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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2. 백제(百濟)[註001]
1)
○백제국(百濟國)도 본래는 부여(扶餘)의 별종(別種)이다.[註002] 일찍이 마한(馬韓)의 옛 땅[註003]으로서 경사(京師)[註004]에서 동으로 6,200리 밖에 있으며, 대해(大海)의 북쪽, 소해(小海)의 남쪽에 위치한다.[註005] 동북으로는 신라(新羅)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註006]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倭國)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려(高[구,句]麗)에 이른다. 또 왕(王)이 사는 곳에는 동· 서로 두 성(城)이 있다.[註007]
2)
○ [그 나라에] 설치된 내관(內官)[註008]으로 내관좌평(內臣佐平)은 왕명출납(王命出納)에 관한 일을 맡아 보고,[註009] 내두좌평(內頭佐平)은 고장(庫藏)에 관한 일을 맡아 보고, 내법좌평(內法佐平)은 예의(禮儀)에 관한 일을 맡아 보고, 위사좌평(衛士佐平)은 숙위군(宿衛軍)의 일을 맡아 보고, 조정좌평(朝廷佐平)은 형옥(刑獄)에 관한 일을 맡아 보고, 병관좌평(兵官佐平)은 재외(在外)의 병마(兵馬)에 관한 일을 맡아 본다. 또 외관(外官)으로는 6대방(帶方)을 두어 10군(郡)을 총관(總管)케 하였다.[註010] 그 형법(刑法)을 적용함에 반역(叛逆)한 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적몰(籍沒)한다. 살인한 자는 노비(奴婢) 세명으로써 속죄(贖罪)케 한다. 관인(官人)으로서 뇌물을 받거나 도둑질을 한 자는 [그 물건의] 3배를 추징하고, 이어서 종신(終身)토록 금고(禁錮)에 처한다.[註011] 모든 부세(賦稅) 및 풍토(風土)의 물산(物産)은 대개 고려(高[구,句]麗)와 같다. 그 나라의 왕(王)은 소매가 큰 자주색 도포에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오라관(烏羅冠)에 금화(金花)로 장식하며, 흰 가죽띠에 까만 가죽신을 신는다. 관인(官人)들은 다 비색(緋色) 옷을 입고 은화(銀花)로 관(冠)을 장식한다. 서인(庶人)들은 비색(緋色)이나 자주색 계통의 옷을 입을 수 없다.[註012] 세시(歲時)와 절기(節氣)는 중국(中國)과 같다. 서적(書籍)으로는 5경(經)과 제자서(諸子書) 및 사서(史書)가 있으며, 또 표(表)· 소(疏)의 글도 중화(中華)의 법(法)에 의거한다.[註013]
3)
○ 무덕(武德) 4년(A.D.621; 百濟 武王 22)에 그 나라의 왕(王) 부여장(扶餘璋)이 사신(使臣)을 보내와 과하마(果下馬)를 바쳤다.[註014] [무덕(武德)] 7년(A.D.624; 百濟 武王 25) [註015]에 또 대신(大臣)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리고 조공(朝貢)을 바쳤다. 고조(高祖)는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사신(使臣)을 보내어 대방군왕(帶方郡王)[註016] 백제왕(百濟王)으로 책봉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朝貢)을 바치니,[註017] 고조(高祖)는 수고로움을 위무하고 매우 후대(厚待)하였다. 이어서 고려(高[구,句]麗)가 길을 막고 중국(中國)과의 내왕(來往)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호소하므로,[註018] 조서(詔書)를 내려 주자사(朱子奢)[註019]를 보내어 화해시켰다. 또 신라(新羅)와는 대대로 서로 원수가 되어 자주 서로 침공하였다.[註020]
4)
○ 정관(貞觀) 원년(A.D. 627; 百濟 武王 28)에 태종(太宗)이 그 나라 왕(王)에게, “왕(王)은 대를 이은 군장(君長)으로서 동번(東蕃)을 무유(撫有)하였소, 바다 한모퉁이 머나먼 곳에서 풍랑(風浪)이 험난하게 가로 막는 데도 정성이 지극하여 직공(職貢)을 빼놓지 않으니, 그 아름다운 뜻은 생각할수록 가상하오. 짐(朕)이 삼가 총명(寵命)을 받들어 천하(天下)에 군림하고부터 생각하는 것은 왕도(王道)를 넓히고 여원(黎元)[註021]을 사랑하여 기르는 일이오. 주거(舟車)가 통하는 곳과 풍우(風雨)가 미치는 곳이라면 나의 본 뜻을 이루어 다같이 안녕을 누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오. 신라왕(新羅王) 김진평(金眞平)은 짐(朕)의 번신(藩臣)이며, 왕(王)의 인국(鄰國)이오. 매번 듣건대 군사를 보내어 쉬지 않고 정토(征討)하며, 무력만 믿어 잔인한 행위를 예사로 한다 하니 너무나도 기대에 어긋나오. 짐(朕)은 이미 왕(王)의 조카 신복(信福)[註022] 및 고려(高[구,句]麗)·신라(新羅)의 사인(使人)을 대하여 함께 통화(通和)할 것을 명(命)하고, 함께 화목할 것을 허락하였오. 왕(王)은 아무쪼록 그들과의 지난날의 원한을 잊고, 짐(朕)의 본뜻을 알아서 함께 인정(鄰情)을 돈독히 하고 즉시 싸움을 멈추기 바라오.”라는 새서(璽書)를 내렸다. 이에 장(璋)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려 사죄하였다. 비록 표면상으로는 명(命)을 따른다고 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예나 마찬가지로 원수 사이였다.
