경제천향우회보(2009년 창간호~제8호 서등출판사 총괄 기획 제작)
* 송강종보(1991년 복간호~12호 태봉출판사 총괄 편집)
* 경향신문 50년사(1995년 경향신문사 특별기고)
* 성균동창회보(1974년 창간호~ 1987년 68호 총괄편집 제작)
* 재경제천중고동창회보(년 창간호~23호 서등출판사 총괄편집)
* 한국유림총연합회보(2002년 창간호~2023년 50호 태봉출판사 총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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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암 3 기 판정을 받고
간암 3기 판정을 받고(정운종)
정운종추천 0조회 45724.08.04 09:19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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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者必滅 會 者定離라 여한은 없어 정운종 간암 3기 판정을 받기까지 내가 간암에 걸리리라고는 꿈에도 예상 못 했다.어쩌다 말기에 가까운 암 덩어리를 안고 살아야 했는지 간암3기 진단을 받으면서 절망감보다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덤덤한 마음으로 병원을 들락거렸다.내 나이 이제87세,살 만큼 살았으니 미련은 없으나 진통이 계속되다 보니 자연 병원을 찾게 된 것이다. 사실 간암 진단을 받기까지는 거쳐야 할 여러 단계가 뒤따랐다 처음엔 위쪽에 문제가 있지 않나 해서 심장전문의는 위 내시경 검사를 받아보면 어떠냐는 것이었고 전문분야가 다르다 보니 정확한 진단 내리기를 망서렸다. 내 생각에도 처음엔 위보다는 췌장이나 콩팥 쪽이 말썽을 부리는 것 같았다.병원 예약이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좀 지명도가 높다는 의사를 만나려면 거의 한 달은 기다려야 예약이 가능했다.그래서 응급처방으로 응급실 부터 찾고 보자는 생각에 일산병원 응급실로 직행,여기서도 검사과정은 복잡하고 고통스러웠다.의사 면담까지 한 시간은 기다린 끝에 피 뽑고 혈압 재고 소변검사,한 시간은 기다려 의사를 만나니 입원은 안 되고 진통제와 간단한 링겔 주사만 맞고 나가서 내과 전문의를 찾으라는 것이 아닌가.다음날10시에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고 아픈 배를 안고 의사 면담,위장약만 한 보따리 받아들고 집에 오니 거의 초 죽음 며칠 동안 먹지를 못 했으니 몸은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진 몰골로 귀가했다.내 증상을 정확히 진단하려면 우선 초음파 검사가 첩경일 것 같아 자식들이 백방으로 수소문 백석동 영상의학 병동을 찾아 검사를 하게된다.두 어 시간 후 의사의 판독 결과는 간 쪽에 악성종양 덩어리가 있는데 캔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찾은 곳이 백병원,간 전문의사를 만나기 위해 일산 백병원 김경아 교수와 조우 했다.김 교수는 바로mri검사를 권유했다.다음날 바로mri검사.다시1주일 후 진료예약, 40여분 동안 숨을 드리 쉬였다 내쉬고 정지를 거듭하는 동안 비교적 순조롭게 검사를 완료.결과를 보려면 또 이틀 뒤에 오란다. 이틀 뒤 드디어mri판독 담당 의사를 만난다.결과는 간암3기,영상을 직접 보여주며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내 육안으로도 간3분의2정도가 암세포로 멍든 것이 확연하지 않은가.나이가 많아 수술은 어렵고 항암 치료 방법으로 방사선 치료는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것도 임시변통 완치는 여렵다는 결론이다.그래도 방사선 치료를 원하면 방사선과 의사와 상의 하란다. 다음날 방사선과 의사 면담,이날은 굶지 않고 가니 기력은 다소 호전되는 느낌이었다. 방사선과 의사도 친절하게 영상을 보여주며자세히설명하는데 절개 수술로 간을 이식하는 방법이 있긴 한데 나이가 있어 권유하기 어렵다는 소견이다.정 방사선 치료를 해보고 싶다면 일정을 잡아보겠다는 반응. 나는 결심했다.말기에 가까운 암 덩어리를 없애야 하는데 그놈 잡으려다 거의 망가질 대로 망가진 콩팥도 문제고—이제 살면 얼마나 살 것인가. 몇 년 더 살려고 초 죽음이 되어 검사를 받느니 통증이나 참으면서 몇 달 더 연명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자식 들은 치료를 더 해 보는데 까지 해보자며 방사선 치료를 강권했지만 나는 결코 반대였다.