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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장 주석
중풍병자를 고치심 (마태복음 9:1-8)
본 장(章)의 첫 구절은 바로 앞에 있는 8장의 끝 부분으로 되돌아가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곳에는 가다라인들이 자기들의 돼지를 잃어 버렸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일행을 싫어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그가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 뒤를 이어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갔다"는 말씀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떠날 것을 명하였으며, 그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가 또다시 그들의 지방에 가셨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의 정의 ─ 그는 그들을 떠났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곳에는 오래 머무시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올바른 판단하에, 그는 자신을 싫어하는 장소와 사람들은 버리지만, 그가 머물러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에게나 장소에는 머무신다. "믿지 않는 자가" 그리스도와 "헤어지려 하거든 헤어지게 하라." 그러나 그것은 본인에게 위험한 일이다(고전 7:15).
2. 그의 참으심 ─ 멸시와 불순종을 인하여 그들이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했지만, 그는 떠나면서 그들을 파괴하기 위해 어떤 심판을 보내지 않으셨다. 그가 이마 마귀의 지배 아래 있었던 자들을 돼지떼 처럼 몰사시켰더라도, 그것은 그에게는 지극히 쉽고 정당했으리라! 실로 그들이 지은 죄악은 큰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제쳐두고 지나가셨다. 또한 성을 내시거나 비난하지도 않으시고 "배에 오르사 건너가셨다." 이날은 그의 인내의 날이었다. 그는 "사람의 생명을 파괴하러" 오시지 않고 구원하러 오셨다. 죽이려 함이 아니라 치유하시기 위해 오셨다. 복음의 시대에는 영적인 심판이 더욱 잘 어울린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일 후에 그리 오래되지 않아 로마인이 유대인과 더불어 시작하였던 그 피비리내 나는 전쟁시에 로마인들은 이 가다라인들이 살았던 가다라 성을 맨 먼저 포위하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를 내쫓은 자들은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면 화로다, 화로다!
예수님은 현재 그의 주요 거주지였던 "본 동네, 즉 가버나움"으로 가셨다(막 2:1). 그러므로 가버나움은 "본 동네"로 불리웠다. 그는 선지자는 자기의 "고향이나 본 동네"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친히 말씀하셨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으로 가셨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은 낮은 처지에 있었으므로 그는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것에도 만족하셨다. 본 장(章)에 기록된 모든 일들은 비록 복음서 기자들의 공관서 요람(要覽)에서 보면 다른 사건들도 사이에 들어가 있지만, 모두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여기에 함께 모아진 것이다. 가다라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떠날 것을 원하였지만 가버나움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모욕를 받는다하더라도, 그를 영화롭게 할 다른 사람들도 또 있는 법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지 않으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가버나움으로 귀환하신 후 맨 처음에 행하신 것은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것이다. 이것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살펴 볼 수 있다.
Ⅰ. 중풍병자를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온 "그의 친구들의 믿음." 그는 중풍병이 심했으므로 자기 힘으로 그리스도에게로 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남의 힘을 빌어야 했다. 절름발이도 그리스도께로 가면 거절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한다면 그는 우리를 영접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신앙에 주목하였다. 어린아이는 스스로 그리스도께로 갈 수 없지만 그는 그 아이들을 데려오는 사람의 신앙에 유의할 것이며, 그것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 즉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의 신앙과 마찬가지로 중풍병자 자신의 믿음을 "보셨다." 아마도 그의 병이 그의 지능을 손상시키고 그 행동을 방해하였을 것이지만, 예수님은 믿음의 습성을 보셨다. 그들의 믿음은,
1. 강력한 믿음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고칠 수 있으며 고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병든 사람을 그렇게 공개적으로 또한 그렇게 어려운 난관을 무릅쓰고 데려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2. 겸손한 믿음. 비록 병든 사람은 걸을 수 없었지만 그리스도에게 방문하기를 요구하지 않고 그에게로 데리고 왔다. 그가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보다 우리가 그를 기다리는 것이 더 합당하다.
3. 능동적인 믿음. 그리스도의 능력과 선하심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들은 병든 자를 "침상에 누이고" 그에게로 데리고 왔다. 그런 일은 큰 수고가 필요한 일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강력한 믿음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데 있어서 어떠한 장애물도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그의 은혜."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은 병든 사람에게는 최고의 친절함이었고, "그의 병중의 자리를 온전히 고쳐 펴시기에"(시 4:3) 족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은 그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이 가련한 병자는 스스로 말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께 환자를 데려왔던 자들도 입으로보다는 행동으로 말하기를 원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병든 자를 그리스도 앞에 두었다.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친구를 그리스도의 긍휼의 대상으로서 그에게 드러내는 일은 헛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불행도 죄와 마찬가지로 부르짖는다. 또한 자비는 정의에 못지 않게 그 부르짖음을 경청하는데 빠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친절한 호칭. "소자야." 고통받는 자에 대한 격려와 위로는 아들에게 대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임을 유의하라. 왜냐하면 고통은 부성적(父性的)인 훈련이기 때문이다(히 12:5).
2. 은혜스러운 격려. "안심하라. 그것에 대해 편안한 마음을 가져라. 걱정하지 말라." 아마도 이 불쌍한 병자는 자기 침상이 그들 앞에 내려지자 당황하였을 것이며, 이렇게 무례하게 인도되어 온 것에 대해 꾸지람을 들을까봐 두려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있다. 그는 그에게 "안심하라"고 명하고 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니, 그가 그리스도를 찾은 것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안심하라고 명하신다. 그후에 그를 치유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만나는 자들에게 선물을 주려고 하신다. 그 선물은 곧 그를 즐거이 찾으며, 즐거이 신뢰하는 은사요, 또한 큰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은사이다.
3. 그 격려에 대한 정당한 이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런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1) 그의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에 대한 서론으로서. "네 죄는 용서받았다. 그러므로 너는 고침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죄가 질병의 원인인 것처럼, 사죄는 질병으로부터의 회복이라는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죄는 용서되었으나 질병은 제거되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질병은 제거되었지만 죄는 용서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질병에서의 회복에 대한 위로도 받았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화목에 대한 위로도 받았다면, 그 위로는 히스기야와 같이(사 38:17) 우리에게 대한 참된 자비이다.
(2) "안심하라"는 명령에 대한 이유로서. "비록 내가 너를 치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네 죄가 사함을 받은 것을 확신하기만 한다면 너는 나를 공연히 찾지는 않았다고 말하겠지? 또한 네가 중풍병을 계속 앓는다고 할지라도, 죄 용서만도 위로에 대한 충분한 근거로서 여길 것이 아닌가?"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은혜를 통하여 사죄의 어떤 증거를 가진 자는 그들이 어떠한 외부적인 고통과 근심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안심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사야 33장 24절을 보라.
Ⅲ.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한 "서기관들의 공연한 트집"(3절). 그들은 "속으로 이르되," 혼자 은밀하게 중얼거리기를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라고 하였다. 하늘 나라의 능력과 은혜가 지옥의 적대감의 검은 점에 의해 어떻게 낙인이 찍혀 있는가를 살펴 보라. 그리스도의 사죄하심은 참람이라고, 칭해지고 있다. 난일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았던 그것은 오히려 참람한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임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죄를 용서하는 체하는 그들이 오히려 참람하다.
Ⅳ.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일을 계속하기 전에 이 트집에 부당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깨우쳐 주셨다.
1. 그는 "그들의 그러한 행동을 힐책하셨다." 그들은 비록 속으로 이 말을 했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의 생각들을 아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가 속으로 말하는 것을 완전히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생각은 은밀하고 갑작스럽지만 그리스도, 즉 영원하신 말씀(히 4:12, 13) 앞에서는 적나라하고 공개적이 된다. 또한 그는 "멀리서도 생각을 통촉하신다(시 139:2)." 그는 그들에게(단순한 사람은 말할 수 없다)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 안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하셨다. 여기에서 유일한 것은, 죄 된 생각에는 많은 사악이 있으며, 이것은 주 예수님께 대한 매우 적대적인 행위라는 사실이다. 그는 마음의 통치자이시므로 죄악 된 생각은 그의 권리를 침해하며 그의 점유를 교란시킨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유의하시며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신다. 그들에게는 "쓴 뿌리"가 놓여 있다(창 6:6). 마음에서 시작되어 거기서 끝나며 더 이상 나가지 않는 죄도 다른 죄만큼 위험스럽다.
