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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잘 다녀왔습니다.
그리운 님들의 뜨거운 환대를 받고 감천에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게스트하우스에서 꿈같은 하룻밤을 보내고
조금 전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같이 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혹 필요하신 분들을 위해 자료를 남깁니다.
천도교의 밥과 영성
김용휘
(한양대 강의교수/천도교한울연대 공동대표)
1. 머리말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봄이 와 애벌레들이 한꺼번에 태어났습니다. 햇살을 듬뿍 받은 부드러운 나무 이파리를 먹고 ‘마나’도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날이 점점 따뜻해지니 나무 여기저기서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가 늘었습니다. 몸이 점점 자라 먹는 양도 엄청 많아졌습니다. 양껏 이파리를 먹어치우고, 다른 무리와 경쟁하느라 서로 싸워가며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다닙니다.
어느 날 마나는 “우리 모두 이렇게 이파리를 먹어치우면 분명 나무가 죽어버릴 거야” 하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잎을 다 먹으면 나무가 말라서 결국 아무도 살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초여름이 되고, 더 통통해진 애벌레들은 먹는 양도 덩달아 늘어났습니다. 나무 이파리들은 애벌레가 갉아 먹어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나뭇가지는 점점 마르면서, 아주 쇠약해졌습니다. 병든 잎을 먹은 애벌레들도 병이 들었습니다.
마나는 나무가 불에 타, 모두 죽는 꿈을 꾸고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 나무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데,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마나는 나무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안해요, 용서해 주세요.”
이 모습을 나무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마나는 이제 고치로 변했습니다. 나무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너는 사랑에 눈을 떴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단다. 너는 곧 나비가 될 거야. 나비가 되면 누구도 잎을 먹지 않는단다. 꽃에 있는 꿀을 찾게 되지. 그리고 꿀의 달콤함에 취해 춤도 춘단다. 그러면 꽃이 열매를 맺지.”
여름이 되었습니다. 나무에는 꽃이 피고 달콤한 꿀 향기가 피어올랐습니다. 나비가 된 마나는 투명하고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꽃과 놀았습니다. 가지는 언제부턴가 다시 푸르러졌고, 꽃에서는 열매가 부풀어 올랐습니다.
지구 어머니는 유한합니다. 그러나 무한 성장과 소비의 욕구는 날로 더 커져가고 있습니다. 예전에 비해 먹을거리는 넘쳐나지만 안심할 수 있는 먹거리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특히 유전자조작식품이 식품첨가물로 수입되어 우리의 선택권을 넘어 거의 모든 가공식품에 들어있다는 사실은 장보기를 두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태 이후로 방사능 오염 식품의 안정성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2011년 구제역으로 인한 돼지들의 비극적인 생매장과 공장식 축산, 비인도적인 도살이 시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과연 육식을 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 일인지,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감을 크게 떨어뜨리는 일은 아닌지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건강의 측면에서도 공장식 축산 시스템에 의해 잔인하게 사육된 고기는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고 경고합니다.
게다가 한쪽에서는 음식이 남아서 그 남은 음식물 처리비용이 수조에 이르는데 지구 반대쪽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의 북쪽 사람들, 특히 북쪽의 아이들이 굶주림에 지금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먹거리를 오로지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생각하여 존엄하고 자연한 생명의 영역에까지 지적재산권을 부여하면서 세계 식량체계를 독점하려는 초국적기업의 탐욕과 횡포 역시 가공할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종다양성은 점점 줄어들고 우리의 선택권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식량자급률이 낮은 우리나라의 경우 식량주권 문제 또한 심각한 상황입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생명에 대한 물신화 속에서 인간 삶의 근원인 하늘과 땅, 생태계, 지구 어머니가 깊이 병들어 신음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밥 속에는 생명 순환의 원리와 나눔과 공생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지구 생명계 전체가 위태로운 상태에 처해 있는 가운데 생명살림의 길을 새롭게 열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사람의 지혜로운 선택과 역할이 필요합니다.