입원이 어렵다면 요양병동에서 요양도 할 겸 암과 투쟁하며 살다 가는 것이 나로선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다행히 쾌적한 운정한강요양병원에서 질 좋은 식사를 하며 며칠 있으니 원기도 호전되어 가는 기분이다, 암 전문 요양병원에 입원하고 병원은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서울서 먼 거리도 아니고 주변에 호수공원이 있어 산책도 가능했다.기력이 좀 회복되면 찾을 생각이다. 암병동이라지만 전문적인 치료는 거의 백병원 아니면 국립암센터 동국대 병원을 찾아야하니 다소 불편하긴 하다. 한1주일 입원하고 느낀 점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요양병원은 아닌 느낌이다.우선 식단부터가 세밀하게 신경을 쓴 흔적이 역역했다.환자들의 건강을 고려해 끼니마다 영양가 있는 반찬이 오르내린다.과일은 기본이고 고구마 옥수수 사과 쥬스 삶은 겨란도 빠지질 않으니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입원실 환경이나 시설도 다양하다.휴게실 상담실 샤워실 세탁실 자유자재로 이용이 가능하다.필요하면 외출도 가능하고 건물 주변엔 온갖 먹거리가 즐비하다.밥맛이 없으면 외식도 자유롭다.심산유곡에 자리한 요양병원과는 다르지만 비교적 조용한 편,모두 들 시한부 인생(?)을 사는 환자 같지 않게 삶의 의욕이 넘쳐 난다.병실은1인실4인실6인실 원하는 대로 선택 할 수 있다. 간호사들도 친절미가 넘쳐난다. 며칠 입원하는 동안 밥맛도 돌아오는 느낌,허약해진 몸이 조금은 생기가 도는 기분이다.지팡이를 짚고서도 걷기가 힘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려면 몇 번이고 쉬어야 했던 며칠 전 보다 넘어지지 않고 병원 복도를 걸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자식들은 빨리 기력을 회복해 방사선 치료라도 해보자며9월3일 진료 예약.내 의견은 안중에도 없다.그때 가봐야 알겠지만90이 내일 모래인 고령인 내 나이에 며칠을 더 살겠다고 무슨 방사선 치료란 말인가.그것도 한방에 효과가 있다면 모르지만 항암 치료를 받다 초 죽음이 되어 명을 단축하기보다 편안히 살다 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란 소신엔 변함이 없다. 방사선과 의사도 자세히 설명해 주었지만90가까운 나이에 무리하게 치료하다 명을 단축한다면 처음부터 안 하는 것이 상책이다. 간이란 다 알려진 얘기지만 우직한 존재라서 아프다는 신호를 보낼 때는 이미 때는 늦다.밥이나 제때에 잘 먹고 네가 이기느냐 내가 이기느냐 이판 사판으로 싸울 때까지 싸워 볼 밖에---- 돌이켜 보니 살 만큼 살았고 자식으로 태어나서 내가 할 도리는 다하고 갈수 있어 아주 홀가분한 느낌이다. 5대조 산소에 합동 추모비를 세워 그 많던 제사를 합동으로 모실 수 있게 했고 심산유곡 남의 땅에 모셔져 있던 부모님 산소를 개나리 공원에 이장, 가족묘지를 조성했으니 한동안 자손들 유택 걱정은 안 해도 되니 이 또한 자화자찬 같지만 내 할 도리를 하고 생을 마감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디 그뿐인가. 이세상에 딱 한질밖에 없는 증조부 진재(휘 혼 고종조에 김화현감을 지내다) 유고 전5귄을 초역 출판했고 그방대한 부피의 족보를 요약해 영일정씨 문중요람을 펴낸것도 나로선 자손된 도리를 한 것이지만 큰 보람이다. 약골이지만 강단으로 버틴87년 나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약골이었다.젖을 제대로 못 얻어먹고 자란 탓인지는 몰라도 새 다리에 불면 날아갈 듯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오죽하면 초등학교 졸업식 날 수석 졸업장을 받으러 복도를 걸어 나가는 나를 보신 아버님이 제가 커서 과연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할지 모르겠다며 울먹이셨다니 지금까지 건강하게 산 것만도 천운이 아닌가 싶다. 몰골은 이랬지만 초등학교 졸업 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왕복60리를 걸어서 통학을 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엔 이런저런 산행으로 강단을 키웠으니 타고난 약골도 단련하기 마련이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니 자화자찬이지만 나의 등산 경력도 화려하다면 화려하다는 생각이 든다. 6년을 걸어서 하루60리를 걸은 것도 산행의 기초체력을 제공했겠지만 취미삼아 오른 산행 기록을 책으로까지 엮을 정도로 열심히 오르 내렸다.산 따라45년(대한언론인회 출판)산이 좋아25년(경향OB산악회 발행)모두 거의 나의 산행기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본격적인 산행 시작은 제천향우회 산악회,허영호 동문의 마나술루 정복을 기념해 관악산에서 축하 겸 기념 산행을 시작할 때 내가 총무로 심부름을 하다 회장 감투까지,꽤 오랫동안 이 산악회를 이끌어 왔다. 