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9. 부활주일예배설교
빌립보서 3장 10~16절
부활 참여자의 행동거지
■ 행동거지는 그 사람의 입장과 태도를 볼 수 있는 외적 잣대입니다. 물론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거나, 상대방을 속이려는 의도에서 하는 행동거지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그 속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의 행동거지는 그의 속을 드러내는 외적 표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부활에 참여하는 자로서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를 밝힙니다. 그래서 어떤 태도로 살고 있는지를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의 입장, 그의 고백을 보여주는 그의 행동거지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성경에 기록되어 있겠죠?☺ 오늘은 그의 입장과 고백이 담긴 행동거지를 통해 부활의 의미와 그에 따른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묵상하겠습니다.
■ 본문에 따르면, 바울에게는 거룩한 소망이 있습니다. ‘부활에 이르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부활에 이르고 싶다는 소망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번역본으로는 바울의 신앙고백에 문제가 될만한 신학이 담겨있습니다. ‘부활에 이르고 싶다’는 부분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내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기쁘게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서는 부활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이고, 더욱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광스러운 부활이 된다며 자랑스럽게 확신했습니다. 그러니 부활은 당연히 확보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부활에 이르고 싶다고 한 것은 모순된 신학이자, 문제 있는 신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앞의 10절과 뒤의 12절을 함께 읽으면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의 관심은 분명 부활입니다. 그러나 심심한 부활이 아닌, 의미있는 거룩한 부활을 맞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맞이한 바로 그 부활을 맞고 싶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부활의 과정을 서술합니다. 그것이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입니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은 “그 고난”이라고 명시합니다. 이는 단순한 죽음, 자연사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고난 중의 죽음, 죽임당한 죽음이 “그의 죽으심”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 고난의 죽음을 본받겠다는 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이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래야 바울이 기대하는 의미있는 거룩한 부활을 맞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대하는 바울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행동거지를 12절로 정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사실 바울에게 부활은 이미 확보된 상태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8장이 설명하고 있다시피, 누가 뭐라 해도 얻은 구원과 부활은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미 확보된 구원과 부활로 인해 안심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안일의 태도를 경계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의인으로 인정해 주셨을 뿐, 의인은 아니기에 의인으로 인정해 주심에 감사한 삶을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얻은 것도 아니고, 이룬 것도 아니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얻어야 할, 그 이루어야 할 거룩을 위해 달려간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바로 ‘칭의’에 대한 고백이고, ‘성화’에 대한 선언입니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소망입니다.
■ 이에 이어지는 바울의 거룩한 부활을 맞기 위한 거룩한 태도로 13절과 14절을 설명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부활을 확신하지만, 거룩한 부활, 의미있는 부활을 맞고 싶은 그의 건강한 의지는 지위, 명예, 소유 등과 같은 소위 세상적 성취와 가치들을 염두에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잊어버리고”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가치는 오직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내리신 소명과 사명에 집중하여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달려가노라”의 의미입니다.
한 번 더 강조하자면, 이것은 세상적 가치를 품고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버리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명과 사명을 위해 억지로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기대하며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의 태도는 바울만 취할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15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3절과 14절의 잊고 달려가는 태도는 바울만이 아닌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이 취해야 하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여기 “온전히 이룬”이라는 의미는, 믿음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여부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부름의 상, 부활의 영광을 위해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혹시 바울과 다른 부활 태도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문제가 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이끌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부활을 맞기 위한 온전한 믿음으로서의 거룩한 입장과 태도를 취합니다. 그리고 이를 실천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거지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16절입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무슨 뜻인가요? 수준을 구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형편을 고려해서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같은 수준끼리 모이는 것,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모이는 것은 모두가 옳지 않은 행동거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준을 구분해서 끼리끼리 담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는 소외라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편을 고려하지 않는 것 또한 평등이 아니라 무시라는 폭력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16절에서 제시한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하자”는 것은 정의에 기초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부활에의 참여이고, 믿음의 행동거지입니다.
■ 그래서 부활 참여자로서 바울의 행동거지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정의의 행진’ 그리고 ‘거룩한 여행’>
바울은 이전 것, 즉 세상적 가치인 지위, 명예, 소유 등을 가차 없이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그분의 고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분의 고난은 제국주의를 거부하는 비폭력적 행진이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 입성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던 민중들에게 보여주셨던 모습이셨습니다. 결국 제국주의 규율을 어긴 대가로 받으신 것이 십자가 짊어짐이셨습니다. 그리고 죽임당함으로서의 죽음이셨습니다.
바로 이 정의의 행진을 만드시고, 사명자를 모집하신 거룩한 여행에 기꺼이 참여한 이가 바울이었습니다. 이 여행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변화시키셨듯이 바울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참으로 이 여행은 지금도 유효한 여행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개인적 변화의 길이자 공동체의 변화를 일으키는 부활의 권능입니다.
그래서 묻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 행진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어느 쪽 여행에 함께 하시겠습니까? 아, 이렇게 묻기보다는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여행을 하고 있습니까? 어느 쪽 행진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정의의 행진’이자 ‘거룩한 여행’을 하고 계시는지, 비겁하고 비열한 행진이자 세상적 여행을 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십자가 앞에 머뭇거리며 망설이고 계신지, 아니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지나시는지, 어떤지 궁금합니다.
■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아 우리의 부활 신앙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헤아려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디에 이르렀든 부활의 영광, 그 푯대를 향하여 함께 달려갔으면 좋겠습니다. 가는 길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지만 기꺼이 어깨동무하며 함께 달려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거룩한 부활의 영광을 함께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