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그늘에 숨어 얼굴을 붉히다 / 홍억선
1. 오버랩
비가 내린다.
도시의 오후는 비에 젖는다.
나는 그린 하우스에 앉아 창밖을 본다.
신호등이 바람처럼 흔들린다.
깜빡이는 신호등을 따라 사람들이 몰려갔다가 다시 몰려온다.
빗방울이 경쾌하게 우산 위를 활강하며 물안개를 만든다.
거리는 잠시 적막하다.
빗물에 유리창이 흐려진다.
아득히 먼 시간이 나를 들여다본다.
2. 푸른 빛
내 유년의 들판에는 언제나 푸른 강물이 흐른다.
나는 소백산 자락 궁벽한 시골에서 자랐다. 내 유년을 휘감고 지나가는 시내는 길게 낙동강으로 이어져 있다. 저학년 때의 젊은 담임선생님은 우리들을 자주 시내로 데려가 묵은 때를 벗기셨다. 우리는 눈부시게 영롱한 금모랫벌에 몸을 굴리다가 풍덩풍덩 물속에 뛰어들었고 선생님은 언제나 꽃그늘에 숨어 그림을 그리셨다.
입술이 파래진 우리들이 등줄기의 물방울을 말리며 선생님의 뒤에 둘러서면 그림은 알 수 없는 푸른빛으로 가득하였다.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선생님은 우리들을 뛰게 하셨다. 푸른 보리밭둑을 거쳐 길 솟은 미루나무 밭을 달음박질해 오면 언제나 숨이 넘어갈 듯하였다.
고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꽤나 유명한 아동 문학가이셨다. 선생님은 곰팡내 가득한 도서실에 우리 몇몇을 가두어 놓고 읽고 쓰고 또 읽고 쓰게 하셨다. 해시계가 키 큰 미루나무를 뉘엿뉘엿 땅바닥에 재울 무렵에야 우리는 풀려나곤 했는데 그 시절이 나에게는 참으로 고마웠다.
그 골방에서 나는 오래 창밖을 내다보는 버릇을 가졌고, 반드시 글을 쓰는 선생님이 되겠다고 일찌감치 꿈을 굳혔다. 나는 그 소망을 한 번도 배반한 적이 없고, 회의한 적도 없고, 그렇게 되고자 노력하였으며, 또 그렇게 되었다.
선생님은 서울로 전근을 떠나시며 가친을 만나 나를 도회지로 보낼 것을 당부하셨다. 열세 살이 되던 이듬해, 나는 앉은뱅이 책상을 등에 지고 책 보따리와 간장 한 됫병을 들고 경북선 기차에 몸을 실었다.
3. 스무 살
나의 스무 살은 사랑과 함께 왔다.
나는 혼자라는 말을 무척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혼자 지내던 중고등학교 시절은 너무나 외로웠다. 친구들이 숱하게 자취방을 들락거렸지만 결국은 혼자였다. 봉산동 자취방에는 북쪽으로 난 봉창이 하나 있었다. 봉창너머 낭떠러지였던 비탈에는 아카시아가 무성히 우거져 있었다. 나는 그 봉창 너머로 햇살에 투명해진 아카시아 속잎을 바라보며 종일을 보내곤 했다.
그런 나에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런 사랑이었기에 더욱 향기로웠고 뜨거웠으며 화려하고도 요란하였다. 사랑은 나의 문학을 더욱 들뜨게 했다. 시화전을 열고 문집을 만들며 홍영철, 김재진, 장옥관, 송재학, 이종문, 박명호, 류후기, 지경광 등 화려했던 70년대의 문학도들과 향촌동 막걸리집을 드나들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은 모두 한두 해쯤 선배였으며, 나는 동급생 하나 없는 외톨박이였다. 나는 그들과 어울리는 막걸리 판이 문학의 전부인 줄 하는 숙맥이었으나 그들은 이미 무척 세련되어 있었다. 막내인 내가 열심히 막걸리 주전자를 셈하는 동안 그들은 은밀한 암호를 나누며 끼리끼리 또 다른 문학의 줄을 찾아 사라지곤 했다.
모 대학 문학상을 수상하고 신동집 선생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붉은 벽돌의 연구동을 올라가면서 나는 무척 상기되었다. 그러나 나는 질식할 것 같은 연구실에서 몇 번이나 알량한 자존심이 무너진 채 선생님의 어깨 너머로 창을 기어오르는 담쟁이 넝쿨을 지루하게 보고 있어야 했다.
3학년을 마치자 사랑을 핑계로, 문학을 핑계로 더 이상 입대를 미룰 수 없었다. 남도에서의 군 생활은 순탄하였으나 말년이 가까워질수록 긴장하게 되었다. 유신정권이 종말을 맞았고 광주항쟁의 중심에서 외부와 차단된 채 죽음의 두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내 사랑이 끝장난 것이었다.
나는 목포 앞바다 철선 위에서 그녀의 마지막 편지를 읽었다. 첫 발령을 받은 봉화 골짜기에서 도저히 혼자 견딜 수 없어 동료교사에게 문고리를 열어주었다는 편지를 갈기갈기 찢으며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변하지 않는 게 없다’라는 그 말밖에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나의 귀향은 쓸쓸했다. 그 사이 문학도들은 하나둘 등단을 하고, 우선의 먹살이를 위해 뿔뿔이 흩어져 거리는 허전했다. 나는 그만 심드렁해졌다. 어서 졸업을 하고 어디든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결국 나는 멀리 가지 못하고 대구의 변두리에 남게 되었다.
4. 獻花
조상님께서 얼마나 바르게살기를 소원하셨으면 내 이름을 ‘億善’으로 지으셨을까. 이름대로 억수로 착하게 살려고 하였으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사람을 쉽게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사람 앞에서 먼저 등을 돌려본 기억은 없다. 혹 누가 등을 보이고 가더라도 나는 그가 가뭇없이 사라질 때까지 오래 뒤를 지켜보며 연정을 보냈다. 어떤 인연의 만남도 그 만남을 아름다운 장미꽃으로 가슴에 담아두려고 노력하였다.
더러 나를 보고 왜 잡문나부랭이나 쓰는 수필가가 되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나는 소설이나 시를 쓸 만한 재주가 없어서라고 답을 한다. 하지만 내가 수필에 진한 애정을 느끼는 것은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진실하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시는 아무래도 대리인을 내세워 허공에다 가공의 집을 짓는 작업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수필은 진실 없이는 단 한 줄도 풀어나갈 수 없는 작업이다. 설사 남을 속일 수 있다 해도 자신은 속일 수 없는 일이 수필 쓰기이다. 나는 올바르게 살아가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미리 세상에 공표하기 위해, 그 맹서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 수필을 쓴다고 말한다.
나는 독실한 믿음을 가진 교인은 아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나를 보낸 분이 있어서 왔으니 틀림없이 거두어 갈 분도 있으리라고 믿는다. 세상을 마감하는 날, 내가 그 분 앞에 선다면 무엇을 내놓을 것인가 하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무엇을 하였느냐 하는 물음에도 우물쭈물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 자리에 서면 나는 향기로운 꽃바구니를 자랑스럽게 내어놓고 싶다. 그 바구니에 내가 만난 숱한 사람들의 이름들과 아름다운 사연들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유년의 푸른빛도 담았으면 좋겠고, 금모래빛 언어들로 빛나는 수필집도 한 권 곁들일 수 있다면 더더욱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