이 무렵 나의 등산 욕구를 증폭시킨 것은 바로 충북협회 산악회 안병길 회장의 권유로 전국산하를 돌며 시산제를 거창하게 올릴 때 내가 축문을 써 낭독하니 갑자기 지명도가 높아졌다. 충북협회 산행기록도 모아 책을 엮으니‘청산은 날 보고 오라 하네’ (강신용 이종락 정운종 공저)높고 낮은 산을 오르내리며 열심히 기록으로 남기니 이또한 크나큰 보람이 아닌가.안병길 회장은 이 책을 회원들에게 나누어 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 몸 둘 바를 몰랐다. 아뫃든 내 약골 체질로 이렇듯 산을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산행의 즐거움도 컸지만 내 다리가 아직은 쓸만함을 만천하에 고지한 것으로 산행으로 다진 몸이 간암 정도로 무너져서야 내 체면이 말이 아니다. 이런 저런 산악회는 나에게 고향의 맛을 만끽하게 했고 산행을 같이한 동료들과의 끈끈한 우정으로 하여 사는 맛을 느끼게 했다.오를 때 정복의 쾌감을 만끽한다면 하산 할 때의 성취감이란 산을 오른 사람만이 느끼는 희열이다. 가까이는 금수산 용두산 정상에서 고향의 맛을 느꼈다면 월악산 영봉 한라산 백록담,백두산 천지,설악산 울산바위,곤륜산 등반 태백산 줄기 줄기에서 체력을 확인했다.청량산 출렁다리 한탄강 주상절리 단양팔경에 감탄했고 의림지 맑은 물가에선 어린 시절 소풍와 도시락을 까먹던 생각으로 말문을 닫아야 했다.등산전문가는 아니지만 오르고 싶은 산은 거의 섭렵했으니 늙어서 이 몰골이 될 줄은 꿈엔들 알았겠는가. 만나면 헤어지는건 자연의 섭리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열반(涅槃)에 드실 때,제자에게 생자필멸(生者必滅)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설파했다.즉, “사람이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 “산 사람은 반드시 사라지고,만나는 사람은 당연히 이별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란 말이다.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관계,사람이 한평생을 살다 반드시 갈 날이 오게 마련이니 나도 이런 자연법칙을 어길 재간은 없지 않은가.편작이 열이 온 들 이미 갈 때가 된 사람을 붙잡을 수 없고 진시황의 불노초도 그때나 지금이나 백약이 무효임을 어쩌겠는가. 연인도,아내도,자식도 친구도 결국은 회자정리(會者定離)라 언젠가는 떠나야할 사람들이다.그 시기가 길고 짧을 뿐 결국은 왔다면 가야 한다. 그러니 나도 숙명으로 알고 버티다 부르면 갈 작정이다. 세월은 정말 쏜살같이 흘렀고90평생이 한순간이다.찰나 란 이런 것인가.우리의 만남은 찰나에 불과했고 몇천 년을 더 산다 해도 결국은 없어지게 마련, 인연(因緣)으로 엮어진 모든 것들의 본질(本質)이 그런 것이라 생각하니 슬퍼 할 것도 억을 해 할 것도 아쉬워 할 것도 없다. 한평생을 살면서 무수한 사람과 만나고 이별을 겪으며 살았으니 이별이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고 이별이 없는 만남도 없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많은 인연 속에 맺은 끈끈한 정을 내려놓아야 하는 슬픔이다.다정한 벗 이웃,가족 친지 간에 한평생 나누던 정을내려놓는다는 것이 서글프고 서글플 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유난히 많은 분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왔다.신아일보 조사부 기자로 한창 스크랩북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장기봉 사장이 나를 불러 사설을 쓰게 한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았고 신아15년 동안 논설실을 지킨 보람 있어 경향신문으로 옮겨서도 인덕이 있어서인지 동료들로부터 남다른 사랑을 받아 정년 때까지 무해 무탈했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한방에서 동고동락했던 지용우 이광훈 박노경 이강걸 최낙동 장명석 최용길 이춘송 문영웅 구건서 조규진 이용승 이정세 이상호 허경구위원 모두 뭐가 그리 급한지 일찍이 세상을 하직 했으니 오호!통재라 세상이 이렇게 무심하고 매정할 수 가 없다. 회사선 그렇다 치고 제천고 동기동창 대학 동기들 또한 타계한 분이 부지기수다.유난히 다정했던 강신용 송동일 이명섭 한상우 김진억 이재선 김봉규 윤성한 엄인호 이원현 정운영 정운주 장남희 이진호 허영청 김성규 오상락 모두 들 이 세상에 없다.