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물고기의 운명은
류 근 만
한 해가 저물고 있다. 동지(冬至)가 지나고 한참이 지났건만 지독한 추위는 없다. 햇볕이 따스하여 별 볼일 없는데도 천변으로 나왔다. 추운 날씨는 아닌데 손은 시리다. 집에서 나올 때 장갑을 챙기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점퍼 속에 손을 감췄다. 모자로 귀를 덮었고, 마스크로 입도 가렸다. 이런 부류가 나뿐 만은 아니다. 천변으로 나온 여러 사람이 단단히 준비한 모습이다.
하천을 내려다보니 얼음이 얼었다. 큰 추위는 없는 것 같은데도 역시 겨울은 겨울이다. 사람이 디딜 정도는 아니고, 살얼음보다는 두텁다. 냇가의 얼음은 바깥쪽에서 안으로 얼어간다. 얼음이 얼면 물고기는 얼음 속으로 숨어든다. 보리나 마늘 같은 겨울 식물은 눈 이불이라 한다. 물고기의 겨울 이불도 얼음인 셈이다. 눈 이불은 보온이고 얼음 이불은 방공호다.
얼음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청둥오리는 물고기 적이다. 이놈들은 맨발로 달리기도 하고 얼음을 콕콕 찍기도 한다. 콕콕 찍으면서 사냥을 하는지, 먹잇감을 낚시질하는지 무척 바빠 보인다. 쫓고 쫓기는 신세가 가련해 보인다. 공격자 앞에는 방공호도 무색하다. 얼음 밑에 붙어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파탄 내는 것이다.
도도히 흐르는 물속엔 얼음 이불을 벗어난 작은 물고기가 숨바꼭질한다. 달리기도 하고 높고 낮게 뜨는 묘기도 부린다. 높이 뜰 때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자칫 조류의 먹잇감이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어미 고기한테 배운 살아남는 기법일 것이다. 공격과 수비, 잡으려는 힘센 자와 잡히지 않으려는 약자의 모습이다.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느라 자리를 쉽게 뜨지 못했다.
생명체가 있는 모든 동식물이 평화를 지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구나! 방공호를 빠져나온 어린 물고기가 안타깝다. 징검다리 사이로 흐르는 물결은 세차다. 한 발 한 발 징검다리를 건넜다. 그 녀석들이 잘 가라고, 또 보자고 손짓하는 것 같다. 재촉하는 발걸음을 멈추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장마철 급류에 떠내왔는지 쭈삣하게 할킨 채 소아 있는 나뭇가지에 온갖 잡쓰레기까지 걸쳐있다. 흉물스럽다. 그 옆에 늙은 어미 새 한 마리가 처량하게 서 있다. 그것도 혼자라서 청승맞다. 길쭉한 한쪽 다리로 몸을 지탱한 채다. 포수한테 얻어맞았나? 왜 외다리야!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꼿꼿하다. 그도 잠시 인기척에 궁금증이 금방 풀렸다. 어린 새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슨 신호가 왔는지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훨훨 날아간다. 품속에 감춰진 다리는 전술상 숨겼을 뿐이다. 구조 요청에 뒷다리 두 개는 힘차게 뻗쳤고 바로 출동을 한다. 아차! 나를 공격자로 오인했나 보다. 날아가는 어미 새를 보면서 나도 방향을 틀었다.
걷기 운동을 하기 위해서다. 천변의 길은 훤하게 잘 다듬어져 있다. 자전거 길과 사람 다니는 길이 구분돼서 안전하다. 자전거 길에는 젊은 건아들이 씽~씽~ 세차게 페달을 밟는다. 다른 한쪽 길은 어린아이들이 재잘거리기도 하고 뜀박질도 한다. 중장년들도 달리거나 바쁘게 걷는다. 체력을 보강하는 운동이다. 나 같은 이는 뒷짐을 짓거나 느릿느릿 걷고, 간혹 지팡이에 의지한 사람도 보인다. 움직이지 않으면 고인 물처럼 될까 봐 걱정하는 부류다.
한참을 걷다 보니 숨이 차는 것 같다. 천변을 벗어나니 하얀 머리털이 휘날리는 억세 풀이 보인다. 갈대숲이다. 사이길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화가 통할 것 같아서다. 멍청한 키에 산발 머리는 솔솔 부는 바람에도 연신 부딪친다. 부딪치다 못해 흰 머리칼은 다 빠지고 실오라기만 앙상하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홀로 덩그러니 서 있는 키다리 갈대는 외로워 보였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초고령사회 선두주자인 선배 노인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혼자 사는 그것보다는 그래도 부딪치며 사는 삶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갑자기 내가 왜 여기에 와 있지? 문득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노년이란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는데! 단지 오늘따라 집에 홀로 있자니 외롭다는 생각에 바람 쐬러 나왔을 뿐이다.
나는 참으로 바쁘게 사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 자처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이제는 좀 변화가 감지된다고 할까? 매사 조심스럽다. 집에 있으려니, 젊지 않은 나이에 무슨 할 말이 있고, 알콩달콩 시간 보낼 일이 뭐 있겠냐는 말이다. 서로 고집 안 피우고, 언성 높이지 않으면 다행이지, 옛날 같으면 부모 봉양하느라 신경을 써야 했지만, 지금은 빠르게 변화는 기후보다 더 빠른 삶의 변화가 공감을 일으킨다. 나도 이런 현실에 깊게 공감이 간다.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짬 내 냇가를 거닐어 보니, 내 삶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쫓고 쫓기는 삶, 생존경쟁, 이제 이런 것들을 지우고 살아도 될 나이 아닌가?
무거운 발짝을 띄면서 집으로 오는 내내 궁금증만 더해간다. 얼음 이불 밖으로 쫓겨난 물고기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까. 바쁘게 움직이던 청동오리에 잡혀서 삶을 마감한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