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롬 8:26-28 태풍지대(颱風地帶)와 무풍지대(無風地帶)
우리 인간은 모두 심각한 장애를 입고 태어납니다. 그 장애는 눈으로 보여지는 장애가 아닙니다.
남들이 알지도 못하며 심지어 자기 자신 조자 알지 못하는 장애입니다.
이 심각한 장애는 영적인 세계를 인지하지 못하는 장애입니다.
현재 지구에는 60억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화와 기술과 지식은 가히 폭발적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의 삶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 지구 밖에 얼마나 많은 별이 있는 줄 아십니까?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혜왕성...이런 별들은 군집을 태양계라고 합니다.
이런 태양계가 수천억개가 모인 것이 은혜계입니다. 그리고 우주에는 이런 은하계가 수백억일지, 수천억일지 측량 못할 정도로 많답니다.
이런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별들이 모두 일정한 패턴에 따라 서로 부딪치지 않고 생성과 소멸,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정교하고 정확합니다. 우주 과학자들은 이 신비함에 겸손히 말합니다. 도저히 이것은 우연일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경이감에도 사람들은 이 우주만물의 주권자인신 하나님에 대해서 알거나 경배하는 자는 극히 소수입니다.
‘이 세계를 있게 한 주인은 누구인가? 그리고 이 거대한 우주 속에 오늘을 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죽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이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겨우 8-90년 살면서 축구공 보다 작은 머리를 가지고 판단하며 자기가 우주의 주인인양 삽니다.
이 두꺼운 성경 중에 창세기 1장만 읽어도 이 우주와 내 존재에 대한 비밀이 풀리는데 이것을 외면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평생을 만족도 없으면서, 슬픔과 애통, 증오, 회한, 후회 속에서 사그러지고 있습니다.
뛰어난 지성을 소유했지만 인간은 엄청난 장애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장애가 있습니까 ?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마음에 엄청난 장애를 주었습니다.
염산 보다 더 독한 죄는 사람의 마음을 뒤틀고 일그러트려 영적 감각을 완전히 죽여 놨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신뢰는 없고 의심과 분노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의 매끄러운 피부 속에는 너무나도 끔직하게 일그러지고 비틀어지고 흉측한 모습이 치료되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연약한 살 속에 가장 날카로운 무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한 꺼풀만 벗기고 인간의 속을 들여다보면 괴물입니다.
그래서 겉사람은 더욱 고급해졌지만 인간성은 갈수록 황폐해지고 사람들은 더욱 사나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축복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구주로 주신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죄는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모든 죄가 다 기록되고 마지막 죽음의 날에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의인이라 해도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 믿는 사람의 죄는 다 지워버리십니다. 이유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너무나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값은 이 우주 만물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값진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절대로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믿는 모든 사람을 기필코 구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우습게 생각하고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별로 실감을 못합니다.
그러나 막상 암 같은 불치병에 걸려서 자신에게 죽음이 시작되면, 그 때는 소리를 지르며 벌벌 떱니다. 엉엉 울기도 합니다.
아무리 착하게 산 사람도, 아무리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도 예외 없이 죽음 앞에서 공포가 있고 회한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는 떨지 않습니다. 이미 죄가 깨끗이 지워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성도가 누리는 첫 번째 복입니다. 이 복을 믿으시기 축복합니다.
우리 중에는 이것이 확실히 믿겨지는 분도 있고 긴가 민가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면 안됩니다.
죄로 말미암아 여전히 영적인 장애 속에 있는 사람은 예수 믿는 복을 얘기하면 콧방귀 밖에 안 뀝니다. 경멸합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믿고 있는 바보 천치들로 생각을 합니다. 영적으로 캄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긴가민가하다는 것은 믿음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비틀어진 마음, 장애를 입어 괴물이 되어 있는 마음을 고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축복입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서 우리 속을 치료하고 회복시킵니다. 그 증거가 희미하게나마 믿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 결국은 우리의 마음과 인격을 너무나도 존귀하고 멋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축복의 시작에 대해서 우리들은 감각을 잘 못합니다. 그래서 믿음에 대해서 확신을 못합니다.
우리의 바램은 예수를 믿지 마자 내 모든 성격과 성품과 인간성이 확 바뀌는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절대로 마술적 역사이거나 기계적이지 않습니다.
마술하는 사람들이 보자기를 들고 있다가 손을 집어넣으면 난데없는 비둘기가 나오는 것처럼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속임수이지 변화가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는 변화이지 속임수가 아닙니다.