제주도로 이사가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깨가 쏟아 질 듯 여생을 행복하게 지내던 이재선 동문은 치매에 걸려5년 전 갑자기 집을 나간 뒤로 종무 소식이다.사람이 살다 이런 날벼락이 왠 말인가.이들보다 몇 해를 더 살았으니 나로선 큰 행복이지만 저승에 가서나 만날는지 하나같이 보고 싶은 얼굴 들이다. 대한언론인회에서도 정만 잔뜩 주고 떠난 분들이 한둘이 아니다.한창 의기투합해 대한언론인회의 기반을 정착시킨 김광섭 이혜복 선생님을 비롯 매우 역동적으로 일했던 제재형 홍원기 김은구 한기호 회장을 비롯,함께 동고 동락 했던 문명호 송두빈 김준하 김건이 오건환 김의수 이종기 송효빈 선생과도 각별했으나 저승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오라 손짓하는 것만 같다. 유명을 달리한 많은 신아일보 동료들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했다. 100수를 넘기신 윤임술 선생(작고)앞에서 서둘러 저승길을 택한 임승준 김경섭 정도현 이왈수 박환수 유승택 임덕규 호영진 장기효 김길홍 윤종보 김왕석 천상기 조규석 이영희 김인수 전규삼 권동섭 장상섭 김익진 박용정 이방원 배한용(촘배) 주길치 모두들 기라성 같은 신아의 동량들이었다.장기봉 사장도 좀 더 사실 나이에 유명을 달리 하셨다.신아 조사부에서 밤늦도록 스크랩북과 씨름했던 김형심씨는 경향으로 옮긴지 한 달도 안 돼 말없이 가버렸다.부부동반 모임도 가졌는데 소문 없이 가고 나니 이 또한 회자정리라 좀 일찍 헤어졌을 뿐이다. 대학 동기들도 거의 가고 없다.1957년 성대법정대 법률학과엔120여명이 입학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지금은 한10여명 생존했으니 인생무상 이보다 더할 수가 없다.최 고령자 유철상동문은 지하철 계단에서 쓰러져 일찍이 세상을 떳고 김홍범 홍순진 박치형 김병현 서영언 이형국 김행원 권병완 성유경 이진홍 조창래 지병억 모두들 다정다감했는데 하늘나라로 훌쩍 가버렸다.남달리 자존심이 강했던 장흥순동문도 간경화로 고생하다 미국서 부음을 전해 왔다.이형국동문은 신동욱 학장 밑에서 함께 형법을 전공 했는데 졸업후 하이델 베르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해 경희대 연세대에서 석학으로 지명도가 높았다.말년엔 학술원 회원까지 노후가 찬연했다고 믿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알츠하이머로 길을 걷다 버스에 부딛혀 와병중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대학 동기중 몇 명은 살아 있어도 요양원 신세를 지는지 전화도 불통이고 종무소식 윤영석 김종만은 근래까지 소식을 교환했는데 최근엔 연락 두절이다. 같은 동기는 아니지만 재학중 줄곧 근로학생 장학회에서 동고 동락 했던 김유성동문은 내 호까지 직접 지어 주었는데 장학회 회장으로 남의 등록금을 대신 내주느라 같은 해 졸업도 못하고 끝내 경희 한의대로 가서 한의사가 되어 대구대학에서 강의 중 쓸어져 쓸쓸이 생을 마감했다.돌이켜 보니 친형제 이상으로 가까이 지내며 자주 만나 술잔도 기울이며 포효하던 세월이 엊그제 같다.워낙 성실해 당시 김제원 신진자동차 사장과 가까이 지내며 보좌관 노릇을 톡톡히 했었다.코로나 자동차가 처음 나왔을 때 나에게 사설까지 부탁해 내딴엔 성심껏 집필했던 기억이 새롭고 김제원 사장이 경향신문을 맡아 경영 했을 때도 비교적 자주만나 술잔을 기울였고 한번은 신아논설실 전원이 경인고속도로 개통기념으로 인천행.밤새도록 놀다 통행금지에 걸려 인천서 일박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그런 그가 세상을 떴을 때 경기도 포천 장지에서 만난 애숭이 어린 상주가 눈에 아른 거린다. 지금쯤 장성해 어디서 큰 재목으로 일하고 있겠지만 한번도 보살펴 주지 못한 것이 후회 막급이다. 이원석 교수 밑에서 상법을 전공했던 엄영진 선배는 일찍이 전주대학교 총장 까지 올랐는데 갑자기 세상을 떴고 정봉휘교수도 한창 살 나이에 이승을 하직했다. 그러고 보니 사는동안 주례도 많이 서봤고 조사도 자천 타천 여러번 쓰고 읽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 중고 시절 별명은 금성촌놈 누가 붙였는지 나의 몰골에 딱들어 맞는 닠네임이 아닌가 백번 들어도 싫지가 않다. 잦은 문병에 뜻밖의 희소식도 병원에 입원하고 보니 가족들은 물론이고 소식을 들은 친인척 친지들의 병문안이 잦았다.실인심은 안 한 모양인지 적지잖게 위로금도 답지했다. 제일 먼저 제천 아우 남매 부부가 달려왔고 증평서는 둘째 수씨와 조카들 남매가 먼 길을 마다 않고 상경했다. 서울 와 한솥에 밥을 먹던 신아일보에서는 김용발 사우회 회장과 장항만 사장이 입원소식을 듣자마자 거금을 들고 와 나를 감격 시키니 몇 십년 전 신아에서 고생한 보람인지 만감이 교차했다.한주에 두 세번 만나 식사를 같이했던 편우회 최귀조 안종우 친구도 물어 물어 병원을 찾아 식사를 함께하니 이 또한 살아있는 보람이 아닐 수 없다. 