5)
○ [정관(貞觀)] 11년(A.D.637; 百濟 武王 38)에 사신(使臣)을 보내와 조회(朝會)하고 철갑(鐵甲)과 조부(雕斧) 를 바치니,[註023] 태종(太宗)은 융숭하게 대접하고, 명주 3천단(段)과 금포(錦袍) 등을 내렸다. [정관(貞觀)] 15년(A.D.641; 百濟 義慈王 1)에 장(璋)이 졸(卒)하니,[註024] 그의 아들 의자(義慈)가 사신(使臣)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려 슬픔을 알렸다. 태종(太宗)은 소복(素服) 차림으로 곡(哭)을 하고,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였으며, 부물(賻物) 2백단(段)을 내렸다. 사신(使臣)을 보내어 의자(義慈)를 주국(柱國)[註025]으로 책명(冊命)하고,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百濟王)에 봉하였다.[註026]
6)
○ [정관(貞觀)] 16년(A.D.642; 百濟 義慈王 2)에 의자(義慈)가 군사를 일으켜 신라(新羅)의 40여성(城)을 빼앗고[註027] 군대를 보내어 지키는 한편, 고려(高[구,句]麗)와 화친(和親)을 맺어 통호(通好)하고, 당항성(黨項城)[註028]을 탈취하여 신라(新羅)의 입조(入朝)길을 끊고자 하였다. 이에 신라(新羅)가 사신(使臣)을 보내어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청하니, 태종(太宗)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獎)[註029]에게 조서(詔書)를 보내어 화복(禍福)으로 양번(兩蕃)을 설득하였다.[註030] 태종(太宗)이 친히 고려(高[구,句]麗)를 정벌하자,[註031] 백제(百濟)는 두마음을 품고, 그 기회를 틈타 신라(新羅)의 10성(城)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정관(貞觀)] 22년(A.D.648; 百濟 義慈王 8)에 또 십여성(城)을 빼앗고,[註032] 수년 동안 마침내 조공(朝貢)이 끊어지고 말았다.[註033]
7)
○ 고종(高宗)이 제위(帝位)를 이어 받자, 영휘(永徽) 2년(A.D.651; 百濟 義慈王 11)에 비로소 또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朝貢)을 바쳤다. 사신(使臣)이 돌아갈 적에 의자(義慈)에게 새서(璽書)를 내려 이르기를,[註034]“해동(海東)의 세나라는 개국한지 오래이며, 강계(疆界)가 나란히 있어 실로 견아(犬牙)의 형세처럼 국경이 서로 들쭉날쭉 서로 닿아 있오.
근래에 와서 드디어 국경을 다투고 침공을 하여 조금도 편안할 해가 없었오.
마침내 삼한(三韓)의 백성으로 하여금 목숨이 도마 위에 놓이게 하고, 창을 찾아 분풀이를 하는 것이 아침 저녁으로 거듭되니, 짐(朕)이 하늘을 대신하여 민물(萬物)을 다스림에 있어 깊이 안타까와하는 바이오. 지난 해 왕(王)이 사신과 고려(高[구,句]麗)· 신라(新羅) 등의 사신(使臣)이 함께 입조(入朝)하였을 적에 짐(朕)은 서로의 수원(讎怨)을 풀고 다시 우호를 돈독히 하도록 명하였오. 신라(新羅)의 사신(使臣) 김법민(金法敏)은 주서(奏書)하여 ‘고려(高[구,句]麗)와 백제(百濟)가 순치(脣齒)의 관계로 서로 의지하고 있으면서 앞을 다투어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침략하므로, 큰 성(城)과 요해처(要害處)의 진(鎭)들이 모두 백제에 병합되니, 강토(疆土)는 날로 줄어 들고 위력 또한 잃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백제(百濟)에게 조칙(詔勅)을 내려 침략한 성(城)을 돌려 주게 하옵소서. 만약 조명(詔命)을 받들지 않는다면 즉시 군사를 일으켜 싸움으로 되찾겠습니다. 다만 옛 땅만 찾으면 바로 교화(交和)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소.
짐(朕)은 그 말이 조리에 맞으므로 불가불 윤허하였소. 옛날 제환공(齊桓公)은 제후(諸侯)의 자리에 있었으나 오히려 망하는 나라를 보존시켰소.[註035] 하물며 짐(朕)은 만국(萬國)의 군주(君主)인데 어찌 위태로운 번국(藩國)을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王)은 빼앗은 신라(新羅)의 성(城)을 모두 본국에 돌려주시오. 신라(新羅)도 사로 잡아간 백제(百濟)의 포로를 모두 王에게 돌려 보내야 할 것이오. 그런 뒤에야 서로의 사이에 불화가 풀리고 전쟁이 멎으니, 백성들은 쉬고 싶은 소원을 이루고 삼번(三蕃)에는 전쟁의 수고로움이 없게 될 것이오. 이 어찌 변정(邊亭)에서 피를 흘리며 싸워 강토(疆土)에 주검이 쌓이고, 농사와 길쌈이 모두 폐지되어 사녀(士女)가 살 길이 없게 되는 것과 비교가 되겠는가? 왕(王)이 만약 나의 처분에 따르지 않는다면 짐(朕)은 이미 법민(法敏)이 청하는대로 왕(王)과 싸우게 놓아 둘 것이오. 또한 고려(高[구,句]麗)와 약속하여 멀리서 서로 돕지 못하게 할 것이오. 고려(高[구,句]麗)가 만약 이 명(命)을 받들지 않는다면 즉시 거란(契丹)의 제번(諸蕃)을 시켜 요택(遼澤)을 건너 쳐들어가게 할 것이오. 왕(王)은 짐(朕)의 말을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고, 주도면밀하게 좋은 계획을 세워 후회를 남김이 없게 하오.”라고 하였다.
8)
○ [영휘(永徽)] 6년(A.D.655; 百濟 義慈王 15)에 신라왕(新羅王) 김춘추(金春秋)가 또 표문(表文)을 올려, 백제(百濟)가 고려(高[구,句]麗) 및 말갈(靺鞨)과 함께 북계(北界)를 침공하여 벌써 30여성(城)이 함락되었다고 하였다.[註036] 현경(顯慶) 5년(A.D.660; 百濟 義慈王 20)에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치게 하니, 그 나라를 크게 깨뜨렸다.[註037] 의자(義慈) 및 태자(太子) 융(隆)[註038]· 소왕(小王) 효연(孝演)[註039]과 위장(僞將) 58명 등을 사로잡아 경사(京師)에 보내왔다. 황제는 이들을 꾸짖기만 하고 용서하였다. 그 나라는 본래 5부(部)[註040]로 나뉘어져 모두 37군(郡), 2백성(城)에 호구(戶口)는 76만이었다.[註041] 이때에 와서 그 땅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등 5도독부(都督府)[註042]를 두어 각각 주(州)와 현(縣)을 통괄케 하고, 백제 출신 추거(酋渠)로 도독(都督)· 자사(刺史) 및 현령(縣令)을 삼았다. 우위랑장(右衛郎將)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의자(義慈)는 어버이를 섬김에 효행(孝行)으로서 함이 널리 알려지고, 형제 사이에 우애가 돈독하여, 당시 사람들이 ‘해동(海東)의 증자(曾子)· 민자(閔子)’[註043]라고 불렀다. 경사(京師)에 와서 며칠 만에 죽었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하고, 특별히 구신(舊臣)의 부곡(赴哭)을 허락하였다. 손호(孫皓)· 진숙보(陳叔寶)[註044]의 묘 옆에 장사하고 아울러 비(碑)도 세워 주었다. 문도(文度)가 바다를 건너가서 죽었다.[註045]
9)
○ 백제(百濟)의 승(僧) 도침(道琛)과 구장(舊將) 복신(福信)이 무리를 거느리고 주류성(周留城)[註046]을 거점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왜국(倭國)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고왕자(故王子) 부여풍(扶餘豊)[註047]을 맞아다 왕(王)으로 세웠다. 서부(西部)와 북부(北部)가 모두 성(城)을 뒤집고 여기에 호응하였다. 이때에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註048]은 백제(百濟)의 부성(府城)에 머물러 있었는데, 도침(道琛) 등이 군사를 이끌고 포위하였다.[註049] 대방주자사(帶方州刺史) 유인궤(劉仁軌)[註050]가 문도(文度)를 대신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병(新羅兵)을 출동시켜 합세하여 인원(仁願)을 구원하고 계속하여 싸워 나가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항복하였다. 도침(道琛) 등이 웅진강(熊津江)[註051] 어귀에 두 개의 책(柵)을 세워 관군(官軍)에게 저항하자, 인궤(仁軌)는 신라병(新羅兵)과 함께 사방에서 협공하였다. 적들은 후퇴하여 책(柵) 안으로 달아났지만, 물에 막히고 다리는 좁아 물에 빠지거나 전사(戰死)한 사람이 1만여 명이나 되었다. 도침(道琛) 등은 이에 인원(仁願)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任存城)으로 물러나 보전하였다. 신라병(新羅兵)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때는 용삭(龍朔) 원년(A.D.661; 新羅 文武王 1) 3월이었다.[註052]