이런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 오늘 저는 천도교 경전 속에서의 가르침과 또한 천도교 도인들의 생활 또는 조직 속에서 전개되었던 실천들을 살펴보고, 오늘날의 과제를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윤리적이고 생태적인 존엄한 선택으로 보다 품격있는 문명을 열어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2. 천도교 경전 속의 밥과 영성
1) 밥 한그릇에 만사의 이치가 있다
동학‧천도교는 수운 선생님의 시천주(侍天主) 사상과 해월 선생님의 천지부모(天地父母), 경물(敬物), 물물천사사천(物物天事事天), 이천식천(以天食天), 내칙 내수도문 등의 가르침에서 만물화생의 이치와 생명순환의 원리, 또한 그것을 한울님으로 공경하는 생명윤리를 내놓았습니다. 시천주는 내 안에서 신령한 한울의 생명과 신성을 발견함과 동시에 내가 전체 우주의 뭇생명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나라는 주체의 존엄성과 생명의 연대성에 대한 자각입니다.(內有神靈, 外有氣化) 또한 이런 생명의 연대성과 떨어져서 나의 생명의 유지될 수 없음에 대한 통렬한 자각입니다.(各知不移) 동학의 주체성은 자신의 마음을 우주의 생성에 조율하는 노력을 통해 고요한 안정성과 포용성을 바탕으로 외부 사물과 소통하는 능력을 함양하는 데에서 이루어집니다. 생명의 원천으로 융화된 의식은 그 원천을 자신의 생활 근거로 삼습니다. 사람이란 그들 모두가 모시고 있는 한울님의 영적 생명력으로 생활하는 존재입니다. 심지어 그 사람은 인간이 먹고 살고자 하는 생각도 한울님의 감응하는 마음이었음을 체험합니다. 이런 체험은 당연히 천지를 부모님처럼 섬기는 실천과 더불어 사람은 물론 모든 존재를 깊이 존중하는 진실성과 공경성, 신실함으로 일상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진실된 천도교의 도가에서는 삼시 세끼를 부모님 제사와 같이 정성들여 받들며, 밥 먹는 것을 한울님의 은덕을 도로 갚는 효도의 차원에서 실천했습니다. 또한 땅을 소중히 여기며 침이나 가래라 할지라도 함부로 뱉지 않고, 음식을 만드는 행위에서부터 먹는 행위에 이르기까지 심고(心告)를 통한 공경의 의례로서 행해졌습니다. 당연히 음식은 함부로 버려져서도 않 되고, 다른 음식과 섞어서도 안 되며, 늘 청결하게 유지되었습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해월 선생님은 밥 한 그릇의 이치를 매우 중요시 했습니다.
한울은 사람에 기대고 사람은 먹는 데에 기댑니다. 세상 모든 일을 아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 데 있습니다.
해월 선생님은 ‘만사지萬事知는 식일완食一碗’이라 하여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 데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지만 제가 생각한 바는 다음의 세가지입니다.
첫째, 우선은 쌀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만물화생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쌀은 농부의 수고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밥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서로 함께 협동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풀, 벌레, 흙, 공기, 바람, 눈, 서리, 천둥, 햇빛과 볍씨와 사람의 정신 및 육체적인 모든 일이 다 같이 협동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쌀이요 밥입니다.” 자연의 무위이화의 작용과 지기(至氣)의 생명력에 의해 쌀은 영글어집니다. 이를 해월 선생님은 천지부모로 말씀하십니다. “부모의 포태가 곧 천지의 포태니, 사람이 어렸을 때에 그 어머니 젖을 빠는 것은 곧 천지의 젖이요, 자라서 오곡을 먹는 것은 또한 천지의 젖이니라.” 또 “사람이 천지의 녹인줄을 알면 반드시 식고(食告)하는 이치를 알 것이요, 어머님의 젖으로 자란 줄을 알면 반드시 효도로 봉양할 마음이 생길 것이니라. 식고는 반포의 이치요 은덕을 갚는 도리이니, 음식을 대하면 반드시 천지에 고하여 그 은덕을 잊지 않는 것이 근본이 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물이 화생하는 것이 한울님의 은덕이며 내가 태어나고 숨쉬는 것 또한 한울님의 조화, 즉 천지부모님의 은덕임을 알아 이 은덕을 늘 공경하며 받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생명의 순환이치를 알고 그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이를 해월 선생님은 ‘이천식천(以天食天)’으로 표현합니다. 이천식천은 한울전체를 성장 진화케 하는 원리입니다. 해월 선생님은 ‘시천주’의 한울 모심을 확장‧심화시켜서 ‘이천식천(以天食天)’의 생명의 순환적 원리를 주창해 내었습니다. 모든 만물이 서로를 먹이는 관계를 통해서 서로의 성장과 우주적 성장 진화를 도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순환적 원리를 너무도 압축적으로 잘 표현한 용어입니다. 언젠가는 내 몸도 누군가의 먹이로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우주 속에 다른 모습으로 살아있는 또 다른 나이며,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이는 결국 존재의 비이원성, 영원성, 무궁성에 대한 자각을 내포합니다.