또한 전구 스위치 누르면 켜지고 꺼지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인격적으로만 역사 합니다.
자녀들을 부모들이 마술 하듯이, 전기 스위치 넣드시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자식을 낳기 전에, 키워보기 전에는 자식을 다 자기 생각대로 키울 수 있는 줄 알지만 다 착각입니다.
세월이 필요하고, 얼래고 달래고 화내고 때리고 참으면서 아슬아슬하게, 겨우 겨우 키워 냅니다.
그것이 인격입니다. 감동이 필요하고 설득이 필요하고 매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여 자식이 겨우 만들어집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과정은 지극히 인격적입니다.
처음에 우리가 기도를 할 때 그 기도제목이라는 것은 대부분 이렇습니다.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족시켜 달라 입니다. 이때만큼 엉터리 기도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기도하다 보면 기도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기도의 제목과 내용이 달라집니다.
달라고 하는 마음에서 드리겠다는 마음이 됩니다. 사랑받겠다고 기도하다가 이제는 사랑을 베풀겠다고 기도하게 됩니다.
마음이 바뀌어 있고 가치관이 달라져 있습니다. 영적 장애가 회복되면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아름답게 변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이루어 가시는 인격적 역사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기도는 성령이 탄식하지 않고 신앙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엉터리로 시작되지만 결론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내는 데로 갑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깊으심과 경륜과 오래 참으심과 일하심 앞에 탄복하며 감사하게 만듭니다.
15세기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롬부스는 바람의 힘으로만 가는 범선을 타고 4번에 걸쳐 대서양을 횡단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대서양이 시계 방향으로 원을 그리면서 물이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의 리스본 항구에서 배가 출항하면 남쪽 아프리카 남단까지 카나리아 해류를 타고 내려갑니다.
그 다음 남적도 해류를 타면 멕시코의 유카 반도 입구까지 오게 되고 다음에는 북적도 해류를 타고 뉴욕에 당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귀환할 때는 북적도 해류를 타고 다시 북대서양 해류로 갈아타면 리스본으로 오게 된다고 합니다.
이 거리가 총 2만 킬로미터 순풍으로만 달려도 70일을 걸려야 횡단이 가능했습니다. 2달이 넘는 길고도 긴 항해였던 것입니다.
동력선이 만들어 지기 전 17세기 까지 이 콜롬부스 항로에서는 평균 4척 당 1척이 침몰하든지 중간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폭풍을 만나 침몰하든지 전염병으로 모두 죽어 유령선이 되거나 해적으로 인해 수많은 배들이 돌아오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 뱃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폭풍지대나 전염병이나 해적이 아니었답니다.
플로리다 만의 허리케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는데 그곳은 선원들이 일컿는 말의 바다였답니다.
이곳은 아무리 유능한 항해사라도 한번 들어가면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는 배들의 무덤이랍니다.
그런데 이곳은 어마어마한 파도가 치는 태풍지대가 아닌 무풍지대였답니다. 바람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정말로 바람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다 한가운데서 배가 딱 멈춰 서서 단 1센치도 움직이지 않는답니다.
그곳은 우리가 한번쯤은 들어 봤을 버뮤다 삼각지역입니다.
갑자기 배가 사라지거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느니 하는 말은 지어낸 것이고 사실은 바람이 없어 벌어진 일이랍니다.
아무리 큰 파도에도, 역풍이 불어도 범선은 어떻게든 그 난관을 극복하고 전진하는데 무풍지대는 전혀 전진이 안 되는 것입니다.
배가 꼼짝 못하면 식량과 식수가 떨어지게 되고, 살겠다고 구명정을 뛰워 노를 젓지만 육지와는 너무 멀어 기진하여 죽는 겁니다.
사람들은 성공하고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머고 마시며 서서히 말라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빨리 죽음을 탈출 하는 방법을 알고 또 탈출 해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무서운 적은 태풍지대인 것 같지만 사실은 무풍지대입니다.
아무런 환란 고통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태풍에 휩싸여 풍전등화가 되어 봐야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삶이 평안하면 절대로 하나님께 매여 있지 않습니다. 아쉽지 않으면 신앙은 취미가 되어 버립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모태 신앙 빼놓고 모두 다 환란의 바다에서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를 믿음에도 여전히 풍랑 속에 있습니다. 곧 침몰 직전에 있기도 합니다.
모태 신앙인들도 꼭 인생에 한번은 이런 격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교만과 잘남의 독을 빼어 내 버리고 겸손하게 만드는 과정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렇다고 태풍지대에 빠졌다고 모두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은 더 독해집니다.
