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11월 15일 수요일 맑음
“하나님 우리 충희가 내일 수능을 봅니다. 충희에게 지혜를 주셔서 수능 잘 보게 해 주시옵고, 원하는 대학에 입학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어려운 문제를 만나도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풀어나갈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모처럼 가족이 모여서 간절한 마음으로 식사 기도를 드렸다.
때가 때이니만큼 모두가 숙연하게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충희야. 그동안 수고했다. 이젠 마음 편하게 기다리는 거야. 오늘 저녁 아무 생각 말고 푹 자야 돼” 충희의 표정이 밝아서 마음이 흐뭇했다.
대전 갈 생각으로 아침부터 서둘러 창고 시멘트 작업을 마쳤다. 주욱 둘러보니 영 아니다. ‘이 걸 어떡한다 ? 자꾸 보면 적응이 될래나 ?’
화장실 타일 붙이러 온 사장님 눈에도 정말 아닌가 보다. “저걸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맡기셔야죠. 우레탄 쏜 거 칼로 떼어내시면, 실리콘으로 쏘아 깔끔하게 해 드릴 게요” “그럼 인건비가 들어가잖아요. 얼마면 되죠 ?” “실리콘이 많이 들어가는데.... 실리콘 사 주시고 인건비 15만원만 주세요” ‘그럼 20만원은 들겠구나. 기술자들이 창고 한 바퀴 실리콘 쏘는 건 한 시간이면 끝낼 텐데 꼭 하루 일당을 달래네’ “칼로 떼는 것도 큰 일이고, 이왕 끝낸 거 그냥 두죠. 보기 싫어도 내 손으로 해봤다는 게 중요하죠” ‘인건비가 비싸서 뭐만 했다하면, 백만원은 보통이니 사소한 일은 내손으로 해야 겠다. 우레탄 쏘는 거와 시멘트 미장은 해봤으니 다음은 용접을 해 볼까 ?’ 오후에는 창고에 들어갈 물건을 나르기 시작했다. 먼저 매실작업을 할 때 쓰는 물건들을 찾아 모아 놓으니 그럭저럭 볼만 하다. 대전으로 출발하려 준비하다 보니 장모님께서 화목보일러 불을 붙이시려 한다. 장모님께서 힘들어 하신다. ‘저 것도 끝내고 출발하자’ 보일러 불 붙이고 닦고 하니 벌써 어두워진다. 날이 너무 짧기도 하지만 어영부영 시간 보내길 잘하는 내 버릇이 미워진다.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데 늦장을 부렸냐 ? 멍청아’
충희하고 같이 밥을 먹고 싶은데, 시간이 촉박하다. 서둘러 출발했는데, 평일인데도 고속도로가 막히네. 저 차들 모두가 수능 보는 자식들 보러 가나 ?
‘자식들 교육보다 중요한 건 없을 테지. 모두 내 마음 같을 거다’
그나마 식구들이 기다려 줘서 식사를 같이 할 수 있었지.
식사 후에 안사람과 앉아 내일 일정을 상의하는 데 “쟤가 내일 준비물을 다 챙겼나 모르겠네” 충희는 날 닮아 덤벙대기 일 수니까.... 아니나 다를까. 컴퓨터 펜이 쓰던 거 단 하나, 수정 테이프도 하나다. 만일 시험장에서 고장이라도 난다면.... 급하게 문구점으로 가서 두 개씩 사왔지.
“여보세요. 죽집이죠. 아까 주문한 거 몇 시쯤 찾으러 가나요 ?” “죽, 웬 죽 ?” “불낙죽. 불악 볼라 ? 아침하고 점심에 그 걸 먹어야 된대” “허, 누가 그래 ? 원 별....” “다들 그래” 비래초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구먼. “엄마는 참 이상한 거 먹으라고 해. 왜 그런지 몰라.” 충희도 웃는다. 그래도 에미의 정성이 그러하다면 궂이 막을 건 없겠지. “9시에 찾으러 오랬지 ?” 30분 전, 대기상태에 들어갔다.
그 때다. “에이, 수능이 연기가 됐대” 충희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 게 무슨 소리 ? 얘가 너무 긴장이 돼서 헛소리를 하나 ?’ 믿어지지 않는 소리였다. “이 거 봐요. 진짜지” 핸드폰을 내민다. “어라 진짜네” 안사람도 자기 핸드폰을 들쳐 보더니 “정말이다. 일주일이 연기 됐대. 이러면 어쩌나” 죽집으로 전화를 건다. 우선 그 게 급하긴 급하지.
“어떡하죠. 취소할 수 있나요” “취소는 ? 30분 전인데.... 그냥 먹어야지” “할 수 없죠. 취소해 드릴 게요” ‘햐, 그 죽집도 대단하다’
“가만있어 봐. 그럼 학교는 ?” 교무부장답게 학교 걱정이 대단하네.
불난 집에 불이 잦아들자 일 순간 고요가 찾아 온다. “뉴스 좀 봐”
뉴스 속으로 빠져 들었지. 지진 피해가 대단하더라. “난 못 느꼈는데.... 재난 문자가 와서 그런가만 했었지” “난 수업 중에 느꼈었는데....” “청양은 아무런 느낌이 없었어. 나만 모르고 있었네”
그때부턴 허탈감이 찾아 오더라. ‘내일이 수능이라고 잔뜩 긴장했었는데....’
모두 늘어진다. 충희가 많이 아쉬워 한다. 좋다고 신나는 거 보다는 다행이다.
“나만 좋네” “왜 ?” “당신 한 번 더 보고....” 우리 마누라 예쁜 소리도 할 줄 안다.
“아빠는 괜히 헛 고생 하셨네요” 충희가 나를 위로한다.
“왜, 우리 충희 얼굴 한 번 더 보는 게 얼마나 좋은데....” 같이 웃었지.
공황상태가 찾아 오더라.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충희나 달래줘야지. “충희야. 고 3들 모두가 똑 같애. 누가 정신적 안정을 먼저 찾느냐가 중요해. 네가 부족한 과목 조금 더 공부하라고 시간을 주시는 거야. 마음 안정시키고 열심히 하자” “네 그럴 게요” “오늘은 공부하기 힘들 거다. 일찍 자라” “나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조금 더 공부하고요” ‘자식, 착하지. 우리 아들’
방으로 들어가니 안사람이 불도 꺼놓은 채 누워있다. “아무 것도 못하겠어. TV도 못보고 있잖아” 그럴 거다.
“근데 내일이 수능이라고 교과서, 참고서 다 버린 애들은 어떻게 해 ?”
“뭐, 충희는 ?” “걔야 동작이 느린 애니까....” “그럴 땐 동작이 느린 게 천만다행이다” 함께 웃었지.
아마 오늘 밤, 잠도 별로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