셋째, 밥이 내 앞에 오기까지의 전과정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밥상에 올라온 먹거리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누구에 의해 생산되고 유통되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뭘 먹는가의 문제 역시 고도의 정치 행위라고 합니다. 우리의 밥상엔 온갖 초국적 기업의 농간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밥상 안에 스민 자본의 작용점을 보고, 이를 적나라하게 들춰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음식문맹’, ‘식맹’을 떨쳐내는 길입니다.
2) 밥은 영양이 아니라 기운이다.
천도교에서는 아이를 잉태했을 때 가급적 육식을 금하도록 권고합니다. 해월 선생님은 「내칙」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포태하거든 육종(肉種)을 먹지말며, 해어(海魚)도 먹지 말며, 논의 우렁도 먹지말며, 거렁의 가재도 먹지 말며, 고기 냄새도 맡지 말며, 무론 아무 고기라도 먹으면 그 고기 기운을 따라 사람이 나면 모질고 탁하니”
육식을 하면 기운이 탁하게 되므로 삼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특별기도나 수련 때에도 어육주초를 금하고 있습니다. 부인들의 포태야말로 천도교의 시천주, 한울님 모심을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육식을 금하는 것은 내 안의 한울님의 기운을 맑게 잘 모시는 것입니다.
음식조절은 수련의 준비로서 몸과 마음을 맑고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몸과 마음을 맑고 밝고 편안하게 유지하는 것이 천도교에서는 진정한 한울님에 대한 공경이자 경천(敬天)입니다. 경천은 저 공중의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몸과 마음을 공경하여 한울님의 마음으로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을 서양에서처럼 영양학적으로만 보지 않고 기운의 측면에서 봐야하며 마음과 몸의 심신관계로서 봐야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아무 음식이나 먹어서는 안 되며, 기운이 좋은 음식, 피를 맑게 할 수 있는 음식을 가려서, 우리 땅에서 자연농으로 재배한 채식을 위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치유로서의 밥
수운 선생님은 “일일시시 먹는음식 성경이자 지켜내어 한울님을 공경하면 자아시 있던 신병 물약자효 아닐런가”라고 하여 정성과 공경으로 음식을 통해 한울님을 공경하면 어릴 때부터 있던 몸의 병이 약 없이도 자연히 낫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해월선생님 역시 「내수도문」에서 말씀하십니다.
먹던 밥 새 밥에 섞지 말고, 먹던 국 새 국에 섞지 말고, 먹던 침채 새 침채에 섞지말고, 먹던 반찬 새 반찬에 섞지 말고, 먹던 밥과 국과 침채와 장과 반찬등절은 따로 두었다가 시장하거든 먹되, 고하지 말고 그저「먹습니다」 하옵소서. 조석할 때에 새 물에다 쌀 다섯번 씻어 안치고, 밥해서 풀 때에 국이나 장이나 침채나 한그릇 놓고 고하옵소서. 금난 그릇에 먹지 말고, 이 빠진 그릇에 먹지 말고, 살생하지 말고, 삼시를 부모님 제사와 같이 받드옵소서.