유난히 정이 많은 김성묘 경향궁산책 회장을 비롯 경향텃밭을 함께 일궜던 유병희 회장과 오래동안 출판관계로 자주만났던 태봉출판사 조성한 사장과 박서연 전산실장도 먼길을 마다않고 병원을 찾아와 쾌유를 빌었다.황우연경향신문 사우회 회장 , 안순영 성법57동기회 회장과 최돈문 장섭운 동문, 정성근 양수회(고 신동욱 선생님을 추모하는 모임) 회장, 4.6회 장석주 회장, 정이훈 총무, 큰딸 친구 송윤지 공인중계사 하나같이 눈물겹도록 고맙다. 90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찾아오신 한국유림총연합 안명호 총재님과 박규을 상임고문께도 머리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한유총과 나는 30년가까이 의기투합, 정도병례 도덕재무장 유림총화를 위해 3군자공보를 발행하며 동고 동락했으니 더욱 각별한 관계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내가 갑자기 이모양 이꼴이 됐으니 이또한 인연을 다한 탓인가 허전하기 이를데 없다. 제천서도 종친회 임원이 왔고 서울 종친회 임원들과 월림친목회 회원들도 먼 길을 찾았다. 모두들 빈손으로 오지 않고 금일봉에 음료수 복숭아 사과상자까지 들고 왔으니 나로선 정말 과분한 대접을 받은 셈이라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한가지 감격적인 소식은 봉화 와선정에 내가 쓴 시‘와선정 음’(臥仙亭吟)편액을 걸 수 있게 한다는 것,이 시는 몇 년전 봉화 태백오현 학술회의를 다녀와서 쓴 시인데 주로 태백오현의 우국충정 굳은 절개와 빼어난 와선정 풍광을 읊은 것으로 내 딴엔 심혈을 기울여 쓴시다.와선정에 내시가 걸린다면 제천 종친회는 물론이고 가문의 영광으로 자손 대대로 빛날 경사가 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하늘이 도우셨는지 내가 심혈을 기우려 집필한 ,우리는 이렇게 나라를 지켰다,가 국방부 진중문고로 선정됐다소식을 듣고 나는 꿈인가 생시인가 귀를 의심했다. 어려운 관문을 뚫고 선정된 이 문고가 전국 방방곡곡 국군장병들에게 선보일수 있게된것은 말그대로 진인사대천명,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말로 그 기쁨을 대신하고 싶다. 외손녀 김현진 양은 생각지도 않은 삼성노트북까지 선물해 나를 감동시켰다. 병원에서 소일거리론 안성맞춤이라 손녀딸 성의를 봐서도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에 용기가 절로 솟는 기분이다. 병원을 찾은 친지들을 대하니 죽기 전에 얼굴이라도 한번 볼 수 있어 기뻤고 살아서 한 번 더 정을 나누었으니 죽고 난 다음 부고를 보내봐야 얼굴 한번 대할 수 없을 테니 하늘은 나에게 큰 시혜를 베풀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 동창 이준원 군은 그 나이에 손수 차를 몰고 인천에서 달려왔다.빈손도 아니고 그 비싼 흑염소 다린 한약 한 상자를 들고 왔다.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1970년대 신아일보 논설위원 때 톡톡히 신세 진 일이 있어 늘 미안했다며 이실직고.내가 도움 준 일이라곤 기사 몇 줄 부탁해 억울한 일을 대변해 주었던 모양인데 두고 두고 고마워 하다 큰 마음 먹고 문병을 결심하게 됐다니 이 또한 나로선 뜻 밖이다.물건도 과분하지만60여년 전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니 살맛 나는 세상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긴1970년대 그 가난했던 시절 모두들 보리 고개를 면치 못하고 있을 때 서울 학교에 시험을 보려면 서울 친척 집을 찾는 것이 거의 관행처럼 생각되던 때 한3일 묵었다고 그것이 고마워서 금일봉을 전달한 제택 종친도 있었으니 그 끈끈한 우정은 필설로 다 표현키 어렵다.종친 간이나 같은 할아버지 자손 당연히 할 노릇을 했는데 그것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진정한 의미의 숭조돈목이란 이를 두고 일컫는가 싶다.영일정씨 문중요람을 내게 된 동기가 여기서부터 싹튼 것임도 책 속에 밝힌 바 있다. 한가지 아쉬운것은 약학사인 손녀딸 이 의사가 되는것을 못볼같아 그게 큰 슬픔이다. 몇년 더살 면 하는 욕심메 밤자믈 설친다 장례식장을 여러 번 다녀 보았지만 고인의 영정을 뚫어지게 바라본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살아서 한 번이라도 얼굴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르겠다. 