하나님을 믿기보다 오히려 다른 이방신을 찾습니다. 태풍지대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태풍지대를 만난다고 연단 받아 더욱 아름다운 인격으로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롯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아먹거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나버립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변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만이 고난을 통해서 유익을 얻고 하나님을 만나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았으니까 예수를 믿는 것이고, 회개해야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았기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 만이 태풍지대에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 동화책은 아이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데렐라가 고생 끝에 왕자와 결혼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았다 이렇게 끝이 납니다.
또 백설 공주도 일곱 난장이와 고생하다가 결국에 왕자를 만나서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끝납니다.
이것보다 더 큰 거짓말이 없습니다. 현실은 이렇지 않습니다.
신데렐라와 왕자가 드디어 결혼하게 되어 그 때부터 지지고 볶아 대며 살다가 때가 되어 죽었다로 끝이 나야 합니다.
백설공주는 7명의 난장이 식솔까지 데려갔으니 그들은 죽을 때까지 시끌벅적 좌충우돌 했다로 끝나야 합니다.
인생은 절대로 동화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다 느끼고 있는 사실입니다. 결코 동화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신앙생활을 자꾸 동화적인 것을 요구하고 바람 한 점 없는 무풍지대를 기대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나름대로 동화같이 살아보려 했지만 그것이 안 되는 비정한 현실 앞에 깨지고 부서진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다시는 슬픔이나 죽음이나 애통이나 고통이 없는 천국을 향해 출발한 것이 신앙입니다.
이 길에 고통이 없고 환란이 없다고 누가 약속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더 많은 고난과 난관을 성경이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태풍지대에서 침몰치 않고 소원하는 항구까지 기항하는 약속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실패할 것입니다. 그것도 거듭 거듭 실패할 것입니다. 침몰 직전의 위기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었기에 하나님께서 합력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실패와 우리의 좌절에도 악을 만들어 내지 않고 오히려 선을 만들어 내는 승리, 천국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이 약속이 있기에 무풍지대에 눌러앉아 생명이 다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먹고 마시는 것을 박차고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은 울지 않고, 속상하지 않고, 고통에 찬 몸부림을 치지 않고서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나이든 이상주의자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상주의자는 언제나 10대, 20대입니다. 직업에 대해 결혼에 대해 꿈을 꿉니다.
준비한 것도 없고 실력도 없으면서 이상만 높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끄을려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0대를 넘으면 이상주의자는 없어집니다. 꿈이 없습니다. 오직 돈 밖에 없습니다.
현실과 타협을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생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그렇습니다. 성경 몇 장 읽고 신앙을 다 알고, 예배 몇 번 드리고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 신앙이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려면 반드시 태풍지대를 건너야만 됩니다.
많은 세월이 필요하고 몸으로 부딪치고 깨져 봐야 하고 아파봐야 하고 발을 동동 굴러봐야 합니다.
성경공부 아무리 많이 해도 그것은 머리가 크는 것이지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 하고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신학교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을 했어도 목회하면서 그것으로 목회가 안된다는 것을 저는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삶은 이론으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듯이 목회도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뼈저린 절망과 곧 침몰할 것 같은 위기들을 건너면서 저는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태풍지대를 건너 봐야만 하나님이 어떻게 합력해 주시는지를 경험하게 되어 지면서 거기서 성숙이옵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태풍지대를 건넌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 그 분의 일하심의 깊이를 깨닫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대소사가 무엇입니까? 인륜지 대사는 신랑신부가 만나는 결혼입니다.
어느 나라고 결혼식이 가장 거창합니다. 사진 찍고 잔치하고 신혼여행가고 그날 하루 신랑신부는 붕붕 뜹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해 줍니다. 왜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가며 결혼식을 일생일대의 잔치로 해야 합니까?
평생 다시는 그런 옷을 입을 수 없고 그런 행복감을 맛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거창하고 뻑적지근한 것입니다.
그 다음 부터는 지지고 볶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사랑은 그 때 부터입니다. 연애할 때 뜨겁지만 그것은 껍데기입니다. 그것은 진짜 불이 아니라 전등불입니다. 결혼하여 아이 낳고 키우고 지지고 볶아 대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웁니다.
그런 고단한 태풍지대를 거치면서야 부부가 성숙해 지고 드디어 사랑의 경지를 알게 됩니다. 격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그게 우리 인생길 입니다. 여러분이 자식이 되어 봐서 아십니다. 자식이 무엇입니까? 속 썩이려고 나타난 웬수입니다.
