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반드시 그 만절(晩節)에서 보아야
『효종대왕 초기에 백강 이경여 상공이 위리안치(圍籬安置)에서 돌아오자 내가 또 가서 뵈었는데, 공의 모습이 진정 회옹<晦翁, 주자(朱子)>이 말한 ‘늙은 잣나무는 불에 타고 도끼에 찍힌 나머지 그 생생한 모양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우뚝 서서 쓰러지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았으니, 옛사람의 ‘사람은 반드시 그 만절(晩節)에서 보아야 한다.’는 말이 진실이었다.』이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은 ‘백강선생문집서(白江先生文集序)’ 기록된 말씀이다.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젊은 시절에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타산적이며 근시안적인 계산으로 일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사람을 제대로 알고 평가하고자하면 반드시 그의 말년(末年) 즉 만절을 보아야 제대로 알 수가 있는 것인데, 평소에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인 생각으로 계산만하며 살아가면 삶의 깊이가 없고 말년에는 그의 인생에서 인간다운 지조(志操)와 품격(品格)을 찾아 볼 수가 없어 그 인생 자체가 비열하고 추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젊을 때부터 오로지 견득사의(見得思義, 이익을 눈앞에 두면 그것이 과연 의로운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라)하며, 인륜도의(人倫道義)와 의리(義理)만을 바라보고 이를 삶의 지표로 삼아서 실천하며 살아가야 비로소 그 만절이 아름답고 인간다운 지조와 품격이 풍겨날 수가 있는 것이다.
생각건대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어릴 때부터 성심(聖心)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하여 쉼 없이 성학(聖學)에 열중해야 하는 것인데, 백강 이경여 선생은 일찍이 효종대왕에게 병자호란 등으로 인한 나라의 재변(災變)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임금이 무엇보다 성심(聖心)을 기르고 성학(聖學)에 열중할 것을 강조하여 권면한 바가 있으니 그 요지(要旨)는 이러하다.
“성심(聖心)을 함양하는 방도는 반드시 발동되기 전에 지키고 발동된 뒤에 살피며 미리 기필(期必)하지 말고 잊지도 말아 보존해 마지않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비고 밝은 한 조각 마음이 그 속에 거두어져 있어 북돋는 것이 깊고 두터우며 이(理)가 밝고 의(義)가 정(精)하여 경계하고 삼가고 두렵게 여기는 것이 잠시도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공부가 어찌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겠습니까.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천덕(天德)·왕도(王道)는 그 요체가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데에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홀로 있을 때를 삼가지 않아서 유암(幽暗)하고 은미(隱微)한 데에 문득 간단(間斷)되는 곳이 있다면 어떻게 날로 고명(高明)한 데에 오르겠습니까. 이른바 이를 향한 성학(聖學)의 공부는 장구(章句)나 구독(口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깊이 몸 받고 그 지취(旨趣)를 밝혀서, 자신에게 돌이켜 의리(義理)의 당연한 것을 찾고 일에 비추어 잘잘못의 기틀을 증험(證驗)함으로써,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참으로 아는 동시에 미리 생각하여 익히 강구하고 평소부터 대책을 세워두어야 합니다.”<1653년 (효종 4년) 7월 2일, 백강 이경여 선생, '재변을 이겨내는데 힘써야할 21항의 상차문(上箚文)’ 에서>.
2026. 6.30. 素澹
백강선생문집서(白江先生文集序)
······························································ 우암 송시열 선생
백강 이경여 선생의 문집《백강집(白江集)》은 모두 15편인데, 소차(疏箚)가 가장 많다.