남는 건 결국 가벼운 재 한줌 입원 중 특기할 사항은 신아 동료 차순길 회우가 한번 읽어보라고 권한 책‘허송세월’(김훈 작가 에세이집),밤새워 독파하면서 마치 나에게 한 말 같아 여기 한 토막 소개한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벗들한테서 소식이 오는데,죽었다는 소식이다.살아 있다는 소식은 오지 않으니까,소식이 없으면 살아 있는 것이다.지난달에도 형뻘 되는 벗이 죽어서 장사를 치르느라고 화장장에 갔었다. 화장장 정문에서부터 영구차와 버스들이 밀려 있었다. 관이 전기 화로 속으로 내려가면 고인의 이름 밑에'소각 중'이라는 문자등이 켜지고, 40분쯤 지나니까'소각 완료',또10분쯤 지나니까'냉각 중'이라는 글자에 불이 켜졌다. 10년쯤 전에는 소각에서 냉각까지100분 정도 걸렸는데,이제는50분으로 줄었다고 화장장 홍보 전단에 적혀 있었다.기술이 크게 진보했고,죽음을 관리하는 의전 절차도 세련되어졌다. '냉각 완료되면 흰 뼛가루가 줄줄이 컨베이어벨트에 실려서 나오는데,성인 한 사람분이 한 되 반 정도였다.직원이 뼛가루를 봉투에 담아서 유족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유족들은 미리 준비한 항아리에 뼛가루를 담아서 목에 걸고 돌아갔다.원통하게 비명횡사한 경우가 아니면 요즘에는 유족들도 별로 울지 않는다.부모를 따라서 화장장에 온 청소년들은 대기실에 모여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제 입으로“우리는 호상입니다"라며 문상 객을 맞는 상주도 있었다.그날 세 살 난 아이가 소각되었다.종이로 만든 작은 관이 내려갈 때,젊은 엄마는 돌아서서 울었다.아기의 뼛가루는 서너 홉 되었을 터이다. 뼛가루는 흰 분말에 흐린 기운이 스며서 안개 색깔이었다.입자가 고와서 먼지처럼 보였다.아무런 질량감도 느껴지지 않았다.두개골과 정강이뼈에는 타다 만 형태가 남아 있었다.물체의 먼 흔적이나 그림자였다.뼛가루의 침묵은 완강했고,범접할 수 없는 적막속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있었다.금방 있던 사람이 금방 없어졌는데,뼛가루는 남은 사람들의 슬픔이나 애도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었고,이 언어도단은 인간 생명의 종말로서 합당하고 편안해 보였다. 죽으면 말길이 끊어져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의 내용을 전할 수 없고,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인간은 그저 죽을 뿐,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화장장에 다녀온 날 이후로 저녁마다 삶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을 생각했다.죽음이 저토록 가벼우므로 나는 이 가벼움으로 남은 삶의 하중을 버티어 낼 수 있다.뼛가루 한 되 반은 인간 육체의 마지막 잔해로서 많지도 적지도 않고,적당해 보였다.죽음은 날이 저물고,비가 오고,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으로 애도할 만한 사태가 아니었다. 뼛가루를 들여다보니까,일상생활 하듯이,세수하고 면도하듯이,그렇게 가볍게 죽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 들이지 말고 죽자,건강보험 재정 축내지 말고 죽자,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말고 가자,질척거리지 말고 가자,지저분한 것들을 남기지 말고 가자,빌려 온 것 있으면 다 갚고 가자,남은 것 있으면 다 주고 가자,입던 옷 깨끗이 빨아 입고 가자,관과 수의는 중저가가 좋겠지,가면서 사람 불러 모으지 말자,빈소에서는 고스톱을 금한다고 미리 말해 두자... 가볍게 죽기 위해서는 미리 정리해 놓을 일이 있다.내 작업실의 서랍과 수납장,책장을 들여다보았더니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의 거의 전부(!)가 쓰레기였다.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한 생애가 지나갔다.똥을 백자 항아리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 둔 꼴이었다. 나는 매일 조금씩,표가 안 나게 이 쓰레기들을 내다 버린다.드나들 때마다 조금씩 쇼핑백에 넣어서 끌어낸다. 나는 이제 높은 산에 오르지 못한다.등산 장비 중에서 쓸만한 것들은 모두 젊은이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나머지는 버렸다.책을 버리기는 쉬운데 헌 신발이나 낡은 등산화를 버리기는 슬프다.뒤축이 닳고 쭉으러진 신발은 내 몸뚱이를 싣고 이 세상의 거리를 쏘다닌 나의 분신이며 동반자이다.헌 신발은 연민할 수밖에 없는 표정을 지니고 있다.헌 신발은 불상하다.그래도 나는 내다 버렸다.뼛가루에 무슨 연민이 있겠는가. 