부모가 해 준 만큼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이 없고 보답하는 자식도 없습니다.
자식은 그저 부모 속을 푹푹 썩이다가 그 복수를 자기 자식을 낳아서 당하는 것, 그것이 거듭되는 것이 인생유전이랍니다.
대부분의 인생이 공부 잘하고 좋은 학교 나와서 좋은 사람 만나서 시집 장가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럼 행복이 옵니까? 거기에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풀립니까?
내 고집 부리며 부모 반대 꺽고, 골라잡은 것이 지금의 여러분의 남편이고 아내입니다. 그래서 만족하고 계십니까?
동화처럼 살고 계십니까? 처음 기대했던 것처럼 행복해 죽을 것 같고 좋아서 죽을 만큼 사랑하고 계십니까?
모두가 후회하는 것이 결혼이랍니다. 정말로 뼈저리게 후회하는 것이 결혼이랍니다.
그러나 그것을 참고 살고 견디면서 드디어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결혼입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속았다고 아우성치며 쫑을 냅니다. 도대체 배우려 하지 않고 깊어지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내가 생긴 것은 영락없는 여자인데 완전히 남자입니다. 감정표현 안하고 참 묵둑둑한 면이 많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저한테 사랑한다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돈 빌려 달라고 할 때입니다.
그리고 상냥하게 말할 때는 설거지 시켜 먹을 때입니다. 왠수입니다. 왠수!
그러나 그 웬수가 있어서 저는 제가 얼마나 심각한 장애인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이지만 제가 제일 사랑하는 아내조차 웬수로 만들어야 하는 이기적인 인간이었습니다.
또한 우리 아이들 때문에 제가 얼마나 교만하고 아집에 잡혀있는 한심한 인간인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이런 무지와 교만을 바로 잡고자 주님께서는 저에게 딱 맞는 아내와 자식들을 붙여 주셨습니다.
이 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합력하심이 없음을 깨달았으며 그로 인해 감사하며 날마다 남편 됨과 어버지 됨을 배우며 실천 중에 있습니다. 결코 제 안에는 이런 자성과 반성이 없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분노와 미움으로 뒤틀려진 채 가장 사랑하는 가족조차 고통스럽게 하다가 회한으로 인생을 마치고 말 저를 주님께서는
사랑하셨고 성령을 보내셔서 제 마음을 고치셨습니다. 주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앞으로 사는 날 동안 얼마나 많은 왠수 같은 일들을 만나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과정 또한 중년과 노년을 배우며 결국 준비된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합력하심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도 제가 내 삶을 쫑내는 일도 없을 것이며, 원망과 불평없이 감사와 찬송으로 이 길을 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이 어떤 회사에 들어가고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다 주어야 안심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얼마나 공부를 잘하고 어떤 학교에 들어가야 마음이 흡족하겠습니까?
우리가 욕심을 내면 낼수록 안심이 없고 흡족이 없고 만족이 없다는 것을 빨리 아셔야 합니다.
욕심 부리고 성질부릴 만큼 우리 인생이 길지 않습니다. 여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이며, 말씀을 듣고 있는 자리가 얼마나 복인 줄 우리는 몰랐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인 장애인이었고 겉은 멀쩡한 채 죽음의 땅에서 말라 비틀어 죽을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성령께서 이 자리가 복의 자리라고 합력하여 여기다 갖다 놓았기에 우리는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 감격과 기쁨을 확인해서 내 것으로 갖은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의 고집과 속 썩임에도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선을 이루셨다는 것을 빨리 깨달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승복하지 못할수록 우리가 핑계 댈수록 우리의 삶은 더 고단하고 힘든 태풍지대가 될 것이며
끝까지 깨닫지 못하고 목을 매었던 가롯 유다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빨리 깨닫고 주님의 합력하심 앞에 승복하는 것이 복입니다. 다 알고 믿음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 한절에도 은혜 받고 찬송 구절만으로도 눈물 흘릴 때 그 때가 하나님께 승복할 때입니다.
마술적으로 바뀌지 않고 기계적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참아야 하고 견디어야 하고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대주시고 겉옷 벗어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면서라도 태풍지대를 건너야 합니다.
주저앉지 마십시오. 영원한 안식처가 나올 때까지 절대로 주저앉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지금까지 우리를 편들어 주셨고 앞으로 우리 평생의 날 동안 편들며 합력해 주십니다.
우리의 자랑과 영광을 바로 아시고 그 길에서 더 깊어지시고 온유해 지시고 너그러워 지십시오.
그릴 할 때만 사랑을 알고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이 승리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