내수도문은 일상에서 한울님 모심을 실천하는 덕목이며 매매사사를 한울님께 고하면서 마음과 기운을 화(和)하게 하는(心和氣和) 요령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수도문의 일곱가지 조목을 하나도 잊지않고 실행하면 모든 병이 나을 뿐 아니라 대도를 빨리 통할 수 있다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좋은 음식만으로도 심화기화가 되어 병을 낫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 해월 선생님의 가르침입니다.
의암 선생님 또한 음식조절을 중시하고 계십니다.
셋째 음식조절이니, 음식이 과하면 위가 넘치고, 위가 넘치면 경락이 고르지 못하여 소화를 잘하지 못하므로 해가 많으니라. 사람이 먹는 물건이 많되 그 중에 오곡은 순연한 정기라 이가 되고, 기타의 물건은 이해가 서로 절반이 되나, 제일 고기류는 해가 많으며 술도 또한 해가 많으니라.
최근에는 음식이 가진 성질을 이용해 치유하고 건강을 돌보는 ‘푸드테라피(food therapy)'가 조명받고 있습니다. 먹는 것이 곧 약이고 치료제입니다.
좋은 식생활은 있던 병도 낫게 하지만, 반대로 잘못된 식생활은 우리의 몸뿐 아니라 마음의 건강도 해칩니다. 오늘날 청소년 학교폭력, 과잉행동장애, 학습장애 등이 식생활의 문제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해월 선생님의 가르침을 통해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4) 밥은 나눔이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끈, 그것은 음식입니다.” 나눔의 밥상이란 책에는 소수민족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를 묻는 물음에 답변하는 목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가서 그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함께 먹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밥이란 본래 공동체적으로 만들고 공동체적으로 거두고 공동체적으로 나누어 먹고 공동체적으로 굿판을 벌이고 공동체적으로 함께 놀고 다시금 공동체적으로 다시 신나게 밥을 만드는, 그러한 생명의 집단적이고 통일적인 순환운동, 전환운동, 확장활동의 상징인 것입니다.”
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동체적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밥상공동체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차려주는 밥보다는 패스트푸드 입맛에 더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온가족이 함께 밥상에 둘러앉아 마음을 나누고 서로 소통하며 저녁밥을 먹는 일이 점점 적어지고 있습니다. 경쟁과 속도에 내몰려 해체되어 버린 가족공동체의 현실이 아이들의 정서불안과 학교폭력, 심지어 자살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요?
해월 선생님이 교수형을 당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일이 당시 감옥 속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다른 죄수들을 위해 음식을 차입해서 나눠 주신 일이었습니다.
神師 다른 囚徒들이 飢寒에 不堪함을 보시고 惻隱히 생각하사 이종훈에게 命하야 金五十兩을 差入케하야 囚徒들에게 屢次 飮食을 주시며 비록 病이 重하나 誦呪를 不撤하며...”
어떤 책에는 떡을 해서 나눠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해월 선생님은 모진 고문으로 뼈가 다 부서져 제대로 앉아 있을 수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 분은 당시 열악하고 비위생적인 감옥 환경 속에서 제대로 인간대접도 받지 못하며 굶주리고 있는 다른 죄수들의 고통이 더 안타까우셨던 것입니다.
생태질서에 맞게 차려지는 밥상에서 아이들은 밥만 먹는 것이 아니라 밥이 담고 있는 기운도 함께 먹는 것입니다. 그 밥의 기운이 사람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게 되면 집안에서 주부가 하는 일을 왜 ‘살림’이라고 하는지를,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월 선생님는 부인이 집안의 주인이며, 도(道)가 이루어지는 여부가 주부에게 달렸다고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3. 천도교인의 생활 속의 음식문화
1) 천도교 도가에서의 실천
대부분의 천도교 도가에서는 해월 선생님의 「내수도문」에 따라 삼시 세끼를 부모님 제사와 같이 받들면서 매 식사때마다 새밥을 정성껏 지어서 올립니다. 밥은 내 안에 모신 한울님과 조상님을 봉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정성을 다해 감사와 함께 감응의 식고(食告)를 드립니다. 해월선생님께선 ‘식고를 도로먹임의 이치요 은덕을 갚는 도리’라고 했습니다. 식사는 곡식을 주신 천지부모님께 다시 봉양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 먹는 것이 아니라 한울님과 조상님을 청하여서 함께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응하소서’ 라는 식고를 합니다. 밥과 반찬은 먹을만큼만 덜고 남기지 않습니다. 부득이 남은 음식은 따로 두었다가 먹되, 한번 먹었던 음식에는 식고를 하지 않습니다.