10)
○ 이에 도침(道琛)은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 일컫고, 복신(福信)은 스스로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일컬으며, 배반하고 도망간 무리들을 유인하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커졌다. 인궤(仁軌)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대당(大唐)이 신라(新羅)와 서약(誓約)하여 백제(百濟) 사람은 노소(老少)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인 다음에 나라를 신라(新羅)에 넘겨준다고 들었소. 죽음을 당할 바에야 어찌 싸우다 죽으려 하지 않겠소? [이것이] 무리를 모아 스스로 고수(固守)하는 이유이오.” 라고 고(告)했다. 인궤(仁軌)는 편지를 작성하여 화복(禍福)을 상세히 설명하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설득하였다. 그러나 도침(道琛) 등은 무리들이 많은 것만 믿고 교만이 생겨서, 인궤(仁軌)의 사자(使者)를 외관(外館)에 머무르게 하고, 전하는 말로, “사자(使者)는 관직(官職)이 낮다. 나는 곧 일국(一國)의 대장(大將)인데, 스스로 참견함은 합당하지 않다.” 라고 하며, 답장을 써 주지 않고 사인(使人)을 돌려보냈다. 얼마 아니되어 복신(福信)이 도침(道琛)을 죽이고 그의 군사들을 합병하니, 부여풍(扶餘豊)은 다만 제사나 주관할 뿐이었다.[註053]
11)
○ [용삭(龍朔)] 2년(A.D.662; 新羅 文武王 2) 7월에 인원(仁願)· 인궤(仁軌) 등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를 이끌고, 웅진(熊津) 동쪽[註054]에서 복신(福信)의 무리들을 크게 무찔러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註055]· 대산(大山)· 사정(沙井) 등의 책(柵)을 빼앗고, 많은 무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어서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복신(福信) 등은 진현성(眞峴城)[註056]이 강에 바짝 닿아 있는 데다 높고 험하며, 또 요충(要衝)의 위치라 하여 군사를 증원시켜 지켰다. 인궤(仁軌)는 신라(新羅)의 군사를 이끌고 야음(夜陰)을 타 성(城)밑에 바짝 다가가서 사면에서 성첩(城堞)을 더위잡고 기어 올라 갔다. 날이 밝을 무렵 그 성(城)을 점거하여 8백 명의 머리를 베어 마침내 신라(新羅)의 군량운송로를 텄다. 인원(仁願)이 이에 증병(增兵)을 주청(奏請)하니, 조서(詔書)를 내려 치(淄)[주(州)]· 청(靑)[주(州)]· 내(萊)[주(州)]· 해(海)[주(州)][註057]의 군사 7천명을 징발하여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註058]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웅진(熊津)으로 가서 인원(仁願)의 무리를 도와주게 하였다. 이때 복신(福信)은 벌써 병권(兵權)을 모두 장악하여 부여풍(扶餘豊)과 점점 서로 시기하여 사이가 나빠지고 있었다. 복신(福信)은 병을 핑계로 굴방(窟房)에 누워서 부여풍(扶餘豊)이 문병오기를 기다려 덮쳐 죽일 것을 꾀하였다. 부여풍(扶餘豊)은 [그러한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그의 심복들을 거느리고 가서 복신(福信)을 덮쳐 죽이고, 또 고려(高[구,句]麗)와 왜국(倭國)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여 관군(官軍)을 막았다.[註059] 손인사(孫仁師)가 중도(中道)에서 [부여풍(扶餘豊)의 군대를] 맞아 쳐 무너뜨리고 드디어 인원(仁願)의 무리와 합세하니, 병세(兵勢)가 크게 떨쳤다. 이에 인사(仁師)· 인원(仁願) 및 신라왕(新羅王) 김법민(金法敏)은 육군(陸軍)을 이끌고 진군하고, 유인궤(劉仁軌) 및 별수(別帥) 사상(社爽)· 부여융(扶餘隆)은 수군(水軍) 및 군량선(軍糧船)을 이끌고 웅진강(熊津江)에서 백강(白江)으로 가서 육군(陸軍)과 회합하여 함께 주류성(周留城)으로 진군하였다. 인궤(仁軌)가 백강(白江)어귀에서 부여풍(扶餘豊)의 무리를 만나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척을 불사르니, 적들은 크게 붕괴되고, 부여풍(扶餘豊)은 몸만 빠져 달아났다.[註060] 위왕자(僞王子) 부여충승(扶餘忠勝)· 충지(忠志) 등이 사녀(士女) 및 왜(倭)의 무리를 이끌고 함께 항복하니, 백제(百濟)의 모든 성(城)이 다시 귀순하였다.[註061] 손인사(孫仁師)· 유인원(劉仁願) 등이 철군을 하여 돌아왔다. 조서(詔書)를 내려 [유(劉)]인원(仁願) 대신 유인궤(劉仁軌)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이에 부여융(扶餘隆)에게 웅진도독(熊津都督)을 제수(除授)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내어, 신라(新羅)와 화친(和親)을 맺고 남은 무리들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註062]
12)
○ 인덕(麟德) 2년(A.D.665; 新羅 文武王 5) 8월에 [부여(扶餘)]융(隆)이 웅진성(熊津城)에 이르러 신라왕(新羅王) 법민(法敏)과 백마(白馬)를 잡아 놓고 맹약하였다.[註063] 먼저 천신(天神)· 지신(地祇) 및 산천의 신(神)에게 제사를 올리고 나서 피를 마셨다. 그 맹서문(盟誓文)은 이러하다. “지난날에 백제(百濟)의 선왕(先王)이 역리(逆理)와 순리(順理)에 혼미하여, 이웃과 우호가 돈독하지 못했으며, 친척[註064]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였다. 고려(高[구,句]麗)와 결탁하고 왜국(倭國)과 교통하여 그들과 함께 잔폭(殘暴)하였으며, 신라(新羅)에 침략하여 읍(邑)을 깨뜨리고 성(城)을 도륙하니, 잠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천자(天子)께서는 하나의 물건이라도 없어지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백성(百姓)이 무고(無辜)하게 [고통 받는 것을] 가엾게 여기시어, 자주 사신(使臣)을 보내어 우호를 닦으라고 명(命)하였다. 그러나 [지세(地勢)가] 험준하고 [도로가] 먼 것만 믿고 하늘의 도리를 업신여겨 태만히 하였다. 황제(皇帝)께서 이에 분노하시어 [죄인을] 치고 [백성을] 위로하는 일을 삼가 거행하시니, 정기(旌旗)가 나가는 곳에 한 번의 싸움으로 모두가 평정되었다. 진실로 궁궐은 못을 파고 집은 웅덩이를 파서 뒷날의 경계를 삼고, 폐단의 근원을 뿌리째 뽑아 다음 사람에게 훈계를 남겨야 될 일이다. 그러나 약한 자를 감싸 주고 배반하는 자를 토벌하는 것이 전왕(前王)의 아름다운 법도요, 망한 자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나라를 이어주는 것은 옛 철인(哲人)의 통규(通規)이다. 일은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 여러 사책(史冊)에 전하여 오고 있다. 그런 까닭에 전 백제태자(前百濟太子) 사가정경(司稼正卿)[註065] 부여융(扶餘隆)을 세워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서 제사를 받들고 그의 고장을 보존하게 하였다.
