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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력으로 부활절 제3주입니다. 올해의 부활절은 감동이 더욱 컸습니다. 코로나 팬더믹 기간에 우리는 부활절에도 함께 모이지 못하고 흩어져 예배를 드렸는데, 3년 만에 드디어 한 자리에 모여서 마음껏 부활의 주님을 찬송하고 부활을 축하하고, 세례식도 행하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활절은 단 한 번의 주일예배와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절기는 성령강림절까지 7주간 동안 계속됩니다. 이 기간에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묵상하면서, 오늘도 우리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 그 부활의 확신으로 오늘을 살아가기를 더욱 힘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우리가 믿는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부활을 믿기보다는 진화론이라는 허점 많은 이론을 더 믿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물질이나 권력을 더 신뢰합니다. 믿음과 성령 안에서 누리는 평안보다는 세상이 주는 쾌락을 더 좋아합니다. 더군다나, 물질과 쾌락중심주의로 흐르는 세상 풍조에 휩싸여,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그래서 교회가 세상에서 조롱과 핍박을 받는 세상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지난해 한 여론조사 전문업체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 5명 중 4명은 한국교회에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교회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한 응답자가 전체의 49%에 달했다고 합니다. 국민 절반이 교회를 매우 부정적인 눈으로 보고 있는데, 내가 교인이라고 굳이 먼저 밝히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같은 조사에서 목사에 대한 호감도는 100점 만점에 32.3점이었습니다. 이런 말씀드리는 것이 좀 민망하지만, 저는 어디 가서 웬만하면 목사 티를 안내려고 노력합니다. 티를 내봤자 좋을 것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가끔 저에게, “목사님이시지요?” 하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합니다.
오늘 베드로전서를 읽었는데, 이 책 첫머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를 쓴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언급된 지역들은 모두 소아시아 지역에 속한 지방들입니다. 이 다섯 지방의 교회들은 베드로가 보낸 이 편지를 차례대로 돌려가며 읽었을 것입니다.
이 편지가 쓰여진 당시에는 소아시아를 비롯하여 로마 제국 내 곳곳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고, 예수가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그 믿음 때문에, 세상에서 소외 당하고 많은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2장 16절에 보면,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악행을 한다고 모함을 하고 비방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4장 14절에 보면,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도시마다 이방 신을 섬기는데, 그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소외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로마제국 내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심지어 재판에 넘겨지고 사형에 처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참으로 믿음을 지키기가 힘든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조롱과 팝박을 견디지 못하고 신앙의 길에서 떠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는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핍박과 시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베드로의 편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문제에 앞서서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 정체성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면, 그에 따라서 내가 걸어갈 길, 내가 살아갈 삶의 방향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소개하는데, 어떤 이는 자신의 직업이나 직장에서의 직위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직업이나 직위가 곧 ‘나’는 아닙니다. 그것은 나라고 하는 자아를 감싸고 있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옷은 시간이 지나면 해어지고, 언젠가 그 옷을 벗어야할 때가 있습니다. 그 옷을 벗고 나면, 남는 것은 그 옷을 입고 살아온 삶입니다. 그래서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것이 곧 그가 누구인지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편지는 먼저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어서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1절에서 먼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하여 “나그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란 사전적으로 ‘자기 고장을 떠나 다른 곳에 임시로 머무르고 있거나 여행 중에 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stranger 혹은 alien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단순히 외국인, 다른 지역 출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 단어에는 차별성과 거리감이라는 뉘앙스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낯선 사람을 경계합니다. 내가 모르는 어떤 사람이 주위에 있으면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좀처럼 공동체에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해외에서 온 이주여성이나 근로자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가 그래서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낯선 존재, 수상한 사람, 이방인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살고 있지만, 그곳에서 적당히 동화되고 타협하고 정착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 땅을 지나가는 나그네로서 잠시 머물러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문화와 종교와 가치관 속에서, 지향하는 삶의 목적도, 살아가는 방식도 전혀 다른 나그네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그네들에게 베드로가 권면하는 것이 있습니다. 벧전 2장 11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권면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의 정욕이 그 삶의 동기가 되고 그 정욕을 채우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그네이기 때문에, 그 동기가 다르고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절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지금 세상 사람들이 너희를 터무니없이 비방하는데, 그들에게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살아가는 선한 행실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의 문화나 가치관을 거스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한 삶을 힘써 살아가는 것이 나그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그냥 ‘나그네’가 아니고 ‘흩어진 나그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흩어진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흩어진 사람들을 이르는 말은 헬라어 원어성경에서 ‘디아스포라’라는 말입니다.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틴 땅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져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의미하였습니다. 기원전 722년에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하였고, 기원전 587년에 남왕국 유다는 바빌론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백성들 중에는 이 때 전란을 피하여 살어남기 위해서 도망치듯 본토를 떠난 이들도 있었고, 또 수많은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 이방 땅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바빌론을 무너뜨린 페르시아가 포로들의 본국 귀환을 허용했지만, 수많은 백성들은 그대로 거기에 머물기도 하였고, 아니면 더 나은 삶을 위해서 폐허가 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팔레스틴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러나 유대교의 규범과 문화와 생활 관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면서 살아갔습니다.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 디아스포라입니다.