음식 중에서 중요한 것이 제사음식입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제사에서 중요한 것은 제물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유교적 제사는 형식과 격식을 중시하다 보니 음식을 장만하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고, 이것은 전적으로 음식을 준비하는 주부, 며느리에게 가중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많은 갈등의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성된 마음으로 부모를 기리면서 청수 한 그릇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싸우면서 진수성찬을 차리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해월 선생님은 1875년 8월 15일 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과거 다년간에 각종 음식물로써 기도식의 대상을 삼아왔으나 이는 아직 인심(人心)의 관계로 부득이해서 나온 일이니 금일 이후에는 일체 의식에 청수일기(淸水一器)만 사용하라. 물은 그 성(性)이 청(靑)하고 그 질(質)이 동(動)하는 것이며 또한 무소부재한지라 가히 만물의 근원이라 이를지라. 내 이로서 의식의 표준을 정하노라”
이 말씀 이후 교단에서는 모든 의식에서 청수(淸水) 한 그릇으로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물은 만물의 근원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가난한 서민들의 형편을 생각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우리 옛 어머니들이 아침마다 정화수 한 그릇으로 하늘에 기도했던 그 맑은 물(淸水)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천도교 도인집에서는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청수 한그릇으로 모든 의례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한편, 동학의 상차림에서 새로운 문명의 전환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향아설위(向我設位)’입니다. 해월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한해 전 1897년에 기존의 벽을 향해서 제사상을 차리는 이른바 ‘향벽설위(向壁設位)’에서 나를 향해서 제사상을 차리는 ‘향아설위’로 파격적인 전환을 합니다. 벽을 향해 제사상을 차리지 않고, 나(후손)를 향해 제사상을 차린다는 것은 조상이 사후에 저 세상에 있다가 제삿날 벽을 타고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손의 심령과 혈기 속에 함께하고 있다는 인식에 따른 것입니다. 이는 신 중심의 수직적이고 저 벽 쪽, 피안, 미래, 저 종말, 역사의 저쪽 혹은 과거 조상들의 시간을 향했던 관습을 이제 자기에게로, 지금 여기에 실존하는 삶과 생명으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습이라는 것이 가장 바꾸기 어려운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간단한 밥그릇 위치가 저쪽에서 이쪽으로 돌아오는 것은 후천개벽의 상징이며 인류 오만년 문명사 전체의 질서를 뒤집어놓는 후천개벽의 가장 완벽한 집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향아설위는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자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삶의 근본적 전환을 지금 어떻게 이루어야 할까요? 지금의 천도교인들은 이런 스승님의 가르침에 따라 근본적인 생활 방식의 전환을 하고 있을까요?
2) 여성회의 실천
천도교 여성회에서는 2000년에 여성회본부 조직부에 ‘한울타리’라는 이름으로 환경보호실천 단위를 만들어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및 친환경 가정 식단 개발에 참여하고, 또한 몇몇 지부의 농산물을, 필요로 하는 지부와 연결해 주는 사업을 시행해 왔습니다. 2002년 3월에는 창립 78주년을 맞아 유기농산물 판매사업의 일환으로 전시 및 먹거리 행사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건강한 먹거리로 우리와 한울님을 서로 살리자’는 선언을 하고 건강한 먹거리 소비운동을 펼쳐나갔습니다.
