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공신 위씨 오덕(五德) 출생지
성균관 진사 위곤(魏鯤)의 오자(五子) 판사공 위덕홍(魏德弘) 군자정, 청계공 위덕의(魏德毅) 병조참의 죽천사 배향, 운암공 위덕관(魏德寬) 부호군, 호조판서공 위덕화(魏德和) 죽천사 배향, 안항공 위덕후(魏德厚) 제용감판관 등 오덕(五德)의 출생지이자 장흥위씨 관산파의 성지(聖地)가 된다.
●독립지사 덕암(德菴) 위석규(魏錫奎) 출생지
선생은 1883년 이곳에서 출생한 후 1906년 을사늑약으로 국외로 망명하여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3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87년 건국훈장애족장(제1668호)을 서훈하였고, 장흥군 주간으로 천관산 장천동 입구에 의열비를 세웠다.
●성균관 고문 의재(毅齋) 위석한(魏錫漢) 출생지
선생은 성균관 고문, 유도회 총본부 고문을 역임하여 유도진흥에 공헌하였고 오덕생가 터 회복과 청계공 위덕의를 광주 황산사(黃山祠)에 존재 위백규 선생을 곡성군 영귀사(詠歸祠)에 배향케 하는 등 숭조돈목(崇祖敦睦)에 기여했다.
이 터의 최초 주인은 고려 때 장흥임씨의 시조 임호(任顥)이다. 1040년경 이곳에 터를 잡아 임씨들의 발상지이며, 17대 인종왕비인 공예태후의 탄향지다. 정확한 연역(演繹)은 알 수 없으나 장흥임씨들은 고려가 폐망하기 前인 1300중반 년까지 300여년 정도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집터의 두번째 주인은 탐진최씨로, 조선 초기까지 150여년 거주하였다.
세번째 주인은 장흥위씨다. 1500년경 최수동(崔壽東)의 사위인 강릉참봉 위진현(1483~1564)이 정착한 후 아들 당곡 진사 위곤(1515~1582)이 이곳에서 아들 덕홍(德弘), 덕의(德毅), 덕관(德寬), 덕화(德和), 덕후(德厚) 등 5형제를 낳아 가문(家門)이 중흥(中興)하였다. 청계 위덕의의 아들 국천(菊泉) 위정헌(1570~1643)이 1630여년까지 거주하다가 이후 거소를 인근 옥산으로 옮겼다. 장흥위씨는 이곳에서 130여년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네번째 주인은 1630~1790년까지 어느 성씨가 거주하였는지 알 수 없다. 160여년 가량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번째 주인은 장흥위씨다. 관암(冠菴) 위상정(1732~1799)의 차자(次子) 위도방(1773~1831)이 1790년 안팎에 거주하여 후손들이 1916년까지 120여년 동안 거주하다가 성산리 선자동으로 잠시 거소를 옮겼다.
여섯번째 주인은 수원백씨가 1916~1950년간 34년 거주하였다.
일곱번째는 주인은 장흥위씨다. 관산읍 성산리 선자동에서 20여년을 거주하던 의재(毅齋) 위석한(1900~ 1982)은 광복 후 1946년 현 당동마을 효자송 주변 새터로 이사와 거주하면서 지난 유년시절에 거주했었던 오덕 생가를 매입할 기회를 보다가 1950년경 백우인의 딸 백몽임으로부터 매입하였다. 현재 의재 선생의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다.
우리가 어렸을때 백몽임씨를 몽이리고 놀리고했었는데 ?
위문으로써는 고마운분이에요 감사합니다
글 잘보고 위문중사 조상님들의 발자취에 대해 많은걸 공부하고 있어요.
의미깊고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위대한 터로군요.
제가 보기에도 범상치 않더군요. 자세한 기록에 머리에 쏙쏙 들어옵니다.
백몽님씨는무슨일만있으면물어볼려고나의선친에게오셨지
발이달도록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