2. 그는 "그들과 더불어 이 문제에 대해 논쟁하셨다:(5, 6절). 이곳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는 "은혜의 왕국"에서의 자기 권위를 어떻게 "주장하고" 있는가" 그는 "인자," 즉 중보자에게는 땅에서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심판을 위탁하시고" 그에게 이 권위를 주셨으니, "이는 그가 인자(人子)이기" 때문이다(요 5:22, 27). 만일 그가 분명히 "영생을 주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정말로 가지고 계신다(요 17:2). 그는 죄를 용서하는 권세도 가지고 있음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범죄는 제거되어야만 하는 장애물(bar)이며, 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하늘 나라를 결코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죄의 능력이 우리의 뼈 중의 뼈이신 "인자"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은 회개하려는 죄인들에게 얼마나 큰 격려를 주는가! 또한 만일 그가 "세상에서도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아버지의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신"그에게는 그 권세가 얼마나 더하겠는가!(행 5:31).
(2) 그는 자연의 왕국에서 지니고 있는 능력에 의해 은혜의 왕국의 능력을 어떻게 "입증하고" 있는가? "일어나라 걸어가라"는 말보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이 더 쉽지 않으냐? 그는 선지자로 선포되었든지 하나님으로 권위가 인정되었든지 간에 병을 고칠 수 있는 자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죄를 사하실 수 있다.
[1] 이것은 그리스도가 신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일반적인 논증이다. 그의 이적, 특히 그의 이적적인 치유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그의 대해 말을 사실로 확증한다. 그의 치유하심에서 드러난 "능력"은 그가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증거 하였다. 그것들에 나타난 "긍휼"은 그가 "고치고 구원하려"고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입증하였다. 진리의 하나님은 거짓에다 그의 도장을 찍지는 않을 것이다.
[2] 그것은 이 경우에 특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풍병은 죄라는 병의 한 징후에 불과했다. 이제 그는 그러한 징후의 즉각적인 제거에 의해 근원적인 질병을 실제적으로 치유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나게 하셨다. 이와 같이 죄와 질병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형벌을 없이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죄를 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서기관은 법적인 의로움에 서 있었고 거기에, 자신들의 신뢰를 두었으며, "죄의 용서"라는 가르침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그 가르침을 영화롭게 하였으며,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려는" 사명으로 세상에 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Ⅴ. 병든 사람을 즉각적으로 치유하심. 그리스도께서는 그들과의 논쟁을 그치시고 돌이켜 그 병든 사람을 말씀으로 치유하셨다. 아무리 필요한 논쟁이라도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손이 하려고 발견한 선행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치유하는, 소생시키는, 강하게 하는 능력이 이 말씀에 수반되어 있다. "그는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7절).
1. 그리스도께서 그의 "침상을 가지고 가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가 "완전히" 완쾌되었다는 것과 그는 더 이상 침상 위에 누어서 옮겨져야 하는 처지에 있지 않다는 사실과 또 그는 침상을 "가지고" 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2. 그가 그를 "집으로" 보낸 것은 그가 오랫동안 짐이 되어 왔던 가족들에게 축복이 되게 하려 함이었다. 또 전시효과로 자기 곁에 오래 있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런 일은 사람에게서 오는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라면 능히 할 일이었다.
Ⅵ. 이 사건이 무리들에게 끼친 인상(8절). 그들은 "이를 보고 두려워하였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의 모든 이적 기사는 우리의 마음을 넓게 열어 오직 놀라운 일을 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불쌍한 사람에 행한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다른 사람의 긍휼은 우리의 칭찬이 되어야 하며 또한 우리는 그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가 지체가 되기 때문이다. 비록 무리들 중에 적은 수효만 그리스도를 믿거나 따르려고 할만큼 정도로 확신했지만 그들은 그를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찬미하지 않고 단지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찬미를 드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은 선을 행하기 위해 "사람에게 주신" 모든 능력을 인하여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모든 능력은 원래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샘으로서 그 안에 있으며, 저수지로서 사람 안에 있다.
마태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교제하심 (마태복음 9:9-13)
이 구절에는 불쌍한 세리들, 특별히 마태에서 베푼 그리스도의 은혜와 호의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사람들의 육신에 대해 행하신 것은 그들의 영혼에 대한 친절한 의도를 위해 길을 만든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Ⅰ. 이 복음서의 저자인 마태의 소명. 마가와 누가는 그를 레위라고 부르고 있다. 아마도 마태라는 이름은 세리로서 대부분 잘 알려졌던 이름이었던 것 같으며, 따라서 그는 겸손하게 자신을 레위라는 영예로운 이름보다 오히려 이 이름으로 불렀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도로 불렀을 때 마태라는 이름을 부여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가 시몬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과 같다. 마태라는 뜻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교역자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들의 사역과 그 사역을 위한 재능들은 그들에게 준 하나님의 선물이다.
1. 그리스도께서 마태를 부르실 때 그(마태)가 취한 자세. 그는 세리였기 때문에 "세관에 앉아 있었다"(눅 5:27). 그는 가버나움 포구에 있는 세관의 관리나 수세리(收稅吏), 또는 토지세를 받는 사람이었다.
(1) 그는 자기의 직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다른 제자들도 그럴 때 부름을 받았다(마 4:18).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탄은 게으른 자를 선택하여 시험하러 오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일하는 자를 선택하여 부르시러 오시는 것이다. 그러나,
(2) 그것은 진지한 사람들에게는 악명이 난 직업이었다. 왜냐하면 그 직업에는 매우 많은 매수와 유혹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직업에는 정직한 사람이 거의 종사하지 않았다. 마태 자신은 사도 바울이 한 것처럼(딤전 1:13) 회심 전의 자기 자신을 인정함으로써, 그를 부르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위대함과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 자기의 남은 자를 두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아무도 세상에서의 자기들의 직업 때문에 자기들이 불신앙 가운데 있다고 자기들을 정당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죄악된 직업"에서도 어떤 사람은 부르심을 받으며 또한 "정당한" 직업에 있지만 단지 몇몇 사람만 "그 안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2. 이 부르심의 도하는 세력. 비록 마태의 동류 중 어떤 사람이 링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 할지라도 마태가 그리스도를 찾거나 따르려고 했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그의 선하심의 축복으로 그를 이끌었던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말씀하셨다." 우리가 그를 택한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또한 동일한 신적이고 전능하신 능력이 마태를 개심 시키기 위해 이 말씀에 수반되었다. 이것은 중풍환자를 고치기 위하여, "일어나 걸으라"(6절)고 하는 말씀에 수반되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구원의 변화가 "창시자"로서의 그리스도와 '수단"으로서의 그의 말씀에 의해 영혼에 작용되고 잇다는 사실이다. 그의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다니다"(롬 1:16). 소명은 효과적이었다. 이는 그가 소명을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는 일어나" 즉시로 그를 좇았다. 그는 순종하기를 거부하거나 늦추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은 즉시 응답하며 또 모든 이의를 극복한다. 신분에 대한 임무나 그것에 의한 소득이 그리스도께서 그를 부를 때 그로 하여금 머물러 있게 할 수는 없다. "그는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갈 1:15, 16). 그는 직장과 그 방면으로 출세하려는 희망을 포기하였다. 우리는 어부 출신의 제자들이 이후에 종종 고기를 잡았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지만 마태가 또다시 "세관에 앉았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Ⅱ. 그리스도께서 이 때를 자아 세리들과 죄인들과 교제하심. 그리스도께서 마태를 부르신 것은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친숙하려고 하심이었다. "예수께서는 집에서 앉아 식사하셨다"(10절).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말하기를, 마태는 가난한 어부들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이 도저히 할 수 없었던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마태가 그 자신에 대해 말하게 될 때 그는 그것이 자신의 집이라거나 잔치였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집에서 앉아 식사하셨다"고 하였다. 그가 그리스도에게 드렸던 존경보다는 세리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 자신의 선행에 대해 인색하게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그 마태가 그리스도를 초대하였을 때 그는 "그와 함께" 제자들을 초대하였다.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자들은 그를 인하여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환영해야만 하며, 그들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2. 그는 "그를 만나러 온"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초대하였다. 이것은 그의 옛 친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친숙케 하려고 마태가 목적한 주요한 일이었다. 그는 경험에 의해 그들의 시험이 어떤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그들을 동정하였다. 그는 경험에 의해 그리스도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알았고 그들에 관해 절망케 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정말로 그리스도에게 인도된 자는 다른 사람들도 그에게 인도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그런 일을 위해서 뭔가를 하려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참된 은혜는 단지 한 조각의 빵을 먹는데 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초대할 것이다. 마태의 개종에 의해 동업관계가 깨어지자 즉시 그의 집은 세리들로 만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를 따랐던 것" 같이 그들 중 몇몇은 분명히 그를 따랐을 것이다. 안드레와 빌립도 이와 같았다(요 1:41, 45; 4:29). 사사기 14장 9절을 보라.