유언을 하기는 쑥스럽지만 꼭 해야 한다면 아주 쉽고 일상적인 걸로 하고 싶다. "딸아,잘 생긴 건달 놈들을 조심해라", "아들아,혀를 너무 빨리 놀리지 마라"정도면 어떨까 싶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는 스스로를'광야를 달리는 말로 자칭했다.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돌면서 평생을 사셨는데,돌아가실 때 유언으로“미안허다”를 남겼다.한 생애가 네 음절로 선명히 요약되었다.더 이상 짧을 수는 없었다.후회와 반성의 진정성이 느껴지기는 하지만,이것은 좋은 유언이 아니다.평생을 밖으로 나돌다가 임종할 때"미안하다"라니 어쩌라는 것인가.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었고,대책 없이 슬프고 허허로워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퇴계 선생님은 죽음이 임박하자 이런 시문을 남겼다. 조화를 따라서 사라짐이여 다시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임종의 자리에서는“매화 화분에 물 줘라"하고 말씀하셨다고 제자들이 기록했다.아름답고 격조 높은 유언이지만 생활의 구체성이 모자란다. '매화에 물 줘라'라는 유언은 일상의 소중함과 사소한 일의 엄중함을 명심하라는 뜻으로 들린다.유언이라는 형식이 말씀의 뜻을 더욱 무겁게 한다. '매화'가 생활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과도하게 탐미적이어서 나 같은 속인이 듣기에는 리얼리티가 모자란다. 내 친구 김용택 시인의 아버지는 섬진강 상류의 산골 마을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김용택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김용택을 불러놓고 유언을 하셨는데, “네 어머니가 방마다 아궁이에 불 때느라고 고생 많이 했다.부디 연탄보일러를 놓아 드려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이야기를 김용택의 어머니 박덕성 여사님한테서 직접 들었다.몇 년 후에 김용택의 시골집에 가 봤더니 그때까지도 연탄보일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퇴계 선생님,김용택의 아버지,이 세 분의 유언 중에서 나는 김용택 아버지의 유언이 최고라고 생각한다.이 유언은 건실하고 씩씩하고 속이 꽉 차 있다.김용택 아버지는 참으로 죽음을 별것 아닌 것으로,아침마다 소를 몰고 밭으로 나가듯이 가볍게 받아들이셨다.그리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인생의 당면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이 정도 유언이 나오려면 깊은 내공과 오래고 성실한 노동의 세월이 필요하다.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 죽음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의술의 목표라면 의술은 백전백패한다.의술의 목표는 생명이고,죽음이 아니다.이국종 국군대전병원장처럼,깨어진 육체를 맞추고 꿰매서 살려내는 의사가 있어야 하지만,충분히 다 살고 죽으려는 사람들의 마지막 길을 품위 있게 인도해 주는 의사도 있어야 한다.죽음은 쓰다듬어서 맞아들여야지,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다 살았으므로 가야하는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고무호스를 꽂아서 붙잡아 놓고서 못 가게 하는 의술은 무의미하다. 가볍게 죽고,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단순한 장례 절차에서도 정중한 애도를 실현할 수 있다.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의술도 모두 가벼움으로 돌아가자.뼛가루를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다.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 낼 수 있다.결국 한 줌 재는 가볍다. (2024 8.4) 끝으로 병원에 있는동안 아들딸 4남매의 지성어린 간호에 감격하며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이글을 마친다. 한강요양병원 608호 병실에서 지난 날을 회고하며) * 과분한 주기도 문 나의 입원을 계기로 큰딸을 비롯 독실한 크리스찬 친구들이 다투어 주기도문을 보내왔다. 나는 전통적인 유교집안에서 자란관계로 기도문 같은 과분한 설교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1년 아홉번 제사에다 부모님 상을 당해서도 굴건제복에다 1년 탈상 조석으로 상식을 올렸으니 유교 집안의 전통을 마지막으로 고수했다는 자부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야 천당간다고 시도 때도 없이 기도문을 보내주니 그 성의를 봐서도 열심히 아멘으로 화답하고 있다. 