신라(新羅)에 의존하여 영원한 동맹국으로서 각자 묵은 감정을 버리고 굳고 화친(和親)하라. 조명(詔命)을 공손히 받들고 영원한 번국(藩國)이 되라. 그리하여 사신(使臣)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노성현공(魯城縣公) 유인원(劉仁願)을 보내어 친림(親臨)하여 타이르고 깨우침과 아울러 짐(朕)의 뜻을 널리 펴게 하노니, 혼인으로 약속하고 맹서로 다짐한다. 희생을 잡아 피를 마시는 것은 우호를 처음부터 끝까지 돈독히 하기 위함이니, 재앙은 나누어 갖고 충난(患難)을 당하여서는 서로 구제하여 은의가 형제와 같이 지내도록 하라. 윤언(綸言)을 공손히 받들어 함부로 저버리지 말며, 맹서를 하고 나서는 다같이 [송백(松柏)처럼] 언제고 변함이 없으라.
만약 [마음이 변하여] 신의를 저버리고 군사를 일으켜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있다면, 신명(神明)께서 이를 보고 온갖 재앙을 내려서 자손이 번창하지 않게 되어 사직(社稷)을 지킬 사람이 없게 될 것이며, 제사는 끊이고 남아나는 유족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금서철계(金書鐵契)[註066]를 만들어 종묘(宗廟)에 간직하는 것이니, 자손만대토록 행하여 범함이 없어야 한다. 신명이 듣고 있으니 이로서 누릴 복이 결정되리라.” [이것은] 유인궤(劉仁軌)의 글이다. 삽혈(歃血)을 마치고 나서 단하(壇下) 깨끗한 곳에 폐백을 묻고, 맹서문은 신라(新羅)의 종묘(宗廟)에 간직하였다. 인원(仁願)· 인궤(仁軌) 등이 돌아오자, 융(隆)은 신라(新羅)를 두려워하여 곧 경사(京師)로 돌아왔다.
[註067]
13)
○ 의봉(儀鳳) 2년(A.D.677; 新羅 文武王 17)에 [융(隆)에게] 광록대부(光祿大夫)[註068] 태상원외경(太常員外卿) 겸웅진도독(兼熊津都督) 대방군왕(帶方郡王)을 제수(除授)하여 본번(本蕃)에 돌아가 남은 무리들을 안집(安集)케 하였다.[註069] 이때 백제(百濟)의 옛 땅이 황폐하여 점점 신라(新羅)의 소유가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융(隆)은 끝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채 죽었다. 그의 손자 경(敬)이 측천(則天)[무후(武后)] 때에 대방군왕(帶方郡王)에 습봉(襲封)되어 위위경(衛尉卿)을 제수(除授)받았다. 이로부터 그 땅은 신라 및 발해말갈(渤海靺鞨)이 나누어 차지하게 되었으며,[註070] 백제의 종족(種族)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3. 신라(新羅)[註001]
1)
○신라국(新羅國)은 본래 변한(弁韓)의 후예이다.[註002] 그 나라는 한대(漢代)의 낙랑(樂浪) 땅에 있으니,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 연하여 있고, 서쪽은 백제(百濟)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고려(高[구,句]麗)와 인접하였다. 동서로 1천리, 남북으로 2천리이다.[註003] 성읍(城邑)과 촌락(村落)이 있다. 왕(王)이 사는 곳은 금성(金城)으로, 둘레가 7·8리이다.[註004] 위병(衛兵)은 3천명으로,[註005] 사자대(獅子隊)[註006]를 설치하였다. 문무관(文武官)은 모두 17등급이 있다. 그 나라의 왕(王) 김진평(金眞平)은 수(隋) 문제(文帝) 때에 상개부
(上開府)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을 제수(除授)받았다.[註007] 무덕(武德) 4년(A.D.621; 新羅 眞平王 43)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朝貢)을 바쳤다. 고조(高祖)는 친히 노고를 치하하고, 통직산기시랑(通直散騎侍郞) 유문소(庾文素)를 사신(使臣)으로 보내어 새서(璽書) 및 그림병풍과 비단 3백단(百段)을 하사하였다.[註008] 이로부터 조공(朝貢)이 끊이지 않았다.[註009]
2)
○ 풍속(風俗)· 형법(刑法)· 의복(衣服)은 고려(高[구,句]麗)· 백제(百濟)와 대략 같으나, 조복(朝服)은 흰색을 숭상한다. 산신(山神)에게 제사하기를 좋아한다. 식기(食器)는 버드나무 그릇을 쓰는데, 구리그릇과 질그릇도 있다. 국인(國人)은 김(金)· 박(朴) 두 성씨가 많으며, 다른 성씨와는 혼인하지 않는다.[註010] 원일(元日)을 중히 여겨서 서로 [이 날을] 축하하고 연회를 베푸는데, 해마다 이 날에는 일월신(日月神)에게 절을 한다. 또 8월 15일을 중히 여겨서 풍악을 울리고 연회를 베풀며, 군신(群臣)을 모아 궁정(宮庭)에서 활쏘기를 한다. 부인들은 머리를 틀어 올려서 비단 및 구슬로 치장하는데, 머리털이 매우 길고 아름답다.