Ⅲ. 바리새인들이 이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함(11절). 그들은 공연히 트집을 잡았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여기에서 살펴 볼 것,
1. 그리스도는 시비를 받았다. 그가 "자신을 대항하는 죄인들의 반박을 참으셨던 것은 그의 고난 중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큰 분쟁을 제거하러 오신 그리스도보다 사람에게서 큰 시비를 받은 자는 없다. 이와 같이 그는 그가 말한 것 이 정당하고, 그가 말한 모든 것이 기꺼이 동의될 수 있었던 성육신 하신 신성에 합당한 영예를 그 자신이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어떤 일을 잘못 말씀하시거나 행하시지는 않았지만 그가 말씀하거나 행했던 모든 일에 흠을 잡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우리도 비난을 받으리라고 기대하고 이에 대해 준비하고 또한 그것을 꾸준히 견디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2. 그와 더불어 논쟁했던 자는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거만스럽고 뻔뻔스러운 자들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의 흠을 잡으려고 애쓰는 자들이었다. 또한 선지자 시대에, "홀로 서라. 내게로 오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하니라"고 말했던 자들과 똑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죄인들"을 피하는데 매우 엄격하였으나, "죄"를 피하는 데는 엄격하지 않았다. 그들은 장로의 전통들을 정확히 지켰으며, 또한 동일한 정신을 선포하여 그들 자신이 이것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3. 그들은 그리스도 자신에게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그들은 감히 그에게 트집을 잡을 용기가 없었고 제자들에게 트집을 잡았다. 제자들은 동일한 무리 안에 있었으나 그 논쟁은 그 주인에 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인이 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이런 트집을 그들에게 잡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자들보다 선지자였던 그(주님)에게 그러한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그들은 그의 위엄이 다른 사람들보다 이러한 무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선생에게 혐의를 가졌으므로 그들은 제자들과 다투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들, 법칙들을 변호하고 정당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벧전 3:15)하도록 하는 것이 기독자가 할 일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는 하늘나라에서의 우리를 위한 중보자이시므로 이 땅에서 그를 위해 중보자가 되자. 그리고 그의 비난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자.
4. 그 불평은 "그리스도가 세리들과 죄인들로 더불어 먹는다"는 것이었다. 사악한 사람괴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난다(시 119:115; 1:1). 아마도 그들은 이 일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비난함으로써 그에게서 그들을 유혹해내며, 그를 싫어하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더 나은 무리를 데리고 있던 자기들의 제자로 삼으려고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개종자를 만들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녔기 때문이다." 세리들과 친숙케 되는 것은 "장로들의 전통"과 위배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가증스러운 일로 여겼다. 그들은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해 분개하였다.
(1) 왜냐하면 그들은 "그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였으며, 또한 그로 하여금 허위 진술을 할 수 있는 기회만을 노렸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최상의 말들과 행위를 악의로 해석하는 것은 쉽고도 매우 일반적인 일이라는 사실이다.
(2) 왜냐하면 그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쓸모 없기를" 바랬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호의가 그들에게 미치는 것을 시기하였고, 그들이 회개에 이르는 것을 탄식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들은 그들 자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지 못하였고 다른 사람들이 그 은혜에 참여하기를 싫어하고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이 당연히 의심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Ⅳ. 그리스도께서 세리들과 죄인들로 더불어 교제하는데 있어서 그 자신과 그의 제자들을 위해 행하신 변호. 아마도 제자들은 아직 약했으므로 바리새인의 트집에 응답하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가져 왔으며, 그리하여 그가 그것을 들었거나(12절) 또한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말하는 것을 멀리서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알 수 없다. 단지 그로 하여금 그 자신을 변호하고 입증하며, 그 자신과 우리를 위해 대답하도록 하라.
1. 세리들이 당한 필요하고도 절박한 사정이 그의 도움을 큰 소리로 청하였다. 따라서 세리들을 위해 그들과 대화하시는 그를 정당화시켰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순수한 윗 세상에서 이 불결한 세상에로 모셔온 것은 이들 가난하고 잃어버린 죄인들이 당하는 절실한 필요성이었다. 또한 불순하다고 생각되었던 이 무리에게로 그를 모셔온 것도 마찬가지였다.
(1) 그는 세리들의 처지의 필요성을 입증하고 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세리들은 병든 자이므로 도움 받고 치료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으나 바리새인들은 그들 자신이 도움과 치료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1] 죄는 영혼의 질병이다. 죄인들은 영적으로 병든 자이다. 원래적인 타락은 영혼의 병이며, 실제적인 범죄는 그 상처이거나 질병의 부스럼이다. 그것은 불구이며 허약이며 불안이며 황폐이며 살상이지만,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그것은 치료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영혼의 위대한 의사이시다. 육체적인 질병에 대한 그의 치유는 그가 "날개 아래 고치심"을 가지고 계심을 의미한다. 그는 노련하고 신실하고 동정심이 많으신 의사이시며 병든 자를 고치시는 것이 그의 직무요 임무이다. 현명하고 선한 사람들은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의사와 같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도 그러하였다. Hunejdnroffectum versus omnes habet sapins, quem versus aegros suos medicus.─Seneca De Const─ 즉 현명한 사람은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자에 대한 의사의 느낌을 마음에 품는다.
[3] 죄라는 병을 가진 영혼은 이 의사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병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저절로 나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우리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없이는 영원히 파멸되는 것이다. 지각 있는 죄인들은 그들의 필요를 알며, 이에 따라서 그들 자신을 그에게 의탁한다.
[4] 그들 자신이 건전하고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자신들에게 "그리스도는 필요가 없으며," 라오디게아(계 3:17)와 같이 그분 없이도 자기 힘으로 꾸려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방법에 대한 지식을 원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아무것도 필요한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요 9:40, 41).
(2) 그는 그들의 필요성이 자기가 그들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을 충분히 정당화시켜 주며, 또한 그것 때문에 자기가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필요성은 그것을 "자비의 행동"으로 만들기 때문인데 이것은 언제나 신앙 고백보다 더 앞서며, 본체가 그림자보다 더 나은 것처럼 선행과 자비는 위엄보다 더 나은 것이다. 도덕적이고 자연적인 책임에 속해 있는 그러한 의무들은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하나님의 율법보다 앞서는 것이거늘,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칙들보다 그것을 보다 엄격하게 만든 사람들의 부칙이나 장로들의 전통에 물론 앞서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호세아 6장 6절,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13절)에서 인용한 구절에 의해 입증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부과하였던 세리들의 단체와는 엄밀한 분리는 "제사보다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더불어 교제하신 것은 일반적인 긍휼 이상의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것에 우선하는 것이었다. 사무엘이 보여 준 것처럼(삼상 15:22, 23) 자기를 위하여 잘 행하는 것이 제사보다 더 낫다면 하물며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랴! 영혼의 개종을 촉진시키는 것은 가능한 긍휼의 최상의 행동이다. 그것은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것이다"(약 5:20). 그리스도는 어떻게 이것을 인용했는가를 살펴 보라. 즉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경은 문자와 친숙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 배워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성경의 의미를 최고로 배웠으며, 그들 자신의 허물에 대한 책망과 그들 자신의 행위에 대한 규칙으로서 그것들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배웠다. 그리스도께서 인용하신 이 성경은 그를 변호하는데 이바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1] 참된 종교는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 준다. 다시 말하면 참된 종교는 외적인 준수(의식)에 있거나, "음식이나 마시는 것," 성결의 겉치레, 하찮은 특별한 의견이나 의심스러운 논쟁에 있지 않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영육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선행을 하는데 있으며, 또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데" 있다.
[2] 종교를 도덕보다는 의식(儀式)에 치중하는 자들의 바리새적인 위선을 정죄한다(마 23:23). 그들은 그러한 정욕들을 극복하는 경건의 능력을 싫어하지만 그들의 자만과 탐심, 야망, 악의와 일치되어질 수 있거나 또한 아마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러한 경건의 모양을 지지하고 있다.