평생을 건성으로 듣다가 말년에 천당가기위해 예수를 믿으라니 내가 예수님이라면 괘심죄로 다스릴 법한 일이 아닌가. 아뫃든 딸의 성의를 봐서도 아멘 만은 잊지 않고 복창하고 있다. *사랑하는 아빠 정운종 님께 천국나라의 티 켓을 드립니다 영접 기도문 저는 예수님을 제 마음의 주인으로 모십니다. 예수님께서 저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 지었던 모든 죄를 회개합니다.용서하여 주세요. 예수님 이제부터 저와 영원히 함께 해 주시고 저를 축복하여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又松의 글을 읽고. 통덕랑공 종친회 정규원 상임고문 又松과 나는四從叔姪間이란 관계를 떠나서16년간同門修學하고 지금까지同居同樂한 친구로써 몇자 적겠네.천하의성인 공자도生卽蒼蒼.死卽畏畏.살아 있을때는 창창한앞일을 생각 하지만,죽음에 임할때는 두렵고 두렵도다 했거늘 어찌 죽음을 그리 담담하게 표현할수 있단 말인가?이는聖人의 경지를 떠나天道理程에通達한仙人에 이른것이 아니겠소. 人命은在天이라 했어도盡人事待天命이라 했으니 요즘 좋은醫術을 믿고 치료에 전념하길 바라오又松의 빠른快愈를기원하겠소 *이종락 동문이 이 글을 읽고 우송! "간암 3기 판정을 받고" 잘 읽었네. 인생을 달관한 노신사의 청산 속 계곡물이 어쩌면 그리 독자의 심금을 씻어 주는가. 읽으면서 너무 많은 감명을 받아 청산 속을 헤매였네. 월악산 비로봉에서 용암과 우송과 같이 사진찍던 생각을 하면서 추억 속에서 잠시 헤매이기도했네 우송의 달관된 인생론을 곱씹으며 아직은 회자정리를 말할 때가 아니란 것을 말하고 싶네. 요즘같은 더위 속에서는 모든 것이 정지된게 요즘의 내 생활이네. 날씨가 가라앉고 서늘한 바람이 찾아오면 만나세. 우송의 건안을 기도하면서 ... *최귀조 편우회 회장도 다음과 같은 소감을 보내왔다. 정선배님! 잘 읽었습니다 읽다 눈물이 나 쉬다 또 읽었습니다 그래도 용기내서 잘드시고 힘내세요 자꾸만 슬퍼만 가는 인생 정선배 와 함께 있으며 많은것 을 배웠어요 평생을 잊지못할 선배입니다 조금만 더 용기내서 싸워봅시다 좋은 날이 올겁니다 간절히 빕니다 사랑하는 정선배 ~? * 남경진동문이 호주에서 다 읽고나니 먹먹한가슴 가눌길이 없구나 지난해 10월 29일 서울호텔에서 만나 사진찍고 얘기나누고 했는데 그때는 건강해보였는데.. 이무슨 날벼락같은 소식인가 자연의 섭리를 누가 거스릴수 있을까만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가슴아픈 소식이라 나의 무딘 글로는 도저히 이심정을 표현할 길이없구나. 그래도 포기하지말고 섭생잘해서 기운차리도록 해라,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의료선진국 이므로 반드시 좋은결과가 있을거라고 믿는다 정운종 자네는 강한 사람이니까 끝까지 포기하지 말게 싸우고 또 싸워서 이겨내리라 믿네 "우리는 이렇게 나라를 지켰다"가 우리군장병 모두에게 읽히는책이 되었다니 정말 자랑스럽고 존경스럽다 나에게 너같은 친구가 있다는것이 정말 자랑스럽다. 시드니에서 남경진 잘잤냐 암세포가 젤 싫어하고 무서워하느것이 엔돌핀 이란다. 그리고 엔돌핀에게 얻어터진 암세포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단다. 몇년전에 읽은 어느 의학논문기사 얘기다 나의 솜씨없는 글몇줄에 엔돌핀이 절로 솓은것 같았다니(good response)자넨 아직 먼길떠날 준비가 전혀 않된 사람이다. 아직 멀었어. 그렇게 준비가 엉성해가지고 어떻게 그 먼길을 가려고하나. 꿈도 야무지다. 평소의 정운종 답지않다. 부르면 가겠다느니 버텨"볼께"따위의 약한소리 집어치우고 전복 연어같은 고단백식품 뭐든지 잘먹고 체력보강해라. 전복살 돈없냐 없으면 말해 내가 보내줄께. 내가 그거 못하겟냐. 내년에 서울갈 예정이다. 괜히 딴소리 하지마라 글솜씨 더럽게 없다고 흉보지마라. 자네한테 비교하면 족탈불급 일테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청춘이란다. 너의그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듣고싶고나 시드니 에서 남경진 깊은 철학과 투철한 국가관을 갖고 이만큼 사회발전에 기여한 사람이 제천에서는 정운종 너만한 이가 없는것 같다. 아직도 너에게는 할일이 많이 남아있어. 그렇지 않으면 그건 직무유기가 될꺼다.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시드니에서 남경진 *제천고 동문 이철재 목사의 기도문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장 10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