3)
○ 고조(高祖)는 이미 해동(海東)의 세 나라가 오래전부터 원한이 맺혀 서로 번갈아 가며 공격을 한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들은 같은 번국(藩國)으로서 힘쓸 것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라 하여, 이에 그 사신(使臣)에게 원한을 맺게 된 까닭을 물으니, [사신은,] “지난 날 백제(百濟)가 고려(高[구,句]麗)를 치러 갈 적에 신라(新羅)에게 구원을 청하였는데, 신라(新羅)는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국(百濟國)을 쳐부수었습니다.[註011] 이로 인하여 원수가 되어 늘 서로 공벌(攻伐)을 하게 되었으며, 〔그후] 신라(新羅)가 백제(百濟)의 왕(王)을 잡아다 죽였으므로[註012] 원한은 이로 말미암아 비롯되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4)
○ [무덕(武德)] 7년(A.D.624; 新羅 眞平王 46)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김진평(金眞平)에게 주국(柱國)을 제수하고,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新羅王)에 책봉하였다. 정관(貞觀) 5년(A.D.631; 新羅 眞平王 53)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여악공(女樂工) 두사람을 바쳤는데, 모두 머리가 새까만 미인(美人)들이었다. 태종(太宗)이 시신(侍臣)에게, “짐(朕)이 들으니 성색(聲色)을 즐기는 것은 덕(德)을 좋아함만 같지 못하다고 한다. 그리고 산천(山川)으로 가로 막혀 있으니, 고향을 그리워 할 것도 알 수 있다. 얼마 전에 임읍(林邑)에서 바친 흰 앵무새도 오히려 고향을 그리워할 줄 알아 제 나라로 보내 줄 것을 하소연하였다. 새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인정(人情)에 있어서랴! 짐(朕)은 그들이 멀리 떠나 와서 반드시 친척을 그리워할 것을 불쌍히 여긴다. 마땅히 사자(使者)의 편에 보내어 제 집으로 돌려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註013] 이 해에 진평(眞平)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그의 딸 선덕(善德)[註014]을 세워 왕(王)으로 삼고,[註015] 종실(宗室)로서 대신(大臣)인 을제(乙祭)가 국정(國政)을 총괄하여 맡아 보았다.[註016] 조서를 내려 진평(眞平)에게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부물(賻物) 2백단(段)을 내려 주었다. [정관(貞觀)] 9년(A.D.635; 新羅 善德女王 4)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절(節)을 가지고 가서 선덕(善德)을 주국(柱國)에 책봉하고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新羅王)에 봉하였다.[註017]
5) [정관(貞觀)] 17년(A.D.643; 新羅 善德女王 12)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고려(高[구,句]麗)와 백제가 여러차례 번갈아 공습을 하여 수십성(城)을 잃었는데, 두 나라 군대가 연합하여 신(臣)의 사직(社稷)을 없애려 합니다. 삼가 배신(陪臣)을 보내어 대국(大國)에 보고를 하오니, 약간의 군사로나마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상언(上言)하였다.[註018] 태종(太宗)은 상리현장(相里玄獎)을 보내어 고려(高[구,句]麗)에, “신라(新羅)는 나의 명령에 따르는 나라로서[註019] 조헌(朝獻)[註020]을 빼놓지 않았소.[註021] 그대 나라와 백제(百濟)는 함께 마땅히 무기를 거두어 들여야 할 것이오. 만약 다시 공격을 한다면 내년에 군사를 내어 그대 나라를 칠 것이오.”라는 새서(璽書)를 내렸다. 태종(太宗)은 친히 고려(高[구,句]麗)를 치려고 신라(新羅)에 조서(詔書)를 내려, 군사와 말을 모집하여 대군(大軍)에 응접(應接)하라고 하였다. 신라(新羅)는 대신(大臣)을 파견하여 군사 5만명을 이끌고 고려(高[구,句]麗)의 남계(南界)로 들어가 수구성(水口城)을 쳐서 항복받았다.[註022]
6)
○ [정관(貞觀)] 21년(A.D.647; 新羅 眞德女王 1)에 선덕(善德)이 졸(卒)하였다.[註023]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나머지의 관작(官爵)은 이전에 봉하여 준대로 하였다. 이어서 그의 여동생 진덕(眞德)을 세워 왕(王)으로 삼고,[註024] 주국(柱國)을 가수(加授)하고 낙랑군왕(樂浪郡王)에 봉하였다.[註025] [정관(貞觀)] 22년(A.D.648; 新羅 眞德女王 2)에 진덕(眞德)이 그의 아우 국상(國相) 이찬간(伊贊干) 김춘추(金春秋)[註026] 및 그의 아들 문왕(文王)[註027]을 보내와 조근(朝覲)하였다. 조서를 내려 춘추(春秋)에게는 특진(特進)[관(官)]을 제수(除授)하고, 문왕(文王)에게는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을 제수(除授)하였다.[註028] 춘추(春秋)가 국학(國學)에 나아가 석전(釋奠) 및 강론(講論)하는 의식을 구경하겠다고 청하므로, 태종(太宗)은 이로 말미암아 친히 지은 『온탕(溫湯)』·『진사비(晋祠碑)』 및 신찬(新撰)한『진서(晋書)』를 내렸다.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3품(品)이상의 관원을 시켜 전별연(餞別宴)을 베풀어 주는 등 예우가 극진하였다.
7)
○ 영휘(永徽) 원년(A.D.650; 新羅 眞德女王 4)에 진덕(眞德)이 백제(百濟)의 무리를 대파(大破)한 뒤[註029] 그의 아우 법민(法敏)을 보내어 보고하였다. 이때 진덕(眞德)이 5언(言)의 태평송(太平頌)을 지어 비단에 짜서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당(大唐)이 큰 왕업(王業)을 연 것은 외외(巍巍)하신 황제(皇帝)의 훌륭한 지모(智謀). 간과(干戈)를 멈추어 세상은 큰 평정을 이루고 문치(文治)를 일으켜 백왕(百王)을 계승하였어라. 천하(天下)를 거느림에는 은혜를 높이 숭상하고 만물(萬物)을 다스림에는 공을 내세우지 않네.