2. 그는 자신의 사명의 본질과 목적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그의 규율을 지켜야만 하며 또한 그가 우대한 교사로 지명 받은 목적인 그것을 수행해야만 한다. 이제 그는 말씀하시고 계시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노라. 그러므로 세리들과 교제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1) 그의 임무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불러 회개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첫 번째 본문이었으며 그의 모든 설교의 취지이기도 하였다. 복음의 소명은 회개에로의 소명이며, 또한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키는 소명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2) 그의 임무가 해당되는 사람(그가 임무를 수행하시는 대상)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다. 다시 말하면,
[1] 사람의 자녀가 "죄인들"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사람"으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타락한" 사람으로서의 사람의 구세주이시다. 첫 번째 아담이 그의 원래적인 "의(義)를 계속하였다면 우리는 둘째 아담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2] 그러므로 그의 "가장 위대한 임무"는 "가장 큰 죄인"에게 놓여져 있다. 병든 사람의 처지가 위급하면 할수록 의사의 도움은 더욱 중시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죄인" 특히 "괴수"를 "구원하시러"오셨으며(딤전 1:15), 죄인이지만 비교적 의로운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 중에 최고로 악한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다.
[3] 죄인이 그 자신의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리스도와 그 복음은 그들을 환영할 것이다. 또한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의 집을 가지려는 자들보다는 자기들과 사귀기를 원하는 자들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의인들," 즉 자칭 의인들로 자만하면서 곧 자기들의 구세주에 대해 싫증을 내고 말 자들에게서 성공하리라는 기대를 걸고 오신 것이 아니라 지극히 겸손한 "죄인들," 죄에 싫증이 난 자들 중에서 성공의 기대를 가지고 오셨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오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에게 환영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에 대한 질문을 함 (마태복음 9:14-17)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게 대한 반대는 그의 설교에 지극히 유리한 어떤 기회를 제공했다. 이와 같이 진리의 중요성은 종종 반대 진에게서 겪는 반대에 의해 부각되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지혜는 악에서부터 선을 가져온다. 이것은 이 장(章)에 있어서 이에 대한 세 번째 실례이다. 죄를 사하시는 그의 능력의 설교와 죄인을 받으실 준비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트집에 의해 야기되었다. 이와 같이 여기에서는 그의 가족의 행위에 대한 회상으로부터 그들을 위한 그의 보살핌에 관한 설교가 생겼다.
Ⅰ. 요한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그들처럼 자주 금식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함. 이것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더불어 먹는 것 이외에 그들의 신앙 고백이 해이하다는 실례로서 책망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앙고백을 보다 더 엄격한 것으로 바꿔야 한다고 제시되고 있다.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그들과 함께 연합되어 있었다고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나타내고 있다(막 2:18; 눅 5:33). 우리는 그들이 요한의 제자들을 그들의 대변자로 이용하여 내세웠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이 제자들과 더욱 친근하였으므로 그것을 더욱 그럴듯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부추기어 음모를 실행하도록 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간에 서로 의견에 맞지 않는다면 흉계가 있는 사람은 이 경우를 이용하여 불화를 일으키게 하며 서로를 대하여 분쟁케 하며 또한 서로에게 떨어지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미끼로 쉽게 만들어 버린다. 만일 요한과 예수의 제자들이 충돌된다면 숯불을 불면서 비열하게 일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은 불평하기를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고 하였다. 거룩한 사랑의 확증이 되어야 하는 종교의 의무가 분쟁과 다툼의 근거가 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들은 그들 자신의 금식을 어떻게 자랑하였는가?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한다." 금식은 교회의 모든 시대를 통하여 특별한 경우에 경건한 의식으로 지켜져 왔다. 바리새인들은 이 일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하였으나 대부분은 위선자였고 사악한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거짓되고 형식적인 신앙 고백자들은 종종 외부적인 헌신이나 고행의 행동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다는 사실이다. 요한의 제자들은 부분적으로 그들의 선생(요한)을 따라 "자주 금식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먹거나 마시러"오지 않았기 때문이다(마 11:18). 사람들은 비록 언제나 똑같은 내적 원리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의 지도자를 모방하기 쉬우며 부분적으로 회개에 대한 선생의 교훈을 추종하기 쉽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종교의 보다 쓰라린 부분은 "속박의 영"인 성령의 훈련 아래 있는 자들에 의해 대개 "유의된다"는 사실이다. 한편 이것들은 그 장소에 따라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 이것들이 인도해야 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를 신뢰하는 생활에로 정진해야만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주 금식한다"는 사실, 적어도 그들의 생각에 자주 금식한다고 말하려고 그리스도에게로 왔다.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느니라"(잠 20:6). 신앙 고백자들이 그들 안에 특별한 일이 있다면 종교상 그들 자신의 수행에 대해 자랑하는 것은 자칫 범하기 쉬운 일이다. 아니,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들 자신을 주장하며 의로운 자로 자처하는 것이다.
2.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자신들처럼 자주 금식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비난하였는가?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은밀한 금식을 할 것과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하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사실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금식하지 않는다"고 단정한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무자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의 금식을 선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들은 사람들의 종교를 단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나 세상의 관찰에 의해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처럼 자주 또는 오래 금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추측한다면 정녕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신앙심을 가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헛된 신앙고백자들이 마치 그들과 다른 모든 자들의 잘못에 있어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사람이나 사물을 시험하고 측정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종교상 표준으로 만드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마치 그들보다 못한 자는 적게 행하며 그들보다 많이 행한자는 많이 행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겸손과 자비가 부족함을 나타내는 명백한 증거이다.
3. 그들은 어떻게 이러한 불평을 그리스도에게로 가져왔는가?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부작위(omission)에 의해서든지 작위(commission)에 의해서든지 잘못을 범하였다면 그리스도 자신은 그것에 대해 들은 것을 확증할 것이며, 그것 때문에 모욕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 예수여, 이 사람이 당신의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예를 고려한다면 자신의 처신과 행동을 잘 해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다툼은 제자들에게 옮겨졌고(11절), 제자들과의 다툼은 그리스도에게 옮겨졌다(14절)는 사실과 이것은 사역자가 백성과, 백성이 사역자와, 한 친구가 다른 친구와 분쟁케 하기 위하여 불화를 야기시키며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Ⅱ. 그리스도께서 이 일로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변명. 그리스도는 요한의 제자들이 앞서 행한 "왜 당신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는 질문에 대해 그들을 나무라셨다. "아니, 너희는 그것을 행하는 이유를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라들은 외부적으로 봉헌을 드리면서도 그것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그의 제자들의 행위를 변호하고 있다. 제자들이 그들 스스로 말할 수 없을 때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말할 것을 준비하셨다. 자녀의 모든 것을 정당화하게 되는 것이 지혜의 영예인 것처럼 지혜에 대해 정당화되는 것이 자녀의 행복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규칙과 본보기를 따라 행한 것을 그는 우리를 위해 확증해 주실 것이며, 우리는 신뢰를 가지고 우리의 정직을 밝혀 주시도록 그에게 맡겨둘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 당신은 나를 위해 응답하실 것이옵니다"(Herbert). 그리스도는 그들의 "금식하지 않는 것"에 대해 변호하시면서 두 가지 일을 제시하고 있다.
1. 그 의무는 적합하지 않다(15절).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여기에서 살펴볼 것은 그리스도의 대답은 매우 적합하며 그 자신의 제자들의 행위를 적절히 정당화시킬 뿐만 아니라 요한의 관례나 그의 제자들의 행위를 정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리새인들이 이 논쟁을 야기시켰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가 그 자신의 제자들이나 요한의 제자들을 나무라기를 원하였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떤때 부당하게 비난을 받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욕을 퍼부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분명히 하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이러한 것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행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을 비난함이 없이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도 있다. 이제 그의 논법은 혼인 예식이 계속 되는 동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일반적인 관습에서 인용되고 있다. 우울과 슬픔에 찬 모든 실례는 부적당하고 불합리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것은 마치 삼손의 결혼식과 마찬가지였다(삿 14:17).