2002년 8월에는 친환경식단을 만들어 24개 지부를 교육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매월 첫째 수요일은 음식물 쓰레기 없는 날로 정해서 실천했으며 매주 금요일은 냉장고 정리의 날로 정해 식품보관 목록표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냉장고는 양면적인 가전제품으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신선한 음식 섭취를 오히려 방해하는 장치입니다. 냉장보관 목록표 작성은 아주 긴요한 먹거리 운동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 역시 식단을 마련하고 이에 기초해서 식품구매와 조리, 그리고 음식물쓰레기의 처리과정이 일관성 있게 연동될 때 제대로 밥상관리가 되는 것이라 여기고 음식물 쓰레기 배출시 이물질을 철저히 분리해 내는 일도 여성회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성회의 실천은 먹거리 문제 전반으로까지 적극적 차원으로 확대되지는 못하였습니다. 도농직거래를 위한 생협의 설립이라든지, 우리 식단에 올라오는 먹거리의 안정성 문제, 그와 관련된 제도적 개선의 문제, 로컬푸드, 도시농업, 식량주권 등의 문제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천주를 일상생활 속의 개벽운동으로 전개하여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에너지와 먹거리’ 문제라고 할 때, 먹거리 문제와 관련한 실천은 여성회가 가장 앞장서야 하는 문제이며, 이에 대한 보다 많은 공부와 실천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3) 한울연대의 빈그릇운동과 소박한 밥상
2010년 ‘천도교 수련과 영성에 바탕한 생명평화 실천’을 목적으로 탄생한 천도교 한울연대는 시천주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가장 중시합니다.
음식과 관련해서 전개한 운동이 2011년부터 시작된 ‘시천주 빈그릇 운동’ 입니다. 이 운동은 “물 한 방울, 밥 한 숟갈도 천지부모 젖인 양 고맙게 받고 공손하게 씹어 감사히 삼키겠습니다. 내 안의 한울님 모시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시천주 빈 그릇] 운동에 참여합니다.”라는 다짐을 하고 아래의 7가지 규칙을 지킵니다.
1) 먹을 만큼만 담고 음식을 남기지 않는다.
2) 음식 앞에서 식고를 하고 꼭꼭 오래 씹어 먹는다.
3) 음식점에서는 안 먹을 반찬은 반납하고 밥이 많으면 미리 덜어낸다.
4) 남은 반찬이 있는 이상 빈 반찬그릇을 추가 시키지 않는다.
5) 육식보다는 채식을, 천천히 먹고 소식을 한다.
6) 튀기거나 굽기보다 자연식과 전체식을 즐긴다.
7) 냅킨을 함부로 쓰지 않고 주머니 손수건을 꺼내 쓴다.
한울연대는 음식물쓰레기를 줄이자는 차원과는 또 다른 시각에서 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환경운동이면서도 한울모심의 천지부모 운동이라고 할 것입니다. 빈 그릇 운동이되 ‘시천주’ 빈 그릇 운동인 것입니다. 시천주의 가르침을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시키면서 ‘시천주’가 하나의 사상에 머물지 않고 나를 바꾸고 우리 사회를 바꾸는 실천적 진리로 거듭나게 하자는 것입니다.
2011년부터 시작한 소박한 밥상 운동은 구제역 파동 이후 공장식 축산으로 생산되는 고기를 먹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라는 성찰에서 시작된 운동입니다. 물론 이것은 다른 종단에서도 많이 하고 있었던 운동입니다만, 한울연대에서는 보다 근본적으로 소박한 밥상이야말로 나를 공경하고 생명을 공경하고 한울을 공경하는 첫걸음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방사능오염식품과 유전자조작식품이 밥상에 오르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실천이 무엇인지를 모색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나라는 콩의 90% 이상을 수입하고 있으며, 그 콩은 대부분 GMO 작물입니다. 그 콩은 직접 소비되지는 않지만 가공식품으로 즉 두부와 콩나물과 식용유, 그리고 두유 등으로 소비되고 있습니다. 가공식품의 경우 원산지표시의무가 없기 때문에 철저하게 따져보기 전에는 GMO 콩을 피할 길은 거의 없습니다. 이는 옥수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밥상은 이미 GMO에 의해 점령당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런 불편한 사실을 정작 많은 주부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울연대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수련을 중시하고 시천주의 한울모심을 모든 생활 속에서 구현하려고 하는 측면에서 여타의 환경단체와는 차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직력이나 전문활동가, 예산 등의 부족으로 실행력에 있어 많은 한계를 노정하고 있습니다.