깊은 인덕(仁德)은 일월(日月)과 짝할만 하고 대운(大運)을 타고 일어남은 도당(陶唐)의 세(世)를 초월하였네. 번기(幡旗)가 혁혁(赫赫)하던 그 날 정고(鉦鼓)는 어이 그리 굉굉(鍠鍠)하였던가. 외이(外夷)로 명(命)을 어긴 자는 천앙(天殃)을 입어 복멸(覆滅)하였네. 순박한 풍속이 유명(幽明)에 같이 엉기니 원근(遠近)에서 앞다투어 정상(呈祥)을 하네. 사시(四時)의 절기(節氣)는 옥촉(玉燭)처럼 순조롭고 칠요(七曜)의 빛이 만방(萬方)에 고루 돈다. 오직 제후(諸侯)라야 재보(宰輔)를 천거하고 오직 제후(皇帝)만이 충량(忠良)을 등용하는 법. 오제삼왕(五帝三王)의 덕(德)을 하나로 하여 우리 당(唐)나라 밝게 빛내리.”[註030] 고종(高宗)은 이를 가상히 여겨, 법민(法敏)에게 태부경(太府卿)을 배수(拜授)하였다.[註031]
8)
○ [영휘(永徽)] 3년(A.D.652; 新羅 眞德女王 6) 에 진덕(眞德)이 졸(卒)하자,[註032] [고종(高宗)이] 거애(擧哀)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춘추(春秋)로 뒤를 이어 신라왕(新羅王)을 삼아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하여 제수하고, 낙랑군왕(樂浪郡王)에 봉(封)하였다.[註033] [영휘(永徽)] 6년(A.D.655; 新羅 武烈王 2)에 백제(百濟)가 고려(高[구,句]麗)· 말갈(靺鞨)과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신라(新羅)의 북계(北界)를 침입하여 3십여성(城)을 함락시켰다. 춘추(春秋)가 사신(使臣)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려 구원을 청하였다.[註034]
9)
○ 현경(顯慶) 5년(A.D.660; 新羅 武烈王 7)에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웅진도대총관(熊津道大總管)에 임명하여 수군(水軍)과 육군(陸軍) 10만을 거느려 [출군(出軍)시켰다.] 이어서 [김(金)]춘추(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에 임명하여 정방(定方)과 함께 백제(百濟)를 토평(討平)하게 하니,[註035] 그 나라의 왕(王) 부여의자(扶餘義慈)를 사로 잡아다 궐하(闕下)에 바쳤다. 이로부터 신라(新羅)가 점차로 고려(高[구,句]麗)· 백제(百濟)의 땅을 차지하게 되니, 그 땅은 더욱 넓어져 서쪽으로는 바다에까지 이르렀다.
10)
○ 용삭(龍朔) 원년(A.D.661; 新羅 文武王 1)에 춘추(春秋)가 졸(卒)하니, 조서를 내려 그의 아들 태부경(太府卿) 법민(法敏)으로 뒤를 잇게 하여,[註036]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용삭(龍朔)] 3년(A.D.663; 新羅 文武王 3)에 조서를 내려 그 나라를 계림주도독부(雞林州都督府)로 삼고, 법민(法敏)에게 계림주도독(雞林州都督)을 제수(除授)하였다.[註037] 법민(法敏)이 개요(開耀) 원년(A.D.681; 新羅 神文王 1)에 졸(卒)하니, 그의 아들 정명(政明)이 위(位)를 이어 받았다.[註038]
11)
○ 수공(垂拱) 2년(A.D.686; 新羅 神文王 6)에 정명(政明)이 사신을 보내와 조근(朝覲)하며, 표문(表文)을 올려 『당례(唐禮)』1부(部)와 기타 문장(文章)을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註039] 측천(則天)은 해당 관사에 명하여 『길흉요례(吉凶要禮)』와 『문관사림(文館詞林)』 가운데 규계(規誡)가 될 만한 것을 골라 쓰게 하여, 모두 5십여권(卷)의 책을 만들어 내려 주었다.
12)
○ 천수(天授) 3년(A.D.692; 新羅 孝昭王 1)에 정명(政明)이 졸(卒)하니, 측천(則天)은 거애(擧哀)를 하는 한편,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그의 아들 이홍(理洪)을 세워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작위인]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행표도위대장군(行豹韜衛大將軍) 계림주도독(雞林州都督)을 승습케 하였다.[註040] 이홍(理洪)이 장안(長安) 2년(A.D.702; 新羅 聖德王 1)에 졸(卒)하니, 측천(則天)은 거애(擧哀)하고 이틀 동안 철조(輟朝)하였다. 그의 아우 흥광(興光)[註041]을 보내어 신라왕(新羅王)으로 삼고, 형의 장군(將軍)· 도독(都督)의 호(號)를 승습하게 하였다. 흥광(興光)은 본명이 태종(太宗)과 같아서 선천(先天) 연간(A.D.712; 新羅 聖德王 11)에 측천(則天)이 고쳐 준 이름이다.
13)
○ 개원(開元) 16년(A.D.728; 新羅 聖德王 27) 에 사신(使臣)을 보내와 방물(方物)을 바치고, 또 표문(表文)을 올려 [신라(新羅)] 인(人)에게 중국의 학문과 경교(經敎)를 배우게 해 달라고 요청하니, 현종(玄宗)은 윤허하였다.[註042] [개원(開元)] 21년(A.D.733; 新羅 聖德王 32)에 발해말갈(渤海靺鞨)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로 침입하였다. 이때 흥광(興光)의 친척 김사란(金思蘭)이 입조(入朝)하여 경사(京師)에 와 머물러 있으면서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의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註043] 본국으로 돌려 보내어 군사를 동원하여 말갈(靺鞨)을 토벌케 하고, [註044] 이어서 흥광(興光)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영해군사(寧海軍使)를 가수(加授)하였다. [개원(開元)] 25년(A.D.737; 新羅 孝成王 1)에 흥광(興光)이 졸(卒)하니, 조서를 내려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추증하고,[註045] 이어서 좌찬선대부(左贊善大夫) 형도(邢璹)를 홍려소경(鴻臚少卿)에 섭직(攝職)시켜 신라(新羅)로 보내어 조제(弔祭)하게 하였다.[註046] 아울러 그의 아들 승경(承慶)[註047]을 책립(册立)하여 아버지의 [작위인]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신라왕(新羅王)을 승습케 하였다. [형(邢)]도(璹)가 길을 떠날 적에 현종(玄宗)이 송별시(送別詩)를 지어 그 서문(序文)을 쓰고, 태자(太子) 이하 모든 관원들로 하여금 시(詩)를 지어 전송하게 하였다.