(1)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신랑방에 있는 손님"으로서, 잔치에 초대되고 영접되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그렇지 않고 "여종의 자손'(갈 4:25, 31) 이었으며, 흑암과 두려움 아래에 머물고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양자의 영을 가진 그리스도의 신실한 추종자들은 속박과 두려움의 영을 가진 자들이 다른 사람처럼 즐거움을 맛볼 수 없을 때(호 9:1) 지속적인 잔치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2)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들이 소유하지 못하였던 "그들과 함께한 신랑"을 소유하였다. 그들의 선생은 지금 투옥되었으며, 그의 생명이 계속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그들이 "자주 금식"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었다. 신랑을 그들에게 빼앗길 날이 이를 것이니, "그 때에는 마땅히 금식해야만 할 것이다." 그가 떠나려고 할 때 그들은 슬퍼하였다(요 16:6). 환난과 고통은 그가 갔을 때 그들에게 닥쳐왔으며,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슬퍼하고 기도하는 계기." 즉 종교적인 금식의 계기를 만들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의 신랑이며, 그의 제자들은 "신랑의 친구들"(영문은 "신부방의 아이들"-역주)이다. 그리스도는 이와 비슷하게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요한은 그 자신을 신랑의 친구라고 불렀을 때 그것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요 3:29). 또한 만일 그들이 이 힌트에 의해 그들의 선생이 말했던 것을 회상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대답했을 것이다.
[2] 신랑의 친구(신부방의 아이들)인 자들의 상태는 이 세상에서 많이 변화를 겪기가 쉽다. 그들은 긍휼과 심판을 노래한다.
[3] 신랑의 친구들은 신랑과 오래 지낼 수 있느냐, 아니면 곧 헤어지느냐에 따라서 즐겁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다. 그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의 촛대는 그들의 머리 위에 비취며, 모든 것은 순조롭다. 그러나 만일 그가 물러간다면 비록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근심하고," 침울하게 지내게 된다. 태양이 있음(presence)과 가까움은 낮과 여름을 만들지만, 없음(absence)과 먼 것은 밤과 겨울을 만든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즐거움에 대한 모든 것 중 모든 것이다.
[4] 모든 의무는 때에 맞추어 행해진다. 전도서 7장 14절, 야고보서 5장 13절을 보라.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할 때가 있으며,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자신에 적응시켜야 하며, 적당한 때에 열매를 맺어야 한다. 금식할 때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에 유의해야만 한다. 그가 "우리를 위해 애통할" 때에 우리는 "슬퍼해야만"한다. 또한 우리에게 관한 그의 섭리의 세대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주 하나님이 애통과 슬픔에로 부르실"때가 종종 있다. 이와 같이 우리 앞에 있는 어떤 특별한 일에 유의해야만 한다(마 17:21; 행 13:2).
2. 그들은 그 의무를 행할 만한 충분한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다. 이것은 두 가지 유사점으로 설명되었는데, 그 하나는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것으로서 기운 것이 낡은 옷을 당겨 헤어짐이 더하게 되며(16절), 또한 그 하나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것으로서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지게 된다(17절).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요한이나 바리새인의 고행과 같은 이러한 고행을 견딜 수 없었다. 이것은 박학한 휘트비(Whitby) 박사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 가운데는 엄격한 생활을 하였던 바리새인과 에세네 종파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종종 산이나 광야에 살며 많은 사람이 나실인이었던 "선지자 학교"가 있었다. 그들은 또한 사람을 엄격하게 훈련시키기 위하여 개인적인 학문 기관을 가졌다. 아마 이들로부터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많이 나왔던 것 같다. 한편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직접적으로 소명을 받았으므로 이러한 엄격함에 익숙하지 않았고 또한 그들에게 적합하지 않았으며 그것에 의해 그들의 다른 일에도 오히려 더 적합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어떤 종교적 의무는, 마음의 최고 긴장을 요구하며 혈육에 대해 극도로 불쾌한 "새 옷"과 "새 포도주"와 같이, 다른 의무들 보다 더 힘들고 고달프다. 이러한 것은 그것에 수반하는 종교적인 금식과 의무이다.
(2)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대부분은 영아의 상태를 지나왔다. 그리스도의 정원에 있는 모든 나무들이 다 자라난 것은 아니었고, 태에서 그의 모든 학생들이 동일한 상태에 있지는 않았다. "그리스도 안에는" 어린아이도 있고 성인도 있다.
(3) 종교적인 연습을 부과함에 있어서 젊은 기독자들의 연약함과 허약성이 고려되어야만 한다. 그들을 위해 마련된 양식이 그들의 나이에 적합한 것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고전 3:2; 히 5:12), 그들에게 적합한 힐을 행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감당치 못할 것을 그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다(요 16:12). 젊은 초신자들은 그들이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맨 처음에 힘든 의무가 부가되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에서 엿볼 수 있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실 때 그는 블레셋의 길로 그들을 인도하시지 않았다(출 13:17, 18). 또한 이것은 야곱이 그의 자녀와 가축을 혹사하지 않도록 돌본 것(창 33:13)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도 이와 같이 그의 가족 중 소자와 양떼를 돌보신다. 그는 순탄하게 그들을 인도하신다. 이러한 배려의 부족 때문에 자주 '부대는 터지고 포도주는 못쓰게 된다." 많은 사람의 신앙 고백은 맨 처음의 무분별 때문에 실패하며 수포가 되고 만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선행에 있어서 더욱 지나치게 행하며, 지나치게 의롭게 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지나치게" 행하는 것은 사탄의 간교 때문에 행하지 않은 것으로 입증될 수도 있다.
회당장의 직원의 딸과 혈루병자 (마태복음 9:18-26) 여기에서는 함께 병행된 역사에 대한 두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 하나는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신 것이요, 또 하나는 다른 것 가운데 삽입구로 소개된 것으로서 그가 야이로의 집으로 갈 때 "혈우병"을 가진 여자를 고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이적은 널리 유포되었고 뒤섞여졌기 때문이다. 그를 "보내신 자의 일"은 그의 일상과제였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트집, 즉 "이 말씀을 하실 때"(18절)에 대한 응답으로 앞서의 일들을 말씀하시는 것에서부터 이러한 선행을 하시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이것이 논쟁의 불쾌한 일에 주어진 유쾌한 증거로 추측할 수 있으며, 이것은 비록 때때로 필요하기는 하지만 선한 사람은 헌신과 자비의 일을 착수하기 위하여 기꺼이 버려둘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Ⅰ. 그리스도께 대한 회당장의 인사(18절). "한 직원," 즉 회당장이 "와서 절하였다." "회당장이 그를 믿은 일이 있는가?" 그렇다. 여기에 있는 한 회당장으로서, 그의 신앙은 다른 회당장들의 불신앙을 비난하였다. 이 회당장은 방금 죽은 열두 살 된 딸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한 이 돌파구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나오게 하였다. 여기에 유의할 것은, 근심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친척의 죽음은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에로 내몰아야만 한다. 어떤 일이 그것을 한다면 좋은 일이다. 고통이 우리의 가족에게 있을 때 우리는 놀라움으로 주저앉아 버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욥과 같이 "엎드려 예배해야 한다." 여기서 살펴볼 것은, 1. 그리스도에게 대한 이 인사에 나타난 회당장의 겸손.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임무를 가지고 왔다. 그는 자기의 종을 보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주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지위 높은 회당장에게 있어서 경시해 버릴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는 무릎을 꿇고 "그에게 절하였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모든 존경을 그에게 드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자비를 얻으려고 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 경의를 표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2. 이 인사에 나타난 그의 신앙.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다른 어떤 의사가 지금 오더라도 늦지만(사후에 약방문-Post mortem medicina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늦지 않겠나이다." 그는 사후의 의사이다. 왜냐하면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이것은 전혀 자연의 능력 이상이었다(a privatione ad habitum non datur regressus- 즉 한 번 생명은 회복될 수 없다).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으며, 그는 "그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그가 하시고자 하는 자를 소생시키신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자연적으로," 그것에 "거스리지" 않고 일반적인 방법으로 역사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이와 같은 요구를 그에게 가져올 수밖에 없다. 생명이 있는 동안 소망이 있고 기도를 위한 기회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친구가 죽을 때 그 경우는 결정된다. "우리는 그들에게로 갈 것이지만 그들은 우리에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행하면서 이 땅 위에 계셨을 때 이와 같은 신뢰는 정당한 걸을 뿐만 아니라 매우 칭찬할만하다. Ⅱ.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사에 응하기 위해 준비하심(19절). 