4. 천도교인들의 과제
많은 천도교인들은 앞절에서 언급한 대로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서 한울님을 공경하고 음식을 남기지 않고 근검절약하며 소박한 삶을 실천하는 부분에서는 잘하고 있는 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개인의 삶의 문제를 넘어 우리 시대의 문제와 연결해서 먹거리 문제의 심각성과, 그와 관련한 어떤 노력과 실천이 요구되는지에 대한 생각으로까지는 나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히려 해월 선생님의 가르침은 ‘한살림’이나 ‘녹색당’을 비롯한 이웃 단체에서 더 잘 실천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먹거리 문제는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고 음식을 남기지 않는 실천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얼마나 많은 식재료가 대기업의 탐욕에 의해 오염되었는지, 음식이 어떻게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패스트푸드의 질낮은 먹거리가 식단을 점령하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기존의 농업과 농촌공동체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또 공장식 농업에 의해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공장의 부품과 같이 살다가 살육되는 길을 가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른바 ‘음식문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해월 선생님의 경물(敬物) 사상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공장식 축산에 의해 잔인하게 사육당하고, 비인도적으로 도살되는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왜 사람들이 천도교를 알아주지 않냐’고 하면 그것은 정당할까요?
모든 삶에서 한울모심(시천주)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먹는 습관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습관이 바뀌어야 삶이 바뀝니다. 운전습관, 음주습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을 안 남기는 정도에 그쳐서는 안되고, 이 음식이 밥상에까지 오기까지의 전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윤리적 정당성을 논할 수 있으며, 스승님들의 가르침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교구와 수도원에서 먹거리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음식조절을 해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수련이 시천주의 한울님 모심을 온전히 체득함으로써 나를 올곧게 바로세우고 수심정기, 심화기화를 하게끔 하는 공부라면 먹거리 문제를 도외시 하고 진행될 수 없습니다. 또한 모든 수련은 몸공부로부터 시작됩니다. 몸공부의 가장 근본은 음식조절입니다. 어육주초를 금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식재료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수도원에서 직접 재배된 또는 자연농법으로 생산하고 있는 생산자와의 직거래를 고민해야 합니다. 천도교 수운회관 내에 또는 여성회에서 직접 운영하는 유기농 매장, 직거래 매장을 운영할 수 있으면 제일 좋겠지요. 수련생들은 평소보다 절반 정도 적게 먹으며 커피 등을 삼가면서 몸을 비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식단 역시 쌀밥을 피하고 현미잡곡밥으로 바꾸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음식 습관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생활의 많은 부분이 개선됩니다.
농산물의 자급에 대해서도 좀더 고민을 해야 합니다. 최근에 ‘도시 농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합니다. 베란다나 옥상만 잘 활용해도 최소한의 채소, 야채 등을 직접 재배해서 먹을 수 있습니다. 일본에는 ‘반농반◯’ 이라는 운동이 있습니다. 지속가능한 농사를 짓는 작은 규모의 생활을 기반으로, 천부의 재능(잘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일)을 살려 사회적인 일을 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살리는 삶의 방식이, 농적(農的) ‧ 자급적 감성이 미래를 열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또한 지금 ‘한살림’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밥상개혁운동’에 대해서도 인식을 같이 하고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의 교육 문제, 정서 문제에서 먹거리 문제, 붕괴되어가는 밥상공동체의 회복 문제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천도교 차원에서는 한울님이 감응하는 밥상운동. 한울님이 한울님을 먹는 운동. 밥상에서 한울님을 모시고 한울님을 북돋는 운동을 전개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다 적극적 실천으로는 거대기업, 종자회사의 횡포에 대한 감시와 견제, 북한과 세계의 빈곤과 굶주리는 아이들의 문제를 ‘푸드 정의(正義)’의 문제에서 접근하는 문제, 건강하고 풍족한 먹거리에 대한 접근성과 자발적인 선택을 시민의 기본적 권리로 인식하고 식품안전 관련한 제도적 개선, 특히 유전자 조작식품이나 방사능 오염으로부터 국민의 건강권을 지키는 제도적 실천에 대해서 고민을 해야 합니다. 또한 에너지와 관련하여 온실가스를 줄이는 운동, 세계 식량체계의 독점에 대항하여 식량자급 기반을 확보하고 식량주권을 지키는 행위이자, 전 세계의 맛을 표준화 획일화시키는 패스트푸드 공화국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로컬푸드’에 대한 고민과 식량주권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5. 맺으며
천도교는 스승님의 좋은 가르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그것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으로 연결해 내는 데에는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합니다. 시대적 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교리에만 매몰되어 있는 듯합니다. 먹거리에 한정해서도 어떤 종단보다도 훌륭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현재의 푸드시스템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인해 ‘음식문맹’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천도교가 외면당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시천주, 사인여천, 경물, 인내천 등의 사상적 구호만 남발하며 이런 좋은 사상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고집스럽게 목소리만 높이는 모습은 결코 닮고 싶은 새로운 주체의 모습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인격 안에서 그리고 삶 속에서 향기로 피어날 때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주변이 저절로 따르고 싶을 것입니다.