현종(玄宗)이 도(璹)에게,“신라(新羅)는 군자(君子)의 나라로 불리며, 자못 학문을 알아서 중화(中華)와 유사한 데가 있소.[註048] 경(卿)의 학술이 강론에 능하기 때문에 이번의 사신(使臣)으로 선발하여 보내는 것이오. 그 나라에 가서 경전(經典)을 천양(闡揚)하여 대국(大國)의 유교(儒敎)가 성대함을 알게 하오.”하였다. 또 그 나라 사람들 중에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고, 바둑에 능한 솔부병조(率府兵曹) 양계응(楊季鷹)을 [형(邢)]도(璹)의 부사(副使)로 삼아 보냈다. 도(璹) 등은 그 나라에 이르러 번인(蕃人)으로부터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그 나라의 바둑 수준은 계응(季鷹)보다 낮았다. 그리하여 도(璹) 등에게 금보(金寶) 및 약물(藥物) 등의 푸짐한 선물을 주어 보냈다.
14)
○ 천보(天寶) 2년(A.D.743; 新羅 景德王 2)에 승경(承慶)이 졸(卒)하니,[註049] 조서를 내려 찬선대부(贊善大夫) 위요(魏曜)를 보내어 조제(弔祭)하게 하였다. 그의 아우 헌영(憲英)[註050]을 책립(册立)하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고, 아울러 형의 관작(官爵)을 승습케 하였다.
15)
○ 대력(大曆) 2년(A.D.767; 新羅 惠恭王 3)에 헌영(憲英)이 졸(卒)하니, 국인(國人)들이 그의 아들 건운(乾運)을 세워 왕(王)으로 삼았다.[註051] 이어서 대신(大臣) 김은거(金隱居)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입조(入朝)하여[註052] 방물(方物)을 바치면서 책명(册命)을 청하였다. [대력(大曆)] 3년(A.D.768; 新羅 惠恭王 4)에 대종(代宗)은 창부랑중(倉部郎中) 겸어사중승 (兼御史中丞)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귀숭경(歸崇敬)에게 부절(符節)과 책서(册書)를 주어 가서 조제(弔祭)하게 하였다. 건운(乾運)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신라왕(新羅王)으로 삼고, 건운(乾運)의 어머니는 태비(太妃)로 책봉하였다.[註053] [대력(大曆)] 7년(A.D.772; 新羅 惠恭王 8)에 사신(使臣) 김표석(金標石)을
보내와 하정(賀正)하니, 위위원외소경(衛尉員外少卿)을 제수(除授)하여 돌려 보냈다.[註054] [대력(大曆)] 8년(A.D.773; 新羅 惠恭王 9)에 사신(使臣)을 보내와 조근(朝覲)하고, 아울러 금(金)· 은(銀)· 우황(牛黃)· 어아주(魚牙紬)· 조하주(朝霞紬) 등을 바쳤다.[註055] [대력(大曆)] 9년(A.D.774; 新羅 惠恭王 10)에서 12년(A.D.777; 新羅 惠恭王 13)까지는 해마다 사신(使臣)을 보내와 조근(朝覲)하였는데, 혹은 한해에 두번도 왔다.[註056]
16)
○ 건중(建中) 4년(A.D.783; 新羅 宣德王 4)에 건운(乾運)이 졸(卒)하였다.[註057] 아들이 없으므로[註058] 국인(國人)들이 그 나라의 상상(上相)[註059] 김양상(金良相)을 세워 왕(王)으로 삼았다.[註060]
17)
○ 정원(貞元) 원년(A.D.785; 新羅 元聖王 1)에 양상(良相)에게 검교태위(檢校太尉) 도독계림주자사(都督雞林州刺史) 영해군사(寧海軍使) 신라왕(新羅王)을 제수(除授)하였다.[註061] 이어서 호부낭중(戶部郎中) 개훈(蓋塤)에게 부절(符節)과 책명(册命)을 주어 보냈다. 그 해에 양상(良相)이 졸(卒)하니, 상상(上相) 경신(敬信)[註062]을 세워 왕(王)으로 삼고,[註063] 그 관작(官爵)을 승습케 하였다. 경신(敬信)은 곧 [전왕(前王)과] 종형제(從兄弟)사이이다. [貞元] 14년(A.D.798; 新羅 元聖王 14)에 경신(敬信)이 졸(卒)하였다. 그의 아들이 경신(敬信)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국인(國人)들이 경신(敬信)의 맏손자 준옹(俊邕)[註064]을 세워 왕(王)으로 삼았다.[註065] [정원(貞元)] 16년(A.D.800; 新羅 哀莊王 1)에 준옹(俊邕)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신라왕(新羅王)을 제수(除授)하였다. 사봉랑중(司封郎中) 겸어사중승(兼御史中丞) 위단(韋丹)에게 부절(符節)과 책명(册命)을 주어 보냈다. 단(丹)이 운주(鄆州)에 이르렀을 때 준옹(俊邕)이 졸(卒)하고 그의 아들 중흥(重興)이 왕(王)이 되었다는 보고가 있어 조명(詔命)으로 단(丹)을 불러 들였다. 영정(永貞) 원년(A.D.805; 新羅 哀莊王 6)에 조서를 내려 병부랑중(兵部郎中) 원계방(元季方)에게 부절(符節)을 주어 보내어 중흥(重興)을 왕(王)으로 책봉하였다.[註066]
18)
○ 원화(元和) 원년(A.D.806; 新羅 哀莊王 7) 11月에 숙위(宿衛)로 와 있던 왕자(王子) 김헌충(金獻忠)을 본국에 돌려보내고,[註067] 이어서 시비서감(試秘書監)을 가수(加授)하였다. [元和] 3년(A.D.808; 新羅 哀莊王 9)에 사신(使臣) 김력기(金力奇)를 보내어 내조(來朝)하였다. 이 해 7월에 역기(力奇)가, “정원(貞元) 16년(A.D.800; 新羅 哀莊王 1)에 신(臣)의 고왕(故主) 김준옹(金俊邕)으로 신라왕(新羅王)을 삼고, 어머니 신시(申氏)로 태비(太妃)를 삼으며,[註068] 아내 숙씨(叔氏)로 왕비(王妃)를 삼는다는[註069] 조책(詔册)을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책사(册使) 위단(韋丹)이 중도에서 준옹(俊邕)의 죽음을 알고 그 책명(册命)을 도로 가지고 돌아가서 중서성(中書省)에 두었습니다. 이번에 신(臣)이 본국으로 돌아가므로 신(臣)이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주시기를 엎드려 청합니다.” 라고 상언(上言)하니, 조칙(詔敇)하여, “김중옹(金俊邕) 등의 책명(册命)은 마땅히 홍려사(鴻臚寺)로 하여금 중서성(中書省)에서 수령해 오게 하여야 되니, [홍려(鴻臚)]사(寺)에 알려서 김력기(金力奇)에게 주어 받들고 돌아 가게 하라. 이어서 그의 삼촌 언승(彦昇)에게 문극(門戟)을 내려주니, 본국은 준례(準例)에 따라 내려 주라.” 고 하였다.[註070] [원화(元和)] 4년(A.D.809; 新羅 憲德王 1)에 사신(使臣) 김륙진(金陸珍) 등을 보내와 조공(朝貢)하였다. [원화(元和)] 5년(A.D.810; 新羅 憲德王 2)에는 왕자(王子) 김헌장(金獻章)이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19)