즉시로 "예수께서는 일어나," 그의 일행을 남겨두고 "그를 따라갔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딸을 소생시키려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시려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가 주려고도 하셨다. 정녕 그는 야곱의 후손들에게, "너희는 공연히 나를 찾노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는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고 말했던 신하(요 4:48-50)와 함께 가기를 거절하였지만, "주여, 오시옵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고 말했던 회당장과는 함께 가셨다.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 취하셨던 여러 방법은 아마도 상이한 마음의 구조와 기질에 의한 것인 듯하며, 이것은 그에게 요청한 사람들에게 있었으며 또한 "마음을 살피는 자"가 완전히 아시고 그 자신이 동조하였던 것이다. 그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과 그가 취하는 길을 아신다. 또한 여기에서 살펴볼 것은, "예수께서 그를 따르실 때," 그가 자신의 항구적인 동반자로 선택한 "그의 제자들로 뒤따랐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대동하신 것은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거나 관찰을 하게 함이 아니라, 이후에 그의 교훈을 전파하는 설교자가 될 자들이 그의 이적에 대해 증거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Ⅲ. 가난한 여자의 혈루병을 치유하심. 내가 그를 "가난한"여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처지가 가련할 뿐만 아니라, 또한 설령 그녀가 이 세상에 어떤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자신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모든 것을 의사에게 바쳤으나" 결코 완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상태는 이중적으로 악화되었으며, 이전에는 많이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텅빈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녀는 건강을 회복하려다가 가난하게 되었고 그렇다고 지금 건강이 회복된 것도 아니었다. 이 "여자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았다"(20절). 이 병은 그녀를 쇠약하고 허약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불결하게 되어 "성전 뜰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지는 못하였다. 그녀는 어쨌든 딸이 죽은 회당장을 따라가면서 그리스도에게 요청하여 자비를 얻었으며, 이것은 회당장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큰 격려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매우 은혜스럽게 연약한 신도들의 구조를 고려하시며, 그 처지를 염두에 두신다. 여기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와 그의 능력에 대한 여자의 큰 믿음. 그녀의 병은 천성적이므로 그녀는 겸손하게도 다른 사람이 하는 것처럼 치유를 위해 그리스도에게 공개적으로 말씀드리지 않고, 믿음의 성령의 특별한 충동에 의해 "그리스도의 겉옷만 만져도" 자신의 혈루병이 나을 것임을 확실히 믿게 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신앙과 혼합된 어떤 추측에 근거한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리스도에게 직접 나아가지 않았으며,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엘리사의 뼈를 만짐으로 죽은 사람이 일어난 사실을 목표하고 있었다(왕하 13:21). 그러나 어떤 "이해의 연약성"이 거기에 있었든지 간에 그리스도는 간과하시고 그녀의 신앙의 진지성과 능력을 받아들이기를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꿀 방울을 먹기" 때문이다(아 4:11). 그녀는 그리스도의 "겉옷의 옷깃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모든 것에는 효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대제사장이 기름부음 받았던 "거룩한 기름은 옷깃까지 흘러내린다"(시 133:2). 그리스도 안에는 이러한 은혜의 충만이 있으므로 "우리가 그것에서 모두 받을 수 있다"(요 1:16). 2. 이 여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큰 호의. 그는 그의 치유하는 감응력을 멈추지 않았으며(그는 하셨을 수도 있다), 그녀는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아시리라고는 미쳐 생각지 못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치유를 받기 위하여 이 수치스러운 환자는 고심하였다. 이제 그녀는 가도 좋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왔던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녀가 그렇게 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치료에서 확대된 능력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녀의 위로와 칭찬에서 크게 된 은혜를 가질 것이다. 그녀의 신앙의 승리는 그녀의 칭찬과 영예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는 그녀를 보려고 "돌이키셨으며"(22절) 즉시로 그녀를 발견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에게서 자신을 숨기는 자는 대개 개인적일 때 그들이 하늘 나라에 대한 요청을 은밀히 보시는 그리스도에게 알려진다는 것은 겸손한 기독자들에게 큰 용기가 된다는 사실이다. (1) 그는 "딸아 안심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녀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있다." 그녀는 비밀히 온 것에 대해 책망 받을까봐 두려워하였지만, 오히려 격려를 받고 있다. [1] 그가 그녀를 "딸"이라고 부른 것은 "아들"이라고 불렀던 "중풍병 환자"에게 하셨던 것처럼(2절) 아버지의 온유함으로 그녀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한나와 같이(삼상 1:15) 슬픈 영인 "시온의 딸들"을 위하여 예비된 위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믿는 여자는 그리스도의 "딸"이며 그는 그들을 이와 같은 자로 인정하실 것이다. [2] 그는 그녀에게 "안심하라"고 명하고 계시다. 만일 그리스도가 그녀를 "딸"로 인정하신다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도의 위로는 그들의 양자 됨에 기초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안심하라"는 그의 명령은 "구원받았다"는 말씀이 건강을 가져다 준 것처럼 그녀에게 위로를 가져다주었다. 그리스도의 백성이 위로를 받아야 된다는 사실은 그의 뜻이며, 고통받는 영들에게 위로를 명령하시는 것은 그의 특권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는 "입술의 열매, 평강을 지으신다"(사 57:19). (2) 그는 그녀의 신앙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 밖의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에게 큰 영예를 드리고 있으며 따라서 그는 그것에 큰 경의를 표하고 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그녀는 신앙에 의해 좋은 소식을 얻었다." 모든 은혜들 중에서 그는 신앙에 최고의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신자들 중에서 그는 가장 겸손한 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이는 마치 자신이 가졌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믿음을 가졌던 여기에 있는 여자와 같다. 그가 "안심하게 된 것은" 그녀가 구원(온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온전케 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1] 그녀는 영적으로 고침을 받았다. 그녀는 치유함을 받았는데, 이것은 신앙의 적절한 열매요 결과이며, 죄의 용서와 은혜의 역사이다. 그것들이 이와 유사한 영적인 축복에 수반된다면 우리는 그때 우리의 현세적 자비에 있어서 풍성하게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신앙에 의해 "생명의 떡"으로 배불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의 옷으로 옷 입혀질" 때 우리의 음식과 옷은 충분하게 될 것이다. 신앙에 의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휴식하며, 그 안에서 편히 거할 때 우리의 휴식과 잠은 편안할 것이다. 신앙에 의해 우리의 영혼들이 번성하며 건전할 때 우리의 건강과 번영은 곤란이 없을 것이다(사 38:16, 17 을 보라). [2] 그녀의 육체적인 치유는 그녀의 신앙의 열매였으며, 또한 신앙은 실로 행복하고 편안한 치유를 하게 했다. 마귀가 내쫓아진 자들은 그리스도의 통치력에 의해 도움을 받았다. 다른 사람의 신앙에 의한 것이 아니라(2절과 같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한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현세적인 자비는 그것들이 신앙으로 받아들여질 때 실로 우리들에게 위로가 된다. 만일 우리가 자비를 구할 때 그것을 위하여 신앙 안에서, 약속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신뢰함으로 기도한다면, 만일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의탁함으로서 그것을 바라며 또한 믿음과 사랑과 순종 안에서 그것에 의해 확대된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그때에 그것은 신앙에 의해 받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Ⅳ. 그리스도께서 회당장의 집에서 목격한 사태. 그는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자들을 보았다." 그 집은 서두르고 있었다. 이러한 일은 사람이 죽을 때 가족에게 행하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경우에 필요한 배려는 그 슬픔에 대해 적절한 기분 전환을 시키는 것인 듯하다. 이웃에 있는 사람들은 잃어버림을 인하여 부모를 위하여, 또한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지연시키기를 원치 않았던 장례식을 준비하기 위하여 함께 왔었다. 피리부는 자들(음악가들)은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슬픔을 격증시키고 이 때문에 모인 사람들의 비애를 고조시키기 위하여 움울하고 구슬픈 곡조를 연주하면서 그들 가운데 있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그 자체가 과도하게 되기 쉬운 격정에 빠지기 쉽고 "소망을 가지지 못한 자들"처럼 슬픔에 젖기 쉽다. 불신앙이 썩은 물체를 지배하는 곳에서도 신앙은 어떻게 강심제를 마련하고 있는가를 살펴 보라. 이교도들은 기독교가 누그러뜨리려고 노력하는 슬픔을 악화시킨다. 또한 아마도 이 음악가들은 슬픔을 위로하거나 가족들을 즐겁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재물에 식초를 붓듯 무거운 마음에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즉시로 고통에 접하였던 부모는 슬픔을 고조시켰던 "사람들과 훤화하는 자들"이 이러한 소동을 부렸지만 잠잠했다는 사실이다. 큰 소리로 외치는 슬픔이 가장 큰 슬픔은 아닌 것에 유의하라. 