헬라어로 διασπορά는 δια(디아)와 σπορά(스포라)의 합성어입니다. δια는 전치사로 “무엇을 통하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σπορά는 “뿌리는 것”, 혹은 “뿌려진 씨앗”을 의미합니다. 씨뿌리는 비유가 떠오릅니다. 농사를 지을 때 팔레스틴에서 파종하는 방식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이때 뿌려진 씨앗이 스포라 σπορά입니다. 그러니까 디아스포라는 마치 뿌려진 씨앗들처럼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아가는 유대인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났고 유대인들은 교회를 잔멸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제외하고 모든 예루살렘 교인들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8장 4절에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사마리아로도 가고, 유대 땅 구석구석으로 갔습니다. 이방 땅 구브로로도 가고 안디옥으로도 갔습니다. 그들은 박해를 피하여 어쩔 수 없이 흩어진 사람들이지만, 흩어진 곳에서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과 구별되는 복음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가신 것입니다. 비록 본향을 떠나와 세상에서 무시도 당하고 조롱과 핍박도 받았지만, 그러나 그들은 흩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씨를 뿌리듯 파종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가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며 살고자 할 때 핍박이나 어려움을 당하기도 할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우리는 나그네이며,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본향에서 쫓겨나서 어쩔 수 없이 여기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파종된 것입니다. 여기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글 성경에서는 헬라어 원문을 번역할 때 어순 상 그 의미를 분명하게 살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 성경을 보면 ‘흩어진 나그네’, ‘파레피데모이스 디아스포라스’라는 말 앞에 ‘에클레크토이스’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에클레크토이스’는 ‘택함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택함 받은, 흩어진 나그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어순상 택함을 받은 자라는 말이 2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흩어진 존재요, 나그네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는 택함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미리 아시고 택하여 주신 흩어진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리 아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이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아시고, 우리를 택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연약함도 아시고, 부족함도 아십니다. 나의 급하고 이기적이고 다듬어지지 못한 성품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택하여 주셨습니다. 믿음의 선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말을 잘 못했습니다. 전승에는 말을 더듬었다고도 합니다. 예레미야도 ‘나는 아이라 말을 잘 못한다’고 핑계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실을 모르셔서 그들을 택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 아시고 택하셨습니다. 그 연약함 조차도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자격이나 공로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택하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여 주셨고,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셔서 우리가 순종하게 해 주십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당신의 피를 뿌리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죄사함과 구원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께서 행하신 그 은혜의 역사를 베드로는 이렇게 오늘 본문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3절 이하에서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리자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거듭남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물려받게 하셨는데, 이 유산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스스로 나그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야곱도 ‘나이가 몇이냐‘고 묻는 바로에게,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 삼십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가나안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애굽이나 블레셋이나 그 어떤 화려하고 기름진 땅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그 말씀만 붙들고 가나안 땅을 소망하며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까? 어떤 조사 보고서에 보니, ‘앞으로 5년 또는 10년 안에 이루고 싶은 꿈이나 목표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77%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예상하시겠지만 대부분 그 꿈은 재산을 얼마 모으고, 승진을 하고, 자격증을 따고,...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4명 중 1명 가까이는 5년이나 10년 내에 이루고자 하는 꿈이나 목표가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왜 이루고 싶은 꿈이나 목표가 없는지 그 이유에 대해 물었더니, ‘어차피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살기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응답이 37%였습니다. 30대가 제일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내가 잘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응답이 많았는데, 특히 20대에서 많았습니다. 꿈과 소망을 갖기가 힘이 듭니다. 세상에서 꾸는 꿈은 우리를 실망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너무 일찍 사람들은 꿈을 포기하기도 하고, 미래를 체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망은 산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는 바라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확신입니다. 주 안에서, 믿음 안에서, 마음껏 미래를 꿈꾸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시 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라”고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우리에게 산 소망입니다. 이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고난과 박해를 당하더라도 오히려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기뻐하는 것이야말로 산 소망의 증거이고,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우리가 누구인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흩어진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택하심을 받은 자 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 은헤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흩어진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 자리는 하나님이 파종해 주신 자리입니다.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처럼, 입술과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고 열매를 맺어야할 자리입니다. 그리고 우니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욕심내며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언젠가 돌아갈 고향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좇아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택함받은 흩어진 나그네의 삶인 것입니다.