○ [원화(元和)] 7년(A.D.812; 新羅 憲德王 4)에 중흥(重興)이 졸(卒)하니, [그 나라에서] 재상(宰相) 김언승(金彦昇)[註071]을 세워 왕(王)으로 삼고,[註072] 사신(使臣) 김창남(金昌南) 등을 보내와 고애(告哀)하였다. 이해 7월에 언승(彦昇)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 겸지절충녕해군사(兼持節充寧海軍使) 상주국(上柱國) 신라국왕(新羅國王)을 제수(除授)하고, 언승(彦昇)의 아내 정씨(貞氏)를 왕비(王妃)로 책봉하였다.[註073] 아울러 재상(宰相) 김숭빈(金崇斌) 등 세사람에게 문극(門戟)을 내려주고,[註074] 역시 본국으로 하여금 준례(準例)대로 내려 주라고 하였다. 아울러 직방원외랑(職方員外郞) 섭어사중승(攝御史中丞) 최정(崔廷)에게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조제(弔祭)와 책립(册立)을 시행하게 하였는데, 그 질자(質子) 김사신(金士信)을 부사(副使)로 딸려 보냈다.[註075] [원화(元和)] 11년(A.D.816; 新羅 憲德王 8) 11월, 입조(入朝)한 왕자(王子) 김사신(金士信)[註076] 등이 사나운 바람을 만나 초주(楚州) 염성현(鹽城縣) 지경에까지 표류하여 갔다는 사실을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이용(李鄘)이 알려 왔다. 이 해에 신라(新羅)에 흉년이 들어 무리 1백 70명이 먹을 것을 찾아 절동(浙東)에까지 왔다.[註077] [원화(元和)] 15년(A.D.820; 新羅 憲德王 12) 11월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註078]
20)
○ 장경(長慶) 2년(A.D.822; 新羅 憲德王 14) 12월에 사신(使臣) 김주필(金柱弼)을 보내 조공(朝貢)하였다. 보력(寶曆) 원년(A.D.825; 新羅 憲德王 17)에 왕자(王子) 김흔(金昕)이 와서 조근(朝覲)하였다.[註079] 대화(大和) 원년(A.D.827; 新羅 興德王 2) 4월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대화(大和)] 5년(A.D.831; 新羅 興德王 6)에 김언승(金彦昇)이 졸(卒)하니,[註080] 그의 아들 김경휘(金景徽)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使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 겸지절충녕해군사(兼持節充寧海軍使)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註081] 경휘(景徽)의 어머니 박씨(朴氏)를 태비(太妃)로 삼고, 아내 박씨(朴氏)를 왕비(王妃)로 삼았다. 태자좌유덕(太子左諭德) 겸어사중승(兼御史中丞) 원적(源寂)에게 부절(符節)을 주어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책립(册立)하게 하였다.
21)
○ 개성(開成) 원년(A.D.836; 新羅 僖康王 1)에 왕자(王子) 김의종(金義琮)이 와서 사의(謝恩)하고 아울러 숙위(宿衛)하였다.[註082] [개성(開成)] 2년(A.D.837; 新羅 僖康王 2) 4월에 [왕자(王子)에게] 물건을 하사하고 본국(本國)으로 돌려 보냈다.[註083] [개성(開成)] 5년(A.D.840; 新羅 文聖王 2) 4월에 홍려사(鴻臚寺)가 신라국(新羅國)에서 국상(國喪)이 났다는 사실을 알려 왔다고 아뢰므로, 질자(質子) 및 기간이 차서 돌아가야 할 유학생 등 도합 1백 5명을 돌려 보냈다.[註084] 회장(會昌) 원년(A.D.841; 新羅 文聖王 3) 7월에 조칙(詔敇)하여, “신라(新羅)로 귀국한 관원(官員)으로서 이전에 선위부사(宣慰副使)로 신라(新羅)에 들어간 전충연주도독부사마(前充兗州都督府司馬) 사비어대(賜緋魚袋) 김운경(金雲卿)[註085]은 치주장사(淄州長史)에 합당하다.”라고 하였다.
4. ○ 사신(史臣)은 말한다.
북적(北狄)은 중국(中國)과 아주 가까워서 변방 침입이 예로부터 있어 왔다. 동이(東夷)는 영해(瀛海)[註051] 밖에 떨어져 있어서 분경(紛梗)을 일으켰다는 것은 듣기 드문 일이다. 이는 형세상 그러할 뿐만 아니라 아마 타고난 성격도 그러한 듯하다. 태평지(太平地)의 사람은 어질고 공동산(空峒山)[註052]의 사람은 억세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수(隋) 양제(煬帝)가 만족을 모르는 끝없는 욕망으로 요좌(遼左)[註053]에 군사를 일으킬 적에 터질 듯한 욕망을 단번에 채우려는 야심이 여기에서 발단되었다. 그러나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들에게 구실을 주게 되어 스스로 제 몸을 불사르고 드디어는 나라까지 망치고 말았다. 우리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가 친히 융차(戎車)를 몰고 동으로 고려(高[구,句]麗)를 정벌한 것도 성공은 하였으나 잃은 바가 또한 많았다. 개선하여 돌아오던 날에 좌우(左右)의 신하들을 돌아보며, ‘짐(朕)에게 위징(魏徵)[註054]이 있었더라면 반드시 이번의 정행(征行)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에서 [태종(太宗)도] 출사(出師)를 후회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찌하여서일까? 이적(夷狄)의 나라란 돌밭과 같아서 얻어도 보탬이 안되고, 잃어버린들 무엇이 손상될 것인가? 반드시 허명(虛名)을 힘써 추구하므로 [단지] 수고로움에나 쓸모가 있을 뿐이다. 다만 마땅히 문덕(文德)을 닦아서 이를 오게 하고, 성교(聲敎)를 입혀서 이를 복종시키며, 신실한 신하(왕,王)를 가려 이를 무마하고, 변경의 수비를 단속하여 방어해야 된다. 그리고 통역(通譯)을 거쳐서 조정에 오게 하고, 바다를 건너서 들어와 조공을 바치게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일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