이런 자각에 의해 저는 최근에 술을 끊었습니다. 술은 저의 기운을 흐리게 하고 마음을 흩뜨릴 뿐 아니라 생활 리듬을 깨뜨림으로써 제가 원하는 삶을 가장 많이 망쳐왔다는 통렬한 반성에 의한 것입니다. 또한 저는 고기를 끊기로 다짐합니다. 제작년 구제역 파동 이후에 한 일년간 안먹다가 작년부터 다시 조금씩 먹었지만 역시 편치는 않았는데, 이 글을 준비하면서 다시 먹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공장식 축산으로 잔인하게 사육되고 비인도적으로 도살된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그 부정의한 폭력과 죽임을 용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해월 선생님의 가르침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내가 먹는 것이 바로 나’(I am what I eat)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성이라는 것이 ‘다른 존재의 고통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라고 할 때, 영성을 먹거리를 빼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몸과 마음이 맑아지고 밝아지는 데 직접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 또한 먹거리라는 점은 앞에서도 자세히 언급했습니다.
결국 핵심은 생활양식, 삶의 방식의 변화입니다. 이것은 결국 식생활 습관을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개벽’은 식생활 습관을 바꾸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먹거리 문제를 단일한 문제, 음식물 쓰레기를 줄인다든가 ‘불량식품 근절’ 차원의 문제로 보아서는 해결이 안됩니다. 삶의 근본적 전환의 차원에서, 나아가 문명의 근본적 전환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이 시대 문제의 가장 중심에 먹거리와 에너지 문제, 즉 생명의 문제가 있습니다. 먹거리와 에너지 문제를 간과하고 개벽을 단지 수련의 차원에서만 논하거나 정치 제도적 개혁의 차원에서만 접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 애벌레가 나비로 탈바꿈해야 하는 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다른 선택은 존재합니다. 이제 다른 결단이 필요할 때입니다.
“나비가 되면 누구도 잎을 먹지 않는단다. 꽃에 있는 꿀을 찾게 되지. 그리고 꿀의 달콤함에 취해 춤도 춘단다. 그러면 꽃이 열매를 맺지.”
첫댓글 “나비가 되면 누구도 잎을 먹지 않는단다. 꽃에 있는 꿀을 찾게 되지. 그리고 꿀의 달콤함에 취해 춤도 춘단다. 그러면 꽃이 열매를 맺지.” 참, 감탄스런 말입니다. 영성이 개화되면 이렇게 풍류의 멋을 즐기며 지상천국을 맞을 수 있겠군요..
역쉬 동학강좌는 용휘대표님 호소력이 대단합니다
몸과 마음이 맑아지고 밝아지는데 직접적인 작용을 하는것이 것이 먹거리라는데 절대 공감합니다
생명의 흐름이 한차원 밝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폭염의 여름햇살을 비껴내고 이제 바야흐로 가을햇살의 때가 이르렀군요....
순례에 이어 숨 돌릴 틈도 없이, 강행군과도 같이, 가을햇살 만방에 비추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