아, 공(公)은 장년(壯年) 적에 혼조(昏朝 광해군 때를 말함)를 만나 몸을 조촐히 하여 스스로 소외(疎外)되도록 하였으므로 나타낼 만한 일이 없었고, 인조반정 뒤에야 밝은 조정에 벼슬하여 그 의논과 계책이 여러 사람의 추앙을 받는바 되었으며, 효종 초년에는 화협된 보필이 주(周) 나라의 어진 구신(舊臣)들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공이 출신(出身)한 이후부터 연이어 양구(陽九)의 액운(厄運)1)을 만났고 대배(大拜)했을 적에는 국가가 극도로 쇠약해져서 아무리 한사(寒士)의 아내로도 그 궁하고 두려움을 감내할 수 없었다. 아, 부모의 병이 위급한 때에 어찌 어떻게 할 수 없다고만 핑계할 뿐, 방문(方文)을 찾아 약 쓰기를 힘써서 만에 하나라도 요행을 바라지 않을 수 있으랴. 만약 오장(五臟)을 치료했는데 육부(六腑)가 터지고, 작은 종창(腫瘡)을 수술했는데 큰 종창이 생긴다면 끝내 죽을 사람이라 도저히 되살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방문과 기술이 나쁜 탓만도 아니다. 이 같은 때에 공이 지혜를 다하고 몸을 바쳐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니 ‘비바람이 몰아치니, 나의 울음소리 애절하다.2)’는 실정을 상상할 수 있다. 옛사람이 ‘무후<武侯, 제갈량(諸葛亮)의 시호>의 출사표(出師表)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참으로 사람의 마음이 없는 자이다.’ 했는데 이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공을 알기에는 오히려 부족하다. 공의 시종을 들어 논한다면, 공은 이이첨(李爾瞻)의 인친(姻親)으로 평소 그의 신임을 받은 터이라, 그가 기어이 제 편으로 끌어넣으려 했으나 끝내 공을 꺾지 못했다.
천지가 뒤집히는 날(병자호란)을 만나서는 오랫동안 심양(瀋陽)에 억류되어 있으면서도 위협에 굴복하지 않았고, 인조가 권도(權道)로써 봉림대군을 저위(儲位, 동궁)로 세울 적에는, 경법(經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홀로 고집, 큰 화복(禍福)을 돌보지 않고 먼 곳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죽을 고비를 수없이 겪으면서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이는 옛사람도 어렵게 여긴 바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공을 알기에는 역시 부족하다.
우리 효종이 성인(聖人)의 자질로 큰 뜻(북벌계획)을 분발하셨는데 일찍이 공의 소장(疏章)에 손수 비답하기를 ‘지극한 통한(痛恨)이 마음속에 있건만, 날은 저물고 길은 멀다.[지통재심 일모도원(至痛在心 日暮道遠)]’ 하였고 또 반드시 ‘대인선생(大人先生)’이라 호칭하였으니, 이 호칭은 공만이 효종에게 받은 것이었고, 딴 사람은 참여되지 못한 바이다. 아, 이것이야말로 공을 완전히 알았다 할 수 있다.
공은 일찍이 문예(文藝)로써 스스로 국한되지 않았고, 사람들도 문예로써 공을 추앙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의 문장은 명백 적절하여 후세에 전할 만하였으니, 당세의 아무리 뛰어난 문필이라도 감히 견줄 수가 없었다. 이번에 공의 셋째 아들 유수공(留守公, 강화유수) 이중 민서(彛仲敏叙 이중은 자)가 일찍이 태학사<太學士 대제학(大提學)>로 있을 적에 공의 주어문자(奏御文字)를 모았던 것을 정리해서 편질(篇帙)을 만들고 여러 작품을 붙여 간행하여 세상에 전파시킬 계획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공을 더 높게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세도(世道)를 위해서는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소시(少時)에 김 문경공(金文敬公, 신독재 김집)의 좌석에서 공을 뵙고 조용히 담화하였고, 또 바로 백강정사(白江亭舍)에서 매우 후한 대우를 받은 적이 있었다. 효종 초기에 공이 위리안치에서 돌아오자 내가 또 가서 뵈었는데, 공의 모습이 진정 회옹(晦翁, 주자)의 ‘늙은 잣나무는 불에 타고 도끼에 찍힌 나머지 그 생생한 모양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우뚝 서서 쓰러지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았으니, 옛사람의 ‘사람이란 반드시 그 만절(晩節)에서 보아야 한다.’는 말이 진실이었다. 그러나 내가 공을 경모(敬慕)함은 전혀 여기에만 있지 않다. 지금 이 서문에도 오히려 속에 있는 말이 다 언급되지 못하였다.
숭정 기원 후 갑자년(1684년, 숙종10년) 3월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주(註) 1]양구(陽九)의 액운(厄運) : 4560년이 대한(大限)이 되고, 이 기간 내에 456년 씩이 소한(小限)이 되는데, 이 기간들이 끝나는 무렵에는 한재(旱災)가 극심하다고 한다.《太乙統宗 卷2》
[주(註) 2]비바람이 …… 애절하다 : 《시경(詩經)》 빈풍(豳風)에 “나의 둥우리 아직 완성되지 못했는데, 비바람이 몰아치니, 나의 울음소리 애절하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