강물은 얕은 곳이 더 큰 소리를 내는 법이다. Ille dolet vere, qui sine teste dolet-즉 가장 진지한 슬픔은 남의 눈을 피한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그녀에 관한 모든 의심할 여지없는 불안을 볼 때 그 소녀는 참으로 죽었다는 사실이다. Ⅴ. 그리스도께서 이 소동과 훤화에 대해 나무라심(24절). 그는 "물러가라"고 말씀하셨다. 때때로 "세상의 슬픔"이 우세할 때 그리스도나 그의 위로가 들어가기는 매우 어렵다. 슬픔으로 자신을 강팍케 하는 자들이나 라헬과 같이 "위로 받기를 거절한 자들"은 그들의 불안한 생각에 대해 "물러가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경청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위로자이시며 그가 영혼에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될 수만 있다면 이 세상 슬픔의 혼란과 압제를 극복하기에 충분한 강한 위로를 가져다주시는 자를 위해 방을 만들어라." 그는 그들이 자신들과 서로에 대해 왜 불안해서는 안 되는 가에 대한 좋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즉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1. 이 소녀가 즉시로 일으킴을 받았다는 것은 두드러진 사실이다. 그녀는 실제로 죽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아시며 또한 그녀의 죽음을 단지 잠으로 결정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잠과 죽음은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지속될 때는 전혀 다르다. 죽음은 오래 지속되지만 잠은 한 밤의 휴식으로서 잠깐 후면 깬다. 죽은 자를 깨우시는 자는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신다(롬 4:17). 2.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죽은 모든 자들, 주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에 대해서도 사실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죽음은 잠이다. 모든 민족들과 언어는 매우 두렵고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그들 자신을 그것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는데 동의하였다. 악한 왕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조상과 함께 잠들었다"고 말해진다. 영원한 수치에로 깨어날 자들은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잠들었다"(단 12:2)고 말해진다. 그것은 영혼의 잠이 아니다. 그 활동이 그치는 것이 아니다. 무덤 속에 누어있는 육신의 잠은 조용하고 아무렇게나 흑암과 어둑한 곳에 싸여 있다. 잠은 짧은 죽음이지만, 죽음은 긴 잠이다. 그러나 "의인의 죽음"은 특별히 잠으로 간주된다(사 57:2).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을 잔다(살전 4:14). 그들은 낮의 수고와 고통에서 휴식할 뿐만 아니라 부활의 아침에 다시 기쁨으로 깨어나는 "소망 가운데서 휴식"하는 것이다. 그때에 그들을 생생하게 깨어날 것이며, 새 생명에로 깨어날 것이며, 화려하게 옷 입고 관 쓰기 위하여 깨어날 것이며 "더 이상 잠자지 않기 위하여" 깨어날 것이다. (2) 이것에 대한 생각은 우리의 사랑하는 친척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슬픔을 경감시켜야 한다. "그들은 잃어버린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아니, 그들은 앞서 가버린 것에 불과하다. 그들이 죽음을 당했다고 말하지 말라. 아니, 그들은 잠자는 것에 불과하다.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가 망했다고 상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고전 15:18)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래의 상태나 계시된 영광에서 나온 은혜의 계약이 역사 하는 그러한 위로에 자리를 양보하라(물러가라)." 이제 이러한 위로의 말씀이 우리 주님의 입을 통하여 나왔다고 생각한다면, 그와 같이 비웃을 수 있는가? "저들이 비웃더라." 사람들은 가버나움에 살았으며 또한 결코 성급하고 어리석은 말씀을 하시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성격을 알았다. 그들은 그가 얼마나 큰 전능한 능력을 행하였는가를 알았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다면 그 결과를 기대하면서 적어도 조용히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이해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일은 이로 말미암아 경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가 가장 신뢰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모순된다고 보일 때에라도 그 신적인 말씀의 신비를 찬미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도 이적의 확증에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녀가 분명히 죽었으므로 그 밖의 것을 말하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Ⅵ.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해 소녀가 소생함(25절). "무리들을 내어 보내셨다." 자기들의 능력 이상의 것을 보고들은 것에 대해 비웃는 조소자들은 그리스도의 놀라운 역사와 과시가 아닌 능력에 놓여져 있는 영광에 대한 적절한 증인이 되지는 못한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나사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공개적으로 일으킴을 받았으나 이 소녀는 은밀하게 일으킴을 받았다. 왜냐하면 건강을 회복시키는 것을 가볍게 경시해버린 가버나움은 보다 큰 생명의 회복을 보기에 합당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 "진주들"은 "발로 짓밟는 자들"에게 던져지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안으로 들어가셔서 소녀가 진다고 하는 그 자신의 비유(은유)를 수행하기 위하여 마치 그 애가 자는 것을 깨워 일으키기나 하듯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리스도를 상징하였던 대제사장은 죽은 자에게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지만(레 21:10, 11), "그리스도는 죽은 자를 만지셨다." 레위적인 제사직은 죽은 자들을 불결한데로 내버려두며, 따라서 그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권세를 가지셨으므로 감염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을 만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소녀의 손을 잡으시며 일어나는지라." 매우 쉽사리, 매우 효과적으로 기적은 이루어졌다. 엘리야(왕상 17:21)나 엘리사(왕하 4:33)가 했던 것처럼 기도에 의하지 않고 만짐에 의해 일으키셨다. 그들은 그 일을 종으로서 하였지만, 그리스도는 성자로서, 하나님으로서 행하셨다. "죽음에서 피함은 그에게 속해있는 것이다"(시 68:20 참조).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영혼의 주님으로서, 그가 원하시는 대로 자유로이 영혼을 지배하신다. 죽은 영혼들은 그리스도가 "손으로 그들을 붙잡지" 않으신다면, 다시 영적 생명에로 부활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의 능력의 날"에 행해진다. 그는 우리를 도와서 일으키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누워 있다. Ⅶ. 은밀히 행하였지만 이 이적에 대해 추해진 주목.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26절). 그것은 대화의 공통적인 주제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역사는 생각보다 그리고 겉보기 보다 더 많이 이야기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의 이적에 대한 소문만을 들었던 자들은 그들에 대한 목격자였던 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에 대해 해명할 의무가 있었다. 비록 우리는 멀리서 그리스도의 이적을 보지는 못하였을지라도 그것들에 대한 확실한 근거가 있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믿을 수 있고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요 20:29). 그리스도의 전도 활동(마태복음 9:35-38)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Ⅰ. 앞에 있는 그리스도의 설교와 이적의 기사에 대한 결론(35절).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가르치시며 고치시니라." 이것은 우리가 앞서 보았던 것과 동일하다(4:23). 그리스도 설교(마 5-7장)와 그의 치유(8, 9장)에 대한 보다 특별한 본보기에는 조교사(ushers)가 있으며, 여기에서 그것은 미려하게 이 본보기의 끝에 quod erat demonstrandum - 즉 입증된 항목으로 반복되고 있다. 마치 복음서 기자가 "이제 나는 특별한 전제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시고 고치신 것을 입증하게 되기를 원하다. 왜냐하면 너희는 그의 설교의 주제와 도한 그의 교훈을 확증하기 위하여 행해진 그의 치유에 대한 몇 가지 실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너희가 믿도록 하기 위하여 쓰여졌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전자와 같이 갈릴리에서의 두 번째 답사 보고였다고 하였다. 그는 이전에 설교하였던 자들을 방문하였다. 바리새인들은 그를 트집잡고 반대하였지만 그는 그의 일을 계속하였다. 그는 "천국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지금 중재자의지배하에 설립된 은혜와 영광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것은 실로 복음, 즉 "기쁜 소식"이며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설교에서 무엇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살펴보자. 1. 개별적인 성읍들과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크고 부유한 도시를 방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마을들도 방문하셨다. 거기에서 그는 전파하였고 그곳에서 치유하셨다.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자들의 영혼은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자들의 영혼만큼 그리스도에게는 값진 것이며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부한 자나 가난한 자," 도시인들이나 시골뜨기는 그 안에서 함께 만난다. "마을 주민에 대한 그의 의로운 행동"은 "열거" 되어야만 한다(삿 5:11). 2. 공중적인 예배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이는 (1) 부패가 있기는 하였지만 경건한 회합자들에게 증거를 가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어떤 일과 같이 함께 모이는 집회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2) 들으려는 기대를 가지고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곳에서 설교하려는 기회를 가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복음적 교회가 설립되거나 기독자 집회가 모이는 곳에서 사도들이 자주 "유대인의 회당에서" 설교하였다. 그것을 최고로 삼는 것은 현명한 지혜이다. Ⅱ. 다음 장에 나오는 제자 파송의 기사에 대한 서언이나 서론. 그는 "무리"(36)를 보셨다. 그는 "자기를 따르던" 무리뿐만 아니라 지나갈 때 모여든 많은 사람들을 주시하셨다. 그는 마을과 성읍에 어떤 영혼의 거처나 많은 주민이 있는가를 주목하셨다. 각 회당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문의 입구에는 어떤 집회 장소가 있는가를 주목하셨다. 많은 인구가 있었으므로 국가는 지금 크게 성장하였다. 또한 그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였다. 이것을 볼 때에, 1. 그리스도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으며,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36절). "그는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가 눈먼 자나 절름발이, 병자를 불쌍히 여기신 것은 현세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영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는 그들을 무지하고 경솔하며 소망이 없기 때문에 망하려 하는 자로 보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귀중한 영혼에 대한 애정 있는 친구이시라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그의 자비심은 특별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를 하늘에서 지상으로 또한 거기에서 십자가로 이끌어온 것은 영혼에 대한 긍휼(연민)이었다. 비참은 자비의 대상이다. 죄스러운 비참이나 자기 파괴적인 영혼은 최고의 비참이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비참한 처지들을 불쌍히 여기신다. 그와 같이 우리도 행해야만 한다. 기독자의 최고 연민은 영혼에 대한 연민이다. 그것은 최고로 그리스도와 닮는 것이다. 이 긍휼을 일으킨 동기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1) "그들은 고생하였다." 그들은 빈곤하고 고통스러웠으며 피곤하였다 그들은 "곁길로 나아갔다." 또한 서로가 흩어졌다. 또한 "연락의 막대기가 잘라졌다"(슥 11:14). 그들은 자기들의 영혼을 위해 도움을 원하였으며, 어떤 좋은 것도 그들 곁에 있지 않았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공연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장로들의 유전으로 무거운 짐을 지움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오류를 범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지키지 않았으며, 신적 법률의 범위와 영적인 본질을 잘 알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고생하였다." "생명의 떡" 대신에 찌끼와 재로 먹여진 영혼들에게 무슨 영적 건강과 생명, 활기가 있을 수 있겠는가? 고귀한 영혼이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되지 못했으므로, 의무가 이해해야 되고 시험에 저항하며, 고통을 견뎌야 할 때 "약해진다." (2)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였다." 그 표현은 열왕기 상 22장 17절에서 인용된 것이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일에서 그들보다 앞장 설 신실한 인도자가 없는 자들의 슬픈 상태를 나타낸다. 양처럼 길을 잘 일어버리는 동물도 없으며, 또한 길을 잃어버릴 때는 다시 집을 찾아오는 일이 드물며 거의 소망이 없다. 죄지은 영혼은 "잃어버린 양과 같다." 그들은 그들을 데려다 줄 목자가 필요하였다. 유대인 교사들은 "목자"로 행세하였으나 그리스도는 그들이 "목자"를 가지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누구보다도 처참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올바르게 인도하는 목자가 아니라 곁길로 나가게 하는 목자였으며, 잘 양육하는 목자가 아니라 양떼를 쫓아내는 목자였다. 이러한 목자는 예레미야 23장 1절과 에스겔 34장 2절 등에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러한 백성들의 경우는 매우 가엾으며 또한 그들은 전혀 목자들을 가지고 있지 않고 누구보다도 처참한 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와 영혼들의 일들이 아닌 자기 자신들의 일을 구하였다. 2.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면하셨다. 그의 긍휼은 이 백성을 위한 수단을 강구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사도들을 내보내기 전에 그는 자신이 기도에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이 나타나 있다(눅 6:12, 13).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기도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난 후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돌이켜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다. (1) 그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라." 사람들은 좋은 설교를 원하였으나 좋은 설교자는 거의 없었다. 해야 할 일이 많고 해야 할 선행이 많았지만 그것을 행할 손이 적었다. [1] "추수할 것"이 매우 "많다"는 것은 격려였다.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무리가 있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 그것을 원하는 자들이 그것을 받으려고 나갔던 일이 드물었다는 사실은 이상하다. 잘못 가르침을 받았던 자는 더 가르침을 받으려고 원하였다. 사람들의 기대는 부풀어졌으며, 잘 약속된 것 같은 감정의 움직임이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랑 안에서 좋은 설교로 양육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된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 때 골짜기(들판)은 곡식으로 덮혀져 있으며 그것을 잘 거두어들이려는 소망이 있다. 그것은 절호의 기회로서 그것을 잘 이용하기 위해서는 이중적인 배려와 근면을 요구한다. 추수날은 바쁜 날이 되어야만 한다. [2] "일꾼"이 적은 것은 가엾은 일이었다. 추수꾼이 없으므로 곡식은 떨어지고 못쓰게 되며 땅 위에서 썩게 될 것이다. 할 일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자들은 많지만 "일꾼"은 매우 "적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좋은 일군이 없기 때문에 선행이 멈춰지고 천천히 진행되는 것은 교회에 불행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될 때 이미 있는 "일꾼"은 매우 분주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이 경우에 그들의 할 일은 무엇이었는가?(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시대의 우울한 국면과 귀중한 영혼의 비참한 상태는 기도를 일으키고 재촉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더욱 기도해야만 하며 불평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교회의 현재 위급한 사태에 대해 기도해야만 하다. 이스라엘이 해야할 것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때를 잘 이해해야만 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추수하는 주인"이시다. 내 아버지는 그 농부이다"(요 15:1). 그것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이다"(사 5:7). "추수가 거두워지는 것"은 그를 위함이며 그에게 드려지는 것이며 그의 봉사와 영예를 위한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다"(고전 3:9). 그의 "타작 마당이며 그의 마당의 곡식"(사 21:10)이다. 그는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추수"에 관한 모든 일을 명령하신다. "일꾼"은 그때에, 그곳에 오래 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최고로 모든 것을 확실히 명하실 하나님이 관장하시는 "추수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2] 교역자들은 하나님의 "추수"에서 "일꾼들"이며 또한 일꾼들이 되어야 한다. 교역은 "일"이며, 따라서 소중하게 간직되어야 한다. 그것은 필요할 일인 "추수의 일"이며, 모든 일이 적절하게, 또한 철저하게 열심히 해야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들은 "기쁨으로 거둔다." 복음 설교자의 기쁨은 "추수의 기쁨"과 흡사하다(사 9:2, 3). 또한 "거두는 자는 임금을 받는다." 하나님의 들에서 거두는 "일꾼들의 품삯은" 그들의 것과 같이(약 5:4)"주지 않고 숨겨지지" 않는다. [3] "일꾼을 내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리스도를 사역자로 삼으신다(엡 4:11). 그 임무나 그의 일의 자격, 그가 주시는 소명은 그가 임명하신다. 그들은 임무나 자격이나 소명이 없이 활동하는 "일꾼"으로 간주되거나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보냄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4] 그리스도와 영혼을 사랑하는 모든 자는 특히 "추수할 것이 많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 보다 익숙하고 신실하며 근면한 "추수할 일꾼"을 더 보내어 주시도록 해야 한다. 또한 그가 죄인들의 회심과 성도들의 교회에서 인정하시려는 자를 일으키시도록, 또한 그들에게 일하려는 마음과 그것에로 부르시며 그것에 성공하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그들에게 "영혼을 구하는 지혜를 주시도록," 그가 "일꾼을 내어 보내시도록"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연약함과 사람의 사악함 때문에, 또한 "추수"에서 밖으로 내 몰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가기를 꺼려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안에서와 밖에서의 모든 모순이 정복되고 극복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추수"하기 위해 내보내기 바로 전에 이것을 기도할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어떤 자비를 베푸시려고 하는 것은 좋은 징조이다. 그때에 그는 은혜의 보좌에서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데 흥미를 가진 자들을 분발시킨다(시 10:17). 더욱이 살펴볼 것은 그리스도는 이것을 "일꾼"으로 고용되었던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사명은 대개 성공적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택한 그릇이다. 왜냐하면 "보라. 그는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행 9:11, 15). 우리는 둘째로 그가 다른 사람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일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역자 자신들도 교역자들의 증가를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자기 자신의 일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홀로 있기를 원하지만(적은 교역자일수록 더 좋아한다)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는" 자는 그것에 의해 그들 자신이 무색해지지만 더 많은 일이 행해지도록 더 많은 일군을 원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